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자매는 도로변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은 참 배달이 발달했어... 저 멀리 도로에 서있는 쿠* 배송 트럭이 보인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지내다 잠깐 한국에 들어온 상옥(이혜영 분)은 고국의 모든 것이 낯설다. 좀 트였다 싶은 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동생 정옥은 미국보다 한국이 살기 좋다며 아파트 하나 사서 여기서 살자고 말한다. 동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입주 때보다 2억이나 올랐다며 신나한다. 말 나온 김에 근처 아파트 공사 현장까지 둘러보자고 한다. 상옥이 보기에는 엄청 비싼 아파트, 여기 사람들은 참 돈도 많아...

  홍상수의 '당신 얼굴 앞에서(In Front of Your Face, 2021)'는 중년의 은퇴 여배우 상옥의 하루를 따라간다. 이런 구성은 홍의 2011년작 '북촌 방향(The Day He Arrives, 2011)'과 유사하다. 대구에서 교편을 잡은 영화 감독 성준(유준상 분)은 아주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온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하는 거다' 성준은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를 시작하며 그렇게 다짐한다. 과연 성준은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당신 얼굴 앞에서'의 상옥은 수시로 경건한 기도문을 읊조린다. 과거와 내일은 없으며 오직 이 순간만이 존재합니다. 이곳에 천국이 이미 와있습니다. 미래의 악몽에서 구해주시고, 항상 여기에 머물게 하소서... 마치 신앙고백같은 상옥의 말들은 자연스럽다기보다 의지적인 다짐으로 들린다.

  '북촌 방향'의 성준이 영호 형(김상중 분)과 만나서 '소주'를 마신다면, 상옥은 영화 감독 재원과 '배갈'을 들이킨다. 술이 들어가면서 홍의 인물들의 속내와 과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상옥의 감사 기도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옥은 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재원의 부탁을 거절한다. 자신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이제, 상옥의 여정이 명확히 이해된다. 약속 장소인 인사동으로 가기 전에 상옥은 이태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어렸을 적에 살았던 집을 둘러본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죽을 때가 되면 누구든 고향을 그리게 된다. 동생과 조카를 만나고, 어린 시절의 집을 찾아보고...

  상옥이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듯, 성준도 이전에 서울에서 지내던 자신의 행적을 복기한다. 지저분하게 끝난 연애, 출연료 아끼려고 치사하게 지인 배우를 내친 일... 상옥과 성준은 마치 영혼의 쌍둥이 같다. 성준은 술 마시다 말고 피아노로 쇼팽의 녹턴을 연주한다. 상옥도 취기가 올라오자, 기타로 바흐의 미뉴엣을 연주한다. 성준이 술자리에서 설파하는 개똥 철학은 자못 진지하다. 우연과 확률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현실이 놀랍고 신기하지 않냐고 침을 튀겨가며 떠든다. 그런가 하면, 상옥은 생판 처음 본 감독에게 17살 때 죽으려 했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때 서울역 광장에서 마주친 이들의 얼굴이 갑자기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고. 얼굴 앞의 세상을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거기에서 천국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제목 '당신 얼굴 앞에서'는 상옥의 그 말에서 나왔다.

  상옥에게 배우란 직업은 잘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단서는 작은 다리 밑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조용히 담배를 피우는 상옥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이 내성적인 여성은 돈을 벌고 모으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동생 정옥은 언니가 미국 생활 동안 모아놓은 돈이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상옥은 미국에서 Liquor Store를 했던 이유를 들려준다. 큰돈을 벌지 못해도 단골 손님만 있으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에 무심한, 그렇게 사람에게도 무관심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피붙이인 정옥과도 소식을 끊은 채 살았다. 정옥은 어떻게 그동안 연락도 안하고 살 수 있었냐고 상옥에게 분을 터뜨린다. 그런 상옥에게 '시한부' 선고가 내려진다. 남은 시간 동안 현재에 충실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자, 고 결심한다. 자신에게 지갑을 선물한 조카의 마음, 길 가다 사진을 찍어준 여성의 친절, 손님에게 열쇠를 맡긴 술집 주인의 신뢰와 배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상옥은 처음 만난 재원에게도 순수하게 대하며, 그의 지분거림도 깔끔하게 받아넘긴다.

