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르파 푸르바(Phurba)는 이제 22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두고 있다. 2014년 4월, 그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에베레스트 최다 등정 기록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스러운 산, 에베레스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니퍼 피돔의 2015년 다큐 'Sherpa'는 2014년에 있었던 쿰부 아이스폴(Khumbu Icafall) 사고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은 2017년작 'Mountain'으로 산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보여주었던 피돔의 전작이다.


  푸르바와 오랫동안 사업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는 러셀 브라이스. 그는 1994년부터 에베레스트 등정을 원하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등반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다. 그의 회사는 비슷한 일을 하는 38개의 에이전시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4000명이 넘는 일반인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돈만 지불한다면 그 꿈을 이루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대략 10만 달러의 비용이 소요된다. 그 돈 가운데 셰르파에게 지불되는 돈은 5천 달러, 보통의 네팔인들 연봉 10배에 해당하는 돈이다.


  다큐의 도입부는 2014년 4월, 셰르파 선발대가 베이스 캠프 구축을 위해 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는 악명 높은 쿰부 아이스폴이 자리하고 있다. 아이스폴은 절벽을 흐르는 거대한 얼음강으로 곳곳에 크레바스(crevasse)가 자리하고 있어서, 굉장히 위험한 코스로 꼽힌다.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발대의 카메라에 엄청난 눈사태가 찍힌다. 그리고 화면이 끊긴다. 아이스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 사고로 16명의 셰르파들이 목숨을 잃었다. 300명에 가까운 셰르파들이 네팔 정부 당국에 사고의 재발 방지와 피해자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며 '파업'한다. 네팔 정부에게 에베레스트 등반 사업은 매력적이고 거대한 돈벌이이다. 어쩔 수 없이 셰르파들과 대면한 장관은 '계속 일을 하든지 여기서 그만 접든지 알아서 하라'며 떠넘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감해진 것은 러셀과 그 고객들이다. 러셀은 어떻게든 셰르파들을 설득하려고 하지만, 동료들의 죽음을 본 셰르파들은 요지부동이다.


  이 국면에서 갈등이 표출되는 것은 당연하다. 러셀의 고객 중 한 명은 셰르파들이 테러리스트처럼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러셀은 일을 하고 싶은 셰르파들이 있음에도 동료들의 협박 때문에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푸르바는 그런 협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박지만, 셰르파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피돔은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이 모든 사태에서 카메라는 매우 피상적으로 인물들의 대화만을 담아낼 뿐이다. 언뜻 보면 꽤나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제작자로서 감독이 갈등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회피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결국 셰르파들의 파업에 러셀의 고객들은 등정을 포기하고 철수한다. 고객들 가운데에는 처음 실패하고 두 번째 도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듬해 다시 러셀을 찾았을까? 아마 찾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 이듬해인 2015년에는 네팔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에베레스트에서도 등반 중에 19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10명이 셰르파였다.


  다큐의 엔딩 자막에는 후일담이 나온다. 2014년의 쿰부 아이스폴 사고 이후 네팔 정부가 셰르파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으며, 또한 푸르바도 가족들의 소원대로 위험한 셰르파 일을 그만 두었다고 알려준다. 그런데 사실은 그와는 달랐다. 등반가이며 저술가인 Mark Horrell의 블로그에서 다큐에 가려진 뒷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네팔 정부가 셰르파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일부 수용했던 요구들은 결국 철회되었다. 또한 푸르바의 근황에도 변화가 있었다. 2015년의 대지진으로 그의 집이 모두 부서졌으며, 삶의 기반을 잃은 그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셰르파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Sherpa'는 표면적으로는 비극적 사고를 기록한 다큐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으로는 에베레스트를 둘러싼 거대한 사업과 인간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 다큐에서 그 사업의 상업성을 비판하는 에드 더글라스는 이렇게 되묻는다.


  "도대체 (일반인이) 위험을 감수하고 거기 오른다는 게 의미있어요?"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더글라스가 인터뷰 내내 입고 있는 다운 재킷의 상표가 내 눈에 들어왔다. 등산복의 세계적 브랜드 N사와 더불어 비싸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R사의 옷이다. 저 사람은 그 회사의 후원을 받는 모양이네... 돈은 얼마가 들어도 괜찮으니 인생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으려는 사람, 그들을 상대로 하는 에이전시, 거기에 고용되어 일하는 셰르파들, 등반객들에게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로 먹고 사는 셰르파 마을, 그리고 에베레스트 입장료로 엄청난 수입을 챙기고 있는 네팔 정부 당국... 네팔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지는 에베레스트는 돈으로 칠갑한 거대한 돈통이 되었으며, 거기에 연관된 이들은 모두가 돈의 부하들처럼 보인다.


