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만난 바냐 아저씨, 세 편의 영화로 만들어진 Uncle Vanya


바냐 아저씨(Дядя Ваня, 1970),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 1시간 44분 
바냐 아저씨(Uncle Vanya, 1991), 그레고리 모셔 감독, 2시간 10분
42번가의 바냐(Vanya on 42nd Street, 1994), 루이 말 감독, 1시간 59분

 


1. 들어가며

  희곡 대본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일은 과연 쉬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작품성이 검증된 대본이 나와있으니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평론가들조차도 연극 공연을 그냥 영화로 찍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시드니 루멧이 1962년에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를 영화로 만들어 내놓았을 때도 그런 반응이었다. 루멧은 자신의 경력을 Off-Broadway(브로드웨이의 소규모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감독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연극적 공간과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또 뛰어난 영화 감독으로서 영화 제작의 메커니즘도 꿰뚫고 있었다. 그런 그의 연극에 대한 애정으로 만든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냉대를 받았다. 그들의 눈에 루멧의 영화는 공연되는 연극을 카메라 한 대 놓고 찍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시드니 루멧은 영화 평론가들의 무지와 한심함에 분개했다. 등장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 묘사를 위해서 루멧은 다양하게 쇼트들을 구성했다. 표준 렌즈를 비롯해 장촛점 렌즈와 광각 렌즈를 번갈아 가며 공간의 깊이를 달리해서 보여줬는데, 그걸 알아차리는 평론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촬영의 기본적인 메커니즘도 모르는 평론가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루멧이 '밤으로의 긴 여로'를 통해 받았던 오해와 혹평은 희곡을 영화로 만드는 감독이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위대한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희곡 '바냐 아저씨(Uncle Vanya)'는 1898년에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인 1899년에 초연된 이후, 이 연극은 고전으로 자리잡으면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연히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세 편의 영화를 뽑았다. 구 소련 시절 모스 필름(Mosfilm)에서 제작된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1970년도 영화, 1991년에 영국 BBC와 미국 WNET TV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TV용 영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이 말 감독의 1994년작 '42번가의 바냐(Vanya on 42nd Street)'이다. 이들 영화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호프의 희곡을 영화적으로 변주했는지 살펴 보려고 한다.


***바냐 아저씨 줄거리***

  47세의 이반(바냐 아저씨)은 어머니 마리아, 조카 소피아와 시골 영지 저택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먼저 떠난 누이의 지참금이었던 저택은 매형 세레브리야코프 교수의 것이 되었다. 세레브리야코프는 25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뒤로 하고 젊은 아내 엘레나와 시골로 내려왔다. 바냐는 젊은 날 자신이 사랑했던 엘레나가 늙은 교수와 결혼해서 사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는 엘레나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지만 엘레나의 마음은 딴 데 있다. 자신의 늙음과 병고로 신경질을 부리는 남편에게 지친 엘레나는 바냐의 집에 잠시 머무르는 마을 의사 아스트로프에게 매혹된다. 세레브리야코프의 딸 소피아는 아스트로프를 6년 동안 사모해왔지만, 아스트로프는 그런 소피아에게 무관심하다.

  아스트로프는 엘레나를 유혹하고, 바냐는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고 절망한다. 소피아도 아스트로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세레브리야코프는 보다 여유로운 삶을 위해 바냐의 저택과 영지를 처분하겠다고 선언한다. 적은 보수를 받고 그동안 영지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수익금을 교수에게 보냈던 바냐는 자신과 조카의 삶이 무너질 수 있는 위기에 격분한다. 바냐는 교수를 비난하고 모욕을 주고,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의 무능함을 지적하며 사위를 두둔한다. 바냐는 교수에게 총을 쏘지만 빗나간다. 그 모든 상황에 놀라고 정나미가 떨어진 세레브리야코프는 아내와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스트로프도 떠난다. 소피아는 희망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바냐 삼촌을 위로하며,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시드니 루멧의 '밤으로의 긴 여로(1962)'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448507


