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회화 아트 라이브러리 13
재니스 톰린슨 지음, 이순령 옮김 / 예경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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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계속해서 발간되고 있는 예경의 아트 라이브러리 시리즈는 도판이나 미술사적 균형감각에 있어서 만족할만한 수준을 보장해주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본 “인상주의”와 “스페인 회화”는 즐거운 책읽기의 체험을 제공해주었다. 

 

  특별히 “스페인 회화”는 엘 그레코와 벨라스케즈, 고야로 대표되는 스페인 회화의 다양한 측면을 정치적, 지리적, 역사적 측면에서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사실 예술을 그 시대의 상황과 따로 떼어서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페인 역사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이 부분에 있어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까치글방에서 나온 “스페인 제국사”이다).    
 

  저자는 스페인 회화를 단지 스페인 출신 화가들의 작품으로 규정하는 것은 스페인 회화의 다채롭고 풍성한 본질을 놓치는 것이라 지적한다. 스페인 회화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다양한 회화적 전통이 정치사적 상황과 맞물려 들어오고 새롭게 변형되면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근대이후 스페인에서 민족주의가 부각되면서 비 스페인 출신 화가들의 작품들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데에 우려를 표명하고,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잊혀진 화가들과 그 전통을 온전히 복원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스페인 회화사의 주요한 작품들의 도판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과 함께 예술이 갖는 시대적 함의, 예술가의 생애까지도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서양 회화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놓치기 힘든 매력을 지닌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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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혁명 당시에 시위 참가자들이 만들어낸 구호 가운데에는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것도 있었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우리의 현실인식을 부정하는 지점, 즉 상상력이 유일한 권력을 획득하게 되는 무의식의 세계에 관한 영화이다. 여자의 눈을 예리하게 가르는 그 유명한 장면을 보라. 이것이 보여주는 의미는 너무나 분명해서 달리 무슨 말이 필요 없다. 새로운 세계를 보기위한 눈을 뜨라는 것이다.

 

  브뉘엘은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의 제도와 권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전복시킬 힘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종교, 계급, 언어, 시공간에 대한 감각 등과 같이 현실적 토대를 이루는 요소들이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 브뉘엘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 와서 보시오, 당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과연 그것은 진짜일까?”

 

  영화는 그 질문에 분명히 “아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그 대답이야말로 이 영화가 현실 비판을 넘어서서 체제 전복적인 메시지까지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것을 꿈꾸는 인간은 권력을 지닌 집단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라야 우리는 진정한 인식과 이해의 눈을 뜨게 된다. 진정한 변혁의 시작은 거기에서부터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브뉘엘은 속삭인다. 문을 열면 바로 해변이 펼쳐지는 놀라운 세계로 오라고. 그곳에서 상상력의 권력을 마음껏 획득하라고. 상상하는 순간 모든 것이 실재하게 되는 세계는 얼마나 멋진가! 이 세계를 보기 위해 우리는 단지 "새로운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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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4:03   좋아요 0 | URL
무라카미 류의 <69>라는 소설에도 이 구호가 인용됐어요.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한 말이더라구요.^^;; 요즘도 가끔 이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답니다. 이 영화 꼭 보고 싶네요.
 
리처드 3세 - 전예원세계문학선 316 셰익스피어 전집 16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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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습작기 동안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닥치기 마련이다. 단지 열심히 쓴다는 것으로는 만족할만한 좋을 글을 얻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글쓰기에도 정교한 이론과 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때가 아마도 그 즈음이 아닐까 싶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는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큰 비중을 두어야할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 좋은 전범이 되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들은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리처드 3세"는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드는 캐릭터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인간성에 대한 탁월한 통찰에 있다. 이 책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오래전 영국 궁정의 왕과 귀족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의 다양한 속성이 투영된 매우 실제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인 리처드 3세는 인간에게 내재된 허영과 욕망, 그로 인해 빚어지는 음모와 배신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나가며 읽는 이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어떻게 매력적인 악역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 책은 놀랄만큼 명료한 답을 제시한다. 글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또 지금 습작기에 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리처드 3세"는 매우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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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무”에는 주인공 소무가 주점의 아가씨와 거리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시퀀스가 있다. 짓다 말았거나, 마치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건물 안으로 소무는 잠깐동안 들어갔다가 나온다. 내게는 그것이 마치 급격한 개발이 진행 중인 중국의 모습에 대한 은유처럼 생각되었다. “소무”에는 그런 식의 공간적 기호가 곳곳에 포진해있다. 영화는 소도시와 그 외곽의 시골 풍경을 마치 다큐를 찍듯 건조한 화면에 담아낸다. “소무”에 나오는 모든 공간은 전근대성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친구가 경영하는 잡화점이나, 약국, 미용실, 주점, 소무의 부모님 집을 보라. 이것은 마치 70년대 개발 독재가 횡행하던 한국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이에 반해 "몰완몰료"가 보여주는 도시 공간의 이미지는 서구적이며 세련된 것이다. 물론 북경이라는 공간은 자금성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의미가 강한 곳이지만 이러한 옛 건축물들이 몰완몰료에서는 하나의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초반부의 관광객이 등장하는 장면이라던가, 갈우가 사장을 협박해서 돈을 갖고 나오게 하는 장소 정도인 것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강조되고 있는 공간은 마치 멋진 모델하우스를 연상하게 하는 오천련의 집을 비롯해, 병원, 경찰서 등과 같은 도시 기능의 핵심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러한 장소들은 "소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낡고 구질구질한 소도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근대화된, 또는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대변하는 기표들로 작동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 또한 그 기표들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몰완몰료”에서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나오는 음악은 빠르고 비트가 강한 랩 음악이고, "소무"에서는 비교적 느린 템포의 중국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영화는 마치 작심을 하고 북경 시내를 보여주기로 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돈을 갖고 나오기로 한 사장과의 약속은 계속 틀어지고, 갈우와 오천련은 하릴없이 차를 타고 북경의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카메라는 그들의 차를 따라가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마치 북경 시내 곳곳을 보여주는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가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북경의 도시적 이미지, 또는 중국 근대화의 상징적 의미로서의 북경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두 영화가 보여주는 중국의 모습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현실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각각의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소무” 97년, “몰완몰료”는 99년이라는 점은 두 영화가 각각 담아내고 있는 공간적 의미를 단순히 중국의 과거와 현재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두 영화는 근대와 전근대, 개발과 비개발, 도시와 농촌, 새것과 옛것, 실리와 명분이 혼재하는 현대 중국의 초상과 맞닿아 있다.

