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N사의 등장은 영상물의 유통과 소비에 있어서 여러모로 혁신을 일으켰다. 특히 다큐멘터리의 경우, 늘 배급 문제로 고민하는 제작자들에게 좋은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빌리 코번 감독의 2021년작 '코카인 카우보이: 마이애미의 제왕들(Cocaine Cowboys: The Kings of Miami)'은 N사의 6부작 다큐로 편성되어서 방영되었다. 코번 감독은 2006년에 'Cocaine Cowboys'로 마이애미의 두 마약 거물들에 대한 고발 다큐를 내놓았는데, 올해 나온 6부작 다큐는 그 후속편으로 다큐의 완성판이라고 보면 된다. 다큐는 Sal Magluta와 Willy Falcon이 1970년대부터 마이애미에 구축한 마약 왕국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1부 윌리와 살, 2부 코카인 75톤, 3부 산더미 같은 증거, 4부 마이애미가 아니라면, 5부 팜므 파탈, 6부 무차초스여 안녕, 이렇게 6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당 50여분 가량으로 만들어진 이 다큐의 흡인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이 다큐를 보려는 이들은 가급적 주말 저녁에 보는 것이 낫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다 보느라 밤을 샐지도 모른다. 다큐는 액션, 스릴러, 법정 드라마, 로맨스, 마치 온갖 종류의 장르 영화들을 절묘하게 합쳐놓은 것 같다. '코카인 카우보이'는 두 명의 마약왕의 일대기인 동시에 1970년대에서 80년대, 90년대까지 아우르며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마약 거물들의 가족과 지인들, 그들의 조직원들, 사건을 취재한 칼럼니스트, 그들을 기소한 연방 검사와 FBI 요원들, 마약왕들을 옹호한 변호사들, 그 모든 이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자료 화면으로 제시되는 사진과 녹음 테이프들은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쿠바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한 마이애미에서 윌과 살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만났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살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지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는 마약상 윌을 만나면서 인생이 뒤바뀐다. 둘은 죽이 잘 맞았다. 소소한 푼돈벌이였던 마약 사업은 콜롬비아의 악명높은 메데인 마약 카르텔로부터 공급을 받게 되면서 획기적 발판을 마련한다. 연방 정부의 해안 경비대를 피해 경비행기와 보트로 직접 공수한 엄청난 양의 마약으로 윌과 살은 거물 마약상의 삶에 진입한다. 윌과 살은 소형 보트 경주 경기를 휩쓴 선수로도 맹활약하며 유명인사가 된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마약 왕국은 판매책, 공급책, 자금 세탁팀, 법률 자문팀으로 세분화되면서 기업의 형태로 변모한다. 마약으로 번 돈은 마이애미의 지역 경제로 흘러들어갔는데, 특히 그들의 투자로 마이애미의 부동산 경기는 대단한 호황을 누렸다. 마이애미에서 그들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으며, 쿠바 이민자 사회에서 그들은 영웅이나 다름 없었다.

  잘나가던 윌과 살의 사업은 레이건 정부의 엄격한 마약 단속 정책으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범죄가 수면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87년이 되어서였다. 1992년, 드디어 연방정부는 그들을 기소하고 재판에 회부한다. 연방 정부의 검사들은 자신만만했다. 압수한 엄청난 양의 마약들과 많은 증인들이 윌과 살의 범죄를 입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증인들은 암살범들에 의해 줄줄이 죽어나가며, 윌과 살은 호화 법률팀을 꾸리며 재판에 대비한다. 1996년, 배심원단은 윌과 살이 무죄라고 판결을 내렸고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다큐는 관객들에게 미국 사법제도의 일그러진 일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넘쳐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마약왕들은 풀려났고, 그날은 마이애미 쿠바 공동체의 축제날이었다. 마이애미는 윌과 살의 더러운 돈으로 포장된 작은 왕국이었다. 주 정부와 사법 기관, 지역 커뮤니티, 종교 단체를 비롯해 그들의 돈이 흘러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름다운 해변 도시 마이애미의 내부는 썩은 돈 냄새로 진동했다.

