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 코드 시대(Pre-Code Era)의 두 영화에 나타난 결혼 제도와 여성: 'What Price Hollywood?(1932)'와 'Millie(1931)'의 경우


*이 글에는 'What Price Hollywood?(1932)'와 'Millie(1931)'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디 가가 주연의 영화 '스타 탄생(A Star Is Born, 2018)'은 꽤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1976년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있고, 1954년 영화에서는 조지 큐커 감독이 주디 갈란드와 함께 작업했다. 그 이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A. 웰먼 감독의 1937년작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어떤 면에서 이야기의 원형인 작품은 조지 큐커 감독의 'What Price Hollywood?(1932)'이다. 이 영화는 'Hays Code'라고 불리는 미국의 검열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의 '프리 코드 시절(Pre-Code Era, 1930-1934)에 만들어졌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과 스타 산업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이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은 이후에 만들어진 '스타 탄생'의 원석과도 같다.

  배우 지망생 메리는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유명 감독 맥스를 알게 된다. 그는 스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할리우드의 유력 인사로 메리가 영화계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재능있는 감독이지만 늘 술어 절어 사는 그는 메리의 빛나는 배우 경력을 함께 한다. 메리는 잘생긴 바람둥이 폴로 선수 로니와 결혼한다. 바쁘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아내의 배우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는 얼마 안가 이혼을 택한다. 한편 술 문제로 경력에 손상을 입은 맥스는 어려움에 처한다. 메리는 맥스를 따뜻하게 보듬지만, 맥스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세상을 뜬다. 그 일로 메리는 스캔들 속에 은퇴를 택한다. 프랑스의 시골에서 은거하던 메리에게 남편 로니가 찾아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조지 큐커 감독은 'What Price Hollywood?'로 시작한 할리우드 이야기의 완결판을 1954년의 영화로 마무리지었다. 이 영화는 '스타 탄생'과 다른 몇몇 지점을 보여준다. 어려운 처지의 배우 지망생이 등장하는 것은 기본 설정이지만, 스타가 된 이후에 결혼의 상대자는 '감독'이 아니라 인기있는 유명 '운동 선수'다. 분명히 메리는 자신을 스타의 길로 이끈 감독 맥스에게 고마움과 함께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호감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은인에 대한 마음이 더 크다. 메리와는 달리 맥스의 감정은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그는 제작사의 사장과 함께 메리의 중요한 개인사인 결혼과 임신을 논의하고 그 결정에 함께 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맥스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객들이 알아차리는 일은 쉽지 않다. 다만 그가 술에 취해 한밤중에 메리의 집을 찾아가 부부가 자고 있는 침실에까지 들어가서 주정을 하는 장면은 하나의 단서가 된다. 그는 자신이 발탁해서 키운 배우 메리와 유부녀 메리와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다.

  비록 메리와 맥스 사이의 연애 감정에 대한 그 어떤 암시도 존재하지 않지만, 메리의 태도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결혼한 메리의 집 거실에는 맥스의 사진이 놓여있다. 스타 배우 메리가 있게 만든 장본인, 메리의 정신적 지주로서 맥스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술로 인해 맥스의 경력이 추락한 것을 메리는 가슴아파한다. 술에 취해 유치장에 갇힌 맥스를 빼내오는 것도 메리이다. 맥스는 '스타 탄생'에서 술 문제를 일으키는 감독 남편의 자리로 치환된다. '프리 코드' 시대에는 남편이 아닌 남자를 인간적인 연민으로 보살피는 여주인공의 행동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검열 규정이 적용되면서 외간 남자의 존재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영화를 위해서 삭제되어야만 했다.

