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모어 레너드가 수정주의 웨스턴(Revisionist Western)에 드리운 빛;

Hombre(1967)와 Valdez Is Coming(1971)   


*이 글에는 두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1886년 3월, 아파치족의 위대한 전사이며 지도자였던 제로니모(Geronimo)가 미군 토벌대의 조지 크룩(George Crook) 장군에게 붙잡혔다. 인디언 전쟁(American Indian Wars)은 막바지에 달했다. 미군은 제로니모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으며, 결국 제로니모와 부족민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포로들을 인계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아파치 부족 사이에서 남다른 외모의 소년을 발견한다. 소년은 인디언의 복식을 하고 있었으나 백인임이 분명했다. 아파치족에게 납치되어 그들과 함께 지낸 것처럼 보였다. 미군은 소년을 데려가서 헤어진 가족과 만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은 완강히 거부했다. 자신은 아파치족을 떠나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소년의 이름은 Jimmy Mackin, 나이는 12살이었다. 소년이 아파치 인디언들에게 납치당한 것은 1885년 8월, 함께 있었던 17살 형은 죽었다. 소년이 인디언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고작 6개월이었다.

  그 사건은 작가 엘모어 레너드(Elmore Leonard)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소설 집필에 착수했고, 1961년에 'Hombre'를 내놓았다. 마틴 리트(Martin Ritt) 감독은 그 소설을 가지고 폴 뉴먼을 주연으로 영화를 찍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두운 피부색의 인디언으로 분장한 폴 뉴먼이 등장한다. 이 특별한 외모의 남자를 결코 인디언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의 '푸른 눈'에 있었다. 원작에서도 주인공 존 러셀은 푸른 눈(blue-eyed)을 가진 백인으로 나온다. 이렇게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 각색 과정에서 생략된 서사의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다소 번거롭고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런 경우에는 할 수만 있다면 원작을 구해서 보는 것이 낫다. 엘모어 레너드의 이 소설은 번역본이 없어서, 영문본의 e-book을 찾아서 읽었다. 'Valdez Is Coming(1971)'의 원작도 엘모어 레너드의 동명 소설이다. 그 소설도 그렇게 구해서 읽었다.

  두 소설 모두 단편 보다는 좀 더 긴, 중단편 정도의 분량으로 매우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서부극과 추리 소설의 대가였던 엘모어 레너드의 문체는 번역기의 어설픈 품질을 뚫고 나와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영화 보다 소설이 더 재미있고 강렬하다고 느꼈다. 그가 소설 'Hombre(1961)'와 'Valdez Is Coming(1970)'을 내놓았던 시절은 미국 사회의 격변기였다. 흑인 민권 운동을 비롯해 여성주의와 반전 평화 운동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역사와 문화 연구에 있어서도 이른바 '수정주의적 관점(revisionism)'이 새롭게 부상한다. 고착화된 기존의 시각에서 탈피해서 다각적인 면으로 현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영화와 소설에서도 포착되었다. 엘모어 레너드는 자신의 주특기인 서부극 소설에서 바로 그런 수정주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소설 'Hombre'의 주인공 존 러셀은 11살에 아파치족에 납치되어 17살까지 인디언과 함께 지낸 인물로 나온다. 실존 인물 지미 맥킨의 6개월은 그렇게 러셀이 보낸 6년이 되었다. 6개월을 인디언과 함께 살았던 맥킨이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동화되었다면, 소설 속 러셀은 외양만 백인이다 뿐이지 그 내면은 인디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존 러셀의 그러한 내력은 생략되어 있다. 그가 어떻게 '옴브레(hombre; 스페인어로 '사나이', '남자'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17살에 가족 곁으로 돌아간 러셀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떠돌았을 때, 미군 기병대와 함께 하며 노새 짐꾼으로 살았던 시절에 얻었던 별칭이었다. 

  영화의 도입부, 인디언 말몰이꾼으로 살던 러셀은 부친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그의 아버지가 상속 재산으로 남긴 하숙집을 처분하기 위해 러셀은 어쩔 수 없이 백인 사회로 돌아온다. 다시 백인의 외모를 되찾았지만, 그에게는 '인디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인디언들과 그들의 땅임을 아는 러셀은 집을 처분한 돈으로 말들을 사려고 한다. 그 일을 위해 러셀은 먼 길을 떠나야만 한다. 마을을 떠나는 역마차에는 러셀과 하숙집 여주인 제시, 하숙집에 머물던 젊은 부부 도리스와 빌리, 페이버 박사와 그 아내 오드리, 그리고 수상쩍은 남자 그라임즈가 오른다.