  다큐의 후반부는 그들을 무죄로 만든 배심원단의 비밀과 정의의 사도로 나선 FBI 요원들의 맹활약, 그리고 살의 여자 친구에게서 압수한 마약 장부로 윌과 살을 재기소하는 과정이 펼쳐진다. 사법 당국이 윌과 살의 마약왕국을 무너뜨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0여년이었다. 다큐는 지역 사회를 장악한 범죄 조직의 위력과 연방제 국가인 미국에서 주정부 사법 관할권의 한계, 배심원 제도의 폐해, 뿌리 깊이 자리한 미국의 마약 문제를 조망한다. 강렬한 비트의 마이애미 사운드와 함께 역동적으로 편집된 화면은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대기순으로 매 편마다 요약 정리해서 보여주는 이 다큐의 친절한 면모는 칭찬할 만하다. 속시원한 결말은 만족스럽지만, 그럼에도 마이애미의 'Muchachos(the boys)'라고 불렸던 윌과 살의 이야기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들의 범죄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과 범죄로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소홀한 부분이 있다. '마약왕들의 서사시'는 너무나 재미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런 범죄 서사시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은 뭔지 모를 씁쓸함을 남긴다.



*사진 출처: netflix.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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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담에 내가 감독 되면, 저것들 안써. 그때도 지금처럼 웃음이 나오나 봐라."

  뭔가 학교에서 쩌리들만 모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 동아리의 부원은 자신을 비웃는 여학생들을 두고 그렇게 뇌까린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The Kirishima Thing, 2012)'는 2009년에 나온 아사이 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금요일, 학교의 최고 인기남인 키리시마가 갑자기 배구부를 그만 두고 종적을 감춘다. 주말 시합을 앞둔 배구부, 키리시마를 중심으로 뭉치며 다녔던 친구들은 모두 혼란에 빠진다. 모두들 키리시마를 애타게 찾는 가운데, 학교의 아웃사이더들 모임인 영화 동아리의 좀비 영화 촬영이 시작된다. 갑작스런 키리시마의 부재는 아이들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며, 마에다가 리더로 있는 영화 동아리의 촬영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영화는 처음에 키리시마의 소식이 전해진 금요일의 풍경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3번에 나누어 보여준다. 마에다와 영화 동아리 부원들, 키리시마의 여친 리사와 친구들, 키리시마의 절친 히로키를 좋아하는 밴드부 주장 사와지마, 이들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1950)'처럼 키리시마의 소식을 다른 입장에서 접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 첫날의 묘사를 통해 관객들은 등장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키리시마'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이다.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는 '영화 속 키리시마는 말하자면 일본의 천황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했다.

  배구부의 주장 키리시마의 부재로 토요일 시합에서 배구부는 패한다. 아무 말도 없이 연락을 끊고 잠수한 키리시마 때문에 여친 리사는 분노하며 허탈해 한다. 키리시마와 늘 어울렸던 히로키와 친구들은 도대체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고민한다. 키리시마의 카리스마에 기대어 매일의 일상을 보냈던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을 돌아볼 시간을 얻게 된다. 히로키는 자신이 속한 야구부 선배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재능과 꿈을 돌아본다. 배구부의 키 작은 고이즈미는 키리시마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열정만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의 부족을 실감한다. 재능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또 있다. 배드민턴 동아리의 미카는 배드민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던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괴로워 한다. 미카는 비슷한 처지의 고이즈미에게 연민을 갖는다.

