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안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The mist was coming)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The Birds, 1963)'는 이전까지 사람에게 무해한 존재로 인식되던 '새'를 공포 영화의 주인공으로 둔갑시킨다. Frank Darabont의 2007년작 'The Mist'에서는 안개가 죽음을 몰고 온다. 정확히는 안개와 함께 온 괴생명체들이 한 마을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영화의 원작은 Stephen King이 198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원작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정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소설과 영화는 어떻게 다를까?

  메인주의 작은 마을, 화가 데이비드에게는 아내와 5살 아들 빌리가 있다. 심한 뇌우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불안해진 마을 사람들은 식료품을 쟁여놓기 위해 동네 슈퍼마켓에 모여든다. 데이비드도 아들과 함께 마트에 들른다. 그런데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들어온다. 남자는 위험하다며 마트를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밖은 순식간에 밀려든 안개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소 괴팍하고 신경질적인 중년 부인 카모디는 이건 죽음의 징조라며 혼자 중얼거린다.

  영화 '미스트'에서 공포의 대상은 안개 그 자체가 아니라 안개 속의 괴생명체들이다. 거대한 촉수와 빨판이 달린 괴물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죽인다. 마트 안의 사람들은 이 괴물들과 대적하는 동안 두 부류로 나뉜다. 데이비드를 비롯해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은 총과 빗자루, 화염방사기로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 반면 카모디 부인이 주축이 된 일군의 무리는 일그러진 종교적 신념에 휩쓸린다. 영화는 카모디 부인을 비뚤어진 광신도로 묘사한다. 하지만 원작 소설 속의 카모디는 기이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면서 일종의 주술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미스트'는 어떻게 공포가 사람의 내면을 망가뜨려가는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묘사한다. 적대적인 타자는 괴생명체가 있는 마트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존재로서 괴물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한다면, 카모디 부인은 자신의 잘못된 광신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난데없이 등장한 안개와 괴물들은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휩쓸리고 인내심은 곧 바닥이 난다. 그 틈을 비집고 맹목적 신념이 들어선다.

  공포는 광기와 일탈 행위로 이어진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 속의 데이비드는 극한의 상황에서 눈이 맞은 아만다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영화의 결말부에서 카모디 부인이 아만다를 향해 '창녀(whore)'라는 모욕적 표현을 쓰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데이비드가 성적 일탈을 보여준다면, 카모디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개 속 괴물에게 인신 공양을 하도록 부추긴다. 마트 안의 사람들 누구도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안개가 몰고온 재난은 신체적 위협과 상해를 가할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이성과 윤리를 마비시킨다.

  원작자 스티븐 킹은 카모디 부인의 죽음과 함께 데이비드 일행의 암울한 탈출 여정을 암시하는 것에서 소설을 끝낸다. 그와는 달리 프랭크 다라본트는 이 공포 수난극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차를 몰고 마을을 떠나려는 데이비드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을 목격하고 절망한다. 연료가 떨어진 차가 멈춘다.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아들 빌리를 비롯해 일행을 죽인다. 그 순간, 안개가 걷히면서 마을에 진입하는 군부대가 보인다.

  아마도 그러한 결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논란이 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광기와 합리적 선택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과연 무엇일까? 기다림? 데이비드가 좀 더 기다렸다면 그는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가정일 뿐이다. 소설은 데이비드와 일행 앞에 놓인 미래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스티븐 킹은 '희망(hope)'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소설을 끝맺는다.

  소설 '미스트'는 초자연적 타자를 내세워 인간 내면의 연약함을 역설한다. 영화 속 끔찍한 괴물은 사람의 육신을 찢고 피를 튀기며 잡아먹는다. 마찬가지로 공포는 이성의 눈을 가리며 결국에는 통째로 삼켜버린다. 영화의 참혹한 결말은 호수에서 데이비드가 처음으로 안개를 목격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스티븐 킹이 멈춰 버린 곳에서 자신만의 구부러진 길을 만든다. 그것이야말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창의적이고 놀라운 틈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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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시대 미국인들의 초상, William Wellman 감독의 영화 두 편
 


Wild Boys of the Road(1933)
Heroes for Sale (1933)



