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신자유주의 과거와 미래



김영삼 정부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인식은 별로 진전이 없어서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레이건-대처식 신보수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재야 진보세력이 김대중 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면서 신자유주의와 코퍼러티즘(조합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4·13 총선에서 경제정책에 대한 합리적 논쟁은 실종되고 오히려 낙선운동만 부각되면서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깊어진 것도 물론 이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논쟁의 구도

미국에서 법인자본의 금융화 및 구조조정이 진점됨에 따라 성장기 경제정책인 케인스주의는 불황기 경제정책인 새 케인스주의로 `개혁'된다. 50~60년대 케인스주의는 보수주의적 우파를 통합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중도좌파의 헤게모니를 실현한다.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는 닉슨의 선언은 이를 상징한다. 그러나 70년대 케인스주의의 헤게모니가 위기에 빠지면서 화폐주의를 매개로 신우파, 신보수주의가 등장하고, 80년대 중반 신중도좌파, 신자유주의의 새 케인스주의가 출현한다. 90년대 신보수주의는 또다시 신자유주의로 수렴하는데, 이를 넓은 의미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부를 수 있다.

 

전후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사민주의에 의해 대표되는데, 특히 독일의 경우 59년 고데스베르크 대회에서 코퍼러티즘으로 변질된 사민주의는 보수주의의 포스트파시즘적 `사회적 시장경제론'을 수용하기까지 한다. 90년대 이후 출현한 유럽식 신자유주의는 금융세계화에 순응하려는 현대화된 사민주의로서 `사회자유주의'라 불린다. 블레어의 `제3의 길'의 논거로 제시되는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자본주의'란 클린턴이 제시하는 새 케인스주의의 유럽식 변종이다. 클린턴과 블레어는 범대서양적 규모에서 신자유주의의 초민족화를 상징하고 있다. 97년 금융위기 이후 아시아-태평양지역도 초민족적 신자유주의에 통합되고 있는 중이다.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수렴은 우파와 중도좌파의 분열 가능성이라는 정치적 효과를 생산한다. 극우 보수주의로서 인민주의 또는 커뮤널리즘(코뮌주의, 공동체자치주의)이 우파에서 분리되고, 자유주의 좌파로서 진보주의 또는 코퍼러티즘(조합주의)이 `좌파의 좌파'를 자처하면서 중도좌파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가능성일 뿐인데, 예를 들어 블레어에 대한 라퐁텐의 반대나 조스팽의 유보는 신자유주의와 코퍼러티즘의 절충이 계속 쟁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진보주의적 경향의 자유주의 좌파가 인민주의적 경향의 극우 보수주의와 연대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유럽과 일본의 요구로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의 `뉴 라운드'에 대한 반대 투쟁은 미국의 방조라는 조건 속에서 복잡 다양한 정치적 경향들이 수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벨 에포크와 파시즘의 위험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이런 논쟁 구도는 언뜻 보아도 바이마르 시대 독일의 상황과 유사한데, 세계사적으로 볼 때 이는 우연이 아니다. 양자는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일반적 위기가 전개되면서 자유주의의 위기와 보수주의의 예외적 형태로서 파시즘의 위험이 동시적으로 발생한다는 정세적 공통성을 갖는다. 특히 `벨 에포크'(일반적 위기를 구성하는 두차례 대불황 사이의 경이로운 호황기)에 중간층과 노동귀족이 몰락하면서, 불가능한 개혁 전망에 대한 좌우의 비판이 전개되고 진보주의적 코퍼러티즘과 인민주의적 커뮤널리즘이 연대하는 `원한의 정치'가 분출한다면, 부르주아지가 위기에 빠진 자유주의를 파시즘으로 대체할 예외적 위험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윤소영/한신대 교수·국제경제학 spinmax@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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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미국자본의 이해



20세기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자본의 법인적 형태, 나아가 초민족적 형태를 토대로 한다. 법인자본은 소유와 경영 또는 금융과 산업의 분리를 의미하고, 게다가 전자에 대한 후자의 우위를 의미한다. 법인자본은 1930년대 대불황을 거치면서 케인스주의적 경제정책이 소유 또는 금융을 억압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법인자본의 초민족화는 전후 유럽의 분단과 서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통해 미국의 직접투자가 급증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의 재건이 시도된다는 점에 지정학적 특수성이 있다. 또 미국은 일본으로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진출하는 것을 억지하고 오히려 일본의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위해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는 이른바 `역개방' 정책을 채택한다. 이에 따라 일본의 재벌은 계열 또는 그룹의 형태로 복원되고, 게다가 한국과 대만은 일본경제의 `후배지'로 재통합된다.

 

미국경제의 위기와 기회

경제위기란 본질적으로 자본축적의 위기이고 그 궁극적 원인은 이윤율 저하 및 이윤량 감소에 있다. 미국의 경우 65년을 전후로 이윤율 저하가 관찰된다. 이윤율 저하가 급기야 이윤량 감소를 촉발시켜 경제위기가 발생한 것은 73~74년께이다.

 

위기에 빠진 미국경제의 성격은 크게 변화한다. 단적으로 소유-금융에 대한 억압이 철회되면서 금융화가 전개되는데, 이는 크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우선 70년대는 석유달러의 환류를 통해 초민족적 은행자본이 크게 확장하고 전통적인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얼마간 위축된다. 남미를 필두로 여러 발전도상국이 전통적인 수입대체적 공업화를 포기하고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무시한 채 수출지향적 공업화로 전향한 것은 초민족적 은행자본으로부터 저금리의 풍부한 외채를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의 고금리로 인한 외채위기는 초민족적 은행자본이 주도하는 금융화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후 초민족적 은행자본 대신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다시 대두한다. 그렇지만 80년대를 거치면서 주식시장이 활성화되고 법인자본의 지배구조도 금융화했기에 법인자본의 초민족화는 금융세계화라는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된다.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활동에서 직접투자와 증권투자는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경제정책에서도 케인스주의가 화폐주의적 요소를 통합해 새 케인스주의로 전환한다. 70년대 이래의 경제위기를 타개하려는 이런 시도 덕분에 90년대에 들어와 미국은 주식시장의 호황과 여피족의 과소비에 근거한 이른바 `신경제'를 창출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윤율은 경제위기가 발생한 73~74년 수준을 겨우 회복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마저도 60년대 노동자와 중산층을 사로잡았던 `보통 사람의 위대한 사회'라는 미국의 꿈, 그리고 제3세계 민중에게 근대화를 약속했던 `진보를 위한 동맹'을 희생한 대가일 뿐이다.

 

금융세계화에 통합되는 한국경제

90년대 소련 및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른 냉전의 종식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봉쇄정책에서 포용정책으로 전환한다.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수성은 소멸하여 역개방 정책이 철회되고 금융세계화로의 통합 압력이 제고된다. 이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공업국은 97년에 금융위기를 맞게 된다.

 

경제위기를 타개한다는 구조조정의 화두가 금융개혁, 즉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국내외 기관투자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른바 `소액주주운동'이 요구하는 재벌개혁의 핵심도 다름 아니라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에 있다. 바야흐로 신흥공업국에서 신흥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는 한국경제의 앞날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윤소영/한신대 교수·국제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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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의 기사를 읽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윤소영 교수가 연재했던 <가리사니>의 기사 몇 개를 가져온다. 당시의 정세에 대한 그의 이론적 분석이 가미되어 생각할거리를 제공한다. 물론 윤 교수의 글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적당한 '복습'의 기회도 될 터. 몇몇 대목에서 빗나간 그의 예측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UK]

 

 

[가리사니] 경제개혁의 어제와 오늘



17년 개발독재 끝에 박정희 정부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진 것은 1978년에 이르러서다. 중화학공업의 과잉투자로 인해 외채가 급증하고 수출 채산성이 악화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말 총선에서 박정희 공화당은 근소한 차이지만 쓰디쓴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런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개각이 단행된다. 특히 이제까지의 경제성장 기조에서 경제안정 기조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신현확이 기용된다. 79년 4월 경제 안정화 종합시책이 나오고 5월에는 그 일환으로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이 시도된다. 그렇지만 정권 말기적 난국은 이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만다. 결국 10·16 부마항쟁으로 인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는 10·26 사건이 발발한다.

 

전두환 정부가 시작한 경제개혁

12·12 쿠데타에서 5·18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80년 봄'은 동상이몽 격이던 두 김씨가 아니라 오히려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79∼82년 세계경제의 불황 속에서 출범한 전두환 정부에서 김재익-강경식 경제팀은 신현확 경제팀의 경제안정론을 경제개혁론으로 급진화한다. 관치금융과 재벌체제로 왜곡된 미시적 산업·무역 구조가 거시적 불안정성을 야기한다는 것이 그 핵심 논리다.

 

그렇지만 중화학공업의 구조조정은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기에 금융·재벌 개혁은 좌절된다. 재벌의 이른바 `대마불사' 신화가 창조되는 순간이다. 83년 아웅산 사건 이후 새로이 구성된 사공일-김만제 경제팀은 일보 후퇴하여 얼마간 타협적 자세를 취한다. 게다가 86∼88년 이른바 `3저 호황'이 조성되는데, 이는 85년 플라자 협정, 87년 루브르 협정과 80년대 초·중반 다른 신흥공업국들의 외채위기 등 금융 세계화 이행과정에서 유발된 일시적 상황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근거 없는 경제 낙관론이 유포되어 금융·재벌 개혁이라는 의제 자체가 기각되고 만다.

 

87년 6·10항쟁을 6·29선언으로 무력화하고 두 김씨의 끝없는 대권경쟁을 활용해 정권을 재창출한 노태우 정부는 확고한 경제정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3저 호황이 퇴조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직 경제 낙관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90년 3당 합당과 공안정국을 틈타 수출 경쟁력 강화라는 구호 아래 구조조정을 시도하지만 이미 때늦은 것이다. 노태우 정부가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성과는 88∼89년 미-소 탈냉전 분위기 조성에 따른 남북관계 개선 정도일 것이다.

 

반면, 이 시기에 재벌과 함께 재벌 노조의 정부에 대한 저항이 크게 부각된다.

 88∼89년 현대중공업 파업투쟁과 92년 정주영 현대 회장의 대선 출마가 그 증거다. 여러모로 보아 노태우 정부는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로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각각 3당 합당과 디제이피 연합을 통해 집권한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역사적 성격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두 김씨 정부가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라 사활적인 목표로 내건 금융·재벌 개혁은 전두환 정부가 실패한 과제를 완수하려는 것이 아닐까. 또 김영삼 정부 때부터 단속적으로 제기되는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도 미국의 포용정책에 따라 노태우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작업을 계승하려는 것이 아닐까.

 

모든 걸 다 바꿔?

