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속 사상] 축음기가 음악 듣는 데 쓰일 줄 몰랐던 에디슨

 

문서 구술용도를 기대했던 발명가는 실망했지만
축음기의 살아남은 기능은 기술개발자가 예측하지 못했던 ‘소리로서 즐거움’
개발자가 원하는 대로만 기술이 사용되지 않기에
기술연구·개발에 일반인의 참여가 중요해
한겨레
» 특정 기술에 대한 시장규모를 예측할 때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기술개발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 기술을 사용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다. 하지만 이 기대는 종종 충족되지 않는다.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가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든지 문서를 구술시키는 용도로 사용될 것이라 기대했으나 현재 축음기의 중요한 용도는 기술개발자가 예측하지 못한 음악재생이다.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29) 현대 기술연구와 사회적 합의
 

기술연구와 사회적 합의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은 기술연구와 사회적 ‘필요’일 것이다. 현대 기술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단지 100년 전과만 비교해도 놀라울 정도로 비약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과거에는 ‘꿈’에 지나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전신과 철도로 무장하고 자신만만하게 전 세계를 누볐던 19세기 유럽 열강의 시민들조차 현재 우리가 걸어가면서 조그만 금속장치에 대고 중얼거리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마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을 현실로 바꾸어 놓는 기술발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공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술연구는 개인적 필요와 사회적 수요에 부응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신기술은 개인·사회적 수요의 결과

신기술에 대한 개인적 필요는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취향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개인적 필요를 적절하게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발명가와 기술자들이 자유롭게 개인의 신기술에 대한 욕망을 파악하여 새로운 인공물로 제작해내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다양한 색깔을 동시에 사용하며 문서를 작성해야 하는 필요성에 주목하고 다색볼펜을 만든 사람처럼 소위 ‘아이디어 상품’을 만들어 큰돈을 번 사람들의 ‘전설’에 우리는 어느덧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신기술 연구가 이런 개인적 필요만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매우 큰 규모의 연구자금이 특정 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이러한 투자가 성공적인 신기술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지 여부가 국가의 미래 경쟁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 현대 기술연구의 배경적 상황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국가가 신기술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미리 예측하고 그 예측에 적절히 대응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처럼 사회적 수요에 대비하는 기술연구는 전문적인 시식과 식견이 필요하기에 기술 전문가와 행정 전문가가 협의해서 결정할 일처럼 보인다.




기술 ‘전문가주의’가 갖는 위험

기술개발 과정은 관련 전문가만이 참여해야 한다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합의를 기술 개발에 도입하는 것은 참여민주주의를 지나치게 확대 적용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개인의 취향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은 어딘지 비효율적이고 전체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다. 또한 국가의 기술적 미래와 같은 복잡한 사안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은 어딘지 아마추어적이고 무책임해 보일 수 있다. 실제로 필자가 참여했던 신기술에 대한 여러 형태의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기술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 DDT 항공방제 모습. 살충제 DDT도 경이로운 신물질에서 심각한 환경오염물질로 순식간에 지위가 강등당했다.

하지만 기술연구에 대한 이런 전문가주의는 결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현대 기술연구에 필수적인 ‘전문성’을 기술 연구자만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대 기술연구의 특징을 고려할 때 사회적 합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나노기술 연구자는 분명 특정 물질을 나노 수준에서 어떻게 처리하면 우리가 원하는 특성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지식만으로 성공적인 기술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 연구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잠재적인 이득이 잠재적인 손해보다 크다는 분석이 나와야 한다. 물론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현대 기술연구는 경제성 분석이나 미래사회 기술수요 예측 등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기술에 대한 시장 규모를 예측할 때 암묵적으로 가정되는 것은 사람들이 기술개발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 기술을 사용한다는 낙관적 기대다. 이 기대는 종종 충족되지 않는다.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하고서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든지 문서를 구술시키는 용도로 사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처음 축음기가 음악을 재생하는 기구로 사용되기 시작할 때 에디슨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축음기의 중요한 용도는 기술개발자가 예측하지 못했던 소리로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전화기의 개발자도 처음에는 친구와 수다를 떠는 일과 같은 하찮은 일에 전화처럼 첨단기기가 사용되는 데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기술 사용자는 기술의 용도만이 아니라 이후의 기술방향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리즈의 다른 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되었다.

 

축음기와 전화기의 경우는 기술의 예기치 못한 용도가 그래도 ‘생산적인’ 다른 용도로 전환된 것에 불과하지만 기술연구의 결과가 항상 이렇게 행복한 결말을 갖는 것은 아니다. 플라스틱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인류는 플라스틱의 내구성에 찬탄을 보냈다. 이 놀라운 문명의 이기가 가진 ‘썩지 않는’ 성질이 미래 환경문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사용이 금지된 DDT라는 살충제도 경이로운 신물질에서 혐오물질로 순식간에 지위가 강등당한 현대 기술연구의 대표적 산물이다. 처음 DDT가 개발되었을 때 다른 살충제에 비해 살충효과가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장점으로 생각되었다. DDT를 한 번 뿌린 벽에는 1년 후에도 모기가 앉으면 죽어서 떨어졌으니 이 기술에 사람들이 왜 그토록 환호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DDT가 한 번도 직접 사용된 적이 없는 남극의 외딴 지역에서도 이 기적의 물질이 검출되어 생명체의 내분비계를 교란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기술연구 과정에는 기술 자체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기술에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고려와 잠재적인 부작용에 대한 명시적 고려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는 기술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분석이 요구되고 광범위한 의견조사 결과가 참조되어야 한다. 현대 기술연구 과정에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전문성과 함께 자신의 삶에 신기술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신기술의 발전방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반인의 역할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을 무시하고 단순한 기술적 전문성과 행정적 편리함만을 추구하다보면 방사능 물질 폐기장 건설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겪은 예기치 못한 사회적 비용의 상승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기술 개발 과정마다 떠안게 될 수도 있다.

