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미국 중산층의 불안과 공허: Come Back, Little Sheba(1952)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1954)'에는 '고도(Godot)'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리는 두 명의 남자 디디와 고고가 등장한다. 이 기념비적인 실존주의 희곡에서 디디와 고고가 애타게 기다리는 그 '고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니엘 만(Daniel Mann) 감독의 'Come Back, Little Sheba(1952)'에서도 제목에 나오는 'Sheba'는 영화 속에서 볼 수 없다. 주인공인 중년 부인 롤라는 키우던 강아지 시바를 몇 달 전 잃어버렸다. 너무나 아끼는 사랑스러운 강아지였기에 롤라는 생각이 날 때면 현관 문 앞에서 자신의 강아지를 애타게 부른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듯, 이 영화에서도 잃어버린 강아지 이름 '시바' 또한 상징성을 가진다.

  영화는 중년의 주부 롤라가 새 하숙인 마리에게 방을 안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대생 마리와 집주인 롤라는 모든 것이 대비된다. 마치 자다가 곧바로 일어나서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매무새의 롤라. 척추지압사(chiropractor)인 남편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롤라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냉담하다. 관객은 곧 이들 부부에게 어떤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문제들 가운데 큰 부분이 닥의 알콜 중독과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부부는 알콜 중독자 치유 모임 'AA(Alcoholics Anonymous)'에 참여하는데, 그곳에서 닥은 금주 1주년을 기념하는 케이크를 받는다.

  어렵게 술과 멀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닥의 상태는 불안정하게 보인다. 그는 하숙인으로 들어온 마리의 존재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이 발랄한 아가씨는 집안으로 남자 친구를 끌어들이는 것을 별로 주저하지 않는다. 마리의 남자 친구 터크의 잦은 방문은 닥과 롤라 부부의 일상에 기묘한 긴장과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닥은 어느 날 저녁, 거실에서 두 사람이 키스를 나누는 것을 목격한다. 마리에게 자신의 젊은 날과 순수함을 투사했던 닥은 실망하고, 결국 찬장 안에 숨겨둔 술을 꺼내는데...

  극작가 William Inge는 1950년, 2막으로 구성된 첫 희곡 작품 'Come Back, Little Sheba'를 발표한다. 희곡은 곧 무대에 올려졌고, 꽤 인기가 있어서 190회에 달하는 상연 기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연극의 주연 배우였던 셜리 부스(Shirley Booth)가 롤라 역을 그대로 맡았고, 닥 역은 버트 랭커스터에게 돌아갔다. 사실 랭커스터는 그 역을 맡기에는 무척 젊은 나이였다. 상대역인 셜리 부스는 그보다 15살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랭커스터는 배역에 욕심을 냈고, 매우 의욕적으로 연기에 임했다. 좀 낯설게 보이기는 하지만, 랭커스터는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괴로워하는 알콜 중독자 역을 나름대로 잘 소화해 냈다.

  랭커스터가 연기하는 '닥'이라는 인물이 술에 빠지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영화는 닥과 롤라의 대화를 통해 관객에게 그들의 과거를 알려준다. 의대생이었던 닥은 롤라와 사귀다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억지로 결혼했다. 그러나 아이는 유산되고, 닥은 결혼 때문에 의대를 끝마치지 못하고 척추지압사가 되었다. 닥은 그 모든 불운과 고통을 아내 롤라의 탓으로 여기면서 술에 의지한다. 롤라는 그런 남편에게 매우 의존적이며 순종적으로 행동한다. 별다른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롤라의 일상은 라디오 청취와 이웃들에 대한 관찰과 수다로 채워진다.

  아마도 독자들은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우울한 부부의 이야기가 무어 그리 대단할 것이 있겠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시 미국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풍부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속에서 닥은 마리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어긋나게 되자 좌절감에 다시 술에 손을 댄다. 그는 술에 취해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리며 아내를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당시 미국 영화의 자율적 검열 기준인 'Hays Code'는 과도한 음주와 관련된 부분 또한 규제의 대상에 넣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후반부에 버트 랭커스터가 보여준 알콜 중독자의 적나라한 실상은 당시의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충격적이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알콜 중독의 문제는 이전에 제작된 1945년작 '잃어버린 주말(The Lost Weekend)'과 궤를 같이 한다. 빌리 와일더 감독의 그 영화도 알콜 중독자가 주인공이다. 

  술은 원작자 윌리엄 잉지를 괴롭혔던 문제이기도 했다. 영화 속의 닥처럼 그도 1948년에 알콜 중독자 치료 모임인 'AA'에 참여했다.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잉지는 그즈음에 프로이트 심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Come Back, Little Sheba'에는 그 시기 잉지의 개인적 경험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에 내재된 프로이트 심리학의 흔적은 매우 분명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롤라가 거실에서 틀어놓는 라디오에서 진행자는 나른한 음악으로 일상에서 탈출하라고 말한다. 그 음악으로 채워지는 '15분간의 유혹'을 진행자는 '터부(taboo)'라는 말로 표현한다. 금기시 되는 유혹, 좌절된 과거의 고통과 상처는 닥과 롤라 부부를 중독으로 이끌었다. 닥은 '술'에, 롤라는 '잠과 나태함'에 중독되어 있다.

