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2부
The Lost Moment(1947), Martin Gabel



*이 글에는 영화 'The Lost Moment(1947)'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Rebecca, 1940)'. 가난하고 별 볼 일 없었던 젊은 아가씨는 부자와 결혼하는 행운을 잡는다. 그리고 남편의 대저택에 입성하는데, 그곳에서 위압적인 여집사 댄버스 부인과 마주한다. 영화 'The Lost Moment(1947)'의 주인공 출판업자 루이스 베너블은 줄리아나 보데로의 집에서 줄리아나의 조카 티나와 마주한다. 수잔 헤이워드가 연기한 티나는 마치 그 댄버스 부인을 연상케 한다. 뻣뻣하고 오만한 태도로 티나가 요구하는 저택의 하숙비는 터무니없이 높지만, 루이스는 기꺼이 지불하기로 한다. 물론 그에게는 나름의 속셈이 있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유명 작가 제프리 애스펀의 숨겨진 연애 편지를 찾으려 한다. 애스펀의 편지를 받았던 주인공 줄리아나는 이제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다.

  영화 'The Lost Moment'는 헨리 제임스의 '애스펀의 러브레터(The Aspern Papers, 1888)'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Leonardo Bercovici가 맡은 각색은 제임스 소설의 기이한 변용을 보여준다. 백발의 노파 줄리아나 역을 맡은 아그네스 무어헤드(Agnes Moorehead)는 5시간이 넘는 특수분장을 한 후에 연기를 했다. 거의 살아있는 해골에 가깝게 늙어버린 줄리아나는 마치 사악한 마귀 할멈처럼 비춰진다. 줄리아나의 대저택은 고딕 소설의 음산한 건축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곳에 편지를 찾기 위해 잠입한 용사 루이스는 곧 자신이 구해야할 대상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밤, 루이스는 저택의 버려진 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티나를 발견한다. 루이스를 반갑게 맞이하는 티나는 스스로를 젊은 날의 이모 줄리아나로 여긴다.

  '애스펀의 러브레터'는 헨리 제임스가 아끼는 작품이었다. 잊혀진 러브레터에 대한 집념으로 출판업자(소설 속에서는 이름이 없다)는 미국에서 베니스까지 여행을 한다. 편지를 꼭꼭 숨기고 내놓지 않는 줄리아나 대신 그는 조카 티타(영화 속 이름 티나)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영화 속 티나와는 달리 소설의 티타는 아무 매력도 없는 노처녀이다. 곧 티타는 그의 친절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모의 뜻을 존중한다며 편지를 찾는 일에는 나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영화는 애스펀의 편지를 찾고자 하는 출판업자의 집착과 열망을 로맨스와 스릴러 장르에 이식시킨다. 루이스는 티나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모두 줄리아나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 조카 티나는 젊은 날의 줄리아나에 빙의되어 있으며, 루이스는 줄리아나가 갖고 있는 애스펀의 편지에 매혹되어 있다. 사악한 마녀로 여겨지는 줄리아나로부터 어떻게 달아날 것인가? 놀랍게도 영화 속에서 그 해법은 '화재'이다. 마치 마녀가 불에 화형되는 것을 연상케 하는데, 줄리아나의 실화(失火)로 인한 그 화재로 편지는 모두 불에 타 없어진다. 

  원작 소설은 값나가는 편지에 대한 어느 출판업자의 욕망과 윤리적 당위성 사이의 고민이 주된 테마를 이룬다. 편지에 눈이 먼 그는 자신의 신분과 의도를 철저히 숨긴다. 티타의 환심을 사서 편지를 찾는 것도 여의칠 않자, 줄리아나의 방에 침입해서 뒤지기까지 한다. 티타는 그런 그의 기만과 거짓을 드러내며, 편지를 얻고 싶으면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줄리아나가 죽은 후 편지는 자신이 물려받았고, 결혼으로 가족이 된다면 편지 또한 그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 편지들 때문에 못생긴 노처녀와 결혼해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고 그는 생각한다.