 

사회적 합의는 선택 아닌 ‘필수’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에서는 생명공학 연구를 중심으로 그것의 윤리적, 법적, 사회적 영향을 살펴보고 바람직한 기술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ELSI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또한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국가가 지원하는 신기술에 대해 2003년부터 기술영향평가도 실시하고 있다. 현재까지 나노기술과 RFID 기술, 줄기세포 기술처럼 미래의 주요 기술로 주목받고 있으면서 사회문화적 영향이 클 기술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기술영향평가는 신기술 관련 전문가나 시민단체와 같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집단의 의견만이 반영될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달 유비쿼터스 기술을 대상으로 실시된 시민공개포럼은 큰 의의를 갖는다. 시민합의회의 형식으로 전개된 이 포럼은 앞으로 일반 시민의 목소리를 보다 대표성 있게 담아낼 수 있는 방식으로 확대 실시될 필요가 있다.

 

기술개발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는 기술이 가진 잠재적 혜택만이 부각되고 불확실한 위험은 축소되거나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기술이 가져올 위험이 불확실할 때조차 기술 연구자들은 사회적 수준에서 그 위험에 대해 설명하고 그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술 개발을 계속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는 반드시 의사로부터 가능한 부작용에 대한 설명과 치료가 가져다 줄 수 있는 효과에 대한 설명을 동시에 들은 후 치료를 받을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이는 자신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치료에 대해 우리가 충분한 설명을 들을 권리와 그 설명에 입각하여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신기술 중에서 국가적 규모에서 상당한 자원을 투자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기술이라면 그 파급효과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병원의 치료와 마찬가지 도덕적 근거에서 우리 국민 모두는 자신의 미래 삶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차원의 기술연구에 대해 충분하고 공정한 설명을 듣고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과정을 통해 기술개발 여부에 대해 합의나 최소한의 공감대를 확보할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현재 개발 중인 기술이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주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권리는 진지하게 떠맡아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기술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증대될 수록 현대 기술연구에서 사회적 합의과정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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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열린 전자사회와 새로운 적들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은 ‘양날의 칼’
내가 타자의 정보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다는 건
타자도 내 정보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단 뜻이므로
한겨레
» 유비쿼터스란 말은 ‘언제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시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접속해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고 사용할 수 있음을 지칭한 것이다. 사진은 달리는 차 안에서 초고속 인터넷을 쓸 수 있는 무선 휴대인터넷 와이브로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한겨레〉자료사진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유비쿼터스 기술의 양면성
 

1988년 미국 제록스사 팰로알토(Palo Alto)연구소에서 일하던 마크 와이저(Mark Weiser) 박사는 미래 정보사회의 특성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주장을 하였다. “사용자가 네트워크나 컴퓨터를 의식하지 않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음 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정보통신 환경”, 소위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 환경”이 미래 정보사회를 규정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시는 핸드폰과 같은 정보통신 기기조차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PC나 인터넷 사용도 널리 보편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임을 생각한다면, 와이저의 주장은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었고 실현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의 말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18년전 와이저 박사의 놀라운 예견

핸드폰을 사용하여 원격으로 자신의 집에 켜있는 불을 끄거나 실내 공기를 정화하고 온도를 조절하는 일, GPS를 통한 교통관제 서비스에서처럼 장소나 사물 또는 사람에 센서 혹은 태그(일종의 전자 바코드)를 부착시켜 대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추적?파악하고 정보화하는 일, 옷이나 안경 등에 부착된 소형 바이오-컴퓨터를 통해 나의 건강 상태를 무선 네트워킹으로 병원에 수시로 알리고 원격으로 진료를 받는 일, 이동하면서 개인 정보기기로 음성·영상·데이터의 융합 정보를 받아 보거나 은행 업무를 보고 쇼핑을 하는 일, 생산 단계에서부터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농산물이나 축산물의 이동 및 관리 과정을 모니터링 하는 일 등등. 우리 생활 속에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이 적용될 영역은 이처럼 무궁무진하다.

 

유비쿼터스란 말은 원래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마크 와이저가 이를 정보사회에 적용한 것인데,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시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고 사용할 수 있음을 지칭한 것이다. 이러한 환경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하나는 우리 주변의 모든 대상들에 정보 처리 능력을 갖춘 소형화된 컴퓨터 또는 지능적인 센서나 태그를 부착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기술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든 사물에 전자태그를 부착하여 사물의 정보 및 주변 상황정보를 감지하고 인식하는데 필요한 기술이다. 사물에 상황 인지능력을 부여하는 것인 만큼 사물에 부착시킬 컴퓨터, 전자태그, 센서 등을 소형화하고 지능화하는 것이 기술적 관건이 된다. 다른 하나는 이들 상호 간에 정보 교환이 가능하도록 이들은 물론 사이버 공간까지 연결한 유기적인 통합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모바일 무선통신망, 초고속인터넷 등이 최근 개발 중에 있는데, 다양한 네트워크들 간의 통합이 관건이다.




