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座頭市, 2003)'는 원작 영화가 있다. 미스미 겐지 감독의 '자토이치 이야기(座頭市物語, 1962)'가 바로 그것이다. 다케시 본인이 주연까지 한 2003년 영화에서 보여지는 맹인검객은 다소 거친 인상의 비범하고 날렵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1962년 영화의 가츠 신타로가 분한 자토이치는 뭔가 어수룩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의 외양을 하고 있다. 뭐랄까, 관객이 뛰어난 검객에게 기대하는 어떤 원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미스미 겐지는 그 영화로 큰 인기를 끌었고, 그것은 일련의 시리즈 영화 제작으로 이어진다. 그의 영화 작품 대부분은 그런 검객 영화로 채워져 있다.


  1964년에 만든 '무숙자(無宿者)'와 '검(劍)'은 모두 이치카와 라이조가 주연을 맡았다. 유명 가부키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일본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경력을 쌓은 그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특히 검객 영화에 많이 출연했는데, 미스미 겐지 감독과도 여러 작품을 함께 했다. 평범한 얼굴 속에 깃든 강직함과 단아함을 보여주는 이치카와 라이조는 '무숙자'에서는 정의로운 사무라이, '검'에서는 순수함과 열정을 가진 검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스미 겐지가 '무숙자'와 '검'에서 보여주는 화면 구성은 매우 경제적이고 정갈하다. 매 쇼트 하나 하나를 보다 보면 뭘 허투루 낭비하는 법이 없다. 마치 필름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 가계부라도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숙자'의 액션은 관객들에게 보기좋게 시원한 액션을 선사하지 않는다. 주인공 잇뽄 마츠는 큰 무리의 악당 패거리와 맞서 싸우는데, 그 싸움들은 현실적이어서 대부분은 '막싸움'이다. 싸움이 이루어지는 장소도 비좁은 집들 사이, 앞마당 정도다. 그래서 통쾌한 활극을 기대한 관객들은 이 영화에 실망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무숙자'의 서사는 군데군데 비어있고, 이야기 전개는 꽤나 성급하게 보이는 구석도 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아들은 유랑의 길을 나선다. 그가 우연히 다다른 마을은 악인에 지배당해서 마을 사람들은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악인과 대면하고 보니, 그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다(스타워즈의 루크와 다스베이더가 일견 떠오른다). 아버지가 정의로운 관료로 살다 죽었다고 믿는 아들은 흑화한 아버지의 변신을 믿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자신의 더러운 사업에 아들의 참여를 권유하지만 아들은 단호히 거절하고, 고통받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 마침내 부자간의 대결이 이루어지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무숙자'에서 미스미 겐지가 보여주는 대결은 꽤나 큰 윤리적인 곤혹스러움을 수반한다. 자신이 괴물이 된 것은 돈만 아는 더러운 세상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도저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아들. 단순한 불의와 정의의 대결이 아니다. '혈육'이란 이름이 그 대결에 부여되었을 때, 관객들은 그 누구의 편에 서기도 어렵게 된다. 그러나 검의 세계에서 승부는 필연적이다. 자신을 차마 죽이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스스로 칼에 몸을 던진다. 그렇게 미스미 겐지는 검의 정의를 실현한다.


  '검'에서의 대결은 인물대 인물의 구도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검도부 주장 고쿠부가 지향하는 무예의 순수함과 그렇지 못한 세상과의 대결이다. 뛰어난 실력과 검도에 대한 열정을 가진 고쿠부 지로는 대학 검도부의 주장이 된다. 그의 엄격하고 단호한 지도는 후배들의 반감을 사는데, 고쿠부에 밀려 주장이 되지 못한 동기 가가와는 특히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린다. 가가와는 전 일본 대회를 앞두고 떠난 합숙 훈련에서 후배들을 선동해 고쿠부에게 반기를 들게 만들고,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자격에 의문을 품게된 고쿠부는 결국 극단의 선택에 이른다.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소설 '검'에 큰 인상을 받은 미스미 겐지는 시대극이 아닌 현대극에 대결의 세계를 펼쳐 놓는다. 역동적이고 빠르게 진행되는 서사는 무척 흡인력이 있는데, 그것은 원작자의 소설이 가진 장점에서 기인한다. 그 어떤 더러움과 약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고쿠부의 세계를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단호한 이분법적인 세계, 즉 순수와 비순수, 검의 세계와 바깥 세상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다. 검도부 후배들과 가가와, 고쿠부의 실력을 인정하는 감독마저도 고쿠부는 세상을 모르는 '아이'라며 은근히 폄하한다.


