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을유세계사상고전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복룡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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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읽는데에 앞서 '해제'라고 되어있는 부분을 먼저 읽었다. 해제에는 우리 시대에 왜 군주론을 읽어야 하는지,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왜 군주론을 썼을까, 마키아벨리의 인간성, 시대와 인간 그리고 운명,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탈리아, 마키아벨리의 생애가 실려 있다.
이를 먼저 읽음으로써 어쩌면 선입견이 먼저 생긴 채 군주론을 대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마키아벨리라는 인물과 그 시대 정황을 조금이라도 알아 본 후에 군주론을 읽었기에 마키아벨리가 왜 이런 주제로 이런 글을 썼는지 조금 더 잘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흔히 마키아벨리적이라고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것이 떠오른다. 그것도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뉘앙스인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신의 나라, 백성, 그리고 군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를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배경에는 백성들을 억압해서 자신의 배만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분열되어 있는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외부 국가로부터 침략받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즉,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자신들의 백성의 마음을 잘 읽을 것과 상황별로 적절한 통치 방법을 주문하고 있다. 간혹 정복지의 백성의 경우 억압을 행할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마키아벨리의 초점은 조국인 것이다.

 

 현 시점에서 보자면 외교적인 면에서 군주에게 권모술수는 물론이거니와 뒷통수를 칠 수도 있을 것을 주문한다는 것은 거부감이 일 수도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조인한 조약에 대한 성실한 수행을 요구하는 현 시대에 이는 어쩌면 핵문제에 대해 북한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것을 군주에게 권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기구와 국제적인 논의가 널리 퍼지기 전, 게다가 정복전쟁이 활발하던 시기에 씌여진 글이라고 한다면 조국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서 현실적인 정치를 주문한 마키아벨리를 현 시대에 와서 현 시점으로 무조건적으로 비판한다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다.

 

 가치관적인 문제를 떠나서 이 책을 보자면 이 책은 상당히 잘 씌여진 책인 것 같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이 자료를 많이 모을 수도 없었을 것인데 여러 인접국가들의 사례를 분석 비교하고 거기에 마키아벨리 자신의 통찰을 더하여 인간의 본성과 권력에 대한 통찰을 펼쳐 놓았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은 현 시대에도 유효한 것들도 있으니 마냥 무시할 수 만은 없는 글이 군주론인 것 같다. 나만 하더라도 나의 가치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글을 읽으면서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런 처신을 할 필요도 있겠군, 아, 글, 인간의 본성이란 어쩜 이 말에 더 가까운 건지도 몰라 라는 등 혼자서 감탄하면서 읽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구절에 줄을 쳐 두었는데 지금 책을 펼쳐보니 이런 구절에 줄이 쳐져 있다.

 

'위대한 사람들에게도 새로이 은전을 베풀면 지난날에 피해 입은 것을 잊게 된다고 믿는 것은 기만입니다.'

 

 즉, 나에게 한번 빈정 상한 적이 있거나 크게 마음 상한 일이 있는 사람, 아니 이보다는 껄끄럽게 서로 싸워가며 부딪혔던 사람에게 내가 은전을 베푼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일을 완전히 잊게 된다고 믿는 것은 나의 기만이라는 것이지. 평소 나의 인간관계는 이런 사항들을 무시하곤 하지만 내가 한 국가, 한 기관의 일원으로서 일처리를 할 경우엔 나는 아마도 이 구절을 착실히 따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우리 국가에 한번 침략을 당했다거나 우리 기관과 라이벌 관계라던가 한다면 결코 말랑말랑하게 지난날에 입은 피해를 잊어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 같고 또 그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판 또한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하루는 적이 되었다 하루는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하기에 은전을 베푼다 할지라도 자신이 지난날에 입은 피해를 잊진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보복정치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겠는가.

 

 그리고 군주에게 백성을 대하는 스킬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악행은 한번에 몰아서 행해야 합니다. 은전은 한 번에 조금씩 베풀어야 합니다.'

