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내기 다큐 제작자의 흥미로운 데뷔작;

The Amazing Johnathan Documentary(2019)          


  한때 잘 나가던 코미디언이 있었다. 순회 공연, 방송을 통해서 많은 인기와 부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점점 나빠지는 건강 때문에 그는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2014년, 그의 나이가 56살이 되었을 때이다. 그는 대중들에게 자신이 1년 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코디미언의 이름은 John Edward Szeles, 본명보다 '어메이징 조나단(Amazing Johnathan)'이란 별칭으로 유명했다. 풋내기 다큐 제작자 Ben Berman은 2017년에 그런 그를 찾아가서 다큐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전직 코미디언은 선뜻 오케이 사인을 내주었다. 마침 지리하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견디다 못한 조나단은 복귀 공연을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버먼은 자신의 첫 장편 다큐를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던 중에 조나단이 흘리듯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말이야, 날 찍겠다는 다큐 팀이 새로 오기로 했거든. 아주 유명한 제작자야. 'Man on Wire(2008)'하고 'Searching for Sugar Man(2012)'을 만든 팀이라고 하더만. 거 아카데미 상도 탄 작품 있잖아. 난 죽어가고 있는데, 많이 찍어서 남길 수 있으면 좋잖아."

  '뭐라고, 당신을 찍는 새로운 다큐 제작팀이 온다고? 그럼, 난 뭐가 되는 거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황망한 표정의 버먼과는 달리 조나단은 아주 여유롭다. 조나단의 공연장에는 그렇게 버먼과 다른 다큐팀이 기이한 경쟁을 하면서 각자의 다큐를 찍는다. 그런 상황이 초짜 다큐 제작자 버먼에게는 영 익숙하지가 않다. 그런 그에게 조나단은 계속해서 놀람 상자를 선물한다. 하루는 분장실 뒷편에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카메라를 든 웬 남자가 버먼에게 다가온다. 그는 버먼에게 나가달라고 정중히 요청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 조나단의 다큐를 찍고 있거든요."

  아니, 아카데미팀 말고 또 다른 다큐 팀이 또 있는 거야? 대체 조나단 이 화상아, 다큐를 몇 개를 찍으려는 거냐... 벤 버먼 감독의 2019년작 다큐 'The Amazing Johnathan Documentary'는 도입부에서부터 코미디가 따로 없다. 관객은 웃음이 빵빵터지지만, 감독에게는 악몽과 같은 상황이다. 버먼은 이미 2년이 넘게 조나단에 대한 다큐를 찍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 말고 새로운 제작팀이 조나단에게 따라 붙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대안 1번) 에잇, 조나단 이 신의없는 인간아, 더러워서 안찍는다. 아카데미상이 그렇게 탐난단 말이냐. 난 갈테니까 잘해봐. 대안 2번) 아니, 아카데미팀은 내가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나까지 포함해서 세 팀은 좀 그렇잖아. 사실 순서로 치면 내가 제일 먼저 시작했는데, 어떻게 나하고 잘 찍으면 안될까?

  버먼은 그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그저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아버지를 비롯해 절친은 2년 동안 찍어온 것이 아깝지 않느냐며 버먼에게 다른 다큐팀과 차별화될 수 있는 전략을 짜내보라고 말한다. '차별화', 정말 좋은 말이다. 그러나 버먼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그런 버먼에게 조나단은 연타를 날린다. '사실은 나를 찍는 팀이 하나 더 있어...'

  다큐가 그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 관객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다큐 속의 감독 버먼은 심신이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자기 관리가 안되어서 체중이 늘었고, 집안에는 설거지와 쓰레기가 수북히 쌓여있다. 버먼을 좌절하게 만든 것은 자신 보다 먼저 조나단을 찍고 있었다던 4번째 다큐팀의 촬영 테이프였다. 버먼이 입수한 테이프 속 조나단의 자기 고백과 일상의 모습들이 마치 버먼의 촬영분과 판박이처럼 비슷하게 찍혀있었다. 조나단은 그 모든 다큐 제작 과정을 하나의 '공연'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이, 버먼, 그냥 때려쳐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지만, 버먼은 강철같은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는 그 시점에서 과감하게 제작 방향을 전환한다. 바로 조나단의 다큐를 찍는 자신을 찍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The Amazing Johnathan Documentary'는 예기치 않게 메타 다큐멘터리(Meta-documentary)가 되어버린다. 그 즈음 버먼의 연락을 계속 씹어버리는 조나단, 버먼은 아카데미팀이 캐나다에서 다큐의 첫 시사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는다. 버먼은 캐나다로 날아간다.

  시사회 상영관에서 한 관객이 질문 답변 시간에 제작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다큐가 이전에 제작한 'Man on Wire'와 'Searching for Sugar Man'과 다른 점이 뭡니까? 그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만."

  그 질문에 당황해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제작진을 보며 버먼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질문을 던진 관객은 버먼이 현지에서 섭외한 전문 연기자였다. 버먼은 그렇게 아카데미팀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고, 이제는 직접 프로듀서를 찾아가 담판을 벌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찍던 다큐 제작에 참여하는 거 어때요?' 그렇게, 프로듀서 Simon Chinn은 버먼과 한 팀이 된다.   

