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속 사상] 뇌는 정말 거짓말을 못할까?

 

거짓말탐지기까지 속인 샤론 스톤도 뇌영상 찍어 ‘P300’ 파를 잡아냈다면 꼼짝 못해
사랑도 우울증도 ‘정직한 뇌’로 판별하고 뇌 향상시키는 ‘똘똘한 약’이면 A학점도 거뜬
그렇지만 ‘뇌 프라이버시’는 누가 지켜주나
한겨레

기술 속 사상/(24) 신경과학과 윤리
 

첩보영화는 거의 언제나 배신자에 대한 응징으로 끝난다. 손에 땀을 쥐면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끝날 때까지 누가 범인인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 중 적어도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 테지만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처럼 자신의 땀샘까지 통제해 거짓말 탐지기마저 무용지물로 만드는 경우들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의 땀샘이나 심장 대신 뇌의 반응을 찍어보면 어떨까? 샤론 스톤은 자신의 뇌마저도 거짓말을 하게 만들 수 있을까?

 

거짓말 탐지기 기능을 하는 뇌영상 기법은 몇몇 특수 기관에서 시범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뇌파(EEG) 중 ‘P300’이라 명명된 파의 경우 피험자가 친숙한 소리, 냄새, 광경을 지각할 때 그 진폭이 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가령 희한한 모자를 보게 되면 맨날 쓰는 모자를 볼 때보다 그 파의 진폭이 작아진다. 그래서 이 기법은 용의자가 특정 범죄 조직의 세부사항에 대해 친숙한지를 알아내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뇌영상 기법 특수기관에서 시범

실제로 미국의 신경학자 파웰은 그것을 ‘뇌지문’이라 칭하고 최근 10여 년 동안 FBI와 공동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FBI 훈련을 이수한 사람들에게만 친숙한 상황을 주고 피험자의 P300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이 실험에서 실제 요원과 가짜 요원이 95%의 신뢰도 하에서 정확히 분류되었다. 물론 이들은 기존의 거짓말 탐지기를 모두 통과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법정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DNA지문과는 달리 뇌지문은 아직 중요한 증거로서 채택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관련 분야의 과학자 공동체가 그 기법의 신빙성을 아직까지는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뇌영상 기법은 뇌손상이나 뇌이상을 탐지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였다. 하지만 거짓말 탐지의 경우처럼 응용분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뇌영상으로 사람들의 능력, 성격, 감정 상태 등을 알아내려는 분야이다.

 

<사례 1> 한 부부가 이혼 법정에서 논쟁을 하고 있다. 부인은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갈라서자고 하지만, 남편은 부인에게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으면서 왜 그러느냐?”고 호소한다. 결말이 날 것 같지 않자 판사가 부인의 머리에 어떤 장치를 갖다 댄다. 그리고 모니터의 영상을 살피더니 곧 판결을 내린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검사한 결과 부인의 뇌가 부인의 사랑이 식었음을 입증함으로 남편은 부인의 요구를 들어줄 의무가 있다”

 

물론 이것이 가상의 법정이긴 하지만 사랑에 빠진 뇌에 특징적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예컨대 런던 대학의 인지신경학자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가 애인의 사진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fMRI로 찍었다. 17명의 참가자에게 자신의 애인 사진과 동성 친구 사진을 보여주고 각 경우에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일어났는지를 9점 척도 상으로 점수를 매기게 했다. 그 결과 애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평균 7.46점, 친구의 경우는 3.2점이 나왔는데,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내측 도, 전측 대상피질, 그리고 미상핵과 피각 등의 활동이 증가하는 영상이 fMRI로 포착되었다.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뇌영상이 사랑과 같은 내밀한 프라이버시까지 제공할 수 있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

 

유전자 말고 뇌 프로파일도 입수

정직한 뇌, 사랑에 빠진 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뇌영상 기술이 제기하는 윤리적 쟁점 중 하나는 바로 뇌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유전정보의 프라이버시 문제와 몇 가지 면에서 비교될 만하다. 우선, 뇌정보는 유전정보에 비해 더 구체적이다. 유전정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에 그 최종 산물을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데 반해, 뇌정보는 관련 유전자들이 이미 몇 차례 발현된 후의 정보이다. 가령 유전정보는 “네가 우울증에 걸릴 개연성은 80%”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뇌정보는 “너는 지금 우울한 상태”라고 말한다.

 

» 드라마의 단골 소재 중 하나인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도 결국 달라진 뇌로 인해 생기는 관계의 혼란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대박을 터뜨린 <겨울 연가>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 추세로 신경과학이 유전공학과 함께 발전하게 되면 머지않아 직장이나 보험회사에서 유전 프로파일뿐만 아니라 뇌 프로파일까지도 입수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면 뇌의 특정 부위가 남들보다 더 잘 활성화된다는 이유만으로 학업, 취업,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차별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프라이버시 문제가 유전공학의 전유물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지 않을까? 유전적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유전적 조성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궁극적으로는 맞춤아기가 그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뇌의 경우는 어떤가?