  결국 고쿠부가 지향하는 이상향은 더럽혀지고, 그를 유일하게 따른 후배 미부마저 등을 돌린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고쿠부의 마지막 선택은 그에게는 나름의 명분을 가진 것이지만, 관객은 그가 추구한 엄격한 이분법의 세계가 불러일으킨 극단적 비극에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고쿠부가 택한 결연한 죽음의 방식은 실은 미시마 유키오가 자신의 삶의 마지막에 행한 것이기도 했다. 자위대 본부에 들어가 총감을 인질로 잡고 자위대 총궐기와 일본 헌법 개정을 외쳤던 그는 결국 할복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가면의 고백'과 '금각사'와 같은 그의 문학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탐미주의적이고 수려한 문학 세계의 결말은 그토록 끔찍했다. '검'은 어떤 면에서 미시마가 추구한 삶의 본질, 그 지향점을 보여주는 간결한 서사이기도 하다. 미스미 겐지는 고쿠부로 대변되는 강함과 순수함이 있는 검의 세계, 그리고 세상의 더러움과 결코 타협할 수 없다고 믿는 고쿠부의 내면을 명확하게 구현해 낸다. 이치카와 라이조는 그러한 대결의 세계가 가진 비정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를 훌륭하게 연기한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에서 여성 캐릭터는 전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무숙자'의 오세이나 하루 같은 여성 캐릭터들은 사랑을 갈구하며 유랑 검객 잇폰 마츠가 정착하길 바라지만, 그들의 바램은 좌절된다. '검'에서 고쿠부를 좋아하는 에리도 마찬가지다. 고쿠부는 자신의 수련에 방해가 된다며 에리의 애정을 단호히 거절한다. 사실 그러한 검의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한정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그 예외라고 할 수 있다면, 후지타 토시야의 '수라설희(修羅雪姫, 1973)'가 있겠다. 타란티노의 '킬 빌(Kill Bill, 2003)'에 영감을 준 바로 그 영화다. 그 밖에도 시대극에서 좀 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있다면 '붉은 모란 도박사' 시리즈 정도일 것이다.


  미스미 겐지가 '무숙자'와 '검'에서 보여주는 대결의 세계는 단호하며 명쾌하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토록 무협과 검객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검의 세계는 승부와 직결되어 있고, 패배는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그 세계가 가진 냉혹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매혹적이지만 잔혹스럽기도 하다.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정의로운 자가 치루는 댓가는 상실과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은 칼의 움직임과 그 명징한 소리를 들으며 어쩔 수 없이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japansociet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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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막이 없이 영화를 볼 때가 가끔 있다. 영어로 된 영화를 자막 없이 볼 때도 있고, 오래된 일본 영화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대충 아는 언어로 영화를 보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래도 좋은 영화들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어서 관객이 자막이라는 보조 도구가 없어도 따라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시부야 미노루 감독의 1952년 영화 '금일휴진(本日休診)'의 경우도 그랬다. 영어 자막을 도저히 구할 수 없어서, 일본어 자막을 띄워놓고 드문드문 알아듣는 일본어를 꿰맞추어가며 봤다. 코미디 장르라 그런가, 회화가 그리 길거나 어렵게 들리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 영화는 나름의 괜찮은 흐름을 가지고 관객을 안내한다.


  소도시에서 작은 병원을 하는 야츠하루 선생은 조카에게 원장 자리를 물려준 지 1년이 되었다. 그것을 기념하며 하루 휴진을 하는데, 아침부터 병원은 부산스럽다. 제대 후 정신이 이상해져서 수시로 소리지르며 발작하는 퇴역 군인 유사쿠를 진정시켜야 했던 것. 그렇게 한숨 돌리고 났더니 다음에는 경찰이 강도를 당한 유코라는 아가씨를 데려온다. 병원에는 야츠하루 선생을 찾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진다. 출산이 임박한 가난한 임산부도 살펴봐야 하고, 도박을 못하게 해달라며 손가락을 마비시켜주는 주사 놔달라는 야쿠자도 온다. 평온한 은퇴의 일상을 꿈꾸는 야츠하루 선생에게 휴진이 가능한 날이 오기는 올까...