  전날의 숙취가 아직 남아있는 아침, 재원의 음성 메시지에 상옥은 잠이 깬다. 재원은 상옥에게 당장 지방에 가서 단편이라도 찍자고 약속을 해둔 터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고, 미안하다고, 행복하시라고 말을 남긴다. 상옥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상옥의 발작적인 웃음은 경박스럽고 위선적인 인간, 부박한 삶에 대한 경멸과 조소처럼 보인다. 성준의 북촌 체류기가 원래의 다짐을 비켜가듯, 상옥의 한국 체류기도 그렇게 감사의 기도문에서 멀어진다. 

  젊은 감독은 나이든 중년의 여배우로, 피아노는 기타로, 북촌은 이태원과 인사동으로, 우연의 현실은 얼굴 앞의 천국으로 바뀌었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홍상수가 지나온 10년의 세월을 그렇게 품는다. 이제 그의 나이는 병고와 죽음을 좀 더 많이 생각할 때이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누그러진 홍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이 홍상수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홍의 영화는 '따뜻함'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서 홍상수가 보여준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젊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 '나이듦'은 영화가 가진 다른 면모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젊은 시절부터 홍상수의 영화를 지켜봐왔던, 함께 나이들어가는 그의 관객들에게 '당신 얼굴 앞에서'는 느긋한 쉼표처럼 느껴진다.  


*사진 출처: slant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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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배우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이혼은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이루어졌다. 영화 제작자였던 여배우의 남편은 곧 다른 여배우와 결혼했다. 연기뿐만 아니라 연출에도 재능이 있었던 여배우는 자신의 영화를 찍기로 한다. 제작과 시나리오는 전남편이, 주연은 전남편과 재혼한 여배우가 맡았다. 'The Bigamist(1953)'은 정말 특이한 영화이다. 뭔가 한자리에 있어도 껄끄러울 것 같은 세 사람이 같이 영화를 찍었기 때문이다. 여배우는 Ida Lupino, 전남편은 Collier Young, 전남편과 결혼한 이는 Joan Fontaine이다. 영화는 '중혼자(重婚者)'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아내를 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줄거리이다. Ida Lupino는 연출도 하고 연기도 했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 필리스 역을 맡았다.

  냉장고 판매 사업을 하는 해리와 아내 이브는 입양을 결정한다. 이브는 불임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다. 입양 기관의 조사 담당관 조단은 해리에게서 미심쩍은 느낌을 받는다. 해리의 주변을 탐문하던 조단은 LA로 출장을 간 해리가 아기와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단이 중혼죄로 경찰에 신고하려던 순간, 해리가 이를 말린다. 해리가 조단에게 털어놓는 과거는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이 남자는 어쩌다 딴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두게 된 것일까...

  이 영화에서 해리 역을 맡은 배우 에드먼드 오브라이언은 미남 배우의 외모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배우 생활 내내 체중 조절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뭐랄까, 후덕한 인상의 동네 아저씨 같은 외모이다. 그런 그가 연기하는 '해리'라는 인물은 아내를 사랑하며, 결혼 생활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쓴다. 아내 이브는 해리의 일을 돕게 된 이후로 오히려 사업에 매진하고, 그런 아내에게서 해리는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에 그는 우연히 LA에서 알게된 필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중요한 것은 해리가 필리스와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여느 필름 느와르 영화라면 불륜에 빠진 남자 주인공이 여자와 공모해서 아내를 죽이려는 이야기로 나아갈 법도 하다. Douglas Sirk'Sleep, My Love(1948)'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가스등(Gaslight, 1944)'의 변형된 서크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부유한 상속녀 아내를 죽이려는 남자가 나온다. 매혹적인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난 남자는 아내에게 공포의 기억과 불안을 주입시켜서 자살에 이르게 하려고 한다. 이 사악한 남편의 살해 시도는 너무나도 필사적이다. 그와는 달리 'The Bigamist'의 해리는 책임감 있는 선량한 남자이다. 놀랍게도 그는 이브와 필리스를 모두 사랑한다. 이 남자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혼한 남자가 동시에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정말 비난받아 마땅한 일인가? 다소 선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 '불륜'이란 소재를 아이다 루피노는 아주 부드럽고 세련된 방식으로 다룬다. 당시 미국 영화의 자체 검열 기준인 'Hays Code'에 따르면 결혼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이야기는 암묵적인 금지에 해당되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에 나름의 근거와 이유를 가지고 있다. 불임인 이브는 입양으로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해리는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필리스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필리스는 아이를 가졌지만 유부남인 해리에게 그 어떤 책임이나 부담감을 지우지 않는다. 결국 해리는 'bigamist', 중혼자의 처지가 된다.

