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 시대(The Hippie Movement)의 종언, Electra Glide in Blue(1973)


*이 글에는 'Electra Glide in Blue'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영화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무척. 그런 당신에게 어느 날 영화 연출의 기회가 온다. 사기가 아닌 진짜다. 자, 엉겁결에 감독이 되어 영화를 찍어야할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영화를 좋아하는 것과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대체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가?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럴 때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은 무엇일까? 정답은 '뛰어난 촬영 감독을 구하는 것'이다. James William Guercio는 그렇게 했다. 그가 제작사 United Artists로부터 'Electra Glide in Blue' 감독직을 제안받았을 때, 그가 한 일은 당시 최고로 잘 나가는 촬영 감독 Conrad Hall을 붙잡은 일이었다.

  Hall은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의 촬영 감독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그런 실력있는 인재를 섭외하는 일은 당연히 돈이 많이 든다. 제작비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구에르시오는 자신의 감독 급여를 포기했다. IMDb의 Trivia 항목에는 그가 자신의 급여를 1달러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콘래드 홀에게 지급했다고 나와있다. 그 액수가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Directed by'라는 오프닝 크레딧의 그 글자를 지키기 위해 돈 따위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초짜 신인 감독과 베테랑 촬영 감독, 'Electra Glide in Blue(1973)'는 그렇게 탄생했다. 물론 좋은 촬영 감독을 데려왔다고 해서 영화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적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 부족과 연출의 부재는 구에르시오의 감독직 수행에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했다. 주연 배우 Robert Blake는 나중에 이 영화는 자신과 촬영 감독이 거의 다 찍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떠들고 다녔다. 구에르시오가 촬영 현장에서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 뭔가 '안봐도 비디오'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기는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의 이름이 분명하게 박힌 연출작이다.

  그렇다면 왜 제작사 United Artists는 구에르시오 같은 생초짜 신인 감독을 데려다 영화를 찍었을까? 거기에는 메이저 영화사의 수익 악화라는 현실적 요인이 있었다. 1948년, 미국 대법원은 이른바 'Paramount Decision'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 판결은 영화 제작사의 수직계열 통합(제작과 배급에 이르는 일련의 사업체 소유)을 독과점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금지시켰다. 영화에 있어서 가장 큰 이익을 낼 수 있는 극장 소유가 금지되자 제작사들의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군소 제작사들이 매각되거나 해체되었고, 메이저 스튜디오들도 어려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 그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러던 중에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는 제작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토바이 히피족들의 마약 기행을 그린 이 영화는 엄청난 흥행수익을 냈다. 새로운 영화 인력의 발굴과 과감한 채용, 1970년대에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는 모두 이십 대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아마도 제작사 United Artists도 신인 구에르시오에게 그런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구에르시오는 뮤지션이자 록 밴드 'Chicago'의 프로듀서로 음악인이었지 영화인이 아니었다. 그가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분명하다. 존 포드 감독의 열렬한 팬으로 자신의 첫 연출작에 포드의 서부작에서 느꼈던 아우라를 덧입히고 싶어했다. 과연 그의 바램은 이루어졌을까? 'Electra Glide in Blue(1973)'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과 감탄이 번갈아가며 터져 나온다. 설득력이 없는 플롯과 크게 비어있는 내러티브는 한심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음악과 촬영 만큼은 거기에 비할 것이 아니다.  

  영화는 기이한 도입부로 시작된다. 프라이팬에서 두 조각의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동안,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떤 남자가 총으로 자살을 하는 장면이 교차편집으로 제시된다. 그 다음에 이어진 장면에서 주인공 존 윈터그린이 등장한다. 그는 애리조나 고속도로 순찰대의 경찰이다. 윈터그린은 동료인 Zipper와 짝을 이루어 과속 차량을 단속하는데, 그들이 싫어하는 히피족들이 주요한 단속 대상이다. 어느 날 그는 순찰 중, 사막 도로변 허름한 집에 사는 늙은 윌리의 시신을 발견한다. 부검의는 자살이라고 말하지만 윈터그린은 타살이라고 여긴다. 사건 담당인 풀 형사는 그런 윈터그린을 수사팀에 합류시키고 함께 수사해 나간다. 풀 형사는 범인이 히피족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막의 히피족 은거지에 가서 그들을 괴롭힌다. 윈터그린은 풀의 그런 행태에 넌더리를 낸다. 그러던 중에 풀은 자신의 아내가 윈터그린과 내연 관계인 것을 알아채고, 윈터그린을 도로 순찰대로 좌천시킨다. 지퍼는 돌아온 윈터그린에게 새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자랑한다. 그것이 죽은 윌리의 돈으로 산 것이라는 지퍼의 말에 둘은 언쟁을 벌이는데...

  영화 '이지 라이더(1969)'의 흥행 성공으로 스튜디오들은 그와 비슷한 아류작들을 찍어내는 데에 골몰했다. 'Two-Lane Blacktop(1971)', 'Vanishing Point(1971)'와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Electra Glide in Blue(1973)'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는 '오토바이'이다. 주인공 윈터그린은 고속도로 오토바이 순찰대원이며, 풀과 윈터그린이 방문하는 히피들의 근거지에도 오토바이가 줄줄이 놓여있다. 윈터그린의 동료 지퍼는 꿈에 그리던 오토바이 'Harley-Davidson Electra Glide'를 사려고 죽은 자의 돈까지 훔친다. 오토바이가 선사하는 속도와 자유로운 질주의 감각은 당시의 젊은 세대에게 소중하게 여겨졌다. 영화 속에서 '이지 라이더'의 포스터가 나오는 것도 볼 수 있다.

  거기에 '사막'이라는 공간성이 이 영화에 더해진다. 'Electra Glide in Blue'의 사막에서는 공권력과 히피들이 충돌한다. 과속을 하는 히피들의 오토바이를 단속하는 순찰대에게 히피들은 인생낙오자 같은 한심한 족속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히피들은 록 밴드의 공연에 열광하고(구에르시오는 밴드 Chicago와 함께 이 영화의 음악을 작업했다), 오토바이로 질주의 기쁨을 만끽하며, 사막 은거지에서 자기들끼리 평화롭게 지낼 뿐이다. 그런 히피들에게 경찰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부당한 공권력으로 비춰진다.

  '이지 라이더'를 시작으로 쏟아져 나온 일련의 '히피족+오토바이+자동차+고속도로' 영화들이 히피들에게 온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Electra Glide in Blue'에서 히피를 바라보는 관점은 기성 세대와 맞닿아 있다. 윈터그린의 동료 지퍼가 고속도로 순찰 중에 히피에게 보이는 집요한 괴롭힘, 형사 풀이 히피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들과는 달리 주인공 윈터그린은 히피들에게 다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한 경찰이기는 해도 그의 삶은 도덕적이지 않다. 수사팀 형사의 아내와 불륜 관계이며, 자신의 업무인 과속 단속은 운전자를 갈구는 흥밋거리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윈터그린은 지퍼가 전에 괴롭혔던 히피를 과속으로 불러세운다. 그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며 경고와 함께 보내지만, 히피가 잊어버리고 간 운전면허증을 돌려주기 위해 차를 따라잡는다. 그러나 자신들을 추격하는 것으로 오해한 히피는 윈터그린을 향해 총을 겨눈다. 애리조나 사막의 이정표 Monument Valley가 원경에 자리한 화면에, 윈터그린은 무한히 뻗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로의 한 가운데에서 피를 쏟으며 죽는다. 감독 구에르시오가 원했던 존 포드식 감성은 그런 기이한 마지막 장면으로 구현된다.