  시부야 미노루의 '금일휴진'은 1949년에 나온 이부세 마스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장르는 코미디이지만, 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웃음 뒤에는 당시 소시민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마도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는 것으로 추정되는 퇴역군인 '유사쿠'가 그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툭하면 큰소리로 군가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는 유사쿠를 야츠하루 선생을 비롯해 동네 사람들은 따뜻하게 보듬는다. 이 영화에서 유사쿠의 존재는 전후의 상흔이 제대로 치유되지 않고 공동체 안에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정신적인 고통에 더해 소시민들의 삶은 가난하고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버려진 기차에서 아이 넷을 데리고 사는 부부에게 다섯째 아이가 태어난다. 작은 배를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영화 내내 야츠하루를 찾는 환자들은 '병원비' 걱정을 한다.


  야나기 에이지로가 분한 의사 야츠하루는 무척이나 인간적이고 소탈하다. 돈 걱정을 하는 환자들에게 따뜻한 말로 괜찮다며 안심시키고, 계란 몇 개를 진료비 대신 받아도 웃는다. 어떤 경우에도 환자들의 왕진 요청을 외면하는 법도 없다. 뺀질거리는 동네 도박꾼에게 맹장수술을 해줬더니, 패거리는 병원비를 내지 않고 도망가면서 병원 리어카까지 훔쳐간다. 그런 일을 겪어도 야츠하루는 낙담하지 않고 환자를 성심성의껏 돌본다. 말하자면 인품이 좋은 큰어른 같은 인상을 준다. 정신이 이상해져서 때론 날뛰는 유사쿠를 진정시키고 그의 기행(行)을 가장 잘 받아주는 것도 야츠하루 선생이다. 어쩌면 그 마을 사람들에게 야츠하루는 정신적 버팀목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금일휴진'은 그렇게 의사 야츠하루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전후 일본 소시민의 삶을 보여준다. 전쟁의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보통의 평범한 일본인들은 그것에서 조금씩 벗어나 새로운 희망과 행복을 꿈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이부세 마스지의 시선은 하층민들이 겪는 가난과 고통에 촛점을 맞춘다. 그는 원폭 피해자의 일기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검은비(黒い雨)'를 쓴 참여적 작가이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1989년 만든 영화 '검은비'는 바로 마스지의 소설이 원작이다. 그런 원작자가 쓴 '금일휴진'에서 유사쿠 캐릭터가 갖는 상징성이 전쟁의 고통 그 자체라는 것을 관객들은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유사쿠는 해질녁에 다시 발작을 일으켜서 야츠하루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을 공터에 불러모아 놓고 연설을 한다. 그때 하늘에는 먼곳으로 향하는 기러기 떼가 지나간다. 그리고 새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특히 유사쿠는 감동을 받아 평온해진 표정을 짓는다. 함께, 그리고 자유롭게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어떻게든 그 고난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소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전후 소시민들의 삶의 애환, 거기에 함께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려는 희망의 의지를 발견한다.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



*내일은 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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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비비안 마이어 시리즈
비비안 마이어 지음, 박여진 옮김 / 윌북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5년 동안 내 책장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동생이 사서 보내준 것인데 한번 쓰윽 보고 그냥 넣어 두었다. 책 밑에 찍힌 서점의 붉은 도장의 날짜가 2015년 4월.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러간 뒤에야 다시 꺼내 보았다.


  평생을 가정부와 유모로 여러 집들을 전전했던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서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었던 마이어는 죽은 후에서야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 사진들이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수집가 존 말루프가 마이어가 남기고 간 대부분의 네거티브 필름과 사진들을 경매를 통해서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마이어의 사진이 가진 진가가 알려지면서 저작권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 일어났다.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는 말루프는 혈족이 아니므로 유산의 정당한 소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혈통 찾기 전문가, 족보 탐정들이 동원되어서 유럽에 있는 혈연들을 찾아냈고, 그 진흙탕 소송은 2021년 현재 아직도 진행 중이다.


  책에 실린 마이어의 사진을 본 내 느낌은 그렇다.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려면, 그래도 나름의 독자적인 자기 세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이어에게는 그런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이어는 거리의 사진사는 될 수 있어도, 사진 작가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이어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대의 유명한 사진 작가들 여럿이 떠오른다. 로버트 프랭크의 '아메리칸'이 보여줬던 미국의 시대적 초상, 다이앤 아버스가 탐험했던 기괴한 인물들과 비주류의 세계, 그리고 빌 커닝햄의 패션 스트리트도 겹쳐서 보인다. 마이어의 사진들은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온갖 잡동사니들의 총집합 같다. 