 

 악행을 한번에 몰아서 자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줄 수도 있지만 매일매일 악행을 저지르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백성들에게 사랑받으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게도 해야 한다거나 사랑받는다는 것과 두려움을 준다는 것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차라리 두려움을 주는 군주가 되라는 것이라던지, 잔인하지 못한 군주는 자신의 전공을 이룰 수 없다라던지 하는 말과 통한다고 하겠다. 즉, 악행을 한번 몰아서 행함으로써 군주로서의 잔인함을 보여주고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줌과 동시에 그것을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백성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새롭고 끊임없는 악행으로 인해 그들의 군주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은전은 조금씩 여러번 나누어 베품으로써 백성들에게 그 달콤함을 충분히 맛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단해 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들 속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군주와 백성과의 관계, 군주로서 보여야 하는 것과 백성들의 심리, 그리고 인간 본성을 고려한 결과 저러한 구절이 나온 것이다. 딱히 저 구절 뿐만이 아니라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이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현 시대에도 일부분은 군주론이 통할 수 있는 것일테고.

 

 이 책 읽으면서 조직생활 하다가 한번씩 펼쳐 볼 일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도 나의 가치관을 좀 고집하자면 굳이 내가 이 책을 꺼내 들어 조언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나는 군주론을 읽으면서 군주론이 전하는 메세지 보다는 군주론을 쓴, 그리고 군주론 속에서 보이는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의 통찰력이 좋았던 것 같다. 여러가지 역사적 자료와 인간 본성, 심리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런 글을 써 낸 마키아벨리라는 작가에게 더 끌렸다고 할까.

여하튼 이 책을 읽고 나니 대학생으로서 군주론 정도는 읽어야한다던 교수님들의 환청이 이제 더이상은 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 좋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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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분
쑤퉁 지음, 전수정 옮김 / 아고라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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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쑤퉁의 새 소설이 나왔다.
국내에 출간된 쑤퉁의 책은 눈물을 빼고는 다 봤지 싶다.

이번 책은 여성의 이야기가 곁들여진 책이 아닌, 대 놓고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쑤퉁의 여성관에 의문을 품은 나로서는 그래, 이번엔 또 어떻게 써 놓았는지 한번 보자! 하는 심산으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나는, 실망했다.

 

 아니, 어쩌면 역시나 쑤퉁, 이라는 생각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쌀'이라는 작품에서 당찬 악녀였던 쯔윈을 첩으로라도 라는 생각을 하는 여성으로, 첩으로 들어가서도 첩대접이 아닌 하녀대접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아들이 장성하면 자신의 처우가 달라질 것이라는, 즉,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던 당찬 여성에서 자신의 운명을 남자에게 맡긴 채, 그 남자가 자신의 위치를 끌여올려 주기만을 기다리는 여자로 만들어버렸던 바로 그 쑤퉁이었다.

 

 '홍분'이라는 책 속에는 '부녀생활', '홍분', '또 다른 부녀생활' 이렇게 세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첫 작품인 부녀생활 속에 나오는 씨엔이라는 여성은 뱃 속의 아이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 생각하는 여인네로 나오는데 이 여인네의 푸념이란 내가 이 아이를 지우고 그 남자를 따라가는 거였는데, 라는 것이었다. 그 남자 뜻대로 하지 않아서, 그 남자 마음에 들게 하지 않아서 나는 그 남자에게 버림 받게 되었고 그래서 인생이 이모양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 씨엔이라는 여성의 상황이, 아닌 씨엔뿐만이 아니라 쑤퉁의 작품 속에 나오는 여성들의 삶이 기구한 것은 이해가 되고 그럴 법도 하고 또 그렇게 그려진다고 해서 거부감도 일지 않지만 어떻게 하나 같이 그 기구한 삶에 반응하는 게 똑같단 말이더냔 말이다. 물론, 무슨 당찬 신여성같이 그려달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쑤퉁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인네들이 하나 같이 결국엔 남자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겨 버린다던지, 던져버린다던지, 하다 못해 버려버린다던지 하냔 말이다. 그리고 그 남자들이란 그 여자들 위에 군림하면서도 묘하게도 그 여자들을 두려워하게 그려놨단 말이지. 여하튼 이런 생각이 들어서 너무 짜증이 났고, 역시 쑤퉁이야, 하는 실망인지 뭔지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읽어내려가면서 그리고 쑤퉁이 했던 말을 생각해 보니..이게 바로 중국의 현실이라면, 이게 중국 속에 통용되는 시각이라면 어쩔거냐는 생각이 들었다. 쑤퉁은 중국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이야기들이 하나 같이 이렇다면 이게 중국의 현실인 것 아닌가.