  마차 안에서 러셀이 인디언들과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페이버 박사는 불쾌감을 표시한다. 한편, 그라임즈는 본색을 드러내며 자신의 갱단과 함께 박사의 돈 가방을 강탈하려고 든다. 러셀의 빠른 총격으로 그라임즈와 갱단은 내쫓기지만, 박사의 아내 오드리가 끌려간다. 박사에게 돈 가방과 아내를 교환하자며 제안하는 그라임즈. 그러나 박사는 결코 돈 가방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 잡혀간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러셀과 일행, 과연 이 여정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페이버 박사의 돈 가방에는 그의 과거가 들어있다.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정부 관리로 일했던 그는 보호 구역으로 들어오는 물품 액수를 속여 횡령했다. 보호 구역의 인디언들은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가 없어서 정부의 공급에 의존해야만 했다. 터무니 없이 부족한 양으로 공급되는 식량에 인디언들은 늘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런 식량을 가지고 박사는 부정 축재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마차 안에서 나눈 약간의 대화를 통해 러셀은 박사의 돈이 동족 인디언들의 고통과 맞바꾼 것임을 알아챈다. 그러므로 그는 그라임즈가 박사의 돈을 노리고 일행을 위협할 때, 거기에 개입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아는 사람은 러셀 한 사람뿐이다. 거기에다 박사의 아내가 그라임즈의 손에 있다. 러셀은 어쩔 수 없이 일행과 함께 한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목숨을 건 것임을 직감한다. 아내의 안위 보다 돈 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박사의 탐욕은 이 사건에서 국외자인 러셀의 고뇌와 명백하게 대비된다. 엘모어 레너드는 '서부'라는 물리적 공간을 윤리적 가치가 충돌하는 정신적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악당 그라임즈, 국고 횡령범 페이버 박사,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다. 마을의 보안관 프랭크이다. 그는 쥐꼬리만한 급료를 받는 보안관의 삶을 내던지고 돈 때문에 강도로 돌변한다.

  엘모어 레너드는 'Valdez Is Coming'에서도 그러한 윤리적 주제를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한다. 멕시코와 인접한 국경 지대 마을의 보안관 발데즈는 총잡이들이 집결한 현장에 출동한다. 지역의 유지이며 목장주인 태너는 탈영병 흑인이 사람을 죽였다면서 사적으로 처벌할 기세이다. 발데즈는 어떻게든 참사를 막으려고 흑인에게 다가가지만, 총잡이 데이비스가 총을 쏘아대는 통에 발데즈는 예기치 않게 흑인을 죽이게 된다. 죽은 흑인에게는 곧 아이를 낳게 될 인디언 아내가 있었다. 자신이 죽인 흑인이 무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데즈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현장에 있었던 목장주 태너와 마을 유력 인사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발데즈. 그는 인디언 미망인을 위한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청원은 거부되고, 마침내 발데즈는 행동에 나서는데...

  에드윈 셔린(Edwin Sherin) 감독의 첫 영화 연출작인 'Valdez Is Coming(1971)'에서 발데즈는 버트 랭카스터가 맡았다. 멕시칸으로 보이기 위해 랭카스터는 피부색을 어둡게 하는 분장을 해야만 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늙고 힘 없어 보이는 마을 보안관을 연기하는 랭카스터를 보며 팬들을 물론이고 당시 비평가들도 뜨악했던 모양이다. 거기에다 이 영화에는 속시원한 총싸움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발데즈는 태너와 정면으로 대결하는데, 결국 그들은 서로를 겨눈 총을 내려놓는다. 기존의 서부극에 익숙한 영화팬들 입장에서 이 결말은 무척 맥아리 없게 여겨졌을 것이다.

  결국 죄없는 흑인을 죽인 사람은 발데즈인데, 왜 그는 그 죽음의 책임을 목장주 태너와 마을 사람들에게 묻는가? 태너는 게이 그린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여자의 전남편이 살해되었는데, 그 살인 용의자로 흑인 존슨이 지목된다. 태너는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가 그 어떤 범죄의 의혹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양이 필요했다. 총잡이를 고용해 체포를 한다고 난리를 피우는 과정에서 흑인은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발데즈는 태너에게 자신이 생각한 미망인의 연금 200달러 가운데 100달러를 요구한다. 어떤 식으로든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발데즈는 태너와 그 부하 총잡이들에게 모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묶여서 사막을 걸어간다. 그 과정은 명백하게 성서 속 예수의 수난 장면과 이어져 있다. 엘모어 레너드는 소설 'Valdez Is Coming'에서 기존의 서부극에서 배제되었던 주변부 인물들을 부각시킨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흑인들은 자유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불가촉천민(outcast)'과도 같은 존재였다. 인디언들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로 백인들에게 내쫓기고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소설 속에서 백인 목장주의 윤리적 정당성을 얻기 위한 명분에 희생되는 사람은 흑인 탈영병이며, 인디언 아내는 미망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인디언 미망인의 연금을 위해 기필코 돈을 받아내려는 발데즈는 멕시칸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윤리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오랫동안 들지 않았던 총을 든다.

  그렇다고 해서 발데즈가 매우 고결하고 도덕적인 인물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영화 속에서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발데즈가 변모하는 순간은 그가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된 짐을 풀 때이다. 먼지가 더깨처럼 얹힌 누런 천을 벗겨내자 한 장의 사진과 총들이 나온다. 사진 속의 그는 미군 기병대 복장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아주 짧게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George Crook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의 정찰대원으로 활약했다. 크룩 장군은 인디언 전쟁에서 매우 놀라운 전적을 기록했는데, 그것은 장군이 지리에 밝은 멕시칸을 비롯해 인디언들을 정찰대원으로 썼기 때문이다. 발데즈는 그 전투에서 인디언들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다시 그 기병대의 군복을 입은 발데즈는 태너와 부하 총잡이들 수십 명을 상대로 싸움을 선포한다. 자신을 쫓아온 하수인 총잡이를 반쯤 죽게 만들면서, 태너에게 전할 말을 일러준다.