  반드시 옹호되어야할 결혼 제도의 가치, 결혼한 여성이 어머니와 아내로서 지켜야할 덕목이 1934년 이후의 검열 규정에서 적용된다. 1931년에 만들어진 프리 코드 영화인 존 프랜시스 딜론(John Francis Dillon) 감독의 '밀리(Millie)'는 결혼 제도에서 이탈한 여성의 굴곡진 인생사를 그려낸다. 부유한 사업가 잭과 결혼한 순박한 아가씨 밀리는 곧 남편이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린 딸의 양육은 부잣집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밀리는 과감히 이혼을 택한다. 이 강단있는 여성은 자존심 때문에 위자료도 받지 않고, 혼자서 삶을 개척해 나간다. 호텔 상점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밀리는 돈많은 중년 남자 지미와 젊고 매력적인 토미의 구애를 받는다. 하지만 그 둘 가운데 누구도 택하지 않고 밀리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밀리는 열여섯 살이 된 자신의 딸에게 지미가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밀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미는 밀리의 딸에게 접근하고, 격분한 밀리는 지미를 향해 총을 쏜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밀리는 이혼 후에 싱글로서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남자들과 어울리며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산다. 밀리의 그런 삶은 경제적인 자립에 의해 가능했다. 자신의 직업적 경력(밀리는 나중에 호텔 매니저로 승진한다)에서도 밀리는 인정받는다. 그러나 밀리의 다른 두 친구들은 이른바 'gold digger'로 돈 많은 남자들을 낚기 위해 파티걸로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밀리'에서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성 캐릭터들의 존재는 죄악시되지 않는다. 물론 연인에 대한 좌절된 애정을 연인의 딸(그것도 미성년자)에게 투사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막장 설정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일은 프리 코드 시대에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의 불순한 시도는 죽음으로 댓가를 치룬다. 16년 동안 돌보지 않은 딸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엄마 밀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밀리는 살인죄로 기소당하지만, 딸의 증언으로 배심원들의 무죄 평결을 받고 풀려난다. 자신의 삶을 위해 남편과 딸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았던 이 여자는 그 어떤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아마도 영화 '밀리'의 검열 시대 버전은 킹 비더 감독의 '스텔라 달라스(Stella Dallas, 1937)'가 될 것이다. 딸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하층 계급 엄마의 모성은 충분히 칭송받을만한 것으로 포장된다.

  'Hays Code(정식 명칭 Motion Picture Production Code)'는 1930년에 도입이 결정되었으나, 그것이 실제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34년부터였다. 검열을 수행할 사무국인 PCA(Production Code Administration)가 설립되기 이전의 4년 동안 할리우드는 마지막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이미 1915년에 미국의 대법원은 언론의 자유가 '영화'의 영역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강한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윤리적 가이드라인에 대한 요구는 초창기 영화 산업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이 1919년부터 1933년까지 금주법이 시행된 나라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대중을 상대로 흥행 수익을 내야하는 영화사와 제작자들은 전방위적으로 들어오는 대중 계몽을 위한 '바람직한 영화' 제작 요구에 부응할 수 밖에 없었다. 거의 비자발적으로 시행된 'Hays Code'는 그 타협의 산물이었다. 전직 우정사업본부장이었던 헤이스가 검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실무적인 차원의 진짜 주역은 조셉 브린(Joseph Breen)이었다. 이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 영화는 브린의 윤리적 세계가 구현되는 거대한 장이나 다름없었다.

  'What Price Hollywood?'와 'Millie'는 프리 코드 시대 영화의 결혼 제도와 여성의 삶에 대한 느슨하고 허용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폭력과 외설적인 면에서도 일정 부분 과감했던 그 시기의 유산은 단지 4년동안 제작된 영화들에 응축되었다. 미국 영화가 그 시절의 표현의 자유를 되찾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물론 프리 코드 시대에도 '인종'에 대한 관행적 묘사는 흑인 관객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했다. 두 영화에서 하녀들은 모두 흑인 배우가 연기한다. 머리에는 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검은색 드레스에 흰색 앞치마를 두른 흑인 하녀는 백인 여주인의 시중을 든다. 할리우드 영화가 인종 문제에 대한 개선된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프리 코드 시대의 영화들은 초창기 미국 영화가 가진 다양성을 탐구하는 좋은 소재가 되어준다. 대공황 시기의 피폐했던 경제 상황 속에서 그런 다채로운 영화들이 당시의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검열의 시대가 그 즐거움을 앗아간 것은 미국의 관객들에게도, 영화사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었다.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프리 코드 영화들은 닫혀지기 직전의 자유의 문 앞에 선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외침같다는 인상을 준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영화 'What Price Hollywood?'의 로웰 셔먼과 콘스탄스 베넷