  내가 당신을 가질 수 없다면, 나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빼앗아 버리겠어. 청혼을 거절당한 티타는 편지들을 모두 불에 태운다. 티타는 자신의 상심을 남자에게 그렇게 되돌려 준다. 헨리 제임스가 그려낸 지독한 욕망과 상실의 변주는 'The Lost Moment'에서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어떤 면에서 영화는 원작과 전혀 다른 작품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음산한 대저택, 백발의 흉측한 노파, 귀신 들린 미녀, 그 모든 것의 원흉이 되는 노파와 대저택을 불사르는 화재, 그리고 사랑의 완성. 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고딕 스릴러 로맨스 영화는 당시 흥행에도 실패했고 비평가들에게도 외면받았다.

  과연 이 영화는 버림받아 마땅한 영화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원작자 헨리 제임스는 기막힌 각색을 못마땅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이 그려낸 인간 내면의 어둡고 축축한 욕망을 영화는 다른 장르적 방식으로 비틀어서 보여준다. 영화 속 줄리아나는 애스펀이 떠나갈 것이 두려워 자신이 살해했다고 고백한다. 줄리아나의 고통받는 자아를 대변하는 조카 티나의 정신병적 징후는 줄리아나와 그 젊은 날을 상징하는 편지가 불과 함께 사라짐으로써 치유된다. 이 영화의 감독 Martin Gabel은 오손 웰스와 연극을 함께 했던 동료로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약했다. 그의 유일한 연출작으로 남은 'The Lost Moment'는 헨리 제임스 문학의 기이한 영화적 변용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christinawehner.wordpress.com   영화 속 줄리아나로 분장한 Agnes Moorehead가 자신의 사진을 들고 있다.



***영화의 원작 소설 '애스펀의 러브레터(The Aspern Papers)'는 2000년에 번역 출간되었으나 현재는 구할 수 없다. 저작권이 풀린 작품(Public Domain)이므로 영문본은 www.gutenberg.org에서 다운받아서 볼 수 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1부
The Wings of the Dove(199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henry-james-1-wings-of-dove-19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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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Henry James)문학의 영화적 변용 1부:

The Wings of the Dove(1997), Iain Softley 감독
 


  "밀리는 죽어가고 있어.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지."

  여자는 남자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인다. 케이트와 머튼은 연인 사이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을 미룬 둘은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주변을 속인다(영화에서는 약혼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돈 때문이다. 가난한 케이트는 부유한 이모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이모는 케이트를 부자 귀족과 맺어주려고 한다. 머튼은 가진 것 없는 글쟁이 기자라서 이모 눈에는 들지도 않는다. 그런 케이트 앞에 미국인 상속녀 밀리가 나타난다. 피붙이 하나 없는 밀리는 죽을 병에 걸려 있다. 그런데 밀리는 케이트의 연인 머튼에게 마음을 뺏긴다. 밀리와 친구가 된 케이트는 속내가 복잡해진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밀리와 머튼을 결혼시키고 유산을 받게 하면 어떨까? 그리고 나서 자신이 머튼과 결혼하면 되지 않은가?

  과연 케이트는 악녀인가? 케이트를 사랑하는 머튼은 정직한 인물로 거짓말을 혐오한다. 그런 그에게 연인 케이트는 다른 여자에 대한 '거짓 사랑'을 강요한다. 그것도 죽어가는 여자를 상대로 유산을 얻어내라고 말이다. 밀리가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냐고 남자를 구슬린다. 남자는 연인에 대한 집착과 환멸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모자가 된다.