  "Valdez is coming!"

  어쩌면 발데즈에게는 인디언들의 죽음에 대한 과거의 부채의식이 남아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채의식과 윤리적 의무감은 'Hombre'의 백인 인디언 러셀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러셀은 그라임즈와의 마지막 담판에 나선다. 돈 가방을 들고 박사의 아내와 맞바꾸기로 한 자리에서 그가 가지고 간 가방에는 돈 대신에 천뭉치가 들어있었다. 그는 결국 진정한 자신의 고향인 아파치족의 땅에 돌아가지 못한다. 왜 그는 진짜 돈 가방을 들고 가지 않았을까? 페이버 박사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과 박사가 횡령한 돈을 동족인 인디언들에게 돌려주는 것, 그 두 가지를 위해 러셀은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한다. 그렇게 백인들이 저지른 패악과 범죄의 속죄는 '인디언의 영혼을 가진 푸른 눈의 백인'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영화 'Hombre'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올라가는 사진에는 인디언처럼 보이는 소년의 모습이 있다. 그가 바로 작가 엘모어 레너드에게 영감을 준 실존 인물 지미 맥킨이다. 당시 크룩 장군 휘하의 사진사가 찍은 그 사진 속 인물 맥킨은 결국 부모에게로 돌아가서 평범한 삶을 살다 갔다. 작가의 손에 의해 재창조된 맥킨의 캐릭터는 러셀이 되었다. 폴 뉴먼은 비밀스런 과거를 지닌, 그로 인해 고통받는 러셀이란 캐릭터를 절제된 연기로 보여준다. 그의 존재 자체가 영화 'Hombre'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Hombre'와 'Valdez Is Coming'은 원작의 일부분이 생략된 서사적 빈틈에도 불구하고, 기존 서부극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또 다른 구부러진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인디언 전쟁이 끝난 1890년대의 서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 속 서부의 공간은 어떤 면에서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진정한 평등과 자유, 평화를 외치는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하던 시대에 엘모어 레너드는 서부 역사에서 소외된,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의 존재를 불러낸다. 그렇게 그가 새롭게 써낸 서부극 소설은 '수정주의 웨스턴'에 독특한 빛을 드리운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Hombre(1967)'의 폴 뉴먼



**사진 출처: tumbral.com   'Valdez Is Coming(1971)'의 버트 랭커스터
이 영화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주요 촬영 장소인 스페인의 남부 지방에서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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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 EBS에서 하는 '비즈니스 리뷰'를 본다. 다양한 분야의 비즈니스 전문가들이 나와서 업계의 현황과 주요 흐름을 짚어준다. 나 같은 마케팅 문외한인 사람도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초간결 마케팅 강의쯤 되겠다. 거기에서 들은 인상적인 일화가 있었다. 그날의 주제는 아마도 '고객의 필요를 파악하라'였던 것 같고, 예시로 든 것이 일본 신칸센의 어느 판매원 이야기였다.

  중년의 이 여성 판매자는 신칸센(
新幹線)에서 최고로 높은 매출을 기록하는 판매왕이었다. 정확한 액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차 한 량(輛)에서 파는 매출액이 대략 100만원을 웃돈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차 한 대를 열 량으로 보면 한 번에 천만 원대의 물건을 파는 이였다. 어떻게 이 판매자가 그런 매출을 올릴 수 있었을까? 그는 승객이 무언가를 주문하기 전에 제안을 했다. 예를 들어 아기를 안고 가는 여성 승객이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

  "샌드위치는 아기를 안고도 한 손으로 먹을 수 있어요. 시장하시면 샌드위치를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기 엄마들이 애를 보느라 식사를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관찰하고 그런 제안을 궁리해낸 것이다. 이 판매자가 올리는 기록적인 매출에는 고객의 필요를 끊임없이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그것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객의 필요에 응답하고자 하는 진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아니, 물건 팔아먹는 데도 진정성이 필요한가? 장사를 하는 이들, 그리고 기업의 주요한 목적은 이윤을 내는 것이므로 어떻게든 고객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오래전에 배우다가 그만둔 중국어를 다시 독학해 보려고 학습 애플리케이션을 이것저것 깔아보았다. 대부분 무료로 제공되는 앱들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무료가 아니라, 광고로 범벅이 된 짜투리 컨텐츠를 제공해놓고 유료 결제를 유도하는 식이었다. 당신들이 우리 앱을 제대로 쓰려면 돈을 내야해요, 아님 광고를 열심히 봐주시던가... 앱 개발자가 자선사업가가 아니라는 점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사용자들에게 합리적인 제안을 해야한다. 그런데 이건 아예 앱을 열자마자 광고를 들이부으면서 '이래도 공짜로 우리 앱을 쓸래?' 하는 것을 보고 아주 질려버렸다. 내가 본 어학 앱들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나는 그런 앱들이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사용자의 돈을 빼내기 위해 혈안이 된, 오만 광고를 퍼붓으며 짜증을 선사하는 방식.