**사진 출처 : tcm.com    영화 'Millie'의 헬렌 트웰브트리스와 로버트 에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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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밀루의 어떤 여름'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해외의 영화 블로거들 글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특이한 블로거가 있었는데, 고양이가 나오는 영화만을 리뷰하는 이였다. 애묘가임이 분명한 그는 리뷰 글에 올리는 사진도 오직 영화 속 고양이만을 캡쳐해서 올린다. '밀루의 어떤 여름'에도 고양이가 나온다. 주인공 밀루(미셸 피콜리 분)의 노모 뷰작 부인이 아끼던 검정 고양이는 의외로 영화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고양이야말로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여주인의 장례식을 앞두고 모인 가족들은 그다지 슬퍼보이지 않는다. 집안의 변호사가 도착해서 유언장을 낭독하기도 전에 노모가 남긴 재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파리에서 일어난 1968년 5월의 시위는 남부의 한적한 시골 저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장례업자들의 파업으로 여주인의 시신은 기약없이 집안에 머무르게 된다. 격화되는 시위 소식과 그로 인한 두려움으로 이 부르주아 가족은 혼란에 빠지고, 마침내 숨겨진 갈등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루이 말 감독의 1990년작 '밀루의 어떤 여름(Milou en mai, May Fools)'은 프랑스 68 혁명을 배경으로 장례식을 앞둔 부르주아 가족의 기이한 풍경을 그린다. 대저택과 넓은 땅을 소유한 밀루의 노모는 이 집안의 실질적인 여가장이다. 밀루는 그런 노모의 그늘에서 유유자적하며 지내다가,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으로 살던 집에서 나가야할 판이다. 동생 조르주, 교통 사고로 죽은 여동생의 딸 클레르와 함께 저택과 땅을 매각해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언장을 뜯고 보니 나눌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하녀로 일했던 아델도 엄연한 상속자의 지위를 차지한다. 할머니의 보석을 몰래 꿍치는 밀루의 딸 카미유, 혁명을 옹호하며 열변을 펼치는 대학생 아들, 레즈비언으로 애인을 데려온 조카 클레르, 그 와중에 제수씨와 불장난을 벌이는 밀루, 여기에 시위대 때문에 도로가 막혀서 잠시 머물게 된 트럭기사는 아무렇지 않게 외설적이고 상스러운 말을 시도때도 없이 내뱉는다.

  화기애애한 가족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균열에 균열을 거듭한다. 여기에는 저 멀리 파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적 사태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밀루의 동생 조르주는 라디오를 끼고 살면서 뉴스에 나오는 시위의 향방을 예의주시한다. 파리에서 도착한 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 부르주아 가족의 걱정과 근심을 더하기에 충분하다. 당시에 대통령 드골은 파리에서 도피해야할 정도로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체제가 뒤엎어질 수도 있는 혁명의 상황은 이 가족의 윤리, 도덕, 사고의 체계를 흔들고 마비시킨다. 카미유는 어린 시절 친구인 집안 변호사와 눈이 맞고, 밀루의 아들은 사촌 클레르의 동성 애인과 연인이 된다. 화가 난 클레르는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트럭 기사를 유혹한다. 그들에게 거실 한 켠에 조용히 자리한 채 자신의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는 여주인의 존재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괴상망칙한 가족의 폭주는 시위대를 피해 한밤중에 도착한 이웃 부부의 방문으로 가속화된다. 카미유는 자신들과 같은 부르주아가 폭도들의 먹잇감이 될 거라면서 근처 산으로 피신하자고 주장한다. 마치 전쟁의 피난 행렬처럼 그들은 산을 오른다. 처음에는 유쾌한 피크닉 같았던 도주는 비가 오고 밤이 되면서 긴장과 공포로 물든다. 이 가족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욕하면서 위선적인 상대방의 모습을 까발린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성의 해방을 논하면서 희희낙락거리던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며 밑바닥을 드러낸다.

