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금광 도시의 영화적 연대기



  1978년, 캐나다 유콘에 위치한 소도시 Dawson City에서는 오래된 건물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도시의 체육관으로 쓰였던 건물의 지하 동토층에서는 무더기로 매몰된 필름들이 발견된다. 무려 533개에 달하는 무성 영화 필름 릴들이 물과 시간의 힘을 견뎌내고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왜 그 필름들은 버려졌을까? 다큐멘터리 제작자 Bill Morrison은 필름이 잠들어 있던 도슨 시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Gold Rush는 1850년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났다 사그라 들었다. 하지만 미국민들의 일확천금에 대한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았다. 1896년, 알래스카에 걸쳐 있는 유콘 강(Yukon River)에서 또 한 번의 거대한 금 열풍이 불었다. 'Klondike Gold Rush'였다. 미 전역에서 금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잭 런던 또한 금을 찾아 나선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금을 찾는 행운은 소수의 사람들의 것이었고, 잭 런던은 몸만 상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소설로 써냈다.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 1903)', '화이트 팽(White Fang, 1906)'은 그 시절의 산물이었다. 앤소니 만 감독의 1954년작 영화 'The Far Country'도 바로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를 배경으로 한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확장된 서부의 공간 속에 부패한 사법 권력과 개인의 대결,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도슨 시티는 그 열풍의 중심지에 세워진 도시였다. 다큐는 간결한 자막과 공문서, 뉴스 릴, 도슨 시티의 무성 영화들에서 발췌한 장면들로 도시의 연대기를 구성해 나간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Alex Somers가 담당한 음악, 그리고 사운드 디자인이다. 마치 굽이치는 물결처럼 그 모든 자료들이 역동적인 소리와 함께 엮어져 있다. 가끔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그것은 좋은 흐름을 가진 영화이다. 그런 면에서 이 다큐는 꽤 괜찮은 리듬감을 갖고 있다. 

  금과 사람들로 흥청거리는 도시에서 도박과 매춘, 여관 사업은 아주 잘 나가는 사업이었다. 트럼프 가문의 거대한 부는 도슨 시티에서 벌인 그 사업에서부터였다. 그러나 금의 소진과 함께 도시는 급격한 쇠퇴기에 접어든다. 1900년대 초, 도슨 시티는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활기를 잃었다. 그럼에도 록펠러 가문에 의해 대규모의 기계식 채굴 사업이 진행되었고, 도시도 유지될 수 있었다. 체육관을 비롯해 레크리에이션 센터가 들어섰다. 나중에 영화 센터로 변모한 체육관은 그 시기에 무성 영화 제작의 요람이었다. 초창기 무성 영화는 온갖 것들을 다 찍었다. 아이들과 자연, 서커스, 마라톤 대회, 경주, 비행기와 배, 해외의 온갖 인종과 풍물에 관한 것까지. 그 자료들은 '움직이는 사진'인 영화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흥분과 열망을 보여준다. 곧 영화는 '기록'에서 발명된 '이야기'로 나아간다.

  초창기 질산염 필름(nitrate film)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화로 인한 화재의 위험성이 크다는 데에 있었다. 영화관을 비롯해 필름 보관소의 대규모 화재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도슨 시티에서도 잦은 화재로 필름이 소실되곤 했다. 그럼에도 이 도시는 일종의 필름 수장고의 역할을 떠맡게 되면서 계속해서 필름들이 쌓여갔다. 개봉 영화가 2년에서 3년을 떠돌다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 도슨 시티였다. 배급업자들은 영화들의 최종 종착지인 이 외진 북부 도시에서 필름을 찾아가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필름들이 보관할 곳을 찾지 못해서 버려졌다. 유콘 강에 내던져 지고, 때론 불태워 졌으며, 땅에 파묻혔다.

  필름들이 그렇게 버려지는 장면과 함께 무성 영화 속 장면들이 제시된다. 비탄과 놀라움을 보여주는 여인들의 표정은 다큐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과 같다. 체육관의 수영장 바닥을 메꾸는 데에도 필름들이 들어갔다. 다큐는 도시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영화사, 미국사의 주요한 사건들을 훑어 나간다. 1914년의 노동자들의 파업과 1차 세계 대전의 시작, 1917년의 흑인들의 차별 반대 시위, 토키(talkie)의 보급과 함께 시작된 유성 영화의 등장, 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들. 그 기간 동안 도슨 시티는 작은 시골 도시로 변모했다. 1950년대에 그곳의 인구는 900명 정도에 불과했다.

  1957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단편 다큐 한 편이 도슨 시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Colin Low와 Wolf Koenig가 만든 'City of Gold(1957)'는 초창기 도슨 시티에서 살았던 사진가 Eric A. Hegg의 사진 자료로 도시의 역사를 개관한다. 카메라의 'zooming'과 'panning'을 통해 사진을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만드는 이 다큐의 기법은 훗날 미국 역사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된 Ken Burns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잊혀진 금광 도시의 진정한 보물은 여전히 땅 밑에 숨겨져 있었다. 1978년, 건물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무성 영화 필름은 복원과 보존 작업을 거쳤다. 무성 영화 시대의 소중한 자료를 품었던 도슨 시티는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빌 모리슨은 '필름'이라는 도구를 통해 금광 도시의 연대기를 독창적으로 직조해 나간다. 금을 향한 사람들의 지독한 열병으로 세워진 도시, 무성 영화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복원과 재생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은 사뭇 감동적이다. 결국 이 다큐가 보여주는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영화'라는 매체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다. 황금에 대한 선망은 이야기를 영화로 남기려는 예술적 열망과 비슷하다. 그렇게 도슨 시티는 그 열망을 화석처럼 보존한 곳으로 남았다.       