  '우리는 당신의 어학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가 아니라, '우리는 당신이 유료 결제를 하도록 만드는 컨텐츠 제작에 더 관심이 있답니다'라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앱들... 무료로 그 앱을 쓰면서 너무나도 좋고,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고객은 진심으로 지갑을 열 것이다. 고객을 함께 성장해 나가는 진정한 파트너로 여기는 회사가 잘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마케팅을 1도 모르는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아, 물론 치열한 기업 마케팅의 세계에서 진정성이 항상 성공을 담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밑바닥에 깔고 가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득 글쓰기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정말로 좋은 글은 무엇일까? 늘 마음으로 고민하는 주제이다. 내가 가진 어떤 글쓰기 비법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작가는 교사이자 코미디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 말은 좋은 글에는 유익함과 재미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내가 써왔던 영화글들에서 독자가 건질만한 나름의 유익한 지식들이 있었겠지만, 재미는 글쎄... 내가 코미디언이 되어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없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런 재주가 있는 이들이 베스트셀러 작가이겠지.

  한 해동안 꾸준히 블로그를 찾아준 독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그다지 재미는 없는 글이지만, 글을 쓰는 이로서 '진정성'을 글에 담기 위해 늘 노력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새롭게 시작되는 내년 한 해는 그 진정성과 함께 '재미'도 더할 수 있는 그런 영화글을 쓰고 싶다. 독자 여러분들 모두에게 2022년이 복된 한 해가 되길 바라며 글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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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 도시 다통의 범죄 조직 보스 빈은 차오와 연인 사이이다. 둘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그 사랑은 곧 위기를 맞는다. 빈의 조직을 삼키려고 경쟁 조직은 자객들을 보낸다. 연인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자 차오는 빈의 총으로 그들을 위협한다. 차오는 총기의 출처에 대해 함구한 댓가로 5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다. 세상 밖으로 나와보니, 남자에게는 애인이 있고 여자한테는 '우리 인연은 끝'이라고 말한다.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거기에서 정말로 끝난 것일까? 

  '江湖儿女'의 영어 제목은 'Ash Is Purest White'와 'Sons and Daughters of Jianghu', 이렇게 두 가지가 존재한다. '재는 가장 순수한 흰색이다'와 '강호의 아들과 딸'이라니,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제목들에는 어떤 뜻이 있는 걸까? 아마도 서구의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가장 어렵고 까다롭게 다가올 개념은 '강호(江湖, Jianghu)'일 것이다. '강호아녀'를 본 서구 비평가들의 글을 보면, 그들에게 이 영화에 내재된 문화적 코드를 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강호'는 무엇일까? 무협물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그 단어는 매우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무협 영화도 아닌 현대 중국을 그려낸 이 영화에서 '강호의 아들과 딸'이라니, 영화의 제목 '강호'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강호'라는 단어의 기원은 중국의 고대 신화와 전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교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신선계(
)의 개념, 이것은 점차로 모험과 방랑을 의미하는 이상화된 공간으로 변모했다. '강호'가 중국인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든 것은 명청(明清)시대였다. 강호를 배경으로 활약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지배 권력은 그런 소설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정통 사회 구조에 저항하고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험의 세계로 떠나는 인물들을 미화하는 이야기는 사회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중국 공산당에게도 '강호'는 배척의 대상이었다. 여기에서의 '강호'는 공식적인 사회 바깥의 모든 사회 구조를 통칭하는 것으로, 공산당은 그 어떤 '강호 민간 결사'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그러니까 개인과 개인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비공식적인 사회 연결망 전부를 부인한 것이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인들은 인정과 의리, 여러 다양한 이익 관계가 얽힌 사적 연결망 속에서 개인과 집단의 생존을 도모해왔다. 왕조나 지배 계층이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들의 답을 그런 '강호' 세계에서 만난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찾았던 것이다.

  '강호아녀'에서 빈이 지배하는 세계는 마피아나 삼합회 같은 범죄 조직과는 궤를 달리한다.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현재의 중국 사회에서 폭력 조직은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영화 속 빈의 조직은 명확하게 규범화되고 엄격한 폭력 조직이 아니라, 형제의 예로 맺어진 다소 느슨한 '강호' 결사체이다. 지아장커는 '강호'라는 개념을 서양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면서 그렇게 설명했다(filmmakermagazine.com과의 인터뷰 참조). 영화 초반부에 빈과 차오, 조직원들은 새해 인사를 하면서 커다란 대야 같은 그릇에 여러 종류의 술을 한꺼번에 붓고 나누어 마신다. 아마도 이런 유형의 정서적 연대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삼국지의 '도원결의'에 해당할 것이다. 생판 남남인 이들이 형제와 가족 같은 존재가 되는 것. 거기에는 함께 하는 동안 서로를 지켜주고 보살펴 준다는 무언의 합의가 내재되어 있다.