2. 가장 러시아적인 콘찰로프스키의 '바냐 아저씨'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Andrei Konchalovsky) 감독은 친분이 있던 배우 이노켄티 스목투노프스키(Innokenti Smoktunovsky)와 체호프의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목투노프스키는 영화 배우이면서 연극 쪽에서 더 많은 공연을 했다. 모스필름은 콘찰로프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전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1970년에 제작된 이 영화에 컬러와 흑백 필름이 혼용되어서 사용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비싼 컬러 필름을 제공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모스필름은 제공되는 필름의 일부분을 흑백 필름으로 떠넘겼다. 콘찰로프스키 감독은 하는 수 없이 두 종류의 필름을 가지고 촬영을 해야만 했는데, 그의 탁월한 감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콘찰로프스키는 희곡 대본이 갖는 연극적 공간의 평면성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식을 사용했다. 장면에 따라 흑백과 컬러를 적절히 나누어 찍었고, 인물과 공간을 보여주는 쇼트들의 구성에도 변화를 주었다. 연극에서 '암전
(轉)'에 해당하는 막의 전환은 인물의 얼굴에 비추어지는 조명을 서서히 어둡게 함으로써 표현했다. 콘찰로프스키는 체호프의 희곡 대본에 충실하기는 했으나,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옮기지는 않았다. 그 예로 2막에 나오는 엘레나와 바냐의 독백 부분이 생략된 것을 들 수가 있다. 아마도 그는 그 부분이 너무나도 연극적으로 보여서 자연스럽게 대화로 이어지는 흐름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콘찰로프스키의 '바냐 아저씨'를 가장 러시아적인 것으로 만든 일등 공신은 주인공 바냐 아저씨 역을 연기한 이노켄티 스목투노프스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낭비한 인생에 대한 회한과 과거에 대한 향수로 살아가는 '바냐 아저씨'란 캐릭터를 절제되고 깊이있는 연기로 보여준다. 배우들 사이의 연기 앙상블도 좋은 편이다. 의사 아스트로프 역을 맡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Sergei Bondarchuk)는 솔직히 그 배역과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감독으로도 유명했던 본다르추크는 원래 VGIK(러시아 국립 영화학교) 연기과 출신으로 배우로도 활약했다. 영화 속 본다르추크의 연기에는 다소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연기력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본다르추크는 의사인 아스트로프가 귀족 출신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값비싼 좋은 의상을 입고 싶어했다. 그와는 달리 콘찰로프스키는 후줄근하고 구깃구깃한 평상복을 입으라고 지시했다. 촬영 내내 사사건건 부딪혔던 두 사람의 갈등은 급기야 불미스럽게 끝났다. 영화를 끝내고 당 중앙위원회로 달려간 본다르추크는 콘찰로프스키의 이 영화가 반 러시아적이며, 반 체호프적인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걸 속어로 표현한다면 '곤조 부린다'에 딱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 본다르추크의 어깃장과는 관계없이 영화는 해외 영화제에서도 수상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바냐 아저씨'는 체호프적인 것에 대한 진중한 고민을 영화로 잘 녹여서 보여준다. 연극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이 상충되거나 어느 한 편에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이 작품은 오리지널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한다. 어떤 면에서 체호프가 러시아어로 쓴 희곡의 의미와 그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러시아인들일 것이다. 러시아의 현대 음악 작곡가로 1970년대 많은 소련 영화 음악을 담당한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ke)의 음악도 영화의 비감함을 부각시킨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Platonov'를 각색한 니키타 미할코프의 영화(197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1977.html
안드레이 스목투프스키 주연의 영화 '차 조심!(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beware-of-car-1966.html



3. 영화적 메커니즘에 대한 몰이해가 낳은 범작, 영미 합작의 TV 영화 '바냐 아저씨'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바냐 아저씨'가 희곡을 스크린에 멋지게 펼쳐놓았다면, 1991년에 만들어진 영미 합작의 TV 영화는 실패작에 가깝다. 감독 그레고리 모셔(Gregory Mosher)는 링컨 센터의 극장 감독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 원작 희곡의 각색자는 미국의 극작가이며 감독으로도 활동한 데이비드 메밋(David Mamet)이다. 재능있는 극작가답게 메밋이 다듬어낸 영어 대사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이 영화는 영국과 미국 배우들이 함께 작업했는데, 그렇게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뭔가 삐걱거리면서도 굴러가는 마차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제작 기간이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스트로프 역의 이안 홀름(Ian Holm)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기는 하다.