 

차이가 있다면 두 김씨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력이 군사정부에 비해 정통성 문제로 덜 시달리는 만큼 재야 진보세력에 대해 더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93년 이후 진보세력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자유·진보 대 보수 구도로 전환하자고 화답하면서 문민화 과정에 통합된다. 문민정부 아래서 각종 이익단체가 활성화하고 노조는 하나의 비정부기구로 격하된다. 구조조정에 금융·재벌 개혁뿐만 아니라 노동개혁까지 포함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라고 외치고 흔들며 사람들 정신을 빼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윤소영/한신대 교수·국제경제학

spinmax@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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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의 역량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I


                                                                

 진태원(서울대학교 강사)

 

 


서론: 『신학정치론』에서 『정치론』으로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의를 전개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요소들(자연상태 개념,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의 원리로서 계약, 계약의 결과로서 주권)을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용은 매우 특이한 수용으로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의 사회계약론의 기본 전제들을 비판하거나 심지어 전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정치론』에 나타난 계약론 수용 및 변용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스피노자는 홉스 사회계약론의 핵심 전제 중 하나인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사이의 단절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사회상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자연권이 지배하는 곳이다. (2) 이에 따라 사회계약은 홉스와는 달리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 곧 인공적 질서로서 국가를 정초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권리는 역량에 의해 조건지어지며, 권리의 범위는 역량의 정도에 비례한다. 따라서 주권자의 권리 역시 그의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3) 홉스와 달리 스피노자에서 계약은 역사적 계약으로 나타나며, 더욱이 고유한 의미의 사회계약, 곧 정치적 계약과 이를 보충하는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된다. 이때 종교적 계약은 사회상태 속에서 지속되는 개인들의 자연권, 곧 정념들을 순화하거나 규율하기 위한 장치로 도입된다. 스피노자는 히브리 신정국가에 관한 고찰들을 통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신학정치론』보다 6년 뒤에 집필된, 하지만 스피노자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은 『정치론』(이 책은 민주정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11장 4절까지 서술된 상태에서 중단되어 있다)에서는 사회계약론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1)

 

 

『신학정치론』의 논의에서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회계약론이 불과 몇 년 뒤에 쓰여진 저작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우선 당대의 네덜란드 연합주 공화국의 정세에 개입하려는 스피노자 자신의 시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 그 시도에 대한 이론적 성찰과 교정의 의미를 갖고 있다. 곧 스피노자는 공화파 지도자인 드 비트 형제의 정치적 노선을 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신학정치론』은 이러한 정치적 태도의 이론적 표현이다) 네덜란드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정치론』에서 스피노자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이는 불충분한 타협책에 불과하며,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2).

  하지만 이는 좀더 근본적으로는 『신학정치론』이 견지하고 있던 이론적 불충분함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20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자신의 저술의 목표를 공표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들의 사고와 판단(그리고 더 나아가 발언3))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유지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훌륭한 방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사고와 판단 및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국가의 근본 원리 또는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이러한 자유는 사고와 판단에 국한되어야지 행위에까지 확장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스피노자가 우중 및 우중을 이루는 개인들의 이성적ㆍ정치적 역량을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인민의 지배 또는 다수의 지배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인민 전체 또는 그 중 가장 큰 부분에 의해 조화롭게 유지되는 민주주의”(TTP 20장 2절; p. 634))가 가능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말과 행동, 사고와 행위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역시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신학정치론』에 도입된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은 바로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라고 간주할 수 있다. 곧 법적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중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개인들을 규율할 수 있는 보충적인 장치가 필요하며, 스피노자는 히브리 국가의 설립과 운영의 기초가 되었던 이중적인 계약에서 이것의 전형적인 모델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러한 계약론적 문제설정은 우중 또는 대중들을 통치의 대상이자 복종의 주체/신민subjectus으로서만 사고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자신이 주창하는 민주주의적 관점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모세 사후에 곧바로 히브리 국가가 분열과 갈등 속에 빠져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도적인 안정성에 기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봤을 때 『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의 부재는 중요한 이론적 관점의 변화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정치론』에는 『신학정치론』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 곧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우중vulgus이나 평민plebs 같은 단어들과 달리 『신학정치론』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고 이론적으로도 부차적인 위치에 있는 데 반해, 『정치론』에서는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의 부재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개념,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을 대체하는 개념이 바로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떻게 『정치론』에서 이 개념들이 전면에 등장해서 중요한 이론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지, 곧 이 개념들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스피노자의 이론적 관점의 변화는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요한 대상이 바로 이 질문들이다.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 『신학정치론』의 정정


  1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은 비관적 현실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첫째,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이 정서와 이성, 충동과 이성의 대립에 기초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정서와 이성이 대립적으로 파악되면 정서들은 내적 변이와 개조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쉽게 외부의 원인들, 특히 운세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신학정치론』에 나타나는 정서들이 한결같이 부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탐욕libido/concupiscentia으로서의 욕망cupiditas, (운세fortuna에 좌우되는) 헛된 희망spes과 공포metus, 오만jactantia, 증오odio, 분노irae, 적의inimicitias, 간계dolos 등). 둘째, 이에 따라 정서들은 홉스와 마찬가지로 개인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 분열, 곧 반사회화의 기초로 작용하여 인간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을 뿐, 사회화의 인간학적 기초를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연속성, 곧 자연권의 지속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반계약론적 관점을 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계약론과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토대 및 작용을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

 

 

   반면 스피노자는 『정치론』 서두에서부터 인간의 자연권이 지니고 있는 공동적 성격, 따라서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1장 5절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이는 아주 확실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정서들에 예속되어 있으며, 불행한 이들을 동정하고 행운을 누리는 자들을 질투하도록, 그리고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복수에 이끌리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TP 1장 5절)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명시적으로 『윤리학』에 준거하면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서들에 예속된다”(E III P1)는 그의 인간학의 근본 공리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는 종교의 가르침, 곧 “각자는 자신의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시 말해 각자는 타인의 권리를 자기자신의 권리처럼 옹호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정서들에 대해서는 거의 힘을 지니지 못한다”(같은 곳)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도입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는 1장의 마지막 7절의 결론, 곧 “국가의 자연적 원인들 및 기초들은 이성의 가르침에서 이끌어내서는petenda 안되며 인간의 공통 본성 내지는 조건communi natura seu conditione에서 연역해야deducenda 한다”(강조는 필자)는 원리를 예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 다음 스피노자는 2장 15절에서 자신의 관점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제 (2장의 9절에 따라) 자연상태에 있는 각각의 사람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억압당하지 않을 수 있는 동안에만 자신의 권리 아래 있기sui juris sit 때문에, 그리고 한 사람 혼자서unus solus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자연권은 각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고 각자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nullum esse 사실이 따라나온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sed magis opinione quam re constare인데, 왜냐하면 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아무런 확실한 방도도 존재하지 않기nulla ejus obtinendi est securitas 때문이다. (『정치론』 2장 15절-강조는 필자)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근대 자연권 이론에서 볼 수 있는 원자론적 관점을 “공상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억압당하지 않아야 “자신의 권리 아래” 있을 수 있는데, 곧 자신의 자연권을 가질 수 있는데, 고립된 상태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원칙적으로 모든 타인들을 적으로 둘 수밖에 없으므로 혼자서는 자신을 돌볼 수 없고4), 따라서 자신의 자연권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립된 각자의 자연권(“각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고 각자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의 자연권)이라는 관점은 공상적,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자연권이란 원초적으로 독립해 있는 개인들의 권리가 아니라 항상 이미 다른 사람들, 타자들과의 매개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권리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매개를 통해서만 각자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립할 수 있고, 각자의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같은 절 뒷부분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이를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인간에게 고유한 자연권은 인간들이 공동의 법률을 갖고 있고 그들이 거주하고 경작할 수 있는 공동의 토지를 갖고 있는 곳, 그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모든 공격을 물리치고 모두의 공통적인 판단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거의 생각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2장 13절에 따라) 서로 연합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그들은 모두 함께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스콜라철학자들이, 자연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자신들의 권리 아래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려 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 대해 어떤 반론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론』 2장 15절-강조는 필자)

 


마지막 문장은 얼핏 보기에는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을 주장하는 스콜라철학으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스피노자는 자신의 전제조건을 분명히 해두고 있다. 곧 그가 스콜라철학자들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인간들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인간들이 생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권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하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5).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에 관한 스피노자의 마키아벨리주의적 입장에 대해 지적한 것6))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곧 정서들의 인간학적 우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는 홉스의 편에 서 있지만, 정서들을 반사회적인 것으로, 따라서 원자론적ㆍ개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하고 정서들의 원초적인 사회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홉스에 맞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매개, 곧 각자가 자신들의 자연권을 얻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이 매개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6장 1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이성보다는 정서에 따라 인도되기 때문에, 대중들은 이성의 인도가 아니라 어떤 공통의 정서에 의해 자연적으로 합치하게 되며ex communi aliquo affectu naturaliter convenire,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듯이, 곧 (우리가 3장 9절에서 말한 것처럼) 공통의 희망이나 공통의 두려움에 의해, 또는 어떤 피해에 보복하려는 공통의 욕망에 의해 인도되기를 원한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더욱이 사람들 모두는 고립을 두려워하고 누구도 고립 속에서는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조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적/본성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하며statum civilem homines natura appetere, 그들이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nec fieri posse ut homines eundem unquam penitus dissolvant는 점이 따라나온다. (『정치론』 6장 1절-강조는 인용자)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성보다 정서에 따라 인도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신학정치론』과 달리 “합치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고, 사람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은 “어떤 공통의 정서에 의해 자연적으로 합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는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서들을 오직 부정적인 것으로, 곧 반목과 분열, 갈등의 동력으로서만 사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정서는 개인들 각자가 혼자서 느끼는 개별적인 정서가 아니라 공통의 정서이며, 이 공통의 정서는 대중들이 자연적으로, 본성적으로 합치하게 해주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이 때의 “합치convenientia”는 “화합concordia”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이성적 조화나 통합의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con-venire”, 곧 “함께-오다”, “함께-모이다”는 의미, 따라서 어떤 일이나 행동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함께 모이다”는 의미를 갖지만, 이성이 아니라 정서가 공동의 행동과 생활의 동력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스피노자는 2장 15절의 논의와 일관되게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한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더 나아가 “그들이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학정치론』이래 스피노자의 일관된 테제는 자연권은 사회상태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상태 속에서도 지속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사회상태 속에서 자연권이 지속된다는 것은, 정서들이 부정적인 힘으로, 곧 반목과 불화, 갈등의 힘으로 정의되고 있는 이상 사회상태 속에서 갈등과 분열, 반목이 그치지 않고 지속된다는 것, 곧 사회 속에는 근본적인 반사회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스피노자가 인용하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말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당신들이 내부의 배신과 내 주위의 음모에 맞서 나의 안전을 보증해줄 때 나는 두려움 없이 전쟁과 전투의 위험을 감당해낼 것이다. 필립대왕은 극장보다 오히려 전쟁터에서 더 안전했다. 그는 적들의 타격을 곧잘 피했지만, 자기 측근들은 벗어나지 못했다. 당신들이 다른 왕들의 최후를 숙고해본다면, 그들 가운데는 적들보다 자기편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TTP 17장 5절; p.542)

 


  따라서 스피노자는 마케도니아와 로마, 영국 등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국가를 위협하는 위험들의 원인은 항상 외부의 적보다는 시민들이다. 왜냐하면 좋은 시민들이란 드물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또한 주권자의 권리는 법적으로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ㆍ제도적 질서 내로 사람들을 이끌어들일 수 있는 그의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1편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러한 테제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전제들과 단절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테제는 그 자체로는 사회상태, 국가의 형성에 관해 어떤 실정적인 내용을 제시해주지 않으며, 우리는 위에서 이러한 한계는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의 핵심을 이루는 정서론의 한계에서 비롯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반대로 6장 1절의 결론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할 뿐만 아니라, 사회상태의 완전한 해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신학정치론』에 빠져 있는 사회상태, 국가 형성의 기초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만약 사회상태의 완전한 해체란 있을 수 없다면, 이는 인간의 본성 안에 항상 이미 사회성의 경향이 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성의 경향이란 어떤 신비적인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로서의, 또는 인간 본성의 다양한 표현방식들로서의 정서들이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상호개인적 관계를 통해 매개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인간들이 실존하고 행위하는 이상 인간들은 항상 이미 이러한 관계망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테제는 『신학정치론』 이래 지속되어온 “자연권은 사회상태 속에서도 지속된다”는 테제를 보완하면서 스피노자 정치학의 인간학적 기초를 완결하는 테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두 가지 테제가 상호보완적으로 결합할 때 우리는 왜 스피노자에게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단절이라는 관점이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두 가지 테제는 『정치론』에서는 『신학정치론』과 달리 계약이라는 관념이 사회체의 형성에 관한 설명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잘 보여준다.