1. 상처입고 방황하는 아이들, Wild Boys of the Road(1933)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40)'는 가장 잘 알려진 대공황 시대의 초상일 것이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1939년작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대공황으로 길바닥에 나앉은 이주 노동자의 처절한 삶을 그려낸다.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그려졌음에도 영화 '분노의 포도'는 소설에 비해서 다소 온건하고 현실타협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1940년대 헐리우드 영화는 황금기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 시기 영화 속 메시지들은 잘 절제되어 있다. 그렇게 만든 배경에는 '검열'이 있었다. 1934년, 미국 영화 산업계는 자율적인 검열 기준을 도입했다. 이른바 'Hays Code'로 불리는 영화 심의 기준이 헐리우드 영화의 내면을 지배했다. 검열은 특정 항목의 금지를 지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정부에 대한 비판을 비롯해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정치적 논제도 회피하게 만들었다. '분노의 포도'의 경우는 사회주의적 메시지를 최대한 걷어내는 데에 스튜디오의 입김이 작용했다.

  그런 면에서 1933년에 제작된 William Wellman 감독의 영화 두 편은 대공황에 대한 아주 사실적인 초상을 제공한다. 'Pre-Code Era(1929-1934)'에 제작된 'Wild Boys of the Road(1933)' 'Heroes for Sale(1933)'은 'Hays Code'가 표현의 자유를 옥죄기 이전의 다채로운 영화적 발언들을 내포한다. 두 영화가 개봉된 시기인 1933년에 미국민들은 대공황의 터널을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윌리엄 웰먼 감독은 자신과 동시대인들이 통과하는 어려운 시기를 직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강인한 성품을 가진 이 감독은 영화사의 밑바닥에서부터 구르면서 영화를 배웠다. 감독 개인의 성격적 특성과 결합한 사회적 초상으로서 그의 대공황 시대 영화들에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Wild Boys of the Road'의 도입부에서 관객은 철부지 고등학생들을 만난다. 그저 놀기 좋아하고 또래 여학생에게 관심이 많은 에디와 토미. 토미는 어려워진 가정 형편에 고등학교를 그만두려고 한다. 에디의 아버지도 대공황으로 실직자가 되었다. 두 친구는 집안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무작정 기차를 타고 길을 떠난다. 부랑자, 떠돌이를 뜻하는 'hobo'는 대공황 시기를 대표하는 단어이다. 'hobo'가 된 에디와 토미는 기차에서 같은 처지의 또래를 만난다. 샐리는 남장을 하고 기차에 탔다.

  길바닥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목도하게 되는 현실은 참담하다. 샐리가 찾아간 시카고의 이모는 아이들을 환대하지만, 집에는 곧 경찰이 들이닥친다. 그곳은 홍등가였다. 경찰을 피해 도망치는 와중에도 빵 한 조각을 필사적으로 그러쥐는 에디의 모습에서 혹독한 가난의 그림자를 본다. 또 다시 정처없는 방랑길에 나선 아이들에게 예기치 않은 곤경이 이어진다. 토미는 기차에 치어 다리가 절단되고, 샐리는 강간을 당한다. 샐리의 이모가 '매춘부'라는 명백한 암시, 신체 절단, 비록 설정 쇼트로 제시되기는 했으나 강간에 대한 묘사는 'Hays Code'에서는 모두 금지되는 사항들이었다. 

  웰먼은 대공황 시대의 고통스런 단면을 예리하게 담아낸다. 가난과 폭력의 현실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도둑질에 나선다. 'Wild Boys of the Road'가 보여주는 날것 그대로의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한줄기 빛을 드리운다. 판사는 재판에 넘겨진 아이들이 재활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푼다. '희망'은 영화 속 아이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필요했다.


2. 시대의 악천후를 견디는 소시민 영웅, Heroes for Sale(1933)

  'Wild Boys of the Road'가 대공황을 통과하는 아이들의 여정기라면, 'Heroes for Sale'는 상이 군인의 눈을 통해 시대의 비참을 그려낸다. 영화는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유럽 전선의 참호에서부터 시작한다. 적군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토마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군을 생포한다.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그는 독일군에게 붙잡힌다. 우여곡절 끝에 치료를 받고 귀환한 토마스는 동료 로저가 자신의 공을 가로채 무공 훈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다 치료 과정에서 독일군 의사가 쓴 모르핀 때문에 토마스는 약물 중독의 늪에 빠지는데...