*본문에서 언급한 작품들

Jack London의 소설: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 1903), 화이트 팽(White Fang, 1906)
The Far Country(1954): Anthony Mann 감독 
City of Gold(1957): Colin Low과 Wolf Koenig 제작, 단편 다큐 21분(유튜브에서 볼 수 있음)


**사진 출처: filmlinc.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금을 찾으러 가는 여정,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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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영화들 특집:


Leave No Trace(2018) 

Bait(2019)

Isabella(2020)

The Father(2020)

Attica(2021)


 
  말 그대로, 영화를 보고 글을 쓰려다가 쓸 말이 별로 없어서 그냥 버려둔 영화들 특집이다. 


1. Leave No Trace(2018)

  데브라 그래닉(Debra Granik)의 2018년작 영화. 이라크전 참전 군인 윌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그는 국립 공원 깊은 산속에서 13살 딸과 함께 살아간다. 평화로운 일상의 어느 날, 공원 관계자들은 무단 점거를 이유로 부녀를 내쫓는다. 윌과 톰은 정부 지원으로 주거지를 지원 받아 사회 적응을 시작한다. 마음의 병 때문에 다시 산으로 떠나려는 윌, 그러나 딸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한다.

  "아빠에게 나쁜 것이 나에게도 그런 건 아냐."

  사람들과 사회를 두려워 하는 아빠에게 딸은 그렇게 말한다. 잔잔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 산으로 올라가는 아버지와 딸이 작별하는 영화의 마지막은 찡하다. 그 장면은 시드니 루멧 감독의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1988)' 결말을 떠올리게 하기도. '언젠가 우린 다시 만날 거야', 폭파 수배범인 부모와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으려는 아들은 그렇게 헤어진다. 'Leave No Trace'는 인물의 감정선을 잘 짚어낸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딸을 연기한 토마신 맥켄지의 연기가 참 좋다.


2. Bait(2019)

  영국 출신의 감독 Mark Jenkin이 구식 필름 카메라 Bolex 16mm로 찍은 1시간 29분의 장편 극영화.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어촌 마을. 마을은 관광객들과 외지인들에 의해 잠식되어가는 중이다. 영화는 외지인과 내지인의 경제적인 갈등,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마크 젠킨은 이야기 중심의 내러티브가 아닌, 실험적인 방식으로 쇼트들을 분할하고 접합시킨다.

  IMDb에서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우호적인 것과 혹평으로 양분되어 있다. 1970년대 영화과 학생들의 실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외국 리뷰어의 혹평도 있다. 그걸 읽으면서 그랬다. '이봐,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 그걸로 영화과 학생들이 영화 찍었어', 하고 웃었다. 마크 젠킨은 번거로운 후시 녹음 작업에, 자기 스튜디오에서 직접 현상까지 해가며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열의에 비해서 영화는 영 맥아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필름이냐 디지털이냐가 아니다. 확실히 이제 이런 아날로그 방식의 실험적인 시도는 더이상 의미가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3. Isabella(2020)

  아르헨티나 출신의 감독 마티아스 피녜로(Matias Pineiro)의 영화. 친구 사이인 마리엘과 루치아노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오디션을 두고 서로 경쟁하며 때론 협력한다. 영화는 색면 분할 추상화로 유명한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회화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해 나간다.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연극과 현실이 뒤엉키는 가운데 두 인물들 사이의 역학 관계도 변해간다. 감독의 전작들과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이사벨라'를 제대로 보려면 전작을 보아야 한다. 알렝 레네, 자끄 리베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도 취향에 맞을 것이다. 알랭 레네의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1961)'와 '히로시마 내 사랑(1959)'에 넌더리를 내었던 나에게 이 영화는 괴로운 영화 보기였다.


4. The Father(2020)

  플로리안 젤러(Florian Zeller)는 자신이 쓴 희곡을 가지고 이 영화를 찍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 앤소니(앤소니 홉킨스 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노년의 슬픔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 영화는 치매로 손상된 인지능력을 가지게 된 앤소니가 바라보는 현실을 찬찬히 펼쳐서 보여준다. 그가 바라보는 딸과 사위의 얼굴은 수시로 바뀌고, 자신을 비롯해 그가 말하는 가족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마침내 요양원에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앤소니의 모습은 언젠가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미래이기도 하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아이처럼 우는 노인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앤소니 홉킨스는 영화 속 치매 노인 앤소니이면서, 모든 것을 이룬 예술인 앤소니 홉킨스 경으로서 유종의 미가 무엇인지 입증한다. 연기의 달인처럼 보이는 그도 못당해낼 배우를 만난 적이 있기는 하다. 역사극 '겨울의 라이온(The Lion in Winter, 1968)'에서 함께 공연한 캐서린 햅번이다. 햅번은 피터 오툴, 티모시 달튼은 물론이고 앤소니 홉킨스의 존재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 영화로 캐서린 햅번은 세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5. Attica(2021)

  Traci Curry와 Stanley Nelson이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1971년 9월에 있었던 '아티카 감옥 폭동(Attica Prison Rebellion)'을 다룬다.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교도소의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죄수들은 감옥을 점거했다. 주정부는 무장 진압으로 맞섰고 그 과정에서 수감자와 교도관들이 죽어나갔다.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당시 수감자들을 비롯해 교도관의 가족, 법률가, 방송 관계자들이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 이전에도 아티카를 다룬 다큐가 있었지만, 이 다큐는 다양한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수감자들과 교도관의 가족들은 주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고, 그것은 2000년대 초반에서야 거액의 합의금으로 마무리되었다. 실제 진압 작전에 참여해 살상을 저지른 주정부군을 비롯해 명령을 내린 이들 가운데 처벌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티카 폭동을 계기로 미국 교도소의 여건은 표면적으로는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 시대 들어서 범죄와의 전쟁으로 교도소와 수감자 관리는 더 엄격해졌다. 오늘날 미국은 교도 행정을 적극적으로 민영화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감자에 대한 노동력 착취와 비인격적인 처우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폭압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아티카 진압 유혈극이 일어난지 50년. 이 다큐는 과연 미국이 그 사건에서 무엇을 배우고 얼마나 나아졌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진 출처: hotcorn.com      Bolex 16mm로 'Bait'를 찍고 있는 감독 Mark Jenkin