  마이어는 정말로 평생에 걸쳐서 대단히 많은 사진을 찍었고, 어쩌면 자신의 생계를 위해 가정부와 유모로 일했던 시간 빼고 나머지를 사진기와 함께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저장 강박증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도 같다. 자신이 찍은 사진과 필름,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영수증과 서류도 마이어의 수집 목록에 들어 있었고, 그것이 창고 몇 개의 분량이었다고 한다. 마이어의 사진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도 사후에 창고 보관비를 내지못해서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이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수집하고 쌓아놓기만 했을 뿐, 마이어는 정리를 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생전에 유언장이라던가, 말년에 자신의 물품과 관련해서 무언가 법적인 조치라도 취했다면 지금의 지저분한 소송은 없었을 것이다. 마이어의 사진들은 그 소송 지옥에 갇혀서 대중들과 만날 기회를 기약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카메라와 함께 평생을 보내면서 삶의 무게를 지탱했던 이가 남긴 사진이라도 빨리 빛을 볼 수 있기만을 바랄 밖에.


  마이어의 사진들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진기를 들고 찍은 자신의 많은 초상 사진이다. 그 사진들은 사진기가 마이어 자신의 생의 근원임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사진기를 들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세상과 사람들을 담아낸 사람. 이 책의 제목 '나는 카메라다'는 마이어를 나타내는 가장 명징한 명제이기도 하다.


  따뜻한 가족이 있는 가정, 안정된 직업, 평온한 일상,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이어가 갖지 못한 것들이었다. 오직 '카메라'만이 마이어가 가진 전부였고, 그 카메라가 마이어의 인생 그 자체였다. 그렇게라도 버거웠던 삶을 견딜 수 있었다면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고 축복일지 모른다. 온 생애를 걸쳐 평범한 행복에는 도달할 수 없었지만, 마이어는 자신이 남긴 사진을 통해 특별한 삶을 지속할 토대를 마련했다. 마이어의 사진을 만나는 이들은 마이어를 어떤 식으로든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진들에 빛나는 재능과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음에도 거기에는 번득이는 열정과 도저한 그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마이어의 사진 세계로 가는 작은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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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만든 감독이 들을 수 있는 심한 혹평이 있다면 무슨 말일까? 아마도 다큐를 본 관객의 다음과 같은 말이 아닐까?


  "일기는 일기장에."


  자기 자신,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 사적 다큐는 어쩌면 다큐 제작자에게 가장 편하고 만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의 이야기가 사회와 만나는 접점이 없고, 단순히 흥미있는 이야기이거나 그저 고통스러운 자기 고백이라면 다큐가 아니라 '영상 일기장'이 되는 일은 흔하다. 그러므로 사적 다큐를 만드는 이들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확장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Gallivant(1996)'를 만든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앤드류 쾨팅은 그런 지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쾨팅은 쥬버트 증후군(Joubert Syndrome)을 가진 어린 딸 이든과 자신의 노모 글래디스의 여행기를 이 다큐에 담아냈다. 염색체 이상으로 뇌와 신체의 기능을 비롯해 언어 능력에 장애를 가진 이든은 자신의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응'과 '아냐' 정도가 이든이 할 수 있는 말이다. 할머니 글래디스는 끊임없이 이든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이든이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여행하는 동안 글래디스는 이든의 손짓과 감탄사, 얼굴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이든의 표현법을 터득해 나간다. 그렇게 할머니와 손녀는 조금씩 친밀감을 쌓아가게 된다.


  'Gallivant'의 기본적 이야기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할머니와 손녀가 따뜻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거기에 감독이자 글래디스의 아들, 이든의 아버지로서 쾨팅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다큐 내내 부각시킨다. 관객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든의 손짓과 감탄사가 가진 의미를 아버지 쾨팅은 알고 있다. 이든이 언덕 위에 자리한 거대한 성채 앞에서 무언가 표현을 하는데, 쾨팅은 기가 막히게 딸의 마음 속 언어를 알아채서 자막으로 보여준다. 정말로 그가 장애를 가진 딸 이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절절한 깊이를 가늠케 한다. 웨일즈에서 스코틀랜드, 영국의 동남부 해안에 이르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여행하면서 그렇게 이 세 명의 가족은 서로 더 가까워진다.


