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야쿠쇼 코지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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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밝은 미래"를 통해서였다. 원래 공포물은 좋아하지 않는지라 기요시 작품을 볼 기회가 있었어도 번번히 외면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그 영화는 독특한 영화보기의 체험을 제공해주었다. 딱히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호한 감성과 독자적인 세계관이 그 작품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기요시 감독의 작품을 하나 둘씩 보기 시작하다가 DVD로  "강령"을 만났다.

 

  "강령"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준코의 눈에 보이는 귀신들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인간 내면에 도사린 그릇된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영화는 매우 극명하게 드러낸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향해 치닫게 만드는 동인은 평온한 일상 속에서 아무런 사심이 없어 보이는 준코 내면의 명예와 부를 탐내는 근원적 욕망이었던 것이다. 

 

  사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점으로 치자면 별 다섯을 다 주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영화가 갖는 완성도는 뛰어나다. 그러나 DVD 자체의 상품성만을 두고 본다면 별 세개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는데, 무엇보다 서플먼트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별 한개를 선선히 더 주게 만드는 것은 기요시 감독이 내한했을 때, 관객과의 대화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강연에 있다. 서플먼트에 실린 것은 편집된 것이기는 해도 기요시 감독의 영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호러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향해 말을 걸고 소통을 시도하는 기요시 감독의 모습은 구도자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호러물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하고 싶은 사람, 그들 모두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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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취향이라는 것은 얼마나 변덕스러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사부의 영화 “포스트맨 블루스”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나에게 이 감독의 세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잘려진 손가락이 영화에서 수시로 나온다거나, 킬러와 야쿠자, 살인 장면의 반복적인 노출이 그렇게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 세계를 조금씩이나마 탐험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배우 “츠츠미 신이치” 덕분이다.

  츠츠미 신이치는 사부의 영화 “하드 럭 히어로(2003)”와 “행복의 종(2002)”을 제외한 전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감독과 배우가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서로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츠츠미 신이치는 사부의 영화세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자이자 후원자로 자신의 연기 영역 뿐만 아니라 사부 감독의 영화적 역량을 극대화시키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그를 사부의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된 “탄환 러너(1996)”는 사부의 이름을 전세계 영화계에 알리는 신호탄 같은 작품이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세 명의 인물들은 쫓고 쫓기면서 달리는 과정 속에 각자의 욕망을 응시하고 스스로를 성찰하게 된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의 대부분은 달리는 신이 차지하고 있다. 속도감 넘치는 영화적 전개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두는 사부 영화의 특징은 1997년작 “포스트맨 블루스”에서도 빛난다. 

 

  인간의 육체가 지닌 능력을 극단으로 밀어붙여서 시험이라도 하듯 이 영화에서 츠츠미 신이치는 자전거와 하나가 되어 달리고 또 달린다. 평범한 우편 배달부가 예기치 못한 우연한 사건으로 희대의 살인범으로 몰려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거기에 사부만의 이야기 작법과 유머 감각이 들어가면서 영화는 독창성과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소한 사건이 오해를 낳고, 그 오해가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동인이 되는 이야기 구조는 “포스트맨 블루스” 뿐만 아니라 사부의 또 다른 영화 “먼데이(1999)”와 “드라이브(2001)”에서도 볼 수 있다. 

 

 

  “먼데이”와 “드라이브”의 주인공들은 별다른 희망이나 기대도 없이 매일매일의 익숙해진 일상에 지쳐있는 소시민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날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이전과는 다른 극적인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다. “먼데이”의 주인공은 평범한 회사원에서 나중에는 인류의 진정한 평화를 역설하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려는 인물로 변화하는가 하면, “드라이브”의 제약회사 영업사원은 은행 강도들에게 인질로 잡히는 시련을 겪는 동안 자신의 나약함과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의 또 다른 영화인 “언럭키 몽키(1998)”는 사부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단지 인간성에 관한 탐구뿐만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인 사회 문제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꾼에서 더 나아가 설득력을 갖는 사회적 메시지까지 담아내는 영화작가로서의 사부의 면모는 그의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언럭키 몽키”에서 츠츠미 신이치가 분한 은행 강도는 공청회장에서 자본주의의 추악한 일면과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일장의 연설을 하고, “드라이브”에서 테라지마 스스무가 비판적 가사의 랩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장면이 그것이다. 