 

<사례 2> 정주는 ㄱ대학 의대 본과 2학년 학생이다. 정신약물학 기말시험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일명 ‘똘똘한 약’으로 불리는 프로버길(provigil) II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이 약은 원래 집중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약으로 처방전이 필요한 경우인데, 요즘은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도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 정주는 결국 A학점을 받았다.

 

그동안 정신약물들은 주로 치료 목적으로 개발돼 왔다. 예컨대 항우울제인 프로작과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처방되는 약이다. 수면 장애, 식욕 장애, 성기능 장애 등을 치료하기 위한 약물들도 흔하다.

 

하지만 기억, 학습, 집중력 등을 강화하는 정신자극제처럼 정신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약물들도 최근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연구되고 사용된 약이 집중력을 높여주는 리탈린과 아데럴인데, 원래는 이 약들도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를 겪는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일반인의 집중력 향상을 위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고등학생 10%, 대학생 20%가 이미 리탈린을 불법으로 구입해서 복용한 경험이 있으며, 전세계적으로는 리탈린의 판매가 지난 10년 사이에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니 <사례 2>는 지금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뇌 다쳐 돌변한 범죄자의 윤리는

이런 약물들을 복용하는 문제는 유전자 강화프로그램에 몸을 맡기는 경우와 몇 가지 면에서 비교될 수 있다. 먼저, 후자는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는 변화를 꽤하는 경우이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둘째, 후자는 변화의 원천(유전자)을 조작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변화의 매개자(뇌)를 조작하는 것이다. 셋째, 약물 복용에는 늘 ‘중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삼킬 수도 있었던 파란약처럼 말이다.

 

하지만 두 강화프로그램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윤리적 쟁점은 그것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원래 두뇌’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늘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차별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들도 있다.

 

<사례 3> 민수는 원래 다정다감하고 친구들이 많은 대학생이었다. 여학생들에게도 매너 좋은 남학생으로 인기가 많았었다. 하지만 어느 날 큰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치고 나서는 친구들과 말다툼을 자주 하고 가끔씩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사고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을 성추행하다 입건된 적도 있다.

 

» 장대익/미국 터프츠대 인지연구소 객원교수
만일 민수의 변호사가 신경과학의 지식을 동원하여 나쁜 행동의 원인이 민수에게 있지 않고 민수의 손상된 뇌에 있다고 강변한다고 해보자. 당신이 판사라면 어떻게 판결하겠는가? 사실, 이 사례는 그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 버몬트 주의 철도노동자인 게이지는 1848년 어느 날 건설 현장에서 큰 폭발 사고를 당해 뇌의 전두엽 부분에 쇠파이프가 관통하는 큰 부상을 당했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지만 그 이후로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괴팍하고 무책임한) 성격의 소유자로 돌변했다. 그렇다면 사고 전의 민수와 게이지는 사고 후의 그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인가? 민수와 게이지의 행동은 도대체 누가 (혹은 무엇이) 책임져야 하는가?

 

이렇게 신경과학의 발전은 뇌 프라이버시 문제, 뇌 차별 문제, 행동의 도덕적?법적 책임 문제 등의 윤리적 쟁점들을 던져줄 뿐만 아니라 ‘뇌가 곧 나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도 제기한다. 이 모든 쟁점들은 ‘신경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뤄질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아는가? 복제된 인간만이 아니라 복제된 뇌, 강화된 뇌들도 미래를 활보하게 될지.

 

장대익/미국 터프츠대 인지연구소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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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자동차 역사 바꾼 도요타의 미국 견학

 

1950년 봄 포드사 공장견학한 도요타 에이지
“포드식 대량생산은 일본에 맞지 않다” 결론
6년 뒤 미국 방문한 엔지니어 오노 다이이치는
슈퍼마켓 진열시스템을 차 생산라인에 도입
30년 뒤 미국 전문가들 도요타 배우려 일본으로
한겨레
»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제조공정의 유연화로 미국 자동차회사들의 포디즘적 한계를 넘어섰으나 그에 따른 소비패턴 변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등 급속한 환경변화로 유연화 자체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됐다. 신뢰, 영구성, 안전성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즐거움을 더해서 만들어졌다는 새턴자동차의 광고 사진. 노동자를 영웅화함으로써 노동자의 권한을 강화했다고 선전하는 포스트 포디즘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23) 포스트 포드주의
 

고급 기술을 배우기 위해 기술 선진국의 공장을 방문하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문은 가끔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뜻밖의 결과를 낳곤 한다.