**사진 출처: altenateend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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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요지(山田洋次, Yamada Yoji) 감독의 영화 속 목소리들(Voices)


고향(同胞, The Village, 1975)
학교(学校, Gakko, 1993)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
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



1. 1970년대 농촌 청년의 목소리: 고향(同胞, The Village, 1975)
 
  내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 책에는 소설을 잘 쓰기 위한 여러가지 비법들이 적혀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누군가에게 들려주 듯이 쓰라는 것도 있다. 사람의 온기를 지닌 목소리. 영화에서는 그것이 작중 화자의 내레이션이 된다. 뛰어난 이야기꾼이며 역사적 통찰력을 가진 일본의 감독 야마다 요지는 그 '목소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1975년작 영화 '고향(同胞, The Village)'은 이와테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주인공은 마을 청년회 회장 타카시이다. 그는 고단한 농촌의 삶에 지쳐있다. 그런 그에게 도쿄 극단의 히데코가 찾아온다. 히데코는 마을 주민들에게 단합의 기회가 될 거라며 뮤지컬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히데코의 제안은 좋지만, 공연비 65만엔을 티켓 판매로 마련해야 하는 상황은 청년회에 부담으로 다가온다. 과연 이 시골 마을에서 극단의 공연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내성적이고 소심한 타카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가씨에게 고백도 못하고 있다. 그에게는 부인과 사별한 후 두 딸을 키우는 형과 어머니가 있다. 농사와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농촌의 삶은 버겁고 힘들다. 마을 젊은이들에게 도쿄는 꿈의 도시이다. 농사에 마음에 없는 그에게 형은 닥달을 하고, 좋아하는 여자는 도쿄에서 살겠다며 떠나버린다. 1970년대 일본은 고도 성장으로 이룬 경제적 발전과 함께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비대해진 도시의 기능과 생산 인력의 충원을 담당한 것은 농촌과 도시 근교 지방의 젊은이들이었다. 영화 속 타카시와 마을 청년들은 생계 때문에 몸은 농촌에 매여 있지만, 마음은 도시로 향해 있다. 야마다 요지는 거센 도시화의 물결에 직면한 농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농촌 청년 타카시의 목소리를 택한다.

  러닝타임 2시간 7분 동안 전반부에는 공연을 올리는 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청년회의 모습, 후반부에는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도쿄 극단의 뮤지컬 공연이 펼쳐진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적 양식이 혼합된 이 독특한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과 함께 하는 농촌의 삶, 그 소박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이다. 노래와 연극, 탭댄스와 춤이 결합한 극단의 뮤지컬 공연의 제목은 '고향(ふるさと)'이다. 농촌이 싫어 떠났던 청년들이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의 극을 보며 주민들은 울고 웃는다. 청년회의 젊은이들은 공연을 올리기까지 자신들이 애썼던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삶의 의지를 다진다.
 
  "실패는 두렵지만, 실패하더라도 시도해보는 것이 낫다구."

  영화는 두 개의 삶을 병치시킨다. 도시로 떠나 중국 음식점 직원과 미용사로 살아가는 외롭고 고단한 삶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 공동체적 유대를 이루는 고향의 삶.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야마다 요지는 농촌의 삶이 젊은 세대들에게도 충분히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일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히데코가 이끄는 도시 극단의 예술적 열정에 의해 일깨워진다. 그렇게 영화 속 타카시의 목소리에는 감독 자신이 동시대의 일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실린다. 야마다 요지의 영화를 통한 이러한 사회적 관심사와 발언은 '학교(学校, Gakko, 1993)'에서도 나타난다.


2. 일본 사회 주변인들의 목소리: 학교(学校, Gakko, 1993)

  야마다 요지 감독을 시리즈의 대가로 알린 영화는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 1969–1995)'연작이었다. 무려 48부작에 이르는 이 영화적 대장정은 방랑 상인 '토라상'의 모험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 편마다 소박하고 유쾌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전후 중장년층 관객들의 티켓 파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즐겁게 변주되는 토라상의 이야기는 과거에 대한 추억과 함께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연작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이 감독은 1993년에 처음으로 선보인 '학교(学校, Gakko)'를 4편까지 이어간다. 그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는 야간 중학교 교사와 그의 제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문맹인 재일 조선인 김 어머니,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함께 사는 비행 소녀 유키, 건물 청소일로 생계를 잇는 카즈, 학교 가기를 거부하는 여중생 에리코,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장, 뇌성마비로 의사소통이 불편한 오사무, 막노동을 하며 경마에 빠져 사는 이노상, 그리고 담임 쿠로이 선생.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펼쳐보이며 관객을 낙오자들의 '학교'로 데려간다. 이 영화에는 여러 주인공들이 각자의 내레이션으로 쿠로이 선생과의 만남이 어떻게 그들의 인생을 바꿔놓았는지를 들려준다. 2시간이 넘는 이 영화를 결코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목소리들이다.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야간 중학교 졸업생들의 수기를 엮은 원작에서 나온다. 야마다 요지는 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일본 사회의 주변부를 조망한다. 쿠로이 선생이 지도하는 학생들은 일본 사회에서 열외적인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보이지 않는 차별과 냉대 속에 놓인 이들, 그런 그들을 돕는 쿠로이상은 따뜻한 마음과 올바른 신념을 가진 교육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일깨우는 것,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의 학생들은 인생을 바꿀 내면의 힘을 얻게 된다.