  그런데 롤라의 무료함과 게으름은 어떤 면에서 개인적인 문제로만 볼 수 없다. 2차 대전 시기에 다양한 산업 분야의 노동자로 종사하며 '국내 전선(Home Front)'을 지켰던 여성들은 종전과 함께 가정으로 복귀했다. 여성들이 떠난 자리는 돌아온 군인들로 채워졌다. 가정은 다시 여성들의 사적 노동의 장소가 되었다. 롤라는 이웃 코프만 부인과 잃어버린 강아지 시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코프만 부인은 그것은 지난 일이니 바쁘게 지내면서 잊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아이 넷을 키우느라 늘 바쁜 코프만 부인이 보기에 롤라의 한탄은 한가로운 잡담처럼 들린다. 그러나 아이가 없는 롤라는 잉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모른다. 롤라와 같은 중산층 주부의 남아도는 시간은 전후 부흥하는 미국 경제 체제 하에서 소비주의로 이어졌다.  

  'Come Back, Little Sheba'가 보여주는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마리와 터크의 관계로 대변되는 성적인 개방성이다. 마리는 터크를 집으로 데려와 드로잉 모델을 하게 한다. 팔과 다리가 다 드러난 짧은 운동복 차림의 터크를 본 롤라는 당혹스러워 한다. 터크가 들고 있는 창은 길고 뾰족한 모양으로 프로이트 심리학에서의 '남근 상징(phallic symbol)'에 속한다. 영화에서는 마리가 터크의 집요한 유혹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 드로잉 장면은 둘의 관계에 대한 은유적인 단서를 드러낸다.

  닥은 터크의 존재에 불만을 터뜨리며, 롤라에게 마리가 잘못되면 모두 롤라 탓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혼전 관계로 생긴 아이 때문에 억지로 결혼한 그들 부부에게 과거는 오점으로 남아있다. 닥이 술로 난동을 피운 후, 롤라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방문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부부는 롤라의 부모에게 용인되지 못한다. 롤라와 부모의 단절된 관계는 당시 기성 세대가 혼전 관계에 매우 보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관객들은 왜 롤라가 집 현관 앞에서 '시바야, 어서 돌아오렴!', 하고 그토록 애타게 잃어버린 강아지를 불렀는지 알게 된다. 시바는 단순한 강아지의 이름이 아니라, 롤라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다. 불운하게 잃은 아기, 젊음, 남편의 사랑, 그리고 생에 대한 열정까지... 시바처럼 그 모든 것들이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롤라는 애절하게 외친다. 롤라 그 자체를 연기한 셜리 부스는 첫 출연한 이 영화로 그해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칸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평생을 알콜 중독과 우울증으로 씨름했던 원작자 윌리엄 잉지는 예순이 되던 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Come Back, Little Sheba'에 전후 미국 사회와 중산층의 불안하고 공허한 내면 풍경을 심리학적 상징과 함께 펼쳐 놓는다.




*영화화된 William Inge의 작품: 1번과 2번은 희곡 원작, 3번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1. 피크닉(Picnic, 1955): 윌리엄 홀덴 주연. 마을을 찾은 낯선 방문자가 일으키는 파문.
2. 버스 정류장(Bus Stop, 1956): 풋내기 로데오 선수의 사랑 찾기. 마릴린 먼로는 과거를 가진 술집 댄서로 나온다.
3.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 1961): 나탈리 우드, 워렌 비티 주연. 청춘의 상처와 그늘을 담아낸 영화.



**알콜 중독과 관련된 전후 할리우드의 주목할 만한 작품

1. 잃어버린 주말 (The Lost Weekend, 1945): 빌리 와일더 감독. 알콜 중독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1940년대 할리우드의 대표작.
2. 고독한 영혼(In A Lonely Place, 1950): 니콜라스 레이 감독. 험프리 보가트가 다혈질의 시나리오 작가로 나온다. 그의 심리적인 문제는 알콜 의존증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사진 출처: britanni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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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들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2018년, 프랑스는 월드컵에서 20년 만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영화의 주인공 소년 Issa도 프랑스 국기를 몸에 휘감고 친구들과 기쁨을 나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 이사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시련이 펼쳐친다. Ladj Ly의 2019년작 영화 'Les Misérables'은 러셀 크로의 견디기 힘든 노래가 나오는 2012년작 뮤지컬 영화와는 제목만 같다.