  헨리 제임스(1843-1916)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였다. 미국인으로 태어났으나 유럽을 동경했고, 결국 영국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살아생전에 소설과 희곡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동시대에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이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 였다. 그즈음 미국 출판계에서 선집 형태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헨리 제임스는 새롭게 부각되었다. 연극과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비둘기의 날개(The Wings of the Dove, 1902)'는 무려 9번이나 각색되었다. 1997년에 Miramax에서 제작한 이 영화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 거치는 과정은 '압축'과 '생략'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헨리 제임스의 문체는 부연 설명이 많고 장황한 만연체에 가깝다. 영문본을 읽다 보면 다시 이전의 문장으로 돌아가서 읽게 될 때가 많다. 영화로 만들어진 '비둘기의 날개'에서는 그런 제임스의 흔적을 기술적으로 삭제해 버렸다.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에서 시간은 1910년으로 건너뛴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등장인물들은 내쳐졌으며, 밀리가 미국 특파원으로 온 머튼을 만나서 반했다는 소설 속 설정도 바꾸었다. 영화에서 밀리는 런던에서 처음으로 머튼을 보게 된다. 영화는 무엇보다 케이트와 머튼의 육체적 끌림에 좀 더 비중을 둔다. 점잖은 빅토리아 시대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영화의 선정성에 꽤나 놀랄 것이다. 헐리우드의 뻔한 장삿속이 불쾌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지닌 본질을 망가뜨린 걸까?

  러닝타임 1시간 42분이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1910년대를 충실히 재현한 세트와 의상, 베니스에서 찍은 로케이션 장면들은 눈을 뗄 수가 없다. 늘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베니스에서 어떻게 인파를 통제하고 영화를 찍었는지 내내 궁금해질 정도이다. 영화 '비둘기의 날개'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 생기와 광채를 부여한다. 무엇보다 케이트를 연기한 헬레나 본햄 카터의 연기가 매혹적이다. 소설 속에서 케이트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묘사되는데, 카터는 존재 그 자체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부에 대한 거칠고 들끓는 욕망으로 연인 머튼을 자신의 계획에 동조하게 만드는 케이트. 꽤나 주도면밀하고 냉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밀어내는 속내가 편할 리가 없다. 머튼이 진짜 밀리를 사랑할까봐 두려워진 케이트는 흔들린다. 밀리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을 원하는 마크 경을 부추겨 머튼과 자신의 관계를 밀리에게 알리도록 한 것이다.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밀리. 머튼의 사랑으로 잠시나마 행복을 느꼈던 밀리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밀리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재산을 머튼과 케이트에게 남긴다.

  "우린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We shall never be again as we were!)"

  원하는 돈을 얻게 된 케이트는 행복했을까? 소설은 케이트가 머튼을 향해 외치는 그 말과 함께 끝난다. 세상물정 모르는, 그저 순전하게 빛나는 한 마리 비둘기로 묘사되는 밀리는 자신이 남긴 돈이 두 연인에게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음을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밀리는 사랑을, 머튼은 평생 간직할 아픈 추억을, 케이트는 돈을 얻었다. 헨리 제임스가 그려낸 이 서늘한 사랑의 초상에서는 깊은 슬픔이 베어져 나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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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살이 넘은 사람은 지원할 수 없다. 몸에 문신이 있는 사람도 안된다. 회사에서 3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기숙사가 제공된다. 방 하나에 4명, 최대 8명이 같이 쓴다. 구인 담당자들은 버스 터미널 앞에서 자신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외친다. 캐리어를 끌고 이제 막 상경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은 그 조건들을 유심히 듣는다. 마침내 마음을 결정한 이들은 대형 관광 버스에 몸을 싣는다. Jessica Kingdon의 2021년작 다큐멘터리 'Ascension(登楼叹)'의 도입부는 대형 제조사들의 현장 구인 장면을 담는다. 다큐는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의 산업 현장과 노동자들, 그리고 다양한 사치 산업과 소비 행태를 통해 오늘날 중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조망한다.      