우리나라 조선시대처럼 여자는 **해야 한다 라던지, 지금 우리가 보기엔 아니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답답할지언정 그 시대에는 그게 상식이었던 부분이라면 이제와서 우리의 시각대로만 그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쑤퉁의 소설 속에 나오는 여자들이 결국엔 하나 같이 자신의 인생을 남자에게 맡겨버리던지, 버려버리던지 했더라도 그게 쑤퉁이 말하고자 하는 보통의 중국 여인들의 삶이라면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쑤통도 나와 같이 한번 쯤은 답답해 봤을런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바로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녀생활을 보며 이런 생각들을 정리했던 나는 이 책의 타이틀이기도 한 '홍분'을 읽기 시작했다.

홍분의 첫 장면은 기녀들이 노동수용소 같은 곳에 실려 가는 장면이었다. 정신개조라는 명목하에 기녀들에게 노동을 시켰고 그 속에서 생활을 잘 하면 밖으로 나가 공장 같은 곳에 취직해서 한 사람 몫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분칠을 하던 여인네들은 갑작스레 힘든 노동을 해야 했고 그런 처우를 거부했던 치우이는 노동훈련부대로 가던 도중 트럭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찾아 간 곳은 라오푸라는 남자였다. 하지만 라오푸도 끝내 치우이를 지켜주지 못했고 치우이는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후에 라오푸는 치우이와 둘도 없는 사이였던 샤오어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샤오어라는 여자는 힘든 노동이 죽는 것 보다 더 싫었다. 실제로 그 노동이 힘들어 죽으려 했지만 죽지 못했고, 붙잡혀 가서도 그 어떤 처벌 보다도 혹여나 노동량을 늘리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이번엔 어떤 방법으로 죽어야할까를 고민할 만큼 힘들게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였을까.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따르던 치우이의 남자였던 라오푸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를 낳게 되고 그 생활 속에서도 힘들게 살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녀 탓에 라오푸는 공금횡령을 하고, 후에 발각되어 죽게 된다. 그렇다면 그 후 샤오어는 어떻게 살았는가. 한동안은 다시 일을 하며 착실히 사는가 싶었더니 또 어떤 남정네를 따라가 버렸다. 홍분이라는 책 속에 나온 남녀관계를 보다 보면 일전에 읽었던 '욕망의 진화'라는 책이 떠오르는데 욕망의 진화라는 책은 진화생물학이었던가, 하는 것으로 남녀 관계를 설명하는 책이었다. 즉, 남자는 자원을 가지고 있고 여자는 젊음과 건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젊음과 건강 속에 미모가 포함될 수도 있겠다. 여하튼, 그리하여 남자들은 젊음과 건강을 가려내기 위하여 피부가 좋고 생기 있으며 머릿결도 윤기가 흐르고 허리와 엉덩이 비율이 적절한 여성을 고르게 되고 여성 또한 남성의 자원력을 보기 위해 남들보다 사냥감을 더 많이 가져올 수 있는 체격을 본다던지, 명석한 두뇌를 본다던지, 아니면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원을 본다던지 하는 등으로 남자를 고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 홍분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는 이 욕망의 진화 속에 그려진 남녀 관계가 생각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이 '또 다른 부녀생활' 이었는데 이 작품이 가장 흥미로웠던 것 같다.