  감독 라지 리는 말리 태생의 프랑스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영화 속 배경인 파리 교외의 Montfermeil에서 자랐다. 이 감독은 논쟁적인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2011년에 '납치'와 '불법 감금'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지역 공동체와 사람들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리'라는 이름을 내걸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죠. 나 또한 내 이야기를 그런 방식으로 하고 싶었어요(cineuropa.org와의 인터뷰 가운데)"

  2005년, 파리 교외의 Clichy-sous-Bois에서 두 명의 무슬림 청소년들이 감전사로 죽었다. 경찰의 불시 검문검색을 피해 달아나려다 숨어든 곳이 변전소였다. 이 사건으로 약 3주간에 걸쳐 파리 근교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인 방화와 폭력사태가 촉발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었다. 외형적으로는 무고한 청소년들의 죽음에 분노해서 일어난 폭동이었지만, 거기에는 프랑스 사회의 구조적인 이민자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영화는 그 사건을 모티프로 취했다.  

  이사가 사는 동네는 전형적인 슬럼가로 매우 '거친 곳'이다. 아이들은 훔치고 뺏는 것이 일상이며,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지역 갱단들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들도 그런 곳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무법자처럼 행동한다. 상스러운 욕설은 기본이며, 검문검색을 이유로 여학생을 희롱한다. '내가 곧 법이다'라고 소리치며 주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경찰 크리스, 그리고 그것을 방조하는 동료 그와다의 행태는 온건한 신참 스테판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런 경찰들에게 서커스단의 사라진 새끼 사자를 찾아내라는 임무가 떨어진다. 그들은 곧 이사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사를 체포하려는데 같이 있던 아이들이 난리를 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와다는 실수로 고무탄을 이사의 얼굴에 쏜다. 이사는 목숨을 건졌지만, 경찰들은 공중에 떠있는 드론이 자신들을 찍었음을 알고 패닉에 빠진다. 촬영자를 찾아나선 경비대장 크리스, 과연 그들은 드론의 주인을 찾아내어 자신들의 실수를 무마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이사가 사는 몽페르메일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민자들, 서북부 아프리카 출신의 이슬람인들이다. 범죄와 폭력이 일상인 그곳에서 크리스를 비롯한 경찰들의 부조리하고 폭압적인 모습은 생존의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극은 그런 곳에서 사는 이들, 특히 어린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것이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에 있다. 주인공인 이사는 그곳의 흔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도둑질과 갈취, 마약과 폭력이 공기처럼 스며든 곳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경찰은 실체화된 악이며 반대자이다. 얼굴에 부상을 입은 자신을 내팽개치고, 오히려 입막음을 하려는 경찰에게 이사는 분노한다. 그 분노는 원초적인 형태의 복수로 나타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세 명의 경찰들은 아이들의 근거지를 순찰하다가 건물에 갇혀 죽을 위기에 내몰린다.

  감독 라지 리는 이러한 구조화된 폭력과 복수의 악순환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담아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드론을 이용한 항공 촬영 장면이다. 드높은 상공에 떠있던 드론은 점차 수직으로 하강하며, 거시적인 시점에서 미시적인 시점으로 이동한다. 드론은 일종의 움직이는 현미경인 셈이다. 관객들은 드론이 보여주는 화면을 통해 도시의 숨겨진 이면을 마주한다. 작은 점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잘 정비된 풍광의 도시는 온갖 불평등과 가난, 범죄와 폭력으로 점철된 복마전(伏魔殿)과 같은 장소이다. 아마도 라지 리는 그런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면서 이렇게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들이 방리유(Banlieue)가 뭔지나 알어?'

  사실 이 영화가 프랑스 사회의 고질적인 '방리유(Banlieue, '교외'라는 뜻의 프랑스어)' 문제를 다룬 첫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마티유 카소비츠의 영화 '증오(La Haine, 1995)'의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역시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 카소비츠도 '증오'에서 방리유의 문제를 다루었다. 파리 근교의 이민자와 하층민 주거지를 뜻하는 '방리유'가 사회 문제로 고착화된 것은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부터 방리유는 범죄의 근원지로 인식이 되었는데, 이미 1981년 여름에 이민자 청소년들이 무려 수백 대의 차량을 전소시키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연말에 차량에 불을 지르는 것은 그곳의 연례 행사처럼 여겨질 정도이며, 방리유의 일부 지역은 아예 마약 도시로 경찰의 진입이 불가능한 곳도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 역사와 이민사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1850년대 제정 프랑스 시절부터 외국의 값싼 노동력 도입이 정책적으로 이루어졌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식민지였던 서북부 아프리카 지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다른 튀니지와 모로코와 같은 식민지와는 다르게 '프랑스령 알제리'는 본토로 인정되는 곳으로 알제리로부터의 상당수 이민자들이 프랑스에 정착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재건과 산업 인력의 수요로 인해 195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이민이 장려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민자들의 주거지 문제를 방리유의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로 해결했다. 그러나 방리유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분리 구역으로 자리잡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곳은 곧 계층과 직업, 종교, 인종에 있어서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열악한 주거지로 전락했다.