  루이 말은 자신이 보고 겪은 1968년 5월을 그렇게 이 영화에 투영시킨다. 여주인 뷰작 부인의 죽음은 드골로 상징되는 구 체제 프랑스의 죽음을 상징한다. 불어에서 국가 프랑스는 여성형 'la France'로 표기된다. 그가 보기에 68혁명은 정신나간 젊은이들과 기회에 편승한 좌파주의자들의 난동이었다. 루이 말은 시골 마을에 등장한 시위대의 모습을 희화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그들이 내건 잡다하고 시시껄렁한 구호를 조롱하며, 목적도 방향성도 없는 그 혼란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물론 시위대에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기성 세대와 기득권 계층의 무능도 그에게는 경멸의 대상이다. 국가의 일시적 죽음, 그렇게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에서 그 누구도 진심으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슬퍼하는 이들은 없었다. 죽은 뷰작 부인은 그렇게 집안 한 구석에 무관심 속에 누워 있다. 거실에 들어온 트럭 기사는 고인의 시신을 부주의하게 건드리다가 고양이에게 할큄을 당한다. 그랬다. 오직 고양이만이 자신의 주인을 지켰다.

  영화의 마지막, 드골의 파리 귀환과 함께 이 정신나간 가족들도 다시금 이성을 되착고 장례식을 끝마친다. 모두가 떠난 집에 밀루는 홀로 남는다. 그는 매각을 위해 포장된 집기들로 어수선한 거실에서 어머니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바라본다. 연주를 마친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왈츠를 춘다. 루이 말은 5월 혁명 이전의 세계와 그렇게 작별한다. 광기와 난동의 5월은 그렇게 끝났다. 드골은 이후의 총선거에서 대승을 했고, 구 체제는 성공적으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뷰작 부인은 죽었고, 그 집은 곧 팔리기로 되어있다. 1968년 5월 이후의 프랑스는 결코 이전의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관, 정치적 신념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밀루의 어떤 여름'은 그 새로운 프랑스가 시작되는 시점의 이야기를 기묘한 부르주아 가족극을 통해 들려준다.  



*사진 출처: culture-vulture.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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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MBC에서 방영한 '경찰청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1993년부터 1999년 초까지 방영되었던 이 프로그램은 실제 사건을 극화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경찰청 사람들'이 독특했던 점은 요새 방영되고 있는 '이것은 실화다' 같은 재연 프로와는 달리, 실제 '경찰'들이 출연한다는 점이었다. 약간은 촌스럽고 강렬한 인트로 화면과 음악, 어색하지만 때론 좋은 연기력을 보여준 진짜 경찰들, 다양하고 극적인 실제 사건 이야기가 있어서 프로그램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루마니아의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Corneliu Porumboiu)의 2009년작 '경찰, 형용사
(Police, Adjective)'에도 경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2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 동안 긴박한 추격전도, 범인 검거도 없다. 통쾌하고 짜릿한 형사물을 생각하고 이 영화를 보려는 이들은 지루한 롱테이크와 그 어떤 별 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에 실망할 것이다. 보면서 무언가를 먹고 있다면 그걸 영화가 나오는 화면에 내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올해 마흔 다섯인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루마니아 국립 연극 영화학교에 들어가서 영화를 공부했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Vaslui를 배경으로 영화들을 찍었는데, 그 이유는 그곳이 그에게 영화를 찍기에 가장 친숙하고 알맞은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Cineuropa와의 인터뷰 참조). 역시 '경찰, 형용사'도 Vaslui에서 찍었다. 작은 도시의 경찰 크리스티는 잠복 근무 중이다. 대마초를 피우는 고등학생 세 명을 감시한다. 그의 일과는 잠복과 추적, 경찰서로 돌아와 근무 일지 쓰기, 퇴근 후 집으로 이어진다. 신혼인 그는 아내와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지방 검사와 서장은 고등학생들을 빨리 검거해 버리라고 닥달을 하지만, 크리스티는 체포를 주저한다. 루마니아에서 대마 소지와 흡연은 최대 7년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범죄가 아닌 행위로, 어린 학생들이 감옥에서 썩을 수 있다는 생각이 크리스티의 결정을 미루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포룸보이우는 롱테이크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크리스티가 용의자 학생들을 감시하고 따라가는 장면은 일관성을 유지하는 호흡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크리스티는 그들이 피우고 버린 꽁초를 수집하고, 눈에 띄지 않게 뒤를 밟는다.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그들의 집 앞에서 끈질기에 기다리고 차량 조회는 물론 누가 드나드는지 기록한다. 관객들은 이런 롱테이크를 응시하면서 크리스티와 잠복 근무를 함께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크리스티의 일상으로 들어온 관객들은 그가 경찰서에서 매일 부딪히는 짜증스럽고 지겨운 관료주의를 곤혹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용의자 가족들의 출입국 기록과 전과 조회가 필요한 크리스티는 무사안일하고 고압적인 타 부서 직원들의 태도를 참아내야 한다. '바쁜 거 안 보여? 지금 못해준다고'말하며 틱틱거리는 여권 담당자, '친구와 약속이 있는데 이걸 지금 꼭 빨리 해야해?'하며 미루는 여직원, 크리스티가 느낄 답답함과 울분에 관객들도 이입된다.