  당시 미국에서 '중혼죄'는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회 문제였다. 아이다 루피노가 그러한 이야기를 과감하게 자신의 영화로 만들기로 한 데에는 그런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루피노는 중혼자들을 단순히 매도하거나 악마화하는 대신에, 내밀한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킨다. 영화 속의 '해리'가 보여주듯, 착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중혼의 그물에 갇힐 수도 있다. 관객은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기이한 딜레마에 빠진다.

  루피노의 전남편 콜리어 영이 쓴 시나리오에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 부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마도 그는 영화 속 바람난 남편의 아내인 이브의 처지와도 같았겠지만,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이다 루피노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을 무렵에 그가 이미 조안 폰테인과 연애 중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는 이혼한 다음해에 폰테인과 재혼했다. 영화는 TV 프로그램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마지막처럼 법정 장면에서 끝난다. 아내와 필리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해리는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에게 슬픔과 고통, 수치심을 안겨주는 결과에 이른다. 'The Bigamist'는 불륜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죄악시하지도 않는다. 아이다 루피노의 관심사는 윤리적인 판단이나 비난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그것이 초래하는 현실의 파장에 있다.

  나는 비참하고 길을 잃은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죠. 


(She wanted to do films “with poor, bewildered people,” she once said, according to the New York Times. “Because that’s what we are.” - 인용문 출처 vanityfair.com)


  'bewildered'는 보통 '당혹스러운'이란 의미로 쓰인다. 또 다른 의미로 이 단어는 '심리적, 신체적으로 무너지고 상처입은'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아이다 루피노는 동시대 영화가 외면했던 주변부 사람들을 자신의 영화에 내세웠다. 대표작 'Outrage(1950)'는 강간 피해자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Never Fear(1950)'는 소아마비를 이겨낸 여성 댄서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영화는 배우 생활 중에 소아마비에 걸려 투병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다. 'Hard, Fast and Beautiful(1951)'에서는 착취적인 엄마에 시달리는 테니스 스타를, 'Not Wanted(1949)'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인 미혼모 문제를 다루었다. 루피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상처입었으며 어디로 갈지 몰라 길 위에 서있다. 영화 'The Bigamist'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불완전한 내면을 성찰한다. 

 
*사진 출처: cultfilmalley.com.au       아이다 루피노와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영화 'The Bigamist(1953)' 촬영장의 세 사람. 좌측부터 순서대로 조안 폰테인, 콜리어 영, 아이다 루피노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주연의 영화 'D.O.A.(195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somewhere-in-night1946-doa1950-no-wa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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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손뿐만이 아니라 다리도 잘라서 강물에 내던져야 한다."