  과연 배움이 우리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가? 영화는 가난한 하층민 이노상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관객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 무더운 여름날, 쿠로이 선생은 이노상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찜통같은 이노상의 집 창문은 닫혀있다. 쿠로이 선생이 창문을 열자 지나가는 기차의 굉음이 들린다. 소음 때문에 문도 열지 못하고 사는 이노상의 열악한 주거 환경, 그런 곳에서 막노동으로 살아온 그는 중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그를 진단한 의사는 이노상의 몸은 '그가 살아온 험한 삶의 흔적'으로 가득하다고 쿠로이상에게 말한다.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학생들은 그가 야간 중학교에서 보낸 1년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노상은 과연 그 시간이 행복했을까에 대해.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쿠로이 선생이 학생들에게 던지는 그 질문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과연 '돈'이 아닌, 대답할 다른 무언가를 갖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그 대답을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실존적 의미에 대한 성찰과 함께 야마다 요지는 '학교'에서 사회의 하층민들과 주변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영화는 그들 또한 일본 사회의 구성원이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3. 전쟁을 관조하는 여성의 목소리: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 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

  야마다 요지는 일본의 과거사와 관련해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사회적 원로이기도 하다. 영화 '어머니(母べえ, 2008)'와 '작은집(小さいおうち, 2014)'은 일본의 과거 침략 전쟁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 성찰을 보여준다. 야마다 요지는 두 영화에서 모두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영화 속 여성들은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전쟁이 각자의 삶에 남긴 상흔에 대해 털어놓는다. 두 영화는 침략 전쟁의 병참 기지로서 '국내 전선(Home Front)'의 일본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난이 미시사적 관점에서 구술된다.

  영화 '어머니(2008)'는 1984년에 노가미 테루요가 발표한 '아버지의 레퀴엠'이라는 단행본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자는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을 비판했던 자신의 아버지가 수감된 후에 가족이 겪은 고난을 써냈다.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이는 막내딸 테루미이다. 9살 테루미는 12살 언니, 그리고 엄마와 함께 감옥에 있는 아버지가 풀려나기만을 기다린다. 사상범으로 체포된 아버지는 전향을 거부하고, 혹독한 수감 생활을 감내한다. 아버지의 제자 야마자키, 고모 히사코는 2년이란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하며 힘이 되어준다.

  러닝타임 2시간 12분은 꽤 긴 시간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야마다 요지는 이야기가 갖는 힘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아버지의 제자 야마자키가 가족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일련의 사건들, 어머니의 친척 아저씨가 여름에 와서 지낸 이야기, 경찰인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갈등. 그런 이야기들 중간중간에 야마다 요지는 일본의 뒤틀린 국수주의와 천황제의 폐해를 부각시킨다. 거리에서는 사치가 죄악이라며 귀중품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캠페인을 벌인다. 기차역에서는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을 배웅하며 천황 만세를 외친다. 어머니가 선생으로 있는 초등 학교에서는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고 아이들에게 그 은혜를 칭송하게 한다.

  영화 '어머니'에서 묘사되는 당시 일본인들의 모습은 집단적인 최면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가 참석한 반상회에서 마을 대표는 천황궁을 향해 절을 하자고 하는데, 천황이 별장에 머무르니 그쪽을 향해 절해야 한다며 논쟁이 벌어진다. 잡화상의 주인은 진주만 습격 소식을 듣고, 드디어 일본이 미국을 무찌르게 되었다며 크게 반색한다. 외부인의 시각에서는 미쳐 돌아가는 나라이지만, 당시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거대한 제국주의적 이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온전한 양심과 합리적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비판적으로 살았던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영화 속 테루미의 아버지는 결국 2년 만에 옥사한다(실제 원작자의 아버지는 전향 후 석방되어 나중에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징집된 야마자키는 군함의 침몰로, 히로시마에 있던 고모 히사코는 원폭으로 사망한다.

  '어머니(2008)'에서 어머니를 연모하는 야마자키의 감정은 매우 절제되어 있고, 그것은 영화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달리 '작은집(小さいおうち, 2014)'의 경우에는 로맨스가 극의 내러티브를 이끈다. 이 영화도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야마다 요지는 2010년에 나카지마 쿄코가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읽고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1935년에 시골 출신의 타키는 도쿄 중산층 가정의 하녀가 된다. 영화는 노인이 된 타키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적어 내려가는 글에 따라 전개된다. 타키가 화자가 되어 들려주는 이야기는 주인 마님의 불행한 사랑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도 2시간 17분으로 역시 길다. 아마도 요즘 관객들에게 이러한 긴 호흡의, 이야기 중심의 영화는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주인 마님 토키코와 이타쿠라의 불륜이라는 것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타키가 토키코에게 품는 연모의 감정을 비롯해 중성적 매력을 지닌 토키코의 친구까지, 영화의 동성애적 코드는 기이한 자기검열처럼 삭제되어 있다. 아마도 노감독에게 그런 부분의 묘사는 영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이 영화는 로맨스 보다 당시 전쟁이 중산층 계급에 미친 영향을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타키의 주인은 완구 회사에 다니는데, 그는 계속되는 일본의 전쟁 소식에 흥분한다. 일본의 식민지가 확장되면 그의 회사가 팔 수 있는 장난감 시장이 커지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노년의 타키는 자신이 쓴 자서전을 대학생 조카 켄지에게 읽어준다. 타키는 1937년 중일 전쟁 시기 일본이 난징을 함락했을 때의 축제 분위기를 적는다. 하지만 켄지는 난징에서는 대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 기억이 맞느냐고 반문한다. 침략 전쟁이 극에 달했을 무렵에도 돈까스를 배달시켜 먹었다는 이야기도 켄지에게는 생뚱맞다. 타키는 조카가 모르는 그 시절의 암시장에 대해 들려준다.