  영화는 학원물에서 빠질 수 없는 연애도 촘촘히 짜넣는다. 밴드부의 주장 사와지마는 히로키를, 마에다는 좀비 영화 보러 갔다 만난 카스미를 좋아하게 된다. 사와지마가 히로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열심히 연주하는 곡은 엘가의 '사랑의 인사'다. 그러나 히로키는 그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마에다의 경우도 마찬가지. 영화는 그 또래 아이들이 겪는 짝사랑의 내밀한 감정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사와지마와 마에다는 또래 집단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자리한 내성적인 아싸(아웃사이더)의 초상을 보여준다. 마에다의 영화 동아리방이 비춰지는 장면이 흥미로운데, 그곳은 검도부 방의 구석진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그나마 그들에게 학교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동아리 활동이다. 사와지마는 밴드부 주장으로, 마에다는 감독으로 영화 촬영에 최선을 다한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는 지금은 일본의 인기 배우로 자리잡은 이들의 신인 시절의 모습들을 즐겁게 볼 수 있다. 또래 집단의 인싸와 아싸에 대한 묘사를 비롯해 연애와 진로에 대한 고민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그 나이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희미하고 흐릿하게, 그리고 흔들려 보였다. 어쩌면 그렇게 흔들리면서 걸어가는 것이 청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다. 감독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여배우와 결혼할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지만,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영화를 찍는다는 마에다의 말은 청춘의 특권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그 시간은 먹고 사는 일에 매몰되지 않은, 어쩌면 좋아하는 것과 온전히 머물 수 있는 인생의 짧은 순간인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영화의 마지막에 마에다가 학교 옥상에서 좀비 영화를 찍을 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 2막에 나오는 '엘자의 대성당의 행렬(Elsa's Procession to the Cathedral)'이다. 사와지마의 밴드부 연주로 들려지는 이 곡은 마에다가 찍는 음울한 좀비 영화와 기묘하게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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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말이 있다. 미하일 롬(Mikhail Romm) 감독의 1962년작 '1년의 9일(Nine Days in One Year)'은 수포자가 아니라 '물포자(물리 포기자)'가 보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들이 참으로 많이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은 핵물리학자로 그의 주변 인물들도 물리학자들이다. 그들은 결혼식 연회장에서도 중수소의 양과 우주 여행을 주제로 냅킨에 계산까지 해가며 불꽃 튀기는 논쟁을 벌인다. 영화는 과학 연구에 자신의 삶을 내던진 젊은 과학자 구제프의 1년, 그 가운데 9일 보여준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이어진 기간이 아니라, 구제프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날들만을 뽑은 것이다. 미하일 롬은 냉전 시대를 살아가는 핵물리학자의 눈을 통해 과학과 인간의 관계, 과학적 발견과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핵 융합 연구소 연구원인 구제프는 스승 신초프와 함께 실험을 하다 방사능에 피폭되는 사고를 겪는다(1일). 치사량의 방사능에 피폭된 스승은 사망하고, 구제프도 더이상의 피폭은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를 듣는다(2일). 그럼에도 그는 연구에의 열정을 멈출 수가 없다. 구제프와 친구 쿨리코프 사이에서 갈등하던 롤리야는 구제프와 결혼한다(3일). 그러나 일상의 모든 것을 연구에만 쏟는 구제프의 모습에 롤리야는 소외감을 느낀다(4일). 연구에 매진하던 구제프는 마침내 중성자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지만(5일), 그것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아서 연구는 답보 상태에 빠진다(6일). 구제프는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아 아버지를 만난다(7일). 실험 과정에서 또 다시 피폭을 겪은 그는 병이 심해지며(8일),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그는 골수 이식 수술을 기다린다(9일).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나는데, 그렇게 구제프의 인생에서 힘겨웠던 1년의 시간을 돌아본다.

  1960년대 소련이 이룬 과학적 발전은 눈부셨다. 1961년, 유리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인으로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군비 경쟁 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1년의 9일'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과학자의 삶을 확대해서 보여준다. 구제프는 학자로서 매우 금욕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미하일 롬은 연구소와 구제프의 집을 매우 미니멀리즘적인 세트로 구성했다. 연구소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장소는 연구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지하 통로이다. 복잡한 전선줄이 얽혀있는 어두운 지하 복도는 연구원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연구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는 곳이기도 하다. 과학이라는 신성한 사원을 지키는 사제들처럼 연구원들은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 연구소의 분위기는 구제프의 신혼집 살림살이에서도 볼 수 있다. 가스 스토브와 식탁, 찬장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부엌, 다른 가구가 없는 침실은 정감있는 집이 아니라, 숙식을 해결하는 하숙집 같다는 느낌을 준다.

