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화와노동
2006.11.30 |335호

와하카의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은 하나다!


[...]6월 14일부터 지금까지 와하카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145명이 감옥에 가고, 2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17명이 사망하였고 33명은 심각한 부상, 65명은 실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마저도 정확한 것이 아니다. 불법적인 억류와 고문, 표적살인, 폭행이 자행되며 언론에 대한 통제와 조작 속에 인권침해가 매우 심각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와하카 투쟁은 고립되거나 좌초되지 않을 것이다. 싸빠띠스따는 지난 11월 1일 멕시코와 리오 그란데 북부에서 시내 도로와 고속도로, 버스정류장, 공항 등 집회가 가능한 모든 곳에서 기습시위를 기획했고, 지속적으로 투쟁을 함께 할 것을 다짐했다. 전세계의 멕시코 대사관 및 영사관에 대한 사이버 시위가 기획되고 있으며 미국과 캐나다, 스페인 등지에서 연대 행동들이 조직되고 있다. 한편 유엔은 와하카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멕시코 정부에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위한 협상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도 와하카는 전쟁 중이다. 연방 경찰을 와하카 주변과 시내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이동을 통제하고 있으며 시위자를 불법적으로 연행, 감금하고 있다. 하지만 연방경찰이 와하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여전히 와하카 곳곳에서 자신들의 생존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NAFTA를 체결할 당시 멕시코 정부가 국민들에게 내건 슬로나 현재 한미 FTA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슬로는 너무나도 똑같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방패로 찍어 죽이고 기본권인 집회, 결사의 자유를 무시한 채 모든 집회를 불허하고 원천봉쇄하는 노무현정부의 모습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압살하는 멕시코 정부와 너무도 똑같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다주는 것은 저들이 선전하는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생존권의 파괴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사실을 목도하고 있으며 몸소 체험하고 있다. 때문에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한미 FTA는 이미 실패한 미래다. 저들의 제시하는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가기위한 싸움을 전개하자. 와하카 민중들의 투쟁과 한미 FTA 저지 투쟁은 하나다.


11월 27일(월) - 12월 3일(일) 사회진보연대 주요 일정

12월 1일(금)

13:30 세계 에이즈의 날 기자회견 (장소: 대치동 코스모스타워)

19:00 인천지부 사회운동학교 1회 “자본주의 위기와 노동자운동의 미래”(장소: 인천지부 회의실)

12월 3일(일)

14:00 자이툰 철군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반전공동행동 (장소: 미정, 주최: 파병반대국민행동)

12월 6일(수)
*3차 민중 총궐기

시간 장소 추후 공지




국제토론회“FTA에 반대하는 여성들” 자료집

지난 11월 24일 진행되었던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국제 워크샵 자료집입니다.
사회진보연대
http://www.pssp.org |
(140-801)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48 신성빌딩 4층
TEL:02-778-4001~2 | FAX:02-778-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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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났다. 그 적은 바로 우리였다"

 

  찰머스 존슨의 '미 제국주의 비판' 〈3〉
  2006-04-11 오후 4:04:07
   : (이라크, 아프간 등의) 전쟁예산은 포함된 게 아니죠?
 

  
  찰머스 : 물론 포함되지 않은 겁니다! 행정부에 앉아 있는 저 사람들은 우리들을 꼬드겨 매우 환상적인 군사장비들을 만들게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주 유명한 지적이 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 당시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콜린 파월 장군에게 이런 말을 했다죠.
 

  
  "귀하가 항상 말하는 그 기똥찬 무기들, 그런데 그 무기들을 사용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겁니까?"
 

  
  글쎄요, 그 무기들을 지금 당장 사용하려고 하면 그 사람들은 당장 1200억 달러가 더 필요하다고 말할 겁니다, 아마!(웃음)
 

  
  그런데 문제는 공식 국방예산도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국방예산계획서는 록히드 마틴의 F-22 전투기와 같은 무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F-22 개발은 미 국방역사상 최대치의 계약액을 기록한 프로젝트죠. F-22는 스텔스 전투기인데 사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신무기입니다. 저들은 또 버지니아급 핵잠수함을 추가로 건조하고 싶어 합니다. 이건 그저 해군 제독들의 장난감일 뿐이죠.
 