  이 영미 합작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적 메커니즘에 대한 감독의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다. 거의 대부분이 미디엄 쇼트와 클로즈업 쇼트로 구성된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영화 내내 등장인물의 얼굴 밖에 안보인다. 심지어 배우와 공간 전체를 다 잡은 풀 쇼트도 거의 없어서, 세트를 구성하는 집안의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도 파악이 안된다. 그렇게 화면을 구성했으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2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동안 쏟아지는 지루함을 견딜 수 밖에 없다. 영국식과 미국식 억양이 뒤섞인 대사들도 조화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 TV용 '바냐 아저씨'는 그냥 걸러도(!) 괜찮은 영화인 걸까? 체호프의 열렬한 팬이라면 놓치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안 홀름이 연기한 아스트로프가 무척 좋다. 원작에서 의사 아스트로프는 잘 생긴 외모의 중년 남자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안 홀름은 그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비교적 작은 체구의 이 배우가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바냐 역을 맡은 데이비드 워너의 비중을 압도한다. 솔직히 이 영화의 제목은 '바냐 아저씨'가 아니라 '의사 아스트로프'가 되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극 전체를 사로잡는 이안 홀름의 연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각색자 데이비드 메밋의 아내로 소피아 역을 맡은 레베카 피전의 뜬금없는 캐스팅도 아쉽기는 하다. 피전이 무리없이 배역을 소화해내기는 했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이렇게 연기와 영화적인 구성 면에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바냐 아저씨'는 연극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경우라 하겠다.    


4. 영화 천재 루이 말의 마지막 역작, '42번가의 바냐'

  영화는 경쾌한 재즈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뉴욕 42번가의 거리를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독특한 영화는 연극 '바냐 아저씨'를 42번가의 버려진 극장에서 극단 배우들이 리허설하는 장면을 담아낸다는 설정으로 기획되었다. 루이 말(Louis Malle)의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My Dinner with Andre, 1981)'를 즐겁게 보았던 이라면 이 영화도 놓칠 수 없다.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에서 같이 작업했던 두 연극인 앙드레 그레고리(André Gregory)와 월레스 숀(Wallace Shawn)이 '42번가의 바냐'에서도 나온다. 주인공 바냐 역은 월레스 숀이 맡았다. 영화에서 리허설 하는 장면의 연극 대본은 앞서 다룬 TV용 영화 대본을 각색했던 데이비드 메밋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극장으로 가는 길에 친구 앙드레를 만난 월레스는 자신이 기획한 연극 '바냐 아저씨' 리허설에 초대한다. 그렇게 앙드레와 그 지인들 몇몇이 모여 낡고 허름한 New Amsterdam Theater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리허설을 구경하러 간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연극이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리허설이 이루어지는 극장이 매우 눈길을 끈다. 1900년 초부터 대공황에 이르는 시기에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설되었던 뉴 암스테르담 극장은 쇠락기에 접어들면서 1970년대에는 흉물스런 건물이 되고 말았다. 연극 연출가 앙드레 그레고리는 가까운 사이의 배우들을 모아 '바냐 아저씨'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루이 말은 소식을 듣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위해 선택한 장소가 바로 그 42번가의 뉴 암스테르담 극장이었다. 그렇게 해서 '42번가의 바냐'가 탄생했다.

  이 영화에서 엘레나 역은 줄리언 무어가 맡았다. 무어의 좋은 연기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영화 제작 당시 이제 막 전성기에 접어드는 이 여배우는 명민하고 세련된 자신만의 배역 분석을 보여준다.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에서 궁색한 연극 배우를 능청스럽게 연기했던 월레스 숀의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바냐 아저씨'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른 배우들도 모두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라 정말이지 뛰어난 연기호흡을 자랑한다. 그런 좋은 연기와 함께 내러티브도 개성적이다. '리허설'이라는 설정 때문에 1막이 끝나고 휴식 시간을 갖는 장면을 비롯해, 구경하는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매우 자연스럽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에 빛나는 화관을 얹어주는 것은 감독 루이 말의 감각적인 화면 구성 능력이다. 어떻게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쇼트들이 거의 없다. 그는 매번 카메라의 위치를 바꾸어 가며, 배우들의 동선과 공간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영화 천재구나', 그런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루이 말은 '바냐 아저씨'의 연극적 공간과 의미에 대한 영화적 탐구를 '42번가의 바냐'에서 멋지게 구현한다. 나는 아직까지 이 정도로 연극을 영화라는 매체적 특성에 부합하게 만들어낸 작품은 만나지 못했다. 만약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하는 독자가 있다면, 꼭 '42번가의 바냐'를 보길 바란다. 루이 말은 이 영화를 완성하고 이듬해에 세상을 떴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천재 감독은 후대의 관객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남겨두고 갔다.