  영화는 마약 중독자가 된 토마스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결국 재활원에서 회복이 되어 나왔지만, 그는 무일푼 신세이다. 토마스는 시카고에서 세탁 업체 직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지인이 발명한 세탁 기계의 특허 이익을 공장 노동자들과 공유하는 토마스. 하지만 공장의 자동화 과정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토마스의 평온한 일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파업을 말리려던 토마스는 주동자로 체포된다. 아내 루스는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한다.

  웰먼은 노동자들의 격렬한 파업과 그것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을 실제처럼 재현한다. 이 장면에서 로레타 영이 연기한 루스가 참혹한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장면은 꽤 충격적이다. 1920년대 미국의 노동 운동은 매우 치열했다. 사회주의와 결합한 이러한 노동 운동은 미정부에 의해 반체제적이고 전복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Red Squad'라고 불리는 진압 경찰의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는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Heroes for Sale'에서 공권력의 횡포는 평범한 한 가정을 무너뜨린다. 주모자로 몰려 5년의 형기를 살고 나온 토마스는 대공황과 마주한다. 힘겹게 재생의 길을 걸으려는 그에게 경찰은 시카고를 떠날 것을 종용한다. 당시 대도시 시카고는 노동 운동의 중심지였다.

  영화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 없이 떠나는 토마스의 눈을 통해 대공황 시기 노동자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그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폭압적인 경찰들, 굶주림에 시달리며 삶의 극한으로 내몰리는 사람들. 'Heroes for Sale'은 웰먼이 만든 에칭 판화 같다. 가는 송곳으로 세밀하게 동판에 새긴 웰먼의 대공황 풍경은 매우 통렬하다. 성실하고 바르게 살고 싶은 주인공에게 세상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하지만 토마스가 지닌 따뜻한 인간성은 자신과 동시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된다. 그는 자신이 받은 엄청난 특허 수익을 빈민 구호 식당에 전액 기부한다.

  이 영화에서 묘사된 마약 중독자의 모습과 경찰의 과도한 진압 장면은 'Pre-Code Era'였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대공황을 묘사한 웰먼의 두 작품에서 그 시대와 사람들의 삶을 목격한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시련에는 거칠지만 진정성 있는 증언이 담겨있다. 분명 대공황은 시대적 재난이었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고통스러웠다. 웰먼은 당시 보통의 미국인들이 어떻게 시대의 악천후와 싸우고 있는지를 냉철한 시각으로 포착한다. 'Heroes for Sale'에서 주인공 토마스가 보여주는 인본주의적 신념은 사뭇 감동적이다. 결국 고통과 재난의 시대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온기와 이타심이다. 이례적인 전염병 시대를 지나는 오늘날의 관객에게도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시대를 뛰어넘어 전달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moviedb.org



*** Pre-Code Era 영화
Millie(1931), What Price Hollywood?(193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pre-code-era-what-price-hollywood19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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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루카스의 1973년작 영화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는 루카스가 첫 영화를 보기좋게 말아먹은 후 찍은 작품이었다. 영화가 제작된 시점에서 정확히 10년 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쳤다. 흥행수익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제작비 대비 180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American Graffiti'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당시 미국인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베트남전의 패배에 뒤이어 오일 쇼크의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루카스의 영화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잘 나가고 좋았던 시절, 1960년대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Paul Thomas Anderson의 'Licorice Pizza(2021)'도 영화 '청춘 낙서'처럼 과거로 돌아간다. 그것도 무려 50년 전인 1973년이다. 루카스의 영화가 당시 청장년층들에게 소구했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2021년작 영화는 어떤 관객층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대적인 정서와 이야기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청춘이었던 이들의 나이는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에 들어선다. 분명 그들을 대상으로 만든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의외로 이 영화의 주 관객층은 20대와 30대 초반에 걸쳐 있었다. 지금 시대의 젊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자, 그렇다면 '감초 피자'는 어떤 영화인지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1973년, 15살 게리(쿠퍼 호프만 분)는 학교 졸업 사진을 담당하는 보조 사진가 알라나(알라나 하임 분)에게 마음을 뺏긴다. 대뜸 사귀자고 말하는 게리. 알라나에게 그 상황은 웃기지도 않는다. 뭐야, 이제 15살 짜리가 25살인 나에게 수작을 걸다니. 일단 퇴짜는 놓았는데 알라나의 마음은 흔들린다. 10살 차이가 나는 커플, 그것도 한 쪽은 미성년자이다. 이 영화가 생뚱맞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게리는 물침대 세일즈맨으로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15살 짜리가 사업을 한다고? 저게 말이 되나 싶어서 실소가 터져 나온다.