 

  "행복의 종(2002)”은 전형적인 사부 영화의 틀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츠츠미 신이치 대신 역시 사부 영화에서 자주 얼굴을 보이는 배우 테라지마 스스무를 주연으로 한 이 영화는 공장폐쇄로 실직한 노동자가 삶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전의 사부 영화들을 보아온 이들이라면 이 영화가 과연 사부가 만든 것인지 의문을 품게 만들 정도로 “행복의 종”은 평탄한 이야기 전개와 다소 밋밋한 결말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작품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지칠 줄 모르고 달려온 사부가 자신을 돌아보는 중간 휴식 지점의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03년에 인기 절정의 아이돌 그룹 V6의 뮤직비디오 의뢰를 받고서 만든 영화 “하드 럭 히어로”는 이제 사부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가 앞으로 들고 나올 영화가 어떤 모습일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사부만의 독창성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부의 영화에 열광하는 이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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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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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서가에는 사두고 미처 읽지도 못한 책들이 있다. 작가를 보고, 또는 대강의 줄거리를 보고, 무슨 수상 경력이며, 괜찮다는 서평을 읽고서 사모았던 책들을 보면 때로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단지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그 책들이 방치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재미가 없어서"라는 것이 가장 솔직한 이유일 것 같다.

 

  "재미가 없다"라는 말에는 책이 읽히지 않는 그 모든 요인들이 담겨져있다. 예를 들면 어설프게 잘못된 번역이라던가, 눈에 익숙하지 않은 활자나 편집 형태 같은 것에서부터 지루한 이야기 전개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아주 아주 "재미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한번 책을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꼼짝않게 만들만큼의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아주 재미있어서 열심히 읽는다. 읽는 동안 이야기 속에 빠져서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뿐이다. 다 읽고나니 뿌듯한 감동이나 마음의 여운 같은 것은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려서 찾을 수가 없다.

 

  이 책을 읽고난 지금 난 무척 우울해진다. 새삼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생각한 소설은 단지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갖고 있는 것이 나는 소설이라고 믿는다. 그런 내 믿음은 이제 폐기되어야할 시점이 된 것일까? 천명관의 "고래"는 내게 우울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듯 하다.

 

  이야기, 무한하게 자기를 복제하며 재미를 창출해내는 이야기로의 회귀가 소설의 미래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나는 이제까지 소설의 정의나 작가의 사회적 책임, 더 나아가 소설의 미래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어쩌면 그러한 고민을 내게 안겨주기 위해 "고래"가 내게로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유일한 수확이라면 수확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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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 1주일 전에 약혼자에게 채인 고등학교 교사 료스케, 자신 없는 무료한 일상에 지쳐있는 호텔직원 미칸, 오래전 이혼한 후 규동집을 운영하며 아무런 희망없이 홀로 지내는 미도리카와, 전업주부로 남편과 아이들에게 외면당한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갖는 오리에, 재혼한 엄마와 계부를 인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와타루, 부모님이 정해준 인생행로를 거부하며 집을 뛰쳐나온 부잣집 딸 아이,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공허한 내면을 지닌 이치로, 서로 다른 사연을 지닌 이 일곱 명의 사람들은 어느날 규동 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모두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그것은 사랑일까? 드라마의 제목 "사랑이 하고 싶어x3"인 것만 본다면 그들이 찾는 것이 연인에 대한 사랑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단순하게 연인을 찾는 과정으로 직진하지 않는다.

  "사랑이 하고 싶어x3"의 이야기는 료스케와 아이, 미칸의 삼각구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딱히 누구를 주연배우로 볼 것인가를 말하기가 어렵다. 일곱 명의 인물들이 가진 이야기는 회를 거듭하며 균등하게 전개된다. 각각의 인물들이 한회의 내래이션을 이끌어가면서 자신의 삶과 그것에서 이끌어낸 성찰을 마치 일기를 쓰듯 풀어내는 점도 인상적이다.

  일곱 명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외치고 있다. "외롭다. 외로워서 미칠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고 함께 하고 싶다." 이 외침은 만남을 갈구하게 되고 그래서 인물들은 새로운 만남 속에서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자신이 찾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대면한 것은 연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의 선택으로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문하고 성찰한다. 마침내 그들은 알게 된다.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음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임을...

  이 드라마가 결국 보여주는 것은 연인을 찾아 떠나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길을 진지하게 묻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스스로의 모습과 삶에 자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는 이에게 사랑은 또 다른 짐일 수 밖에 없으며 혼란스러움을 더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일곱 명의 인물들은 다른 이를 사랑하기에 앞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임을 깨닫고 그 길을 찾아 나선다. 결국 자신의 내면을 채워줄 그 무언가를 열렬히 찾아 헤매던 그들은 답을 얻었다. 그제서야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진정한 사랑도 찾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드라마적인 설정만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회에서 료스케는 아름답게 변화된 미칸을 바라보며 외친다.