 

1950년 봄, 일본이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시기에 도요타 회사의 자동차 생산을 담당하던 도요타 에이지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포드사의 로그공장을 방문했다. 그의 목적은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조립라인에서 작업을 하던 거대한 로그공장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공장을 방문한 뒤에 도요타 에이지가 내린 결론은 포드사의 대량생산 방식이 일본에서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선 일본의 자동차 수요는 미국처럼 대량 소비가 가능할 정도로 많지 않았다. 또 일본 사람들은 한가지 모델에 만족하기보다 다양한 모델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전후의 일본 경제에서는 거대한 공장과 같은 높은 설비투자를 할 수가 없었으며, 공장의 노동자들도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단순 조립 노동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부품을 정교하게 깎고 여러 종류의 금형을 제작해야 했다. 원래 이 모든 것은 숙련된 장인과 노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나 (지금도 최고급 스포츠카는 수제품임을 기억하라), 헨리 포드는 인간으로부터 이 숙련을 빼앗아 이를 기계에 부여했다. 즉 포드의 공장에는 ‘숙련된’ 기계인 전용기계들과 탈숙련된 단순 조립 노동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숙련노동을 대체한 포드의 전용기계는 매우 복잡하고 비쌌으며, 이를 설치하거나 바꾸는 데에 많은 설비투자가 필요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포드회사가 모델 T에서 모델 A로 생산라인을 바꾸는 데 오랜 시간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미국의 절반만 투자해 생산 두배로




도요타 에이지는 미국과 일본을 비교한 뒤에 ‘미국의 절반만 하자’고 판단했다. 전쟁 때문에 황폐화된 일본에는 자원이 부족했고,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생산에 투입되는 모든 것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생각이었다. 절반의 장비와 기계, 절반의 노동력, 절반의 공장부지, 그렇지만 하나의 제품에서 새로운 제품으로 옮겨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절반으로! 절반의 설비투자로 신제품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생각은 얼핏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포드사의 혁신이 거대한 설비투자 때문에 늦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했다.

 

도요타 회사의 엔지니어들은 이를 가능하게 할 기술혁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우선 새로운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금형을 만드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도요타사의 엔지니어 오도 다이이치는 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프레스 공정에서 간단한 금형교환기술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는 생산을 유연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모델을 원하는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신속하게 많이 생산해서 원가절감을 이루었던 포드식의 대량생산의 이점에, 유연성과 양질의 제품 생산이라는 수공업생산의 이점을 결합한 혁신이었다. (도요타의 생산체계는 이후 대량mass생산과 대비되어 린lean생산으로 이름 붙여졌다).

 

도요타 생산방식의 핵심은 유연성에 있었다. 그렇지만 유연한 금형제작기술은 도요타 혁신의 끝이라기보다는 그 시작에 불과했다. 또 한번의 새로운 혁신은 전혀 예상치 않던 방향에서 찾아졌다.

 

오노 다이이치는 1956년에 미국을 방문했는데, 미국의 자동차 공장보다는 수퍼마켓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수퍼마켓은 물건을 고르는 구매자가 자신이 원하는 수량만큼의 물건을 집어 들고 계산을 하면 매니저가 빈 진열대를 재빨리 파악하고 이를 다시 채워넣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얘기지만, 일본에서 수퍼마켓을 구경하지 못했던 오노에게 미국의 수퍼마켓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서 물건이 채워지는 방식을 주시했고, 일본에 돌아와서 이를 자동차 생산에 응용했다.

 

기존의 자동차 생산은 부품의 공급에서 시작했다. 생산라인은 공급받은 부품을 조립해서 다음 라인으로 넘겼고, 그 다음 라인은 이를 받아서 다음 단계의 조립을 완성하는 식이었다. 앞 라인이 뒷 라인의 부품에 의존하다보니 속도가 조금이라도 늦어질 경우에 항상 재고가 문제가 되었다. 재고 혹은 낭비(muda むだ)를 줄이는 것은 ‘카이젠’이라고 불리던 도요타 공장의 오랜 경영철학이었는데, 미국에서 돌아온 오노는 공장의 생산라인을 수퍼마켓의 진열대 식으로 바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소비자가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수퍼마켓 진열대에서 골라 들듯이, 한 생산라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부품만을 이전 생산라인으로부터 취사선택한다는 개념이었다. 모든 생산라인은 다음 생산라인을 위한 수퍼마켓이 되는 셈이었다.

 

‘저스트 인 타임’과 ‘간판’ 효과

‘저스트-인-타임’(Just-in-Time 혹은 JIT) 생산방식으로 불리게 된 이 시스템은 뒷 공정에서 필요한 만큼만 앞 공정의 부품들을 인수함으로써 재고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도요타 회사가 시장의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이러한 공정상의 혁신이 존재했다. 물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후공정에서 전공정에 생산량, 시기, 방법, 순서, 운반량, 운반시기와 같은 정보가 정확히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간판(kanban)’이었다. 간판은 조그만 사각형의 비닐 봉투에 종이쪽지를 집어넣는 것으로, 이는 생산과 조립에 대한 지침을 전달하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간판 스스로가 부품과 함께 움직임으로써 생산 공정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했다. 간판이 쌓여있는 곳은 당장 관리를 해야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도요타 회사의 생산체계는 노동자에게 더 큰 권한을 부여했다. 포드 공장을 희화화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포드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계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와 같은 생산의 과정에 잘 적응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불량부품을 만들어 내거나 조립과정을 제대로 마무리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컨베이어 벨트를 비롯한 공장의 생산라인은 24시간 계속 돌아갔고, 여기에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요타 키운 ‘유연성’이 위험으로

반면에 도요타 회사의 노동자들은 불량 부품이 만들어졌거나 조립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생산라인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시스템은 ‘지도카’(Jidoka - 자동화)라고 명명되었다. 이를 영어로 번역할 경우, 일반적인 자동화를 의미하는 automation이 아니라 autonomation이라는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인간의 지능과 손길을 기계에 부여하는 자동화라는 뜻이다.