기술은 ‘배경’으로 사라지게 돼

이러한 기반 기술들로 인해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기존의 정보화 작업이 컴퓨터 속의 가상공간에서 전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유비쿼터스 컴퓨팅 작업은 현실세계와 가상공간이 결합한 공간 곧 확장된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기존 정보화는 현실세계를 컴퓨터 내의 가상공간 안에 재현하고 현실세계는 배제한 채 그 공간 안에서만 필요한 정보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두 공간 사이의 단절을 오히려 강화시켰다. 그러나 유비쿼터스 컴퓨팅 작업은 사이버공간의 중요한 특성과 작동원리를 현실세계의 물리적 공간에 확대?적용하는 방식으로 두 공간의 융합을 추구함으로써 두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는 정보사회의 발전과 관련하여 하나의 획기적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현실세계 속에 남아 컴퓨터 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 대상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한 대상들의 경우 우리가 직접 조사하기 전에는 그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잘못되고 있으며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 그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또한 인터넷과 같은 사이버공간에 지금처럼 접속하는 방식도 때와 장소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항상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것도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일이다. 따라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가 디지털 정보의 흐름을 매개로 통합하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은 정보화의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분명히 필요하다.

 

둘째, 기술이 사물 속에 은닉(혹은 은폐)된다. 컴퓨터 칩이나 센서들, 대부분의 통신 장치들은 소형화되어 사물들 속에 보이지 않게 내재한다. 그리고 사물 속에 심어진 장치들은 스스로 주위에 존재하는 다른 사물의 정체성을 식별하고, 주변 환경 및 사물들의 변화를 지각·감시·추적한다. 사물이 지능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얻은 정보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컴퓨터나 네트워크와 같은 정보 장치들에 의식적으로 접근하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이러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수많은 컴퓨터들이 한 사람을 위해 움직이는 꼴이다. 이는 인간과 컴퓨터의 관계에서 컴퓨터 중심의 환경이 사용자인 인간 중심의 환경으로 바뀌는 중요한 변화를 예고한다. 한편 같은 이유에서 역으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정보장치들에 의해 감시와 추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새로운 환경에서 “기술은 배경으로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거나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확산되는 것이다.

 

셋째, 컴퓨터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물과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어 있다. 사물 속에 내재된 컴퓨터들끼리 무선 네트워크로 연결돼 서로 정보를 주고받음으로써 사물들 간에 자율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나아가 정보-사람-사물-기기를 연결하는 유기적 통합 네트워크가 구축된다면 이들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연결은 사실상 디지털 기술이 지니는 중요한 특성인 융합가능성, 곧 디지털 컨버전스(convergence)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음성·영상·문자와 같은 정보 데이터들의 통합, 방송·통신·인터넷과 같은 네트워크들의 통합, 컴퓨터·통신·정보가전과 같은 정보기기들의 통합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이 지닌 이와 같은 특징들을 고려해 볼 때,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은 미래의 인간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 분명하다. 디지털 네트워크 체계를 현실세계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이므로, 가령 시공간적 제약의 극복이라든가 정보에의 무한한 접근성 그리고 의사소통의 용이성과 같은 가상세계만의 독특한 장점들을 현실세계에서도 그대로 구현하여 누리는 새로운 삶의 양식, 곧 디지털 라이프(digital life)가 등장할 것이다.

 

정보권력 빅브러더 사회 올 수도

우리가 많이 들어 왔던 스마트홈(smart home), 유비쿼터스-건강(u-healthcare), 유비쿼터스-도시(u-city) 등이 그 좋은 예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생활의 편의성을 엄청나게 증대시킨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용자 개인의 상황에 부합하는 맞춤형 서비스를 중심으로 편의성에서의 혁명이 예상된다.

 

그러나 유비쿼터스 기술의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 뒤에는, 우리가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부정적인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전자감시사회의 출현이다. 은닉된 기술과 무선 네트워크의 보편화로 개인이 보호받지 못하고 개인정보가 심각하게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 개인은 언제 어느 곳에 있든 고성능 CCTV, GPS, 무선전화위치 감응기 등에 의해 자신의 모든 행적이 낱낱이 기록되고 분석되는 완벽한 감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재 영국 런던의 경우 15만대의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한 사람이 하루 평균 300번 정도 카메라에 노출되고 있음을 볼 때, 이 보다 훨씬 정보노출이 심한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에서 그 감시능력이 얼마 만큼일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또한 막강한 정보 권력의 등장도 예상된다. 첨단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국가나 어떤 조직이 축적과 유통이 용이한 디지털 정보들을 장악함으로써 개인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교묘한 방식으로 실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수의 빅브라더들(Big Brothers)이 통치하는 전자 파놉티콘 사회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중원/서울시립대 교수·과학철학
이런 심각한 우려가 아니더라도 개인 프라이버시의 침해 및 개인 정보의 악용 문제가 시도 때도 없이 제기될 것이다. 전자체계에 대한 인간의 종속이 심화되고 그에 따른 위험도 증가할 것이다. 정보 및 네트워크 시스템에 대한 보안 문제가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한다면, 유비쿼터스 사회는 편리성이 증대하는 만큼 재앙도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내가 타자에 관한 모든 정보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역으로 타자가 나에 관한 모든 정보에 무한히 접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면에서 두 상황은 대칭적이다. 이는 유비쿼터스 사회에서 공유와 감시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음을 말해 준다.

