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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 세종.문종실록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역자 후기에서 세종실록의 내용과 분량이 엄청 방대해서 정리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했다고 말했는데 많은 내용을 너무 압축적으로 축약해서 그런지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세종에 대한 이야기보다 '조선 전기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던 세종시대의 인물에 대한 소개가 잘 돼 있었다. 이천, 정인지, 장영실, 정초, 최윤덕 등.
장영실은 관노 출신 임에도 종3품 자리에까지 올랐고, 이천은 무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자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인지는 정초 이후 과학기술 분야의 이론적 지휘자였는데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고려사>, <세종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세종 말년 중국 학자 예겸이 사신으로 와 정인지와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대와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10년 동안 글 공부하는 것보다 낫다'라 할 정도로 학문의 깊이가 깊었었나보다.
충녕은 세자가 된지 두달만에 보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이 서른살 될 때까지 군사나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참여하여 돕겠다고 말했다. 병조참판으로 있던 강상인이라는 자는 군사 관련 일을 세종에서 직접 보고했다가 관노비가 되는 벌을 받았고 병조판서는 유배되기도 했다. 태종은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을 색출해 집요하게 제거해나갔다. 왕의 장인 심온을 명에 사은사로 보냈다가 한달이나 지난 강상인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 자백을 강요하여 그의 입에서 심온이 동조하였다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결국 사은사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심온을 의주에서 기다렸다가 잡아들이고 그의 처와 자식을 관노로 만들었다. 그런데 세종은 태종이 죽고 난 뒤에도 처가 세력 제거에 앞장선 신하들을 벌주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그릇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세종때의 대마도 정벌도 태종이 직접 추진한 것이라고 한다. 이종무가 이때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려 유배되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한편 처가세력이 모두 몰락한 뒤 숨죽여 지내던 원경왕후 민씨가 눈을 감았는데 이때 세종은 최복을 12일 동안만 입으라는 태종의 명령을 거역했고 무덤 옆에 절도 세웠다. 세종이 태종의 뜻을 거역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세종은 학문을 위한 학문, 연구를 위한 연구, 발명을 위한 발명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현실의 필요만이 그를 자극했다."라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세종시대의 업적들은 세종이 신분에 구애됨 없이 인재를 등용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능력을 발휘할 환경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오늘날의 시각에서 봤을 때에도 굉장히 선진적이라 느껴질 정도의 복지정책도 실시하였다. 당시 관비들은 출산시 산후 7일간의 휴가를 받았는데 세종은 출산이 예정된 달과 출산 후 100일을 더 쉴 수 있게 해주었다. 나중에는 남편도 산후 한달간 쉬게 했다.
문종은 세자로 30년을 있었는데 스무살이 넘어서부터는 세종 곁에서 실무를 배우고 세종을 도왔다. 마지막 8년은 병든 세종을 대신해 정무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고 한다. 문종은 부인이 셋 있었는데 첫번째 부인 휘빈 김씨는 용모가 단정치 못해 문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결국 폐출되었다. 두번째 부인 봉씨는 처녀집을 돌아다니며 용모로서 1차 심사를 한 결과 간택되었는데 성격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궁녀와 스캔들을 일으켜 역시 폐출되었다. 결국 권씨, 홍씨, 정씨를 후실로 들이게 됐는데, 문종은 28세 되던 해에 세번째 부인 권씨에게서 첫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권씨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었다. 이 아이가 후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부인, 처가도 없이 열두살 나이에 보위에 오르게 되는 단종이다.
세종의 능은 원래 태종의 능(헌릉) 곁에 있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후손이 끊어지고 장자를 잃는 곳이라 하여 예종때 지금의 영릉(여주)으로 이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