  'Electra Glide in Blue'의 길 잃은 서사와 연출력의 부재는 영화의 완성도를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당대 최고의 촬영 감독 콘래드 홀이 담아낸 애리조나 사막의 풍광과 오토바이 추격 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모든 결함을 메꾸고도 남는다. 비록 영화 제작에 문외한인 감독으로 촬영 현장에서 이리저리 휘둘려 다녔을 터이지만, 구에르시오는 자신이 잘하는 음악 하나는 기막히게 뽑아냈다. Directed by James William Guercio. 그렇게 그의 유일한 영화는 1970년대 미국 영화사에서 컬트적 지위를 차지했다.

  영화 속에서 윈터그린으로 상징되는 공권력은 히피에 의해 죽는다. 그러나 이제 히피들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보수층은 자신들의 불만을 계속해서 축적해 나가면서, 그들의 의견을 대변할 새로운 정권을 모색한다. 권토중래(捲土重來),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외치는 레이건의 시대는 1970년대 보수 세력의 절치부심 속에 1980년에 마침내 막을 올리게 된다. 'Electra Glide in Blue'의 마지막은 그런 면에서 매우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한 시대의 종언인 셈이다. 



*사진 출처: filmpuls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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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일본 드라마를 아주 열심히 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일본 현지에서 드라마가 방영되면, 그 주에 인터넷에 영상이 풀리고 자막 팀에서 자막 입혀서 나오는 시스템(?)으로 일드 팬들의 세계가 굴러갔었다. 일본 드라마에 대한 열정으로 열심히 자막 제작했던 일본어 능력자들 덕분에 일드를 잘 보았었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지만, 많은 일드 팬들의 마음 속에서 고마운 존재였다. 오래전에 보았던 일드들은 그 드라마와 함께 했던 인생의 한 조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시절에 보았던, 내 기억 속에 남은 구식 명작 일본 드라마를 뽑아보았다.


1. 오렌지 데이즈(オレンジデイズ, 2004)

  대학 졸업반 학생 5명의 이야기를 담은 청춘 성장 드라마. 이제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츠마부키 사토시의 젊은 날의 모습이 참 좋았더랬다. 당시에 잘 나가던 일본 청춘 스타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시바사키 코우가 츠마부키 사토시의 상대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청각장애인 역의 시바사키 코우가 보여주는 수화는 조용조용한 수화가 아니라 극중 성격처럼 자신의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화통한 수화를 사용한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 나름의 고민을 하는 청춘의 모습을 너무 무겁지 않게, 긍정적으로 그려냈다. 


2. 굿럭(GOOD LUCK!!, 2003)

  항공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 키무라 타쿠야, 츠츠미 신이치, 시바사키 코우, 쿠로키 히토미가 나온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과거의 상처와 씨름하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이 드라마에 로맨스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는 것은 트라우마의 극복과 재생이다. 과거에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살아낼 것인가를 두고 주인공들은 고민한다. 조종사 역을 맡은 키무라 타쿠야와 츠츠미 신이치의 연기도 좋지만, 동료 조종사 타케나카 나오토의 감초 연기는 언제 봐도 즐겁다. 윤손하도 조연으로 나온다.


3. 야마토나데시코(やまとなでしこ, 2000)

  마츠시마 나나코가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로맨스 드라마. 부에 대한 선망과 허영심으로 가득한 항공사 승무원 진노 사쿠라코가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짜임새 있게 그려냈다. 마츠시마 나나코의 상대역으로는 츠츠미 신이치가 나온다. 둘의 연기 호흡도 좋다. 마츠시마 나나코는 이 드라마를 통해 명실상부한 일본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한다. MISIA가 불렀던 주제곡도 기억에 남는다.  


4. 런치의 여왕(ランチの女王, 2002)

  이제는 세상을 떠난 타케우치 유코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드라마. 타케우치 유코가 발산하는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의 에너지는 언제나 보기가 좋았다. 늘 맛있는 점심을 먹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생각하는 나츠미가 '키친 마카로니'를 운영하는 집안에 들어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즐거운 소동을 그려냈다. 츠츠미 신이치, 에구치 요스케, 츠마부키 사토시, 야마시타 토모히사, 이 4형제가 모두 나츠미를 좋아하게 된다. 과연 나츠미의 선택은? 오므라이스 가게의 비법 '데미그라스 소스'가 드라마 내내 풍기는듯한 음식+인생+로맨스 드라마.


5. 비기너(ビギナー, 2003)

  '후지 TV의 게츠구(げつく, 월요일 저녁 9시) 드라마'는 뭔가 확실한 재미를 보증하는 수표처럼 여겨졌다. '비기너'도 역시 그 게츠쿠 드라마였다. 사법연수원에 들어온 다양한 경력의 8명 신참 연수생들이 좌충우돌하며 법조인의 세계에 들어서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 드라마는 '비기너(Beginner)'라는 제목에 걸맞게 경력의 첫 단추를 꿰는 이들의 직업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매회의 에피소드에 재미와 감동이 적절하게 들어가 있다. 아주 즐겁게 보았던 드라마.


6. 퓨어(Pure, 1996)

  아, 이 오래된 드라마를 기억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와쿠이 에미와 츠츠미 신이치가 주연을 맡았다. 지적 장애를 가졌지만 예술적 재능이 있는 처자가 과거의 상처를 가진 신문기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 뭐 이렇게만 적어놓고 보면 그 드라마 재미있겠어, 싶지만 이 드라마야말로 내가 일드의 세계에 들어서게 해준 작품이다. 당시 화질 떨어지는 240p로 봤어도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1990년대 일본 드라마 동영상 화질은 대개가 240p였던 시절. 신작 드라마 480p는 아주 드물었고, 360p를 구하면 감지덕지했었다. 와쿠이 에미는 이 드라마에서 괜찮은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후 경력이 그리 잘 풀리지는 않았다. 츠츠미 신이치의 초기 경력에 해당하는 작품이지만, 배우로서의 가능성은 '퓨어'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7. 하얀 그림자(白い影, 2001)

  타케우치 유코와 SMAP의 리더 나카이 마사히로가 주연을 맡았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의사와 사랑에 빠진 간호사의 이야기. 눈물 쥐어짜내는 최루 드라마 아니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어둡지는 않다. 끝이 보이는 사랑에, 주어진 시간 동안 삶에 최선을 다하려는 의사 역할은 나카이 마사히로가 연기한다. 마초에다 성질도 더러운 이 의사 양반의 치명적 매력에 타케우치 유코가 끌려간다. 나카이 마사히로의 연기력에 놀랐던 작품.