  영화 '개의 심장(Heart of a Dog, 1988)'을 만든 Vladimir Bortko는 신문에 실린 평론가의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작가 Mikhail Bulgakov가 1925년에 쓴 원작 소설은 소련에서 오랫동안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 고르바초프 집권기에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을 타고 공식적으로 출판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은 소설을 가지고 TV 방영용 영화로 만들었다. 방영 후의 반응은 꽤 격렬했다. 저주에 가까운 혹평은 그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영화 '개의 심장'은 문학을 모범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영화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보르트코 감독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소련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세피아(sepia)'색의 필터를 끼워서 촬영했다. 누리끼리한 황갈색의 독특한 색감은 영화의 음울한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개의 시점 쇼트로 펼쳐지는 1920년대 소련의 풍경과 마주한다. 눈이 쌓인 황량한 거리에 사람들은 줄지어 서서 배급을 기다리고 있다. 1921년, 레닌은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한다. 1차 세계 대전에 이어 오랜 적백 내전으로 소련의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소련 인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사람이 그럴진대 개의 처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원작 소설 속에서 처음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바로 'Sharik'이라는 이름의 개이다. 샤릭은 필사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는 중이다.  

  굶주린 개 샤릭은 Filipp Filippovich Preobrazhensky 박사가 건네는 소시지 한 조각에 혹해서 따라간다. 회춘 시술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에게는 시커먼 속셈이 있다. 그는 샤릭을 자신의 의학 실험에 쓰려고 한다. 그렇게 박사의 아파트로 들어선 샤릭은 곧 가혹한 운명과 마주한다. 박사는 샤릭의 생식기와 뇌하수체를 제거한다. 그리고 샤릭에게 술집에서 칼에 찔려 죽은 발랄라이카 연주자 클림 추군킨의 몸에서 떼어낸 기관을 이식한다. 과연 박사가 만들어낸 괴이한 피조물 샤릭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원작 소설을 쓴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원래 직업은 의사였다. 그는 소련이란 국가의 탄생과 성장을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관점은 뒤틀리고 기이한 환상 문학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개의 심장'은 불가코프의 소련 체제 비판서나 다름없다. 검열 당국이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시 체제의 중심 구성원들이다. 7개의 방이 딸린 아파트에서 지내는 박사는 부르주아를, 거리의 개 샤릭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박사의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슈본더는 공산당을 대표한다.

  영화는 초창기 소련 체제에서 그 세 구성축이 어떻게 은밀하고도 격렬하게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부르주아의 삶을 영위하는 박사의 저녁 식탁에는 와인과 캐비어가 자리한다. 그는 우매한 민중과 그들을 조종하는 공산당에 대해 성토한다. 슈본더와 동료들의 공산당 지부에서는 장엄한 혁명가가 울려퍼진다. 그 사이에서 샤릭은 박사의 수술을 통해 개에서 조금씩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간다. 이 과정은 매우 극적이다. 짐승의 소리에 가까운 어, 으, 하는 비명을 내던 샤릭은 점차 인간의 말을 배워간다. 말을 하게 된 샤릭은 박사를 '아빠'로 불렀다가, 불같이 화를 내는 박사를 보며 '동무(comrade)'로 바꾼다. 천대받는 동물의 위치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적 각성을 하는 순간이다.     

  개에서 사람으로, 이제 샤릭의 이름도 바뀐다. Poligraf Poligrafovich Sharikov. 샤릭이 갖게 된 이름 '폴리그라프'는 '거짓말 탐지기'를 뜻한다. 피험자의 생리적 신체 반응을 기록하는 장치. 비유적인 의미에서 샤릭의 몸은 공산주의 사상과 체제의 실험장이다. 샤리코프의 존재로 박사는 일순간에 과학계의 스타가 된다. 그와 동시에 샤리코프는 박사의 안정된 일상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노숙자들을 끌고 와서 집안에서 술을 퍼먹는다. 고양이(개였을 때 샤릭은 고양이를 싫어했다)피한다고 욕실로 숨었다가 수도꼭지를 파손시켜 박사의 집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샤리코프가 보여준 파괴적이고 저속한 행동은 박사와 조수 보르멘탈을 경악하게 만든다.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면서도 자신만의 각인을 새겨넣는다. 바로 무성 영화를 활용한 장면이다. 영화의 초반부, 떠돌이개 샤릭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타이피스트 아가씨가 나온다. 이 가난한 아가씨는 틈만 나면 영화관에 가서 무성 영화를 본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이러한 장면은 민중을 현혹하는 거대한 환영(幻影)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암시한다. 이는 나중에 샤리코프가 공산당원이 되어 열성적으로 일하는 장면이 무성 영화로 제시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박사가 만든 괴이한 생명체 샤리코프는 이제 박사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아니, 박사가 혐오하고 경멸하는 슈본더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다. 박사는 엥겔스와 카우츠키의 서신을 읽고 있는 샤리코프를 보게 된다. 샤리코프는 더이상 개가 아니다. 단지 '말'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정치적 발화'를 할 줄 아는 존재가 된 것이다.