 

일본이 독특한 생산방식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의 회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1970년대와 특히 1980년대를 통해서 일본의 자동차들이 미국 시장에서 미국차를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포드나 GM과 같은 미국의 거대 자동차 제국들은 일본의 도요타의 모델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요타 에이지와 오노 다이이치가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미국 공장을 방문한 지 30년 만에, 미국의 엔지니어와 경영학자들이 도요타의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서 일본 공장을 찾아왔다. MIT의 경영학자들은 5백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받아서 5년간 일본의 도요타를 연구했다. 이들의 책은 1990년에 <세상을 바꾼 기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무렵부터 ‘유연성’은 생산은 물론 경영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유연한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충족되었지만, 이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더 급변하게 만들었다. 소비자의 수요를 안정적으로 예측한다는 것이 어려워지고 신제품의 생산 주기는 더 단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산품, 소비패턴, 노동과정만이 아니라 노동 시장 자체도 유연해졌다. 범세계적인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평생직장을 보장하던 도요타 회사마저도 임시직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종업원들의 해고를 감행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유연한 것은 불안정한 것, 심지어 위험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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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마이카 시대 연 ‘일당 5달러’

 

“자동차 누구나 싸게 살 수 있게 하겠다”
컨베이어 공정으로 대량생산 길트고
파격 임금으로 대량소비 지원한 포드
노동 비인간화·한가지 차종 고집으로 쇠퇴
한겨레

기술 속 사상/(22) 대량생산 대중소비, 포드주의
 

철도가 19세기를 상징하는 교통수단이라면 20세기 이후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자동차이다. 내연기관을 이용한 가솔린 자동차는 1880년대 독일에서 처음 발명되었지만 1910년대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만 해도 자가용을 굴리는 사람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자동차의 소유가 보편화되는 이른바 ‘마이카 시대’에 접어들었다.

 

역사상 최초로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자동차의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이다. 포드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기계공의 길을 걸었고 청년 시절부터 자동차에 도전하였다. 그는 1896년에 자동차를 제작하는 데 성공한 후 기술자 겸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1903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포드자동차회사가 설립되었는데, 그 회사는 오늘날에도 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와 함께 미국 자동차업계의 ‘빅 3’로 불리고 있다.

 

포드사의 급속한 성장은 ‘모델 T’에서 비롯되었다. 포드는 모델 T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나는 수많은 일반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생산할 것이다. 최고의 재료를 쓰고 최고의 기술자를 고용하여 현대 공학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디자인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가격을 저렴하게 하여 적당한 봉급을 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입해서 신이 내려주신 드넓은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만 해도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만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기술자가 힘들여 제작한 고가품으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의미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생활필수품으로서의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의 출발점은 동일한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핀은 다른 핀과 똑같고, 성냥 또한 그렇다. 이것은 자동차도 마찬가지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립라인 완성→작업 단순화




1908년 10월에는 검정 색상의 소형자동차인 모델 T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새로운 합금강을 사용하여 견고할 뿐만 아니라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델 T는 82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 사람들은 모델 T에게 ‘틴 리치’(Tin Lizzie) 혹은 ‘플리버’(Flivver)라는 애교스러운 별명을 붙였다. 틴 리치는 ‘털터리 자동차’를, 플리버는 ‘싸구려 자동차’를 뜻한다.

 

포드주의의 두 기둥: 컨베이어 벨트와 일당 5달러

포드사는 1910년에 4층으로 된 하이랜드 파크(Highland Park) 공장을 신설하였다. 그것은 작업이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된 최신 공장이었다. 4층에서는 차체가 만들어지고, 3층에서는 바퀴에 타이어가 부착되면서 차체에 페인트가 칠해졌다. 2층에서 모든 조립이 끝난 자동차는 경사면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와 최종 검사를 받았다. 모델 T의 생산대수는 1910년의 19,000대에서 1913년에는 248,000대로 크게 증가하였다.