  'Licorice Pizza'에는 기상천외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 폭죽처럼 터진다. 게리는 살인범으로 몰려 갑자기 경찰에게 수갑이 채워져 끌려간다. 알라나는 배우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유명 배우(숀 펜 분)와 자리를 함께 하는데, 술 취한 그가 오토바이 타고 객기 부리는 통에 뒤에 앉았던 알라나가 나자빠진다. 물침대 배달하는 길에서 미친 인간 하나 잘못 태웠다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이 영화의 괴상한 유머 포인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뿐이리라.

  이 영화는 결코 1970년대를 잘 아는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물론 영화는 철저한 시대 고증을 거쳤다. 영화 제목 'Licorice Pizza'는 1969년에 James Greenwood가 Long Beach에 문을 연 LA의 레코드 매장 체인에서 따왔다. 이 레코드 체인점은 1985년에 매각될 때까지 존속했다. 영화에서 게리가 사업 구상에 착수하는 우스꽝스러운 박람회는 실제로 1973년에 Hollywood Palladium에서 열렸던 '십 대 박람회(Teen-Age Fair)'였다. 게리와 알라나가 만나는 영화관은 El Portal 극장으로 1926년에 개관한 이곳은 아직도 영업 중이다. 게리의 엄마가 운영하는 사무실의 손님 제리는 일본식 레스토랑 'Mikado'를 여는데, 이 또한 실제 LA의 명소였다. 게리가 즐겨찾았던 'Tail O' Cock' 레스토랑도 1985년까지 영업하던 곳이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렇게 1970년대 San Fernando Valley를 'Licorice Pizza'에 통째로 옮겨다 놓는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는 15살 게리와 25살 알라나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그 시공간을 선택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를 통과한 관객층에게 소구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청춘의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젊은 관객들을 불러 모은다. 게리는 엉뚱한 유머 감각을 가진 괴짜 십 대 사업가이며, 알라나는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 없는 불만족스러운 25살 아가씨이다. 이 둘이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는지. 그들은 서로에게서 무엇을 원하며 또 그 관계에서 어떻게 좌절하게 되는지. 연애하는 커플이라면 그러한 과정을 한 번쯤 겪는다. 'Licorice Pizza'는 청춘 로맨스를 낯선 시공간에 비틀린 방식으로 구겨서 집어 넣는다. 그것은 지금의 청춘 세대들에게는 호기심을 가지고 탐색을 하도록 만드는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의도는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영화의 수익은 제작비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대부분의 젊은 관객들은 궁금해서 집어든 '감초맛 피자'를 한 입 먹고 그냥 내던져 버린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랬다. 조지 루카스가 '청춘 낙서'에서 자신이 지나온 바로 직전의 시대를 보편적 감성으로 그려냈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특이한 이야기를 독창적인 것이라며 우긴다. '1970년대 미국'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걷어낸다 하더라도, 과연 영화 속 게리와 알라나의 사랑 이야기에 공감할 관객이 얼마나 될까?