  'Amazing Johnathan'을 찍기로 했던 다큐는 감독 버먼의 이야기가 합쳐져 알 수 없는 목적지로 흘러간다. 버먼은 그 과정 내내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왜 자신이 죽어가는 코미디언의 이야기를 다큐로 찍기로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 다큐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촬영 대상자인 조나단을 자신은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큐는 그 질문들에 대해 버먼이 답을 찾는 여정이 담겨있다. 아마도 이 다큐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강렬한 장면은 버먼이 조나단에게 매우 솔직하게 마음 속 의심을 털어놓을 때일 것이다. 조나단의 동료는 버먼에게 조나단이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한 말을 정말로 믿냐고 묻는다. 그는 조나단은 노련한 코미디언이며 그 모든 상황을 이용하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버먼은 언제부터인가 마음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조나단에 대한 의심과 대면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조나단, 당신이 1년 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팬들 앞에서 그랬잖아. 그런데 그 이후로 당신은 4년째, 어쨌든 살아있어. 정말 죽을 병 걸린 거 맞아?"

  결국 버먼과 조나단의 관계는 어떻게 끝났을까? 버먼은 자신의 첫 다큐를 완성했다. 그리고 유능한 프로듀서 덕분에 선댄스 영화제에서 다큐를 상영할 기회도 얻었다. 조나단을 찍던 나머지 세 개의 다큐 가운데 한 편은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다큐는 전적으로 코미디언 조나단에 대한 것이다. 버먼의 'The Amazing Johnathan Documentary'는 조나단의 이름이 제목에 있지만,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정작 들어있지 않다. 이것은 첫 다큐를 찍는 풋내기 제작자 벤 버먼의 고행기인 동시에 다큐멘터리 장르에 대한 실험적 시도와 자기 성찰적 유머의 집합체이다.


  이 다큐는 과연 버먼이 생각하고 원했던 작품이 되었을까? 가끔 인생은 예기치 않은 장소로 우리를 이끈다. 비록 그곳이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가 아닐지라도, 때론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충분히 아름답고 멋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풋내기 다큐 제작자는 그렇게 해서 꽤 괜찮은 첫 작품을 갖게 되었다.      



*사진 출처: vox.com      버먼과 조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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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아름다운 유작, Ashik Kerib
 
  어린 시절부터 그는 병약했다. 부유한 귀족이었던 할머니는 그런 손주의 건강을 위해 코카서스 지방에 보내어 요양을 하게 했다. 9살 소년의 마음은 광대하게 펼쳐진 코카서스의 자연 풍광에 매혹되었다. 그는 이후로도 여러 번 코카서스에 머물며 그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렇게 코카서스는 그의 영혼의 일부분이 되었다. 문학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틈틈이 시와 소설을 썼다.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는 군대에 들어가서 방탕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좋은 성격의 사람은 아니었다.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운 불같은 성미에 제멋대로였다. 동료를 짖궃게 놀려대다가 결투 신청을 받았다. 자신의 고르지 못한 성미로 인한 댓가는 죽음이었다. 그 때의 나이가 스물 여섯, 생전에 많은 시와 소설을 썼으나 출판된 시집은 단 한 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러시아 문학사에 빛나는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시인 미하일 레몬토프(Mikhail Lermontov, 1814-1841)의 이야기이다.

  조지아(Georgia) 태생의 세르게이 파라자노프(Sergei Parajanov)는 레몬토프가 쓴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Ashik Kerib(1988)'은 파라자노프의 유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작업 중이던 영화를 미처 끝내지 못하고 1990년에 세상을 떴다. 파라자노프는 소련 영화계의 이단아였다. 자신만의 영화 미학으로 영화사에 분명한 각인을 남겼지만, 그 생애는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소련 정부는 당국의 예술 창작 원리에 따르지 않는 파라자노프를 철저히 탄압했다. 동성애를 비롯해 여러 범죄 혐의를 뒤집어 씌우며 감옥과 수용소행을 강제했다.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Shadows of Forgotten Ancestors, 1964)', '석류의 빛깔(The Color of Pomegranates, 1969)'은 그런 악전고투 속에서 남긴 작품이다.

  '아쉬크 케립'은 그 두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서있다. 영화를 통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탐구해온 파라자노프답게 이 영화도 민속지학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간명하다. 가난한 음유시인 아쉬크 케립은 어여쁜 아가씨 마굴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마굴과 결혼하고 싶어하지만, 마굴의 아버지는 가진 것 없는 케립을 박대하며 내쫓는다. 결혼 지참금을 모으기 위해 길을 떠난 케립은 모험과 역경을 겪은 후, 결국 연인에게 돌아온다.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 파라자노프는 친절하게 주요한 장면마다 제목과 짧은 설명을 넣는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 내내 귓가에 휘몰아치는 민속음악은 도무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파라자노프의 위트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민속음악과 함께 깔리는 배경 음악은 어디서 많이 듣던 곡이다.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Introduction et Rondo capriccioso en la mineur)'와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Ave Maria)'가 민속악기로 연주된다. 케립이 파샤(pasha)의 성에 머무를 때, 파샤는 케립에게 자신을 위해 노래하라고 위압적으로 명령한다. 파샤의 옆에 있던 여인들은 기관총을 들어 보이며 환호한다. 클래식 음악과 현대의 무기는 파라자노프의 하이브리드적 민족지 감성에 그렇게 녹아든다.  