  '개의 심장'에서 '거울'은 의미심장한 영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개의 모습일 때의 샤릭이 보는 거울, 수술을 통해 인간 샤리코프가 된 후 바라보는 거울. 박사가 만들어낸 이 괴생명체는 개인가, 인간인가? 관객은 거울 속 존재의 내면에 자리한 다층적 면모를 목도한다. 떠돌이 개 샤릭, 범죄자 추군킨, 슈본더가 주입한 공산주의 사상, 박사가 가르치려는 부르주아적 예의범절과 허위의식... 원작자 불가코프는 공산당이 부르짖는 인간 개조의 불합리성과 허상을 샤리코프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결코 제대로 된 인간으로 기능할 수 없는 이 존재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박사는 자신을 당에 고발한 샤리코프를 원래 개의 모습으로 돌려놓기로 마음먹는다.

  영화의 초반부와 마지막 부분에는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눈으로 진창길이 된 거리를 행군하며 힘차게 군가를 부른다. Julius Kim이 작사한 군가의 가사는 이렇다. '백군은 완전히 패배했지만, 붉은 군대는 그 누구에게도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의 관객에게 그 군가는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은 무너졌다. 그로부터 66년 전에 예지적 안목을 지닌 작가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될 역사적 실험을 그렇게 글로 남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개가 된 샤리코프, 아니 샤릭은 박사의 서재에 편안하게 앉아있다. 박사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공산당원에게 프롤레타리아가 싫다고 대놓고 말했다. 그들, 부르주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사진 출처: open-foto.ru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Mikhail Bulgakov(1891-1940)

 


***'NEP' 시기 소련의 흔들리는 풍경,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Трактир на Пятницкой, The Tavern on Pyatnitskaya, 197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nep-tavern-on-pyatnitskaya-19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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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구부러진 길, 영국 감독 Barney Platts-Mills(1944-2021)의 영화 두 편

Bronco Bullfrog(1969), 1시간 26분

Private Road(1971), 1시간 29분


  영국의 감독 Barney Platts-Mills'Bronco Bullfrog(1969)'는 하마터면 다시는 관객을 만나지 못할 뻔 했다. 개봉 당시에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배급사는 영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급기야 1980년대 중반에 마스터 네가티브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그걸 매립지행에서 구해낸 사람은 영화사 직원이었다. 그렇게 영화는 살아남았다(출처 theguardian.com). 'Bronco Bullfrog'에 출연한 이들은 하층민 출신의 청소년들이었다. 그들은 Stratford의 Theatre Royal에서 지역 청소년들의 복지를 위해 마련한 연기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저예산에 아마추어 배우들을 데리고 플래츠 밀즈는 자신의 첫 영화를 찍었다.

  델, 로이, 크리스, 제프. 4명의 십 대 청소년들은 잽싸게 카페의 창문을 깨고 가게 이곳저곳을 뒤진다. 기껏 갖고 나간다는 것이 케이크 몇 조각. 어째 하는 걸 보니 녀석들은 초짜 도둑들 같다. 싸구려 변두리 영화관에서 시간을 죽이더니, 길가던 남자한테 주먹질로 시비를 건다. 버려진 건물 아지트에서는 도색 잡지를 보면서 키득거린다. 소년원에서 출소한 Bronco Bullfrog 조가 무리에 합류하면서 녀석들의 비행은 범죄로 나아간다. 그 와중에 델은 또래 아이린과 연애를 시작한다.

