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속 사상] 뇌까지 갈아끼울 수 있다면?

한겨레
» 중합효소 연쇄반응을 설명하는 그림.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달은 이제 생물-무생물의 기존 개념조차 허물어뜨리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 삶의 한계를 돌파하는 가능성을 열어줄 미래 신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생명공학의 길은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으로 상징되는 디스토피아 세계로도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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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25) 생명공학의 비젼


 

생명공학은 흔히 미래의 신기술로 표상된다. 인류의 수명이 비약적으로 연장되고 모든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을 모르고 살 수 있는 유토피아적 세계가 생명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도래하리라는 장밋빛 전망이 널리 유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 부풀려진 전망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사람들이나 생명공학에서 미래 산업동력을 찾으려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정책입안자에게는 생명공학의 이러한 비전이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생명공학은 다른 종류의 비젼도 가지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무명의 괴물이 상징하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그것이다. 통상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인간이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함부로 생명현상에 개입하다가는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이자 생명공학의 위험성에 대한 생생한 표식으로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기에 최근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맞춤아기’나 ‘수정란 줄기세포’ 등은 자연스럽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의 이런 상징성과 연관되곤 한다.

 

오래된 첨단 바이오식품, 된장

이렇게 상반된 이미지가 생명공학과 관련되어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지만 실제로 생명공학은 이보다 훨씬 일상적인 수준에서 우리 곁에 있어왔던 기술이다. 생명공학을 생명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목적에 맞게 생명체를 변형하거나 이용하는 기술로 이해할 때 생명공학은 실은 매우 오래된 기술이다. 온갖 종류의 미생물을 사용하여 원래 재료가 가지고 있지 못한 특성, 특히 우리 몸에 이로운 특성을 갖도록 하는 발효기술은 이렇게 ‘오래된’ 생명공학 기술의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된장이나 맥주는 좀 더 색다르게 들리는 이종장기 이식이나 유전자 은행만큼이나 생명공학의 대표적인 생산품인 것이다.

 

유토피아-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란 전망 사이

생명공학은 이미 친숙해 된장·맥주가 대표적

문제는 예측불가능한 복잡기술융합의 ‘산물’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 묻게 될 것

최첨단의 생명공학 담론에 익숙해진 우리가 된장의 발효기술을 생명공학 기술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효기술이나 누에를 이용한 양잠기술 등은 생명공학의 근간이 되는 생물학의 발전이나 생명공학적 발상을 가능하게 한 이론틀의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 현대 생물학의 형성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파스퇴르나 코흐 모두가 포도주의 발효과정이나 맥주의 발효과정 그리고 누에 전염병이나 소의 탄저병에 대한 연구에서 자신들의 혁신적인 연구를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은 미생물이 눈에 보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그 중 어떤 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조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이후 생명공학의 발전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패턴이었다.

 

이와 더불어 현대 생명공학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던 생각은 생명이 우리에게 친숙한 다른 물질과 질적으로 무척 다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원리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체는 무생물과 달리 ‘생기(vitality)’라는 비물질적인 생명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생명체와 무생물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법칙과 설명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했던 사건은 그 전까지 생명체와 무생물의 구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여겨지던 몇 가지 결정적 증거들이 경험적으로 반박된 일이다. 대표적인 예가 생명체 내에서만 합성이 된다고(그러므로 생명체에 고유한 ‘생기’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성될 수 있는) 알려졌던 몇 가지 유기화합물이 실제로는 생명체 밖에서도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1828년 프레드리히 뵐러가 무기물인 사이안산암모늄으로부터 유기물인 요소를 합성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이 합성을 계기로 전통적으로 생명체만이 생성할 수 있는 유기물질을 다루는 분야로 정의되었던 유기화학이 탄소-수소 결합물의 화학으로 다시 정의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도 이처럼 생명체와 무생물 사이의 원리적 구분이 정당성을 잃어가던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물질적인 생명의 힘 ‘생기’ 작용