 

 



정서들의 모방: 원초적 계약의 불가능성


  하지만 우리는 아직 공통의 정서들, 곧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공통의 희망이나 공통의 두려움, 어떤 공통의 피해에 대해 보복하려는 공통의 욕망”이 어떻게 해서 홉스 및 『신학정치론』에서 계약이라는 관념이 수행했던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 이 문제를 살펴봐야 할 차례인데, 여기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스피노자가 『윤리학』 3부 정리 27 이하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사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이래 이룩한 이론적 성과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정서론에서의 발전이다.

 

 

  『신학정치론』의 정념론에 비하면 『윤리학』의 정념론 또는 정서론은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윤리학』에 나타난 정서 개념은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서가 수동적인 것, 곧 정념적인 것들에 국한되지 않고 능동적인 정서들도 포함하고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이하에서 제시된 정서론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정서 개념 및 능동과 수동 개념을 확립함으로써 데카르트나 홉스의 정념론과 단절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윤리학』에 이르러 비로소 역량의 관점에서 정서들을 연역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7). 그 결과 『윤리학』 이후에 스피노자는 더 이상 정서들을 이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이성을 좀더 광범위한 능동화의 역량의 한 계기로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은 『정치론』의 정서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둘째, 『신학정치론』과 비교해볼 때 『윤리학』의 정서론이 지니는 또다른 특징은 바로 정서들의 모방 개념에 있다. 사실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스피노자가 사회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핵심적인 인간학적 원리로서, 바로 이 개념에 기초하여 스피노자는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인간의 사회화 및 반사회화의 경향들을 단일한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당대의 정치학의 흐름과 상이한 기반 위에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할 수 있었다.

 

 

  우선 정서들의 모방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를 간단히 살펴보자.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윤리학』 3부 정리 27에서 제시되는데, 이 정리는 정서들의 모방 개념을 통해 3부의 논의의 한 가지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8)



만약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그리고 그것에 관해 우리가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실재가 어떤 정서를 겪는 것을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이 사실에 의해 비슷한 정서를 겪게 된다.9)

 


정서들의 모방이 제시되기 이전까지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스피노자는 욕망과 기쁨, 슬픔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서들의 분자구조를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코나투스로서의 욕망은 우리의 존재 및 행위역량이 증대되고 촉진되거나 아니면 감소되고 저해받는 이중적 경향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전자와 후자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기쁨과 슬픔이라는 정서다. 나머지 다른 정서들은 이 분자 구조가 변형되고 복잡화된 형태들이다. 둘째, 스피노자는 정리 26에 이르기까지 정서들의 관계를 대상과의 관계로서 전개하고 있다. 이는 다시 두 가지 소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곧 외부원인들에 대한 표상과 결부된 기쁨과 슬픔으로서의 사랑과 미움이 나오는 정리 12-13에서부터 정서의 시간적 차원을 함축하고 있는 희망과 공포가 제시되는 정리 20에 이르기까지는 개별적인 주체와 어떤 대상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분석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정리 21에서 26까지는 이러한 대상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분석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정리 27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정서와 대상의 직접적인 관계를 해체한다는 점에 있다. 곧 이 정리 이전까지 전개된 정서론에서 모든 정서는 항상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생겨난 반면, 정리 27은 직접 어떤 대상에 대한 정서를 겪지 않고서도, 우리와 비슷한 실재10)가 이 대상에 대한 정서들을 겪게 되면, 또는 그것이 그러한 정서들을 겪는다는 것을 우리가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그 실재와 비슷한 정서를 겪게 되는 정서적 메커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정서들의 모방에서 우리는 어떤 대상과의 직접적인 변용을 통해 이러저러한 정서들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하지만, 우리가 이전까지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실재가 대상과 맺는 정서적 관계들을 모방함으로써 그와 비슷한 정서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서들의 모방은 정서들, 또는 정서적 연관망을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빼어내서, 이를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실재들과 맺는 관계와 관련시킨다.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메커니즘이 등장하면서, 이제 정서들의 일차적인 생산자는 우리가 대상과 맺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실재들과 맺는 간접적 관계, 모방적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정서들의 모방에서는 정서들이 진행되는 방향의 전환이 발생한다. 곧 이제 더 이상 정서들의 진행방향은 나에서 시작해서 다른 실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재에서 나에게로 진행한다. 이제 나는 정서들의 출발점, 정서들의 중심이 아니며, 따라서 정서들의 모방은 정서적 관계에서 (말하자면) 탈주체적, 탈자아적 효과를 산출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러한 모방이 의식적으로 실행되는 모방이 아니라는 점, 곧 정서들의 모방 메커니즘에서 내가 타자의 정서들을 모방하게 되는 것은 의식적인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의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정서들의 모방이 갖는 힘과 효력은 바로 이러한 비의식적이고 비의지적인 성격에 있기 때문이다11).

 

 

  이러한 정서들의 모방이 갖는 합치의 힘은 스피노자가 3부 정리 29 및 그 주석에서 ambitio라고 부르는 정서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암비치오는 현대어에서 쓰이는 “야망”이나 “야심”과는 좀 다른 의미를 갖는 단어다. 현대어에서 “야망”이 “무언가를 크게 이루어보려는 희망”을 의미하고, “야심”은 “이를 이루려는 마음”이나 좀더 부정적으로는 “이를 이루기 위해 남을 해치려는 마음” 곧 “음모”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데 비해, 스피노자가 말하는 암비치오는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곧 자신의 이익이나 기쁨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기쁨이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12) 

 


정리 29

우리는 또한 사람들이 기쁘게 간주할 만한 모든 것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반대로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것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주석

이처럼 단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을 피하려는 노력은 암비치오[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ambitio이라 불린다. 특히 우리가 어떤 것을 하거나 삼가는 일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우중vulgus을 기쁘게 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할 때 그렇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암비치오, 곧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추구하려는 노력과는 다른 것이다. 암비치오는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다른 사람들, 특히 대중에게 잘 보이고, 대중을 기쁘게 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사람들이 이처럼 암비치오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면, 곧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피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만을 하려고 한다면, 사람들 사이에 합치를 이루는 것, 더 나아가 조화를 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서들의 모방은 이와는 또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방향적인 관계만을 살펴봤는데, 사실 정서들의 모방은 A → B만이 아니라 B → A라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과정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정서적 관계는 정서들의 모방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정서들의 모방을 동반하지 않는, 곧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정서적 관계들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모든 측면을 모두 검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서들의 모방이 어떻게 해서 갈등을 산출할 수밖에 없는지는 좀더 분명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가 “마음의 동요fluctatio animi”라고 부르는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의 동요는 “두 가지 대립하는 정서에서 생기는 정신의 상태mentis constitutio quae scilicet ex duobus contrariis affectibus oritur”(E III P17s)를 가리키는 것으로, “만약 우리가 우리를 보통solet 슬픔의 정서로 변용시키는 실재가, 우리를 보통 같은 크기의 기쁨의 정서로 변용시키는 다른 실재와 어떤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이 실재에 대해 미움을 가지면서 동시에 사랑하게 될 것이다.”(E III P17) 따라서 마음의 동요, 또는 정신의 동요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동시에 상반된 정서들을 느낄 때 겪게 되는 혼란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동요가 정서들의 모방과 결부되면, 앞에서는 합치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던 암비치오가 이번에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정리 31은 이처럼 정서들의 모방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를 제시해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이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하는odio habere 것을 어떤 사람이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한다고 상상하면, 이로써 우리는 이것을 더욱 확고하게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그가 싫어하거나aversari 또는 그 역의 경우라고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의 동요를 겪게 될 것이다.”(E III P31) 이 정리에서 첫 번째 문장에서는 두 가지의 정서적 관계가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따라 생겨나는 정서적 관계(나-어떤 실재, 어떤 실재-타인)며, 다른 하나는 타인과 나 사이에서 성립하는 정서적 모방의 관계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 가지 정서적 관계는 같은 방향으로, 곧 내가 사랑하는 것을 그도 사랑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은 그도 미워하는 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이전보다 나의 정서적 강도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똑같이 두 개의 정서적 관계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는 첫 번째 경우와는 달리 대상과의 정서적 관계와 타인과의 정서적 모방의 관계가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마음의 동요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동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정서들의 모방이 결부될 경우 이러한 탈출의 노력은 예기치 않은 전환, 심지어 전도를 낳게 된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 31의 따름정리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로부터, 그리고 3부 정리 28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곧 각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게끔 노력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게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quantum potest 노력하게 된다. ... 자기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게 만들려는 이러한 노력은 사실은 암비치오/잘 보이려는 욕망이다(3부 정리 29의 주석을 보라).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 각자는 본성상 다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열망하며, 모든 사람이 똑같이pariter 이를 열망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 대해 똑같이 장애물이 되며,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거나 사랑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E III P31c)  

 


이를 전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이 이 경우에는 거꾸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는 욕망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첫 번째 암비치오의 경우 화합, 또는 적어도 일치의 동력으로 나타났던 정서들의 모방이 이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갈등과 증오의 동력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종류의 암비치오, 곧 “명예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E III app.41)으로서 암비치오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과 동일한 욕망을 갖도록 욕망하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증오와 갈등을 낳는다는 점에서 (마트롱이 말하듯이) 단순한 명예욕을 넘어서는 지배에 대한 욕망이라 할 만한 것이다.13)

 

 


  정서들의 모방 개념이 정치학의 문제에 대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기에 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1)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고전적인 사회계약론자들(특히 홉스)의 가정과 달리 인간들은 원초적인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인간의 동일성에 대해 외재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라는 점, 곧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관개체적(貫個體的)transindividual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14)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욕망을 갖게 만들려고 노력할까?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암비치오의 첫 번째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답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측면에 대해서는 전혀 답변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다. 정서들의 모방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명예나 이익이라는 목표와 무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로를 따라 이야기하자면15), 사람들이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욕망을 갖게 하려고 욕망하는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인간의 본성이 욕망인 한, 인간들은 욕망하지 않고서는, 정서적 활동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인간들이 항상 이미 정서들의 모방의 연관망 속에 들어 있는 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 정서들을 모방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들의 본질을 이루는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정서적 관계는 개인들의 동일성/정체성에 내재적이며, 바로 이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관개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우리가 앞 절에서 살펴본 『정치론』의 인간학적 특성, 곧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의 구체적 형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이처럼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정서적 관계, 특히 정서들의 모방 관계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정체와 자연권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적인 개인들의 우선성을 존재론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사회계약론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더 이상 이론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그 대신 스피노자 정치학은 새로운 대상, 새로운 문제는 갖게 된다.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대상은 바로 대중들multitudo16)이다.