  전쟁이 온나라를 쥐어짜내고 있었지만, 가진 사람들에게는 견딜만 했던 것이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제임스 아이보리의 '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1993)'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는 2차 대전 시기에 부유한 귀족 가문의 충복으로 일하는 집사장 스티븐슨의 시선으로 상류층의 일상을 포착한다. 나치와 연계되면서 몰락하는 주인, 맹목적인 충성을 보였지만 결국 회한만 남은 노년의 집사장. 스티븐슨처럼 타키도 평생 독신으로 산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고독사였다.

  야마다 요지의 이 씁쓸한 전쟁 로맨스 영화에는 감독의 명확한 역사적 인식이 담겨져 있다. 영화의 마지막, 조카 켄지는 타키가 그토록 아꼈던 토키코의 아들 쿄이치와 만난다. 쿄이치는 전쟁 시기의 일본인들은 모두 원치 않은 선택을 강요받았다고 회고한다. 자발적으로 전쟁에 나섰던 이들조차도 자신이 원치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시대. 그러나 과연 전쟁을 지원하고 수행했던 일본 국민들에게 원죄를 묻는다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조곤조곤하고 명징하게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은 천황과 군국주의에 대한 광신으로 점철된 침략 전쟁의 이면과 마주하게 된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사진 출처: asianwiki.com



***사진 출처: asianwi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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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느와르, 전후 미국 사회의 불안한 초상


Somewhere in the Night(1946), Joseph L. Mankiewicz
D.O.A.(1950), Rudolph Maté,
No Way Out(1950), Joseph L. Mankiewicz



1. 전후 새로운 젠더 규범의 정의, Somewhere in the Night(1946)

  영화는 병실에서 이제 막 의식을 찾은 남자의 시점 쇼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얼굴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 때문에 붕대로 칭칭 감겨있다.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관객은 이 남자에게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퇴원 후, '조지 테일러'란 이름으로 제대한 그는 물품 보관소에서 찾은 가방에서 '래리 크라바트'가 남긴 쪽지를 발견한다. 자신은 조지 테일러가 맞을까? 래리 크라바트는 또 누구인가? 래리 크라바트를 찾아가는 남자의 여정에 수상한 이들이 계속해서 들러붙는다.

  조셉 멘케비츠 감독의 'Somewhere in the Night(1946)'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퇴역 군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화 내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에 제작된 이 필름 느와르 영화는 전쟁이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분명히 미국은 압도적인 승전국이었으나, 그것이 아무런 상처가 없는 영광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영화 속 주인공 조지 테일러는 기억을 잃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전쟁은 모두에게 혹독한 것이었으며 특히 남자들, 참전 군인에게 큰 상흔을 남겼다. 영화 속에서 기억상실증으로 고통받는 조지 테일러의 모습은 그 한 단면이다. 그는 입대 직전에 자신이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는 호텔에 가서 기억을 되살리려 한다. 그를 응대하는 프런트의 나이든 직원은 호텔 벨보이들이 전쟁으로 모두 입대해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이 제대 후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모든 군인들의 사회 적응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단절된 경력의 남성들은 당연히 이전의 사회적 위치를 회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주인공 조지 테일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의문, '나는 누구인가'는 그들이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실존적 과제였다. 남자들은 군인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또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빠르게 변모해야 했다. 그러한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압박감은 영화 속 조지 테일러를 괴롭히는 '기억상실증'으로 나타난다.

  조지 테일러는 자신에게 의문의 쪽지를 남긴 래리 크라바트가 미국으로 들어온 나치의 비밀 자금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그가 겪는 모든 곤란은 바로 그 돈의 행방과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는 머리를 쥐어짜내가며 래리 크라바트와 조지 테일러의 관계에 대해 알아 내려고 애를 쓴다. 물론 그것은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알아낼 수가 없다. 아름답고 착한 밤무대 가수 크리스티는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다. 이러한 조력자로서의 여성 캐릭터의 대조적 지점에 '필리스'가 있다. 천박하고 낮은 사회 계층의 여성으로 묘사되는 이 팜므 파탈은 테일러의 불투명한 과거와 연계된 여성이다. 필리스는 테일러를 곤경으로 몰아가는 뒷골목의 인간들과 함께 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이런 양분화된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에는 전후 미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드러난다. 여성들에게는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들을 환대하고 따뜻하게 도와주어야 하며, 공적인 영역(전시의 군수 공장과 같은 직장)의 자리를 기꺼이 남자들에게 인계해야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크리스티가 테일러에게 보여주는 순전한 믿음과 도움은 그러한 여성상을 대변한다. 그리고 테일러는 크리스티와 함께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고,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필리스와 같은 여성이 가진 힘은 무력화되어야만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남자를 안전하게 사회에 복귀하도록 돕는 여성, 결코 남성에게 위협적이지 않는 여성성에 대한 재정의. 멘케비츠의 이 필름 느와르 영화는 퇴역 군인의 실존적 위기와 함께 전후 새로운 젠더 규범을 내러티브에 직조해 나간다. 


2. 전후 중산층 계급의 편집증적 공포, D.O.A.(1950)

의사: 우선 경찰에 알려야겠소. 이건 살인 사건이니까요.
프랭크 비글로우: 살인 사건이라뇨?
의사: 비글로우 씨,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선생은 살해당하는 중이요.

Dr. MacDonald: Of course, I'll have to notify the police. This is a case for Homicide.
Frank Bigelow: Homicide?
Dr. MacDonald: I don't think you fully understand, Bigelow. You've been murdered.


  남자는 의사로부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살해당하는 과정에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랬다. 그는 이상한 독성 물질에 중독되어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길어야 일주일 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장길에 오른 남자는 호텔 옆방 사람들과 잠시 어울렸다. 그리고 바에서 낯선 여자와 술 한 잔을 마셨다. 도대체 왜, 누가 남자를 독살하려는 것일까? 시한부 인생이 되어버린 남자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찾아나선다.