  '바냐 아저씨'를 세 편의 영화로 보다 보니, 나중에는 배우들의 동선과 대사까지 줄줄 꿰게 되었다. 체호프의 이 희곡은 계속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아마도 그런 질문을 던질 독자도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 러시아 시골 귀족의 케케묵은 소동극이 무어 그리 볼 게 있겠느냐고... 체호프가 그려낸 인물들의 삶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고통받는 인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회한, 늙음과 질병, 생계와 돈에 대한 압박, 환경 파괴의 문제, 이 모든 것이 '바냐 아저씨'에 들어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또한 '바냐 아저씨'의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속성은 다면적이다. 왜 바냐 삼촌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들의 저택과 땅을 팔겠다는 교수 사위의 편을 들까? 바냐 삼촌이 세레브리야코프에게 총까지 쏘게 되는 것은 매형에 대한 증오일까, 아니면 생을 낭비한 자신에 대한 절망일까? 소피아가 어떻게든 남아있는 날들을 살아가야 한다고 마지막에 읊조리는 것은 희망의 표현일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체념일까? 그 모든 것을 곱씹게 되는 것이야말로 작가 체호프가 후대의 독자에게 남긴 아름다운 문학적 수수께끼이다.       


루이 말의 '앙드레와의 저녁식사(1981)'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790460


*사진 출처: poetree.ru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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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서부, 환대받지 못한 사람들

7편 The Geography of Hope(1877-1887)   1시간 25분


  켄 번즈는 미국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일련의 다큐멘터리로 명성을 얻은 제작자이다. 그는 해설 위주의 건조하고 딱딱한 역사 다큐에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시적이고 문학적인 것이었다. 번즈는 시와 편지, 문학 작품에서 발췌한 글들을 내레이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과거와 현재를 병치시키는 독특한 자료 화면 배열로 정적이고 지루한 다큐에 '재미'라는 요소를 더했다. 'The West'에서도 번즈의 이런 제작 스타일이 드러난다. 서부 개척 시대를 살았던 여러 다양한 인물들의 서간문, 일기, 소설의 문장들이 성우들의 목소리로 낭독된다. 주요 해설자의 흡인력있는 내레이션, 권위있는 연구자들의 부가 설명이 곁들여지면서 다큐의 내용은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제 'The West'의 7편에서는 미국의 서부 정복이 완료된 이후의 후일담이 펼쳐진다. 인디언들을 내쫓은 땅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이주민들이 계속 쏟아져 들어왔다. 거기에는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의 주역이었던 중국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해방 노예들 또한 서부에서 기회를 찾고자 했다. 브리검 영 사후의 몰몬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나갔을까? 그리고 보호구역으로 들어간 인디언들이 있었다. 인디언들이 원하는 평화는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땅을 뺏은 것으로도 모자라 원주민 문화마저 말살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1877년부터 1887년까지 무려 450만 명의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들었다. 서부에는 그렇게 정착한 이주민들이 세운 도시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그 땅에서 모두가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다. 1877년, 마지막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했다. 연방의 뜻에 따른 남부 재건은 무너졌고, 새로운 남부의 주법이 제정되었다. 노골적인 흑인 차별의 움직임 속에 KKK단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흑인들은 차별을 피해 아프리카나 캐나다로 떠나기도 했다. 서부 또한 희망의 땅이었다. 남부를 떠나는 흑인들은 자신들을 'exoduster'라는 이름으로 칭했다. 이른바 '남부 대탈출(exodus)'의 주요 목적지는 캔자스였다. 1880년까지 15000명의 흑인들이 캔자스에 정착했다. 네브래스카, 다코타도 흑인 이주민들이 선호하는 정착지였다.

  이주민들은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땅을 가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홍수, 토네이도, 메뚜기떼, 가뭄, 폭풍...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정착민들은 그 희망의 감각을 결코 잃지 않았다. 땅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인디언들도 희망을 갖고 버티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했다. 시팅 불(Sitting Bull)은 캐나다 변경에서의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스탠딩 록 보호구역(Standing Rock Reservation)으로 돌아왔다. 1887년에 블랙 힐스를 미 정부에 빼앗기고 4년이 흐른 뒤였다.

  보호 구역의 삶은 감옥에서 사는 죄수와 다를 바 없었다. 2주 마다 몇 마리의 버팔로가 제공되었다. 부족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식량으로 인디언들은 굶주렸다. 인디언들은 보호 구역 밖으로의 외출과 여행도 허락되지 않았다. 1883년, 미 의회 의원들이 스탠딩 록을 방문했을 때 시팅 불은 울분을 터뜨리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것은 대등한 관계에서의 의사 표현이라기 보다는 부족의 생존을 위한 간청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본격적인 인디언 동화 정책을 추진한다. 1883년, 선교사들에 의한 인디언 아동들의 학교 교육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새롭게 지은 영어 이름으로 불렸고, 가족과 떨어져서 기숙사에 머물렀다. 81개의 기숙사 학교와 147개의 일반 학교가 생겨났다. 시팅 불의 자녀들 또한 그 학교에 다녔다. 다큐에서 나이든 인디언 여성은 영어가 아닌 인디언 말을 썼다고 자신의 입에 비누를 짓이겨 넣은 백인 여사감에 대해 증언한다.