 

하이랜드 파크를 건설하면서 포드는 생산과정을 연속화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당시에 그는 시카고로 여행하던 중에 푸줏간 주인이 도살한 소를 손수레로 이동시키면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부위별로 고기를 발라내는 것을 목격하였다. 포드는 유사한 기능을 가진 기계들을 그룹별로 묶어 본 후 나중에는 생산물을 중심으로 기계체계를 구성하였다. 결국 포드사의 생산과정은 1913년에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로 연결된 조립라인(assembly line)이 구축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이에 따라 공작물이 이동하고 노동자의 작업 위치는 고정되었는데,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영화인 <모던 타임즈>(Modern Times)는 이러한 상황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사회부’ 만들어 노동자 생화 조사

» 대중용 자동차의 효시, 포드의 ‘모델 T’. 1908년 10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검정 색상의 소형자동차 ‘모델 T’는 가볍지만 견고한 차체, 강력한 엔진, 싼 값으로, 그때까지 부자들의 사치품이던 자동차의 대중화에 길을 열었다.
조립라인이 완성되자 포드사의 생산성은 급속히 향상되었다. 그것은 1914년의 자동차 생산량과 노동자의 수를 비교해 보면 단번에 드러난다. 당시에 포드사에서는 13,000명의 노동자들이 26만 72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던 반면, 미국의 나머지 299개 자동차업체들은 28만 6,770대를 생산하기 위하여 66,350명의 노동자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업의 단순화는 높은 이직률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하루 종일 나사를 조이는 작업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무슨 노동의 즐거움이 있겠는가? 1913년 한 해 동안 포드사는 100명의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무려 936명을 고용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포드는 1914년 1월 5일에 ‘일당 5달러’(Five-Dollar Day)라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루 8시간 노동에 대하여 최소한 5달러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미국의 노동자들이 하루 9시간 일한 대가로 2.38달러를 받았으니, 포드사는 통상적인 임금의 2배 이상을 보장했던 셈이다. 포드는 이를 가리켜 “내가 한 것 중에서 가장 멋진 비용절감 운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와 동시에 포드사는 노동자의 규율을 확립하기 위하여 ‘사회부’(Sociological Department)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사회부는 노동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노동자의 인간관계, 경제적 여건, 생활습관 등을 조사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포드사의 경영진은 해당 노동자가 일당 5달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였다. 음주나 도박에 문제가 있는 노동자들은 경고를 받았고 그것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에는 해고되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포드사는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움직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을 자동차 고객층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20년대 중반에 모델 T의 가격은 290달러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포드사에 근무했던 일반 노동자의 3달치 봉급과 비슷하였다. 이제 일반 노동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포드사는 컨베이어 벨트와 일당 5달러 정책을 통해 ‘대량생산’(mass production)과 ‘대중소비’(mass consumption)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1920년대부터 미국 사회는 풍요한 경제와 모델 T를 배경으로 자동차 대중화 시대에 돌입하여 1930년에는 가구당 1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대량생산과 대중소비를 연결하기 위한 포드사의 실험은 이후에 ‘포드주의’(Fordism)로 불렸다. 그러나 포드사의 온정주의적 정책도 경영 환경이 나빠지자 계속해서 유지될 수 없었다. 경영 환경이 악화된 이유 중의 하나는 포드사가 한 가지 차종에 집착함으로써 소비자의 새로운 기호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24년은 포드에게 역설적인 한 해였다. 1924년은 모델 T의 생산량이 1천만 대를 넘어섰던 해이자 제너럴 모터스에서 시보레(Chevrolet)가 출시한 해였다. 시보레는 모델 T의 단점을 보완하면서도 신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크랭크 대신에 전자 시동장치가 부착되었으며, 무거운 톱니바퀴식 변속기 대신에 부드러운 3단 기어가 장착되었다. 시보레는 자동차 시장을 급속히 잠식했지만, 포드는 자신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검정색의 모델 T에 끝까지 집착하였다. 그는 자신의 차가 팔리지 않는 이유를 몰랐으며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포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고객은 누구나 원하는 자동차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이 까만 색깔인 한.”

 

“까만 차가 아니면 차가 아니다”

포드사의 상대적 쇠퇴와는 별도로 포드주의는 오랫동안 호평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공상과학소설의 백미로 평가되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현대사회에 ‘A.F.’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After Ford’의 약칭으로서 포드가 현대사회를 건설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사실상 자본주의 경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도 전례 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했으며, 거기에는 포드주의의 확립과 확산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송성수/부산대 교양교육원 조교수·과학기술학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포드주의는 상당한 위기를 맞이하였다. 포드주의는 소비자의 수요가 다양화되는 추세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막대한 설비투자나 임금의 상승과 결부되어 자본의 수익성을 감소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노동조합의 성장과 노동운동의 강화를 배경으로 포드주의는 노동을 비(非)인간화하는 상징으로 간주되어 극렬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결국 포드주의는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급속히 쇠퇴하였고 다양한 형태의 ‘포스트 포드주의’(post Fordism)가 모색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송성수/부산대 교양교육원 조교수·과학기술학 triple@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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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성과급제 원조…그는 노동자의 적인가

 

철강회사 노동자로 출발 수석엔지니어로 승진 ‘은밀한 태업’ 해법 연구 경영컨설턴트로 나서
‘테일러주의’ 핵심은 노동자별 ‘과업’ 할당…노동력 착취 수단·인간 노예화 비판 받기도
한겨레