  폴란드 출신의 촬영 감독으로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던 Rudolph Maté는 헐리우드로 옮겨서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그가 1950년에 만든 'D.O.A.'는 잘 짜여진 플롯, 거기에 더해진 긴박감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영화의 제목은 '도착 즉시 사망(Dead On Arrival)'이란 단어의 약자로, 주인공 프랭크가 맞이하게 되는 최후와 연결된다. 성실한 회계사이며 공증인으로 살아가던 남자의 일상은 평범하게 잘 짜여져 있다. 안정적인 직업,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 친구까지. 프랭크는 샌프란시스코의 출장길을 신선한 일상 탈출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악몽이 되어버린다.

  갑작스럽게 맞이하게 되는 삶의 마지막 순간, 이 엄청난 재난은 누군가가 그의 술잔에 타놓은 '빛나는 독약' 때문이다. 그것은 '이리듐(Iridium)'이라는 방사성 물질이다. 'Somewhere in the Night(1946)'의 조지 테일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나치의 비밀 자금'이 그러했던 것처럼, 'D.O.A.(1950)'에는 낯설고 뜬금없는 방사성 원소가 등장한다. 영화 속 외부의 적대적 세력이 보낸 치명적 물건은 주인공을 무덤 깊숙이 끌고 간다. '나치'와 '방사능'으로 상정된 이러한 위협은 전후 미국 사회가 외부 세계에 느끼는 불안감을 의미하며, 그것이 일종의 편집증적인 공포로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미국인들의 내면에서는 사그라들지 않는 두려움이 상존하고 있었다. '냉전(Cold War)'의 시작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사상 검증의 바람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존재가 외부의 악의적 존재에 의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영화 속 주인공 프랭크에게 닥친 일이 그것이다. 그는 그저 열심히 살아온 선량한 시민이다. 그런 그에게 죽음이 다가온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살인범을 찾아나서는 여정, 전에는 귀찮게 느껴지던 여자 친구는 중간중간 그의 안부를 묻는다. 프랭크는 너무 고맙고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다시는 그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프랭크를 연기한 에드먼드 오브라이언(Edmond O'Brien)은 당시 헐리우드의 미남 주연 배우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외모이다. 배우 생활 내내 체중 관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그는 이 영화에서 배 나온 중산층 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 속 프랭크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 절박한 추적의 여정은 미국 중산층 계급이 느끼는 불안감과 맞닿아 있다.

  프랭크가 경찰서에 도착해서 들어가는 영화 첫 부분의 인상적인 시퀀스를 비롯해, 'D.O.A.'는 너무나도 멋진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은 나중에 무려 세 번이나 리메이크 될 정도였다. '죽음의 카운트다운'이란 한글 제목으로 번역된 이 영화의 원본으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는 결국 시대성과 연결된다. 죽어가고 있는 주인공이 길고 어두운 경찰서 복도를 걸어들어갈 때, 그리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형사 앞에서 자백한 후 플래시백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영화적 여정은 관객을 전후 미국 사회의 내면으로 안내한다.

 
3. 195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전조, No Way Out(1950)

  조셉 멘케비츠 감독은 캐릭터들의 세부적 심리 묘사에 탁월하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No Way Out(1950)'은 그러한 멘케비츠의 면모를 관객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영화는 두 명의 범죄자가 교도소 병동으로 실려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조니와 레이, 이 두 명의 형제 범죄자들을 담당하는 이는 흑인 의사 루터(시드니 포이티에 분)이다. 루터는 의식이 없는 조니의 상태를 보면서 뇌종양을 의심하고 척수 천자 검사를 시행한다. 그러나 검사 도중에 조니가 사망하고, 그것을 본 레이(리처드 위드마크 분)는 루터에게 인종차별적 언사를 퍼붓으며 살인자로 몰아간다. 루터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부검을 요청하지만, 레이는 강하게 반대하고 그것을 기회로 인종 갈등을 부추기려는 공작을 은밀히 계획한다.

  흑인 의사와 백인 범죄자, 루터와 레이로 대변되는 이 인종적이고 계층적인 대립의 양상은 195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매우 놀랍게 느껴진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었지만, 루터는 '피부색'에 내재된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맹목적이고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적 신념을 가진 레이는 자신의 사회적 박탈감과 분노를 루터에게 투사한다. 루터의 적대자는 단지 레이 한 사람만이 아니다. 폭동으로 실려온 백인 환자를 돌보던 그에게 환자의 보호자는 '더러운 깜둥이는 손을 떼라'는 모욕적 언사와 함께 침을 뱉는다. 그가 직면한 거대하고 지독한 차별의 벽은 견고하며, 그것은 '의사'라는 직업적 명망으로도 상쇄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시드니 포이티에가 연기하는 루터의 캐릭터는 고독한 투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그에게 우군이 있기는 하다. 백인이지만 인종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동료 와튼 박사는 루터를 돕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럼에도 루터가 맞닥뜨리는 일련의 곤경은 와튼의 우호적인 태도와 도움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부검을 통해 루터의 결백이 입증되었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레이는 병동을 탈출해 루터를 죽이려고 한다. 리처드 위드마크가 연기한 레이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인종적 편견은 그것이 치유불가능한 '질병(disease)'임을 부각시킨다. 영화는 과연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내면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조니의 이혼한 아내 에디의 캐릭터는 그에 대한 하나의 희망적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역시 하층민 출신으로 인종적 편견을 가진 에디는 와튼의 집에서 만난 흑인 가정부 글래디스와의 대화를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힌다. 에디의 개심(改心)은 결국 레이의 살해 위협에서 루터를 구하도록 만든다. 루터는 자신에 대한 레이의 악의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악화된 부상으로 출혈이 심해진 레이를 돌본다. 이러한 루터를 보며 에디는 레이와 같은 인간은 죽게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이가 가진 인종차별주의, 범죄 전과, 가난, 무지, 그러한 모든 것들은 오직 죽음으로만 사라질 병증으로 여겨진다.