  그렇게 밖에서 일에 치여서 집에 들어왔더니, 아내는 사랑 타령 가사의 유행가를 큰 소리로 계속 틀어놓고 있다. 밥 먹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소리 좀 줄여달라고 했더니, 못들은 건지 하기가 싫은 건지 소리는 여전히 크다. 관객도 견디기 힘든 소음과 같은 노래를 들으며, 이 인내심 있는 신혼의 남편은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음식 만들어준 아내에게 맛있다는 인사를 챙긴다. 아내가 듣고 있는 사랑 노래 가사는 크리스티에게 너무 유치하다. 사랑을 들판의 꽃과 바다에 떠있는 태양에 비유한 노래가 도무지 와닿지 않는다. 크리스티에게 단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비유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다. 이 경찰관은 자신의 업무와 일상의 모든 것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사람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비만한 동료 경찰이 크리스티의 풋살 동호회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를 맘에 들어하지 않은 크리스티가 조깅이나 테니스를 하라고 하자, 그는 그런 운동은 싫증이 났다고 말한다. 크리스티는 그가 풋살을 잘 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런 사람과 같이 운동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한다. 화가 난 동료가 도대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는다. 크리스티는 조깅도 테니스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운동도 잘 해내지 못한다며, 그것이 자신의 판단 근거라고 잘라 말한다. 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젊은 경찰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도 깊이있게 성찰하며 그 성찰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다. 중산층 부모를 둔 고등학생들이 대마초를 좀 피운다고 해서 사회에 커다란 해악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런 그들을 가두는 법은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은 경찰관이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영역에 있는 그의 주변 사람들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영화의 마지막, 10분이 넘는 롱테이크는 체포를 하지 않고 미루는 크리스티가 서장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는 장면이다. 서장은 양심에 꺼려져서 학생들을 체포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크리스티에게 루마니아어 사전을 던져준다. '양심'과 '윤리', '경찰'이란 단어를 차례로 찾아서 큰소리로 낭독하게 한다. '경찰, 형용사'란 제목은 그렇게 루마니아어 사전에 쓰여있다. 명사와 동사로만 쓰이는 영어의 'police'와는 달리 루마니아어에는 '경찰의 업무를 수행하는' 이란 형용사로도 쓰인다. 서장은 크리스티가 생각하는 '양심'과 '경찰'의 의미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전을 이용한다. 크리스티에게 사전에 적힌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정의는 선뜻 와닿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그가 알아먹지 못하는 사랑 타령 유행가 가사와도 같다. 그 모든 언어적 정의는 결국 무용하며, 허섭쓰레기처럼 보인다. 서장은 법을 적용하는 '행동'과 '실천'이 경찰 업무의 본령임을 일갈한다.