  구제프는 자신의 연구가 핵폭탄과 같은 대량 살상 무기가 아니라 원자력 에너지로 쓰일 거라는 긍정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연구에 매진할수록 아내를 비롯해 주변과 단절된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구제프에게 중성자 연구가 핵폭탄 제조에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구제프도 자신의 연구가 가진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는 과학자로서 자신이 해야할 임무를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구제프와 상반되는 지점에 서있는 회의론자 쿨리코프는 이전의 과학 발전이 전쟁 무기 개발(독가스와 원자 폭탄)과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흐루시초프의 '해빙기(Thaw era)'에 만들어진 영화로서 '1년의 9일'은 나름의 균형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미하일 롬은 과학 연구에 헌신하는 구제프의 모습을 과학자의 순수한 이상으로 상정한다. 연구소 동료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들도 물리학적 주제들로 그들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제프의 과학에 대한 열정은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로 걸게 만든다. 그는 피폭으로 쇠약해져서 수술대에 오른다. 개를 대상으로 치료 성과가 입증된 것이어서, 그가 수술을 해도 산다는 보장은 없다. 영화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숭고한 과학자에게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 '해빙기'라고 해서 검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본에서는 피폭으로 실명한 구제프가 어머니의 묘를 참배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그 장면은 삭제되었다. 어쨌든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인민들에게 희망에 찬 결론을 보여주는 쪽을 선호했다.

  이 영화를 만들 무렵, 미하일 롬은 이미 지난 시대의 구세대 감독으로 기억되었다. 그는 VGIK(러시아 국립 영화 학교)에서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젊은 세대의 제자들을 길러내는 교육자로서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그러나 롬은 이 영화로 자신이 가진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다시 한 번 입증해 보인다. 그가 그린 냉전 시대 과학자의 초상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다소 경직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1년의 9일'은 독특한 소재로 그가 살던 시대의 과학적 진보에 대한 믿음, 인류애를 가진 과학자들의 열정, 국가 주도의 과학 연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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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이혼이 다 나쁜 건 아니에요. 난 우리 부모님이 이혼한다고 했을 때 비로소 마음이 놓였어요."

  부부의 첫째 딸은 부모의 이혼을 그렇게 회고했다. 매트 리들후버 감독의 2020년작 다큐 'My Darling Vivian'은 미국 컨트리 음악의 전설 조니 캐시(John R. Cash)의 숨겨진 가족사를 이야기한다. 조니 캐시와 두 번째 부인 준 카터와의 러브스토리는 영화 '앙코르(Walk the Line, 2005)'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비비안 리베르토가 바로 이 다큐의 주인공이다. 그들 부부의 4명의 딸들은 부모의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과 어머니의 인간적 모습에 대해서 증언한다.

  유명인과 그 가족들의 실제 삶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다큐가 들려주는 비비안의 삶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의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17살의 비비안은 잘 생긴 공군의 구애를 받는다. 짧은 연애 기간 후, 독일로 파병된 남자는 3년 동안 엄청난 러브레터를 보낸다. 그리고 그가 귀환했을 때, 비비안은 그와 결혼한다. 세일즈맨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던 여자의 남편은 노래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수가 된다.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이 신인 가수는 곧 스타덤에 오른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이 활약했고, 영화도 찍었으며, 꽉 짜인 공연 스케줄로 집에 들어오는 날은 거의 드물었다. 그 사이 여자는 4명의 딸들 엄마로 바쁘고, 외롭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기치 않은 삶의 변화. 숲 속에 지은 대저택에는 수시로 방울뱀과 야생동물이 출몰했다. 여자는 산탄총을 들고 방울뱀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극성 팬들은 집 주소를 알고 찾아와 밤낮으로 문을 두들겨 댔다. 내성적인 성격의 비비안에게 그러한 변화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거기에다 그 시대 유명인들이 거쳐가는 안좋은 인생 행로를 남편은 걸어가고 있었다. 약물 중독이었다. 각성제를 비롯한 여러 약물에 중독된 자니 캐시는 멕시코에서 약물을 밀반입하려다 체포된다. 언론에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비안은 그런 남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가 신문에 크게 사진이 실린다. 남편은 곧 풀려났지만, 그 일의 불똥은 엉뚱하게 튄다. 비비안의 외모를 두고 흑인이 분명하다며 온갖 추측이 쏟아진다.