  가난한 젊은이들은 어떻게 연애를 할까? 가진 돈이 없으니 갈 데도,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훔친 오토바이로 시내 질주하기, 무너진 건물 아지트와 근교 숲에서 시간 때우기... 맘놓고 서로를 안을 장소도 찾기 어렵다. 궁리 끝에 연인들이 찾아간 곳은 친구 Bronco Bullfrog의 허름한 하숙방이다. 훔친 물건들로 채워진 비좁은 침실에서 델과 아이린은 침대에, 조는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감독 바니 플래츠 밀스의 이 데뷔작은 모든 일에 어색하고 서투른 십 대 연인들의 모습과도 닮았다. 하지만 놀라운 생기가 영화 곳곳을 가득 채운다. 사실적이고 자연스런 연출, 주변부 청춘과 하층민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에서 이 감독의 재능을 짐작할 수 있다.  

  2년 뒤에 내놓은 'Private Road(1971)'는 얼핏 보기에 평범한 로맨스 영화 같다. 이제 막 첫 소설을 낸 피터는 출판사 직원 앤과 연애를 시작한다. 이 젊은 연인들은 서로에게 푹 빠진다. 중산층인 앤의 부모는 가난한 글쟁이 피터가 영 마뜩잖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스코틀랜드 시골로 여행을 떠난다. 시골 오두막에서의 목가적인 생활도 잠깐, 앤은 임신하고 책임감을 느낀 피터는 결혼을 생각한다.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광고 회사에 취직한 피터. 원치 않는 일을 하려니 자괴감만 커진다.

  감독 Barney Platts-Mills는 두 연인의 사랑과 이별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집요하게 계층의 문제를 다룬다. 전작인 'Bronco Bullfrog'에서도 그러한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델의 아버지는 아이린을, 아이린의 엄마는 델을 싫어한다. 그들은 같은 하층민이면서도 서로의 배경을 경멸하고 무시한다. 돈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Private Road'에서 앤의 부모가 피터를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앤도 차츰 자신과 피터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적 차이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된 피터는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에 찌들어 간다. 경제적인 압박감은 앤과 피터의 삶에 조금씩 균열을 가한다. 거기에 피터가 이어온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도 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터는 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약쟁이 친구가 집에 맘대로 드나드는 것을 감싼다.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앤은 피터를 떠나 부모의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앤이 둘 사이의 아이를 포기하게 되면서 젊은 연인의 짧았던 좋은 날도 끝난다. 다시 작가의 생활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피터는 친구와 함께 회사의 타자기를 훔친다.

  영화는 청춘의 구부러진 뒤안길을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계층간의 격차는 사랑으로 극복되지 않으며, 예술가의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Private Road'는 'Bronco Bullfrog' 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작품성 면에서는 데뷔작을 능가한다. 두 작품을 통해 동시대 영국 젊은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포착한 Barney Platts-Mills는 작년 10월에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올해 초에 디지털로 새롭게 복원된 'Bronco Bullfrog'가 고인의 영화 세계를 알고픈 관객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


*사진 출처: observer.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감독 Barney Platts-Mills



****영국의 Kitchen Sink Drama Film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6/saturday-night-and-sunday-morning-19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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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들은 들뜨고 기대에 차있다. '새로운 고기(new meat)'가 곧 도착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정육점인가? 아니다. 호주 오지의 술집(pub)이다. Coolgardie는 서호주 중남부 내륙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다. 20세기 초반에 금광의 발견으로 흥청거렸던 이 마을은 이제 그 누구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곳에 두 명의 핀란드 아가씨가 도착한다. 배낭 여행객 스테파니와 리나는 Bali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남은 돈이라고는 15달러가 전부. 호주에 도착한 그들은 워킹 홀리데이로 여행 경비를 벌 생각을 하고 직업 소개소로 간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Hotel Coolgardie'. 그렇게 스테파니와 리나의 잊지못할 워킹 홀리데이가 시작된다.