  내레이션이 배제된 이 다큐는 이미지와 소리, 음악으로만 내러티브를 구성해 나간다. Dan Deacon이 맡은 음악은 군데 군데 전자음과 공장의 기계음을 합성했다. 때론 빠르게, 느리게 흘러가면서 음악은 다큐에 운율을 부여한다. 쉴 새 없이 기계에서 쏟아지는 플라스틱 부품들, 그것을 반복적으로 조립하는 공장 노동자들, 그들은 가끔씩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동료에게 왜 공장장에게 밥을 사지 않느냐며 말하는 이는 그에게 잘 보여야 일거리를 계속 줄 거라며 설득한다. 노닥거리지 말고 잡담도 하지 말라며 경고하는 관리자. 아마도 관리자의 자녀라고 생각되는 아이는 공장을 비추는 여러 대의 CC TV 화면이 보이는 책상 앞에서 간식을 먹고 있다. 이렇게 이 다큐에는 다층적 의미를 지닌 메시지들이 흥미롭게 숨겨져 있다.

  관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붙잡는 장면은 성인용 특수 인형(Sex Doll) 제작 현장일 것이다. 실리콘으로 제작되는 인형을 만드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그들은 섭씨 400도가 넘는 고온의 성형 도구를 다룬다. 거기에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유해한 염료와 가루와도 씨름해야 한다. 주문 고객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최적의 색을 선정하고, 완제품의 세부를 사진으로 찍어서 주문자에게 보낸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국경을 뛰어넘는 성 상품 산업의 하부 구조를 부각시킨다.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회사는 전체주의적 방식으로 직원들을 훈련시키고 관리한다. 군복을 입고 제식 훈련을 받는 노동자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애사심을 되새긴다. '명령에 따르라'는 구호를 외친 후, 기숙사로 향하는 그들의 출입은 '지문'과 같은 생체 인식으로 통제되고 감시받는다. 그들이 만든 물건은 부의 창출을 위한 원재료가 된다. 개인 동영상 채널로 물건을 판매하는 판매자는 신상품을 사라고 외치고, 부자가 되기 위한 마케팅 세미나에서는 몇 년 이내에 몇 백억을 벌겠다는 허황된 다짐이 울려퍼진다.

  늘어난 부유층들의 수요에 맞추기 위해 생겨난 집사 교육 학원, 경호원 학교도 볼 수 있다. 경호원 학교의 교관은 잘 해내지 못한 훈련생을 무자비하게 질책하며 모욕을 준다. 진짜 돈 있는 사람들의 저녁 식사 장면도 포착한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그들은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벌이는 무역 전쟁에 불편한 속내를 보인다. 신장 지역의 인권 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라며 중국의 입장을 강변하기도 한다. 중국이 좀 어려움을 겪기는 하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다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대형 화장품 회사 사장의 연설에서 드러난다. 행사장의 홍보 영상에는 립스틱 생산 장면과 여군들의 행렬이 병치된다. 이 기이한 홍보 영상은 중국이 무역전쟁에서 필사적인 '군인 정신'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자기 암시가 들어있다.   

  감독 제시카 킹던은 2017년에 10분 가량의 단편 다큐를 선보였다. 'Commodity City'는 다양한 소비재들의 판매 집결지인 중국 저장성의 'Yiwu(義烏) city' 상가의 일상을 담았다. 킹던이 그 단편을 찍으면서 가졌던 관심이 'Ascension'에서 좀 더 깊이있는 사유로 확장되었다. '상승'으로 번역되는 이 다큐의 제목은 킹던의 증조부가 지은 시 제목에서 따왔다. 다큐는 중국 각 지역의 51개 공장에서 촬영되었는데, 그 여정은 감독에게 자신의 뿌리를 들여다 보는 계기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중국인인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킹던은 후난성에서 증조부의 자취를 발견한다(asiapacificarts.org와의 인터뷰 참조). 청나라 말기의 문인이었던 Zheng Ze, 그가 지은 시 'Ascension(登楼叹)'의 싯귀로 다큐는 문을 연다.