 

이중원/서울시립대 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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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은나노세탁기가 때를 잘 빼는 비법

 

‘머리카락 만분의 1’ 최소단위 물질 ‘나노’
입자 작아지면 물질의 색깔·속성까지 바뀌어
때 덜타는 유리·안 지워지는 페인트 등 이미 친숙
하지만 너무 작아 위험 일으킬 우려도 크다
한겨레
» 원자 수준 크기의 물질을 다루는 나노 세계를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다면 공업 생산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생긴다. 1993년 IBM(아이비엠)의 과학자들이 구리 표면 위에 철 원자를 하나씩 배열해서 만들어낸 나노 크기의 스타디움 모양. 나노 수준에서의 물질 제어가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27) 나노기술의 세계
 

나노(nano)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난장이를 뜻하는 나노스(nanos)에서 왔다고 한다. 아주 작은 길이 단위로 적절한 유래라고 생각된다. 1 나노미터는 10억분의 1 미터이다. 이렇게 말해서는 엄청 작은 단위라는 것은 알겠는데 느낌이 잘 안 올 수 있다. 그래서 나노 연구자들이 흔히 드는 예가 머리카락과의 비교이다. 가는 머리카락이 대개 10 마이크로미터 정도니까 1 나노미터에 비하면 가는 머리카락도 만 배나 더 두껍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원자(atom)이라는 말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궁극단위를 의미했고 실제로 꽤 오랫동안 원자는 물질의 최소단위로 여겨졌다. 지금도 현실적으로 핵분열이나 핵융합이 아니고서는 원자를 쪼개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1 나노미터는 원자 서너 개의 크기에 해당되니 나노의 세계는 안정적인 물질의 최소단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엄청나게 작은 세계다.

 

그리스어 ‘난쟁이’에서 유래

현재 대다수의 산업 선진국은 이렇게 작은 나노 영역을 과학적으로 탐구하여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고자 자국의 연구자원의 상당 부분을 투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이미 정부는 2002년에 ‘나노기술개발촉진법’을 제정하여 나노기술에 매년 상당한 연구비를 투여하고 있고 민간 기업의 투자도 활발하다. 도대체 나노의 세계에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 기술개발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일까?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재 우리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물품의 제조방식은 조각 작품을 만드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충분한 크기의 물질을 잘 깎아서 원하는 조각만 골라내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 조각처럼 큰 물건의 경우만이 아니라 색종이를 잘 오려서 토끼를 만들거나 반도체 웨이퍼를 잘 녹여내어 반도체 칩을 만드는 과정 모두에 작용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도 원하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블럭쌓기를 떠올려 보라. 만약 우리가 블럭처럼 적당한 단위의 물질을 개별적으로 조립할 수 있다면 이 방식으로 원하는 형태의 원하는 기능을 가진 물질을 만드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런 일을 나노 수준에서 원자들을 가지고 할 수 있다면 물질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단위 물질을 조립하는 과정에는 깎아내는 과정과 달리 버리는 부분이 거의 없으니 자원낭비와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 있다. 또한 원자를 조립하는 일은 원칙적으로는 매우 적은 에너지만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에너지 또한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나노의 세게를 이해하고 잘 조작할 수 있다면 현재 공업 생산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1959년 한 강연에서 유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했다는 “밑바닥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는 말이 자주 인용된다. 나노 세계(밑바닥)에는 우리가 아직 탐험하지 않았던 충분한 가능성과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가능한 재료의 특성과 공간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나노기술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기존 기술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설명해주지만 실제로 나노 기술에 왜 그토록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현재 나노기술의 연구의 대부분은 여전히 블럭쌓기의 방식보다는 깎아만들기의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각국이 나노기술에 열광하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다른 데서 즉, 물질이 특정 크기 이하가 되면 평소와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노란 색을 띄는 금은 사금이라고 하는 모래 알갱이 수준에서도 여전히 노란색을 띤다. 그래서 아예 황금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20 나노미터 정도가 되면 빨간 색이 된다. 금이라는 물질은 분명히 동일한 데 단순히 입자 크기가 작아진다고 해서 색깔과 같은 친숙한 속성이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색깔은 물질 고유의 속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갈릴레오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현대 과학의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빨간 장미는 여러 파장의 빛이 섞인 백색광에서 정확히 빨간 색만 제외하고는 장미가 모두 흡수하기 때문에 빨갛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빨간 장미는 빨간 속성 빼고 다른 모든 색깔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빨갛다는 다소 역설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색깔의 이런 특징은 질량과 같은 물리적 속성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갈릴레오의 영향을 받은 근대 경험주의 철학자 로크는 물질이 가진 속성을 질량처럼 물질 본유적인 성질과 색깔처럼 우리 지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나눌 정도였다.