  셰르파의 신화가 되었던 텐징 노르가이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유순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서양 등반가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셰르파들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기초적인 영어 구사능력도 갖추고 있다. 결코 서양 등반객들에게 하인처럼 굴종적인 자세로 일하지 않는다. 2013년에 이탈리아 등반객이 셰르파에게 욕설을 했다가 폭력사태로까지 번지는 일이 있었는데, 러셀은 그것을 젊은 셰르파들의 참지 못하는 성미 탓으로 돌린다. 이처럼 이 다큐는 서로 다른 문화적, 인종적 관점의 차이도 담아낸다. 비록 'Sherpa'의 세계에 깊이있는 접근은 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산 에베레스트를 둘러싼 복마전과 같은 돈의 세계를 관객들은 잠깐이나마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markhorrell.com (사진 가운데 부분이 'Khumbu Icefal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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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부클래식 Boo Classics 43
조지 오웰 지음, 김설자 옮김 / 부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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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광의 막장에 진짜 내려가본 작가가 있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 그는 1936년 1월부터 3월까지 영국 북부의 탄광촌에 머물면서 그곳 광부들의 삶을 취재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쓴 책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이 책은 실질적인 탄광촌 취재기인 1부와 사회주의에 대한 오웰의 생각을 담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오웰이 보여주는 피폐하고 비참한 탄광 노동자들의 삶과 열악한 노동 현장은 말그대로 뼈를 가르는 치열한 문장들로 열거되어 있다. 막장에 내려가 보고 나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육체 노동자가 아니다. 그리고 사정이 허락하면 결코 육체 노동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꼭 그래야 한다면 내가 해낼 수 있는 육체 노동이 있다. 나는 어느 정도 쓸만한 도로 청소부나 비효율적인 정원사나, 형편없는 농장 노동자는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노력을 하고 훈련을 받는다 해도 나는 석탄 광부는 될 수 없다. 그 일은 나를 몇 주 안에 죽게 할 것이다."


  그토록 엄청난 강도의 일을 매일매일 해내는 탄광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된 노동 여건을 견뎌낸다. 오웰은 최하층 노동자들이 그 모든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질병과 가난에 길들여지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자세하고 사실적인 기록을 남겨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글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했던 작가의 실천적 신념에서 나온 결과물인 셈이다.


  1부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하층 노동 계급의 삶의 단면이라면, 2부는 오웰이 가진 사회주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펼쳐진다. 왜 사회주의인가? 그는 그 사상이 가난과 불평등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주의에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웰은 '사회주의는 믿지만, 사회주의자는 믿지 않는다'는 약간의 냉소주의와 거리감도 갖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가 가진 이상이 제대로 실현된다면 최선의 것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실제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의 무모함과 결함이 가져올 수 있는 파국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예측했던 것 같다. 이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문인 샤르트르가 공산주의의 이상에 극도로 매몰된 나머지, 스탈린 집권기의 강제 수용소와 무장 혁명의 폭력성을 옹호한 것과는 대비된다. 1950년부터 1956년 사이에 소련의 편에 섰던 샤르트르는 소련이 1956년에 헝가리의 반소 자유화 운동을 무력 진압하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선다. 공산주의를 맹목적으로 지지했던 그 시기는 샤르트르의 인생에서 오점으로 남았다.


  진정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오웰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계급간에 존재하는 편견을 없애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서로 다른 계급이 하나로 뭉치고, 그들을 이끌어갈 사회주의 정당이 정치적 세력을 얻어서 가난의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웰이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글로써 투쟁했던 오웰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중산층의 출신 배경을 가지고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오웰의 젊은 시절은 가난과 노동의 일상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동물 농장'을 비롯해 독재권력이 감시하는 어두운 미래를 그린 '1984'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작품들은 인간과 시대를 꿰뚫어 보는 뛰어난 통찰력이 돋보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닮고 싶어하는 작가가 쓴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아낌없이 별점 5개를 매긴다. 문학성과 시대정신이 온전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작가 조지 오웰은 자신의 삶과 작품으로 입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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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영화사'란 과목은 뭔가 참 애매한 기억으로 남았다. 엄청 두꺼운 책을 교재로 썼는데, 글씨가 정말이지 깨알만 했다. 세계 각국의 오만가지 영화들을 모아놓은 잡동사니 책 같았다. 아, 물론 거기서도 가장 비중있게 다룬 것은 미국과 유럽의 영화사였다. 3학년 때 그 과목을 들었는데, 강사는 '400번의 구타(1959)' 같은 영화를 과제로 냈다. 이미 다 본 영화들이 줄구장창 나오는데다, 도무지 얻어들을 것이 없는 맥아리 없는 강의는 실망스러웠다. 그 과목이 아마 전공 필수였나, 억지로라도 들어야해서 더 짜증스러웠다. '400번의 구타' 대신 다른 영화를 과제로 써냈다가 학점 못받은 기억이 난다.