8. 골든볼(ゴールデンボウル, 2002) 

  볼링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드라마. 카네시로 타케시(금성무)와 쿠로키 히토미가 주연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드라마 주연을 중년 여성 배우가 맡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쿠로키 히토미는 그걸 해냈다. 질척거리는 사랑 타령 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느낌을 주는 '스포츠 드라마'라고 해야 하나? 주연 배우를 비롯해 조연들이 맡은 배역들 모두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가 있어서 좋았다.


9. 모래그릇(砂の器, 2004)

  작가 마츠모토 세이초의 장편 추리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 나카이 마사히로가 주인공 와가 에이료 역을 맡아 열연했다. 자신이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음악가, 그리고 살인범을 추적하는 형사. 원작의 탄탄한 이야기 구조가 드라마의 흡인력을 만들어 낸다.


10.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愛なんていらねえよ、夏, 2002)

  와타베 아츠로,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그야말로 '일드의 전설'이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을 작품. 여자들 갈취하며 살아가는 막장 인생 호스트 레이지. 그는 부잣집 상속녀 아코의 재산을 노리고 아코가 어린 시절에 헤어진 오빠로 접근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코는 레이지를 진짜 오빠라고 생각하며 따른다. 이 둘 사이에 일어나는 여름날의 사랑 이야기. 와타베 아츠로가 애절하게 '아코!'를 외치는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11. 섬머 스노우(Summer Snow, 2000)

  토모토 츠요시와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가슴 짠한 로맨스 드라마. 당시 히로스에 료코의 연기력은 정말이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 그냥 자신이 맡은 배역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동생들을 데리고 사는 청년 가장 나츠오와 심장병을 앓는 유키의 사랑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가슴 아픈 결말과 함께 Sissel이 부르는 동명의 타이틀 주제가 'Summer Snow'도 마음에 남는다.


12. 장미없는 화원(薔薇のない花屋, 2008)

  드라마 작가 노지마 신지의 작품은 관객에 따라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린다. 극단적인 성향의 캐릭터들에다, 작가가 그리는 이야기들이 강한 색채를 가지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의외로 '장미없는 화원'은 부드러운 노지마 신지를 보여준다. 미스터리와 로맨스가 기묘하게 결합된 이 드라마는 결말에 다가갈수록 이야기의 힘이 빠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카토리 싱고와 타케우치 유코의 좋은 연기가 그런 결함을 상쇄시킨다. 어린 딸을 키우며 꽃집을 운영하는 한 남자에게는 비밀스런 과거가 있다. 비밀과 오해, 복수극이 기묘한 무늬를 짜가며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사진 출처: mtv.tokyo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2002)'의 히로스에 료코와 와타베 아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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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kfors 부부의 다큐 두 편;

Raising a School Shooter(2021)와 Pervert Park(2014)


1. 학교 총기 난사범을 키운 것은 누구인가, Raising a School Shooter(2021)

  "나는 그 아이가 그곳에서 죽었기를 바랬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죽는 것을 바라는 부모가 있을까? Sue Klebold는 그랬다. 수의 아들은 1999년에 있었던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Columbine High School massacre)의 주범인 Dylan Klebold였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Elephant, 2003)'는 그 사건을 극영화로 만든 것이다. Frida Barkfors와 Lasse Barkfors의 2021년작 다큐 'Raising a School Shooter'는 학교 총격 사건 주범을 아들로 둔 세 부모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 다큐는 BBC Four의 다큐 프로그램 'Storyville'에서도 방영되었다.

  딜런 클레볼드와 친구 에릭 해리스가 저지른 총기 난사로 15명이 죽었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 자신의 아들이 주범일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는 차라리 아들이 그곳에서 죽기를 바랬다고 말한다. 딜런과 에릭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건 이후, 수에게는 총격범을 키워낸 엄마라는 비난과 분노가 쏟아졌다. 1988년, Atlantic Shores Christian School에서 니콜라스 엘리엇은 3개의 화염 폭탄, 반자동 권총 및 200발의 탄약을 가져가 교사 1명을 죽이고 다른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니콜라스의 아버지 클레런스는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인 아들을 30년 넘게 기다리고 있다. 2001년의 'Santana High School shooting' 사건의 주범인 15살 앤디 윌리엄스는 총기로 2명의 학생을 죽이고, 1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제프는 50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인 앤디의 아버지이다.

  '당신들이 자식을 잘못 키운 거야'라고 그 세 명의 부모를 비난하는 것은 사건을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들은 좀 다른 관점을 채택했다. '과연 그것이 온전히 그 부모만의 잘못일까?', 그런 질문에서부터 이 다큐는 출발한다. 물론 목숨을 잃은 희생자와 평생을 안고 갈 후유증을 얻게된 부상자들이 존재하는데, 총격범의 부모도 피해자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Raising a School Shooter'는 범인들 부모의 개인적인 일상을 담담히 응시한다. 그들 부모에게도 살아가야할 남은 시간들이 있다.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비우고, 동네 술집에 들르고, 마트에 가는 일상의 시간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들은 과거의 그림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세 명의 부모 가운데 가장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딜런의 엄마 수 클레볼드이다. 총격 사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들의 장례식을 치룰 때, 수는 관에 누워있는 아들의 손을 어루만지며 '제발 너를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며 울었다. 경찰이 사건 발생 6개월 후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 수는 아들의 범행이 계획적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어떻게 자신의 아들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모든 것들이 다 죽어버렸어요. 하느님도, 진실에 대한 내 믿음도, 내 가족과 딜런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조차도요.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난 거죠."
 
  세 명의 부모들은 대중과 언론의 비난을 받았고, 자신들이 속한 지역 공동체에서 배척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총격범의 부모'라는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딜런의 엄마 수가 사건의 원인으로 아들의 정서적 문제와 성격적 결함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과는 달리, 다른 두 총격범의 부모 클레런스와 제프는 좀 다른 입장에 서있다. 그들은 자식이 저지른 범행이 크나큰 범죄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거기에는 학교 폭력이라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니콜라스와 앤디는 모두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의 지속적인 괴롭힘을 받았다.