  라지 리가 '레 미제라블'에서 보여주는 방리유의 문제는 어쩌면 최신판의 모습일 것이다.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목도하는 폭력과 함께 몽페르메일 이민자 사회 내부의 모습에도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독특한 이국적 복식을 비롯해 토착 풍습인 '계'를 하고 있는 여성들이 나오는 장면은 과연 저곳이 프랑스가 맞나,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제 방리유의 다양한 인종적, 문화적 특징들은 파편화된 게토(ghetto)로 자리잡았고, 그것이 프랑스가 직면한 사회 갈등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하고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자유, 평등, 우애, 라는 공화국의 이상을 기치로 내걸고, 그 어떤 종교적 예외나 배려를 인정하지 않는 세속주의(laïcité)는 이슬람 이민자들을 더 분파적이고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2015년에 발생한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테러 사건은 그 극단의 예를 보여준다.

  “세상에는 그 어떤 잡초도, 무가치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나쁜 농부만 존재할 뿐입니다(There are no weeds, and no worthless men. There are only bad farmers).”

  영화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한 귀절을 인용하면서 끝난다. 결국 라지 리는 영화 속에서 펼쳐 보여준 모든 악덕과 폭력의 원흉으로 프랑스, 그것을 통치하는 지배 계층, 더 나아가 공화국의 이상을 지목한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고, 우애로 연대하는 그런 나라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고 그는 외친다. 그의 '레 미제라블'은 공화국의 이상에 더이상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은 이민자들과 하층민들인 셈이다. 자신의 이야기로 '우리의 문제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던 감독의 바램은 그렇게 실현되었다.


이 영화와 함께 보면 좋은 영화

1. 증오(La Haine, 1995), 마티유 카소비츠
2.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 1989), 스파이크 리
3.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 1966), 질로 폰테코르보


*사진 출처: readthespiri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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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 영화: 
글렌 밀러 스토리(The Glenn Miller Story, 1954),

너무 늦은 블루스(Too Late Blues, 1961)


  여러분은 음악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 천부적 재능을 지녔지만 시련과 고통을 겪는 주인공, 결국 실패를 딛고 멋지게 재기하는 결말... 오늘 다룰 영화들은 바로 그 음악이 중심이 되는 영화이다. 여기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두 편의 음악 영화가 있다. 독특한 서부극들을 만든 앤소니 만(Anthony Mann) 감독은 1954년에 '글렌 밀러 스토리'를 내놓았다. 영화는 스윙 재즈 시대(The Swing Era, 1930-1945)를 대표하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인 글렌 밀러(Glenn MIller)의 일대기를 담았다. 주연은 제임스 스튜어트, 그는 앤소니 만 감독과 여러 편의 작품을 함께 했다. 재즈 음악인을 다룬 존 카사베츠(John Cassavetes) 감독의 영화도 있다. '너무 늦은 블루스(Too Late Blues, 1961)'는 카사베츠가 메이저 스튜디오와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이다. 재능을 가졌지만 상처받고 부서지는 젊은 재즈 음악가의 초상을 그렸다.

  '글렌 밀러 스토리'는 관객들이 음악 영화에 기대하는 모든 것들을 충실히 담아낸다. 영화의 도입부, 풋내기 재즈 트롬본 연주자인 글렌 밀러는 전당포에 악기를 맡겼다 찾는 일상을 반복한다. 악단 생활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밀러에게는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밀러의 러브 스토리로 채워진다. 아내 헬렌 버거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밀러를 이해하고 지원한다. 그런 아내 덕분에 밀러는 독립 악단을 꾸리고, 새로운 스타일의 재즈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물론 많은 위인전이 그러하듯 밀러도 단번에 성공의 정점에 오르지 않는다. 밀러의 신생 악단은 어려움 속에 연주 여행을 이어가지만 결국은 파산 위기에 처하고 만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주인공도 재즈 음악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Ghost'란 별명을 가진 재즈 밴드 리더 웨이크필드(바비 다린 분)이다. 그의 악단은 변두리 마을 회관과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을 이어간다. 어느 날, 고스트는 파티에서 가수 지망생 제스가 노래 부르는 것을 보게 된다. 제스는 고스트의 제안으로 밴드에 합류하고, 둘은 연인이 된다. 그러나 제스를 갈망하는 에이전트 베니는 그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겉으로는 고스트에게 음반 녹음의 기회를 주면서 성공의 길을 함께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제스의 등장은 밴드 부원들 사이에 긴장과 질투를 일으키고, 그것은 음반 취입 축하 파티의 예기치 못한 난투극과 얽힌다.