20세기 이후 샘명공학은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발전이 결합되면서 비약적인 도약의 시기를 갖는다. 처음에는 박테리아처럼 비교적 단순한 유전과정을 갖는 원핵생물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한 분자유전학은 점차적으로 보다 복잡한 유전기작과 유전정보 오류수정 및 편집과정을 거치는 진핵생물에 대한 연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원하는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 조각을 엄청나게 대량으로 복사할 수 있는 중합효소 연쇄반응(PCR) 기법과 이를 다시 다른 생명체에 거꾸로 주입시켜 그 생명체의 유전정보 내용을 변형시킬 수 있는 역전사(RT) 기법의 발견은 이후 유전공학 발전의 필수적인 기술을 제공해주게 된다. 이 두 과정을 결합하면 원리적으로는 원하는 형질을 발현시키는 유전정보를 한 생물체에서 빼 낸 다음 이를 대량으로 증폭시킨 후 이 유전정보가 발현되기를 원하는 다른 생명체에 주입하여 원하는 형질이 발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병충해에 강한 토마토나 우유를 더 많이 생산하는 젖소처럼 원하는 형질을 유전공학적 기법으로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런 생명공학의 전능성에 대한 기대는 표준적인 생명공학 교과서를 조금만 살펴봐도 지나친 것임이 드러난다. 우선 위의 절차는 우리가 원하는 형질(예를 들어, ‘병충해에 강한’)에 해당되는 유전자가 정확히 하나 존재하고 그 유전자가 토마토에게 병충해에 대한 저항성을 강화시키는 일 이외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는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매끈하게 성립한다. 그러나 실제로 유전학의 상식적 사실은 한 유전자는 대개 하나 이상의 형질 발현에 관여하고 역으로 한 형질의 발현에는 대개 하나 이상의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충해에 강하도록’ 토마토의 특정 유전자를 조절했는데 원하지도 않게 토마토의 독성이 강화되는 결과를 얻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역으로 ‘병충해에 강하도록’ 유전자를 분명히 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병충해의 저항성과 관련된 다른 유전자의 영향으로 우리가 원한 효과를 충분히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책임있는 유전공학자라면 병충해에 충분히 강하지 못한 토마토나 병충해에는 강하지만 독성이 높은 토마토를 제품으로 내놓을 리는 만무하다. 정직한 연구자로서 유전공학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하여 원하지 않는 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막고 원하는 형질이 안정적으로 발현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부작용 ‘섬뜩’

문제는 우리가 유전자의 복잡한 네트워크 상호작용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현재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나 장기적으로만 발현되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미리 알아낼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유전공학의 산물이 진정으로 안전한지 여부는 궁극적으로는 직접 사용해봄으로써만 검증이 가능하다는 다소 섬뜩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자동차가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인명살해 수단으로 돌변할 것이라는 점을 상당기간 사용해보고서야 알 수 있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니까 자동차 사용을 당장 그만 두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할 사람이 많지 않듯이 이상의 고려가 유전공학 연구가 당장 중단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전공학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수많은 잠재적 혜택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많은 경우 미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위험 사이에서 사회적 공감대에 기초한 적절한 선택을 수행하는 일이다. 생명공학이 우리에게 기술적인 도전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을 제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전학의 중대한 영향만큼이나 현대 생명공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갖는 존재론적 측면이다. 현대 생명공학은 다른 첨단기술들과 융합되어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극미세계를 다루는 나노공학과 연계하여 나노바이오 소자가 건강진단이나 질병치료에 광범위하게 사용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정보공학과 생명공학의 결합도 인간 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점차 활용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나노-바이오-정보 기술의 결합이 인체의 많은 영역을 기계와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각종 인공장치로 채울 가능성이 높다. 좀 더 먼 미래에는 뇌의 일부조차 진화한 생명공학적 컴퓨터가 대체할 수도 있다. 어쩌면 좀 더 극단적으로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전망하듯 아예 자신을 웹상의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온라인에서의 삶을 추구하려는 사람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물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생명공학이 형이상학과 만나게 될 미래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잘 준비되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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