  클레런스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가혹한 형량과 가석방 신청이 6번이나 거부된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겪는 인종적 편견과 사회적 약자로서의 위치를 에둘러 표현한다. 30년 넘게 감옥에 있는 아들이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70대 노인의 바램은 뻔뻔한 것일까? 어쩌면 그는 살아있는 동안 감옥 밖에서 아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앤디의 아버지 제프는 새로운 반려자를 만나서 삶을 꾸려감으로써 자식이 드리운 과거의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수는 딜런의 성장과정에서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정서적 고통과 성격적 결함을 깊이 성찰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해나갈 바를 찾아냈다.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에 대한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하는 데에 목소리를 냈다. 책을 펴내고 강연도 했다. 이 강인한 엄마는 살아왔던 지역 공동체를 떠나지 않았다. 요가를 하고, 댄스 수업을 듣는 수의 일상을 보는 것은 관객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수는 총격범의 엄마로서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할 죄책감과 함께, 아들의 죽음으로 자신과 가족이 겪었던 심리적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관객은 수와 제프, 클레런스, 이 세 명의 총격범 부모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과 마주한다. 과연 '학교 총격범을 길러낸 것(Raising a School Shooter)'은 누구인가? 결국엔 '만약(if)'으로 시작되는 가정문의 질문들을 던질 수 밖에 없다. 만약 그 부모들이 청소년 자녀의 정서적 문제를 좀 더 일찍 알아차리고, 적절한 치료를 받게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만약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겪었던 괴롭힘과 폭력의 문제를 학교 당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섰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쉽게 총기에 접근할 수 없었더라면...'

  다큐가 시작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자막이 뜬다. '1970년 이후 미국의 학교에서 발생한 총기 사건은 1677건이며, 598명이 사망했고 1626명이 부상했다. 총격 사건 주범의 연령은 18세 이하이다.' 2012년에 '샌디훅 총기 난사 사건(Sandy Hook Elementary School shooting)'이 발생했을 때, 나는 그 사건이 미국 사회에 총기 규제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총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드러냈다.

  자기 보호의 수단으로서의 '총기의 소유에 대한 자유'는 미국 수정 헌법 2조에 보장되어 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 자경권의 법적 개념, NRA(전미 총기 협회)의 막강한 로비력, 총기에 대한 미국민들의 격렬한 찬반 양론, 그 모든 것이 총기 문제에 축약되어 있다. 합리적이고 획기적인 방식의 총기 규제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 다큐에 나온 부모와 같은 이들, 그리고 학교에 총을 들고 가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이들이 계속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렇게 Frida Barkfors와 Lasse Barkfors의 이 통찰력 있는 다큐는 관객들로 하여금 청소년의 학교 총기 범죄를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문제로 확장시켜 성찰하게 만든다.


2. 변태 공원의 그들, Pervert Park(2014)

  미국 플로리다주의 Saint Petersburg에 가장 위험한 트레일러 공원(Trailer Park, 이동식 주택 단지)이 있다. 'Pervert Park'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100여명의 출소한 성범죄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 각각 덴마크와 스웨덴 출신인 부부 제작자 Frida Barkfors와 Lasse Barkfors의 2014년작 'Pervert Park'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변태들의 공원'쯤 될 것이다. 그곳에는 성범죄자의 사회복귀와 재활을 돕는 민간인들이 있다. 20년 전, 아들이 체포된 이후에 성범죄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자선 사업가는 그들이 출소한 이후에 겪는 주거 문제를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조성된 곳이 바로 그 'Pervert Park'였다. 다큐는 그곳의 거주자들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모습을 담았다.    

  성범죄자와 이웃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마땅히 살 곳을 구하지 못해 'Pervert Park'에 모인 이들은 모두 성범죄자들이다. 이 다큐를 보려는 이들은 우선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아 두어야만 한다. 온갖 종류의,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성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다큐도 역시 BBC 채널 Four의 'Storyville'을 통해 2019년에 방영이 되었다. 공영방송으로서 BBC는 자신들이 가진 사명감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핏 보기에 성범죄자들이 나오는 이런 다큐를 공중파를 통해 내보낸다는 것은 상당한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깊이있는 다큐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런 관점에서 과감하게 이 다큐의 편성을 결정한 'Stroyville' 제작진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일종의 느슨하게 연결된 공동체로 운영되는 그곳에는 거주자들을 위한 집단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비롯해 취업 지원과 생활 지원이 이루어진다. 상주 상담가는 자신이 왜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들려준다. 성범죄 피해자들을 도왔던 그는 한 명의 성범죄자를 재활시킨다면 10명의 피해자들을 막을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진행하는 집단 상담에서 거주자들이 말하는 범죄 경력은 충격적이다 못해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성추행 범죄자, 소아성애자, 강간범들은 무미건조하게 범죄와 삶의 이력을 털어놓는다. 성범죄자들은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도 있다.

  "결국엔 다 자기변명일 뿐이죠. 모두들 한다는 말이 다 어린 시절에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거야. 그런 일 겪었다고 모두 성범죄자가 되나?"

  동성애자로 자신도 성범죄자인 남자는 상담에 참여한 이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도 그럴 것이 다큐에서 인터뷰에 나오는 이들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거의 대부분 끔찍한 성학대와 추행으로 얼룩져 있다. 마치 악습이 대물림되듯 성범죄 피해자였던 그들은 성인이 되어 가해자의 위치로 쉽게 자리바꿈을 한다. 아마도 이 다큐에서 가장 비극적인 경우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여자가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저질렀던 범죄일 것이다. 여자는 아들과 격리되어 감옥에서 살다 나왔고, 그 아들은 커서 비행을 저지르다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정말이지 범죄와 트라우마의 악순환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얼마 안되어 성범죄로 감옥에 다녀온 20대 엘리트 성범죄자도 있다. 미성년자 추행죄로 1년을 살다 나온 그는 그곳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 5년, 10년 살다 나온 것에 비하면 자신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고 안도한다. 그러나 평생을 두고 자신을 따라다닐 성범죄 이력은 이 청년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곳에서 관리자 일을 하고 있는 40대의 남자는 살아온 인생 절반에 해당하는 2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과연 'Pervert Park'에 사는 그런 이들에게 재활, 사회로의 복귀는 실현 가능한 명제일까?

  결국 다큐가 던지는 질문은 그런 것이다. 성범죄자들을 감옥에 영구격리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들의 재범 확률을 낮추고 사회 복귀를 도울 것인가?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서 사회에 들어온 이들을 일반인들은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생각해 보면 모두 다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Frida Barkfors와 Lasse Barkfors의 '사회적 낙인 3부작(trilogy of social stigma); Pervert Park(2014), Death of a Child(2017), Raising a School Shooter(2021)'의 시작인 이 작품은 그들이 이후 제작할 다큐의 청사진으로 자리한다. 공동 제작자로서 Barkfors 부부는 범죄가 개인과 사회의 연결망 속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다큐의 마지막에는 인터뷰했던 'Pervert Park' 거주자들의 범죄 이력이 차례대로 제시된다. 다큐 이후에 그들은 '변태 공원'을 떠나 사회 속으로 돌아갔을까? 'Pervert Park'는 사회가 그들을 위한 생존의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고 있음을 일러준다.



*사진 출처: filmaffinity.com


**사진 출처: spectacularoptical.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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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드라이브 마이 카'를 관람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최대한 스포일러를 넣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글의 전개상 어쩔 수 없이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편한 독자들은 나중에 영화를 본 후에 이 글을 읽기 바랍니다. 


1. 영화를 보기 전에

  누군가 영화 사이트 게시판에 이런 질문글을 올린 것을 읽었다.

  "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려고 하는데, '바냐 아저씨'를 읽고 가야 하나요?"