 

 

  사실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 고유한 개념도, 스피노자가 가장 먼저 사용한 개념도 아니며, 이미 홉스의 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개념은 홉스의 정치학을 가능하게 한, 하지만 홉스의 정치학 체계 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바깥에 존재하는(또는 존재해야 하는) 개념,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홉스 정치학의 유령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이 홉스의 정치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우리가 1편에서도 인용했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중들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 왜냐하면 그들은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며, 이들 각자는 모든 문제에 관해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의 판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각각의 사람이 특수한 계약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권리소유를 갖게 되어, 어떤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도, 대중들 전체가 각각의 개인과 구분되는 하나의 의인(擬人, person)으로서, 이것은 다른 이의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행위로서 귀속되어야 할 어떤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DC 6장 1절, pp. 75-76―강조는 홉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홉스는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으로서 대중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뒤, 곧바로 대중들은 “단일한 실재singular entity”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중들을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한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하나의 의인, 곧 법적 인격체로서의 계약의 주체가 될 수 없고17), 따라서 소유도 권리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유효한 행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홉스의 정치학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그것은 이처럼 대중들을 다수의 사람들,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함으로써 대중들의 정치적 유효성을 박탈할 경우에만 (홉스의 의미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이 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또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과 귀족정에서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는 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왕은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가 왕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DC 12장 8절, p. 137)

 


홉스의 정치학에서는 계약의 주체로서 개인들 또는 의인들과, 계약의 결과로 성립한 권력의 주체로서의 주권자 이외의 다른 정치적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들만이 국가를 구성한다. 따라서 만약 대중들이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갖게 된다면 홉스의 정치학은 근저로부터 위협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홉스는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하기 위한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으로서 대중들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고, 대중들을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홉스가 이처럼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하기 위한 결정적인 첫 번째 질문으로 대중들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역으로 대중들이 그만큼 정치적으로 유효한 실재라는 것, 대중운동이 정치적 질서에 대해 그만큼 위협적이라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중들이라는 개념이 홉스 정치학의 유령이라는 말이 그리 부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스피노자는―다음 절에서 좀더 상세히 살펴 보겠지만―대중들을 원초적인 정치적 실재로서 긍정한다. 이는 정서들과 관념들의 연관망으로 이루어진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개인들에 선행하고 개인들의 정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더러, 이러한 관계가 국가, 따라서 정치의 기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중들은 개인들을 결합하고 대립시키는 이러한 정서들과 관념들의 연관망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3) 이처럼 대중들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새로운 대상으로 등장함에 따라, 스피노자 정치학의 과제 역시 『신학정치론』과 달라지게 된다. 『신학정치론』이 “따라서 국가의 목적은 실은 자유다Finis ergo reipublicae revera libertas est”(TTP 20장 6절, p.636)라고 선언했다면, 『정치론』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보존이라는 문제, 평화와 안전이라는 문제가 국가의 핵심 과제로 제시된다. “시민사회의 목적은 평화 및 안전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TP 5장 2절) 이렇게 평화와 안전이 국가의 핵심 과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갈등이 사회적 관계에 구성적이기 때문이다. 갈등이 사회적 관계에 구성적이며, 이에 따라 국가에 대한 주요 위험은 바로 내부의 시민들에 있다는 주장은 『신학정치론』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이러한 위험을 해소하는 길을 우중들을 규율하는 데서 찾고 있는 데 반해, 『정치론』에서는 더 이상 대중들 바깥에서, 곧 어떤 초월(론)적 준거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도 않다. 사실 대중들, 곧 정서들과 관념들의 복합적인 연관망이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면, 대중들 바깥에서 정치학의 기초를 찾는 것은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지거나(TP 1장 1-2절 참조) 참주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TTP 「서문」 외 여러 곳). 그런데 이처럼 우중 또는 대중들이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 설정되어 대중들이 더 이상 통치의 대상으로서만 간주될 수 없다면, 대중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이며, 이들에게 항상 수반되는 정서적 동요들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는 첫째,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질서의 존재론적 위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둘째,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며, 셋째, 『정치론』에 나타나는 민주주의 개념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문제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정치론』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의 의미


  『신학정치론』에 대해 『정치론』이 보여주고 있는 핵심적인 차이점 중 하나는 바로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의 등장이다. 이는 이 개념들이 정치체의 존재론적 기초에 관해 새로운 문제설정을 제기할 수 있게 해주고, 주권 개념의 의미와 기능을 다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선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서 볼 수 있는 용어법상의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저작의 용어법상의 차이점은 무엇보다도 대중을 가리키는 용어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곧 『신학정치론』에서는 우중vulgus, 평민plebs 같이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 용어들이 다수 사용되고 있는(불구스는 총 42번 사용되고 있고, 플레브스는 총 21번 사용되고 있다) 반면, 시민들의 집합으로 이해된 인민populus이라는 개념은 좀더 드물게 사용되고 있으며(총 13번), 대중들이라는 용어는 훨씬 더 드물게 사용되고 있다. 『신학정치론』에서 대중들이라는 단어는 단 세 차례(「서문」, 17장, 18장) 등장할 뿐이다.18)

 

 

 하지만 이와 달리 『정치론』의 경우에는 제일 경멸적인 함의를 지니는 불구스는 단 두 차례만 사용되고 있고(두번 모두 7장 27절에 나온다) 플레브스는 21번 사용되고 있는 반면19), 물티투도라는 단어는 총 69번 등장하고, 대중들의 역량, 곧 포텐샤 물티투디니스potentia multitudinis라는 개념은 총 4번, 2장 17절에서 한 차례, 그리고 3장 2절, 7절, 9절에서 세 차례 사용되고 있다.20) 따라서 용어법에서 볼 때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두 저작의 실질적인 내용상의 차이점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연구21) 이후 많은 연구자들(특히 유럽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22),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신학정치론』에서는 빈도가 적을 뿐 아니라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주변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처럼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이 개념을 중심적인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은 『신학정치론』에서 『정치론』으로 나아가면서 스피노자 정치학이 발전 또는 “진화”하고 있다는 것(예컨대 Matheron 1990을 보라), 또는 적어도 모종의 이론적 단절이 발생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신학정치론』에는 사회계약론이 현존하는 반면 『정치론』에는 부재한다는 사실과, 그 대신 『정치론』에는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중심 개념으로 부각된다는 사실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론』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네그리가 말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며, 『신학정치론』에서 우중이나 평민 개념의 용법과 유사하게 부정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과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지적ㆍ정치적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 만약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욕망하도록 인간 본성이 이루어져 있다면, 화합과 신의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기술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성향들은 전혀 다르다는 게 확실하기 때문에, 국가는 통치자들만이 아니라 피통치자들도 포함되는 모든 사람이―내키든 내키지 않든 간에―공공의 복리를 위해 중요한 것을 할 수 있도록 규제되어야 한다. 곧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든 아니면 힘이나 강요에 의해서든 간에, 이성의 계율에 따라 살아가게 만들어야 한다(TP 6장 3절).


따라서 전체 대중들multitudo integra이 자기자신과 화합할 수 있다면, 대규모 회의에서 늘 일어나는 논쟁들이 소요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대중들은 결코 자신의 권리를 소수의 사람들이나 한 사람에게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 (TP 7장 5절)

 


또한 다음과 같은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본성상 적대적이며, 그들을 통합하고 연결시키는 법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본성을 보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민주주의 국가들은 귀족정으로 변화하고 다시 이는 군주정으로 변화한다고 믿는다. 사실 나는 귀족제 국가들 중 다수는 민주제 국가로 출발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믿는다(TP 8장 12절).

 


  이 구절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대중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화합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데, 이러한 능력의 결여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근본적인 인간학적 원리, 곧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서들에 예속되며, 또한 각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기질에 따라, 곧 자신의 인정하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고 자신이 거부하는 것은 그들도 거부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하려고 욕망한다”(TP 1장 5절)는 원리에서 유래한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 정서들에 따라 규정되는 한에서 인간들은 안정적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룩할 수 없으며, 모종의 강제나 규제가 없이는 사회적 관계가 제대로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론』에서도 여전히 스피노자는 대중들이 보여주는 정서적 동요들과 비합리성 및 이것이 불러올 수 있는 국가의 혼란에 대해 심각한 두려움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23)

 

 

  발리바르는 대중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두려움과 근심을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개념을 통해 훌륭하게 규정한 바 있다. 스피노자 자신이 이 개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인용하고 있는, 그리고 발리바르가 자신의 논문의 제사(題詞)로 사용하고 있는 타키투스의 『사기(史記)Annales』 1권 27장의 한 구절은 이를 매우 명료하게 보여준다. “[대중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24)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관념에서 핵심적인 것은 소유격의 이중적 용법이다. 곧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대중들이 통치자들에 대해 느끼는 공포만이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공포, 곧 대중들이 통치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라는 원리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인간들의 삶(개인적인 삶과 정치적인 삶)에서 정서들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 삶을 합리적(또는 능동적)으로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드러내준다. 

 

 

  하지만 우리가 위에서 인용한 『정치론』의 구절들은 『신학정치론』 및 『윤리학』과 관련하여 얼마간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위의 구절들에서는 더 이상 정서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중이나 평민으로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람”(6장 3절)이나 “사람들”(8장 12절)과 같이 훨씬 일반적인 명사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는 더 이상 우중과 지식인들이라는 엘리트주의적인 인간학적 분할에 의거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곧 우중이나 지식인, 통치자나 피통치자 모두는 사람들인 한에서 똑같이 정서들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지, 정서적 영향력이 반드시 우중에만 한정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7장 5절과 같이 자기자신과 화합하지 못하는 존재를 “대중들”로 한정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통치자들보다는 피통치자들로서의 대중들이 좀더 정서적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25)

 

 

  또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는 달리 더 이상 우중 또는 대중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규율과 복종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우선 2장 17절의 규정이 잘 보여주듯이 『정치론』에서 대중들(의 역량)은 국가의 기초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주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TP 2장 17절)” 그리고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는 달리 대중들을 정념에 예속되어 갈등과 분열에 시달리는 존재로만 규정하지 않고, 적어도 몇 군데에서는 “자유로운 대중들libera multitudo”로 규정하고 있다(5장 6절 둘째줄과 넷째줄, 5장 7절, 7장 26절).  