  시골 술집의 구수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큰 오산이다. 술집 주인 피터는 욕설과 모욕적인 표현(shit, bitch)을 입에 달고 산다. 예절바르고 교양있는 두 명의 핀란드 아가씨는 그곳에서 바보 취급을 받는다(언어 때문이 아니다. 리나와 스테파니의 영어 구사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 이 시골 주민들의 입은 거칠기 짝이 없다. 스테파니와 리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명백한 성차별, 성희롱에 해당하는 말들이다.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말부터, 나체 여자 사진 들이대면서 지분거리는 일은 사소할 뿐이다. 술꾼은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속하고 너절하게 구는 중년의 여자 술꾼들도 있다. 리나와 스테파니에게 욕설을 퍼붓고, 먹다 남은 술을 카운터에 쏟아버리기도 한다.

  호주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Pete Gleeson은 호텔 쿨가디를 이전에 여러 번 방문했었다. 그의 관심은 그곳 사람들의 폐쇄성이 외지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할까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2016년작 다큐 'Hotel Coolgardie'는 그렇게 외국인 스테파니와 리나의 쿨가디 체류기를 담아낸다. 거칠고 상스러운 술꾼들에게 핀란드 아가씨들은 바텐더가 아니라 정육점에 전시된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meat)'이다. 어떻게든 들이대려고 추근거리고, 욕설과 희롱으로 모멸감을 준다. 그런 상황에서 리나와 스테파니가 보여주는 절제와 평정심은 놀랍기만 하다. 이전의 많은 여자 바텐더들이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나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여긴 너무 슬프고 희망이 없는 곳이에요. 이런 곳에 누가 있으려고 하겠어요?"

  리나는 황량한, 모래 바람이 부는 마을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광산에서 일하고 돌아온 남자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풀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손님들이 털어놓는 개인사는 건조하고 서글프다. 한 남자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 주변 사람들과 바람난 아내 이야기를 꺼낸다. 또 다른 남자는 자신이 여자들에게 몇 번이나 낙태를 시켰는가를 자랑처럼 늘어놓는다. 좀 더 대범한 스테파니가 그런 말들을 흘려버리는 것과는 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리나는 힘들어 한다. 힘든 노동 환경에서 두 명의 아가씨는 일과 후에 술에 취한 날들이 많아진다. 무엇보다 당뇨가 있는 리나에게 그런 상황은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Hotel Coolgardie'는 호주 오지 마을의 술집을 통해 인종차별과 성차별, 노동력 착취의 맨얼굴을 부각시킨다. 관객들은 한 집단, 사회의 안정성이 여성의 지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성이 바텐더로 일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만약 스테파니와 리나가 시드니나 퍼스 같은 대도시 pub에서 일했다면 그 경험은 분명 쿨가디에서와는 달랐을 것이다. 빈곤, 억눌린 분노와 좌절, 단절된 인간 관계의 시골 마을에서 여성들, 외지인은 차별적인 구조의 하부에 자리한다. '고깃덩어리'로 취급받는 젊은 여성 바텐더들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

  가깝게 지내온 손님들과 근교로 캠핑을 다녀온 뒤, 리나는 당뇨로 악화된 감염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처지가 된다. 설상가상, 가차없는 술집 주인은 스테파니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큰 병원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은 뒤에 리나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감염의 후유증으로 한쪽 눈을 잃고, 다른 한쪽 눈의 기능은 30% 정도만 남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리나에게 호주 쿨가디에서의 경험은 '악몽의 워킹 홀리데이'로 남았다.

  Pete Gleeson은 현실 여행지에서 경험할 수 있는 밑바닥을 호주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놓는다. 차별, 적대감과 공포, 질병, 불운과 궁핍... 인생에서 어떤 일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Coolgardie가 리나에게 그러했을 것이다. 그토록 노골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과 맞닥뜨릴 수 있는 기회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맞다. 결국 관객들은 여행지에서의 아름다운 교류와 소통에는 지역과 계층, 경제적 배경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이 다큐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이 지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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