 

하지만 나노 영역에서 달라지는 것은 색깔만이 아니다. 로크조차 물질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인정했을 화학적, 전자기적 속성도 달라지는 것이다. 화학적 속성이 달라지는 이유는 동일한 물질이라도 잘게 쪼갤수록 표면적이 커진다는 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화학작용이 보다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티타니아 입자 크기가 20 나노미터 정도 되면 갑자기 약한 빛 아래서도 샬균력, 세척력, 김서림 방지효과 등의 특성을 나타낸다. 우리에게는 나노기술을 친숙하게 만든 은나노 세탁기라든가 잘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 ‘스스로 청소하는(때가 잘 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리창 등은 모두 이처럼 적당한 크기 이하에서 일상적인 물질이 특별한 성질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이용한 것이다.

 

일상-양자역활 세계의 중간계

» 2001년 일본 오사카 대학 연구팀이 만든 나노 개. 구리 표면에 원자를 하나씩 입혀서 만든 일종의 ‘작품’이다.
비슷한 이유로 약품을 나노입자로 만들면 체내에서 흡수되는 정도나 약효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게다가 코발트와 같은 나노 입자를 적당히 규칙적으로 배열한 후 강한 자성으로 조정하면 하나하나의 입자를 기억장소로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적당한 나노 구조물을 차세대 기억장치로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물질의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여겨지는 물리화학적 속성조차 실은 길이 척도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나노기술자들은 이런 현상을 이용하여 각종 유용한 소자나 물질을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나노의 세계가 우리에게는 익숙한 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은 실은 충분히 에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세계를 기술하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우리의 일상세계를 기술하는 고전역학이고 다른 하나는 극히 작은 소립자의 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이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양자역학이 이 모든 세계를 모두 다 기술하는 이론이고 고전역학은 일상세계에서 양자역학을 근사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로 일상세계에서는 양자역학적 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각자는 단단한 벽을 상처하나 없이 지나 순식간에 다른 방으로 이동할 수 있는 양자역학적 확률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일상세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양자역학적 효과는 길이 척도가 작아질수록 점점 더 커지다가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경우처럼 삶과 죽음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나노의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 직관이 잘 통용되는 세계와 별의별 희한한 일이 일어나는 양자역학의 세계 중간쯤에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상세계와는 달리 기묘한 양자역학적 효과가 상당히 강하게 나타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 효과를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과학소설에 등장하듯 나노기계를 이용하여 뇌 세포 사이의 시냅스 연결을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특정 정신적 능력을 강화하거나 몸속을 돌아다니며 인체 곳곳의 문제를 해결하는 나노 의료로봇의 혜택을 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현재 기술 수준으로 볼 때 이런 일들은 설사 장차 가능하더라도 앞으로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처럼 나노기술의 장밋빛 전망은 궁극적으로는 나노 물질의 작은 크기에서 나온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나노기술의 위험성도 역시 나노물질의 작은 크기에서 나온다.

 

몸의 여과장치마저 그대로 통과

»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우리 인류는 나노 수준의 입자가 대량으로 떠도는 환경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우리의 코 점막이나 폐의 여과장치 등은 나노입자보다 천배나 더 큰 마이크로 입자를 걸러내기에 적당하게 발달해왔다. 그러므로 나노물질은 우리 몸의 여과장치를 그대로 통과하여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쥐 폐 조직에 주입된 탄소나노튜브가 폐 조직을 손상시킨 실험결과가 있고 입자의 크기를 달리해서 쥐에게 흡입시켰을 때 오직 나노수준의 미세한 입자만이 치명적이었다는 실험결과도 있다. 게다가 나노소자는 워낙 작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물류에 부착하여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의 신상정보가 광범위하게 수집되는 조지 오웰적 비젼을 실현시키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신기술에 대한 인류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볼 때 나노기술이 인류에게 아무런 위험도 제기하지 않으면서 혜택만 가져다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볼테르 소설에 등장하는 팽글로스 교수만큼이나 순진한 태도이다. 우리도 깡디드가 그랬던 것처럼 나노기술에 대해 균형있는 관점을 찾아내야 한다.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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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로봇’이 선거권 달라면 어쩌나

 

인간과 감정 통하는 로봇 ‘휴머노이드’ 진화중 반대로 로봇 닮은 인간 ‘사이보그’ 연구도 활발
뇌까지 대체된다면 누가 진짜 인간일까 갈 길 멀지만 ‘인간-기계’ 공존시대 대비해야
한겨레

기술 속 사상/(26)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2004년에 개봉된 윌 스미스 주연의 <아이 로봇 i, Robot> 속으로 들어가보자. 2035년 어느 날, 시카고 경찰 스프너(윌 스미스 분)는 로봇 모델 NS-5를 창조한 래닝 박사의 살인용의자로 ‘써니’라 불리는 로봇을 체포한다. 취조실에 앉아있는 써니 앞에서 스프너는 상관에게 ‘윙크’를 하며 들어온다. 그 광경을 신기하게 지켜본 써니는 그 윙크가 무엇을 의미하냐고 다그치지만 스프너는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린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로봇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물론, 영화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무안하게도 써니가 감정을 진화시킨 최초의 로봇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스프너의 목숨을 살린 것은 써니가 배운 그 윙크였다.