  지아장커는 '강호아녀'의 두 사람, 빈과 차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그 '강호'의 인간적인 소중한 가치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탐색한다. 차오는 사랑하는 남자의 목숨을 지키고, 그의 미래를 위해서 5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다. 그런 차오와 달리 빈은 자신의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한때 폭력 조직을 이끌었던 남자는 화력 발전소의 책임자가 되어있다. 차오가 빈을 만나러 가는 길에 탄 2006년의 유람선에서는 삼협댐의 건설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마치 외국의 유명 관광지처럼 꾸며진 도시의 거대한 중앙 공원에서 차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한다.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는 것'처럼, 차오가 유람선에서 바라본 그 모든 풍광은 이후 지어질 삼협댐에 다 잠길 터였다.

  강과 호수, 강호의 외관이 변한 것처럼 사람도 변했다. 유람선에서 차오와 같은 객실에 있었던 여자는 차오의 돈을 훔쳐 달아난다. 차오는 비싼 음식점에서 무작정 낯선 남자에게 접근해 여동생이 댁의 아이를 가졌다며 돈을 뜯어낸다. 빈의 발전소가 있는 외진 곳에 가기 위해 탔던 오토바이 기사는 차오를 강간하려고 한다. 일상화된 몰염치와 범죄. 지아장커는 물밀듯이 밀려온 자본주의의 공세에 황폐해진 중국인의 내면을 직시한다. 차오의 연인 빈도 그렇게 차오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다.

  2006년에서 다시 시간을 건너뛴 2017년, 차오는 역에서 빈과 마주한다. 빈은 반신불수가 되어 휠체어에 앉아있다. 다통에서 예전에 빈이 차지했던 지위는 차오의 것이 되었다. 예전에 빈의 것이었던 도박장을 운영하며 여주인으로 살아가는 차오는 빈의 치료를 위해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한다. 빈은 차오의 도움을 받는 자신의 처지에 모멸감을 느끼지만, 차오가 보여주는 빈에 대한 감정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또한 빈과 차오가 연인이었던 2001년의 '강호' 세계는 2017년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때도 도박장 중앙에 모셔져 있던 '관우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며, 조직원들은 차오를 깍듯이 '보스'로 모신다. 변한 것이 있다면 차오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과 도박장 입구에 설치된 CCTV의 존재이다.

  지아장커는 그렇게 빈과 차오의 지난한 사랑 이야기를 날실로, 중국 사회의 변화를 씨실로 엮어 한 폭의 옷감을 짜간다. 그의 전작 '산하고인(山河故人, 2015)'에서도 이러한 이야기 구조가 동일하게 구현된다. 석탄 채굴이 주산업인 산시성 펀양을 배경으로 여주인공 타오의 고통스런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1999년에서 아직 오지 않은 가상의 2025년에 이르는 시간을 관통하며, 영화는 자본주의와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중국인들이 잃어버린 가치를 응시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난하다는 이유로 저버린 타오는 돈 많은 남자를 선택하지만, 그것은 이후 이어질 길고 오랜 외로움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이혼한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며, 타오의 장성한 아들은 엄마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 영화의 제목 '산하고인'은 산천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한 사람에 대한 마음도 변치 않고 지키겠다는 뜻이다. 영문 제목 'Mountains May Depart'에는 '비록 산들이 움직일지라도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뒷문장이 생략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영화에서 타오가 즐겨듣는 Sally Yeh(엽천문)의 노래 '珍重(Take Care)'에서 반복해서 재생된다. 헤어지는 연인을 향해 평생을 다해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이 노래는 '강호아녀'의 차오의 빈에 대한 마음과 기이하게 겹친다. 지아장커는 차오의 사랑을 통해 '강호'의 인간적 가치를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제 '강호아녀'의 영어 제목에 담긴 뜻을 풀 차례이다. 'Ash Is Purest White'는 화산 폭발 후에 남은 재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결정이듯, '강호'를 지탱하는 신념과 정서는 시대의 변화에도 살아남음을 의미한다.

  지아장커의 영화들에서 개인은 결코 사회보다 더 커질 수 없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압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개인'의 이야기는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이다. '산하고인'과 '강호아녀'에서 그는 사랑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중국의 현대사를 성찰한다. 자본주의와 함께 서구문물이 중국인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지아장커는 비중있게 다룬다. Villiage People의 'YMCA(강호아녀)'와 Pet Shop Boys의 'Go West(산하고인)'는 영화의 주요한 테마로 기능한다. 그는 그 모든 변화의 세례를 받은 자신의 세대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중국인의 삶은 진정으로 행복한가', 하고... 마치 바둑 기사가 시합이 끝난 후 자신의 대국을 복기하듯 지아장커는 영화를 도구로 자신의 시대를 반추한다. 그리고 관객은 그의 영화를 통해 중국의 그늘진 내면을 들여다 본다. 
 

* 두 영화의 주연을 맡은 자오타오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다. 지아장커의 아내이기도 한 자오타오는 캐릭터를 체화한 배우의 연기가 어떤 것인가를 그 자체로 입증한다. 북경 댄스 아카데미를 졸업한 자오타오의 실력은 두 영화 속 팝송에 맞추어 춤추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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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pbs-8-ken-burns-west199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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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개척 시대의 끝

8편 "One Sky Above Us" (1887-1914), 1시간 58분


  드디어 켄 번즈의 8부작 다큐 'The West'의 마지막 편에 이르렀다. 8편에서는 라코타족 추장 시팅 불(Sitting Bull)의 비극적 최후와 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 몬태나의 광산 개발 열풍, 서부 제일의 도시를 만든 로스 엔젤레스의 수로 공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8편의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상쇄시켜주는 것은 콜로라도주에 정착했던 젊은 연인들의 사랑이야기이다. 에델과 존의 만남에서부터 결혼, 농장을 일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서부의 역사를 만들어간 개인의 목소리가 들어간 것이다.       