기술 속 사상/테일러주의와 엔지니어의 꿈
 

요즘에 구인 광고란을 보면 새로운 직종이 많이 생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기술관리’다. ‘관리’라는 단어 앞에 붙일 수 있는 업무가 인사, 조직, 재무, 회계, 생산, 판매를 넘어 기술로 확장된 것이다. 기술이 점점 복잡해지고 급속히 변화함에 따라 그것을 관리하거나 기획하는 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사람이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역사상 기술과 관리를 결합시킨 선구자로는 과학적 관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W. Taylor, 1856~1915)를 들 수 있다.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배경은 테일러가 기업의 관행을 개혁할 수 있는 기술자 및 관리자로 성장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철강산업과 기계산업의 중심지였고, 테일러의 집안은 기업가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청교도적인 품성은 실용적인 활동을 장려하고 게으름을 죄악으로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기술과 관리 결합시킨 선구자

테일러는 1878년에 미드베일 철강회사에 일반노동자로 입사한 후 기계공, 조장, 직장, 주임을 거쳐 수석 엔지니어로 승진했으며, 스티븐스 공과대학을 야간으로 다니면서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철강산업과 기계산업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던 ‘은밀한 태업’(soldiering)의 관행에 직면하면서 관리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은밀한 태업은 공식적 태업(sabotage)과 달리 적당히 일함으로써 산출고를 제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생산과정에 대한 실제적인 권한이 숙련노동자들에게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테일러는 이러한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제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미드베일 철강회사에서 금속절삭작업을 대상으로 새로운 관리법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부터는 ‘경영 컨설턴트’라는 직함을 내걸고 다양한 기업의 기술적·경영적 문제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테일러는 1898~1901년에 베들레헴 강철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자신의 관리법을 체계화하였다. 그 이후에는 현업에서 은퇴하여 자문, 강연, 저술 활동에 몰두하면서 <공장관리>, <금속절삭의 기술에 관하여>, <과학적 관리의 원리들> 등의 저작을 남겼다.

 

테일러리즘의 핵심적인 관념은 과업(task)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되는 하루의 공정한 작업을 뜻한다. 테일러는 작업도구와 작업방법에 관한 시간연구(time study)를 통해 과업을 설정하였고, 노동자에게 과업 실행의 유인을 제공하기 위해서 차별적 성과급제(differential piece rate)를 개발했으며, 과업이 제대로 실행되고 관리될 수 있도록 기획부(planning department)와 기능별 직장제(functional foremanship)를 고안하였다.

 

테일러주의는 금속절삭작업의 도구와 방법을 표준화하기 위한 시간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테일러는 작업도구의 칼날의 형태와 사용방법을 개량하고 도구를 규격화하여 노동자들이 사용할 도구를 자세히 지시하였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동작으로 분해한 후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하고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낸 후 스톱워치(stop watch)로 단위시간을 측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작업에 대하여 도구, 동작, 시간을 결합하여 테일러는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할 수 있는 과업을 구성하였다.

 

시간연구의 초보적인 형태는 19세기 영국의 과학자이자 기술자인 배비지(Charles Babbage)가 이미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러나 배비지가 업무 수행의 총 시간에 만족했던 것에 반해 테일러는 작업을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분해하여 분석한 후 이를 다시 결합시켰다. 또한 배비지는 실제로 행해졌던 시간을 측정했던 반면 테일러는 작업이 수행되어야만 하는 시간에 초점을 두었다. 테일러는 “한 사람이 주어진 일정량의 작업을 하는 데 걸리는 전체 시간에 대한 단순한 통계는 시간연구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20세기초 도마에 오른 테일러주의

» 기술과 관리를 결합시킨 선구자 프레더릭 테일러.
차별적 성과급제는 노동자가 과업을 달성한 경우에는 임금에 높은 비율을 적용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낮은 비율을 적용하는 임금제도였다. 그것은 과업을 달성한 노동자가 이전에 비해 30~100%의 임금을 추가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특히, 테일러는 차별적 성과급제의 성패가 기계와 작업에 관한 정밀한 시간연구를 통해 적절한 과업을 구성하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기획부는 이전에 숙련 노동자들이 가졌던 작업에 대한 지식을 관리자의 손으로 옮기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그것은 ‘구상과 실행의 분리’ 혹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로 상징된다. 기능별 직장제는 참모 기능이 강화된 수평적 조직으로서 기획부와 작업장에 각각 4명씩 배치된다. 그들은 각각 작업 순서의 결정, 작업지시카드의 작성, 임금 산출의 내역 계산, 업무의 조정, 작업 방법의 교육, 작업 속도의 설정, 기계의 관리 빛 정비, 제품의 품질 검사를 담당하였다.