  'Licorice Pizza'에는 현실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게리와 알라나가 보게 되는 TV 화면 속 당시 대통령 닉슨의 모습, 오일 쇼크로 주유소에 사람이 몰리는 장면을 비롯해 잘 재현된 1970년대 세트들은 별 의미도 없는 배경일 뿐이다. 제멋대로인 10대 청소년과 이도 저도 안되어서 좌절할 뿐인 20대 아가씨의 만남과 사랑 이야기에는 감독이 지인에게서 주워들은 일화들이 짜깁기 되어 있다. 아마도 이 영화의 유일한 미덕이라면 그 모든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엮어낸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야기 솜씨일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 '감초맛 피자'를 맛보라고 권할 마음이 선뜻 나지 않는다. 분명 이 영화는 잘 만든, 좋은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이 요리해서 내놓은 'Licorice Pizza'에는 비주류적 감성의, 진짜 기이한 맛이 난다. 글쎄, 이걸 무슨 맛이라고 표현해야할까? '쇠의 맛', 독자 여러분은 '쇠맛'을 아는가? 커피맛에 극도로 예민한 이들은 스테인리스 보온병에 담는 것을 저어한다. 그 보온병에서는 '쇠맛'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질 수도 있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유리 보온병에 담는 것을 선호한다. 대체 '쇠맛'이 어떤 것이냐고요, 라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주 가끔은 나도 스테인리스 보온병에서 그 '쇠맛'을 느낄 때가 있다. 영화 'Licorice Pizza'에서는 쇠맛이 느껴진다. 그 맛이 궁금한 이라면 한 번 도전해 보아도 괜찮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조지 루카스의 영화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197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american-graffiti-19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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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까지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여긴 좀 메스꺼운 냄새가 난다."
  (Never seen the sea before. It’s got a funny smell to it.)


  아이는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을 그렇게 말한다. 영국의 영화 제작자이며 교육자였던 존 크리쉬(John Krish, 1923-2016)의 단편 다큐 'They Took Us to the Sea(1961)'는 빈민가 아이들의 바닷가 소풍을 담는다. 다큐는 버밍엄(Birmingham)의 전형적인 하층민 주거지를 비춰주면서 시작한다. 아이들은 허물어진 건물이 있는 황량한 공터를 놀이터로 삼는다. 구태여 '가난'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행색에서는 그 단어가 빗물처럼 뚝뚝 흘러내린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어있는 옷, 흙먼지로 얼룩이 진 신발, 위축되고 생기 없는 얼굴 표정. 이 아이들에게 어느 날 자선 단체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말한다. 너희들을 바닷가에 데리고 갈 거란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버밍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안고 기차역에 모인 아이들에게 단체의 인솔 감독자들은 이름표를 달아준다. 기차에 올라탄 아이들은 창밖의 가족들과 짧은 이별 인사를 나눈다. 마침내 기차가 출발하고 그렇게 선물과도 같은 하루가 주어진다. 꼬마의 내레이션은 신나거나 흥분으로 가득차 있지 않다. 조심스럽고 담담하게 들린다. 아이들은 수줍음이 많고 쭈빗거린다. 농장과 소가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간식도 먹는다. 조금은 긴장이 누그러지는 것 같다. 마침내 기차는 Weston-super-Mare의 바닷가에 도착한다.

  조금은 이상한, 메스꺼운 냄새가 나는 곳. 하지만 그곳은 곧 즐거운 추억을 선사하는 장소가 된다. 즐거운 식사 시간, 볼이 미어져라 음식을 입에 넣는다. 피시 앤드 칩스(fish and chips)에 여유있게 식초를 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먹음직스러운 푸딩도 나온다. 배를 채웠으면 구경을 해야겠지. 당나귀를 타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모래성도 쌓는다. 롤러코스터와 전동차는 또 얼마나 재밌는가. 다시 배가 고파온다. 데리고 온 어른들은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사준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갈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 떠나는 아이들은 촬영하는 제작진을 향해 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힘차게 손을 흔든다.

