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쿠호오 이야기 - 규슈 지쿠호오 탄광을 중심으로 한 격동의 민중사, 평화교육시리즈 03
오오노 세츠코 지음, 김병진 옮김 / 커뮤니티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책은 꽤나 묵직했고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

이 책은 이 책 자체가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이다.

나는 이 책 내용의 무게만큼,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의 무게만큼 이 책이 아쉽다.

 

일본의 탄광과 그 탄광 속에서 노동력을 착취 당한 일본인들. 그리고 조선인들.

우리는 일본인이 한국인을 상대로 자행했던 악행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악행들은 조선인만을 상대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은 같은 일본인들에게도 그들의 필요에 의해 충분히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

박정희 시대, 경제를 위해 국민들을 착취하고 탄압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일본도 경제 성장을 해야 했고, 일본 국민들도 배가 고팠고, 그 속에서도 일본은

조선을, 중국을, 러시아를 그리고 세계를 침략하고자 했다. 그리고 조선의 여성 뿐만 아니라

자국의 여성에게도 요구하는 바가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딸자식을 팔았다.

그리고 그렇게 팔려간 딸자식들은 결국 일본에 이용만 당하고 먼 타국에서 버려졌다.

 

하지만 이 책이 정말 일본인이 일본인을 착취한 이야기일까?

정말 일본인이 전쟁 속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일까?

 

한국에는 형평사가 있다. 일본에는 수평사가 있다.

형평운동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들의 인권운동이다.

수평사도 비슷하다. 우리 백성들 중에도 백정과 같이 특별히 천대 받는 사람들이 있었듯이

일본에도 부락민이라고 하여 특별히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격리되어 한 마을에 모여 살았고, 그 마을에서 불타는 검은 돌을

발견하여 그 돌을 캐다 팔게 되었고, 곧이어 그 마을은 큰 탄광촌이 되었던 것이다.

그 곳이 바로 지쿠호오이다. 물론 후에는 부락민, 조선인들 뿐만 아니라 돌아온 군인들,

오갈 곳 없는 실직자들이 때로는 정부의 경제 부흥 정책에 의해 때로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탄광으로 모여 들었다. 이 탄광이라는 곳은 그러니까 천대받는 사람들, 차별받는

사람들이 모여 일하던 곳이었고 또 그 노동현장은 참혹, 비참, 3D 등의 수식을 붙일 수 있었다.

 

여기서 잠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구절이 떠올랐다.

 

'울고 있는 친구에게 울어본 적 있는 친구가..'

 

그러니까 그 탄광에 있는 사람들이 누가 먼저 울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진 않고,

일단은 울어본 적이 있거나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부락민들은

조선인들에게 정을 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당시 정황을 알리는 책을 만들고 시민모임을

조직하고 시민운동을 펼치는 등 그 당시 강제 동원 당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해 같이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그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서 나온 책이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아쉬운 책이고.

 

우선, 일단 책이 판본이 크고 무겁다. 안에 삽화들도 이쁘지 않다.

추천서와 서문만 일본어와 함께 실려 있나 했더니 이 책 전체가 위에는 한국어,

아래는 일본어 이렇게 두 가지 언어로 씌여 있다. 이 책이 한국에서 먼저 나온 걸로 아는데

한국에서 출판하면서 왜 일본어를 같이 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뭐,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아이들, 청소년들도 염두에 둔 책인 듯 한데 말이 너무 어렵다.

기술 방식도 이야기 방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그랬던 거야, 그랬어, 이런 식으로 서술어만

부드럽지 그 안에 설명하는 말들은 용어가 어렵다.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한다거나 비유를

해 가면서 기술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삽화. 그림이 너무 눈에 안 들어와서

거의 힐긋힐긋 보기만 했는데 이는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이 탄광 이야기를 보고

그림을 그린다면 이렇게 그리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림

동화를 보여준다던데 그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그림이라 생각하니 내 눈엔 익지 않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이 그림이 더 와 닿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보고서 같은 기술 방식

말고 쉬운 말로 비유도 들어가면서 기술했더라면 더 좋을뻔 했다.

 

쏟아부은 마음과 정성에 비해서 책이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척이나 아쉬울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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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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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이 아니었어.

나는 주인공을 보고 있지 않았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닌, 나를, 내 주위의 누군가를,

그도 아니면 작가를 훔쳐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마도 이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꼭 내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기 때문일거야. 일부는 나의 이야기였고, 일부는 내가 아는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 그도 아니면 이건 작가의 이야기구나.