간장가게에는 세 명의 여자가 있는데 이들은 2:1로 편을 먹어 싸우기도 하는데 그 편이란 늘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명의 여자는 서로 의심하고 욕하고 치고박고 하기도 하는데 결국엔 피를 보고야 만다. 또 다른 이야기로 이 간장가게 윗층에 사는 노처녀 자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40이 넘도록 남자 손 한번 잡지 못한 여인네들답게 모든 생활을 아주 조신하게 하고 있다. 거의 사람 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윗층은 음산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기도 했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보이는 아랫층과 윗층. 하지만 이 아랫층과 윗층이 조금씩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아랫층이 윗층이 될 순 없었지만 윗층도 아랫층과는 별반 다를게 없다는 것은 보여주었다.

 

 세 작품 모두 끝이 좋지는 않았는데 그것이 작가의 악의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여인네들이 불쌍하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이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당연한 귀결인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여성의 본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여자들이 꼭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대와 상황 속에서는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었을 법도 하다. 물론 게중에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만족할만한 삶을 산 여성들도 있겠지만 그런 여성들이 특이한 경우일 것이고 대개는 이 범위 속에서 조금 더 상황이 좋았다거나, 나빴다거나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뭐, 따지고 보면 21세기를, 그리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네 삶이라고 이와 다르겠는가. 길가는 40-50대 여성 아무나 붙잡고서 그 여성에게 지금까지의 삶을 이야기 해 보라고 하면 이 소설 속에 나왔던 여자주인공들의 비극 한 토막 쯤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여자들은 또 다른 사랑을 꿈꾸기도 하고 자포자기 하듯이 한 남자에게 기대기도 하고 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쑤퉁의 여성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쑤퉁의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모습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은 그것이 없는 이야기, 쑤퉁만 그렇게 그려대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기 때문에, 아니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고 그렇게 살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에 더 반발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여하튼, 이번 '홍분'이라는 책은 나에게 여성으로서의 삶과 그 속의 역학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했던 책이었다. 참, 책이 생각보다 빨리 읽혔는데 싫다 싫다 하면서도 이야기가 재밌고 궁금하니까 줄줄 읽어 내려져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 아는 언니가 소설 책 한 권을 권해 달라고 했는데 술술 재밌게 잘 읽히는 것을 보니 이 책을 권해주면 크게 기대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서 무슨 생각을 하던지는 자유지만 그 책이 읽기에도 힘들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읽은 후 무슨 생각이 들런지는 모르겠지만 책장은 술술 잘 넘어가도록 재밌게 잘 쓰여진 책이니 기회가 닿으면 한번 읽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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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구하기 - 개정판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알라딘 도서평가단 선정 도서.

 

 애덤스미스 구하기라는 제목에서 이 책은 애덤스미스에 관한 책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구하기'라는 말에 있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책의 시작은 해럴드라는 한 남자가 경제학자인 리치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된다. 이 해럴드라는 남자에게는 자칭 애덤스미스라고 하는 영혼이 빙의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둘을 이어주는 매개자 역할로 줄리아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자칭 애덤스미스라는 영혼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해서 지극히 현실적이며 이성적인 리치가 곧이 곧대로 믿어줄 리 없다. 그는 애덤스미스를 시험하게 되고 그러면서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면서 그가 애덤스미스임을 인정하게 되고 그리고 그의 뛰어난 지성에 감복하게 되고 후에 그가 떠났음을 알았을 때는 시련이라도 당한 듯이 허전해하게 된다.

 

 여기서 애덤스미스는 현 시대의 인물 속에 자신의 영혼이 들어가면서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하며 자기 스스로를 구해내기로 한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선택된 리치는 이 시대 어느 경제학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리치가 대변하는 이 시대 상황이란 무엇인가. 바로 시장원리의 기본이 무너진 시대 속에서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애덤스미스는 그 무너진 기본, 시장원리를 떠받치고 있는 도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적절한 예를 들어놨는데 잠시 살펴보자.