 

 

  그리고 『신학정치론』에서도 엿보이는 관념, 곧 “민주주의 국가에서 부조리한 일이 발생할 우려는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전체의 다수 성원―이 전체가 상당히 큰 규모라면―이 어떤 부조리한 일에 일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TTP 16장 9절; 모로판, 516)라는 관념은 『정치론』에서도 지속될 뿐만 아니라 좀더 정확한 이론적 토대를 얻게 된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나의 전체―만약 이 전체가 충분한 크기를 갖고 있다면―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 다수가 어떤 부조리한 일에 동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TP 6장 1절)


인간 본성은 개인 각자가 항상 매우 열렬히 자기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추구하고 [...] 자신의 처지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다른 이의 대의를 옹호하도록 이루어져 있다. [...] 그리고 비록 매우 많은 수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이 회의기구는 필연적으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을 포함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 이 회의기구의 다수는 결코 전쟁을 벌이려는 욕망을 갖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평화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고 이를 항상 선호할 것이다. [...](TP 7장 4절))

 


따라서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치론』에서 대중들은 국가의 기초, 토대라는 위상을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신학정치론』이 다수의 합리성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낙관적 태도가 경험적 교훈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에 반해, 『정치론』에서 제시되는 거의 동일한 견해에 대해 좀더 일관된 이론적 논거를 제공해준다. 곧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충분한 숫자의 다수가 보여주는 합리성에 대해 신뢰를 보내고 있다면, 이는 그가 『정치론』에서 개인적 합리성과 제도적 합리성을 『신학정치론』보다 좀더 정확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구분은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통해 정서 개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정서들이 더 이상 이성과 대립하지 않고 역량의 관점에서 합리성을 실현하기 위한 자연적 조건으로 인식된다면, 그리고 정서들의 상호개인적 성격이 분명히 인식된다면, 합리성은 더 이상 정서들과 외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게 되며, 따라서 인간들 또는 대중들이 정서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이 집합적ㆍ제도적 합리성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그런데 네그리 같은 사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론』에서 처음으로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개념이 단지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윤리학』을 포함하는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 전체를 재정초하는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곧 네그리에 따르면 대중들의 역량 개념은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절대적인 국가imperium omnino absolutum”라고 부른 이유를 해명해줄 뿐만 아니라, 『윤리학』 1, 2부에서 볼 수 있는 사변적인 존재론을 넘어서 스피노자 철학이 실천적인 구성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주춧돌을 마련해 준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네그리는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스피노자 철학의 혁신적인 의의(스피노자 철학의 “야생의 이례성” 또는 “야생의 별종”으로서의 스피노자)를 집약하고 있고,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을 측정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라는 개념에 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에 대한 평가에서도 네그리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운데, 이는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대중들의 역량 개념이 『정치론』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개념은 『정치론』에서 총 4차례 사용되고 있는데, 우선 국가의 권리 또는 통치권에 대한 정의에서 등장하고 있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주권imperium26)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TP 2장 17절)

 


그 다음 3장 2절에서는 대중들의 역량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처럼 인도되는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TP 3장 2절).

 


이 두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통치권 또는 주권을 정의하는 매우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신학정치론』의 경우 주권을 주권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정치론』의 이 두 구절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 구절들은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통치권의 기초로 명시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전개한 “역량의 존재론”과 좀더 부합하는 정치학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 실제로 『정치론』 2장 3-4절의 논의는 두 저작 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자연 실재들이 실존하고 활동하는 역량은 충만하게 현존하는 신의 역량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권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신이 모든 실재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고, 신의 권리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된 신의 역량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자연적 실재는 실존하고 활동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만큼의 권리를 자연적으로 지닌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실존하고 활동하는 역량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신의 역량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연권을 자연의 법칙들 자체로, 또는 모든 실재가 생산되는 규칙들, 곧 자연의 역량 자체로 이해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자연 전체의 자연권 및 따라서 각 개체의 자연권은 그것의 역량이 미치는 곳까지 연장된다atque adeo totius naturae, et consequenter uniuscujusque individui naturale Jus eo usque se extendit, quo ejus potentia. 결과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자연]의 법칙들에 따라 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최고의[주권적] 권리에 따라 하는 것이며, 그는 자연에 대해 자신의 역량만큼의 권리를 갖는다.(TP 2장 3-4절)

 


이 구절의 핵심 논점은 신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자연권의 존재론적 기초로 제시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1편에서 살펴봤듯이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주권자의 권리가 주권자의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고 말함으로써, 홉스 주권 개념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하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역량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과 자연권에 대한 규정 사이의 체계적 연관성이 분명히 해명되지 않고 있는 데 반해, 위의 구절에서는 이를 연역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자연 전체의 역량이 신의 역량과 다르지 않고 인간을 포함하는 각각의 자연적 권리가 그가 보유하고 있는 자연적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면, 대중들이 한 사회, 한 국가의 통치의 권리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더 나아가 2장 17절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인민의 역량”으로 이해하게 하고, 따라서 대중들의 역량을 민주주의 자체와 동일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부정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인민의 역량, 인민 자신의 통치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 또는 적어도 그 기초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스피노자는 위의 구절에서 분명히 통치권의 기초로서 대중들의 역량과 이러한 통치권을 실행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역량 자체가 아니라, 통치권이 실행되는 세 가지 형태 중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곧 통치권이 한 사람의 군주에 의해 행사되면 군주정이고, 법적으로 명문화된 규정이 아니라 주권의회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특정한 사람들(반드시 소수일 필요는 없다)에 의해 행사되면 귀족정27)이며, 반대로 법적 규정들에 따라 선출된 사람들이 통치권을 행사한다면 이는 민주정이다. 역으로 대중들의 역량은 민주정 국가만이 아니라 귀족정 국가 및 군주정 국가의 통치권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대중들의 역량 자체는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이러한 분류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형식적, 법적 규정에 불과할 뿐이며, 따라서 이런 근거 위에서 대중들의 역량과 민주정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은 일리가 있는데, 이는 특히 8장 3절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고려해볼 때 그렇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앞에서 우리가 말한 것과는 달리 대중들의 역량을 민주주의의 직접 연결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귀족정이 의지해야 하는 기초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으려면 먼저, 단 한 사람에게 양도된 통치권imperium과 충분히 큰 규모의 회의체로 양도된 통치권 사이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실로 상당히 큰 차이점이다. 첫째, (우리가 6장 5절에서 보여준 것처럼) 단 한 사람의 역량으로 통치의 부담을 전부 감당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충분히 큰 규모의 회의체concilio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회의체가 충분히 큰 규모다라고 긍정하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통치의 부담을 감당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에게는 자문관들consiliariis이 필요하지만 회의체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둘째, 왕들은 유한하고 회의체들은 영속적이다aeterna. 따라서 일단 회의체로 양도된 주권은 결코 대중들로 복귀하지 않는다atque adeo imperii potentia, quae semel in concilium satis magnum translata est, numquam ad multitudinem redit. 우리가 7장 25절에서 보여준 것처럼 군주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셋째, 왕의 통치는 왕의 연소(年少)함이나 질병, 연로함이나 다른 원인들 때문에 종종 취약한 경우가 있는 반면, 이런 종류의 회의체의 역량은 항상 하나로 동일하게 유지된다. ...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진 회의체에 부여된 통치권은 절대적이라고, 또는 이러한 조건에 아주 근접한다고 결론내리게 된다. 만약 절대적인 통치권imperium absolutum이 실존한다면, 이는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quod integra multitudo tenet일 수밖에 없다.(TP 8장 3절)

 


이 구절에서 스피노자는 집약적으로 군주정과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의 경우를 비교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볼 때 군주정의 취약점은 왕들의 유한성에 있는데 비해, 귀족정의 강점은 회의체들을 통해 영속적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지는 한에서 절대적 통치권에 근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처럼 충분한 다수가 절대적 통치권에 접근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면,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은 당연히 절대적 통치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은 민주정과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면, 민주정은 곧 절대적인 통치권, 절대적인 정체의 실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사회계약론을 사용하지 않은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제시될 수 있는 듯하다. 곧 사회계약은 어떤 식으로 제시되든 간에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권의 양도, 곧 자신의 역량으로부터의 소외와, 법적으로 형성된 초월적 권력인 주권자에 대한 예속―노예와, 신민 또는 시민 사이의 차이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을 함축하고 있는 데 반해, 방금 제시된 구절들의 논의에 따르면 『정치론』은 적어도 경향적으로나마 초월적인 주권적 권력에 대한 개인들의 예속을 전제하지 않는 정체, 곧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권력”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으며, 이를 “완전하게 절대적인 국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소 성급한 결론인데, 대중들의 역량 개념의 나머지 두 가지 용법들을 검토해보면 그 이유를 좀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가장 강력하고 자신의 권리를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국가는 이성의 기초 위에서 설립되고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국가다. 왜냐하면 국가의 권리는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처럼 인도되는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들의 연합은, 만약 국가가 건전한 이성이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바에 따라 최대한 운영되지 않는다면 결코 인식될 수 없다(TP 3장 7절).


국가의 권리가 대중들의 공통적인 역량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국가의 역량 또는 권리는 시민들 대부분이 국가에 맞서 결탁할 만한 이유들을 제공하는 한에서 감소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TP 3장 9절).

 


대중들의 역량을 직접 민주정과 일치시키고, 이로써 대중들의 역량을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과 동일시하는 관점은 스피노자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항상 유지하고 있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자(주권자는 꼭 인간 개인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차이를 대립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및 인간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정확히 해명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일차적인 문제는 존재론에서부터 인간학,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 철학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하지만 결코 각각의 영역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포텐샤potentia와 포테스타스potestas 개념28)의 구분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제한된 지면 안에서 이 두 가지 개념이 지니는 모든 차이점을 다 해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들은 지적되어야 할 듯하다. 우선 존재론적으로 볼 때 포텐샤/역량은 어떤 것을 생산하는 현행적이고 실제적인 힘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 이 힘의 실행의 필연성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권능은 초월자(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 한다)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곧 존재론의 영역에서 두 개념의 핵심적인 차이는 역량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29), 권능 개념은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주체의 의지의 무한성을 함축한다는 점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당대의 신학 및 존재론(특히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제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 17의 주석이나 1부 정리 33의 따름정리 2 같은 곳에서 역량의 관점에서 권능의 신학ㆍ 존재론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초월적 권능을 중심으로 자연 또는 실재를 설명하게 되면, 자연을 구성하는 실제적인 인과관계 및 그 일부로서 인간 자신의 본성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움직이는 초월적 신이나 주권자에 대한 맹목적인 예속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이는 특히 『윤리학』 1부 「부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학의 영역(또는 독특한 실재들로서의 “유한 양태들”의 영역)에서 역량은 코나투스 개념으로 표현된다.30) 이처럼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의 차원에서 유한 양태들의 차원으로 옮겨올 경우 역량은 현행성actuality과 잠재성virtuality(또는 “영원성”)으로 분화되며, 능동과 수동의 갈등적인 경향 속에 기입된다. 현행성과 잠재성의 차이 또는 잠재성으로부터 현행성의 분화, 독립은 개체들의 개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량의 형상적 한계를 수반하며, 이러한 한계 내에서 역량의 양적 차이, 강도의 변이가 전개된다. 따라서 능동과 수동의 경향적인 분화는 현행성과 잠재성의 분리가 산출한 강도적 차이의 공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능동과 수동의 구분은 또한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윤리학』 3부 정의 2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곧 (앞의 정의 1에 따라)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어떤 것이 따라나올 때, 나는 우리가 활동한다[능동적이다]nos tum agere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생겨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나올 때, 나는 우리가 활동을 겪는다[수동적이다]nos pati라고 말한다.”(E III D2)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볼 때 이 정의의 요점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1부의 마지막 정리 36이 말하듯이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실재는 그것이 실존하는 한 항상 원인으로서 어떤 결과들을 생산하며, 이것이 그의 역량을 구성한다. 따라서 모든 실재는 최소의 능동성을 함축하고 있다. 둘째, 하지만 이러한 역량의 실현은 적합하거나 부적합하게, 곧 “우리의 본성만으로” 이루어지거나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방식으로(또는 “완결적”이거나 “단편적이고 혼합적[곧 부분적]으로mutilus & confusus”) 이루어진다. 따라서 능동과 수동의 차이는 원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이 우리를 통해 산출된 결과들과 맺는 관계들의 차이를 가리킨다. 우리가 이 결과들을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전유(專有)할 때 우리는 수동적이며31), 우리가 완결되게 전유할 때(“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능동적이다. 따라서 수동에서 능동으로, 또는 그 이전에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운동은 해방의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존재론적ㆍ인간학적인 영역에서 사용되는 역량 개념을 (네그리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학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할 때 발생한다. 이 경우 『정치론』에 나타나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자의 권력 사이의 차이는 역량과 권능 사이의 차이로 이해되어, 역량은 긍정적이고 해방적인 힘으로 나타나며 주권자의 권력은 부정적이고 기생적인 지배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문제가 있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존재론이나 인간학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역량 개념을 부지불식간에 “주체/기체(基體)subjectum” 또는 개체의 모델에 따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 관점은 “신의 역량”이나 독특한 실재/인간의 역량에 대해 사고할 때 (자생적으로) 개체를 모델로 삼는 경향이 있으며, 이에 따라 신이나 독특한 실재들을 고립된 개체들로서, 그리고 신의 역량이나 실재들의 역량은 개체 또는 주체의 능력(주체의 의지에 따라 실행하거나 실행하지 않을 수 있는)으로 사고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에 고유한 관계의 존재론(또는 오히려 비(非)존재론meontology32))과 어긋나는 관점인데, 이러한 개체론적 관점은 처음부터, 개체에 구성적인, 그리고 개체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들로부터 개체를 분리시켜 사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령 네그리 같은 사람들이 “다중”을 구성의 “주체”로 설정할 때 문제가 되는 것33)은 단지 이러저러한 문헌학적 문제점들이나 네그리의 관점이 함축하는 막연한 낙관적 전망만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관점이 자칫 주체의 목적론에 빠져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학이 함축하는 진정으로 혁신적인 의의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34)