  "손에 칼을 쥐고 탑을 오르네
  근심이 사라지길 바라며 먼 곳을 바라보네
  하지만 내가 오르기에 탑은 너무 높아
  오히려 괴로움만 커질 뿐

  Hand on my sword, I ascend the tower.
  I gaze afar, hoping to relieve my worries.
  The tower is too high to climb;
  Instead, my troubles only grow."

  부를 향한 무지막지한 열망, 소비주의로의 질주. 오늘날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계층 이동은 가능한가? 킹던은 대규모 워터 파크를 채운 인파, PC 게임에 몰두하는 젊은이들의 무료한 일상을 보여주며 그 질문에 답한다. 그들은 소비할 뿐, 더 높은 계층으로 가기 위한 사다리에 오르지는 못한다. 이 다큐는 우리말 제목 '중국몽'으로 나와있는데, 나는 그 제목이 다큐의 본질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Ascension'의 중국어 부제는 '登楼叹', '망루에 오르며 한숨을 쉰다'는 뜻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갖고 싶고, 쓰고 싶다는 극한의 물질적 욕망의 끝에서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허망한 괴로움 뿐이라고 킹던은 시를 통해 강조한다.

  다큐의 끝부분, 중국의 자원 무기인 희토류 광산과 함께 상품을 실은 컨테이너 선박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버스 터미널에서 시작한 다큐의 여정은 그렇게 마무리 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 매혹적인 영상 서사시를 만든 제시카 킹던, 그의 부친은 성공한 헤지 펀드 매니저이다. 분명 '궁핍함'과는 거리가 먼 삶의 배경을 지닌 부유한 다큐 제작자는 어쩌면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부의 숨겨진 본질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이 다큐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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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Gaku: Our Sound(2019), Kenji Iwaisawa
The Summit of the Gods(2021), Patrick Imbert
Flee(2021), Jonas Poher Rasmussen


1. 일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바람, On-Gaku: Our Sound

  하고 싶은 일이 없어도 괜찮은 걸까? 고등학생 켄지와 오타, 아사쿠라는 학교 동아리방에서 비디오 게임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 한주먹하는 켄지에게는 싸움을 걸고 싶어하는 오바와 그 패거리들이 골칫거리다. 그러나 켄지는 '짱'이 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켄지에게 누군가 잠깐 일렉 기타를 맡긴다. 그때부터였다. 켄지가 음악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민머리, 각진 눈, 뚱뚱한 외모를 지닌 아웃사이더 3총사는 그렇게 밴드를 결성한다. 이 밴드, 과연 연주는 할 수나 있을까?     
 
  이와이사와 켄지는 2019년에 독특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내놓았다. '음악(音楽)'이란 제목의 'On-Gaku: Our Sound'는 제작에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모든 작화를 직접 손으로 그린 71분의 이 작품을 만드는 동안 그의 나이는 마흔을 넘겼다. 아마도 이와이사와 켄지에게 이 애니메이션은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중요한,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On-Gaku'는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지점에 자리한다. 단순하고 간결한 작화, 건조한 유머, 실험적 음악,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꽤 괜찮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켄지는 자신들의 밴드에 '고무술(古武術, Kobujutsu)'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저 단음으로 베이스 기타를 치고, 드럼으로 두들겨 대는 음악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록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연주는 학교 음악 동아리 리더 모리타를 감동시킨다. 두 밴드는 합심해서 곧 열릴 록 페스티발에 참가하기로 한다. 삼총사 밴드가 연주하는 단음의 연주, 모리타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손발 오그라드는 발라드적 감성. 남들이 보기에는 우습기 짝이 없다.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매우 진지하며 최선을 다해 음악을 하고 있다. 이 '자기 중심성'이야말로 청소년기를 이끄는 중심 추동력이다.  

  "음악이 없다면, 난 아무 것도 아냐."