  그의 전매 특허라 할 수 있는 풍부한 상징적 이미지들은 '아쉬크 케립'에서도 반복된다. 흰색의 비둘기, 붉은색의 석류와 고추, 다양한 원색으로 구성된 민속의상, 춤과 노래... 파라자노프의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시원성(始原性)'을 떠올리게 만든다. 매혹적인 이미지와 소리의 향연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초창기 무성영화도 그렇게 무수한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그 단순함과 아름다움을 파라자노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주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군가 내 영화에서 길을 찾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길을 잃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을 보다 많은 이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 어떤 관객에게 '아쉬크 케립'은 별 재미도 없고, 중앙아시아의 민속 전설을 어설프게 담아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대부분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해 만든 이 영화의 모든 것은 '프로페셔널함'이나 '좋은 때깔'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나에게 '아쉬크 케립'은 좋은 영화이다. 파라자노프가 영화를 만들고 바라보는 방식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에는 흰색의 비둘기가 카메라 위에 앉아있다. 그리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추모하며'라는 글씨가 보인다. VGIK(러시아 국립 영화학교)동기였던 타르코프스키는 파라자노프의 절친이었다. 두 사람의 영화적 영혼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주었던 '지음(知音)'의 죽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까지, 나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2. 예술 영화와 Netflix의 상업적 감수성이 만났을 때, The Power of the Dog

  '천원샵'과 같은 잡화점의 장점은 무엇일까? 자잘구레한 물건들을 여러 다른 상점에 들리지 않고 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Netflix도 보다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잡화점의 마케팅 전략을 채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자체 제작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큐 관객들을 불러 모은 데 이어, 넷플릭스는 온라인 매대에 예술 영화도 꾸준히 올려놓고 있다. 예술 영화를 찾는 영화팬들에게 '우리도 이런 거 만들 줄 알아요!'하고 외치는 것일까? 제인 캠피온은 그 넷플릭스와 손잡고 신작 영화를 내놓았다. 'The Power of the Dog', 우리말로 번역하면 '개의 힘'이 되겠다. 도대체 제목 '개의 힘'에는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

  영화의 원작은 미국 작가 토마스 새비지(Thomas Savage)가 1967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다. 이안 감독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2005)'의 원작 소설을 쓴 E. Annie Proulx는 자신의 소설이 새비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비지의 소설은 제인 캠피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캠피온은 영화 'In the Cut(2003)'의 폭망으로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TV 미니 시리즈로 작업을 이어오던 캠피온에게 그런 면에서 'The Power of the Dog'은 재기작인 셈이다.

  이런 신작 영화를 리뷰할 때의 어려움은 아직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다 보니 대충 줄거리 소개하고, 정작 중요한 부분에 대한 언급은 피해서 변죽만 울리는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The Power of the Dog'의 경우도 그렇다. 1925년, 몬태나의 목장주 필은 동생 조지와 거칠고 외로운 서부의 삶을 살고 있다. 독선적이고 위압적인 형과 달리 자상한 조지는 여관집 주인인 과부 로즈와 결혼한다. 필은 로즈가 아들을 의대에 보내기 위해 조지의 재산을 보고 결혼했다고 생각한다. 로즈는 필의 무시와 조롱 속에서 알콜 중독에 빠져든다. 의대에 다니는 로즈의 아들 피터가 방학을 맞아 집에 들어오면서 이 어울리지 않는 가족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우는데...

  솔직히 2시간 6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길고 지루하다. 이 영화는 해외의 영화 잡지들이 뽑은 2021년 최고의 영화 목록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과연 이 영화가 그런 평가를 받을만 한가? 나에게는 이 영화를 둘러싼 반응의 모든 것들이 과하게 느껴진다. 기존 웨스턴의 내러티브를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수정주의 웨스턴이라는 시각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 만들어지는 웨스턴 가운데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얼마나 되는가? 이미 이안 감독이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서 동성애자 카우보이들의 사랑을 담아냄으로써 웨스턴의 새로운 젠더 서사를 보여주었다. 'The Power of the Dog'은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되는 흐릿한 뒷이야기 같다. 작가 토마스 새비지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소설은 서부극의 외피를 둘렀을 뿐, 동성애와 얼킨 가족 서사가 펼쳐지는 드라마이다.