  영화를 본 사람으로서 내 대답은 이렇다. '네, 그래요.' 3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동안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대사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그러니 그 희곡을 모르면 이 영화를 온전히 감상해낼 재간이 없다. 그럼 인터넷으로 줄거리 요약이나 독서 유튜버가 축약 설명하는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괜찮을까? 안타깝게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만나려는 관객은 영화를 보기 전에 안톤 체호프와 마주해야만 한다. 과연 하마구치 류스케는 관객에게 강제로 독서하게 만드는 감독일까?

  "나는 그저 '바냐 아저씨'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하마구치 류스케, filmcomment.com과의 인터뷰 가운데)."

  하마구치 류스케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제작이 결정되고 나서 한 일이 그것이었다. 그러니 관객은 체호프를 읽는 것 외에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2013년에 문예춘추에 아주 짧은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ドライブ・マイ・カー)'를 발표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 단편을 토대로 자신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갔다. 소설이 대강의 뼈대를 제공했다면, 체호프는 거기에 덧붙여진 건축 자재들이다. 그것을 조화롭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축조해낸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라는 틀 안에 문학을 녹여낸 하이브리드 장인인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과 함께 언급해야할 또 다른 희곡은 영화 초반부에 주인공 카후쿠가 출연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이 희곡은 오지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의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한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연극 사랑은 영화 '아사코(Asako I & II, 2018)'에서도 드러난다. 헨릭 입센의 희곡 '들오리(The Wild Duck)'와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Three Sisters)'는 그 영화를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가 된다. 거기에 고초 시게오(牛腸茂雄)의 사진집 'Self and Others'도 추가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감독은 연극을 사랑하며, 특히 체호프의 광팬임이 분명하다. 

  '해피 아워(Happy Hour, 2015)'의 5시간 17분을 견딘 관객이라면, '드라이브 마이 카'의 3시간은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해피 아워'로 알 수 있듯, 하마구치 류스케는 압축과 생략의 방식을 통해 영화를 간결하게 만들기 보다는, 하나의 이야기가 결말에 이르는 여정을 자세하게 풀어서 보여주고 싶어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러닝타임 3시간의 주요한 부분은 주인공 카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리허설 과정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비롯해 표준 중국어(Mandarin), 한국 수화(手話)가 섞인 다국적 언어의 연극은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각자 다른 언어로 말하는 배우들이 공연하는 '바냐 아저씨'를 통해 하마구치 류스케는 언어의 형식을 뛰어넘은 '감정의 소통'과 '상처의 치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2. 상실의 시간으로서의 중년, 그리고 치유의 여정

  서로 다른 삶의 배경과 이야기를 지닌 두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주인공 카후쿠와 미사키가 그들이다. 그들이 만나기 이전의 카후쿠의 이야기를 하마구치 류스케는 프롤로그(prologue)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오프닝 크레딧은 바로 그 40분 정도의 프롤로그가 끝날 무렵에 뜬다. 연극 배우이며 연출가인 카후쿠는 글을 쓰는 아내 오토와 단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카후쿠는 연극 대본을 아내의 낭독으로 녹음한 테이프를 자신의 차에 늘 틀어놓고 연습한다. 어느 날, 해외 출장을 가려고 공항에 도착한 카후쿠는 날씨가 좋지 않아 비행기 예약이 미뤄졌다는 통보를 받는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온 그는 아내가 낯선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집을 나온 카후쿠는 그 일에 대해 이후로도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 지낸다. 그러다 그는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는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서막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후, 카후쿠는 히로시마 연극제의 초빙 연출가로 다국적 언어로 공연되는 '바냐 아저씨'를 맡는다. 공연에 출연할 배우들은 오디션으로 뽑는데, 그 오디션에서 카후쿠는 아내의 내연남이었던 젊은 배우 타카츠키와 마주한다.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서 타카츠키를 본 기억을 떠올린다. 주연인 바냐 아저씨를 카후쿠가 할 것이라는 주위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그 배역을 타카츠키에게 준다. 타카츠키는 극에서 47세인 바냐 역할을 젊은 자신이 떠맡은 것을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연극에 참여한다. 그렇게 카후쿠와 타카츠키의 뜻밖의 인연이 이어진다.

  한편, 연극제에서는 초빙 예술가의 안전을 위해 카후쿠에게 전담 운전기사를 붙여준다. '미사키'라는 이름의 골초이며, 과묵한 젊은 여성 운전자는 그렇게 카후쿠의 오래된 수동 클래식 자동차를 몰게 된다. 차 안에서 틀어놓는 '바냐 아저씨' 대본 테이프를 매개로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히로시마에서 새롭게 만나게 된 미사키와 타카츠키를 통해 카후쿠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데...

  관객은 영화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카후쿠가 겪고 있는 상실을 바라보게 된다.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병원에 가게 된 카후쿠는 녹내장을 진단받는다. 약물로 시기를 늦출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시력의 손상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아내와 함께 죽은 딸의 기일을 절에서 보내는 장면에서는 그가 오래전에 자식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그는 아내의 부정(不貞)을 알게 된 것에 뒤이어 죽음을 목격한다. 카후쿠가 연기하는 연극 속의 '바냐 아저씨'는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중년이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고통스러워 한다. 젊음도, 사랑도 이미 지나가 버렸다. 원래는 누이의 것이었지만, 누이의 죽음으로 매형 소유가 된 영지와 저택을 근근이 꾸려오는 동안 그의 시간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그는 한탄한다.


  "난 마흔 일곱이야. 아마 예순 살까지 살겠지. 13년이나 남았어. 내겐 영원과도 같아. 어떻게 그 13년을 견디지? 내가 어떻게?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냔 말이지..."

(I am forty-seven years old. I may live to sixty; I still have thirteen years before me; an eternity! How shall I be able to endure life for thirteen years? What shall I do? How can I fill them?)

  체호프의 그 희곡 대사를 외울 때, 카후쿠는 바냐 아저씨가 아니라 그 자신이 된다. 또한 그는 공연 도중에 '바냐 아저씨' 1막의 대사, '그 여자의 정조란 가식이며 부자연스러운 것(such fidelity is false and unnatural)'이라고 말할 때에 북받히는 감정으로 대사를 더 잇지 못하고 무대에서 퇴장한다. 자신이 목격한 아내의 불륜이 그에게 수치스런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점차로 카후쿠에게 '바냐 아저씨'는 연기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공연해야하는 무거운 숙제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초빙한 연극제 주최 측의 바람과는 달리 바냐 아저씨 배역을 포기한다. 대신에 그것을 아내의 내연남이었던 타카츠키에게 넘긴다.

  무엇보다 카후쿠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아내의 죽음과 관련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스런 죄책감이다. 그는 갑작스런 뇌출혈로 세상을 뜬 아내의 죽음을 자신이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상처는 운전 기사 미사키가 들려주는 상실의 트라우마와도 기이하게 겹친다. 산사태로 엄마를 잃고 자신은 살아남은 미사키는 과거의 재난이 드리운 깊고 무거운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다. 미사키 또한 엄마의 죽음에 대한 마음의 빚을 털어내지 못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진다.