  러닝타임 28분 가량의 이 다큐를 보는 것은 충만한 기쁨을 선사한다. 굳은 아이들의 얼굴이 조금씩 누그러지면서 순전한 즐거움으로 채워지는 것은 마치 마법과도 같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 그곳에서 보낸 짧은 시간은 아이들을 바꾸어 놓는다. 정말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소품이라고 나는 느꼈다. 하지만, 다큐의 제작자 존 크리쉬에게 이 작품은 꽤 무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 다큐에는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2014년, 'birminghammail.co.uk'는 아흔의 존 크리쉬를 인터뷰했다. 크리쉬에게 다큐를 의뢰한 곳은 영국의 자선 단체 'NSPCC(Nation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Children)'였다. 그곳에서는 재단의 기금 마련을 위해 후원자들에게 보여줄 영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TV로 보는 자선 단체 광고의 영화 버전인 셈이었다. 후원자들의 주머니에서 큰 돈이 나오게 하려면 가난한 아이들을 최대한 불쌍하고 비참하게 찍어야만 했다. 제작자 존 크리쉬의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고민을 하던 그는 단체에서 아이들의 바닷가 소풍을 기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걸 찍기로 했다. 'They Took Us to the Sea'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는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신경쓰지 말라고 부탁했고, 자신도 아이들에게 행복한 하루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아이들이 다 즐겁고 좋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고 크리쉬는 회고한다. 더러는 외톨이처럼 겉도는 아이도 있었고, 불안한 표정으로 헤매는 아이도 있었다. 짧은 바닷가 소풍이 끝나고, 아이들이 촬영팀에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서도 크리쉬는 자신이 찍은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나중에 인화된 필름을 보았을 때 그는 비로소 감동을 느꼈다.

  크리쉬가 느꼈던 감동은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다큐는 아이들이 느꼈던 '순전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이 단편은 아마도 화려한 파티장에서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상영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이름은 단체의 요청에 따라 식별할 수 없도록 처리되었다. 그럼에도 아흔의 제작자는 아이들에 대한 마음의 부채감을 오랜 세월 동안 떨치지 못했다.

  다큐의 마지막 장면은 아이들이 사는 그 가난한 동네 풍경이다. 외롭게 집 벽돌담에 기댄 아이. 바다 한 번 보고 왔다고 무어 그리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 짧은 소풍을 아이들은 잊지 못하리라. 바닷가에서 느꼈던 흥분과 기쁨은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며,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크리쉬는 아이들이 떠난 텅 빈 선착장과 바닷가를 보여준다. 인생에서 좋은 순간은 짧고 강렬하다. 다시 외로움과 고단함으로 채워질 일상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선물처럼 기쁨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 다큐를 보는 이들은 빈민가 아이들의 한 나절 소풍에서 그렇게 인생의 한 단면을 마주하게 된다.  



*사진 출처: birminghammail.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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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무라이로 기억될 배우, 미후네 토시로
 


  "뭐랄까, 그는 바다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동료 여배우는 그를 그렇게 회고했다. Steven Okazaki의 2015년작 다큐 'Mifune: The Last Samurai'는 일본의 명배우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 1920-1997)의 영화 인생을 돌아본다. 어떤 사람을 '바다' 같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일까? 여배우는 로케이션 촬영할 때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미후네 토시로가 요리를 해주었던 이야기를 한다. 대스타이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소탈했던 한 인간, 배우로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했던 사람. '바다'라는 단어야말로 그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후네 토시로의 영화 인생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黒澤明, 1910-1998)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다큐는 영화를 구도자적인 엄격함으로 만들었던 한 감독의 이야기 또한 비중있게 다룬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배우들에게 매우 철저하고 치밀하게 연출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이들은 촬영 현장이 훈련소 같은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완벽주의자 감독의 지시를 따라가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그런 감독이 아무런 연출 지시를 하지 않는 유일한 배우가 바로 미후네 토시로였다.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미후네 토시로는 예술적 동반자였다.

  다큐는 일본 시대극을 대표하는 배우로서 미후네 토시로를 부각하면서 시작한다. 사무라이들이 나오는 시대극은 '찬바라(チャンバラ)'로 불린다. 그 단어는 칼들이 부딪히며 내는 '찬찬, 챙챙'하는 소리에서 따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Seven Samurai, 1954)''요짐보(Yojimbo, 1961)', 이나가키 히로시(稲垣浩) 감독의 '미야모토 무사시(Samurai I : Musashi Miyamoto, 1954) 같은 작품은 미후네 토시로를 사무라이의 원형적 캐릭터로 각인시켰다. 스티븐 오카자키는 그런 이유로 다큐의 제목을 '미후네: 마지막 사무라이'로 정했다. 확실히 이 배우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은 시대극으로 채워져 있다.