그래서 이 책은 도통 소설 같지가 않았던거야.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느낌.

 

이 책의 초점은 철저하게 여성에게 맞추어져 있어. 남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건 그 남성이 직접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이 아, 저 남자는 이래서 저런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이야기를 해. 남성의 이야기이든 여성의 이야기이든

기본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편견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남성을 너무 남성답게 다루고 있지 않아.

여성의 분노를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주는 여성들의 기대치가 반영된 그런 인물로 나오거나

아니면 여성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는 그런 남성들로 나오거나.

 

세진과 인혜와의 관계를 내심 궁금해했어. 저들은 왜 저랬을까? 작가는 이 둘의 관계를

두고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까? 결국엔 동전의 양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구나.

원인은 같은데 나타나는 방향이 다른 거. 세진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다스리는 방식,

인혜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다스리는 방식이 달랐던 것 뿐이구나. 알고 보면 같은 건데

그 둘은 서로를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그 같은 생각으로 인해 서로에게 같은 상처를

입히고 같은 상처를 받고..그래, 40이 되기전에라도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제발 20대에 끝내보도록 하자라는 생각을 했지만.

 

1권까지 읽었을 땐 이런 상담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미 나는 나의 도덕률을 깨뜨렸고 경쟁을 지레 피하던 내 모습도 자각했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의식으로 인해 가슴 속에 상처를 쌓아두고 있을 거야.

어쩌면 이따금 내가 아무런 일도 없는데 습관처럼 혼자 몰래 내뱉는 욕지거리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의 파괴의 욕구 또한 말이지.

그래서 나는 나도 저런 상담치료라도 받으면서 더 큰 사고를 치지 않기를, 내 자식을

정신병자로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정신분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유아기에 대한 부재가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런 생각들을

거둬 버렸지. 나는 기억이 나지도 않을 뿐더러 나에게 이야기를 해 준 사람도 없었으니

무슨 수로 나의 유아기를 추적하지? 무슨 수로 나의 결핍들을 찾아내지? 이런 고민들이 생겼네.

 

책을 읽다가 갑자기 울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건 내 무의식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이러니 내가 이 책을 소설로 읽을 수 없다는 거야.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동화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거든. 이 책을 참고서 삼아 자신을 보게 된다고 해야 맞을거야. 이게 무슨 소설이니.

그냥 정신분석 사례집이지. 좀 더 세련되고 재밌는 사례집?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이 제목을 두고 이 책을 읽고 나는 지난 내 남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는가를 떠올려봤지만 글쎄, 공통점이 잡히질 않는 걸.

이건 내겐 아직까지 남자를 고를 때 만큼은 나의 무의식이 작용하지 않은 거라고 봐야하니.

아니면 어릴 때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나를 좋다는 사람이라면, 그닥 싫지만

않으면 나는 그걸 게걸스럽게 받아 먹었다고 해야 하니.

물건에 집착하지도 사람에 집착하지도 않으려는 건 이미 내가 내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테고 그건 또 어린 시절의 경험에 근거하는 거겠지.

여러모로 이 책은 나에겐 소설로만 읽을 수는 없었던 책이 되었네.

 

그나저나 김형경은 언제까지 이런 책들을 써 낼거지?

성에도, 사람풍경도, 정신분학석을 작품에 깔고 있는데, 그냥 이것자체가 김형경 스타일이

되어버린 거야? 정신분석을 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그 일은 혼자서 해 나간다고 하던데

아, 이건 이 작가 이야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속에서 정신분석을

해 나가고 있는 그녀. 그녀는 이미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지?

아예 대 놓고 독자들에게 정신분석을 권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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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1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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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송은일 작가의 새 책이 나왔다.

소울메이트와 도둑의누이에서도 이야기를 참 잘 만드는 작가라 느꼈지만

이번 반야는 아예 대 놓고 이야기이다. 앞의 두 작품이 현 시대를 배경으로 했기에

그 현 시대에서 너무 허황된 이야기, 너무 현실감 없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는 평이

언짢았나보다. 그에 대항이라도 하듯 이젠 아예 배경을 조선시대로 옮겨서 그야말로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한 반야라는 무녀와 사신계라는 만민평등한 조직을 내세워 이야기를

얽어가고 있다.

 

반야라는 무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이는 게 너무 많아 삶이 고달픈 아이였다.