  카후쿠와 미사키가 나누는 감정의 색깔은 사랑일까? 가까워진 남녀의 사이를 '연인'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편협한 시각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친구, 또는 어떤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그 관계를 통해 두 사람은 자기 앞의 생을 담담히 응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카후쿠와 미사키는 각자의 삶에서 치유의 여정을 시작한다.

  카후쿠는 갑작스런 타카츠키의 하차로 연극이 취소될 위기에 처하자 바냐 아저씨 역을 마지못해 떠맡는다. 마침내 연극이 상연된다. 무대 정면의 스크린에 다국적 언어의 자막이 뜨는 가운데 카후쿠는 청각 장애인 배우 윤아가 맡은 소피아와 함께 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른다. 영화 속에서 수화로 표현되는 소피아의 대사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해요. 그래요. 우린 살아야 해요. 우리 앞에는 길고 긴 밤과 낮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는 운명이 우리에게 떠안긴 짐을 견뎌야 하죠. 쉼없이 누군가를 위해 일해야만 할 거에요. 그렇게 우린 늙어갈 거에요. 마침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왔을 때, 비로소 무덤 너머의 것과 겸손하게 마주하게 될 테지요. 우리는 지난 삶을 돌아보며,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거에요. 그리고 신은 그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겠지요. 아, 바냐 삼촌, 우리는 결국 아름답게 빛나는 삶을 만나요. 우리의 슬픔이 있던 이 자리를 기쁨으로 돌아보면서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쉬게 되겠지요. 바냐 삼촌, 난 그런 열렬한 소망을 갖고 있답니다."

(What can we do? We must live our lives. [A pause] Yes, we shall live, Uncle Vanya. We shall live through the long procession of days before us, and through the long evenings; we shall patiently bear the trials that fate imposes on us; we shall work for others without rest, both now and when we are old; and when our last hour comes we shall meet it humbly, and there, beyond the grave, we shall say that we have suffered and wept, that our life was bitter, and God will have pity on us. Ah, then dear, dear Uncle, we shall see that bright and beautiful life; we shall rejoice and look back upon our sorrow here; a tender smile—and—we shall rest. I have faith, Uncle, fervent, passionate faith.)


3. 비어있음의 미학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카후쿠가 다국적 언어로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이다. 서로 다른 국적의 연기자들, 거기에 청각 장애인 배우까지 그들은 각자의 언어로 대사를 소화한다. 오디션 장면에서 타카츠키가 아스트로프를, 대만 여배우 재니스가 엘레나를 맡아 극의 한 장면을 연기한다. 관객은 어떻게 상대방의 언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를 해낼 수 있을까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이루어진다. 몸짓과 감정 표현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배우들 사이에서 바로 그대로 전달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어를 넘어선 그런 교감의 연기는 야외에서 이루어진 재니스와 윤아의 연습 장면에서도 재연된다. 재니스는 중국어로, 윤아는 수화로 연기하는 그 장면은 '바냐 아저씨'에서 의붓 엄마 엘레나와 전처 소생의 딸 소피아가 나누는 대화이다. 엘레나는 소피아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오해와 불편한 감정을 풀기 위해 노력한다. 두 사람은 마침내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데, 그 연기 장면에서의 따뜻함이 관객들에게도 전해진다.

  자신의 영화 시나리오를 대부분 직접 쓰는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터뷰에서 늘 '대사'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어떻게 하면 대사가 배우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는지, 배우들이 그 대사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중점을 두고 다듬는 작업을 한다고 밝혔다. 그에게는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배우 개인이 가진 특성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 것이 연출의 주요한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하마구치 류스케는 배우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연기를 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가진 역량에서 최대한의 것을 끌어내기 위해 협의와 공감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이것은 그의 영화 경력 초창기 때 생긴 어려움에서 습득된 것이다.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와 영화를 찍게 되었을 때 감독으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가 그의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배우에게 연기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 이런 하마구치 류스케의 연출 방식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카후쿠가 타카츠키에게 설파하는 연기론과도 맞닿아 있다. 타카츠키는 언어가 다른 배우들이 함께 연기를 하는 것에 회의를 내비친다. 앞서 언급한 재니스와 윤아의 야외 연기 장면도 그런 타카츠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카후쿠는 타카츠키가 가진 자아의 경직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텍스트에 적힌 대사 그 자체에만 의미를 한정짓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일러준다.

  "텍스트에 여백을 주게. 그래서 그것이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말이지."

  감독이 자신이 생각한 연출 의도를 배우에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에게 자기 표현의 자리를 주는 것. 그리고 희곡 대본의 활자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거기에 여백을 허용하는 것. 그 두 가지 경우 모두 '비어있음의 미학'과 연결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속 인물들에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움'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관객들은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이 영화나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현실의 일상 어딘가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나에게 그것이 가장 생생하게 다가온 캐릭터는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였다.

  텍스트에 여백을 허용하지 못하는 경직성, 자신이 우선으로 하는 신념과 가치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하는 편협함. 결국 타카츠키의 닫힌 캐릭터는 스스로에게 파국을 가져온다. 여백을 허용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어주는' 의지적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서도 적용된다. 인생의 구멍과도 같은 상처와 상실을 억지로 메꾸려고 하는 대신, 그곳으로 시간과 아픔이 흘러가도록 바라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의 마지막, 한국에서 지내는 미사키의 모습이 비춰진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가는 미사키의 차는 카후쿠의 것이다. 그리고 그 차에는 귀여운 레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 한다. 청각 장애인 배우 윤아의 집에 미사키가 카후쿠와 초대받았을 때, 미사키의 마음에 들었던 레트리버가 이제 옆에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미사키는 이제 자신의 차가 된 카후쿠의 차를 운전하면서 평온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카후쿠에게 히로시마에서의 연극 '바냐 아저씨'와 미사키와의 만남이 치유의 시작점인 것처럼, 카후쿠와 그의 연극을 통해 미사키도 같은 여정에 들어선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꽤 괜찮은, 참으로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감독이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이정표 같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2021-2-bad-luck-banging-or-loony.html

영화 '아사코(Asako I & II, 201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asako-i-ii-2018.html

영화 '해피 아워(Happy Hour, 2015)'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chilly-scenes-of-winter1979-happy.html


*글 속에 인용한 희곡 대사 부분은 직접 번역했다.
   