  그 수업에서 브라질 영화사 같은 건 다루지도 않았다. 한국 영화사를 비중있게 다루는 외국대학의 영화학과는 얼마나 될까?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마리오 페이소토의 'Limite(1931)'를 얼마 전에 보고 나서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브라질이란 나라에는 어떤 영화 역사가 있는지에 대해서 찾아 보다가 'Vidas secas(1963)'가 눈에 들어왔다.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가 1938년에 그라실리아노 라모스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다. 이 감독은 브라질 영화사의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는 '시네마 노보(Cinema Novo)'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시네마 노보, 번역하면 '새로운 영화'쯤 되겠다. 기존 브라질 영화가 서구 자본에 의해 영혼 없는 오락물만 양산하고 있다고 느낀 영화인들이 좀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들어 보자, 해서 일어난 영화 운동. 뼈대는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닮아있고, 곁가지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작가주의 정신을 덧붙인듯하다. 아무튼 'Vidas secas'는 시네마 노보의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제목을 직역하면 '메마른 삶'이 될 텐데, 영화의 내용을 보면 '황폐한 삶'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또 다른 제목 '보람없는 삶'으로도 나와있다. 어떤 제목이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하층민의 삶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러닝타임 1시간 43분.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완성도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배우들의 연기는 어설프기 짝이 없고, 이야기는 '옛날 옛적 브라질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영화의 배경은 1941년, 먹고 살 것을 찾아 떠도는 일가족의 고통스런 생존기가 펼쳐진다. 탐욕스러운 대농장주, 부패한 경찰과 관료, 그들이 가혹하게 수탈하는 민중의 밑바닥 삶...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영화적 '재미'라는 것을 이 영화에서 기대하면 안된다. 영화가 정치적 대의명분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임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이런 방식은 1930년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나마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예술적 성취도 함께 이루어낸 것에 비해 'Vidas secas'는 그저 정치 선언적인 의미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 보기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것은 영화 속의 'Baleia'라는 이름의 개였다. 영화의 도입부, 땡볕의 더위에 메마른 평야를 걷는 부부와 어린 두 아들이 있다. 갈증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그들을 활기차게 이끄는 것은 바로 '발레야'이다. 이 가족들에게 발레야는 둘도 없는 충견인 동시에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어렵게 도착한 마을의 집. 먹을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발레야는 집 마당의 기니피그(꾸이, cui)를 잡아서 가져온다. 오랜 굶주림으로 키우던 앵무새조차 잡아먹은 가족에게 발레야는 식량도 조달한다.


  대농장주에게 푼돈을 받으며 소를 치게 된 가장 파비아노. 아이들은 양을 돌보는데, 발레야는 양몰이견으로도 활약한다. 외롭고 지친 아이에게 친구 노릇도 해주는 발레야는 진짜 자기 밥값을 해내고도 남는다. 솔직히 이 영화에서 발레야를 빼고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개는 영화 속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다. 개 때문에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은 참 드문 경우다. 얼마나 싹싹하고 영리하며 활기가 넘치는지 모른다. 물론 영화 속 가족의 처절한 밑바닥 삶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Vidas secas'의 진정한 주인공은 발레야이다.


  나만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은 아니다. 외국 논문에는 이 영화의 발레야와 가족의 관계를 라캉 이론을 적용해서 분석한 것도 있다. 라캉 이론에 개를 밀어넣다니, 참... 뭔가 아스트랄한 영화 평론의 세계를 목격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이 영특하고 충실한 개 발레야는 영화 내내 가족의 삶과 함께 한다. 그러다 발레야가 병이 드는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또 다시 길을 떠나는 가족은 발레야를 버린다. 그냥 두고 가는 게 아니라 안락사 시킨다. 아이들은 아빠가 개를 죽일 것이라는 알고 공포와 슬픔에 휩싸인다. 발레야도 자신에게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직감한다. 가급적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주인을 안내한다. 마치 자신이 죽을 곳을 정하는 것 같다. 가만히 고개를 돌리고 기다리는 발레야. 마침내 총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이내 곧 가족은 그곳을 떠난다.