  
   : 우리가 젊었을 때는 펜타곤의 예산낭비에 관한 기사들이 상당히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1개에 100만 달러나 되는 몽키스패너 등등….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언론보도조차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찰머스 : 그것은 언론이 펜타곤의 품위 있고 정상적인(?) 회계관행에 완전히 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 등에 소요되는 진짜 펜타곤 예산을 뽑아본 적이 있는데 자그마치 2조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빌린 국채에 대한 이자만도 수십억 달러에 이릅니다. 무엇보다도 펜타곤은 퇴역군인 복지에 관한 예산을 정직하게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 올해 공식예산은 680억 달러인데, 이는 실제 필요예산보다 훨씬 적은 것이 분명합니다. 1차 걸프전 이후 연금 등을 신청해서 받고 있는 퇴역군인의 그 엄청난 숫자만 고려해도 그렇습니다. 퇴역군인들에게 약속했던 혜택의 상당 부분을 취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릴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트라이케어(Tricare)란 게 있는데, 이는 퇴역군인 및 그 가족들에 대한 정부보조 건강보험제도입니다. 2007년도의 관련 예산은 390억 달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수치는 벌써부터 엄청난 상승세로 치솟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도널드 럼스펠드, 잘난 척하는 이 이데올로그도 최근의 국방예산에는 완전히 두 손을 다 든 것 같습니다. 단 한 항목도 삭감되지 않았으니까요. 모든 무기개발이 통과됐습니다. 럼스펠드는 '군사력 변환(고가의 중무기 대신 경량화, 지능화로 미군을 신속기동군화한다는 전략: 역자)'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이미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핵무기를 갖고 있는데 도대체 왜 새로운 무기개발에 돈을 써야 하는 겁니까? (럼스펠드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미국의 신무기개발 중독증은 심각하다는 의미: 역자) 게다가 (펜타곤의 국방예산 외에) 에너지부도 핵무기개발을 위해 2006회계연도에만 185억 달러의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 펜타곤 외에 다른 부서에서도 국방예산을 쓰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찰머스 : 그렇습니다. 이것은 에너지부의 예산입니다.
 

  
   : 그러니까, 펜타곤 예산 외에 숨겨진 국방예산이 상당히 많다?
 

  
  찰머스 : 그렇습니다, 대단히 많습니다! 저는 미 국방예산의 전체 규모를 연간 7500억 달러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펜타곤의 공식예산이 4400억 달러 정도, 여기에 이라크전쟁 등을 위한 예산이 연간 1200억 달러, 이는 펜타곤 회계책임자인 티나 존스가 계산한 것인데 현재 한 달에 68억 달러씩 쓰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또다른 항목들이 추가되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퇴역군인 관련 예산입니다. 특히 중증 부상자, 베트남전쟁 시기만 해도 전사자로 처리됐을 이들 중증 부상 군인들의 생명 유지 및 건강관리에 들어갈 비용이 엄청날 거라는 얘깁니다. 베트남전쟁 때라면 이들은 대부분 전사자로 처리됐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부시 행정부에게도 너무도 당혹스러운 것이라 정부는 이들을 한밤중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본국으로 송환시킵니다. 존 머사라는 하원의원이 있죠. 퇴역 장교이기도 한 이 사람은 펜타곤이 한다고 하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무기개발이라도 무엇이든지 밀어주는 바람에 방위산업 역사상 가장 우호적인 정치인이라는 평판까지 들었던 의원인데, 최근 퇴역군인들을 위한 병원을 드나들더니 정신을 조금 차렸습니다. 공개적으로 이라크전쟁에 반대한 거죠. 저로서는 놀랍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톰의 어머니도 만화가였던 걸로 알고 있지만, 어머니와 내가 같이 좋아하는 월트 켈리라는 만화가가 있습니다. 그 분의 만화 중에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뭔지 아십니까? "적을 만났다. 그 적은 바로 우리였다"입니다. 지금 우리 상황에 딱 맞는 말이 아닐까요?
 
 
   
 
  찰머스 존슨/일본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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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은 나치의 길을 가고 있다"

 

  찰머스 존슨의 '미 제국주의 비판' 〈2〉
  2006-04-10 오후 2:55:57
   :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선생께서는 제국을 발견하셨고….
 