 

 

  따라서 이러한 주체의 목적론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체나 주체의 모델에 따라 파악된 역량론을 정치의 영역에 적용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관계론의 관점에서 역량 개념을 다시 사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정치의 영역은 역량 개념을 관계론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한 특권적인 장소가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스피노자는『정치론』에서 국가의 기초를 더 이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의 기초 위에서 사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신학정치론』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정치론』 2장에서 좀더 체계적으로 전개된 전자의 관점은 법적 형식주의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규정하지 않고 역량의 관점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와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초월(론)적 정치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35) 하지만 이 관점은 역량의 문제를 여전히 개체론의 틀에 따라 사고한다는(또는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아직 일관된 관계론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여러번에 걸쳐 “주권자의 권리는 주권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학정치론』은 주권의 문제를 주권자 개인(또는 집합적 개체)의 역량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는 반면, 『정치론』에서는 주권자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에 따라 주권의 문제를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나오게 된다.36) 이런 의미에서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가 근대 자연권 이론과 단절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표일 뿐만 아니라 관계론적 관점에서 역량의 문제,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려는 스피노자의 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역량 또는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는 지배권력에 맞선 인민대중의 비판적인 힘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라는 좀더 근원적인, 그리고 좀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이 개념은 그 자체로 능동적인 것도 실정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하이데거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현사실적인faktisch”, 곧 어떤 원인도 목적도 없이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실존적(이 경우에는 사회의 실존이겠지만) 사태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대중들(의 운동)이란 정서적ㆍ관념적 연관망들의 집합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중들의 역량은 항상 능동성과 수동성의 갈등적인 경향 속에 들어 있으며, 항상 희망과 공포의 정서적 동요를 보여준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정치적인 의미의 역량, 곧 어떤 국가의 제도적 틀 안에서 존재하고 행사될 수 있는 역량이 아니라 법적ㆍ정치적 제도 바깥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힘(또는 폭력)이며, 이러한 힘은 항상 제도를 동요시키거나 전복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역량은 결코 안정된 지속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의 유지와 보존을 위한 기초로 사용될 수도 없다.37)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자연적 역량이 실효성 있는 정치적 역량으로 표현되려면 항상 제도적 매개가 필요하다.38) 

 

 

  그러므로 이러한 법적ㆍ제도적 매개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이고 필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법적ㆍ제도적인 매개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자생적으로는 정념적이고 갈등적인 존재들로 남아 있는 개인들 및 대중들이 마치 이성적인 존재자들이 행위하듯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행위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으며, 스피노자는 이를 “마치 ~처럼veluti”이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대중들은 본성적으로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정신에 의해 실제로 인도되지는 않지만, 대중들의 역량이 국가의 보존과 안전을 위해 적절하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대중들은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것처럼, 법적ㆍ제도적 매개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국가의 근본 과제를 “국가의 평화와 안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국가의 평화와 안전은 “국가 형태의 보존imperii formam conservandam”(TP 6장 2절)에 달려 있으며, 국가 형태의 보존을 위해서는 대중들의 (정념적) 동요가 낳는 불안정성을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이라는 개념들은 상호 대립하는 개념들이 아니며, 주권은 초월적이고 기생적인 지배권력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처럼 두 개념을 상호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홉스가 설정한 구도의 (거울반영적인) 전도에 그칠 우려가 있다. 곧 홉스가 정치 권력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이를 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대중들을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하여 정치의 영역 바깥으로 몰아내야 했다면, 반대로 이와 같은 관점은 대중들 자체를 해방적인 주체, 또는 진정한 정치의 주체로 만듦으로써, 제도적인 정치의 공간 자체를 해체하고 말소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결코 주권이라는 개념을 부정적으로 폄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권의 절대성”이라는 홉스 정치학의 핵심 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개조하려고 노력했다.39)

 

 

  이러한 노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치론』에서 집요하게 나타나는 (數)의 논리, 또는 대중들이라는 개념의 통계학적/국상학적(國狀學的)statistical 활용이다(이에 관해서는 특히 Balibar 1997b 참조). 통계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대중들은 다수, 더욱이 하나의 통일된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수의 독특한 실재들, 개인들을 의미하며, 한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 이러한 다수는 국가의 생존을 뒷받침하는 물리적 기초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통치권 내지는 주권의 정치적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곧 이러저러한 주권자(그리고 이 주권자가 구현하고 있는 각각의 정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대중들 중 가장 큰 부분maximae partis multitudinis의 분노”를 자극해서는 안되며(TP 3장 9절, 7장 2절, 10장 8절 참조), 주권이 대중들의 손에 넘어가도록(“대중들로의 복귀”) 해서도 안된다(이에 관해서는 7장 25절 참조). 이는 사회적 관계, 국가 형태의 해체로 귀결되거나, 또는 적어도 국가 형태의 안정과 역량의 강화가 아니라 동요와 역량의 감소를 낳을 뿐인, 한 국가형태(또는 정체)에서 다른 국가형태로의 교체로 귀결될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통계학적/국상학적 관점에서 파악될 때 민주주의란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정체(政體)regime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으로 나아가려는 운동, 곧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람들을 통치 영역 안에, 회의체 안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는 예컨대 군주정에서는 군주 개인(또는 실질적으로 그를 조종하는 조신(朝臣)들과 권력가들)의 독단과 무능력에 따라 통치가 좌우되는 것을 막고, 민회에 심의권을 부여해서 가능한 한 다양한 의견들을 수합하고 왕은 결정권을 보유함으로써 주권의 통일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표현된다(이에 관해서는 특히 TP 6장 18-19절 참조. 그리고 7장 1절에 나오는 사이렌의 유혹에 맞서 자신의 몸을 묶은 율리시즈의 사례에 관한 스피노자의 논평 참조). 그리고 귀족정의 경우에는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진 회의체”를 구성해야 하며, 심지어 “대중들 전체integra multitudo가 귀족의 지위에 오를 수도 있다”(TP 8장 1절)는 거의 모순적인 주장에서 이런 사고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주권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존재론적 기초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대중들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확대할(또는 절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지만, 대중들의 역량을 합리화하고 그것에 결여된 유사-통일성(“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한 것처럼”)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정치, 곧 국가 형태의 보존의 기술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 정치학의 강점 중 하나는 이러한 대중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가 모든 국가의 근저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쉽게 보수주의적인(또는 엘리트주의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거나 홉스식의 인공주의적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또 더 나아가 그 이후의 혁명주의적인 전통과 달리 대중들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맹목적인 낙관으로 지성의 비관을 보충하려고 하지도 않고서도,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의 변증법을 통해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또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장치의 변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사고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11장1절)로서의 민주주의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결론: 사회계약론의 해체와 정치학의 새로운 과제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의 모호성을 정정하면서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전제들과 양립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 원리, 곧 인간의 본성적 사회성이라는 테제를 제시하고 있다. 2) 이런 측면에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제시한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윤리학』 3부 정리 27 이하에서 등장하는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정서적 관계망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들의 사회화 경향은 항상 이미 반사회화 경향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우리는 스피노자의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원초적 계약이라는 관념은 처음부터 성립 불가능하며,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중요한 문제는 사회계약론과는 달리 사회의 원초적 구성이나 법적 정당화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기초지음과 동시에 위협하는 정서적 관계, 곧 대중들의 운동을 조절하는 문제임을 알 수 있게 된다. 3)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치론』에서는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중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을 수용하는 주요한 이론적 동기는 우중의 이성적ㆍ정치적 무능력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정치론』에 등장하는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그가 계약론의 문제설정을 완전히 포기하고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이론적 기초 위에서 사고하려고 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이론적 노력의 핵심은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의 변증법을 통해 민주주의를 국가장치 변혁의 과정으로서 파악하려고 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정치론』에 이르러 『신학정치론』에 남아 있던 당대의 자연권 이론의 요소들을 해체하고 관계론적 관점에서 정치학의 과제를 재정립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원초적인 개인 대 국가라는 추상적인 이원적 관계로 설정된 고전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구도는 해체되며, 이러한 정치철학의 핵심 요소로서 부르주아 법이데올로기가 은폐하는 자유주의 정치의 근본 과제, 곧 개인(주체)들의 생산과 재생산15)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스피노자 정치학은 아직 또다른 대결을 남겨 두고 있는 셈이며, 아마도 이러한 대결 이후에야 우리는 대중들의/대중들의 공포의 아포리아를 넘어선 스피노자 철학의 좀더 근본적인 이론적 기여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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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1998). On the Citizen, ed. & trans., Richard Tuck,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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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noza, Benedictus de(1925). Spinoza opera, vol. 1-4, ed., Carl Gebhardt, Carl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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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1999a). Tractatus-Theologico-Politicus/Traité théologique-politique, ed., Fokke Akkerman ed., trans., P.-F. Moreau & Jacqueline Lagrée, P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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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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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스피노자 철학의 어휘들의 빈도와 용법에 관한 표준적인 참고문헌으로는 Giancotti 1970을 참조하고, 특히 사회계약론의 문제와 관련하여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어법상의 차이에 관해서는 Matheron 1990을 참조.