  발레야는 절뚝거리면서 집 앞 마당에 자리잡는다. 발레야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쇼트가 이어진다. 죽어가는 발레야는 가족들이 살던 집을 서글프게 바라본다. 마당에는 발레야가 가족들을 위해 잡았던 꾸이들이 몰려다닌다. 그 꾸이들을 잡아다 줄 가족은 이미 먼 길을 떠났다. 꾸이들을 바라보면서 발레야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볼 수 있을까? 이런 삶은 정말 짐승과 다름없어."


  또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는 태양 아래 길을 떠나게 된 여자는 남편에게 한탄한다. 그러자 남편이 대답한다.


  "아니, 그건 불가능할 거 같아."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흙먼지 날리는 길을 걷는 일가족이 사라질 때까지 롱테이크가 이어진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짐승처럼 사는 삶. 일가족은 자신들에게 충심을 다했던 개를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그 지옥과 같은 삶을 그나마 온기있는 인간의 삶으로 만든 것은 '발레야' 덕분이었음에도... 


  개의 죽음은 그렇게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은 영화학도, 영화광, 그리고 개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 정도나 될까... 발레야가 어떤 견종인지 찾아보았다. 브라질리언 테리어(Brazilian Terrier)이다.



*사진 출처: revistapesquisa.fape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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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막장 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한때 잘나가던 연극배우로 엄청나게 큰 돈을 모았으나, 지독한 수전노가 되어서 가족들의 원망을 듣고 있다.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연극 배우에게 반해서 결혼했으나, 출산 후유증 때문에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다. 첫째 아들은 술고래에 주색잡기로 인생을 망치고 있고,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가 선원으로 떠돌아다니다 폐결핵을 얻어 돌아왔다. 술에 취한 첫째 아들은 부모를 노랭이, 약쟁이로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 4명의 가족이 여름 별장에서 보낸 하루 동안의 이야기, 바로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이다.


  TV와 연극 연출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시드니 루멧의 첫 영화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이었다. 배심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의 이야기를 다룬 그 작품은 매우 성공적인 데뷔작이었다. 인물과 공간을 다루는 그의 솜씨가 연극 연출에서 기인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밤으로의 긴 여로(1962)'를 비롯해 '갈매기(The Sea Gull, 1968)', '에쿠우스(Equus, 1977)' 만듦으로써 연극에 대한 그의 애정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가장 찬사를 받은, 주목할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캐서린 햅번은 칸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랄프 리처드슨과 제임스 로바즈, 딘 스톡웰은 공동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배우들의 불꽃튀는 연기대결뿐만 아니라, 루멧의 연출과 영화적 감각도 눈부시게 빛난다.


  유진 오닐의 자전적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 자신이 사후 25년 동안 출판과 공연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표명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오닐이 사망한 후 3년 뒤인 1956년에 출판이 되었고, 루멧은 1962년에 희곡을 영화로 만들었다.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무려 2시간 50분에 이른다. 뒤틀리고 어긋난 티론 일가의 고통스런 애증의 관계가 처절하게 펼쳐지는데, 루멧은 그것을 결코 단조로운 화면에 담지 않았다. 다양한 쇼트들, 카메라의 위치를 바닥에 둔 쇼트들부터 미디엄, 롱 쇼트, 그리고 여러대의 크레인(crane)을 사용한 장면들이 눈길을 끈다. 카메라 렌즈도 장면에 따라 광각렌즈(wide-angle lens)와 장초점 렌즈(long-focus lens)를 사용해서 복잡한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주로 거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장면들을 카메라가 매우 역동적이고 다채롭게 담아냈다. 단순히 연극 공연을 찍듯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루멧은 이 영화의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그런 몰이해에 굉장히 분노했다.