  그런데 그 과정을 담아내는 쾨팅의 서사 방식은 결코 단순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빠르게 배속 편집된 화면이 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물들의 말은 제대로 잘 들리지 않으며 장면들을 따라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뉴스 릴(news reel)과 여러 자료 화면, 라디오 방송, 수화로 제작된 교육용 화면, 쾨팅과 제작진이 분장하고 찍은 장면들이 뜬금없이 튀어나오며 관객의 집중력을 시험한다. 마치 실험 영화를 찍듯 개연성 없는 극도의 클로즈업, 여행지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던지는 별 의미없는 쾨팅의 질문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음악(로만 폴란스키의 1966년 영화 'Cul-de-sac'의 음악을 차용했다)은 일반적인 여행기의 서사에서 벗어나 있다.


  여행지의 풍광도 평화로움이나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해변가에 위치한 의류 공장에서는 거품이 가득한 폐수가 쏟아지며, 'Clootywell'이라는 마을에서는 온갖 종류의 속옷이 나무에 걸려있는 기이한 광경과 마주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소원을 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성황당 당산나무에 묶어놓은 색색의 헝겊들을 생각하면 될듯 하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여행하면서 보고 만난 1995년의 영국과 영국인의 모습이다'라고 쾨팅은 선언하는 것 같다. 다소 낙후된 영국 북부를 비롯해 소도시 사람들은 생기가 없고, 정부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는다. 그런가 하면 시골 마을에서의 전통춤과 마을 주민의 하모니카 연주도 나름의 볼거리로 들어 있다. 그저 되는대로 찍은 것처럼 보이는 혼란스러운 가족 여행기는 외부 세계와 사람들로 그 방향을 넓혀 간다.  

  

  그렇게 'Gallivant'는 가족 일기장의 한계를 넘어서 사회적 접점을 만들고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다. 보기 편한, 감동이 가득한 다큐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큐를 전공하거나 제작하려는 이들의 필수 감상 목록에는 들어가겠지만, 일반 관객들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를 보는 일은 오래된, 그렇지만 아주 새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어떤 무언가와 만나는 일이다. 앤드류 쾨팅은 별 의미없이 돌아다니며(gallivant) 자신이 만난 영국인들과 그들의 삶의 단편들을 보여준다. 그는 사적 다큐가 가진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어서 온갖 영화적 실험이 가득한 자국 문화 탐방기를 만들어 냈다.


  "난 이든과 함께 지낸 매순간을 즐겼어. 그러니까 그 말은... 이 아이와 내가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이겠지."


  생의 황혼의 시간에 서있는 노모에게는 손녀딸과의 살가운 시간을, 딸 이든에게는 가족 여행의 추억을, 쾨팅 자신은 새로운 영화적 탐험을 하면서 그 시대의 영국을 담아낸 작품. 'Gallivant'는 그런 다큐이다.



*사진 출처: tainiothiki.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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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수도원 피정에서 원장 신부님에게 들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하루는 수련 수사 두 명이 화장실 청소를 하다 말고 신부님을 찾아왔다고 했다. 서로 청소하는 방식이 다른데, 도저히 타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좀 생각해 보다가, 화장실을 반으로 나눠서 각자의 방식으로 청소하라고 했어요.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화장실 청소 같은 것은 그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나누어 할 수 있다지만, 만약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일이라면 어떨까? 나카하라 슌 감독의 '12명의 상냥한 일본인(The Gentle Twelve, 1991)'은 뜻하지 않게 배심원으로 위촉받은 평범한 시민 12명이 살인 피의자의 유무죄 여부를 가리는 재판 평결 과정을 담아낸다. 그들이 내리는 평결에 따라 남편을 죽인 혐의를 짊어진 젊은 여성의 남은 인생이 달라지게 된다. 단 1명이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평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마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명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을 본 이들이라면 쉽게 눈치를 챌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영화 '웰컴 투 미스터 맥도날드(1997)'의 각본을 쓴 미타니 코키는 '일본에도 배심원 제도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가정하에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미국 사법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12명의 상냥한 일본인'은 덜 무겁고 경쾌하다. 러닝 타임이 2시간 가까이 되는데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대사의 향연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12명의 배심원들에게는 이름이 없고, 배심원 1호, 2호와 같이 번호가 부여된다. 영화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배심원장을 맡은 1호의 제안에 따라 거수로 피의자의 유무죄를 평결하게 된다. 젊은 여성 피의자는 폭력으로 이혼한 남편의 재혼 요구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남편을 밀쳐서 트럭에 치여 죽게 만들었다는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 배심원들은 재판 과정을 모두 보았고, 이제 평결을 내려야 한다. 미모에, 기구하고 가련한 인생사를 가진 여성 피의자에게 동정심을 느낀 배심원들은 별다른 토론도 하지 않고 전원 무죄 평결에 이른다. 그렇게 배심원들이 모두 방을 나서려는 순간, 배심원 2호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유죄를 주장한다. 그때부터 치열한 토론이 시작된다.


