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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10월
평점 :
조선 전기 공물 부과기준은 단순히 '호'에 따른 것인줄 알았는데, 요역 동원했던 방식처럼 토지 8결 단위로 그 안에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앙에서 공물을 부과할때 각 고을 토지의 상대적 규모가 고려되지 않아 작은 고을 부담이 가중되고 윤회 횟수도 늘어나는 폐해가 생겼다. 또 수취 과정에서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부과량을 늘리거나 순서를 조정하는 일이 생겨 이런 문제점을 막는 자구책으로서 '사대동'이 시행되었다. 사대동은 1년치 공물가를 예측해서 가능하면 고을 안의 전결 전체에 고르게 나누는 것이다.
선조대에 이미 현물로 공납을 바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물론 이때까지 이러한 경우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고 수령의 자율적 권한에 의해 퍼져나간 것이었다.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에 이미 현물납부가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은 좀 의외였다. 하지만 공물작미가 제도화되기 전까지는 방납의 폐단이 발생할 여지가 매우 컸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공물작미를 허용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선조 때에 납부 방식을 쌀로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결당 균일한 공물가를 정했고 이것이 나중에 대동법으로 흡수되었다.
대동법을 이론적으로 설계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조익이었다. 대동법 시행에 대해 제기된 여러 반론을 조목조목 반박했다.(책 74~75에 걸쳐) 한편 김장생은 대동법의 취지와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즉각적인 실시는 반대했다. 양전의 시행과 장리의 부패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의 마련 등 방법적 차원에서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결국 인조대 경상도를 제외한 강원, 충청, 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흉년으로 인한 미곡 생산량의 감소와 운반비의 부담, 운반 과정에서의 위험, 중복 수취 등의 문제로 시행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삼도대동법을 경대동으로 바꿔 시행하게 되는데, 경대동이란 서울 관아에 내는 공물만 미, 포로 거두고 지방 관아의 수요는 이전 방식대로 수취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경대동 실시 후에도 방납의 폐단, 공물 부과의 불균형이 시정되지 않았고 대동법 실시 반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재정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대책으로 양전론과 호패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병자호란 직후 대동법에 대한 논의가 산발적으로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현물 대신 미, 포를 납부하게 했던 관행을 '대동법'이라는 국가 법규정으로 제도화하는 것은 법적 강제력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됐다는 변화를 수반하는 동시에, 지방 재정 수요에 따라 추가징수가 발생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각 관의 수요를 국가재정의 틀 안에 통합시켰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 무명 1필에 쌀 5두로 미, 포의 교환비율을 고정하되 해마다 풍흉을 반영해 변동시켰는데, 이는 대동법이 얼마나 세심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규정에 없는데도 민에게서 수취하던 것들을 대동법 안으로 흡수하여 대동미를 지급했다. 또 비록 정부가 거두는 물품 자체는 아니지만, 그 물품을 운반하는 데 수반되는 노동력 동원을 포함한 다양한 신역들도 모두 대동미로 지급했다. 대동사목은 정부가 공물주인에게 시가보다 낮게 지급했던 물품의 가격을 시가에 따라 지급하도록 규정했다."(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