  이 영화의 줄거리와 캐릭터를 분석하는 것은 어쩌면 연극학도에게 더 매력적인 작업일 것이다. 영화를 분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영화적인 것'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메리 티론을 연기한 캐서린 햅번은 불안과 회한, 원망이 뒤엉킨 약물 중독자의 모습을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낸다. 가난에 대한 상처와 배우로서 좌절된 경력을 지닌 제임스 티론 역은 랄프 리처드슨이 맡았는데 그의 연기는 다소 '연극적'이며 어느 부분에서는 과장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첫째 아들 제이미 역의 제임스 로바즈의 연기도 뛰어나다. 그는 브로드웨이 연극 공연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연기하기도 했다. 나는 막내 에드먼드 역을 맡은 딘 스톡웰의 연기가 가장 좋았다. 그는 이 영화에서의 연기 경험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생산적인 것'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쟁쟁한 연기 경력의 대선배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스톡웰의 강단있는 연기는 그가 칸 영화제 공동 남우 주연상을 받기에 충분했음을 입증한다.


  이 영화의 음악은 앙드레 프레빈이 맡았다. 날카롭고 음울한 음악이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영화 중간 중간 들어가는 피아노 음악은 장면의 전환를 알리는 역할도 한다. 프레빈은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명성이 드높지만, 그의 음악 세계는 클래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재즈 애호가들에게 프레빈은 뛰어난 재즈 피아니스트로 기억된다. 클래식 음악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재즈 음악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음에도 그가 남긴 재주 음반들은 상당하다. 그의 재즈 연주를 듣다 보면 프레빈은 두 개의 심장을 가졌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클래식의 심장과 재즈의 심장, 그런 재능을 가진 이는 아마도 그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우디 앨런의 아내 순이 프레빈은 그가 미아 패로와 결혼 기간 중에 입양한 딸이다.


  영화 속 4명의 인물들이 서로의 상처를 들추고 과거를 헤집는 모습은 마치 전갈들이 독침으로 적을 찌르며 하이에나가 시체를 물어뜯는 것을 연상케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티론 일가의 오래된 곪은 상처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밤 속에서 마침내 터져버린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 막장 가족의 처절한 비극 밑바닥에 혈연의 뜨거운 피와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밤으로부터의 긴 여로'는 피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드리운 고통과 슬픔의 뿌리를 들여다 보게 만든다. 조상과 부모로부터 이어진 그 내력, 그것이 주는 빛과 어두움, 환희와 절망에서 온전히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영화에서 여러 번 들리는 고동 소리는 무적(霧笛), 안개가 끼었을 때 선박이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나 등대에서 울리는 소리이다. 별장이 자리한 곳은 동부 코네티컷 해안가로 안개가 수시로 끼는 곳이다. 4명의 인물들은 과거의 상처라는 안개 속에 갇혀서 삶의 방향성을 상실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적 소리를 들으며 배들은 충돌을 피할 수 있지만, 티론 일가의 사람들은 서로를 들이받으며 고통스럽게 침몰한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메리는 모르핀에, 가장 제임스와 두 아들 제이미와 에드먼드는 술에 중독되어 있다. 이 안개 속의 가족을 시드니 루멧은 흑백의 화면 속에 정교하고 밀도있게 담아낸다.



*영화를 보기 전에 희곡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한다.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사진 출처: filmcomm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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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내멋대로 살아왔어.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 대학도 다니다 때려쳤거든. 그러다 '누리'라는 이름의 그 남자를 알게 되었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쿠르드족 출신 전직 마약상. 직업이 좀 그렇지? 그런데, 난 괜찮았어.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라구. 남자는 새출발하려고 감옥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어. 뭔가 의지가 있어 보였지. 결혼식장은 교도소 안이었어. 장소 따위가 중요한가? 어쨌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냐? 난 그렇게 생각했어.

  곧 아이가 생겼어. '로코'라는 이름으로 불렀지. 착하디 착한 아들. 이제 6살이 된 그 아이는 한 번도 내 속을 상하게 한 적이 없어. 아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어떤 괴로움도 잊을 수 있었어. 내게도 온전히 나만의 것,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내 것이 생긴 거야. 남편도 마음잡고 착실히 잘 살아주었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 걸까, 때론 그런 불안감이 들기도 했지. 왜냐하면... 세상에는 좋은 것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일은 드무니까. 
 