  몬태나의 부유한 목장주 필의 지독한 마초적 면모에 숨겨진 동성애 성향은 로즈의 아들 피터의 등장으로 분명해진다. 피터는 필의 비밀을 알아채고, 그것을 자신의 어머니 로즈에게 가하는 필의 학대에 대한 앙갚음으로 돌려줄 생각을 한다. 신중하고 냉혹한, 잠재적 사이코패스 살인마처럼 보이는 피터의 행동들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피터는 마침내 자신이 해야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필의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온 엄마와 계부가 다정하게 끌어안는 것을 보면서 피터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피터는 성경책을 펼치고 시편 22편 20절을 읽는다.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출처 공동번역 성서, Deliver my soul from the s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the dog).' 

  아니, 그래서 대체 '개의 힘(the power of the dog)'이 뭐냐고요... 어떤 영화들은 꽤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상징과 수수께끼 같은 장치들을 여기저기 흩뿌려놓고, 관객들과 심리적 시합을 하기도 한다. 지금 시대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나서 그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곱씹고, 그것이 주는 잔향(殘響)과 파문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켜고 구글 검색으로 달려간다. 마치 가축 발골 작업을 보는 것처럼 조각조각 분해되어 알기 쉽게 전시된 텍스트의 살점과 뼈들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렇게 이해되어야만 하는 영화 텍스트는 과연 좋은 영화일까? 제인 캠피온의 'The Power of the Dog'은 무언가 대단한 것을 감추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게 새롭고 내실있는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뉴질랜드의 멋진 풍광과 뛰어난 촬영, 견고한 세트, 관객의 심리를 압박하는 놀라운 음악, 배우들의 좋은 연기... 그 모든 것의 때깔은 정말로 괜찮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러니까, '개의 힘'이란 모든 종류의 충동들,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충동들 말입니다. 결코 통제되지 않는 그 충동은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고, 마침내 파괴시켜버리지요(The power of the dog is all those urges, all those deep, uncontrollable urges that can come and destroy us, you know?)"

  제인 캠피온은 'indiewire.com'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폐쇄적인 장소에서 오랫동안 살게 된 사람들이 겪는 불안과 고통, 일그러진 내면의 충동들, 그것이 가져오는 파국을 'The Power of the Dog'은 한 편의 건조한 수채화처럼 펼쳐서 보여준다. 캠피온의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세련된 웨스턴 서사는 Netflix의 상업적 감수성에 그렇게 희석된다.   



*사진 출처: film-grab.com



**사진 출처: thewr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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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1.html
2편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pbs-3-ken-burns-prohibition-2011-2.html



되찾은 자유의 감각


3편: A Nation of Hypocrites 1시간 45분


  콜럼버스, 워싱턴, 링컨, 볼스테드. 누군가 미국 역사는 이 네 명의 인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볼스테드 법은 금주법의 시대를 열었다. 무려 13년 동안 미국인들에게 음주는 불법이었다. 자유롭게 술을 마실 권리, 이제 누군가는 그 대의명분을 위해 나서야만 했다. 1926년 6월, 뉴욕의 공화당 의원은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정치인들도 금주법이 가진 폐해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들의 마음이 변했던 것이다. 1920년대의 미국은 급변하고 있었다. 대도시들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자유의 분위기가 흘러 넘쳤다. 흑인 음악으로 시작한 재즈가 일반 대중의 삶으로 스며들었다. 클럽은 재즈 음악과 춤추는 젊은 남녀들로 미어터졌다. 거기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 물론 몰래 파는 술이었다.

  주류 산업은 지하 세계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금주법이 시행되던 1920년대에 70만개의 증류소에 50만 명이 그 사업에 종사했다. 'speakeasy'라고 불리는 무허가 술집이 얼마나 많은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뉴욕의 밤문화를 지배한 비밀 술집은 경찰의 단속에 의해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 문을 열기를 반복했다. 술집에는 남자 손님만 있지는 않았다. 젊은 독신 여성들에게도 술은 인기였다. 금주법 이전 시대에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여성은 매춘부로 여겨졌다. 세대가 변했고, 여성들은 훨씬 더 술에 관대해졌다.

  시카고에서는 한바탕 피바람이 일었다. 카포네는 경쟁자 Bugs Moran을 제거하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1926년과 1927년에 갱단원들은 시카고 도심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살인자들은 기소되었으나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배심원들을 비롯해 검사와 판사 모두 돈을 받았다. 증인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일관했다. 언론에서는 증인들이 'Chicago amnesia(시카고 기억상실증)'를 앓고 있다고 조롱했다. 다른 대도시 갱단 리더들에게도 시카고는 기막힌 곳이었다. 뉴욕을 지배하던 갱단 일파의 우두머리 Lucky Luciano는 시카고를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긴 진짜 미친 도시야(a real goddamn crazy place)!'