  인디언들처럼 중국인들도 서부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대륙 횡단 철도의 건설 노동자로 들어온 중국인들은 30만 명에 이르렀다. 백인들의 중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은 계속 커져갔다. 그 가운데 터진 일이 1871년 LA에서 일어난 'Chinese massacre'였다. 처음 시작은 여자 하나를 두고 벌어진 두 중국인 갱단원의 싸움이었다. 그것은 곧 백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방화, 살상으로 이어졌다. 28명의 중국인들이 사망했다. 타인종에 대한 명백한 테러이며 학살이었다. 1882년, 캘리포니아 의회는 중국인 이민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자신들만의 적절하고도 야만적인 방식으로 중국인 이민자들을 배제시켰다.

  그 즈음, 몰몬교도들에 대한 미 연방 정부의 통제력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몰몬교의 도시 솔트 레이크 시티에도 많은 이민자들이 도착했다. 매춘업소가 생겨났고, 거룩한 사막 성전 도시는 타락에 물들어 갔다. 1882년, 에드먼드 법안(Edmunds Act)이 통과되었다. 이 법에 따라 일부다처제는 연방법에 의해 5년형의 구금에 해당하는 범죄로 규정되었다. 1300명의 일부다처 몰몬교 남자들이 투옥되었다. 몰몬교도들은 연방 대법원에 항소까지 했으나 패했다. 교회가 해체되고 소유 재산이 몰수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몰몬교의 수장 윌포드 우드러프는 1890년, 일부다처제 교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몰몬교 지도부는 자산을 매각하고 정당을 해산하라는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896년, 유타주는 45번째로 연방에 가입한다.

  서부는 거칠고 황량한 땅이었다. 1886년의 극심한 가뭄, 그리고 1887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 최악의 한파가 서부를 덮쳤다. 많은 소들이 죽어나갔고, 그제서야 서부의 사람들은 그 땅과 기후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서부라는 공간이 갖는 모험과 도전, 로맨스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갔다. 버팔로 빌(Buffalo Bill)은 대단한 흥행사였다. 그의 'Wild West' 쇼는 서부에 대한 거대한 서사극이었다. 총잡이들과 군인, 인디언들의 싸움이 대중의 오락거리로 재탄생했다.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괴롭히고 무찌르는, 현실의 피해자가 가해자 노릇을 하는 기이한 쇼였다. 그럼에도 당시의 관객들은 열광했고, 버팔로 빌은 유럽 순회 공연까지 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빅토리아 여왕까지 버팔로 빌의 공연을 보고 극찬했다. 버팔로 빌은 시팅 불을 쇼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시팅 불은 높은 출연료를 받고 쇼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버팔로 빌을 아주 좋아했으며, 와일드 웨스트 쇼에 나오는 여성 명사수 애니 오클리(Annie Oakley)를 수양딸로 삼기도 했다. 비록 패배한 원주민족 추장이기는 했으나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그렇게 라코타족 추장의 영욕의 생애가 저물고 있었다.
 
 
*사진 출처: pbs.org        뛰어난 흥행사 버팔로 빌(
Buffalo B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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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lex 16mm. 1학년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주로 썼던 카메라 기종이다. 지금 영화 공부하는 학생들은 아마도 디지털 기기로 공부하고 작업할 것이다. 내가 배울 당시에 영화에서 디지털이란 저예산, 실험 영화에서나 시도되는 것이었다. 디지털이 필름을 막 밀어내는 시기였다. Bolex로 찍은 16mm 필름을 현상해 보면, 거칠고 누런 색감이 났다. 마치 굵은 모래 뿌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16mm=학생용=단편=실험 영화, 이런 공식이 적용되곤 했다. 그렇다고 이 카메라가 구닥다리에 우습게 볼 기종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영국의 Mark Jenkin은 'Bait'란 장편 극영화(1시간 29분)를 그 Bolex로 찍었다(조만간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한다). 2019년작이다. 영화를 만드는 데에 중요한 것은 장비가 아니다. 작가적인 관점에서의 성실한 관찰과 깊이있는 사유이다.  