  앤소니 만 감독은 짜임새 있는 대본을 바탕으로 신화가 되어버린 재즈 음악인의 삶을 직조해 나간다. 자신만의 음색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밀러는 독자적인 악기 배치와 구성, 편안한 스윙의 음률로 작곡한 곡들로 마침내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미국 전역에서 밀러의 재즈곡들이 음반과 주크 박스로 쉴 새 없이 흐르게 된다. 그렇게 밀러는 최고의 전성기에 들어선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헨리 맨시니는 유려한 편곡으로 밀러의 음악에 빛을 더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은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당대 재즈 음악인들의 합동 공연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독보적인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와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재즈 음악 팬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     
 
  '글렌 밀러 스토리'의 주인공이 그렇게 성공 신화를 써나가는 것과는 달리, 카사베츠는 자신이 만들어낸 '고스트'에게 그런 장밋빛 미래를 선물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 'Shadows(1959)'로 당시 미국 영화계에 이단아처럼 등장한 카사베츠는 관객이 음악 영화에서 기대하는 그 모든 것들을 깨부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 가수이기도 했던 Bobby Darin은 너무나도 유약하고 예민한 음악가 고스트를 연기한다. 제스는 축하 파티에서 자신에게 추근거리는 남자와의 싸움을 피한 고스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 곁을 떠난다. 밴드는 해체되고, 고스트는 돈 많은 중년 여성의 애인이 되어 시시한 클럽 연주자의 삶을 이어간다. 베니는 그런 고스트를 조롱한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약함(weakness)'는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테마가 된다. 'Husbands(1970)'의 중년 남자들이 처한 중년의 위기,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에서 알콜 중독과 우울증으로 무너지는 가정 주부, 늙음과 사그라드는 재능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배우가 주인공인 'Opening Night(1977)'. 그 영화들 속의 인물들은 그렇게 내면에 자리한 약함과 지리한 싸움을 이어간다. 그들이 가진 '약함'은 '결함(fault)'과는 결을 달리한다. 부족함과 손실의 의미로서의 '결함'은 때로 잘못과 악덕에 가깝지만, '약함'은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카사베츠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그 약함이 가져오는 상처와 고통스러운 일면을 부각시킨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고스트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결벽증적이고 유약한 성정(性情)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도 전에 꺾인다. 그런 고스트와 대척점에 있는 베니는 착취적이고 비열한 유형의 인간으로 세상은 그런 이들에게 더 많이 열려있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고스트가 자신의 약함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 것과는 달리, '글렌 밀러 스토리'의 주인공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애국'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스스로 내던진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는 38세의 나이로 공군에 입대한다. 당시 많은 재즈 음악인들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해서 군악대 활동으로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 당시 재즈가 미국인의 음악에서 전세계인의 음악이 된 데에는 그렇게 군부대 밴드의 열정적인 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 밀러는 군에 입대해서 자신의 재즈 음악으로 자유와 평화에 기여하고 싶어했다. 영화는 독일군의 폭격을 받으면서도 군병원에서 위문 공연을 이어가는 밀러와 군악대의 영웅적 행위를 부각시킨다. 밀러의 그러한 애국적 면모는 비행기 사고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극의 대미를 이룬다.

  시련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 성공의 길을 가던 재즈 음악인의 장렬한 최후, 그렇게 앤소니 만 감독의 '글렌 밀러 스토리'는 당시 미국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큰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글렌 밀러의 곡들이 담긴 영화 음악 음반도 불티나게 팔렸다. 카사베츠의 음악 영화는 일반 대중들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튜디오의 제한된 예산과 '한 달'이라는 급박한 촬영일정에 쫓겨서 거의 급조하듯 만든 이 영화를 감독은 평생 증오했다. 파라마운트는 신인 감독에게 새로운 것을 기대했으나 전적인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 제작 과정 내내 파열음을 일으킨 카사베츠는 스튜디오의 상업주의를 경멸했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주인공 별명이 '고스트(ghost)'인 것처럼, 이 영화를 만든 카사베츠도 메이저 스튜디오의 합작 과정에서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엉성한 내러티브, 대부분 실내 세트 촬영으로 한정된 단조로운 장면들, 영화의 우울한 결말까지 겹쳐서 영화는 겨우 수지타산을 맞추었다. 처참한 흥행 실패를 기록한 United Artists 제작의 'A Child Is Waiting(1963)'을 끝으로, 카사베츠는 독립 영화 제작자의 길을 걷는다.

  나에게 두 영화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두 영화 모두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글렌 밀러 스토리'는 비교적 사실에 충실한 전기 영화로서 재즈 팬들에게는 필수 감상 목록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멋진 음악과 루이 암스트롱의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스튜어트의 뻣뻣하고 매너리즘적인 연기는 실망스럽다. '너무 늦은 블루스'는 세련되고 잘 만들어진 음악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재능을 가진 약한 인간, 그는 끊임없이 상처받고 결국에는 그저 주변부를 맴도는 인생을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아는 진짜 현실의 이야기와 더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카사베츠가 선사하는 이 씁쓸한 음악 영화는 가슴 아픈 여운을 남긴다.   



*사진 출처: tcm.com


**사진 출처: thenewbe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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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 팬들에게 기차를 배경으로 하는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74년작 영화도 있다. 크리스티는 또 다른 작품 '패딩턴발 4시 50분(1957)'에서도 '기차'의 공간성을 치밀하게 이용한다. 일본의 추리 소설 작가 마츠모토 세이초도 '점과 선(1957)'에서 기차를 전면에 내세워 사건을 전개시킨다.