  1887년, 미 의회는 도즈 법(The Dawes Act)을 통과시켰다. '인디언 일반 토지 할당법(General Allotment Act)'을 통칭하는 도즈 법은 인디언 토지의 소유와 분배에 있어서 미 정부의 권한을 명시한 법안이었다. 인디언들에게 토지는 부족 소유의 공개념의 의미였으나 이 법안은 개인의 사유 재산권과 임대의 권리를 인정했다. 그 과정에서 부족민들은 누가 얼마만큼의 땅을 가질 것이냐를 두고 분란을 겪었다. 거기에다 개인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땅은 미 정부의 소유로 귀속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인디언 소유의 땅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다. 서부 백인 정착민들의 땅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에 응한 미 정부의 대책은 인디언 땅의 약탈이었다. 도즈 법 이전에 1억 5천만 에이커였던 인디언들의 땅은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3/2가 사라졌다.

  그 시기, 몬태나주에서는 광산 열풍으로 새로운 도시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1850년대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가 끝난 이후, 서부는 다시 한번 부흥의 시기를 맞이한다. 1858년, 몬태나에서 처음으로 금이 발견된 이후에 1876년에는 은광맥이 발견되었다. 1880년대에 몬태나의 Butte 광산은 금과 은을 비롯해 구리를 쏟아냈다. 광부는 위험하고 어려운 여건에서 일하는 가장 위험한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정착을 찾아 서부로 몰려드는 많은 이들은 광산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매장량은 빠르게 고갈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도 몬태나의 광산업은 그 지역의 주요한 산업으로 자리했다.

  한편, 라코타족 추장 시팅 불에게는 최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속적인 인디언 토벌과 도즈 법으로 인한 정착지의 상실까지, 인디언들은 절망과 고통의 날들 속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Paiute족의 주술사 Wovoka는 'Ghost Dance'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구성원들이 둥근 원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노래하고 춤추는 고스트 댄스는 점차 타부족민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인디언들은 고스트 댄스 의식이 백인들의 총탄까지 막아준다는 주술적인 믿음까지 가졌다. 시팅 불은 무척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희망을 잃은 라코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고스트 댄스가 인디언 저항 운동의 기폭제가 될 것을 두려워한 미 정부는 기병대 2개 부대를 라코타족 보호구역에 급파한다. 1890년 12월 15일, 43명의 라코타족 경찰이 시팅 불의 처소를 둘러쌌다. 그리고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시팅 불은 미군이 아니라 동족인 라코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미국은 보호 구역의 자치 경비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인디언 자경단을 전부터 양성해왔다. 시팅 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부족민들을 미군이 무장해제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다툼과 오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운디드니 학살로 이어졌다. 250명의 희생자들 대부분은 추운 겨울 벌판에서 춤을 추다 기병대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미군은 구덩이에 얼어붙은 시신들은 마구잡이로 내던졌다. 많은 미국민들은 그 사건을 군대의 가혹한 진압이라고 인식했고, 비난 여론이 크게 일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제 남은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으로 들어가 완전히 격리되었다. 인디언들은 교회에서는 백인들의 신을, 그 자녀들은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운디드니는 빠르게 잊혀졌고, 동화 정책은 가속화되었다.

  서부 개척은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큰 공사가 로스 엔젤레스에서 시작되었다. 갈수록 커지는 도시 LA에서는 물 부족 문제가 대두되었다. LA 시장 Frederick Eaton과 수도국의 William Mulholland는 자신들의 도시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공유했다. 그들이 주목한 곳은 Owens Valley였다. Owens 강의 물을 끌어와서 도시에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멀홀랜드의 사업팀은 오웬스 밸리 인근의 땅들을 비밀리에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905년에 시작된 수로 건설은 1913년에 끝났다. LA는 풍부한 물을 바탕으로 명실공히 서부 최대의 도시로 발돋움했다.

  켄 번즈는 'The West'의 마지막 편에 젊은 연인의 서부 정착기를 끼워넣었다. 문학을 전공한 여교사 에델은 시골 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신참 목장주 존을 알게 된다. 존은 에델에게 청혼하지만, 도시 출신의 에델은 학교에 돌아가서 학위 공부에 몰두했다. 끊임없는 편지 공세와 한결같은 믿음을 보여준 덕에 존은 결국 에델을 아내로 맞이한다. 그렇게 부부는 20세기 초, 거친 서부에서 힘들게 목장을 일구며 세 아이들을 키웠다. 그곳에서 세 아이들을 엔지니어와 화학자, 지리학자로 키워낸 부부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번즈는 서부라는 장소가 꿈을 찾아 떠난 미국인들에게 소중한 삶의 터전임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해서 8부작에 이르는 'The West'의 긴 여정을 끝마쳤다. 개인적으로는 웨스턴 장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선택한 다큐였는데, 여러모로 많은 공부가 되었다. 다큐에서는 짧게 다루어지는 부분을 논문과 자료를 찾아보면서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 결국 미국 근대사에서 서부 개척사는 엄밀히 말하면 인디언들의 문화와 역사를 지우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그 과정에서 흘린 무수한 피와 희생의 후유증은 아직도 '인디언 보호 구역(Indian reservation)'에서 이어지고 있다. 빈곤과 문맹, 약물중독과 자살, 치솟는 범죄율과 갱단의 폭력, 그 모든 것은 서부 개척이 인디언 사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이다.