  시대극의 사무라이 연기는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더욱 치우치게 된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와의 협업 관계가 끝나고서부터였다. 'Red Beard(赤ひげ, 1965)', 그 작품은 두 사람이 함께 한 마지막 작품이었다. 무려 제작 기간이 2년이나 걸린 이 영화를 찍는 동안 미후네 토시로는 배역을 위해 수염을 깎지 않고 지내야만 했다. 다큐는 그 영화가 두 사람의 결별에 원인을 제공해 주었음을 내비친다. 수염 때문에 다른 영화 작업을 할 수 없었던 미후네 토시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

  아마도 '거미집의 성(Throne of Blood, 1957)'도 그 원인들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관객은 다큐에서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미후네 토시로는 주군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영주 와시즈로 나온다. 와시즈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결투 장면에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궁사들에게 '진짜 화살'을 쏘도록 했다. 당시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는 이렇게 회고한다.

  "바로 옆으로 화살이 팍팍 꽂히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물론 미리 언질을 받기는 했죠. 위험할 거라는 걸 모두들 알고는 있었지만 누구 하나 반대 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가장 오금이 저렸을 사람은 바로 미후네 토시로였다. 그 장면에서 미후네 토시로의 얼굴은 자신에게 미친듯이 쏟아지는 화살을 바라보며 공포와 두려움으로 일그러진다. 그 진짜 화살을 쏘는 이들은 게다가 아마추어인 대학 양궁부 부원들이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에는 그 뒷이야기가 나와있다. 촬영이 끝나고 분을 이기지 못한 미후네 토시로는 술에 취해 산탄총을 들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집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렸다. '어이, 좀 나와보라구(こら! 出て来い)!' 영화의 그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면, 그렇게 악다구니를 쓸만도 하겠다 싶다.

  미후네 토시로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은인으로 여겼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하면서 그는 일본의 배우에서 세계적인 배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 하고 둘은 'Red Beard'를 끝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다큐는 그 이유에 대해 명확한 답을 들려주지는 않는다. 그들의 가족과 동료들의 증언은 매우 조심스럽게 들린다. 일본 영화사의 두 거목에 대한 언급이 꽤나 부담스럽기도 할 것이다. 심지어 미후네 토시로의 아들도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며 말을 아낀다. 1948년작 '술 취한 천사(Drunken Angel)'에서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미후네 토시로는 시대극에 치우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미국을 비롯해 해외에서의 영화 작업도 병행했다. 그런 그와는 달리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력은 쇠락해 갔다. 외국에서 그의 명성은 높아가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일본에서 활동 기반을 잃은 상태였다. 그들에게 좋은 날은 다시 오지 않았다. 미후네 토시로는 그저 그런, 비슷한 시대극을 찍으며 연기 역량을 소모해 버렸다. 외국에서 제작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 또한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 다큐에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일본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들이 나온다. 'The Bad Sleep Well(1960)'에서 미후네 토시로와 공연했던 배우 카가와 교코(香川 京子)는 너무나도 곱게 나이든 얼굴로 나온다. 할머니 스크립터는 짱짱한 목소리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함께 했던 시간을 증언한다. 백발이 성성한 단신의 영감님은 아직도 찬바라 연기 지도를 하며 미후네 토시로와의 무술 연기를 떠올린다. 다큐는 일본 영화 속 마지막 사무라이로 기억될 한 배우의 인생을 돌아보며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조망도 빼놓지 않는다. 강제 징집되어 공군에 복무했던 미후네 토시로는 카미카제 대원들의 교관이었다. 미후네 토시로는 무고한 젊은이들을 사지로 떠나보냈던 참혹한 기억을 잊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그가 연기한 체제 반항적 이미지의 캐릭터들은 어쩌면 연기가 아니라 그의 내면적 본질과 맞닿아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미후네 토시로와 구로사와 아키라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미후네 토시로 주연의 영화 '신선조(新選組, Shinsengumi, 196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shinsengumi-1969.html


미후네 토시로가 단역으로 출연한 후기작 '윈터 킬(Winter Kills, 197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winter-kills-19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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