  
  찰머스 : 그 제국은 개념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제국이란 식민지를 갖고 있는 나라라고 정의를 내리지요. 하지만 분석적으로 보면 제국이란 외부로 헤게모니를 투사해 다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익이 어떻게 되느냐와 상관이 없이 우리들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제국일까요? 미 제국의 단위는 식민지가 아닙니다. 군사기지이지요. 이것은 제국의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외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로마제국 시대 중동지역에 있었던 주요 군사기지의 숫자를 쉽사리 계산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오늘날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기지 숫자와 거의 같습니다. 38개지요.
 

  
  군사기지의 제국, 이는 미 국방부도 인정하고 있다시피 세계 도처에 700개 이상의 군사기지를 두고 있는 미 제국의 논리를 가장 잘 설명해내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군사기지들이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기지들을 당초에는 장래 있을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한 전략적 목적으로 확보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결코 그 군사기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게임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게 만드는 건 오만입니다. 미 해병은 지금까지도 자신들이 오키나와에 주둔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차대전 최후의 격전이었던 오키나와전투에서 그들이 치른 희생이 그러한 자격을 부여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제국의 개념이, 반드시 군사기지의 제국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들 부시의 시대에 네오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매우 빨리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제국이란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한다는 것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랬지요, 미국의 건국이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미국인은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반제국주의적이라는 것을 늘 자랑으로 생각해 왔고, 독재적 방법으로 다스리려는 왕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전통은 제 생각으로는 (19세말의) 미-스페인전쟁까지가 고작이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미국은 제국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 선생이 쓰셨던 것처럼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이 군사화돼 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은 일종의 외다리 제국이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찰머스 : 그 부분이야말로 미 제국의 앞날에 매우 불길한 징조입니다. 대부분의 제국에도 군사력은 필요합니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군사주의(militarism)가 모든 것의 중심이 돼 있습니다. 군사주의란 국가방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력의 행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활의 방식, 부자가 되고 편안해지기 위한 생활의 방식입니다. 제가 확실히 말하건대 미 제1해병사단은 이곳 캘리포니아에 주둔하는 것보다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약간 좋은 정도가 아니라 차원이 다르게 좋습니다. 소련군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이후에도 무려 5년 동안이나 동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았습니다. 가난한 러시아로 돌아가기보다는 독일에 머무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을 그들을 알았던 거죠.
 

  
  대부분의 제국들은 군사적 측면을 은폐하려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군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군을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 그나마 제대로 작동되는 조직으로 바라봅니다.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외치는 말, "우리 군을 밀어주자"라는 말처럼 위선적인 말도 또 없습니다.
 

  
   : 미국의 국방예산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이라는 데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찰머스 : 제국의 특징 중 하나는 제국이 우리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파고드느냐 하는 겁니다. 사회가 제국에 의존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예전의 제국들,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 일본제국 등은 로마 시민, 영국 시민, 일본 시민들이 잘 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기 제조와 판매가 우리 삶과 매우 깊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미국의 주요 무기 제조업자는 이제 4개, 즉 보잉과 록히드 마틴, 노스럽 그루만과 제너럴 다이내믹스밖에 없으며 이들 무기제조 기업들이 가능한 한 많은 주, 많은 지역구에 엄청난 계약을 (즉 일자리를) 나눠주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지금 국방예산이 이 나라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어떤 합리적 군사목적으로도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을 정도로 국방예산의 규모는 무시무시하게 커져 버렸습니다. 현재 미국의 국방예산은 전세계 국방예산의 절반에 육박합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작고, 가장 가난한 두 나라 때문에 거의 질식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침공당하기 전 이라크의 GDP는 루이지애나주와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아프간은 분명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이 두 나라가 미국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보면, 미국의 국방예산은 전혀 일관되지 못하며 합리적이지도 못합니다. 물론 국방예산이 우리 산업에 대한 보조금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특히 무기가 그나마 아직도 미국기업이 효율적으로 생산해내는 몇 안 되는 공산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미국의 무기산업은 엄청난 수출산업이죠. 다른 게 있다면 민간기업이 아니라 펜타곤이 외국정부에 대한 대외군사판매라는 방식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죠.
 