  최근 몇 년 동안의 다큐멘터리 제작 경향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LGBT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이다. 'No Ordinary Man(2020)'은 남장 여자의 삶을 살았던 재즈 뮤지션 Billy Tipton의 삶을, 'The Sound of Identity(2020)'는 트랜스젠더 바리톤 가수 Lucia Lucas의 이야기를 담았다. 두 다큐 모두 소재에 있어서 파격성이 돋보인다. 중요한 것은 소재가 주는 반향을 뛰어넘어 그것을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얼마나 잘 변주해 내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두 작품 모두 매우 실망스러웠다.

  'No Ordinary Man'은 지금의 시대를 사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들이 나와서 빌리 팁튼과 자신의 삶을 견주어 이야기한다. 성적 다양성에 닫혀 있었던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과한 팁튼의 삶은 대충 훑어보고 만다. 일종의 메타적 방식(meta documentary)을 적용한 셈인데, 결과적으로는 난삽하고 경박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The Sound of Identity'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바리톤 가수 루시아 루카스의 Tulsa Opera단 데뷔 공연 준비과정을 따라간다. 최초의 트랜스젠더 오페라 가수라는 점에만 집중한 나머지 흥미 위주의 가벼운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 다큐는 중심 소재가 되는 인물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대한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

  캐나다 출신의 젊은 여성 감독 Sarah Baril Gaudet의 2020년작 다큐 'Passage(2020)'는 앞서 언급한 두 다큐에 비한다면 분명한 자기 색깔과 나름의 성찰을 담고 있다. 다큐의 주인공은 시골 마을의 두 친구이다. 캐나다 퀘벡주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Temiscamingue은 감독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과 나즈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그곳은 전형적인 시골이다. 이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18살의 Yoan과 Gabrielle는 친한 이성 친구이다. 동성애자인 Yoan은 단조로운 시골에서 벗어나 대도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험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생각 중이다. 동물을 좋아하는 Gabrielle은 말 사육장에서 일하면서, 동물 관리와 치료에 대한 공부를 해볼까 생각한다. 그러러면 집을 떠나 100km 떨어진 낯선 도시의 대학에 가야한다.

  'Passage'는 그 두 친구의 일상을 담담하고 고요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그들의 고향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다큐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그 Temiscamingue의 자연이 차지한다. 넓게 펼쳐진 녹색의 평원,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 한가롭게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청년들... 그렇지만 그곳의 풍광과는 달리 가브리엘과 요안의 마음은 진로와 앞날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물결이 일렁인다.

  동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요안은 도시에서의 삶을 위해 준비 중이다. 게이 커뮤니티 구성원들과 인터넷으로 소식을 주고 받으며 친분을 쌓는다. 거주할 곳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어떤 일자리를 얻을지도 고민한다. 요안의 조부모는 낯선 도시로 떠나게 될 손주가 걱정스럽지만, 기꺼이 응원한다. 가브리엘은 직업을 위해 진로를 결정했지만, 부모와 남자친구가 있는 고향땅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가브리엘과 요안은 그러한 고민들을 진솔하게 나누면서 마음의 짐을 덜어낸다. 가브리엘이 자신보다 8살이나 많은 남자친구에게 느끼는 세대차와 둘 사이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을 때, 요안이 해주는 말들은 전문 상담가 못지않다. 남자친구와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속깊은 친구 요안. 가브리엘과 요안이 그렇게 의지하고 격려하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친구'라는 단어의 온기를 느낀다.

  '통과'라는 의미의 제목답게 다큐는 요안과 가브리엘이 어른의 세계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들의 마을을 지나는 길고 한적한 도로변의 풍경도 자주 나온다. 진로, 성정체성, 연애, 가족과의 관계, 그 모든 것이 두 친구가 나아가는 길 위에 놓여있다. 어찌보면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는 걱정들이지만, 그들이 사는 곳의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넉넉히 품고 감싸안는다. 그것은 도시에서 사는 그 또래 청년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특권인지도 모른다. Sarah Gaudet 감독 자신에게도 Temiscamingue의 자연이 준 평화로움과 사유의 지평은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Passage'에는 감독의 고향땅과 그곳의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다큐는 요안과 가브리엘이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들은 이제 막 인생의 작은 길목을 통과했다. 감독 자신에게도 의미있는 첫 장편이 된 'Passage'는 젊은 다큐 제작자로서 앞으로 내놓을 작품들에 대한 희망의 빛을 던진다. 이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다큐는 영상물 창작자가 갖추어야할 덕목이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대상을 관찰할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것. 좋은 작품이란 이 간명한 원칙이 구현된 결과물이다. 그것을 제대로 해내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영화'를 만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기도 하다.  