  공부는 구제불능이라며 자조하는 모리타. 학교 생활은 재미가 없고, 다들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한다. 이와이사와 켄지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주변부 청소년의 초상을 그려낸다. 'On-Gaku'가 그려낸 십대 아웃사이더들의 모습에는 기이한 활력과 희망이 보인다. 그 이유가 뭘까?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그냥 해보게 된 음악이 그들의 꽉 막힌 일상에 숨구멍을 만들어 준다. 비록 최고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여린 음성(여성 성우가 담당)으로 말하던 모리타는 강한 목소리의 록커로 변신하며, 켄지는 단음만 내는 베이스 기타를 때려 부수고 리코더로 기막힌 음률을 연주해 낸다. 그리고 마음에만 둔 여자 친구 아야에게도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 있게 된다. 비주류적 감성이 넘쳐나는 이 애니메이션은 썰렁하지만, 그 이면에 온기를 지니고 있다. 'On-Gaku'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바람이 느껴진다.  


2. 멈출 수 없는 여정, The Summit of the Gods(2021)

  Netflix의 마케팅 전략은 '돈 되는 것은 무조건 다 해 본다' 같다. 자체 제작 다큐를 비롯해 예술 영화, 애니메이션 배급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프랑스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The Summit of the Gods(2021)'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유메마쿠라 바쿠(夢枕獏)가 쓴 '신들의 봉우리(神々の山嶺)'를 원작으로 한다. 다니구치 지로가 생생한 작화로 그려낸 만화책도 나와있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라 실사 영화 '에베레스트 신들의 봉우리(2016)'로도 개봉되었는데, 관객들의 평은 그렇게 높지 않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어떨까?

  이 프랑스 애니메이션은 좀 밋밋하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등장인물이 일본인들인데 프랑스어 더빙으로 만들어졌다는 데에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에 익숙한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그 차이가 좀 더 크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인물과 대사가 따로 노는 이 기묘한 불일치성은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 거기에 이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그림체는 정교하고 세밀한 일본 애니의 작풍과도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등반 장면을 비롯해 에베레스트의 풍광을 재현한 모습은 실사 영화만큼이나 사실적이다.

  1924년, 조지 말로리와 앤드류 어바인은 에베레스트 등정 과정에서 실종된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1993년, 일본 기자 후카마치는 말로리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카메라를 손에 넣는다. 만약 말로리가 정상에서 찍은 필름을 찾을 수 있다면,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기록이 바뀔 것이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본 결과, 카메라를 발견한 일본 산악인 하부 조지가 필름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하부는 동료를 비운의 조난 사고로 잃은 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하부와 필름의 행방을 찾아 네팔로 떠난 후카마치, 그는 자신이 찾는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한 이 작품은 산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지닌 한 산악인의 인생 여정을 따라간다. 목숨을 내걸고 신들의 봉우리에 다가서려는 사람들, 무엇이 그들을 산으로 이끄는가? 그것을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신들의 봉우리'는 그 이유가 단지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한 야망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산을 오르는 여정, 일단 그 길에 오르면 멈출 수 없는 사람들. 결국 이 작품은 그 도저한 열망과 집념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3. 이야기가 가진 진정한 힘, Flee(2021)

  '난민'은 팬데믹 시대에도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진행되는 주요한 사건이다. 덴마크에서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희망을 찾아나선 아프간 난민의 기나긴 여정을 들려준다. 주인공 '아민'의 이름은 가명이지만,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실사와 애니메이션, 실제 뉴스 화면이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서 이야기의 핍진성(逼眞性)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            

  아민의 이야기를 듣는 감독은 마치 임상 심리학자 같다.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기억을 편안하게 털어놓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선 아민은 침대에 눕는다. 눈을 감고 이야기를 하던 그는 때로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할 때도 있다. 1989년, 소련의 아프간 철군과 함께 어린 아민과 가족은 고국을 떠날 처지에 놓인다. 관료였던 아버지는 무자헤딘에 의해 체포되어서 생사를 알 수 없다. 어머니와 두 누나, 형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했지만 그때부터 시련은 시작되었다. 불법 체류자 신세로 소련 경찰의 추적을 피해 집안에서 지내야만 했던 것. 일찍 고국을 떠나 스웨덴에 정착한 큰 형이 밀입국 비용을 마련할 동안 아민의 가족들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떠난 두 누나는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련을 빠져 나갔다. 그 뒤를 이어 아민과 형, 어머니도 밀입국 길에 오르는데...