  영화의 마지막, 에디는 레이를 지혈하는 루터를 바라보며 현관문을 열고 경찰을 기다린다. 증오는 복수가 아닌 인본주의적 신념으로 봉합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누구나 그 결말이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게 된다. 미국 사회의 오랜 불안 요소로서 인종차별 문제가 가진 위험성은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미 이전에도 여러 도시에서 인종 폭동이 발생했으며, 전쟁은 그 폭력적 사태를 잠시 동안 멈추게 했을 뿐이었다. 이제 전쟁은 끝났고,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환부를 들여다 보아야만 했다. 영화 속에서 도시의 흑백 인종 폭동이 재현되는 시퀀스는 1분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멘케비치가 압축적으로 담은 폭동 장면에는 미국 사회 내부에서 곪아터지기 시작한 인종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No Way Out', 이제 끓어오르는 분노가 빠져나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1950년대 흑인 민권 운동에 대한 명백한 예언자적 발화(發話)를 담고 있다.


*사진 출처: cinemamuseum.org.uk      Somewhere in the Night(1946)   



**사진 출처: cinemamuseum.org.uk      D.O.A.(1950)



***사진 출처: tcm.com             No Way Out(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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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경계:

City of Pirates(1983), After Hours(1985), Stranger than Fiction(2006)
 


1. 망명자 감독이 써내려간 초현실주의적 'Vanitas', City of Pirates(1983)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의 첫 번째 과제물은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에 따라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내는 것이었다. 자유 연상,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 어떤 통제나 검열없이 털어놓게 함으로써 무의식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한 정신분석학적 도구를 발빠르게 수용한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프랑스의 작가로 초현실주의를 주창한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무의식의 표현을 위한 '자동 기술법(automatic writing)'을 착안해냈다. 비현실적 환상으로 채워진 영화 세계를 보여주는 칠레 출신의 감독 라울 루이즈(Raúl Ruiz)의 '해적들의 도시(City of Pirates. 1983)' 시나리오도 그런 방식으로 쓰여졌다. 라울 루이즈는 자신에게 떠오르는 무의식적 사고들을 종이 위에 무작정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영화를 찍었다.

  영화는 '해외의 땅, 종전 1주일 전'이라는 의문의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시도르(Isidore)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는 어느 섬에서 어머니, 의붓아버지와 살고 있다. 이시도르는 불안과 우울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의붓아버지의 성추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괴로워하는 이시도르는 방에 숨어든 어린 소년 말로를 만나게 된다. 가족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말로는 이시도르에게 약혼을 제안한다. 어린 약혼자 말로, 버려진 성에 사는 또 다른 추방자 토비, 이시도르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이한 여정에 나서는데...

  자동기술법에 따라 쓰여진 시나리오를 관객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는 라울 루이즈의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생각의 파편들을 이어붙인 것이다. 1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든 이 다작 감독은 결코 대중적인 작품을 만든 이는 아니었다. 이 감독에게 있어서 생의 결정적인 사건은 칠레의 정치적 격변이었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라울 루이즈가 칠레를 떠나 프랑스에서 살도록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면 망명자로서 그가 느끼는 조국에 대한 부채의식, 무지막지한 독재자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피와 칼의 이미지가 그것을 입증한다.

  이시도르의 어린 약혼자 말로는 가족들을 살해하고 값비싼 보석들을 훔쳐서 달아난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나온다. 소년은 이시도르의 의붓아버지를 살해하고, 이시도르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어떤 면에서 고통받는 이시도르는 감독 자신의 영화적 자아일 수도 있다. 라울 루이즈는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자신의 상황을 조난자, 내지는 해적들에 의해 납치된 비운의 승객으로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해적들의 도시'는 영화 속에서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시도르는 섬을 떠나지 못하고,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해골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이 영화를 줄거리로 파악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무익하다. 라울 루이즈는 다양한 색들을 사용한 필터로 촬영된 바다의 풍경들,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차용된 이미지들로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간다. '해골'의 이미지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 영화가 일종의 '바니타스(Vanitas, 유한한 인생의 허무함을 일깨워주는 그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울 루이즈는 변화시킬 수 없는 조국의 현실에 대한 무력감과 고통, 독재자를 향한 독설을 뒤틀린 환상의 세계로 표현한다. 그는 망명한 예술가로서의 책무를 잊지 않았다. '해적들의 도시'는 해외의 땅에서 내면의 전쟁을 치루는 자신에 대한 보고서인 동시에 조국 칠레를 향해 쏜 비탄의 화살이기도 하다.


2. 작가와 등장인물의 만남, Stranger than Fiction(2006)

  라울 루이즈의 '해적들의 섬'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그린 매운 맛 영화라면, 마크 포르스터의 2006년작 'Stranger than Fiction'은 순한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주인공 해롤드 크릭(윌 패럴 분)의 일거수 일투족을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된다. 국세청 직원으로 오로지 숫자와 씨름하며 정해진 규칙대로 사는 그의 삶에는 '재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설명하는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해롤드는 미쳐버릴 것 같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해롤드의 죽음을 예고한다. 정신과 의사에게 찾아갔더니, 조현병(정신분열증; 주요한 증상은 환청, 환각을 비롯해 망상과 같은 이상 지각이다)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절대로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해롤드는 문학 교수에게서 도움을 구하는데...   
 