  이 다큐를 보는 이들은 사진과 영상으로 제시되는 비비안의 외모에서 흑인 혼혈의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비비안의 부모와 형제는 모두 백인이고 오직 비비안만이 그들과 구별되는 외모와 피부색을 가졌다. 공공연한 인종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1960년대, 유명 컨트리 가수의 부인이 흑인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비비안의 외증조모가 흑인 노예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KKK단을 비롯해 극성 팬들은 비비안과 가족에게 협박을 가했고, 조니 캐시의 공연을 보이콧하기도 했다. 비비안은 그 모든 것과 홀로 맞서야 했다. 조니 캐시도 곤경에 처했지만, 그는 결혼 생활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첫째 딸의 회고대로 정말로 좋은 이혼이었을까? 어쨌든 남자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컨트리 가수와 재혼해서 경력의 성공가도를 달린다. 비비안도 재혼하지만, 딸들의 부양은 전적으로 비비안의 몫이었다.

  4명의 딸들은 신산스러웠던 어머니의 삶을 돌이켜 보며 회한에 젖는다. 그들은 어머니 비비안에게 전적인 연민만을 보이지 않는다. 불행했던 결혼 생활에 정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비비안은 딸들에게 그렇게 충실한 엄마 노릇을 하지는 못했다. 아이들은 서로를 보살피며 컸고, 불안정한 엄마를 보면서 늘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엄마가 한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고통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한다. 남편이 재혼한 여자가 전처의 딸들을 자신이 다 키우고 있다며 뻔뻔하게 언플할 때, 남편이 죽은 뒤에 성대하게 열렸던 추모 음악회에서 그 여자 준 카터가 조니 캐시의 유일한 동반자로 칭송받을 때, 비비안의 슬픔과 분노는 클 수 밖에 없었다. 비비안은 손자들을 보살피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한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행복을 찾았다. 그렇게 조니 캐시의 첫 번째 아내는 공식적으로 잊혀졌다.
 
  딸들이 어머니의 삶에 대한 공식적 복원에 적극적이었던 배경에는 영화 '앙코르'가 있었다. 사실과는 다른 영화 속 비비안에 대한 묘사는 딸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준 카터는 약물에 절은 조니 캐시를 구원한 음악적 동반자이며 연인으로 각인되었지만, 비비안은 정서불안의 철없는 아내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더스틴 티틀은 비비안의 손자로 할머니의 삶을 복원하는 이 다큐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다큐는 유족들이 소장한 편지, 사진, 비디오 자료들을 통해  비비안 리베르토의 인간적 모습을 차근차근 되살려낸다. 이 다큐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 '앙코르'의 원제 'Walk the Line'이 가진 역설에 대해서도 알게된다. 그것은 조니 캐시의 노래 제목 'I Walk the Line'에서 따온 것으로, 그 노래는 사실 비비안에 대한 연가로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조니 캐시가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래서 잊혀지길 바랬던 첫 번째 부인 비비안. 'My Darling Vivian'은 한 남자를 사랑했었고, 그 사랑 때문에 상처받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한 여성의 삶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다음 글은 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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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선생님이 노숙자라고 하던데, 정말 그래요?"
  "아니, 난 노숙자(homeless)가 아냐. 그냥 집이 없는 것(houseless) 뿐이야."

  한때 학교 보조 교사로 일했던 여자는 오랜만에 만난 학생에게 그렇게 대답한다. 중국계 미국인 감독 클로이 자오의 2020년작 '노매드랜드(Nomadland)'는 집을 떠나 길 위의 삶을 택한 중년 여성 펀(Fern)의 이야기를 담는다. 원작은 2017년에 출판된 제시카 브루더의 동명 논픽션으로, 클로이 자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색을 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펀'이라는 캐릭터와 이야기는 자오의 창작물인 셈이다.