*사진 출처: f3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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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성지 Black Hills, 인디언 전쟁의 끝

6편 Fight No More Forever(1874-1877)          1시간 25분
     

  대륙 횡단 철도 개통된 1869년부터 1874년까지 수백만 명의 이주민들이 서부로 몰려왔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땅이었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의 거주지를 계속해서 뺏어나갔다. 표면적으로는 돈을 주고 인디언들의 땅을 사들이는 것이었지만, 헐값에 넘기기를 강요하는 '강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마도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으시지. 살려는 드릴게' 같은 협박이 아니었을까? 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살던 곳을 떠나 낯설고 황폐한 보호구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Oregon의 Wallowa 지역에 사는 Nez Perce족 추장은 미국 정부가 내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고 버텼다.

  라코타족도 살던 곳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다코타에 위치한 'Black Hills'는 수족 인디언(라코타족은 수족의 한 분파)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1868년에 체결된 포트 라라미 조약(Treaty of Fort Laramie)에 따라 블랙 힐스에 대한 수족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견된 금이 문제였다. 15000명의 광부들이 블랙 힐스로 몰려들었고, 그것은 곧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약을 깨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6백만 달러에 블랙 힐스를 넘기라는 미 정부의 제안을 추장 시팅 불(Sitting Bull)은 거부했다.

  이제 결전은 불가피해졌다. 1876년, 라코타와 아라파호, 샤이엔족 인디언 연합군과 커스터가 이끄는 부대가 맞붙었다. 시팅 불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예지적 환영을 본다. 하늘을 까맣게 메운 메뚜기떼 같은 미군들이 모두 죽어 땅에 떨어지는 꿈이었다. 그렇게 리틀 빅혼 강(Little Bighorn River)에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미 기병대를 이끄는 커스터는 남북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올린 지휘관이었다. 젊고 야심만만한 그는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화려한 군복을 입었고 신문사 기자들을 위해 특별 브리핑을 하는, 당시로서는 미디어 친화적인 유명인사였다. 커스터는 인디언들과의 싸움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인디언 부족의 여자와 아이들을 포로로 잡고 인디언들을 회유해서 내쫓을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Crazy Horse와 Black Kettle 같은 인디언 전사들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6000명의 인디언들 가운데 1800명이 전사였다.

  당시 군인들의 처우는 매우 열악했다. 잡다한 무리로 구성된 오합지졸과도 같았다. 군인들은 알콜 중독에 시달렸고, 자살자 수는 그 2배에 달했다. 가장 큰 사망 원인은 질병이었다. 군인들 대부분은 인디언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군인 700명을 이끌고 커스터는 리틀 빅혼 전투를 치루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전투는 커스터에게 패배와 함께 죽음을 안겨주었다. 인디언들에게는 최초이자 마지막 승리로 기록된 전투였다. 1864년 샌드 크리크에서 동족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한 블랙 케틀은 비로소 원한을 갚을 수 있었다.

  인디언들에게 그 승리는 잠깐 동안의 영광이었다. 미국 정부는 곧 반격에 나섰다. 필립 셰리든 장군을 앞세운 후속 토벌대가 커스터의 복수에 나섰다. 인디언들은 결국 블랙 힐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시팅 불은 자신의 부족들을 이끌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캐나다 국경 인근의 인디언들은 시팅 불과 부족민들을 환대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사냥할 버팔로도 적었고, 어떻게든 먹고 살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1877년부터 1881년까지 그렇게 떠돌이 생활이 이어졌다.

  한편, 몰몬교도들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미국 정부는 유타주에 대한 전면적 통제권을 얻으려고 나설 참이었다. 브리검 영에 의해 다스려지는 은둔의 왕국은 더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미 정부는 1857년에 몰몬교도들에 의해 이주민 여행자들이 학살당한 메도우산 사건을 들고 나왔다. 브리검 영을 잡아넣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학살의 주모자로 지목된 John D. Lee는 끝까지 브리검 영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결국 1877년, Lee의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해에 브리검 영이 숨을 거둔다. 30년 동안 사막의 도시 솔트 레이크를 세우고 몰몬교를 이끌었던 수장의 죽음이었다.