**사진 출처: tiff.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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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만난 바냐 아저씨, 세 편의 영화로 만들어진 Uncle Vanya


바냐 아저씨(Дядя Ваня, 1970),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 1시간 44분 
바냐 아저씨(Uncle Vanya, 1991), 그레고리 모셔 감독, 2시간 10분
42번가의 바냐(Vanya on 42nd Street, 1994), 루이 말 감독, 1시간 59분

 


1. 들어가며

  희곡 대본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일은 과연 쉬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작품성이 검증된 대본이 나와있으니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평론가들조차도 연극 공연을 그냥 영화로 찍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시드니 루멧이 1962년에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를 영화로 만들어 내놓았을 때도 그런 반응이었다. 루멧은 자신의 경력을 Off-Broadway(브로드웨이의 소규모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감독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연극적 공간과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또 뛰어난 영화 감독으로서 영화 제작의 메커니즘도 꿰뚫고 있었다. 그런 그의 연극에 대한 애정으로 만든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냉대를 받았다. 그들의 눈에 루멧의 영화는 공연되는 연극을 카메라 한 대 놓고 찍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시드니 루멧은 영화 평론가들의 무지와 한심함에 분개했다. 등장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 묘사를 위해서 루멧은 다양하게 쇼트들을 구성했다. 표준 렌즈를 비롯해 장촛점 렌즈와 광각 렌즈를 번갈아 가며 공간의 깊이를 달리해서 보여줬는데, 그걸 알아차리는 평론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촬영의 기본적인 메커니즘도 모르는 평론가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루멧이 '밤으로의 긴 여로'를 통해 받았던 오해와 혹평은 희곡을 영화로 만드는 감독이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위대한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희곡 '바냐 아저씨(Uncle Vanya)'는 1898년에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인 1899년에 초연된 이후, 이 연극은 고전으로 자리잡으면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연히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세 편의 영화를 뽑았다. 구 소련 시절 모스 필름(Mosfilm)에서 제작된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1970년도 영화, 1991년에 영국 BBC와 미국 WNET TV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TV용 영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이 말 감독의 1994년작 '42번가의 바냐(Vanya on 42nd Street)'이다. 이들 영화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호프의 희곡을 영화적으로 변주했는지 살펴 보려고 한다.


***바냐 아저씨 줄거리***

  47세의 이반(바냐 아저씨)은 어머니 마리아, 조카 소피아와 시골 영지 저택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먼저 떠난 누이의 지참금이었던 저택은 매형 세레브리야코프 교수의 것이 되었다. 세레브리야코프는 25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뒤로 하고 젊은 아내 엘레나와 시골로 내려왔다. 바냐는 젊은 날 자신이 사랑했던 엘레나가 늙은 교수와 결혼해서 사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는 엘레나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지만 엘레나의 마음은 딴 데 있다. 자신의 늙음과 병고로 신경질을 부리는 남편에게 지친 엘레나는 바냐의 집에 잠시 머무르는 마을 의사 아스트로프에게 매혹된다. 세레브리야코프의 딸 소피아는 아스트로프를 6년 동안 사모해왔지만, 아스트로프는 그런 소피아에게 무관심하다.

  아스트로프는 엘레나를 유혹하고, 바냐는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고 절망한다. 소피아도 아스트로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세레브리야코프는 보다 여유로운 삶을 위해 바냐의 저택과 영지를 처분하겠다고 선언한다. 적은 보수를 받고 그동안 영지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수익금을 교수에게 보냈던 바냐는 자신과 조카의 삶이 무너질 수 있는 위기에 격분한다. 바냐는 교수를 비난하고 모욕을 주고,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의 무능함을 지적하며 사위를 두둔한다. 바냐는 교수에게 총을 쏘지만 빗나간다. 그 모든 상황에 놀라고 정나미가 떨어진 세레브리야코프는 아내와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스트로프도 떠난다. 소피아는 희망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바냐 삼촌을 위로하며,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시드니 루멧의 '밤으로의 긴 여로(1962)'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448507


2. 가장 러시아적인 콘찰로프스키의 '바냐 아저씨'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Andrei Konchalovsky) 감독은 친분이 있던 배우 이노켄티 스목투노프스키(Innokenti Smoktunovsky)와 체호프의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목투노프스키는 영화 배우이면서 연극 쪽에서 더 많은 공연을 했다. 모스필름은 콘찰로프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전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1970년에 제작된 이 영화에 컬러와 흑백 필름이 혼용되어서 사용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비싼 컬러 필름을 제공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모스필름은 제공되는 필름의 일부분을 흑백 필름으로 떠넘겼다. 콘찰로프스키 감독은 하는 수 없이 두 종류의 필름을 가지고 촬영을 해야만 했는데, 그의 탁월한 감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콘찰로프스키는 희곡 대본이 갖는 연극적 공간의 평면성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식을 사용했다. 장면에 따라 흑백과 컬러를 적절히 나누어 찍었고, 인물과 공간을 보여주는 쇼트들의 구성에도 변화를 주었다. 연극에서 '암전
(轉)'에 해당하는 막의 전환은 인물의 얼굴에 비추어지는 조명을 서서히 어둡게 함으로써 표현했다. 콘찰로프스키는 체호프의 희곡 대본에 충실하기는 했으나,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옮기지는 않았다. 그 예로 2막에 나오는 엘레나와 바냐의 독백 부분이 생략된 것을 들 수가 있다. 아마도 그는 그 부분이 너무나도 연극적으로 보여서 자연스럽게 대화로 이어지는 흐름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콘찰로프스키의 '바냐 아저씨'를 가장 러시아적인 것으로 만든 일등 공신은 주인공 바냐 아저씨 역을 연기한 이노켄티 스목투노프스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낭비한 인생에 대한 회한과 과거에 대한 향수로 살아가는 '바냐 아저씨'란 캐릭터를 절제되고 깊이있는 연기로 보여준다. 배우들 사이의 연기 앙상블도 좋은 편이다. 의사 아스트로프 역을 맡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Sergei Bondarchuk)는 솔직히 그 배역과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감독으로도 유명했던 본다르추크는 원래 VGIK(러시아 국립 영화학교) 연기과 출신으로 배우로도 활약했다. 영화 속 본다르추크의 연기에는 다소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연기력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본다르추크는 의사인 아스트로프가 귀족 출신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값비싼 좋은 의상을 입고 싶어했다. 그와는 달리 콘찰로프스키는 후줄근하고 구깃구깃한 평상복을 입으라고 지시했다. 촬영 내내 사사건건 부딪혔던 두 사람의 갈등은 급기야 불미스럽게 끝났다. 영화를 끝내고 당 중앙위원회로 달려간 본다르추크는 콘찰로프스키의 이 영화가 반 러시아적이며, 반 체호프적인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걸 속어로 표현한다면 '곤조 부린다'에 딱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 본다르추크의 어깃장과는 관계없이 영화는 해외 영화제에서도 수상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바냐 아저씨'는 체호프적인 것에 대한 진중한 고민을 영화로 잘 녹여서 보여준다. 연극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이 상충되거나 어느 한 편에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이 작품은 오리지널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한다. 어떤 면에서 체호프가 러시아어로 쓴 희곡의 의미와 그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러시아인들일 것이다. 러시아의 현대 음악 작곡가로 1970년대 많은 소련 영화 음악을 담당한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ke)의 음악도 영화의 비감함을 부각시킨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Platonov'를 각색한 니키타 미할코프의 영화(197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1977.html
안드레이 스목투프스키 주연의 영화 '차 조심!(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beware-of-car-1966.html



3. 영화적 메커니즘에 대한 몰이해가 낳은 범작, 영미 합작의 TV 영화 '바냐 아저씨'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바냐 아저씨'가 희곡을 스크린에 멋지게 펼쳐놓았다면, 1991년에 만들어진 영미 합작의 TV 영화는 실패작에 가깝다. 감독 그레고리 모셔(Gregory Mosher)는 링컨 센터의 극장 감독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 원작 희곡의 각색자는 미국의 극작가이며 감독으로도 활동한 데이비드 메밋(David Mamet)이다. 재능있는 극작가답게 메밋이 다듬어낸 영어 대사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이 영화는 영국과 미국 배우들이 함께 작업했는데, 그렇게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뭔가 삐걱거리면서도 굴러가는 마차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제작 기간이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스트로프 역의 이안 홀름(Ian Holm)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기는 하다.