  "네가 지금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너 자신과 너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일 거야."

  어쩌면 료스케의 이 말은 자신의 길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고픈 소중한 격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이 하고 싶어x3"의 인물들은 진정한 사랑이 하고 싶은 이들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아주 평범해 보이지만, 그래서 놓치기 쉬운 진실에 관한 것이다.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내 삶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라야 사랑은 찾아오는 것임을, 아니 발견할 수 있다는 진실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는 이들의 마음 속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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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 따위는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시대적 배경은 1940년, 검열관 사키사카는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에게 올라오는 희극 대본을 철저히 검열하여 어떻게든 극장에서 상연되는 것을 막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희극작가 츠바키라는 강적이 나타난다. 웃음의 요소를 배제시키려고 온갖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검열관에 맞서 츠바키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더 웃기는 내용을 넣은 희극을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웃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검열관은 공동 창작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웃음의 대학(호시 마모루 감독, 2004년)에 나온 희극작가 츠바키를 괴롭히는 것은 검열관으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이다. 개인이 자유롭게 웃을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하려는 거대 권력에 맞서려는 츠바키의 무기는 오직 글 뿐이다. 그가 고치고 삭제하라는 검열관의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는 것은 어찌보면 권력에 순응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식으로는 자신의 글을 관객과 만나게끔 하려는 강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다. 츠바키에게는 쓰고 또 쓰는 것이 곧 저항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의 열정은 마침내 검열관의 마음마저 움직인다. 강제 징집 영장을 받고 떠나는 그에게 검열관 사키사카는 외친다. 나라를 위해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반드시 살아 돌아와서 멋진 희극을 함께 공연하자고...

  브로드웨이를 쏴라(우디 앨런 감독, 1995)에 나오는 극작가 데이빗을 괴롭히는 것은 국가권력이 아닌 돈, 바로 자본이다. 자신의 작품을 상연하는 데에 필요한 돈을 구하지 못해 고생하던 그는 마피아 두목을 제작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상연을 댓가로 두목은 자신의 애인을 주연 배우로 써줄 것을 요구하게 되고 그 순간부터 데이빗의 연극은 예측 불허의 결말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대사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올리브, 연극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올리브의 경호원 치치, 배우들 간의 불화, 그 와중에 주연배우 헬렌과 사랑에 빠져버리는 데이빗... 이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데이빗은 무력하기만 하다. 그런 그가 도움을 받게 되는 사람은 바로 치치. 16살 때부터 갱으로 살아온 치치는 자신의 처절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극 대본에 생기를 불어넣고, 연극은 데이빗이 아닌 치치의 것이 되어간다. 

  하나의 연극 상연을 두고 결국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을보면서 데이빗은 절망하며 브로드웨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예술이란 잔혹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다. 데이빗이 느끼는 참혹한 심정은 어댑테이션(스파이크 존즈 감독, 2002)의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에게 이르면 좀 더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그물망 속으로 들어온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글쓰기에 좀 더 솔직하게 자신을 던질 수 없었던 그는 "난초 도둑"이라는 책을 각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좌절감과 회의에 휩싸인다.

  그와는 달리 여유있고 낙관적인 쌍둥이 동생 도널드는 그냥 한번 써본 대본으로 제작자들에게 극찬을 받게 되는데, 동생의 성공에 대한 질시와 벽에 부딪힌 각본 작업으로 찰리는 점점 더 괴로워할 뿐이다. 도널드는 어떻게든 형을 돕고자 "난초 도둑"의 원작자인 수잔을 만나서 인터뷰를 시도하게 되고, 그들 형제는 수잔과 수잔의 책에 나온 실제 주인공 라로쉬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얽히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의 만남은 도널드의 죽음으로 끝나게 되고, 찰리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써야하는지, 어떻게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이 세 편의 영화에 나타난 작가의 초상은 참으로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깨끗한 책상에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라는 불구덩이 속에서 스스로를 던져 소진시키면서 자신의 글을 건지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초상에는 기쁨 보다는 슬픔이, 여유보다는 쫓기는 초조함이, 희망 보다는 불안과 우울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과연 이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애초부터 작가들은 그런 것을 누군가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단 하나의 것만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을 따름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죽은 후에도 남을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모든 것을 말하고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러기 위해 치루어야할 댓가가 무엇이든 간에 글쓰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세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방식이기는 해도 작가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탐색해가며 진솔한 초상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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