  
  물론 이것은 자유기업이 아닙니다. 4개의 거대한 방위산업체가 단 하나의 고객을 위해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국가사회주의입니다. 미국 어느 대학의 어떤 경제학 강의에서도 볼 수 없는 방식으로 미국의 경제가 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케인즈가 제기했던 방식, 즉 경기순환에 저항하며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대폭 늘이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지금 이 나라는 군사기지 폐쇄 얘기가 나올 때마다 집단적 신경증을 앓습니다. 그리고 이는 정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곳 샌디에이고의 미 해병 군용비행장 폐쇄 가능성이 제기되면 온 도시가 들끓는 것과 마찬가지로 뉴잉글랜드 포츠머스에 있는 미 해군조선소 폐쇄에 대해 그곳 주민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미군기지를 '자신들의' 기지로 생각합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감히 우리 기지를 빼앗아간단 말이냐!' '국회의원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되찾아 와야지', 이런 식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미국의 군사주의, 미 군사제국주의의 가장 병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군대 없이 살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마약에 중독되듯이 군대에 중독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군대가 없으면 미국경제는 지탱되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시무시한 일이죠.
 

  
  나아가 이러한 미국적 상황의 역사상 전례들은 더욱더 무시무시합니다. 군사적 케인즈주의의 가장 극명한 전례, 즉 막대한 군비수요에 의해 불황에 빠져 있는 경제를 살려내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은 대표적인 선례는 바로 독일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된 1933년 이후 5년동안 히틀러는 현대의 천재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일자리를 되찾았죠. 이러한 업적은 전적으로 군사적 케인즈주의, 즉 나치당과 독일산업계 간의 동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히틀러의 방식이야말로 진짜 케인즈주의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정부 재정지출에 의한 수요자극으로 공장을 다시 열게 되면 이는 곧 노동조합, 즉 노동자 계급의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겁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 계급을 강화시킬지도 모를 정부정책을 두려워하기 마련이죠. 노동자 계급이 혁명적으로 변화할지도 모르니까요. 실제로 20세기에는 그런 사례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볼세비즘이라고 하면 놀라자빠지죠. 어느 정도는 아직까지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미국경제에 대해서 해놓은 일은 히틀러가 독일경제에 대해 한 것과 대단히 유사합니다. 지금 미국은 엄청난 숫자의 전투기와 기타 무기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991년 마침내 소련이 붕괴됐을 때, 미국이 느껴야 했던 당혹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냉전을 종식시킬 수가 없었던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정을 매우 빨리 깨달았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일찍부터 냉전의 추동력은, 특히 미 냉전전략의 핵심인 국가안보회의문서 68호(NSC)의 정당성은 대공황시대를 실제로 살아본 중년 이후 미국인들의 분명한 이해, 즉 미국경제는 자본주의적 자유기업이라는 기반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다는 데 대한 명백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안보국가(national security state)'의 길을 택한 지 불과 20년만인 1966년에 미국은 자그마치 3만2000개나 되는 핵탄두를 보유하게 된 겁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해에 미국의 핵탄두 보유는 역사상 최고치에 이르렀는데 이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9960개의 핵탄두를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2007년 펜타곤의 국방예산도 도대체 말이 되지가 않습니다. 자그마치 4393억 달러라니 말입니다.
 
 
   
 
 

찰머스 존슨/일본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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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은 끝나지 않았다"

 

  찰머스 존슨의 '미 제국주의 비판' 〈1〉
  2006-04-09 오후 6:38:32
  다음은 미국의 저명한 동아시아 전문가인 찰머스 존슨 교수가 그의 '미 제국주의 비판 3부작(Blowback Trirology)'의 마지막 책, 〈네메시스(Nemesis)〉의 발간을 앞두고 행한 인터뷰의 전문이다. 존슨 교수는 지난 2000년 〈블로우백〉, 2004년에는 〈제국의 슬픔들: 군사주의, 비밀주의, 그리고 공화국의 종말〉을 통해 미 제국주의의 본질을 파헤치고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의 미 제국주의 비판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의 독특한 전력 때문이다. 그는 학자로서는 중국 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통산성 연구'를 통해 2차대전 후 일본의 비약적 경제성장이 미국식 자유주의경제 모델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개발국가(Deveopmental State)' 모델 때문임을 처음으로 밝혀내 동아시아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또한 시민으로서 그는 1950년대 초 미 해군 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1967-1973년에는 미 중앙정보국(CIA)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베트남전쟁을 찬성했고, 냉전 당시 소련이 미국의 주적임을 굳게 믿었던 전형적 미국인이었다.