  1950년대에 제작한 일련의 서부극으로 유명한 앤소니 만(Anthony Mann) 감독이 1951년에 'The Tall Target'을 내놓았을 때, 관객들은 물론이고 평론가들도 낯설게 느꼈던 모양이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앤소니 만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그다지 주목받는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61년의 어느 기차를 배경으로 하는 이 흥미진진한 영화는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

  1861년 2월, 뉴욕 경찰 존 케네디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링컨에 대한 암살 첩보를 입수한다. 그는 링컨이 볼티모어에서 워싱턴 D.C.로 이동할 때 타게 될 기차가 암살범들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직감한다. 그러나 케네디의 보고는 묵살되고, 분개한 그는 혼자서 암살 시도를 저지하기로 마음먹는다. 기차에서 자신의 동료와 만나기로 한 케네디는 차디찬 주검이 되어버린 형사를 발견한다. 분명히 기차 안에서는 어떤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많은 승객들 가운데 암살범을 찾아낼 것인가? 케네디는 과연 링컨을 구할 수 있을까...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링컨은 늘 암살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 'The Tall Target'은 링컨을 둘러싼 그런 음모들 가운데 한 가지를 주요한 플롯으로 취한다. 선거 운동을 위해 이동하는 그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는 형사는 오직 혼자의 힘으로만 싸워야 한다. '기차'는 형사 케네디의 외로운 전장이나 마찬가지이다. 암살범은 철저히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있으며, 그곳에는 너무나 다양한 이들이 있다. 민병대 장교, 작가, 남군에 입대 예정인 웨스트포인트 졸업 생도와 여동생, 그들의 흑인 노예 소녀, 장난꾸러기 꼬마와 엄마... 기차 안은 마치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당시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은 승객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작가 알솝 부인은 남부 출신의 보퍼트 남매와 대척점에 서있다. 알솝 부인이 남매가 데리고 있는 노예 소녀 레이첼에게 자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지니 보퍼트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니는 레이첼이 자신과 같이 자유로우며, 그것이 레이첼에게 따로 자유를 줄 필요가 없는 이유라고 강변한다.

  "자유는 아가씨가 나에게 주어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Freedom isn't a thing you should be able to give me, Miss Ginny. Freedom is something I should have been born with)."

  노예 소녀 레이첼은 부드럽고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밝힌다. 알솝 부인이 대변하는 것처럼 노예제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단순한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첨예한 경제 논리와 연관되어 있기도 했다. 케네디를 돕는 것처럼 보였던 민병대 장교 재퍼스는 암살 음모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다. 그는 노예제가 폐지되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북부 면화 공장의 수익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다. 실제로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면과 관련된 것이었다. 노예들에 의존하고 있는 남부의 면화 농장주들은 링컨의 반대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앤소니 만은 '기차'라는 닫힌 공간을 그렇게 정치적 공론의 장으로 변모시킨다. 외형적으로는 느와르의 틀을 취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내재적인 메시지는 매우 정치적이다. 영화는 '링컨'이 대변하는 위대한 연방의 가치, 그리고 흑인 민권의 옹호자로서의 상징성을 신화화한다. 암살범들에게 키가 큰 링컨의 존재를 뜻하는 'The Tall Target'은 그러므로 어떻게든 지켜야할 존재가 된다. 기이한 일치로 영화 속에서 그 링컨을 암살의 위협에서 구하는 것은 '케네디'란 이름의 형사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되고 9년 후, 우리가 알고 있듯 정치인 케네디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자유와 인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매카시즘'이라는 사상 검증의 광풍이 휘몰아닥친 그 시기의 미국인들에게 링컨은 분열을 통합하는 상징적 아이콘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 색출은 단지 정치권에서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사회 전체를 강타했으며, 그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투옥당하는 이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상원의원 매카시가 그 광풍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였다면, 노회한 정치인 닉슨이야말로 실질적인 주동자였다. 그는 이 시기에 공화당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한다.

  생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시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영화 속 형사 케네디는 적과 친구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안개 속과 같은 기차 안을 끊임없이 탐색하며 돌아다닌다. 마침내 그의 분투로 링컨은 암살자의 손길에서 벗어난다. 용기있는 개인의 결단은 그렇게 한 사람의 대통령과 미국을 구한다. 가상의 역사물로서 'The Tall Target'은 기차라는 숨막힐 듯한 폐쇄적 공간 속에 당시 미국 사회의 분열과 정치적 독선을 은유적으로 담는다.