  1877년, 미국은 블랙 힐스를 점령했다. 라코타족에게 닥친 비운을 다른 인디언 부족들도 마주했다. 남은 인디언들은 셔먼의 군대를 피해 도망쳤다. 이제 인디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고, 백인들의 옷을 입었다. 1804년,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의 탐험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인디언들이었다. 원정대는 인디언들에게 미국이 진정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깨졌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버팔로들을 학살했다. 그리하여 이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라코타족 추장 Sitting Bull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조지 커스터(George C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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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2013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에서 혈육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묻는다. 평범한 회사원 남자는 어느 날, 자신의 친아들이 병원에서 뒤바뀌어 다른 집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것은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집도 마찬가지. 서로 뒤바뀐 아이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두 집안은 당분간 시간을 갖기로 한다. 남자는 정기적으로 먼 거리를 운전해서 아들을 만나고 온다. 그가 차로 지나는 고속도로 장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길게 이어진 전선주의 선들이었다. 그것이 꽤 흥미롭게 보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선들로 '혈연'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가족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그런 질문에서 더 나아가 그는 2018년작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Shoplifters)'에서 혈연이 아닌 가족의 모습을 담는다. 도쿄의 비좁고 낡은 어느 주택, 그곳에서 사는 쇼타에게는 할머니와 부모, 이모가 있다. 그런데 쇼타와 아버지가 동네 마트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영 이상하다. 아버지 오사무는 아들에게 마트의 물건들을 훔쳐오게끔 수신호를 보내 지시한다. 자신이 직접 훔치는 것도 아니고, 아들에게 도둑질을 시키는 아버지라니 참으로 몹쓸 사람이다.

  훔치는 것은 쇼타의 엄마도 마찬가지. 세탁부 일을 하면서 세탁물에서 나오는 소소한 물건들을 죄다 챙긴다. 오사무는 어느 날, 쇼타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베란다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유리를 집으로 데려온다. 유리를 데리고 있으면 문제가 될 줄 알면서도,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에게는 다시 돌려보낼 수 없어서 그렇게 유리는 '린'이라는 이름의 막내딸이 된다. 곧 집안의 막내 린은 쇼타와 짝을 이루어 동네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영화의 일본어 제목 '万引き家族' 그대로 '도둑질 가족'이 되는 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기이한 집안의 가족들이 지닌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쇼타는 부부의 친아들이 아니며, 오사무와 노부요도 진짜 부부가 아니다. 할머니 하츠에와 이모 아키도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이다. 어쩌다 보니 그냥 모여서 살게된 이들의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학대당하는 동네 꼬마 유리를 거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보살핀다. 이 가족이 여름의 해변가에서 즐겁고 평화롭게 한 때를 보내는 장면에 이르면, 그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견고해 보이는 이 가족의 유대감이 얼마나 얄팍하고 위선적인가는 할머니 하츠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드러난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그나마 보탬이 되었던 하츠에의 연금 때문에 가족은 그 죽음을 숨기기로 한다. 마당에 암매장을 한 후 계속 연금을 타내며, 쇼타와 린의 도둑질도 계속 된다. 쇼타는 시간이 갈수록 어른들의 위선과 좀도둑인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낀다. 과연 이 가족의 일상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에서 '혈연'의 의미,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옥죄는 '경제적 궁핍'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다. 남남으로 맺어진 쇼타의 가족은 나름대로 충분히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가족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졌느냐가 아니라, '돈'이다. 막노동을 하는 오사무가 다리를 다쳐 일을 쉬게 되자 집안의 경제는 타격을 받는다. 거기에다 아내 노부요까지 해고당하면서 이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된다. 어린 쇼타와 린이 도둑질을 해야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성인 전용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돈을 버는 아키의 경우도 딱하기는 마찬가지. 과연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족'의 이상은 얼마만큼의 현실성을 갖고 있는가? 코레에다 히로카즈가 보여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이란 대명제는 '핏줄'이라는 불가침의 전제 보다 더 엄혹한 '돈'의 지배를 받는다.

  삶의 괴로움을 아이에 대한 학대로 드러내는 유리의 친부모에게서 볼 수 있듯, 혈연은 가족의 절대적 성립 요건이 아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쇼타의 '가짜 가족'이 해체되면서 '린'으로 지내던 유리도 친부모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무관심과 학대로 추운 겨울에 베란다에서 떨고 있었던 유리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유리는 베란다에서 무슨 소리가 나자 얼른 나와 본다. 그리고 밖을 바라보는 유리의 눈빛에는 그리움이 담겨져 있다. 유리는 오사무와 쇼타가 그 베란다에서 자신을 데려가 주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일까? 코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닫는다. 영화는 사람들이 가족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만이 진짜 가족'이라든지, '가족이 행복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돈이 아니다'라든지 하는 것들. 그에 대한 답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관객의 마음 속에 그 답에 대한 생각의 파문을 던지는 것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뜻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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