  이 애니메이션 영화가 가진 힘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아프간에서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던 아민이 어떻게 소련에서 고립된 몇 년의 세월을 견뎠는지, 첫 번째 밀입국 시도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그리고 마침내 유럽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이 마치 소설처럼 펼쳐진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아니라, 피와 뼈를 가르는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건져올리는 과거의 기억이다. 자유를 찾아 떠난 난민이면서 동성애자로서 아민이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도 겹쳐진다.        

  이제는 학자로서, 그리고 삶의 동반자를 만나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민. 난민으로 지냈던 시절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아있고, 가족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서로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 어떤 면에서 아민의 이야기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그 시절 많은 아프간 난민들의 가려진 삶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민은 먼저 고국을 떠나 유럽에 정착한 형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탈출이 가능했다. 얼마나 많은 난민들이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 다치고 죽었는지 알 수 없다. 'Flee'는 아민의 힘겨운 탈출기를 통해 분쟁 지역의 사람들이 처한 생존의 위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난민의 문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사진 출처: gkids.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flimspea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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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 movie. 흔히 우리가 수준 낮은 영화를 언급할 때 'B급 영화'라는 표현을 쓴다. 그 B급 영화를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그야말로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쏟아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아주 간명하다.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B movie는 단기간에 적은 제작비로 만드는 영화였다. 주로 70분 안팎의 분량으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극장의 상영 회전율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1930년대와 40년대의 B movie는 서부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거기에 새로운 장르가 더해졌다. 필름 느와르(Film noir)였다. 제작사 RKO는 필름 느와르의 산실이었다. '삐 삐 삐비삑'하는 소리와 함께 라디오 송신탑이 나오는 인트로 화면. 아마도 오늘날 필름 느와르 영화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제작사 로고일 것이다.

  고전기 헐리우드의 많은 감독들에게 B movie 연출은 일종의 수련기에 해당했다. 에드워드 드미트릭(Edward Dmytryk) 감독은 영화사의 메신저 보이(하급 사환)에서부터 경력을 시작한, 말 그대로 밑바닥에서부터 구르면서 영화를 배웠다. 그도 수많은 B movie를 찍으면서 경험을 쌓아갔다. RKO와의 계약은 경력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A급 영화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그런 그에게 '십자포화(Crossfire, 1947)'는 명성과 상업적 성공을 안겨다준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직후에 그의 경력은 급전직하했다. RKO에서는 해고 통보를 받았고, 미국을 떠나야만 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영화의 원작은 리처드 브룩스(Richard Brooks, 작가 겸 감독)가 1945년에 발표한 소설 'The Brick Foxhole'이다. John Paxton이 각색 작업을 맡았는데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원작의 상당 부분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에 해병대원으로 참전한 리처드 브룩스는 군대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소설을 썼다. 소설은 군인 살인 사건과 함께 얽혀 있는 동성애와 인종차별주의, 반유대주의를 그려냈다. 전후 리얼리즘 소설로서 리처드 브룩스는 냉철한 관찰자적 시점을 보여준다. 영화 '십자포화'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원작 소설을 읽었다. 235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두운 방 안에서 격투 소리가 들리고,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다. 사건을 맡은 핀레이 반장은 피살된 조셉의 동료 군인들을 취조해 나간다. 그는 조셉과 함께 있었던 미첼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하지만 미첼의 성품을 잘 아는 킬리(로버트 미첨 분)는 미첼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옹호한다. 킬리의 심중에는 다른 유력한 용의자가 있다. 냉혹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몬티(로버트 라이언 분), 그도 조셉이 죽은 날 밤에 미첼과 함께 어울렸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핀레이 반장은 살인의 동기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은 조셉은 유대인이었다. 제대를 앞두고 서로 의지하며 형제처럼 지냈던 그들 가운데 과연 누가, 왜 조셉을 죽인 것일까?