 

  공간은 단지 배경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규제하고 변화시킨다. 같은 경찰서라 하더라도 “소무”에 나오는 경찰과 “몰완몰료”에 나오는 경찰의 일처리 방식은 다르다. 전자는 공포와 위압감을 주는 모습으로, 후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이것은 파기하고 도태시켜야할 전근대성에는 낡고 오래된 건물뿐 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무”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제거해야할 공공의 적이며 사회악으로 지목된 소무는 경찰에 연행된다. 경찰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소무는 수갑이 채워진 채로 방치되고, 곧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나는 소무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증오보다는 깊게 드리워진 수치심을 보았다. 그것은 비단 소매치기 잡범인 소무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소무로 대변되는 그들 자신의 빈곤과 무기력, 부정부패와 미신, 물신적 욕망으로 채워진 자본주의적 심성이 온존하는 전근대적 공간과 생활방식에 대한 자조적 시선으로 읽힌다.  

 

  그에 반해 “몰완몰료”가 보여주는 결말은 급격한 근대화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이 가져다준 어두운 일면, 즉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의 상실에 대한 중국인들의 열렬한 희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누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려는 갈우, 그의 곁에는 아름답고 마음씨 착한 오천련이 자리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결말은 지금의 중국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것이기에 영화 속에서나 재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소무”에서 소무가 잠시나마 마음을 주었던 주점의 아가씨가 돈 많은 남자를 만나 떠나버리는 것이 현실이라면, “몰완몰료”의 결말은 매우 이상적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작위적인 것이다.

 

  현재와 같은 속도라면 조만간 중국에서 “소무”에서 보았던 정체되고 낙후된 소도시들의 모습은 빠르게 변할 것이다. 중국인들이 열렬히 지지해마지 않는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여줄 것인가? 그래서 그들은 “몰완몰료”가 보여주는 세련된 도시적 공간에서 도덕적인 가치를 지키며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중국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들이 잃어버려야할 것들이 너무 많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영화는 그들의 상상 속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지금보다 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찾아 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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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
닐 우드 지음, 홍기빈 옮김 / 개마고원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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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운 사람들과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다양한 삶의 문제들이 결국 한가지로 귀결된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돈" 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지만 "돈"이 있으면 문제 자체가 해결되버리거나,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되는 일이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 그래서였을까? 이 책에는 세계의 구원과 희망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절절이 묻어나는 듯 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매우 명료하다. 우리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타락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심성의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한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선행되어야할 작업은 자본주의의 횡포와 폐해를 직시하고 고발하며 연구하는 일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에 실린 내용은 단순히 "미국"이라는 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그것으로 대표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세계화라는 미명으로 불리우는 미국화의 추악한 일면을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화"란 세계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의 글은 통렬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운 책임감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결국 사람의 심성까지 철저히 파괴시켜버리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전 신문에 실린 젊은 작가가 쓴 글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제 스물을  좀 넘긴 그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 세대의 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을 팔지"말라고.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을 파는"일은 없길 바란다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팔 궁리를 한다. 우리가 가진 지식, 노동, 시간, 그 밖의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되고 시장에 팔 물건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 끔찍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의외로 출발은 어렵지 않다. 깨어있으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잠자고 있는 다른 이들을, 그들의 생각을 흔들어 깨워서 함께 나아갈 길을 찾아보는 것이다. 평생 학자적 양심으로 올곧은 길을 걸어온 저자의 목소리에는 분명히 힘이 실려있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그 힘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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