*사진 출처: tc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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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집으로, Tutti a casa(Everybody Go Home, 1960), 120분
과학적인 카드 도박꾼, Lo Scopone Scientifico(The Scientific Cardplayer, 1972), 116분



이 글에는 두 영화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폭압적 파시즘과 전쟁의 기억, Tutti a casa

  제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7월, 시칠리아에 진입한 연합군으로 인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진다. 무솔리니는 체포되고, 국왕의 명령에 따라 새로 수립된 정부는 연합군과의 휴전을 모색한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은 그 틈을 타서 이탈리아 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이탈리아 본토 수복에 나선다. 루이지 코멘치니 감독의 1960년작 영화 'Tutti a casa(Everybody Go Home)는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코멘치니 감독은 전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감독임에도 비토리오 데 시카나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같은 세계적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이탈리아 내에서의 그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가 찍은 너무 많은 영화들에서 코멘치니의 분명한 색깔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도 한몫할 것이다. 하지만 코멘치니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그가 치열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수준높은 영화를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Tutti a casa'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 해변가에 주둔 중인 이탈리아 부대의 하급 부사관 알베르토(알베르토 소르디 분)는 라디오에서 정부가 발표한 휴전 성명을 듣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겨운 전쟁에 지친 부대원들은 모두들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휩싸인다. 소집 해제 명령을 기다리는 부대원들과는 달리 군 수뇌부는 뜻밖의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들이 부대를 떠나자마자 어디선가 총탄이 빗발치듯 날아온다. 연합군에 맞서 이탈리아 장악에 나선 독일군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그들은 꿈에 그리던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주인공 알베르토와 부대원들이 남쪽에 있는 집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목도하게 되는 것은 전쟁의 참상이다. 철로를 따라 걷던 그들은 체포된 유태인들을 실은 기차와 마주한다. 물 좀 달라는 소리와 함께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라는 절규를 듣는다. 참혹한 광경이지만, 부대원들은 남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곳곳에서 밀고 내려오는 독일군들을 피하는 것만이 살 길이기 때문이다. 코멘치니가 펼쳐서 보여주는 부대원들의 여정은 전후 이탈리아 영화의 사실주의적 사조인 '네오리얼리즘(neorealism)'과 맞닿아 있다. 나치를 피해 달아난 유태인 여성이 결국 신분이 발각되어 총에 맞아 죽고, 굶주린 시민들은 밀가루 포대가 실린 트럭을 강탈해서 서로 가져가느라 정신이 없다. 폭격을 당해 처참하게 부서지고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에서 어린 꼬마는 배고픔과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다.

  'Tutti a casa'에 펼쳐진 그러한 지옥도는 그럼에도 지나치게 무겁고 비장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코멘치니는 중간중간 가벼운 유머를 섞는다. 이탈리아의 국민 배우 알베르토 소르디가 표현하는 소박하고 인간적인 병사 알베르토의 모습은 영화의 긴장감과 공포를 상당부분 누그러뜨린다. 완급이 잘 조절된 코멘치니의 전쟁 서사는 의외의 흡인력을 보여준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을 결코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감독의 역량은 전쟁의 참상과 함께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마침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집에 도착한 알베르토는 부친과 상봉한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 알베르토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현실과 마주한다. 궁핍함에 찌든 아버지는 아들이 다시 파시스트 군대에 입대해서 급료를 받아오길 기대한다. 경제적인 곤궁은 자식마저도 사지로 내몬다. 실망한 알베르토는 집을 떠나지만 곧 부대원 체카렐리와 함께 독일군에 끌려간다. 결국 도망을 치다가 총알이 쏟아지는 길바닥 한복판에서 죽어가는 체카렐리를 알베르토는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 목숨을 걸고 달려나가 체카렐리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은 전쟁이 훼손할 수 없는 고귀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모두가 집을 향해 나섰지만, 그 누구도 집에 머물 수 없었던 비극의 여정. 영화의 마지막에 레지스탕스에 합류하는 알베르토를 통해 애국주의를 부각시키면서도 코멘치니는 영화 전체를 통해 냉철한 균형 감각을 유지한다. '1943년 9월 8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한 화면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그 날은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날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본토를 장악한 독일군은 무솔리니의 괴뢰 정부를 앞세워 전쟁을 이어간다. 이탈리아에서 포성이 멈추려면 그로부터 2년이란 시간이 더 지나야 했다. 코멘치니는 'Tutti a casa'를 통해 폭압적 파시즘과 전쟁의 기억을 옴스라니 복원한다.    


2. 코미디에 숨겨진 계급 갈등과 빈부 격차의 문제, Lo Scopone Scientifico

  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1950)'에는 기묘한 커플이 등장한다. 부유한 노부인과 젊고 잘 생긴 남자. 윌리엄 홀든이 연기한 가난한 극작가 조는 은퇴한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 노마의 재력에 포섭된다. 결국 조의 죽음으로 끝난 영화 속 이 커플이 만약 그대로 나이를 먹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코멘치니의 1972년작 영화 'Lo Scopone Scientifico'에 나오는 베티 데이비스와 조셉 코튼의 모습일 것이다.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특이한데, 직역하면 '과학적인 스코폰 게임'이란 뜻이다. '스코폰(scopone)'은 독특한 그림의 카드로 하는 이탈리아식 카드 게임이다. 백만장자 노부인은 스코폰의 광팬으로 그 게임을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한다. 헐리우드의 고전기를 대표했던 배우 조셉 코튼이 베티 데이비스와 짝을 이뤄 나온다. 그 두 배우와 함께 나오는 이탈리아 배우는 'Tutti a casa'의 알베르토 소르디, 그리고 이 영화의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의 아내이며 명배우인 실바나 망가노(Silvana Mangano)이다.