 

테일러주의는 20세기 초 미국 사회에서 두 번의 커다란 시험대에 올랐다. 1910년에 동부철도회사가 운임 인상을 요구했을 때 당시에 ‘민중의 변호사’로 불린 브랜다이스(Louis D. Brandeis)는 테일러의 방법을 적용하여 비능률적 요소를 제거하면 운임을 인상할 필요가 없다고 맞섰다. ‘과학적 관리’라는 용어는 그 때 만들어져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테일러는 워터타운 병기창(Watertown Arsenal) 사건을 매개로 1911~1912년에 청문회에 불려가기도 했다. 워터타운의 경영진은 테일러주의를 적용하려고 했지만 노동조합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노동조합은 테일러주의를 도입하면 작업속도가 빨라지고 일자리가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 청문회는 과학적 관리를 위해 별도의 예산을 사용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처럼 테일러주의가 반드시 경영진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테일러주의를 경영진과 노동자의 이분법적 구도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사실상 테일러는 자신의 관리법을 개발하면서 엔지니어를 핵심적인 주체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임금 산출의 기준이 되는 작업속도를 엔지니어가 정했다는 점, 시간연구를 통해 작업에 대한 지식을 엔지니어에게 집중시켰다는 점, 기능별 직장제를 통해 기획부나 작업장의 주요 업무를 엔지니어가 담당하였다는 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엔지니어가 전문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공장관리를 주도함으로써 노사양측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테일러는 엔지니어를 중심으로 한 공장관리에 관심을 기울였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엔지니어의 사회적 지위가 변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테일러 이전 세대의 엔지니어들은 공장의 소유주인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독립적인 사업가에 가까웠다. 그러나 테일러 세대의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대기업의 고용인이었고 이에 따라 이전과 같은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지위하락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엔지니어 자신이 독자적인 사업을 하는 방법과 공장관리의 문제를 공학의 한 분야로 취급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의 방법은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자의 방법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테일러가 주목했던 것도 공장관리의 문제를 엔지니어가 담당하는 방법이었다.

 

엔지니어를 주체로 설정했으나

» 송성수/부산대 교수·기술학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엔지니어가 경영진에 종속되는 정도가 심해지면서 공정한 전문가로 기능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테일러주의의 철학적 기반은 무시하고 단순한 기법만을 도입하는 사례도 속출하였다. 특히, 제3세계의 경우에는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어 “출혈적 테일러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테일러주의는 기술적?조직적 측면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인간적?사회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테일러주의가 인간적인 요소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집단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치중하다보면 인간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기 마련이다. 테일러주의가 인간을 기계와 조직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송성수/부산대 교수·기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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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정보의 바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월드 와이드 웹’ 정보망 10년만에 지구촌 중독
개발 의도 상관없이 무한 진화의 ‘럭비공’으로
전세계 서버 관리하는 장치는 미국 손안에
‘쌍방향 교류도 민주 발전’ 착각일 수도
세살부터 배우는 클릭클릭, 우려스럽다
한겨레

기술 속 사상/(19) 인터넷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들은 평균 만 3세에 인터넷을 시작해 5세 이상의 어린이 중 절반 이상이 많게는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며, 중고교생의 반 이상이 인터넷 중독 증상을 보인다 한다. 2003년 1월 25일 국내 인터넷이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해 한동안 마비되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외부와 단절된 것 같은 공포감이나 금단현상을 경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반에 널리 보급된 지 10여 년 만에 인터넷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2000년을 전후해서는 닷컴 열풍이 세계를 흔들었고, 얼마 전 우리나라의 인터넷 뱅킹에서의 거래량이 은행 창구의 거래량을 추월했다. 기업과 정부기관, 정당과 각종 단체들 뿐 아니라 개인들도 홈페이지를 제작, 관리하는데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아파트 청약은 사이버 모델 하우스를 본 뒤 온라인에서 처리한다. 실제 공간인 지하철에는 인터넷 쇼핑몰과 인터넷 게임과 같은 가상공간의 세계로 오라는 광고가 붙어있다. 이런 세상에서 어린이의 인터넷 사용이나 인터넷 중독을 굳이 문제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1960년 군사·학술용 네트워크로

인터넷은 1960년 대 미국에서 군사 및 학술적 목적의 정보교환을 위해 몇몇 컴퓨터들의 통신 네트워크를 만든 것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흔히 ‘인터넷’이라 칭하는 것은 World Wide Web(WWW)이라는 정보망이다. 웹(Web)이라고도 불리는 이 정보망에 컴퓨터를 연결하면 자신의 위치에 상관없이 거기에 올라있는 웹페이지, 문서, 사진 등 여러 형태를 가진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고, 자신도 웹에 원하는 자료를 올릴 수 있다.




인터넷의 세계는 컴퓨터, 모템, 통신케이블, 여러 소프트웨어의 복합체 이상의 그 무엇이다. 전 세계의 컴퓨터가 서로 연결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종류의 자료를 교환하면서 만들어지는 가능성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미국 철학자 허버트 드레퓌스의 말처럼, 인터넷은 처음의 개발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진화하는 새로운 종류의 기술 혁신이다. 그래서 그 완성된 모습에 대한 상도 없고 그 발전의 방향도 알 수 없다. 학술 및 군사용 정보 교환이라는 최초의 목적은 이제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행위들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발전해 간다는 두 가지 특성만 고려하더라도, 정책 입안자들이나 미래학자들이 역설하는 인터넷에 대한 기대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인터넷 중독에 대해 막연히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여러 혜택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 인터넷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이라도 살펴보자.