주렁주렁 매달린 식구들이 반야를 웃전으로 받들며 산다고는 하지만 이는 곧 그 많은 식솔들을

반야가 먹여 살려야 함을 말하며 곧 반야에게 그들의 목숨이 달려 있음을 말한다.

 

전생에 반야는 어느 왕의 후궁이었다. 이 소설 속의 배경은 짐작은 가능하나 확인은 불가능한

특징이 있는지라 짐작해 보건대, 반야는 전생에 장희빈이었음을 나타내지 않을까.

그 반야와의 악연을 이 생에 이어 만난 이 김선비. 이는 아마도 숙종이었을게다.

오로지 한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어 발악을 했던 여인 반야, 그 반야에게 독약을 먹인

남자 김선비. 이는 곧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를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여하튼, 이들의 악연은 현생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또 한명의 악연, 김학주.

그자는 신내림을 받아야 함에도 그 신기를 누르며 그 신기를 적당히 자기 앞길에 이용할 줄

아는 자로 나온다. 한마디로 기가 엄청 드세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기에 잡아먹히기는 커녕

그 신기를 자신의 앞길에 이용해 먹다니. 이런 작자가 반야의 악연으로 나오니 반야의

인생이 더 고달프다 하겠다. 그리고 이 속에서 반야가 이용해 먹은 사내가 있었으니 그는 임인.

이 세 악연과 반야의 교만이 만나 반야는 자신에게 목숨줄을 대고 있던 식솔들을 잃는다.

 

반야의 친모인 유을해. 애초에 반가의 여식이었으나 일찍이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키워지다

자신의 아비보다도 늙은 사내의 후실로 들어가라는 말에 자신을 죽음 셈 치고 무녀의 딸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타고난 무녀가 아닌 배워서 익힌 무녀이다. 그런 그녀가 반야를 낳았고

그 외 죽어가는 아이들을 거둬 자신의 아이삼아 길러 낸다. 그 아이들 중엔 반야와 평생을

여여하리라 생각했던 동마로가 있었다. 그들은 나들이를 갈 때도 언제나 함께였고, 반야의

일거수 일투족이 동마로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무녀였던 반야와 겉으로나마 남매인 동마로는 부부의 연을 맺을 수는 없지만 언제까지나

그러하리라 믿었던 사이였다.

 

이 두 사람 모두 결국엔 반야를 위해 죽었다. 스스로 제 목을 찔러 죽는다.

앞서 말했던 반야의 악연과 그 악연을 다스림에 있어서 반야의 교만이 반야에겐 둘도 없는

귀한 인연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리고 반야는 눈이 멀어 버렸던가.

 

이 책을 참 재미나게 읽고 있다가 동마로가 죽는 부분에서는 이 뭔가 싶었다.

그 어미가 죽을 때까지만 해도 일이 그리 풀여갈 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갑작스레 동마로마저

제 목을 찔러 죽였다고 하니 어찌나 허전하던지. 반야와 동마로 둘이서 이 소설을 끝까지

이끌어 갈 줄 알았더니 그 둘 중 하나는 죽고 하나만 살아남아 이 남은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데 내 마음이 다 헛헛해 지는 것이, 이건 뭔가 잘못된거야, 작가가 이야기를 왜 이따위로

만들었지, 이건 아니잖아,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해졌어 라고 마구 작가 욕을 해 주다가,

그만큼 반야의 가슴에 멍이 들었겠구나 싶고, 그만큼 이 아이 반야가 가슴이 찢어지겠구나,

헛헛하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다 읽어내야 하듯이 이 아이도 자신의 남은

생을 살아 내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어찌나 마음이 안 좋던지. 작가가 너무했다 싶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했다. 동마로 없인 안 될것 같던 이야기도 남은 악연들과

동마로를 대신한 사내의 이야기로 어찌어찌 이어는 지더라. 그리고 이야기는 그다지 극적이지도

않고 그다지 마무리짓는 것 같지도 않게 끝나버린다. 뭔가가 허전해. 한 편의 이야기를 끝까지

본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한참 보고 있다가 마지막회를 남겨두고 그 이상은 볼 수 없게 된 것

같다고나 할까.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로 끝내야겠지. 그게 작가가 바란 것일 것 같다.

작은 이야기를 거창하게 끌어다 이게 우리네 삶이다, 지금 시대가 이렇다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아, 그런 이야기가 있군요. 그 이야기를 읽으니 마음이 참 어떻군요, 하고 가벼이

여기고 지나가야지. 왠지 그러지 않으면 난 이 이야기 속에 갇혀 버릴 것 같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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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약속
소르주 샬랑동 지음, 김민정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은근한 감동이 참 따스하게 와 닿았던 책이다.