  개척사의 이면에 존재하는 피해자는 인디언들 뿐만이 아니다. LA시가 수로 건설을 위해 오웬스 밸리 땅의 소유주들에게서 마구잡이로 헐값에 사들인 땅은 오랜 분쟁의 씨앗으로 남았다. 2017년까지도 소유주들은 LA 시 당국과 땅을 비롯해 물 사용권을 두고 소송을 진행 중이다(출처, LA Times).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차이나 타운(China Town, 1974)'에는 바로 그 댐과 토지의 분쟁이 삽화적 배경으로 나온다. 착취, 사기, 협잡, 피와 배신, 그리고 무고한 죽음들... 그 모든 것이 미국의 서부 땅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있다. 그 역사를 명확히 바라보고 인식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국외자로서 우리가 미국이라는 나라와 문화, '미국 영화'를 더 깊이있게 이해하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사진 출처: pb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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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 시대(The Hippie Movement)의 종언, Electra Glide in Blue(1973)


*이 글에는 'Electra Glide in Blue'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영화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무척. 그런 당신에게 어느 날 영화 연출의 기회가 온다. 사기가 아닌 진짜다. 자, 엉겁결에 감독이 되어 영화를 찍어야할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영화를 좋아하는 것과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대체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가?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럴 때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은 무엇일까? 정답은 '뛰어난 촬영 감독을 구하는 것'이다. James William Guercio는 그렇게 했다. 그가 제작사 United Artists로부터 'Electra Glide in Blue' 감독직을 제안받았을 때, 그가 한 일은 당시 최고로 잘 나가는 촬영 감독 Conrad Hall을 붙잡은 일이었다.

  Hall은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의 촬영 감독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그런 실력있는 인재를 섭외하는 일은 당연히 돈이 많이 든다. 제작비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구에르시오는 자신의 감독 급여를 포기했다. IMDb의 Trivia 항목에는 그가 자신의 급여를 1달러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콘래드 홀에게 지급했다고 나와있다. 그 액수가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Directed by'라는 오프닝 크레딧의 그 글자를 지키기 위해 돈 따위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초짜 신인 감독과 베테랑 촬영 감독, 'Electra Glide in Blue(1973)'는 그렇게 탄생했다. 물론 좋은 촬영 감독을 데려왔다고 해서 영화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적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 부족과 연출의 부재는 구에르시오의 감독직 수행에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했다. 주연 배우 Robert Blake는 나중에 이 영화는 자신과 촬영 감독이 거의 다 찍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떠들고 다녔다. 구에르시오가 촬영 현장에서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 뭔가 '안봐도 비디오'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기는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의 이름이 분명하게 박힌 연출작이다.

  그렇다면 왜 제작사 United Artists는 구에르시오 같은 생초짜 신인 감독을 데려다 영화를 찍었을까? 거기에는 메이저 영화사의 수익 악화라는 현실적 요인이 있었다. 1948년, 미국 대법원은 이른바 'Paramount Decision'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 판결은 영화 제작사의 수직계열 통합(제작과 배급에 이르는 일련의 사업체 소유)을 독과점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금지시켰다. 영화에 있어서 가장 큰 이익을 낼 수 있는 극장 소유가 금지되자 제작사들의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군소 제작사들이 매각되거나 해체되었고, 메이저 스튜디오들도 어려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 그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러던 중에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는 제작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토바이 히피족들의 마약 기행을 그린 이 영화는 엄청난 흥행수익을 냈다. 새로운 영화 인력의 발굴과 과감한 채용, 1970년대에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는 모두 이십 대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아마도 제작사 United Artists도 신인 구에르시오에게 그런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구에르시오는 뮤지션이자 록 밴드 'Chicago'의 프로듀서로 음악인이었지 영화인이 아니었다. 그가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분명하다. 존 포드 감독의 열렬한 팬으로 자신의 첫 연출작에 포드의 서부작에서 느꼈던 아우라를 덧입히고 싶어했다. 과연 그의 바램은 이루어졌을까? 'Electra Glide in Blue(1973)'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과 감탄이 번갈아가며 터져 나온다. 설득력이 없는 플롯과 크게 비어있는 내러티브는 한심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음악과 촬영 만큼은 거기에 비할 것이 아니다.  