 

2)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 나타난 네덜란드 연합주, 특히 홀란드에 관한 스피노자의 평가는 『신학정치론』 19-20장과 『정치론』 9장 14절을 참조하라. 네덜란드 당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정세에 관한 고찰로는 Balibar 1997a 1장 및 Prokhovnik 2004를 각각 참조.

 

3)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20장에서 한편으로 사고와 판단, 다른 한편으로는 발언과 소통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있다. 곧 사고와 판단의 자유는 조건 없이 허용되어야 하는 반면, 발언과 소통의 자유의 경우에는 “단순히 말하거나 가르치는[또는 정보를 전달하는]doceat 데 국한하고, 간계와 분노, 증오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리고 자기 결정의 권위에 따라ex authoritate sui decreti 국가 안에 어떤 것을 도입하려는 의도를 품지도 않고, 오직 이성에 따라 자신을 변호한다”(TTP, 638)는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이는 발언과 소통만이 아니라 사고 역시 고립된 개인에 의해 단독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간주하는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인간학적 원리(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ego cogito”와 대비되는 “인간은 생각한다homo cogitat”(E II A7)는 『윤리학』의 공리다)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신학정치론』의 이론적 난점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다. 이에 관한 좋은 평주로는 Balibar 1997a 2장 참조.

 

4) 『윤리학』 4부 공리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자연 안에는 더 힘있고 강한 어떤 것에 의해 제압되지 않는 어떠한 독특한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실재가 주어져 있을 때에는 이 실재가 그것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더 강한 다른 실재가 존재한다.”

 

5) 반대로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면서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우연”일 뿐, 자연적 필연성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서로의 동료가 되려고 하고 서로 연합하는 것을 기뻐하는지에 관한 원인들을 좀더 상세히 고찰해본다면, 이런 일은 본성에 의해by nature, 달리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연에 의해by chance 일어난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DC 1장 2절)


6) Macherey 2004, 100쪽 참조.

 

7) 이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필자의 학위논문, [스피노자에서 관계의 문제] 6장을 참조하라.

 

8) 정서들의 모방 개념이 ????윤리학???? 3부의 논증 과정에서 이룩하고 있는 단절의 의미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Matheron 1969, pp. 151 이하 및 Macherey 1995, pp. 214-226을 각각 참조하고, 홉스의 인간학과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Lazzeri 1998, pp. 77 이하 참조. 단 마슈레의 경우는 정리 27보다는 정리 21 이하의 단절을 더 중시하는데, 이는 정리 21 이전까지는 대상, 실재와의 관계만이 문제가 되었다면, 정리 21부터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9) “Ex eo, quod rem nobis similem, & quam nullo affectu prosecuti sumus, aliquo affectu affici imaginamur, eo ipso simili affectu afficimur.”

 

10) 여기에서 “res”란, 현대어로는 대개 “thing”이나 “Ding”, “chose”로 번역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현대의 용법과는 달리 인간 또는 생명체와 대립하는 의미의 무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 일반을 가리킨다. 그리고 정리 27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우리와 비슷한 실재rem nobis similem”는 다른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res”를 “사물”이라고 번역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 막연하다. 그런데 “res”에서 파생한 “realitas”라는 단어는 현대어로는 “reality”나 “Realität”(또는 “Wirklichkeit”), “réalité”로 번역되고, 우리말로는 “실재성”이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이 단어 및 이와 관련된 단어들(“real”, “realism” 등)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이 글에서 “res”는 “실재”라는 말로 번역해서 사용하겠다.

 

11) 이는 (초기) 마트롱이나 네그리에서 나타나는 목적론적 경향과 비교를 위해 강조해둘 필요가 있는 논점이다.


12) 대개의 『윤리학』 불역본이나 영역본에서는 이를 어원에 따라 “ambition”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바르투샤트Bartuschat의 최신 독역본(Spinoza 1999c)에서는 이를 “공명심”이나 “명예심”이라는 뜻을 지닌 “Ehrgeiz”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고 강영계의 국역본에서는 “명예욕”(158쪽)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독역본이나 국역본의 번역은 고전 라틴어의 ambitio가 지니는 의미를 비교적 잘 살려주고 있으나, 이런 점에서 본다면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의미를 표현해주기에는 좀 미흡하다. 왜냐하면 명예욕이라는 것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제안하는 “잘 보이려는 욕망désir d'être bien vu”라는 역어(Macherey 1995, p. 235)가 스피노자의 ambitio가 지닌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ambitio를 이렇게만 번역하기에는 좀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ambitio라는 개념의 핵심적 중요성은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따르도록 하는 욕망으로 전도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경우 ambitio는 “잘 보이려는 욕망”은 물론이거니와 “명예욕”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ambitio가 지니고 있는 이 이중적 의미, 전자의 의미에서 후자의 의미로 전환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정서들의 모방의 이해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마트롱이 ambitio를 “ambition de gloire”와 “ambition de domination”으로, 곧 “명예욕”과 “지배욕”으로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구분은 두 가지 경향이 서로 상이한 유래를 갖는 것이 아니라, ambitio라는 동일한 하나의 원천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첫 번째 ambitio를 “명예”와 관련짓고 두 번째 ambitio는 “지배”와 관련짓는 것은 얼마간 주체중심적인 관점인데, 왜냐하면 ambitio의 근본적인 함의는 주체의 지향적 구조를 해체한다는 데 있지만, 이 두 가지 번역은 이러한 지향적 구조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ambitio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첫 번째 ambitio는 “잘 보이려는 욕망”으로 번역하겠지만, 두 번째의 경우는 “지배욕”으로 번역할 것이다.

 

13) 하지만 이러한 지배의 욕망이 실현될 수 있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욕망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내가 타인들을 나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하는 그만큼, 타인들 역시 나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경우 타인들을 나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는 나의 노력은 타인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그 중 한 가지 경우로 나는 좌절하게 된다. 이 때 나는 타인들의 기질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째, 내가 타인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그들을 나의 욕망, 나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와 같은 기질, 같은 욕망을 가질 경우 그들은 나와 동일한 것을 욕망하게 되는데,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 대개 공유 불가능한 것(돈, 명예, 성적 대상 등)이라는 점을 감안할 경우(특히 우리가 이성적 능력이 결여된 정서적인 삶을 살아갈 경우에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이는 모든 사람을 나의 경쟁자로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욕망을 따라 욕망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이 진짜로 나의 욕망을 따를까 봐 두려워하게 되며, 이렇게 해서 다시 또 마음의 동요에 빠지게 된다. 결국 마음의 동요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발했지만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셈이다.

 

14) 관개체성 개념에 기초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해석으로는 특히 Balibar 1993; 1996을 참조.

 

15) 특히 Moreau 2003 pp. 133 이하 참조.

 

16) 용어 번역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인다면, 우리는 이 글(및 제 1부)에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multitudo”라는 용어를 줄곧 “대중들”이라고 번역했다. 네그리 연구자들은 이 개념을 주로 “대중들”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물티투도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 네그리의 관점이 많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뒤에서 좀더 상세히 논의하겠지만, 적어도 스피노자 자신의 용법을 고려할 때 물티투도는 집합적인 명칭이기는 하지만 통일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든 (정치적)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제안하듯이 물티투도 개념은,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수성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masses”, 우리말로는 “대중들”로 번역하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17) 홉스의 “의인” 개념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4, 140-141쪽 참조.

 

18) 『신학정치론』 및 『정치론』에서 대중들, 우중, 평민 개념의 용법 및 의미에 관해서는 Balibar 1997b와 Chaui 1998을 각각 참조.

 

19) 하지만 이 때 플레브스는 『신학정치론』과 같은 부정적인 함의로 사용되고 있다기보다는 귀족과 대비되는, 고유한 의미의 평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빈도의 차이만으로는 중요성과 의미의 차이를 평가하기 어렵다.

 

20) 이에 관해서는 『정치론』의 용어들의 빈도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은 Spinoza 1978의 「부록」을 참조하라.

 

21) Negri 1990; 1994; Balibar 1997a; Balibar 2004 참조. 그 외에 대중들 개념을 스피노자 정치철학 해석을 위한 근간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저작으로는 특히 Bové 1996을 들 수 있다.

 

22) 반면 영미권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정치철학에 대한 연구에서 대중들이나 대중들의 역량 개념이 지니는 중요성을 다소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영미권 연구자들이 그로티우스와 홉스에서 시작되는 자연권 사상의 흐름 속에서 스피노자 정치철학을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고(이 경우 스피노자 정치철학에서 사용되는 법적 개념들, 곧 권리와 법, 자유, 정체 같은 개념들이 주요한 검토 대상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영향에 따라 ????신학정치론????이 좀더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미권의 연구자들 중 전자의 경향을 보이는 연구로는 Curley 1991, 1995; Den Uyl 1984, 1987를 꼽을 수 있고, Bagley 1999; Smith 1994, 1997은 후자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구이다. 반면 Montag 1998은 유럽의 연구 경향과 매우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영미권 연구자들 중 일부는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사이의 이론적 차이점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특히 리 라이스와 스티븐 바본의 개별 연구 및 공동 연구에서 잘 나타난다(Rice 1990; Rice & Barbone 2000).  이들의 논의에 대한 좀더 상세한 비판은 필자의 학위 논문 11장을 참조하라.  


23) 이에 관해서는 TP 1장 3절; 7장 25절; 8장 4절-5절; 8장 13절; 9장 14절 등을 참조.


24) “Terrere, nisi paveant.” 『정치론』 7장 27절.

 

25) 이에 관한 좋은 논의는 Montag 1998, pp. 78-81 및 Chaui 1998을 참조.

 

26) 스피노자가 “주권”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은 대개 “숨마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특히 『정치론』에서 “imperium”이라는 용어(이 용어는 대개는 “국가”를 의미한다)를 “주권” 내지 “통치권”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이 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summa potestas”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imperium”을 “통치권”으로 번역하겠지만, 양자 사이에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정치론』에서 “imperium”의 번역 문제에 관한 좋은 논의는 Ramond 2002 참조.