 

 해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해달은 지난 2세기 동안 수렵의 대상으로 거의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가죽에 대한 높은 수요 때문이었다. 해달의 운명은 그 유명한 '공공 목장의 비극'을 따르고 있다. 해달은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공공의 자산이었다. 따라서 해달은 보호하는 특정 개인이 금전적 이익을 거둘 수는 없었다. 대신 해달을 수렵하여 상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늘어났다. 해달의 수가 적어질수록 뜻하지 않았던 결과가 생겨났다. 해달은 성게를 잡아억기 때문이다. 천적이 없어지니 성게는 배로 증가하여 수중 식물들을 먹어 치웠다. 바닷속 해조류 숲이 사라지게 되자 그곳에 살던 어족들도 무더기로 사라졌다. 이번에는 그 물고기를 먹던 새들도 모습을 감추었다. 단기적으로 보면 수렵꾼들은 이득을 얻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훨씬 큰 정도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 생태계 재앙은 1911년 해달의 수렵을 금하는 국제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 지어졌고 해달의 수는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었다.'

 

 이 이야기는 해달을 그것이 속해 있는 환경과 따로 떼어 이윤을 내기 위한 단순한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시장과 제도적 조직, 사회적 가치가 모두 얽혀 있는 통합 체제다. 비인격적인 시장을 다루는 수학적인 모델을 가지고는 그 복합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애덤스미스는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을, 그들의 이기심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또한 애덤스미스는 독점과 노동력 착취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그리던 시장은 제도적 조직, 사회적 가치가 모두 얽혀 있는 통합체로서의 시장과 그 속의 사람들은 각자의 본능과 이성이 적절히 결합된 이기심과 덕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즉,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애덤스미스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경제학자와 그 속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기계처럼 애덤스미스 하면 보이지 않는 손 하면서 여기까지만 생각할 뿐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기 이전에 썼던 도덕감정론은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이다. 애덤스미스가 말했던 자유시장만을 쫓을 뿐, 그 자유시장의 전제조건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이 책에서 다시 불려 나온 애덤스미스는 자유시장은 여전히 지지하면서 자신이 일찍이 말했던 인간의 덕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 속에 좋은 구절들이 많은데 잠깐 소개를 하자면 '모든 경제적 활동은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한다.(윌리엄 레트윈)',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 이기심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 자신의 행동의 타당성에 진심으로 신중을 하가는 것이...덕의 진정한 정수이다.(애덤스미스)'. 이 외에 내가 진정으로 감동을 받고 개인적을 반성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내가 정리를 좀 해서 말을 하자면 이런 것이다.

 

 애덤스미스는 양심은 본능과 이성 두가지를 모두 사용하여 형성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자기보존이나 자기애의 본능은 한계를 넘지만 않으면 고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인정받고자 하는 본능 또한 있는데 이것은 타인, 자신 모두에게 해당한다. 자신이 어떠한 행동을 하기 전에 그 행동을 할지 하지 않을지에 대해서 내면에서는 대화를 벌인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고 해도 자신이 상상하는 관중,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관중의 인정을 토대로 결정을 내린다. 즉, 자기자신과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애덤스미스는 이러한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양심을 계발할 수 있다고 한다.

타인과의 동감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타인과의 동감이란 내 느낌이 적절하다고 타인이 인정해 주는 것인데 이러한 타인과의 동감은 상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상상은 진정한 인간이 되라고 조물주가 내려 준 선물과도 같다. 일단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게 되면 나는 행동과 감정을 의식하게 된다. 감정이나 행동이 실제로 적절한지 보기 위해 그것을 주시하게 된다. 그리고 타인이 나를 보는 것처럼 내 자신을 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이 연극에서 배우일 뿐 아니라 '공정한 관객' 이 되는 것이다.