  크리스티는 과연 '경찰'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가 수행해야할 경찰 업무는 '비판적 성찰'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될수록 크리스티는 현실의 경찰이란 직업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크다.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는 젊은 경찰이 마주한 딜레마를 통해 '합리적 이성'을 배제한 기계적이고 무능한 관료주의의 폐해를 드러낸다. 이 정적(靜的)이며, 느리게 흘러가는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 세계는 통렬하기 짝이 없다. '경찰, 형용사'가 여느 형사물과 달리 탁월한 지점이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게 포룸보이우가 그려낸 어느 경찰의 초상은 관객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사진 출처: stiri.botosan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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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West Bank)에 살고 있던 72살의 노파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샤울 모파즈(Shaul Mofaz)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장관의 집과 25미터 거리에 있는 노파의 과수원을 군부에서 없애 버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사는 곳이 맘에 안들면 장관이 이사가면 될 것을, 먼저 살고 있는 자신의 땅 근처에 이사와서 땅을 빼앗으려 한다고 말했다. 과수원에 심어진 오렌지와 레몬 나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전부라고도 덧붙였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안보상의 이유로 나무들을 베는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렸다(출처 Al Jazeera). 이스라엘의 감독 에란 리클리스(Eran Riklis)는 그 사건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영화 '레몬 트리(Etz Limon, Lemon tree, 2008)'를 만들었다.

  영화 속 과부 살마가 제기한 소송 변론에서 변호사는 나무를 베는 것이 성서에도 어긋난다는 말을 한다. 그 부분이 흥미로운데, 실제로 구약 성서의 신명기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한 성을 함락시키려고 포위 공격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거기에 있는 나무를 도끼로 마구 찍어 내지는 말라. 나무에 여는 것을 따 먹어야 할 터인데 찍어 내면 되겠느냐? 들에 서 있는 나무가 사람처럼 너희를 피하여 성 안으로 들어 갈 리 없지 않느냐?" (공동 번역 성서 신명기 20:19)

  과연 성서가 살마의 목숨과도 같은 레몬 나무들을 보호해 줄까? 개인의 재산권은 가볍게 깔아뭉개고 나무를 베어버리려는 군부에 대항해 힘겨운 싸움을 하는 살마. 마을의 촌장은 이길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보상금 따위는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과부의 레몬 나무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결혼한 딸과 미국에 가서 정착한 아들도 심드렁하기는 마찬가지. 사위가 소개해준 젊은 변호사 지아드만이 살마의 싸움을 지지하고 격려해 준다.

  그런데 그런 살마를 심정적으로 응원하는 이는 또 있다. 살마에게는 적대자라고 할 수 있는 장관의 아내이다. 온정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진 미라는 살마의 처지를 연민을 가지고 바라본다. 미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보와 관련된 이스라엘의 과도한 규제를 비판한다. 그 인터뷰는 살마에게는 호재이지만, 남편의 입지를 흔드는 일이다. 왜 미라는 장관인 남편과 이스라엘 편에 서지 않는가? 얼핏 보기에 미라의 존재는 '레몬 트리'가 가진 정치적 올바름을 대표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대로 과수원을 가꾸며 살아온 이의 땅 옆에 이사와서는 테러리스트가 숨을 위험이 있으니 나무를 다 베어버리겠다고 하는 국방 장관의 처사는 분명히 온당치 못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엄연한 정치적 현실이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일방적 정치적 구호는 프로파간다로 전락하기 쉽다. 감독 에란 리클리스는 그런 위험을 매우 영리하게 비껴간다. '레몬 트리'는 첨예한 정치적 갈등을 개인의 차원으로 끌여들이는 전략을 구사한다. 레몬 나무 소송전의 뒤에는 중년 여성의 고독과 슬픔, 가부장제의 억압적 면모가 숨겨져 있다.