  카포네는 어둠 속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매우 미디어 친화적(!)인 독특한 마피아였다. 그는 기자들을 불러 모아 회견도 자주 했다. 기자들이 써내는 기사에서는 카포네로부터 받은 돈이 흘러다녔다. 사람들은 신문에서 카포네의 생각을 읽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화제가 되었다. 그는 악당이면서 동시에 인기스타였다. 사람들은 카포네를 보기 위해 그가 가는 곳마다 몰려다녔다. 시카고는 사실상 그가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점차 많은 미국인들이 금주법에서 돌아설 무렵인 1928년, 미국의 31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뤄졌다. 민주당 후보는 뉴욕 주지사였던 Al Smith, 공화당은 Herbert Hoover를 내세웠다. 앨 스미스는 금주법 폐지론자였다. 후버도 금주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금주법을 찬성하는 지지자들의 표 또한 소중했다. 안티 살롱 리그는 스미스의 낙선 운동에 열을 올렸다. 법무부 장관 빌레브란트는 아예 대놓고 앨 스미스를 비난하며 노골적인 선거 운동을 했다. 금주법 옹호의 여전사로서 빌레브란트는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버가 당선이 되면 자신의 공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토사구팽(兔死狗烹). 대통령이 된 후버의 새 내각 명단에 빌레브란트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후버는 금주법이 끝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게된 빌레브란트는 사표를 던지고 공직을 떠났다. 그리고 곧 새로운 직함을 얻는다. 포도 농축액 회사의 법률 자문이었다. 그곳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포도 원액을 제조하는 회사였다. 금주법 투사는 전직 공무원의 이해상충이라는 비난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퇴직 관료로서의 명예보다 소중한 것은 돈이었다.

  1927년, 웨인 휠러가 세상을 떴다. 그는
'Anti-Saloon League'를 이끌며 금주법을 구체적으로 설계한 인물이었다. 빌레브란트의 퇴진과 함께 금주법 지지자들에게 휠러의 죽음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들은 구심점을 잃었다. 금주법은 점점 쪼그라드는 풍선처럼 되어갔다. 그와는 달리 금주법을 폐지하자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Pauline Sabin, 매우 부유한 뉴요커였던 사빈은 공화당 지지자로서 후버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후버가 금주법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자 과감하게 돌아섰다. 사빈은 '전국 금주법 개혁을 위한 여성 단체(WONPR)'를 설립했다. 금주법의 제정에 앞장섰던 이들도 여성이었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이들도 여성이었다.

  처음엔 자신의 두 아들에게 금주법이 지배하는 세상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유층의 여성 인사는 그렇게 금주법 폐지의 선봉장이 되었다. 1929년에 세워진 이 단체의 회원은 곧 150만 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반대 진영의 여성 단체 'WCTU'의 3배였다. 'WONPR'은 사빈이 가진 유명 인사로서의 아우라에 기대고 있었다. 중산층 주부들에게 그곳은 부유하고 지적인 이들의 모임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마치 팬클럽에 가입하는 것처럼 많은 여성들이 사빈의 단체에 회원이 되었다. 사빈이 이끄는 'WONPR'은 이후 금주법 폐지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렇게 금주법 폐지를 외치는 깃발이 휘날릴 무렵, 'Scarface' 알 카포네의 좋은 시절도 끝나가고 있었다. 라이벌 벅스 모란과의 일전은 그 유명한 1929년의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Saint Valentine's Day Massacre)'로 정점을 찍었다. 1931년, 카포네는 탈세 혐의로 기소된다. 결국 카포네는 감옥에 갇혔다. 미국 대도시 갱단 리더들의 이권 다툼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들에게 금주법은 계속해서 돈을 쏟아내는 화수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화수분은 어느 날 갑자기 금이 가버렸다. 1929년, 미국에 대공황의 강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버 정부는 대공황의 여파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늘어나는 실업자들을 구제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재정이었다. 안정적인 세수(稅收)의 확보가 시급했다. 재정이 쪼들리는 판국에 금주법 단속에는 여전히 돈이 나가고 있었다. 금주법을 폐지하면 주류 산업이 합법화되면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세금도 거둘 수 있었다. 금주법 폐지를 당론으로 내건 민주당 의원들이 상원과 하원에서 점차로 세를 불려나갔다. 1932년, 금주법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수정헌법 21조는 금주법을 명시한 수정헌법 18조를 폐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 헌정 사상 다른 헌법 조항을 폐지하기 위해 새로운 헌법을 만든 경우는 전무후무했다. 1933년 12월 5일, 수정헌법 21조가 미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13년 10개월 18일' 동안 미국인들의 삶을 지배했던 금주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술집에서 환호하며 자축했다. 금주법과 함께 흥했던 암흑가 갱단들에게 그 소식은 폐업신고서 같았다. 주 수입원의 상실로 그들의 세력 확장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들은 이후 '마약 밀매'라는 새로운 사업 수단으로 눈을 돌린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금주법이 미국 내 범죄 조직을 고착화시킨 주요한 요인이라고 평가한다.

  술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권리. 이제 술로 인한 문제는 법이 아니라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여전히 알콜 중독자들은 사회 문제로 남아있었다. 1935년, 알콜 중독자들을 위한 치료 모임 'AA(Alcoholics Anonymous)'가 민간인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미국인들은 과도한 음주가 가지는 위험성과 함께 그것을 국가가 강제적으로 해결하려고 나섰을 때의 폐해 또한 목격했다. 과연 금주법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금주법 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인들의 주류 소비량은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은 되찾은 '자유의 감각'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국가가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소중한 권리'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금주법이 미국인들의 내면에 남긴 가장 강렬한 흔적이었다.