  그날도 그냥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지. 친구와 만나고 남편 사무실로 가는 길이었는데, 길이 다 막혀있었어. 경찰차와 경찰들이 그득한 거야. 폭발 사고가 있었대.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어. 그때 직감했어. 불안하게 이어지던 내 행복이 끝났다는 것을. 경찰이 남편과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더군. 못으로 만든 사제 폭탄이 온몸을 갈기갈기 다 찢어놓았다는 걸, 나중에 재판정에서 들었어.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을까... 죽는 것도 쉽지가 않아. 눈을 떠보니 살아 있었어.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누리와 로코는 왜 죽어야 했지? 경찰은 동유럽 마피아 짓이래. 웃겨, 미리 범인을 다 정해놓은 거 같아. 그날, 로코를 누리에게 데려다 주고 나오는데 백인 여자 하나를 길에서 만났었지. 새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도 않고 어딜 가려고 했어. 도난당할 수 있으니 자물쇠를 채우라고 알려줬지. 좀 이상하게 보였어. 거긴 이민자들이 사는 곳인데, 저런 백인 여자가 무슨 일로 왔을까 했어. 그 여자,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섬뜩한 느낌이 들어. 분명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야.

  변호사가 용의자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알려줬어. 죽지 않고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 그 짐승같은 것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길바닥에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 생각이었지. 내 짐작이 맞았어. 새 자전거에 실었던 건 폭탄이었어. 백인 여자와 그 남편이 저지른 짓이었어. 쓰레기 같은 나치 추종자들. 아무 것도 모른다는듯이 순진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것들의 면상을 죄다 칼로 긁어버리고 싶었지. 나는 참고 또 참았어.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내 편이라고 믿었거든.

  그런데 재판이 이상하게 흘러가. 집에서 나온 마약을 가지고 날 마약중독자로 몰아가고 있어. 여자를 봤다는 내 증언은 믿을 수 없다는 거야. 악마같은 것들의 변호사 놈은 뻔뻔한 얼굴로 나를 더 몰아붙였고, 난 결국 법정에서 그 짐승들에게 욕을 퍼붓고 말았어. 견딜 수가 없었지.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어. 질 것 같았거든.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어. 그 악마들이 사건 당시 그리스에 휴가차 있었다는 증언을 그리스 숙박 업자가 했고, 그게 먹혔어. 웃으면서 그것들은 법정을 떠날 수 있었지.

  항소를 하자고 변호사한테서 자꾸 연락이 와. 항소? 그런 게 의미있어? 난 이길 수 없을 거야. 내 방식대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어. 사제 폭탄을 만드는 법을 찾아봤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아. 로코의 찢겨나간 부드러운 살과 혈관들을 떠올려 봤어. 그것들도 그렇게 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모든 걸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거야. 어쩌면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 그리스, 거기에 그 나치 패거리들이 있어. 그 더러운 것들이 도피 여행을 떠났더군.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로코를 위해서, 누리를 위해서. 목숨값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려줄 참이야.

  결국 난 그 악마들을 찾았어. 그리스 파시스트 놈한테 붙잡힐 뻔 했지만 용케 빠져나왔지. 해변가 캠핑카에 그 짐승들이 숨어있더군. 멀쩡히 잘 살아있었어. 매일 건강을 위해 해변을 달리더군. 난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폭탄은 완벽하게 준비됐어. 그런데, 좀 무섭고 떨려. 왜 그럴까?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쉬울 리가 없잖아. 그것들이 없는 사이 차 밑에 폭탄을 넣어두었어. 그대로 돌아서서 오면 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근처 나무에 새 둥지가 있었거든. 아기새를 어미새가 보듬고 있었어. 폭탄이 터지면 새들도 죽겠지.

  해낼 수 있을까? 로코와 누리를 생각해야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잊으면 안된다구. 저 미친 쓰레기들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난 죽은 거나 다름없어. 난 해야할 일을 할 뿐이야. 되돌려 주는 거지. 내 소중한 모든 걸 앗아간 악인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는 거야.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어. 끝내야 해...


  파티흐 아킨의 2017년작 '심판(Aus dem Nichts, In the Fade)'의 주인공 카티야의 이야기다. 이 글에서 카티야의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티야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카티야 역을 맡은 다이앤 크루거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배우에게 있어 영혼을 불사르는 '인생 연기'가 무엇인지 궁금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를 찾아볼 법 하다. 내 생각에 다이앤 크루거가 앞으로 어떤 배역의 연기를 하든 이 영화에서 자신이 연기했던 카티야를 넘어서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영화의 독일어 제목 'Aus dem Nichts'의 뜻은 '무
()로부터'이다. 영어 제목 'In the Fade'의 의미가 더 명징하게 다가온다. 소멸, 사라짐의 의미이다. 



*사진 출처: cinema.de



*내일은 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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