 

27) “우리는 단 한 사람이 아니라 대중들 가운데 선발되고selecti 우리가 이제부터 “귀족들Patricios”이라고 부를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의 수중에 통치권이 놓여 있는 국가를 귀족정이라 불렀다. 나는 분명히 일정한 숫자의 선발된 사람들의 수중에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이 국가와 민주정 국가의 주요한 차이점이기 때문이다. 귀족정 국가에서 통치에 참여할 권리는 오직 선출에 의존하는 반면, 민주정 국가의 경우에는 특히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권리나 우연(우리가 적절한 장소에서 설명하게 될 것처럼)에 의존한다.”(TP 8장 1절) “민주정과 귀족정 국가의 차이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곧 귀족정에서는 어떤 사람이 귀족위원이 되는 것은 오직 최고의회의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누구도 세습적인 투표권이나 공직담임권을 갖지 못하며, 우리가 이제 논의하려는 국가에서처럼 누구도 이러한 권리를 스스로 법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TP 11장 1절)


28) potentia는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 온 “역량”이라는 용어의 원어고, “potestas”는 우리말로는 “권능”, “능력”, “권력”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고전 라틴어나 중세 라틴어의 용법에서 이 두 가지 용어는 특별한 의미상의 차이 없이 함께 사용되었으나, 스피노자(및 홉스)에서는 상당히 뚜렷한 의미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두 개념의 구분은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피노자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 개념들이 어떻게 다르고 스피노자 철학 전반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견해가 다소 다르다. 들뢰즈의 경우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구분은 변용들을 생산하는 힘과 변용들을 수용하는 능력의 구분에 해당한다(특히 Deleuze 1969, 14장 참조). 네그리의 경우 이 두 가지 구분은 “다중”의 구성적이고 생산적인 힘 대 지배세력의 기생적이고 소외시키는 권력의 구분에 상응한다(Negri 1990; 1994). 그리고 최근의 몇몇 연구자들은 좀더 문헌학적으로 엄밀한 검토에 기초하여,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걸쳐 이 두 가지 개념이 구분되는 양상들을 해명하고 있다(특히 Terpstra 1994; Ramond 1998; Barbone 1999; Rice & Barbone 2000; Zourabichvili 2002 등 참조). 반면 영미권 연구자들은 (라이스와 바본을 제외한다면) 이 두 가지 개념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연구자들의 구분 노력에 대해 이전에는 매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던 에드윈 컬리Edwin Curley 같은 이는 최근 들어 이 두 가지 개념들이 존재론 및 정치학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Curley 1997). 이하의 논의는 이러한 차이점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에 관한 간단한 고찰이다.

 

29) 이런 의미에서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니체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

 

30)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스스로 존속하려는 노력은 이 실재 자신의 현행적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E III P7) “충동appetitus ... 은 인간의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 따라서 욕망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충동을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의 사람들과 관련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충동과 욕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E III P9s)

 

31) 따라서 수동성의 극한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우리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곧 이러저러한 타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량이 전유될 때다.

 

32) 이에 관해서는 Balibar 1993; 1996의 시사적인 언급들을 참조.

 

33) 대중들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 네그리의 입장에 관해서는 Negri 1990; 1994 참조.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multitudo”라는 스피노자의 용어는 “다중”이라는 용어로 번역하는 게 좋을 것이다. 스피노자 정치학에 관한 이러한 입장은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제국』 및 『다중』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34) 사실 네그리 자신은 이러한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다중” 개념을 항상 “독특성” 개념과 결부시켜 사고하려고 한다(특히 Negri 1994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다중”을 “주체”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35)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Balibar 1997a pp. 72-78 참조.

 

36) 하지만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사이에 단면적인 단절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5장, 7장)은 스피노자가 이미 『신학정치론』에서 당대의 자연권 이론과 달리 관계론적 관점에서 정치적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 단절 관계가 성립한다면, 이는 경향적이고 다면적이지, 확정적이고 단면적인 단절 관계는 아니다. 

 

37) 『신학정치론』에서부터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가 당대의 대중운동들, 특히 폭군의 제거와 군주정의 폐지 등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인 운동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8) 스피노자가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권력”이라고 말할 때, “포텐샤potentia” 대신 “임페리움imperium”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39) 반면 『신학정치론』에서 “주권의 절대성”이라는 원리는 세속 권력과 구분되는 영적 권능의 공간을 마련하고(“국가 속의 국가”), 이에 기반하여 새로운 신정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당대의 칼뱅주의 신학자들에 맞서 종교적 권력을 정치적 권력에 종속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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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개혁하자, ‘조화사회’를 향해

 

개혁개방 고도성장 이면에 빈부격차 심해지자 “체면있는 생활 누릴 사회보장 사회”
변방에서 우짖던 신좌파 목소리 통치목표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대안 나올까
한겨레
» 중국이 사회적 목표로 내걸고 있는 ‘조화사회’ 이념은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처음 제출됐다. ‘조화사회’란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가리킨다. 눈부신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압축성장이 야기한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들의 소외, 이로 인한 불안정을 조화사회 이념이 해소시켜 줄 수 있을까? 사진은 지난해 3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3차 전체회의 장면. 베이징/ 신화 연합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은 중국 ⑭
 

현대중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중국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조화사회’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지난 달 11일 폐막된 중국공산당 제16기 전국대표대회 제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6기 6중전회)에서 ‘사회주의 조화사회 건설의 몇 가지 중대 문제에 관한 중공 중앙의 결정’이 통과되었다고 한다. ‘조화사회’라는 이념은 2002년 처음 중국 공산당 제 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제출되었고 2005년부터는 언론매체에서 부쩍 자주 거론되더니 이번에 중국 공산당이 추진해야 할 목표로 확립된 것이다. 지난 1978년 12월에 열린 11기 3중전회의 결의가 그동안의 좌의 오류를 바로잡고 개혁개방을 결정한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면 이번 6중전회의 결정도 개혁의 와중에서 야기된 여러 가지 불공평과 부정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총리도 의료·교육 실패 자인

조화사회란 화해사회(和諧社會)의 번역어로 쉽게 말하면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라는 말이다. 조화가 되었건 화해가 되었건 간에 모두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이념을 제출했다는 것 자체가 뒤집어보면 중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롭게 화해하며 지내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고도성장을 구가했고 또 구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빈부격차, 도시와 농촌의 차별, 연안과 내륙의 차별, 생태위기 등으로 신음하고 있다. 또한 시장개혁이 심화됨에 따라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특히 의료와 교육 환경은 점차 악화되었다.

 

원자바오 총리와 같은 최고위급 인사가 매우 이례적으로 의료와 교육 개혁의 실패를 공개적으로 자인했을 정도니 사정의 심각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사에 따르면 13억에 달하는 인구 중에서 겨우 3분의 1에 못 미치는 사람만이 의료보험이 되고 설사 여기에 속한 사람도 50% 이상의 의료비를 자기 돈으로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초등학교에서부터 각종의 잡부금을 징수하여 자녀교육을 포기하는 사례가 느는 등 교육문제도 심각하다. 그리하여 ‘개혁’을 개혁할 때가 온 것이다. 조화사회론은 이런 현실적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한 전문가는 조화사회에 대해 “생산력 수준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체면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보장이 되어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런데 후진타오 주석을 중심으로 한 새 지도부의 통치이념으로 등장한 조화사회론이 이른바 ‘신좌파’의 관점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을 끌고 있다. ‘신좌파’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은 일찍이 1993년~94년부터 존재했지만 ‘신좌파’라는 말은 1997년~98년에 널리 유행하였다. 그 계기가 된 것이 1997년 <천애(天涯)> 잡지에 발표되었던 ‘당대중국의 사상계의 상황과 현대성 문제’라는 왕후이의 글이다.(참고로 말하면 이 글의 간략한 초고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사회주의와 근대성 문제’는 먼저 우리나라의 <창작과 비평>(1994년 겨울호)에 발표되었다.) ‘신좌파’의 우렁찬 입장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의 발표를 계기로 중국의 사상계는 분화되고 ‘신좌파’와 자유주의의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건설과 사상해방이라는 일치된 지향점을 공유했던 지식인들이 분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분량도 두툼하고 고함량의 논문을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언급하는 것도 벅찬 일이다. 따라서 그가 거기서 반현대적 현대성(모더니티)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관점을제기하고 있다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 올해 3월 열린 전인대에 나온 후진타오(중앙) 주석, 원자바오(왼쪽) 총리,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 베이징/ 로이터 연합
일반적으로 현대성이란 자본주의적 질서와 연관된 규정으로 이해되고 있고 서구에서 현대화는 다름 아닌 자본주의화였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현대중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현대화를 실현하는 것을 기본적 목표로 삼았고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중국적 현대성의 주된 특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현대성이란 반자본주의적 현대성이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 온갖 어려움과 곡절이 겪었다는 것이다. 좌우간 이 글은 중국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중국의 현대화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당연히 경제의 시장화가 중국이 나아갈 유일하고 올바른 길이라고 본다. 그들은 정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 시장이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유재산의 신성불가침을 헌법에 명기하여 시민의 권리를 보호한다면 합리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왕후이가 볼 때 이것은 환상이다.

 

돌이켜 보면 왕후이가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하는 1989년 천안문 사건이 무력으로 진압되자 많은 이들은 개혁 개방이 후퇴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오히려 개혁의 발걸음을 가속화시켰다. 따라서 천안문 사건을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 체제수호파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체제파의 충돌이라고 단순하게 파악할 수 없다. 천안문 사건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는 시장화, 자유화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자유화에 동반되는 심각한 격차를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두 층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중국 정부가 그동안 걸어온 길은 크게 보면 시장주의를 선도하고 있는 전자들의 소리를 채택한 것이었고 후자들은 “변방에 우짖는 새”였다. 그런데 이번에 조화사회론이 통치이념으로 채택된 것을 보면 그동안 체제 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자는 획일화를 하지 않는다”

근자에 행해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왕후이는 신좌파가 현 정권에 점차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삼농(三農)문제의 중요성을 역설해온 원티에쥔(溫鐵軍)과 미국과 독일의 헌법에도 사유재산 신성불가침 조항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 추이즈위안(崔之元)의 글들을 읽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른바 신좌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글은 모두 그가 주편으로 있는 <독서>라는 잡지에서 발표된 것이었다.

 

왕후이는 서양에서 발전한 현대자본주의가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또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도움으로 발전해온 점을 지적하면서, 커다란 전쟁과 환경파괴 없이 이 서구의 독특한 경제모델이 세계화될 수 있었겠냐고 반문하고 있다. 따라는 단순히 서양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중국적 대안(chinese alternative)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를 비롯한 많은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새롭게 아시아(일본, 인도 등)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침 지난달 19일은 루쉰(1881~1936)이 서거한 지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왕후이는 원래 루쉰 연구자였다. 루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루쉰은 좌익작가였지만 좌익작가들과 활동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중국의 전통을 비판했지만 매우 우수한 고전학자였고, 서양의 진보 관념을 환영했지만 또한 거기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고. 그는 루쉰의 이러한 내적 모순을 통해 중국의 현대성의 문제가 마오주의자나 자유시장 찬양론자들처럼 단순히 전통적인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문제일 수 없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마오가 루쉰을 “현대중국의 공자”로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루쉰의 저작은 <홍루몽>과 함께 문화대혁명 기간에 아주 특수한 지위를 누렸다. 그렇지만 문혁이 종결되자 루쉰은 사상해방의 하나의 원천으로 작용하면서도 다른 한편 신화화된 루쉰이 문제가 되었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나도 그의 작품을 읽기 싫어한다는 중국인을 몇 명 접한 적이 있다. 이유는 너무 각박하다는 것이다. 그가 루쉰을 만난 것도 이렇게 루쉰을 회의하는 분위기 속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중국 역사와 현실에 대한 루쉰의 깊은 통찰, 한 지식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어두운 기억에 대한 발굴, 지옥과 천당의 기운이 혼합되어 있고 절망과 희망이 뒤엉켜 있는 루쉰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버렸다고 한다. 그런 루쉰이 일찍이(1908) “나쁜 소리(惡聲)”로 꼽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러분은 국민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러분은 세계인입니다”라는 말이다. 이런 말이 왜 나쁜가? 모두 인간의 자아를 멸하고 독특한 개성을 갖지 못하게 획일화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공자님도 말하지 않았는가. “군자는 조화를 도모하지 획일화를 하지 않는다”고. 조화사회 이념이 과연 중국을 과연 더 조화롭고 화해로운 사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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