*사진 출처: pbs.org 후버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지만 결국 외면당한 금주법 여전사 빌레브란트


**사진 출처: pbs.org     '잘 가라, 금주법!'   금주법 폐지에 환호하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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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Call 이후의 세상

2편: A Nation of Scofflaws 1시간 50분


  1920년 1월 16일, 마침내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발효 알콜의 제조, 판매, 운송을 금지하는 수정헌법 18조는 미국을 알콜 중독의 재앙에서 구할 법으로 여겨졌다. 금주법의 시행 이전에 술집들은 마지막 재고 세일 간판을 내걸었다. 'Last Call'이라는 간판 앞에 사람들은 줄지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부자들은 선견지명을 가지고 엄청난 술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두었다. 위스키 증류소를 비롯해 양조장도 문을 닫을 채비를 했다.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금주법은 주류 관련 산업 전체의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수정헌법 18조에는 '취하게 하는 음료'라고 명시가 되어있을 뿐, 알콜 도수를 명시하지 않았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후속 법안이 필요했다. 법안을 입안한 의원의 이름을 딴 'Volstead Act'는 알콜 도수를 0.5%로 제한했다. 법안을 실제로 기획한 이는 'The Anti-Saloon League'의 웨인 휠러였다. 그는 미국에 남아있는 술 한 방울까지도 다 말려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금주법의 본격적인 시행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의사들은 치료 목적에 한해 술을 처방할 수 있었다. 종교적인 목적의 술 소비도 인정되었다. 가톨릭의 미사주, 유대교의 제례에 쓰이는 술이 그러했다. 의사들은 술 처방전 장사로 갑자기 돈방석에 앉았고, 유대교는 급증하는 신자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웃지못할 촌극이었다.

  많은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금주했으나,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의 대도시 뉴욕은 곧 밀주업자와 무허가 술집의 천국이 되었다. 뉴욕은 캐나다 국경과 가까워서 술의 밀수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밀주업자들은 공무원과 경찰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뇌물을 살포했다. 볼스테드법의 더 엄격한 뉴욕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Mullan-Gage Law'가 만들어졌다. 4000명이 넘는 이들이 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나, 뉴욕 시민들은 금주법 자체에 냉소적이었다. 1923년에 그 법은 폐지되었다. 뉴욕은 그렇게 일찌감치 금주법과 멀어졌다.

  미국 전역의 법원에는 판결을 기다리는 금주법 위반자들이 넘쳐났다. 미국 변호사들의 44%가 금주법 관련 소송에 매달렸다. 판사들은 늘어난 업무량에 진저리를 쳤고, 경찰들은 뇌물에 취약해졌다. 밀주업자들이 뿌리는 뇌물은 그 직업군의 평판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그럼에도 단속은 중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정부는 단속에 쓸 재정이 별로 없었으므로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자 연방 정부가 나섰다. 당시 대통령 하딩은 자신의 의지를 보여줄 여성 전사를 임명했다. 법무부 차관보로 임명된 Mabel Walker Willebrandt는 1921년에 장관이 되어서 열정적으로 금주법 단속에 임했다.

  빌레브란트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밀주는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탄광과 협곡, 농장, 주차장, 어느 곳에서도 밀주업자들은 술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speakeasy'라고 불리는 비밀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빌레브란트의 요원들은 그 모든 곳을 누비며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빈약한 급여와 뇌물에의 유혹, 밀주업자들의 저항은 연방 단속 요원들에게 걸림돌이었다. Frank Allen Mather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밀주업자 단속에 나섰다가 총을 맞고 사망했다. 다큐에서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회고한다.

  "나중에 금주법이 폐지되었을 때, 저는 그 모든 것이 낭비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금주법의 시대를 일생일대의 사업 기회로 이용한 이들이 등장했다. 시애틀 경찰이었던 Roy Olmstead는 술이 엄청난 돈을 벌어다줄 것임을 간파했다. 경찰직을 때려친 그는 곧 밀주 사업에 나섰다. 그가 뿌리는 뇌물에 경찰들은 자발적으로 부하가 되었다. 옴스테드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또 있었다. 변호사 George Remus는 처음에는 밀주업자들의 소송을 맡아서 일하다가 밀주업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금주법의 헛점을 발견했다. 금주법 이전에 만들어진 보세 증류주는 의약품 목적의 판매가 가능했다. 그는 밀주 판매를 위한 제약 회사를 설립하고 증류소를 사들였다. 엄청난 돈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신시내티로 근거지를 옮긴 그는 곧 미국 밀주업계의 대부가 되었다. 그의 회사 직원은 무려 3000명에 달했다. 해외의 위스키 밀수도 큰 돈벌이가 되었다. 플로리다의 선장 William McCoy도 그렇게 떼돈을 벌었다.