공정한 관객은 양심을 창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건, 우리는 타인이 던지는 외부적인 찬사를 얻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오는 내부적인 존경과 찬사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찬사에 부응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칭찬받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확실히 양심이 인간의 나약함에 패배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적절한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심에 물어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자신과의 대화라는 키워드로 집중된다. 자신과의 대화.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 가치관을 세우고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어떠한 일에 앞서 그 일이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인지를 점검해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을 할 때에만 우리의 양심은 평온할 수 있다. 이 자신과의 대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이는 즉, 가치판단의 결여가 될 것이고 이렇게 가치판단이 결여된 상태에서 행해진 행동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내가 자신과의 대화를 재개할 때 어떤 형식으로든 내 양심에 상처를 주게 된다.

 이 책은 주로 경제학을 다루고 있지만 그 경제학 속엔 인간도 포함되어 있고 그 인간이란 도덕이 살아있는 인간을 말하고 있기에 나에게 이런 반성을 하게 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자신과의 대화를 게을리 했는지 그래서 간혹 내 가치관에 반하는 일을 저질러 놓고 그 후에 얼마나 아파했는지 등을 떠올려 볼 때, 자신의 가치관, 양심을 위해서 자신과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시장 또한 이러한 자신과의 대화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지금의 모순들이 발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 시장의 처음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위한 시장이었는지 그러한 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기본 전제들이 무엇이었는지 즉, 시장의 가치관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게 되고 이야기 하지 않게 되면서 시장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까? 애덤스미스가 원죄인 양 애덤스미스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고 애덤스미스의 본질을 알지도 못한 채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여하튼, 이 책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아, 애덤스미스가 이런 말도 했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나이를 조금 더 먹고 공부를 조금 더 하고 내가 조금 더 변함으로써 다시 한번 이 책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참, 너무 애덤스미스에 대한 이야기만 했는데 그야말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자면 책은 소설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일단 시작하기는 쉽다. 친구에게 이 책을 빌려 줬더니 처음 몇장만 읽고는 재밌다고, 재밌을 것 같다고 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읽다 보면, 즉 애덤스미스와 경제학자 리치가 영적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시장이 어떻고 도덕이 어떻고 하면서 조금 심각한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부분을 재밌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테고 그냥 가볍게 소설처럼만 보고 싶었다면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중간 적절한 예로써 활용 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나오고 있으니 소설로만 보려 했던 사람들도 이 책을 읽는 데에는 크게 어렵지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던 점은 포커를 치는 장면에서 여러 철학자들이 스미스의 친구로 나오는데 그 이야기가 좀 더 길게 그리고  여러 사상들을 적절히 엮어 내어 재밌게 구성 되어더라면 하는 점이었다. 뭐, 이야기의 중심이 애덤 스미스이니 굳이 다른 철학자들 이야기까지 깊이 다루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잘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냥 조금 아쉬웠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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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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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책을 덮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독서감상문이라든지 책의 리뷰를 쓸 때

제목만 대충 훑고도 써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을 여러번 읽어 책을 분석하듯 써 내는 사람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엔 책을 읽고 난 후,

아련히 남은 감상 위주로 쓴다. 내가 그 책에서 보고 느낀 게

딱 그만큼 이거나, 아니면 꼭 그 부분이 내게 강하게 남았다거나.


이 책은 추리 소설이다. 추리하는 사람과 추리해야 하는 대상이 있는.

스밀라라는 여성은 이중적이며 혼합적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추리는

딱히 무언가를 밝혀내고야 말겠어! 라기 보다는 이런 저런 일들이 맞물려

계속해서 무언가 밝혀지고 종국엔 그 자신도 제어하지 못한 채

그저 계속 가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물론 발단은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 개인에겐 아주 중대한 문제.

단지, 한 소년이 왜 죽었는가에 대한.

경찰이 조사한 내용과 스밀라가 추론한 내용의 어긋남.

단지, 스밀라는 그 소년에 왜 죽었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고 싶었을 뿐이지만 소설은 그렇게 흘러가진 않는다.

하여, 이 소설은 그다지 긴박하지 않다. 긴박하기엔 밝혀져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상세하게 밝혀주지도 않는다.