  영화는 미국인 백만장자 노부인이 공항에 도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페피노와 안토니아 부부는 스코폰 게임의 고수로 노부인의 게임 테이블에 초대받는다. 부부에게는 그 무엇보다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리가 불편한 딸의 다리도 고쳐주고, 장의사 일을 돕는 어린 꼬마들의 미래를 위해서 노부인과의 게임에서 이겨야만 한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페피노 부부가 이기기를 기원한다. 부부에게 첫 판돈 백만 리라를 호기롭게 빌려주며 시작하는 노부인, 페피노와 안토니아는 차분하게 게임에 집중하며 연전연승을 이어간다. 마침내 7백만 리라를 부부가 따냈을 때, 페피노는 그만 두고 싶어하지만 안토니아는 기세를 올려 더 많은 돈을 따려 한다. 지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하는 노부인도 의사까지 대기시켜 가며 게임을 이어간다. 과연 부부는 스코폰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 이 영화는 한 편의 즐거운 코미디 같다. 카드 게임을 위해 이탈리아로 날아온 백만장자, 그 게임에 참여하는 가난한 부부, 그리고 부부의 승리를 기원하며 판돈을 거는 빈민가 사람들. 코멘치니는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이 기묘한 조합의 이야기에 당시 이탈리아의 현실을 담아냈다.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후 축적된 사회적 모순과 불만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이탈리아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70년대에 이탈리아 국민들은 혼돈과 파괴의 시대를 보내야만 했다. 극좌파와 극우파가 극렬히 대립하며 무차별적인 테러를 자행했다. 거기에 1970년대의 세계적 석유 파동까지 겹쳐 경제난과 빈부격차가 가중되었다. 이른바 '납의 시대(Years of Lead)'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사회의 혼란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페피노와 안토니아 부부가 살고 있는 빈민가의 판잣집들은 노부인의 거대하고 호화로운 흰색 대저택과 명백히 대비된다. 노부인(영화 속에서는 이름이 없다)이 게임을 하다 잠시 쉬는 시간에 뉴스를 봐야겠다면서 TV를 켜는데, 거기에서 독일 재무상이 달러 매입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저런 뉴스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페피노가 말하는데, 비서 조지는 노부인의 막대한 자산 증식은 그런 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지는 점을 알려준다. 그저 카드 게임에서 딴 돈으로 고물 창고를 매입하는 것이 꿈인 페피노에게 그런 노부인의 재정 상황은 도무지 알아먹지 못할 일이다.

  이 영화에 내재된 계급적 갈등은 단지 노부인과 페피노 부부로만 대변되지 않는다. 부부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빈민가의 사람들을 비롯해 노부인의 시중을 드는 이들도 포함된다. 마치 귀족의 집에 기거하는 하인들의 단정한 복장을 갖춘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부부가 노부인을 이기기를 응원한다. 그들은 심지어 부부가 판돈을 잃었을 때에 자신들이 가진 돈을 기꺼이 내어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가난한 자들의 연대와 맹목적인 희망은 노부인의 승부사적 기질에 산산조각이 난다. 고리대금업자에게 꾼 엄청난 돈까지 날려버린 부부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이다.            

  부부는 가족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인 판잣집을 판 돈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공항의 노부인에게 달려간다. 그것으로 마지막 카드 게임을 하지만 그마저도 날린다. 털털거리는 낡은 트럭에 살림살이를 싣고 어디론가 떠나는 이 가족이 살아야할 삶은 어떤 것일까? 영화가 보여주는 이 비극의 해법은 매우 과격하며 통렬하다. 부부에게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과학적 방법'에 대해 설교하는 자칭 '교수'는 노부인을 이길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육신이 완전히 사라질 때'라고 선언하는 교수의 말을 부부의 어린 딸 클레오파트라는 허투루 듣지 않는다. 쥐약을 넣어 만든 쿠키를 공항에서 노부인에게 선물한 딸은 절망한 부모의 복수를 그렇게 대신한다.

  우리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루이지 코멘치니 감독의 이 두 편의 영화들은 영화가 시대와 호흡하는 텍스트임을 알려준다. 그는 이탈리아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자신만의 성찰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대중 예술로서 영화는 결코 사회와 동떨어진 진공의 텍스트로 존재할 수 없다. 영화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적 틀 안에 동시대의 문제의식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코멘치니는 'Tutti a casa'에서는 전쟁과 파시즘을, 'Lo Scopone Scientifico'로 계층 갈등과 구조적 빈부격차에 대해 이야기 한다. 관객들은 그의 영화에서 감독이 그려낸 당대 이탈리아의 조밀한 초상과 마주한다.    



*사진 출처: it.wikipedia.org


**사진 출처: filmaffini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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