  살마에게 레몬 나무는 베어버려도 괜찮은 그냥 '나무'가 아니다. 그 나무에서 나오는 레몬들로 살마는 홀로 아이들을 키워냈다. 남편은 어린 레몬 나무를 심어놓고 세상을 떴다. 이제는 자식들도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자신이 직접 담근 레몬차를 마시며 바람에 흔들리는 레몬 나무를 보는 것이 살마의 유일한 낙이다. 그런 살마에게 생의 근원이며 버팀목이었던 나무를 잃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나무들이 삶의 전부라고 말한 진짜 뉴스 속 팔레스타인 노파의 이야기는 그대로 살마의 대사가 된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살마는 노파 보다는 좀 더 젊은 사십대 중반의 나이라는 점이다. 집 근처 계곡에서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면 같이 울고 싶다고 말하는 살마의 내면적 고독은 젊고 야심에 찬 변호사와의 만남으로 공명을 일으킨다.

  촌장을 비롯해 남편의 친구였던 마을 주민들은 살마의 감시자로 등장한다. 그들은 살마에게 죽은 남편의 명예를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거실 벽에 음울한 표정으로 걸려 있는 사진 속 남편의 가부장적인 힘은 그렇게 살마에게 출몰한다. 장관의 아내 미라도 그런 가부장제의 영향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과는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음에도 그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처지의 장관 부인은 마음 기댈 곳이 없다. 남편은 젊고 매력적인 비서와 바람이 난 것 같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딸은 항상 바빠서 통화하기도 어렵다. 딸과의 대화가 유일한 위로이지만, 그 딸은 혈육이 아니라 입양한 딸이며 미라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미라의 인터뷰는 결정적으로 남편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 이렇게 가부장제의 서로 다른 처지의 두 여인은 인생에서 내적인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레몬 트리'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매우 손쉬운 해석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리 좋은 도구가 아닐 수도 있다. 두 여인은 명백한 연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단 한 번, 경호원의 눈을 피해 살마의 집에 들어가려고 했던 미라는 살마가 우는 모습을 엿보게 된다. 살마가 울었던 이유는 베어질 '레몬 나무' 때문이 아니라 '젊은 남자' 때문이었다. 물론 미라는 그걸 알지도 못하고, 미라의 시도는 경호원에 의해 좌절된다. 살마에게도 미라는 재수없는 이웃의 아내이지만, 그렇게 나빠보이는 것 같지 않은 여자일 뿐이다. 둘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라고 할 수 있는 미라의 인터뷰 또한 살마의 입장을 옹호했다기 보다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찰자적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이스라엘 관객들에게 그다지 우호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마도 이스라엘 감독이 만든 영화가 확실하게 '이스라엘 편'에 서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깟 나무 베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뭐 저걸 가지고...' 하는 반응이 아니었을까? 분쟁 지역에서 테러의 위험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적과 우리 편의 구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정치적 갈등이 진행되는 현실은 개개인의 실제적 삶에 지속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레몬 트리'가 보여주는 것은 정치와 개인의 삶이 맞닿는 지점에서의 예기치 못한 파열음과 반향이다. 에란 리클리스는 레몬 나무를 둘러싼 소송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현실, 중년 여인의 내면적 풍경을 펼쳐놓는다. 이 영화는 좋은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이 영화를 그저 그런 이스라엘 영화가 될 수 있는 위험에서 구해낸다. 영화 감독이 가져야 할 덕목은 탁월한 정치 감각이 아니라, 인간과 현실에 대한 탐구심이어야 함을 '레몬 트리'는 일깨운다.    



*사진 출처: he.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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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고베이, 죽음을 각오해라!"