 

윌 스미스에게 윙크하던 ‘써니’

하지만 감정이라니! 그것은 인류의 지성사에서 거의 언제나 이성의 적이지 않았던가? 실제로, 불과 20년 전만 해도 감정이 인공지능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인간의 독특성을 인지능력(전통적 의미에서 이성)에서 찾았으며 그 능력은 감정과 거의 언제나 길항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전제했다. “이성을 잃었다”는 그래서 나온 부정적 표현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잠시 짐승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정을 잃었다”는 표현은 쓰지 않으며 게다가 감정을 잃었다고 해서 짐승(혹은 로봇) 취급을 당하지도 않는다. 감정은 동물의 본성을 설명하는 키워드일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감정에 대한 인지과학적 연구들로 인해 기존의 관념들이 도전을 받고 있다. 예컨대 감정을 담당하는 안와전두엽 피질에 손상이 생기면 이성적 판단도 함께 흐려진다는 결과가 보고되는 등, ‘이성 대 감정’이라는 전통적 이분법이 재고되기 시작했으며, 감정 교류가 가능한 ‘사회 로봇(sociable robot)’을 만드는 일이 인공지능 로봇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아이 로봇>외에도 최근의 <에이 아이>, <바이센테니얼 맨>, 그리고 고전적인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 영화들은 이미 감정과 의식을 가진 로봇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영화 속에서 로봇은 우리 인간과 감정적 교감을 나누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여느 인간보다 더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이다.

 

현실의 로봇은 어떤가? 우리는 혼다의 아시모와 KAIST의 휴보가 인간과 똑같은 운동능력을 가지도록 진화한다 해도 여전히 그것은 운동신경이 발달한 기계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것을 구현하는 과제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터넷 채팅을 통해 재밌는 대화를 나눈 상대방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고 하면 우리는 깜짝 놀란다. 즉 의사소통, 혹은 감정교감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대상에게 단지 ‘기계’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로봇 연구의 메카로 알려져 있는 MIT 미디어랩의 몇몇 실험실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감정을 ‘읽고’ 그에 맞게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로봇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가령 아이들의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는 로봇이 있다. 이 로봇은 아이에게 문제를 내주고 풀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아이가 계속 틀리거나 막혀도 “땡! 다시 시도해 보세요.”라고만 하지 않는다. 대신 “나도 이런 문제가 나오면 너무 화가 나. 잠시 만화 좀 보다가 다시 해볼까?”라고 대답한다. 그 로봇에게는 아이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어서 그가 화가 났는지, 긴장하고 있는지, 지겨워하는지, 흥미로워하는지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 로봇의 궁극적 목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자폐증 환자를 돕는 것이다.

 

로봇이 부적절한 대우 느낄 수도

» 영화 <아이로봇>에서 스프너는 써니에게 윙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로봇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아냥댄다. 감정은 인간과 로봇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와도 같다.
이와 비슷한 로봇인 ‘키즈멧(Kismet)’은 상대방의 얼굴 표정뿐만 아니라, 시선, 몸동작, 말을 분석하여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또한 ‘리플리(repley)’라는 로봇은 바이센테니얼 맨의 농담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렇게 로봇 연구의 뒤에는 전자 및 기계공학뿐만 아니라 언어학, 발달심리학, 인지심리학, 컴퓨터과학, 동물행동학 등이 매우 중요한 이론적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로봇이 진정으로 감정을 얻게 되는 날은 동물, 인간, 기계가 한 직선 위에 올려지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로봇은 자신이 (부)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까지 갖게 될지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심각하게 묻는 로봇이 생겨날 수도 있다. 똑같은 모델로 양산되었다는 사실 앞에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로봇도 있을 것이다. <에이 아이>의 데이빗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영화 <애니 매트릭스>에서처럼 로봇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인간과의 공존을 희망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들에게 선거권을 줘야 하는가? 그들을 위한 노동법을 만들어줘야 하는가?

 

혹자는 이런 질문들이 SF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불과 20-30년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물의 권리’라는 단어에 대해 황당함을 느꼈는지를 떠올려 보자. 동물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이 쌓이면서 우리는 이제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느낌이 우리와 교감하는 동물에 대해서만 작동하리라는 법은 없다. 우리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로봇이 생기면 우리는 틀림없이 훨씬 더 심각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 대화가 불가능한 동물들보다 대화가 가능한 로봇들이 우리의 정서에 더 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사이보그엔 정체성 물음 뒤따라

한편 인간을 닮은 로봇, 즉 ‘휴머노이드(humanoid)’를 만들려는 인간의 꿈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또 다른 욕망이 있다. 그것은 로봇을 닮은 인간, 즉 ‘사이보그(cyborg)’가 되려는 욕망이다. 사이보그는 짧은 유통기한을 가진 신체의 여러 부분들을 그렇지 않은 기계 및 전자 장치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생긴 산물이다.