이건 꼭 감동스러워해야 해! 이런 게 바로 감동인거야!라고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아프다기 보다는 따뜻해 지는 감동.

 

소르주 살랑동의 첫 작품이었던 말더듬이 자크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워진 덕분인지

책은 쉽게 잘 읽혔다. 하지만, 그냥 술술 읽히기만 하진 않고 적절히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가게 끔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각각의 인물의 특징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고,

노부부에 대한 궁금증도 품게 되었으며, 그들의 어린 시절 일화들 속에서 지금 현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해 볼 수도 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재미있었다.

 

자,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어느 한 인물이 어느 저택을 찾는다. 그래서 문을 두드리고

벨을 울리고서는 그냥 가 버린다. 물론 이 집엔 노부부가 살고 있다. 이 노부부는 음, 누가

왔군, 이제 벨을 울리겠지? 이렇게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음 행동은 무엇인지 추측은

하면서도 문은 열어주지 않는다. 이 노부부는 참 다정해 보이는데 여자는 낱말을 맟추고

남자는 우표를 들여다 본다. 그리고 조곤조곤 나누는 이야기들.

 

그런데 왜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거지? 분명 존재하는 인물인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처음엔

집안에 숨어 지내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다가 나중에 돌아가는 정황을 보고서는 시체를

유기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이야기는 아니었고 망각이란

무엇인가라는, 망각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 죽음을 말하는 것이라는 그런 의미심장한 구절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그럼 이젠 대충 감이 잡히겠지? 그들이 그 저택을 방문하고 손님이 온 것처럼 벨을 누르고,

창문을 열고 식탁을 차리고 하는 것들이 결국엔 그 노부부를 잊지 않기 위함이었음을.

그리고 그들은 그 노부부에 대한 사랑과 갑판장에 대한 우정으로 그 수상쩍은 행동을

왜 그래야 하는지 단 한번도 물어보지 않은 채, 단 한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히 수행해

냈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에 각자가 이 노부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을 보면 역시 이 작가는 말더듬이 자크를 쓴 그 작가가 맞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형식이 어떻게 되었든, 어떤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가든, 이 작가는 참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마음을 전달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작가가 맞다는 사실이 또 기뻤다.

어떤 작품을 써 내든 작가의 이런 마음은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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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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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단 한줄 평.

역시, 이 남자와는 절대 연애하지 않을테야-

알랭 드 보통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난 이 남자와 연애하지는 말아야지.

이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꼼짝달싹 못하고 내가 내가 아닌 게 되어 철저히 분해당해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의 시각에 의해서. 거기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인지

알랭 드 보통이 신간이 나왔다고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인연은 인연인지 이렇게 읽게 되었고, 그렇다면 이번에 나온 행복의 건축은

대체 어떤 책이란 말인가.

 

일단 정체성 불명. 이 책이 어찌하여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의 책으로 선정되었을까.

건축 에세이라는데 그러면 문학일텐데, 아니면 차라리 실용취미가 더 적절할 것 같은데

이 책은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의 책으로 주어졌고 그러다 보니 나는 참 난감했다.

 

너 이녀석, 네 정체가 무엇이냐! 이렇게 잔뜩 의심을 하고 봐서 그런지 나는 의미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자를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해하고자

미간에 힘을 주어가며 읽었지만 역시나 무슨 말인지. 그렇게 자꾸 읽다보니 일단 조화라는

키워드가 떠오른다. 이 조화란 건물 전체적인 조화일 수도 있고, 시대와 공간에 대한 조화일

수도 있고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조화일 수도 있고 사람의 기질과 취향과의 조화일 수도 있다.

여하튼 중요한 건 조화로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있는데 글쎄, 행복이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자신의 기질과 취향에 맞는, 자신의

행복을 완성시켜 줄 만한 집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3% 정도?

좀 더 많으려나? 여하튼 보편화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 그래서인지 이 책은 약간은 씁쓸하기도

했다. 

 

이 책 읽으면서 건축학도들이 읽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물론 일반인들도 읽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직접 건축물을 설계하고 디자인하고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들이 건축물을 대할 때,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 때

그 건축물과 사람과의 관계, 그 건축물이 주는 의미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건축물을 만든다면 아름답고도 행복한 건축물이 탄생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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