  1934년부터 1968년까지 적용된 미국 영화 산업의 자율적 검열 기준인 'Hays Code'에서 동성애는 성 도착(sex perversion)에 해당하는 금기 사항이었다. 그러므로 영화 '십자포화'는 브룩스의 원작 소설에서 살해 동기가 된 '동성애'를 '반유대주의(anti-semitism)'로 대체했다. 물론 반유대주의도 껄끄러운 요소이기는 했다. 헐리우드를 지배하는 유대인 자본을 고려하면 그러했다. 영화가 원작의 동성애 코드를 삭제하고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것은 검열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미국내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었다. 'The Brick Foxhole'에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가 잘 묘사되어 있다. 원작자 리처드 브룩스는 그러한 불안 요소들로 끓어 오르는 미국 사회의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로버트 라이언이 연기한 '몬티'라는 인물은 바로 미국 사회의 병적 징후를 상징한다. 소설에서 그는 입대 전에 경찰이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재직 기간에 흑인과 유대인에 관련된 폭행으로 고발을 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몬티가 바라보는 세상은 힘에 의해 지배되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그런 그의 기준에서 에디(영화 속에서는 조셉)와 같은 유대인, 거기에자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제거해야할 열등한 존재이다. 영화는 살해된 조셉에게서 소설의 에디가 지닌 '동성애자' 기표를 제거하고, '유대인'만을 남긴다. 그런데 에디가 가진 유약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성향은 미첼의 성격과 일정 부분 닮아 있다. 에디는 외롭다며 우는데, 그것은 남성다움의 특성과는 거리가 멀다.

  소설 속에서 술에 취한 에디는 미첼과 함께 춤을 춘다. 이러한 은밀한 동성애적 코드는 영화에서는 '동료애'의 형태로 살아남는다. 킬리는 미첼의 가장 우호적인 조력자로 제대를 앞둔 미첼의 취약한 심리 상태를 걱정한다. 그는 핀레이의 심문에서 자신이 미첼의 아내에게 힘들어 하는 남편을 만나 보라고 전화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또한 미첼의 구명을 위해 핀레이 반장의 수사를 돕는다. 

  '십자포화'에는 그렇게 원작 소설의 본질적인 부분이 삭제되고 변형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당시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중요한 사회적 문제, 즉 '다름'에 대한 폭력적인 증오와 차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는 이후, 공산주의자 색출이라는 '매카시즘'과 연결된다. 그리고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 자신이 그 광풍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영화가 개봉된 1947년에 드미트릭은 의회 비미활동위원회(HUAC)에 나와서 증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부했다. 잠시 영국에서 지내던 그는 결국 미국으로 돌아와 의회에서 증언했다. 그것은 변절이나 배신이 아닌 생존을 위한 길이었다.

  "전쟁이 지옥이라면 벽돌 참호는 저주이다(So I can say, long after Sherman, that if war is hell, then a brick foxhole is damnation)."

  소설 'The Brick Foxhole'의 서문에서 리처드 브룩스는 그렇게 썼다. 브룩스는 전쟁의 참혹한 본질과 끔찍한 살육극이 참전 군인들에게 남긴 깊은 내상을 그려낸다. 전쟁은 끝났지만, 돌아온 군인들이 마주하게 될 사회는 또 다른 의미의 전장이 될 터였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나오는 분노와 증오가 어떻게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는지, 영화 '십자포화'는 그에 대한 소신있는 발언을 들려준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좌측부터 로버트 미첨, 로버트 라이언, 로버트 영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산(The Mountain, 195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mountain-1956.html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스나이퍼(The Sniper, 195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sniper-19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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