  사무라이는 한 무리의 자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고향 사바이를 떠나 에도에 머물던 그는 3년 만에 사바이 땅을 밟은 참이었다. 그는 에도에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들을 물리쳤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도대체 그는 무슨 이유로 그 땅을 떠났으며 왜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한 걸까? 고샤 히데오 감독의 '어용금(御用金, 1969)'은 1830년대를 배경으로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가길 택한 어느 사무라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어부의 딸 오리하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돈을 벌러 도시로 떠났던 오리하는 폐허로 변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 어떤 인적도 없이 오직 까마귀 떼만이 을씨년스럽게 울어댄다. 가족도, 결혼을 하기로 한 정혼자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3년의 시간이 지났다. 오리하는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청년과 주사위 도박으로 도박꾼들의 돈을 뜯어내며 살아간다. 속임수가 들통나서 쫓기는 오리하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의 마고베이가 구해준다. 그 두 사람은 3년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

  사건의 시작은 막부의 무지막지한 조공 요구였다. 번의 가신 타테와키는 막부의 금 수송선을 탈취한다. 그 일에 동원된 어부들과 마을 주민들은 입막음을 위해 몰살당했다. 마고베이는 타테와키에게 부당한 일이라며 항의하지만, 타테와키는 번의 생존이 달린 일이라며 정당화한다. 낭인이 되어서 떠도는 것을 택한 마고베이. 그는 또 다시 번에서 벌일 어용금 탈취극을 막으려고 고향에 돌아온다. 더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그는 용납할 수 없다.

  사무라이는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주군의 안녕을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해낸다. 마고베이는 어용금을 탈취하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아무 죄없는 어민들을 잔혹하게 죽인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타테와키는 마고베이와는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그에게 무사도란 주군과 번의 안위를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양민을 학살하는 것도 마땅히 해야할 의무였다. 마고베이와 타테와키, 그 둘의 대결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지난 3년의 시간은 나에게 죽은 삶이었어."

  마고베이는 또 다시 일어나게 될 학살극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돌아온다. 고샤 히데오는 마고베이를 통해 사무라이와 무사도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무사도'란 결국 주군의 개가 되어 죽기까지 충성을 바치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가? 도덕적 각성을 한 사무라이는 비로소 인간의 길로 들어선다. 그에게 주군이니, 번이니 하는 것은 더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무고한 양민의 피를 보는 일은 정의롭지 못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막부의 세력이 저물어갈 무렵이다. 가상의 사바이 번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시대극에서 번에 무리한 조공을 강제하는 막부도, 그에 대항하기 위해 어용금을 탈취하는 번도 양민들에게는 가혹한 수탈자들일 뿐이다. 마고베이는 수탈자의 부하 노릇인 '사무라이'를 그만 둔다. 영화의 마지막, 그는 사무라이에게 목숨과도 같은 칼을 버리고 길을 떠난다. 무사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순탄했을까? 일본의 근대사는 그 질문에 비관적인 답을 제시한다. 1850년대부터 시작된 막부의 몰락과 왕정 복고,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사무라이들은 칼을 버려야 했다. 빼앗겼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천황 체제로 재편된 새로운 나라에서 더이상 사무라이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축적된 무(武)의 힘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라이들은 자연스럽게 총을 든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갔고, 그 결말은 자명한 패망이었다.

  고샤 히데오 감독은 정격의 무사 활극을 보여준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눈 쌓인 숲 속에서 벌어지는 대결은 빼어난 영상미를 자랑한다. 영화 속에서 마고베이가 잠시 머무르는 여인숙이 눈길을 끄는데, 그 주변은 온통 진창길이다. 그 설정은 프랑코 네로 주연의 영화 '장고(Django, 1966)'에서 결투가 벌어지는 진흙밭 마을을 떠올리게 만든다. 장고가 자신을 옥죄는 과거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수를 결심했듯, 마고베이 또한 어두운 과거를 지우기 위해 칼을 빼든다. 개인적인 복수를 완성하는 장고와는 달리, 양심에 따른 도덕적 결단을 실행한 마고베이는 결국 칼을 버린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사무라이의 정체성을 버리고 평범하고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무라이들의 주군은 다이묘에서 천황, 그리고 국가가 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그렇게 오랜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어용금'은 그 기원이 되는 시점의 한 사무라이의 선택을 그린다. 그는 지배 계급에 굴종하는 대신, 내면의 도덕적 각성을 이룬 인간이 된다. 진정한 의미의 '시민'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이 그 시민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진 출처: 2017.kiff.kyot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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