  영화는 기이한 도입부로 시작된다. 프라이팬에서 두 조각의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동안,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떤 남자가 총으로 자살을 하는 장면이 교차편집으로 제시된다. 그 다음에 이어진 장면에서 주인공 존 윈터그린이 등장한다. 그는 애리조나 고속도로 순찰대의 경찰이다. 윈터그린은 동료인 Zipper와 짝을 이루어 과속 차량을 단속하는데, 그들이 싫어하는 히피족들이 주요한 단속 대상이다. 어느 날 그는 순찰 중, 사막 도로변 허름한 집에 사는 늙은 윌리의 시신을 발견한다. 부검의는 자살이라고 말하지만 윈터그린은 타살이라고 여긴다. 사건 담당인 풀 형사는 그런 윈터그린을 수사팀에 합류시키고 함께 수사해 나간다. 풀 형사는 범인이 히피족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막의 히피족 은거지에 가서 그들을 괴롭힌다. 윈터그린은 풀의 그런 행태에 넌더리를 낸다. 그러던 중에 풀은 자신의 아내가 윈터그린과 내연 관계인 것을 알아채고, 윈터그린을 도로 순찰대로 좌천시킨다. 지퍼는 돌아온 윈터그린에게 새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자랑한다. 그것이 죽은 윌리의 돈으로 산 것이라는 지퍼의 말에 둘은 언쟁을 벌이는데...

  영화 '이지 라이더(1969)'의 흥행 성공으로 스튜디오들은 그와 비슷한 아류작들을 찍어내는 데에 골몰했다. 'Two-Lane Blacktop(1971)', 'Vanishing Point(1971)'와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Electra Glide in Blue(1973)'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는 '오토바이'이다. 주인공 윈터그린은 고속도로 오토바이 순찰대원이며, 풀과 윈터그린이 방문하는 히피들의 근거지에도 오토바이가 줄줄이 놓여있다. 윈터그린의 동료 지퍼는 꿈에 그리던 오토바이 'Harley-Davidson Electra Glide'를 사려고 죽은 자의 돈까지 훔친다. 오토바이가 선사하는 속도와 자유로운 질주의 감각은 당시의 젊은 세대에게 소중하게 여겨졌다. 영화 속에서 '이지 라이더'의 포스터가 나오는 것도 볼 수 있다.

  거기에 '사막'이라는 공간성이 이 영화에 더해진다. 'Electra Glide in Blue'의 사막에서는 공권력과 히피들이 충돌한다. 과속을 하는 히피들의 오토바이를 단속하는 순찰대에게 히피들은 인생낙오자 같은 한심한 족속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히피들은 록 밴드의 공연에 열광하고(구에르시오는 밴드 Chicago와 함께 이 영화의 음악을 작업했다), 오토바이로 질주의 기쁨을 만끽하며, 사막 은거지에서 자기들끼리 평화롭게 지낼 뿐이다. 그런 히피들에게 경찰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부당한 공권력으로 비춰진다.

  '이지 라이더'를 시작으로 쏟아져 나온 일련의 '히피족+오토바이+자동차+고속도로' 영화들이 히피들에게 온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Electra Glide in Blue'에서 히피를 바라보는 관점은 기성 세대와 맞닿아 있다. 윈터그린의 동료 지퍼가 고속도로 순찰 중에 히피에게 보이는 집요한 괴롭힘, 형사 풀이 히피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들과는 달리 주인공 윈터그린은 히피들에게 다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한 경찰이기는 해도 그의 삶은 도덕적이지 않다. 수사팀 형사의 아내와 불륜 관계이며, 자신의 업무인 과속 단속은 운전자를 갈구는 흥밋거리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윈터그린은 지퍼가 전에 괴롭혔던 히피를 과속으로 불러세운다. 그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며 경고와 함께 보내지만, 히피가 잊어버리고 간 운전면허증을 돌려주기 위해 차를 따라잡는다. 그러나 자신들을 추격하는 것으로 오해한 히피는 윈터그린을 향해 총을 겨눈다. 애리조나 사막의 이정표 Monument Valley가 원경에 자리한 화면에, 윈터그린은 무한히 뻗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로의 한 가운데에서 피를 쏟으며 죽는다. 감독 구에르시오가 원했던 존 포드식 감성은 그런 기이한 마지막 장면으로 구현된다.

  'Electra Glide in Blue'의 길 잃은 서사와 연출력의 부재는 영화의 완성도를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당대 최고의 촬영 감독 콘래드 홀이 담아낸 애리조나 사막의 풍광과 오토바이 추격 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모든 결함을 메꾸고도 남는다. 비록 영화 제작에 문외한인 감독으로 촬영 현장에서 이리저리 휘둘려 다녔을 터이지만, 구에르시오는 자신이 잘하는 음악 하나는 기막히게 뽑아냈다. Directed by James William Guercio. 그렇게 그의 유일한 영화는 1970년대 미국 영화사에서 컬트적 지위를 차지했다.

  영화 속에서 윈터그린으로 상징되는 공권력은 히피에 의해 죽는다. 그러나 이제 히피들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보수층은 자신들의 불만을 계속해서 축적해 나가면서, 그들의 의견을 대변할 새로운 정권을 모색한다. 권토중래(捲土重來),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외치는 레이건의 시대는 1970년대 보수 세력의 절치부심 속에 1980년에 마침내 막을 올리게 된다. 'Electra Glide in Blue'의 마지막은 그런 면에서 매우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한 시대의 종언인 셈이다. 



*사진 출처: filmpuls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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