  해롤드에게 들리는 목소리는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 즉 해롤드를 주인공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한 축에는 글을 쓰다 막힌 작가 카렌(엠마 톰슨 분)과 글쓰기를 돕는 출판사 직원 페니, 그리고 또 다른 축에는 카렌이 써내려가는 해롤드의 삶이 자리한다. 평행선을 달리며 결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작가와 등장인물은 해롤드가 자신의 예고된 죽음을 거부하면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롤드는 결코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자신이 정한 규칙들을 깨가며 삶을 즐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가와 등장인물과의 만남,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의 플롯은 무척 기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새롭지도 않다.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867-1936)의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는 작가가 창조한 희곡 속 등장인물들을 두고 모델이 된 실제 인물들의 싸움이 리허설 장면에서 펼쳐진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이 독특한 희극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진짜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작가 카렌이 만들어낸 등장인물 해롤드는 진짜 현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카렌은 그때까지 써냈던 소설의 주인공에게 늘 그러했듯 죽음으로 끝을 내려한다. 해롤드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작가를 찾아가 결말을 바꾸라고 부탁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해롤드는 그 작가가 누구인지 모른다. 해롤드가 작가를 찾아가는 여정, 그것이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Stranger than Fiction'은 작가가 만들어낸 등장인물이 실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설정으로 관객들을 유인한다. 여기에 해롤드의 로맨스, 작가의 존재를 특정해 나가는 추리의 과정, 등장인물에게 신과 같은 작가의 현실적 고뇌가 겹쳐진다. 관객들은 그 모든 이야기가 말도 안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가 설계한 환상의 세계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과연 카렌은 삶과 죽음, 그 둘 중 어떤 것을 해롤드에게 선사할 것인가? 이야기의 완결성을 생각한다면 해롤드는 죽어야 하고, 해롤드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게 해야한다. 여러분이 카렌이라면 해롤드의 운명을 어떻게 써내려갈 것인가? 이 영화는 작품성과 흥행 모두 좋은 성과를 냈다. 마크 포르스터는 소설과 현실을 오가는 독특한 이야기를 대중적인 입맛에 맞추어 무난하게 연출했다.


3. 마틴 스콜세지가 그려낸 뉴욕 환상 특급, After Hours(1985)

  어렸을 적에 TV에서 방영된 '환상 특급'이라는 외화 시리즈는 참으로 기괴하고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다. 마틴 스콜세지의 1985년작 '특근(After Hours)'을 보면서 그 '환상 특급'을 떠올렸다. 영화는 평범한 직장인이 경험한 악몽과도 같은 하룻밤의 모험담을 그렸다. 늘 판에 박힌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던 데이터 입력자 폴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매력적인 여성 마시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소호(Soho)를 찾는다. 총알 택시 기사의 난폭운전에 20달러를 잃은 것부터 어째 조짐이 좋지 않다. 어떻게든 마시를 꼬셔보려는 폴의 시도는 무산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돈이 없어서 지하철도 못탄다. 다시 마시에게로 돌아와 보니, 여자는 죽어있다. 그 와중에 절도범으로 몰린 그는 분노한 소호 자경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과연 그는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만들 무렵의 마틴 스콜세지는 무척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의 이전 작품들은 비평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흥행 수익 면에서는 그렇질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제작사들에게 'box-office bomb(흥행 실패작)' 양산자로 여겨졌다. 제작사들의 외면을 받는 괴로운 시기에 스콜세지는 독립 영화를 만드는 심정으로 'After Hours'를 후다닥 만들었다. 그를 움직인 것은 매력적인 시나리오였다. 조셉 미니언의 각본에 스콜세지가 수정을 가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처음에는 결말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촬영 내내 스콜세지는 지인들에게 결말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엔딩은 정말이지 꽤 괜찮다.

  영화의 주인공 폴이 대변하는 중산층 인텔리 직장인의 작은 일탈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이어진다. 시작은 '헨리 밀러(Henry Miller, 외설적인 내용의 소설로 유명)'의 소설책에서부터 였다. 카페에서 그 책을 읽고 있는 폴에게 마시가 접근한다. 처음에 폴의 머릿속에는 가볍게 하룻밤 보낼 상대를 찾을 심산이었다. 그렇게 해서 마시가 머무는 조각가 친구 키키의 집이 있는 소호에 가게 된다. 그러나 소호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모두 폴의 성적인 추동(sexual drive)을 좌절시켜 버린다. 죽어버린 마시, 도난범으로 모는 카페 여종업원 줄리, 폴을 추적하는 자경단을 이끄는 게일, 그를 자경단에게서 숨겨준다며 급기야 회반죽으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린 준까지. 폴의 수난은 그렇게 이어진다.

  마틴 스콜세지는 폴이 겪는 성적인 좌절감에 더해 실존적 위기를 덧붙인다. 마시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폴은 키키가 있는 클럽 베를린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험악한 인상의 클럽 문지기는 다른 사람은 입장시키면서 폴은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스콜세지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 '심판'의 일부분에서 따왔다. 법정으로 들어가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문지기에 의해 번번히 거부당하는 남자의 이야기. 그처럼 폴도 클럽 베를린과 소호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다. 억지로 우겨서 들어간 클럽에서 그는 강제로 삭발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곳은 폴에게 악몽과 같은 경험을 선사하는 끔찍한 공간이 된다.

  그렇게 영화는 '소호'라는 장소에 일탈과 공포, 불안정성과 과격함을 부여함으로써 비현실적 공간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폴은 결국 아침 일찍 열리는 직장의 철문을 통과해 사무실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본다. 그것은 단지 소호에서 직장으로의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환상에서 현실로의 복귀이며 정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After Hours'는 마틴 스콜세지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스콜세지가 선사하는 기기묘묘, 요절복통 '환상 특급'인 이 영화의 매력을 좀 더 많은 관객들이 발견하길 바란다. 

 

  

*사진 출처: usa.newonnetflix.info



**사진 출처: slantmagazine.com      영화 '특근(After Hours)', 영화 음악을 맡은 하워드 쇼어의 클래식에서부터 다양한 팝 음악에 이르는 선곡, 오리지널 스코어가 무척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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