  '12명의 상냥한 일본인'에는 토론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행태들이 다 나온다. 큰 소리로 우기기, 비꼬기, 사실 왜곡, 끼어들기와 거짓말, 감성에의 호소... 각각의 배심원들은 서로 다른 성격과 직업, 살아온 이력에 따라 피의자의 유죄와 무죄를 주장한다. 그 과정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추론이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기 보다는 배심원들이 가진 개인적 편견과 경험에 기대고 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사람이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나름의 논리와 증거를 들이대며 유죄를 강력히 주장하는 배심원 2호의 반대편에 배심원 6호가 있다. 한마디로 무지막지하게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는 이 사람의 판단 근거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이다. 노총각으로 살면서 연애도 못해봤는데, 피의자의 남편은 별로 잘 생기지도 못했으면서 여자들에게 빌붙어서 편하게 살던 한심한 인간이므로 죽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울분을 터뜨리면서 피의자의 무죄를 큰소리로 주장할 때 묘한 타당성이 느껴진다. 가치 판단에서 감성이 차지하는 비중을 그는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뭐랄까, 필링(feeling)이랄까..."


  토론이고 뭐고 다 귀찮고, 그냥 느낌상 그렇다고 말하는 배심원 4호도 있다. 그 어떤 합리적인 추론도 마다하며 그런 감정적 판단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배심원들이 여럿이다. 토론이 거듭되면서 고민하는 배심원들의 마음은 요동친다. 영화는 그렇게 최종 평결에 이르기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나름의 유머 감각 또한 놓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제작년도가 1991년이니, 30년이나 묵은 영화이다. 그럼에도 '12명의 상냥한 일본인'에는 구식의 촌스런 감성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미타니 코키가 써낸 생생한 대사들은 시간의 흐름을 비껴가 있다. 평결이 이루어지는 방에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대립과 갈등은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 내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연극으로 상연되면서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물론 장점만 갖고 있지는 않다. 이 영화 속 3명의 여성 배심원 캐릭터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명은 중년 부인으로 피의자가 불쌍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다른 한 명은 그저 수첩에다 정리만 잘 하는 맹한 노처녀, 그리고 이랬다 저랬다 줏대없이 휩쓸리는 젊은 엄마가 그들이다. 어떻게 죄다 좀 덜 떨어진 캐릭터들로 묘사된다. 그것이 단순히 여성 캐릭터들에게 부여된 우연한 특질들인지, 아니면 일본 사회에서 바라보는 여성에 대한 여러 편견의 집합체로서 묘사된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건 여성 캐릭터들 가운데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인물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남성 배심원 캐릭터들도 있다. 하지만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하나같이 다 그렇다면 관객의 입장에서 마냥 웃을 수만도 없다. 거기에다 재판에서 나온 아줌마의 증언을 두고 남자 배심원들이 보여주는 지독한 편견과 비아냥은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 있다. 어떤 면에서 그 점이 구시대의 가치관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12명의 상냥한 일본인'과 '12명의 마음 약한 일본인'으로 통용되고 있다. 일본어 제목의 뜻대로라면 '상냥한'이 맞지만, '마음 약한'이라는 제목이 심정적으로는 더 맞지 않나 싶다. 이 영화 속의 배심원 캐릭터들은 모두 '약함(weakness)'을 지녔으며, 그것이 그들이 내리는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 사실 그들만이 그런 약점을 가진 것이 아니다. 관객들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약함과 함께, 평결이 이루어지는 영화 속의 그 방에서 자신은 과연 어떤 편에 설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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