  갱단들은 금주법으로 새로운 어둠의 제국을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필라델피아는 유대인 갱단이 장악했다. 뉴욕에서는 여러 갱단들의 싸움으로 12년 동안 수백 명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시카고, 거기에는 'Scarface' 알 카포네가 있었다. 그는 밀주 사업을 비롯해 도박과 매춘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시카고 시장 선거에도 개입했다. 이른바 정치 깡패의 일도 겸업했다. 시카고는 알 카포네의 도시가 되어갔다. 무려 시카고 경찰의 60%가 주류 밀매에 연루되어 있었다.

  술로 흥했던 옴스테드와 리무스에게는 쓰디쓴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1925년에 금주법 위반으로 기소된 리무스는 감옥에 갇혔다.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리무스의 아내는 연방 요원 Franklin L. Dodge와 바람을 피우며 리무스의 재산을 비밀리에 처분했다. 출소한 리무스는 아내를 쏘아 죽였다. 살인 혐의로 체포된 리무스의 재판은 미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을 받아 풀려났다. 옴스테드도 기소되었다. 연방 정부는 도청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으나, 옴스테드는 개인의 사생활 보장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며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Olmstead v. United States 소송에서 옴스테드는 5대 4로 승소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감옥에서 4년을 살다 나왔다.   

  이제 사람들은 금주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자 공업용 알콜로 만들어진 독주를 마시다 죽음에 이르는 이들이 금주법 시대에 1만 명에 달했다. 그 법은 온갖 위선과 범죄, 부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에는 금주법 지지자들(Dry)의 세력이 우세했다. 그렇지만 폐지론자들(Wet)은 조금씩 자신들의 목소리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Dry vs. Wet, 마침내 그 전쟁을 끝내기 위한 비전을 가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사진 출처: pbs.org  '마지막 술'과 '버려지는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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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A Nation of Drunkards 1시간 34분


1. 들어가며
 

  영화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의 조커를 특징짓는 것은 입 가장자리부터 눈가에 이르는 긴 흉터이다. 금주법 시대의 악명높은 갱 '알 카포네(Al Capone)'에게도 그와 같은 흉터가 있었다. 그가 풋내기 갱이었던 시절, 젊은 형제 일행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 일로 카포네의 얼굴에는 조커와 비슷한 흉터가 생겼다. '스카페이스(Scarface)'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카포네는 말 그대로 금주법 시대를 대표하는 '무법자'였다. 그는 온 나라가 술을 금지하는 시대에 술로써 자신의 제국을 세웠으며, 결국 그 술로 인해 몰락했다. 'Prohibition'이라는 영단어를 '금주법'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만든 시대. 미국인이 아닌 국외자의 시선으로 보아도 그 시대는 매우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자신의 역사이기도 했던 현대의 미국민들에게도 그러하다.

  "지금을 사는 미국인들에게도 금주법의 시대란 놀랍게 느껴져요. 어떻게 국가가 나서서 전국민의 음주를 금지시킬 수 있었을까요? 정말이지 그런 정신나간, 미친 시대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지거든요."

  그 시기는 무려 13년 동안 이어졌다. 미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Ken Burns는 미국의 공영방송 PBS와의 협업을 통해 미국 역사에 대한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을 선보였다. 재즈 음악의 연대기를 다룬 10부작 'Jazz(2001)'와 서부 개척기를 다룬  8부작 'The West(1996)'는 그의 대표작이다. '금주법(Prohibition, 2011)'은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러닝 타임이 5시간이 넘는 이 다큐를 통해 번즈는 많은 미국인들이 그다지 들여다 보고 싶어하지 않는 그 '정신나간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얼핏 보기에 도무지 말이 안되는 '금주법'의 시대는 어떻게 도래했으며, 그 시기 미국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누군가는 그 시대를 진정으로 반기고 환호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불만과 고통 속에서 견뎌야 했다. 이제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켄 번즈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흘러나온다.


2. 금주법으로 향하는 여정

  미 의회에서 금주법이 통과된 것은 1919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시작점에는 무려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절주 운동(Temperance Movement)'이 있었다. 왜 '술과 음주의 절제'가 사회 운동의 화두로 등장했던 것일까? 미 동부 연안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이주민들의 '메이플라워호(Mayflower)'에 가득 실렸던 것은 다름 아닌 맥주였다. 술은 초창기 미 개척지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다. 낯선 곳에서의 삶은 예측하기 어려운, 고되고 힘든 것이었다. 술이야말로 일상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음료였다. 많은 미국의 도시에서 하루에 두 번 'Grog-time(술 한 잔 하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약한 도수의 술은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독해졌다. 술을 마시는 인구도 늘어났다. 1830년대에 이르면 미국인 한 명이 1년에 소비하는 위스키는 88갤런으로, 그것은 오늘날 현대 미국인이 마시는 소비량의 세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그야말로 그 시대의 미국인들은 술을 '너무나도 많이' 마셨다.

  주취자에 의한 가정 폭력, 아동 학대, 매춘, 간경화로 인한 높은 사망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움직임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Lyman Beecher 목사는 여신도들의 고통에 개탄했다. 술 취한 남자들은 일도, 가정 생활도 꾸려나갈 수 없었다. 술은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었다. 1840년, 'Society of reformed drunkards'가 조직되었다. 개신교는 본격적으로 절주 운동을 교회 밖으로 확장시켰다.