  펀이 오랫동안 살던 석고 광산 도시 엠파이어는 광산의 폐쇄와 함께 도시로서의 운명도 끝난다. 암에 걸린 남편의 죽음을 겪으며 펀은 밴 한 대에 자신의 삶을 담아 길을 떠난다. 영화는 온갖 일용직을 전전하며 노매드(nomad)의 삶을 고수하는 펀의 여정을 보여준다. 무려 1시간 50여분에 이르는 이 영화는 줄거리라고 할 것이 없다. 펀이 하는 다양한 일들, 아마존의 물류창고 일, 드러그 스토어 점원, 캠핑장 청소일, 햄버거 음식점 주방일 등이 마치 씨실처럼 직조된다. 날실은 길에서 만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펀이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광대한 미국 자연의 풍경도 정말 멋진 배경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나? 맞다. 이 영화는 음악이 꽤 좋다. 나중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니 현대 음악 작곡가로 잘 나가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이름이 뜬다. 그가 들려주는 음악은 명상적인 울림을 준다. 정말 그 뿐이다.

  '노매드랜드'는 작년 한 해 동안 아카데미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를 휩쓴 영화이다. 나는 도대체 이 영화의 어디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찾아낼 수 없었다. 경제적 기반의 붕괴와 남편의 죽음. 여자는 그렇게 길을 떠났고, 길 위의 삶에도 잘 적응했다. 영화는 펀이 만나는 노매드들의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현시대 미국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늘어놓는다.

  "나는 이 삶이 마음에 들어요. 자유롭고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과연 실제 길 위의 삶이 그토록 충만하고 낭만적이며 평화로운 경험으로만 채워질까? 영화는 펀이 계속 일자리를 찾아다니며 생계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거주가 불안정한 여성이 겪는 위험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여성 노숙자들이 드문 이유는 성적 위협과 착취가 매우 현실적인 위험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평화로운 노매드 공동체의 모습은 실제의 현실을 탈색시킨 것이다. 길 위의 삶은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어나갈 수 없다. 치안을 비롯해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느냐의 문제,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고도 변수로 작용한다. 이 영화의 처절한 지루함에 몸이 뒤틀릴 무렵, 펀에게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펀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밴이 고장난다. 영화 시작 후 1시간이 지났을 무렵이다. 나는 그제서야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다.

  펀은 차 수리비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결국 펀의 선택은 여동생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여동생은 돈도 빌려주고, 같이 살자고 제안도 한다. 아들 내외와 함께 살게된 마음 맞는 노매드 데이브도 펀에게 진짜 '집'에서 살자고 말한다. 그러나 펀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 이 여자는 결코 절박한 처지의 노숙자가 아니다. 클로이 자오는 길 위의 삶을 이상적으로 포장한다. '집'으로 상징되는 물질에 매몰된 삶을 '죽은 것'이란 메시지를 보여줌으로써, 펀의 선택은 진정한 자유와 생의 의지에 대한 표현이 된다. 그것은 여동생의 집에서 지인들과 나눈 주택 구매에 대한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펀은 집을 사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란 자신의 미래를 건축물에 매몰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매드랜드'는 기꺼이 삶의 불안정성을 끌어안고 진정한 내적 자유와 평화를 위한 대안적 삶의 방식을 찾길 요구한다. 그것이 노매드의 삶이라고 추켜세우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거친 현실과는 다르게 매끄럽게 가공되어 있으며 그저 얄팍한 성찰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작년 한 해에 이 영화가 그토록 세간의 화제가 된 이유는 전례없는 전염병의 시대에 줄어든 영화 제작 편수, 그리고 이 영화의 풍광이 보여주는 감상적 위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클로이 자오의 이 영화는 지루하고, 생기도 없으며, 경박스럽다. 한가지 더, 아마존 물류 센터의 급여가 '꽤 괜찮다'고 말하는 펀의 대사는 정말이지 끔찍하다. 아마존이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혹독한 조건의 노동 환경을 제공하는 기업인지 클로이 자오는 정말 몰랐을까? 떠오르는 젊은 거장이라고 칭송받는 이 여성 감독은 정치 감각과 현실 타협 능력만큼은 대단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empireonl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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