독자들은 스밀라와 같은 상황 속에서 느린 템포로 이 사건을

끝까지 밝혀 낼 것인지 중도 포기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한국말로 옮겨 놓아도 한국말로 와 닿지 않는 번역과 함께.


이 고비를 지나게 되면 얼음과 눈이 말하는 진실 앞에 도달하게 된다.

이 자연물을 통해 작가는 몇몇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카니크, 히쿠 등의 단어가 주는 그린란드에 대한 환상과 함께.


정작은 추리소설 이지만 나에겐 전혀 추리소설로 와 닿지 않았던 책.

다 읽고 난 후, 추리 소설을 다 읽은 후의 후련함 보단

그린란드에 대한 환상과 스밀라와 수리공의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한번 더 읽어야 하는 필요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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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우리 역사 바로잡기 2
이덕일.김병기.박찬규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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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고 당당히 선언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표지에는 이를 나타내는 구절이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이 박혀 있다. 그리고 역사학자의 책답게 풍부한 자료들이 실려 있다.
그것도 칼라판으로. 여기서, 책이 상당히 무겁다는 것은 이 책의 단점이긴 하지만 질감이나 자료의 선명함에 있어선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 같아 내 팔에 배긴 알통은 넘어가 주겠다.

 

 이번 책은사도세자의 고백과 조선왕 독살사건과 같이 특정 테마를 정해 역사적 사료와 저자의 상상력을 통해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책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특정 사건이 아닌, 고구려라는 한 나라의 기원부터 멸망까지 이야기하고자 했으니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사료가 부족한 탓에 객관적 자료에 의한 결과라기 보다는 저자의 견해가 더 어필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부족한 증거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견해를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자료가 저자의 견해가 옳다고 확실하게 말해줬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들이 수집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에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마시키기 어려울 것 같다. 대부분의 고구려에 대한 유적이 북한과 중국에 걸쳐 있기 때문에 한국 역사학자로서는 조사, 연구 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아쉬움을 접어두고 이 책에 대해서 살펴보자.

 

 고구려 역사에 있어서 부여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이는 부여의 시조 동명왕의 탄생설화와 고구려의 동명성왕의 탄생설화가 유사한 점을 보아 알 수 있다. 즉, 부여의 한 갈래인 북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온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부여의 시조사화가 고구려의 시조사화로 차용된 것이다. 이런식으로 시조사화를 비교해 가며 설명해 준 덕에 교과서보다 학습효과가 더 높았다고 하겠다. 이는 이 책의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평양천도에 대한 다른 해석은 흥미로웠다. 교과서에서 배우기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고구려가 남하정챙을 펴기 위해서였다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고구려가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평양천도를 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곧바로 백제를 공격하지 않고 48년이 지나서야 백제를 공격했다. 이는 고구려가 의도적으로 남하정책을 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구려 내부 사정으로 인해 평양으로 천도할 수 밖에 없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일대사건'을 빗대어 '조선 역사상 2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 칭했는데 이는 광개토대왕이 한 것처럼 북방확장정책을 통해 고구려의 천하체제를 확대했어야 했지만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백제,신라와의 긴장관계를 형성, 고구려 역사의 주 무대를 만주 대륙에서 한반도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게 되었으니, 이를 조선 역사상 2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 부를 만 하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라 하겠다.

 

 여하튼 이 책을 통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고 기존에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사실에 대해 다른 견해를 접하기도 했다. 고구려 전체 역사를 다룬 탓에 그 방대함에 전체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기에는 좋았지만 그만큼 자세하고 세밀한 맛은 없어서 아쉬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편을 자주 쓰는 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장편들은 그가 일전에 썼던 단편들 중의 한 편을 확장시켜 장편으로 쓴 것이 많다. 저자 또한 이 책을 쓰면서 했던 고구려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세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 같이 좀 더 재미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 주기를 바란다.

 

 

오타신고

 

p130 7째줄  백제는 고구려와 백제 양쪽과 다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 양쪽과 다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문맥 상 신라로 고치는 것이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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