  거기에 여성 운동가들도 동참했다. Susan B. Anthony는 그 운동의 선구자였다. 술을 마시는 남편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이들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주를 비롯해 의회에 청원 운동을 전개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1851년, 메인주의 포틀랜드에서 시장 Neal Dow에 의해 처음으로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반발했고, 시위가 잇따랐다. 그럼에도 술은 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가능한 '의약품'이 되었다. 밀주 판매자들은 자신들의 옷 속에 술을 숨겨서 팔았다. 'Boot-Leggers'라는 단어는 그렇게 생겨났다. 1860년대에 이르면 몇몇 주들이 포틀랜드를 따라 금주법에 동참했다.

  그런 움직임을 중단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Civil War', 미국은 남과 북이 갈리어 치열하게 싸웠다. 전쟁의 공포와 슬픔, 고통을 달래기에 술만한 것은 없었다. 술 소비는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재건을 위해 부족한 세수()를 메꾸려는 연방 정부에게도 술은 효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온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술 문화도 함께 가져왔다. 특히 독일 이민자들은 맥주 제조 비법을 가지고 양조장 사업에 뛰어들었고, 그것은 곧 그들에게 안정된 부를 약속했다. 1870년대에 이르면 맥주 제조업자들은 본격적으로 단체를 세워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로비를 하기에 이른다. 맥주는 그렇게 미국인들의 삶에 자리잡는다.

  드디어 여성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1876년, 오하이오 주지사의 딸 Eliza Jane Thompson은 목사였던 아들이 알콜 중독으로 사망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톰슨은 오하이오 여성 금주 십자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술집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기도를 하며 연설을 했다. 1883년에는 뛰어난 여성 운동가이며 리더였던 Frances Willard가 'WCTU(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를 설립했다. 이후 금주법의 제정을 위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단체였다. 여성 참정권 운동(Suffragette)과 금주법 청원 운동은 궤를 같이 했다. 그들은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공립 교과서에 금주 교육 메시지를 싣는 대가로 리베이트를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이들은 일주일에 세 번, 학교에서 금주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남자들의 사회 생활에 있어 술은 매우 중요했다. 술집(Saloon)을 중심으로 사교와 모임,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민자들에게 술집은 고된 노동의 일상을 달래주는 활력소였다.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백인 개신교도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자신들만의 술집을 가지고 있었다. 포주와 깡패, 정치인들도 술집을 끼고 돈을 벌었다. 곳곳에서 알콜 중독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술은 곧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많은 이들은 술집을 없애는 것을 그 해결책으로 생각하게 된다.

  '캐리 네이션(Carry Nation)'이란 이름의 여성이 포문을 열었다. 네이션은 매우 기구한 인생 이력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정신병으로, 첫 남편은 알콜중독으로 죽었다. 재혼은 이혼으로 끝났다. 자신의 고통스런 삶이 모두 '술' 때문이라 생각한 네이션은 기도 중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든 술집을 없애는 것'이었다. 네이션의 무기는 '손도끼(hatchet)'였다. 네이션은 가는 술집마다 닥치는 대로 깨부수었다. 네이션이 사는 캔자스주에서는 이미 금주법이 실행되고 있었으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것을 네이션은 진짜 실행으로 보여주었다. 체포와 석방이 반복되는 동안 네이션의 이름은 열광과 비웃음을 동시에 받는 대명사가 되었다.

  1893년, 목사 Howard  Russell이 'The Anti-Saloon League'를 조직한다.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교파들의 금주 연합 단체였다. 루터파 교회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독일계 개신교도들에게 '맥주'를 죄악시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기민한 조직가이며 행동가였던 Wayne Wheeler는 안티 살롱 리그를 이끌며 정치적 힘을 키워나갔다. 맥주 제조업자들의 힘은 갈수록 커졌다. 맥주 제조업자 Adolphus Busch는 대통령을 친구로 둘 정도였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술이 이민자들의 문화이며 미국적인 것이 아니라는 반감의 정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13년에 이르는 기간에 금주법에 찬성하는 주들이 점차 늘어났다.

  1차 세계 대전은 미국 내 반독일 정서에 불을 붙였다. '독일' 딱지가 붙은 모든 것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계 학교가 파괴되었고, 심지어 독일 견종 닥스 훈트가 돌에 맞아 죽는 경우도 빈번했다. 맥주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금주법으로 향하는 여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우선 48개주의 헌법 제정 청원이 있어야 했다. 하원과 상원에서는 제적 인원 3/2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 어려워 보이는 과정은 마침내 1919년에 마침표를 찍었다.

  금주법을 명시한 수정헌법 18조는 1년 후인 1920년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다. 과연 그 법은 정말로 시행될 것인가? 많은 미국인들은 모든 것이 잘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법을 제정하는 것과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미국인들의 낙관적인 감각과는 달리 그들 앞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출처: pbs.org   캐리 네이션을 풍자한 만평과 금주법의 의회 통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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