 

첫째, 인터넷을 ‘정보 고속도로(Information Highway)’라 부르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정보의 장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필요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어 혜택을 누리게 된다. 광범위한 정보의 공유는 세상을 더욱 투명한 곳으로 만들어 불합리한 억압을 없애기도 한다. 저소득층이나 저개발국에 인터넷을 보급하는 것이 곧 그들에게 경제적 도약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나, 독재국가의 국민들이 인터넷을 통해 해방의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이런 견해에서 비롯된다.

 

필요 아닌 좋아하는 정보만 축적

» 월드 와이드 웹(WWW) 정보망의 발명자 팀 버너스리.
이러한 관점에도 일리가 있지만 일반적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엄청난 양의 정보 중에 꼭 필요하고 정확한 정보를 찾아내기도 어렵고 정확성을 판단하기도 힘들다. 모든 사람이 같은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정보의 희소성과 가치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설사 좋은 정보만 골라낸다 해도 개인이 소화하지 못할 만큼 많다는 것도 문제다.

 

인터넷이 정보의 보고라는 사실은 자주 강조되지만 그 정보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다. 웹에는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게 되는 하이퍼링크(hyperlink) 기능이 있어서 전쟁으로 죽어가는 아이의 이야기에서 포르노 사이트로의 이동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정 정보의 검색이 아닌 막연한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유는 하이퍼링크를 통해 수많은 가능성들이 제시되고 나는 그 순간 나의 관심을 끄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움이 되는 정보보다 내가 좋아하는 정보를 축적하게 될 가능성이 더 많다.

 

둘째, 인터넷이 모든 정치적, 물리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를 반박하는 견해는 인터넷 상에서 좋은 정보와 유해한 정보가 뒤섞여 교환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할 수 있다. 지금 인터넷 관련 기술의 개발에서 컴퓨터 보안 및 유해 정보의 차단이 중요한 이슈가 되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인터넷 상에서 오가는 정보들에 대한 통제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해킹, 바이러스 유포, 스팸메일의 발송, 불법 복제 등과 같은 인터넷 상의 범죄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통제 수단의 개발이 불가피한데, 이러한 기술들은 언제든지 다른 정보들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 무비판적 수용은 금물

» 인터넷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파넷(ARPANET) 지도.
이와 관련하여 인터넷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관리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되어야 한다. 전세계의 인터넷 트래픽을 관리하는 컴퓨터들인 루트 서버(Root Server)를 관리하는 ICANN이란 단체는 사실상 미국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다. 물론 미국 정부가 인터넷 상의 모든 정보들을 감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인터넷이 완전한 자유의 공간이라는 인터넷 낭만주의자들의 생각은 착각이다.

 

셋째, 풍부한 정보의 보고라는 점과 더불어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도 인터넷의 특징으로 자주 거론된다. 이전의 미디어들은 정보의 제공자와 수용자의 관계가 일방적이었고, 수용자는 채널을 돌리거나 신문을 바꾸는 선택의 권한만을 가졌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정보의 공급자가 될 수 있다. 개인 홈페이지는 물론, 댓글 달기나 토론게시판 등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기존의 모든 미디어가 인터넷에서 통합되면서 쌍방향 의사소통의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모두가 말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의 말이 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접속자가 많은 홈페이지는 따로 있고, 내가 쓴 댓글을 남들이 보길 원한다면 제목도 색다르게 붙여야 한다. 인터넷 상의 토론이 찬반이 명백히 갈리거나 감정적인 주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차분하고 논리적인 토론보다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논쟁으로 치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사소통이 쉬워질수록 소통의 질은 오히려 떨어져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최고인 우리나라에서 사실왜곡과 여론호도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비합리적인 보수진보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쌍방향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민주적 의사소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 손화철/서울대 강사
인터넷 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과 그 변화무쌍한 발전의 모든 측면을 다 열거하고 그것이 초래한 변화들과 혜택을 일일이 논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노릇이다. 하물며 그 다양한 측면들 중 위에서 언급한 몇몇 문제점들이 있다고 해서 이미 우리 생활의 필수적인 일부가 된 인터넷의 사용을 중단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을 필수적인 일부로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고, 인터넷이 제공하는 기회만을 강조하면서 그 기회에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인터넷으로 인해 촉발된 수많은 가능성들이 혹시 우리의 반성적 능력을 저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술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되짚어 반추할 여유를 잃고 막연한 기술발전의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술은 인간의 자율성을 넘어선다. 더욱 발전된 미래의 기술사회를 살아가게 될 3세 어린이의 인터넷 사용과 청소년의 인터넷 중독이 우려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화철/서울대 강사 phte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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