  이 영미 합작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적 메커니즘에 대한 감독의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다. 거의 대부분이 미디엄 쇼트와 클로즈업 쇼트로 구성된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영화 내내 등장인물의 얼굴 밖에 안보인다. 심지어 배우와 공간 전체를 다 잡은 풀 쇼트도 거의 없어서, 세트를 구성하는 집안의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도 파악이 안된다. 그렇게 화면을 구성했으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2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동안 쏟아지는 지루함을 견딜 수 밖에 없다. 영국식과 미국식 억양이 뒤섞인 대사들도 조화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 TV용 '바냐 아저씨'는 그냥 걸러도(!) 괜찮은 영화인 걸까? 체호프의 열렬한 팬이라면 놓치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안 홀름이 연기한 아스트로프가 무척 좋다. 원작에서 의사 아스트로프는 잘 생긴 외모의 중년 남자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안 홀름은 그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비교적 작은 체구의 이 배우가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바냐 역을 맡은 데이비드 워너의 비중을 압도한다. 솔직히 이 영화의 제목은 '바냐 아저씨'가 아니라 '의사 아스트로프'가 되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극 전체를 사로잡는 이안 홀름의 연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각색자 데이비드 메밋의 아내로 소피아 역을 맡은 레베카 피전의 뜬금없는 캐스팅도 아쉽기는 하다. 피전이 무리없이 배역을 소화해내기는 했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이렇게 연기와 영화적인 구성 면에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바냐 아저씨'는 연극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경우라 하겠다.    


4. 영화 천재 루이 말의 마지막 역작, '42번가의 바냐'

  영화는 경쾌한 재즈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뉴욕 42번가의 거리를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독특한 영화는 연극 '바냐 아저씨'를 42번가의 버려진 극장에서 극단 배우들이 리허설하는 장면을 담아낸다는 설정으로 기획되었다. 루이 말(Louis Malle)의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My Dinner with Andre, 1981)'를 즐겁게 보았던 이라면 이 영화도 놓칠 수 없다.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에서 같이 작업했던 두 연극인 앙드레 그레고리(André Gregory)와 월레스 숀(Wallace Shawn)이 '42번가의 바냐'에서도 나온다. 주인공 바냐 역은 월레스 숀이 맡았다. 영화에서 리허설 하는 장면의 연극 대본은 앞서 다룬 TV용 영화 대본을 각색했던 데이비드 메밋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극장으로 가는 길에 친구 앙드레를 만난 월레스는 자신이 기획한 연극 '바냐 아저씨' 리허설에 초대한다. 그렇게 앙드레와 그 지인들 몇몇이 모여 낡고 허름한 New Amsterdam Theater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리허설을 구경하러 간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연극이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리허설이 이루어지는 극장이 매우 눈길을 끈다. 1900년 초부터 대공황에 이르는 시기에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설되었던 뉴 암스테르담 극장은 쇠락기에 접어들면서 1970년대에는 흉물스런 건물이 되고 말았다. 연극 연출가 앙드레 그레고리는 가까운 사이의 배우들을 모아 '바냐 아저씨'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루이 말은 소식을 듣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위해 선택한 장소가 바로 그 42번가의 뉴 암스테르담 극장이었다. 그렇게 해서 '42번가의 바냐'가 탄생했다.

  이 영화에서 엘레나 역은 줄리언 무어가 맡았다. 무어의 좋은 연기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영화 제작 당시 이제 막 전성기에 접어드는 이 여배우는 명민하고 세련된 자신만의 배역 분석을 보여준다.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에서 궁색한 연극 배우를 능청스럽게 연기했던 월레스 숀의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바냐 아저씨'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른 배우들도 모두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라 정말이지 뛰어난 연기호흡을 자랑한다. 그런 좋은 연기와 함께 내러티브도 개성적이다. '리허설'이라는 설정 때문에 1막이 끝나고 휴식 시간을 갖는 장면을 비롯해, 구경하는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매우 자연스럽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에 빛나는 화관을 얹어주는 것은 감독 루이 말의 감각적인 화면 구성 능력이다. 어떻게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쇼트들이 거의 없다. 그는 매번 카메라의 위치를 바꾸어 가며, 배우들의 동선과 공간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영화 천재구나', 그런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루이 말은 '바냐 아저씨'의 연극적 공간과 의미에 대한 영화적 탐구를 '42번가의 바냐'에서 멋지게 구현한다. 나는 아직까지 이 정도로 연극을 영화라는 매체적 특성에 부합하게 만들어낸 작품은 만나지 못했다. 만약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하는 독자가 있다면, 꼭 '42번가의 바냐'를 보길 바란다. 루이 말은 이 영화를 완성하고 이듬해에 세상을 떴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천재 감독은 후대의 관객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남겨두고 갔다.

  '바냐 아저씨'를 세 편의 영화로 보다 보니, 나중에는 배우들의 동선과 대사까지 줄줄 꿰게 되었다. 체호프의 이 희곡은 계속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아마도 그런 질문을 던질 독자도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 러시아 시골 귀족의 케케묵은 소동극이 무어 그리 볼 게 있겠느냐고... 체호프가 그려낸 인물들의 삶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고통받는 인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회한, 늙음과 질병, 생계와 돈에 대한 압박, 환경 파괴의 문제, 이 모든 것이 '바냐 아저씨'에 들어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또한 '바냐 아저씨'의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속성은 다면적이다. 왜 바냐 삼촌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들의 저택과 땅을 팔겠다는 교수 사위의 편을 들까? 바냐 삼촌이 세레브리야코프에게 총까지 쏘게 되는 것은 매형에 대한 증오일까, 아니면 생을 낭비한 자신에 대한 절망일까? 소피아가 어떻게든 남아있는 날들을 살아가야 한다고 마지막에 읊조리는 것은 희망의 표현일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체념일까? 그 모든 것을 곱씹게 되는 것이야말로 작가 체호프가 후대의 독자에게 남긴 아름다운 문학적 수수께끼이다.       


루이 말의 '앙드레와의 저녁식사(1981)'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790460


*사진 출처: poetree.ru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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