 

몇 달 전 저명한 과학 전문지 <네이처>는 뇌에 칩을 이식한 20대 척수마비 환자(매튜 네이글)의 사진을 표지로 올렸다. 그는 ‘뇌-컴퓨터 연결장치(BCI)’를 개발하는 한 회사로부터 ‘브레인케이트’라는 칩을 운동 피질에 이식받아 자신의 생각을 전자 신호로 다른 컴퓨터에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전달된 신호를 통해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도 뭔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이 실험은 몇 년 전 원숭이에게 신경칩을 심어 원숭이의 생각만으로도 로봇 팔을 움직이게 하는 실험보다 한 단계 진보한 것이었다.

 

사실, 사이보그는 주로 손, 팔, 다리, 심장, 망막 등 이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신체 기관들에 대해 인공 보철물을 만드는 식으로 진화해왔다. 가령, 심장에 문제가 많은 사람에게 튼튼하고 수명이 긴 인공 심장을 이식함으로써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매튜의 사례에서처럼 뇌의 부분에 직접적으로 인공물을 삽입하는 사이보그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이다.

 

뇌에 신경칩을 이식받은 매튜는 아직은 매튜이다. 즉, 그 칩은 매튜의 두뇌가 하는 일을 돕는 보조 장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 수천, 수만 개의 그런 신경칩이 뇌 속에 이식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뇌의 생체조직이 오히려 그 칩들의 보조장치가 되는 때가 온다고 해보자. 그 때도 우리는 그 사이보그를 매튜라고 불러야 하는가? 인간이 사이보그가 되려는 욕망 뒤에는 이렇게 자기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뒤따른다.

 

사이보그가 보편화되는 시대가 오면 인류는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이보그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기계의 하이브리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를 문자 그대로 기계부품처럼 취급하게 되면 온갖 형태의 하이브리드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모든 신체를 중성화해 성별을 없앤 사이보그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모두 기계로 대체되지 않는 이상 수십 만 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우리의 뇌와 마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 장대익/미국 터프츠대 인지연구소 방문연구
SF에 등장하는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까지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언젠가는 그들과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체세포 복제술과 줄기세포 연구 등은 불과 10년 전만해도 소수의 생명공학자들에게만 쟁점이 되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명공학에 대한 사회윤리적 쟁점들이 대학 입시 문제에 단골이 되었을 정도로 당면한 과제가 되었다. 휴머노이드와 사이보그에 대한 연구도 이와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바로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로봇 윤리학을 학교에서 배워야만 할지도 모른다. 옆 자리의 사이보그와 함께?

 

장대익/미국 터프츠대 인지연구소 방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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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뇌까지 갈아끼울 수 있다면?

한겨레
» 중합효소 연쇄반응을 설명하는 그림.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달은 이제 생물-무생물의 기존 개념조차 허물어뜨리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 삶의 한계를 돌파하는 가능성을 열어줄 미래 신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생명공학의 길은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으로 상징되는 디스토피아 세계로도 열려 있다.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25) 생명공학의 비젼


 

생명공학은 흔히 미래의 신기술로 표상된다. 인류의 수명이 비약적으로 연장되고 모든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을 모르고 살 수 있는 유토피아적 세계가 생명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도래하리라는 장밋빛 전망이 널리 유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 부풀려진 전망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사람들이나 생명공학에서 미래 산업동력을 찾으려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정책입안자에게는 생명공학의 이러한 비전이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생명공학은 다른 종류의 비젼도 가지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무명의 괴물이 상징하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그것이다. 통상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인간이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함부로 생명현상에 개입하다가는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이자 생명공학의 위험성에 대한 생생한 표식으로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기에 최근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맞춤아기’나 ‘수정란 줄기세포’ 등은 자연스럽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의 이런 상징성과 연관되곤 한다.

 

오래된 첨단 바이오식품, 된장

이렇게 상반된 이미지가 생명공학과 관련되어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지만 실제로 생명공학은 이보다 훨씬 일상적인 수준에서 우리 곁에 있어왔던 기술이다. 생명공학을 생명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목적에 맞게 생명체를 변형하거나 이용하는 기술로 이해할 때 생명공학은 실은 매우 오래된 기술이다. 온갖 종류의 미생물을 사용하여 원래 재료가 가지고 있지 못한 특성, 특히 우리 몸에 이로운 특성을 갖도록 하는 발효기술은 이렇게 ‘오래된’ 생명공학 기술의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된장이나 맥주는 좀 더 색다르게 들리는 이종장기 이식이나 유전자 은행만큼이나 생명공학의 대표적인 생산품인 것이다.

 

유토피아-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란 전망 사이

생명공학은 이미 친숙해 된장·맥주가 대표적

문제는 예측불가능한 복잡기술융합의 ‘산물’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 묻게 될 것

최첨단의 생명공학 담론에 익숙해진 우리가 된장의 발효기술을 생명공학 기술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효기술이나 누에를 이용한 양잠기술 등은 생명공학의 근간이 되는 생물학의 발전이나 생명공학적 발상을 가능하게 한 이론틀의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 현대 생물학의 형성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파스퇴르나 코흐 모두가 포도주의 발효과정이나 맥주의 발효과정 그리고 누에 전염병이나 소의 탄저병에 대한 연구에서 자신들의 혁신적인 연구를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은 미생물이 눈에 보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그 중 어떤 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조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이후 생명공학의 발전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패턴이었다.

 

이와 더불어 현대 생명공학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던 생각은 생명이 우리에게 친숙한 다른 물질과 질적으로 무척 다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원리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체는 무생물과 달리 ‘생기(vitality)’라는 비물질적인 생명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생명체와 무생물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법칙과 설명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했던 사건은 그 전까지 생명체와 무생물의 구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여겨지던 몇 가지 결정적 증거들이 경험적으로 반박된 일이다. 대표적인 예가 생명체 내에서만 합성이 된다고(그러므로 생명체에 고유한 ‘생기’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성될 수 있는) 알려졌던 몇 가지 유기화합물이 실제로는 생명체 밖에서도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1828년 프레드리히 뵐러가 무기물인 사이안산암모늄으로부터 유기물인 요소를 합성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이 합성을 계기로 전통적으로 생명체만이 생성할 수 있는 유기물질을 다루는 분야로 정의되었던 유기화학이 탄소-수소 결합물의 화학으로 다시 정의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도 이처럼 생명체와 무생물 사이의 원리적 구분이 정당성을 잃어가던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물질적인 생명의 힘 ‘생기’ 작용

20세기 이후 샘명공학은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발전이 결합되면서 비약적인 도약의 시기를 갖는다. 처음에는 박테리아처럼 비교적 단순한 유전과정을 갖는 원핵생물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한 분자유전학은 점차적으로 보다 복잡한 유전기작과 유전정보 오류수정 및 편집과정을 거치는 진핵생물에 대한 연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원하는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 조각을 엄청나게 대량으로 복사할 수 있는 중합효소 연쇄반응(PCR) 기법과 이를 다시 다른 생명체에 거꾸로 주입시켜 그 생명체의 유전정보 내용을 변형시킬 수 있는 역전사(RT) 기법의 발견은 이후 유전공학 발전의 필수적인 기술을 제공해주게 된다. 이 두 과정을 결합하면 원리적으로는 원하는 형질을 발현시키는 유전정보를 한 생물체에서 빼 낸 다음 이를 대량으로 증폭시킨 후 이 유전정보가 발현되기를 원하는 다른 생명체에 주입하여 원하는 형질이 발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병충해에 강한 토마토나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하는 젖소처럼 원하는 형질을 유전공학적 기법으로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런 생명공학의 전능성에 대한 기대는 표준적인 생명공학 교과서를 조금만 살펴봐도 지나친 것임이 드러난다. 우선 위의 절차는 우리가 원하는 형질(예를 들어, ‘병충해에 강한’)에 해당되는 유전자가 정확히 하나 존재하고 그 유전자가 토마토에게 병충해에 대한 저항성을 강화시키는 일 이외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는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매끈하게 성립한다. 그러나 실제로 유전학의 상식적 사실은 한 유전자는 대개 하나 이상의 형질 발현에 관여하고 역으로 한 형질의 발현에는 대개 하나 이상의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충해에 강하도록’ 토마토의 특정 유전자를 조절했는데 원하지도 않게 토마토의 독성이 강화되는 결과를 얻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역으로 ‘병충해에 강하도록’ 유전자를 분명히 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병충해의 저항성과 관련된 다른 유전자의 영향으로 우리가 원한 효과를 충분히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책임있는 유전공학자라면 병충해에 충분히 강하지 못한 토마토나 병충해에는 강하지만 독성이 높은 토마토를 제품으로 내놓을 리는 만무하다. 정직한 연구자로서 유전공학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하여 원하지 않는 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막고 원하는 형질이 안정적으로 발현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부작용 ‘섬뜩’

문제는 우리가 유전자의 복잡한 네트워크 상호작용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현재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나 장기적으로만 발현되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미리 알아낼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유전공학의 산물이 진정으로 안전한지 여부는 궁극적으로는 직접 사용해봄으로써만 검증이 가능하다는 다소 섬뜩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자동차가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인명살해 수단으로 돌변할 것이라는 점을 상당기간 사용해보고서야 알 수 있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니까 자동차 사용을 당장 그만 두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할 사람이 많지 않듯이 이상의 고려가 유전공학 연구가 당장 중단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전공학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수많은 잠재적 혜택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많은 경우 미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위험 사이에서 사회적 공감대에 기초한 적절한 선택을 수행하는 일이다. 생명공학이 우리에게 기술적인 도전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을 제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전학의 중대한 영향만큼이나 현대 생명공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갖는 존재론적 측면이다. 현대 생명공학은 다른 첨단기술들과 융합되어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극미세계를 다루는 나노공학과 연계하여 나노바이오 소자가 건강진단이나 질병치료에 광범위하게 사용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정보공학과 생명공학의 결합도 인간 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차 활용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나노-바이오-정보 기술의 결합이 인체의 많은 영역을 기계와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각종 인공장치로 채울 가능성이 높다. 좀 더 먼 미래에는 뇌의 일부조차 진화한 생명공학적 컴퓨터가 대체할 수도 있다. 어쩌면 좀 더 극단적으로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전망하듯 아예 자신을 웹상의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온라인에서의 삶을 추구하려는 사람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물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생명공학이 형이상학과 만나게 될 미래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잘 준비되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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