  
  그런 그가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행로를 지켜보면서 미 제국의 통렬한 비판자가 된 것이다. 그의 논지의 핵심은 미국은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위협해 미국의 이익에 봉사토록 하고, 오로지 군수경제만으로 경제를 지탱해가는 과도한 군사주의의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00년 발간된 〈블로우백〉의 서문에서 자신의 70년대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나의 문제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 관해서는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반면, 미국의 국내정치와 펜타곤에 대해서는 너무도 순진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그때 반전데모를 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들의 모든 유치함과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옳았고 미국의 정책은 틀렸다."

  
  그는 또 74세의 나이에도 미 제국주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 제국주의는 아직도 학문적 주제로는 금기시되고 있다. 나는 이제 편안하게 은퇴한 노인이고, 학자로서도 성공적 경력을 쌓아 왔다. 오늘날 누군가가 앞장을 서지 않으면 젊은 연구자들이 미 제국주의 연구에 감히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선구자가 필요한 것이다. 내 밑에서 공부했던 몇몇 대학원생들이 내게 "교수님, 교수님은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지 않습니까. 교수님께서 나서지 않으면서 저희더러 '터키 미군기지 주변의 집창촌이 터키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같은 주제를 연구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저희들 말은 한번 해보시라는 겁니다. 이거 아주 좋은 연구주제예요.'"

  
  찰머스 존슨 교수는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 샌디에이고캠퍼스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일본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인터뷰는 미국의 진보적 웹사이트 〈톰디스패치(Tomdispatch.com)〉의 운영자 톰 엔젤하트가 진행했다. 원문은 아래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6회로 나누어 연재한다.
 
 
 
 
 
 

  
  "냉전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냉전은 영원히 지속될 것"
  
 
찰머스 존슨 일본정책연구소 소장. ⓒwww.reprehensor.gnn.tv  

  톰 엔젤하트(이하 '톰'): 선생의 인생에서 '진실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 즉 냉전의 종식에서부터 얘기를 풀어가 보죠. 냉전의 종식은 선생에게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찰머스 존슨(이하 '찰머스'): 나는 '냉전의 전사(cold warrior)'였습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나는 소련이 진짜 위협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소련이 이상주의에 영감을 불어넣은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 중에는 지금도 '인터내셔널가'만 울려 퍼지면 벌떡 일어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그 사람은 수 십 년 전에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소련공산당의 만행에 실망한 나머지 현실사회주의와 결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나는 소비에트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저 무시무시한 군사기구들, 그 규모와 거기에 투입되는 엄청난 자금,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지적했던 군산복합체의 등장 및 성장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소련의 존재, 나아가 미국에 대적하려는 소련의 의지 외에는 없습니다. 소련이 전세계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고 나아가 대단히 강력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소련의 약점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전성기였던 1978년에 모스크바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누구라도 '소련에는 소비자경제란 게 없구나'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부 연구기관인) '미·캐나다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더군요. 값비싼 그루지야산 백포도주에 쿠바산 시가까지,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일반가게에선 보드카 외에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정말 험한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네들도 아주 잘 하는 일들이 있더군요.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미국의 미사일방어에 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들어 놓은 어떤 미사일방어망도 깰 수 있는 무기를 나라를 가진 나라는 현재까지 러시아, 단 한 나라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직도 토폴-엠(Topol-M), 미국에서는 SS-27이라고 부르죠, 이 미사일에 필적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스타워즈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하자 소련의 매우 영리한 무기제작자들은 '그래, 우리가 못하게 해줄게'라고 말했고 실제로 이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모이니한 상원의원이 말했던 것처럼 1980년대에 소련경제가 엉망이 돼가고 있다는 사실을 낌새도 채지 못한 중앙정보국(CIA)을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1년에 320억 달러나 되는 예산을 쓰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인해 소련경제가 엉망진창이 돼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면 말이 되는 겁니까?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결단을 내립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았던 거죠. 고르바초프로서는 러시아의 장래를 위해서는 스탈린이 만들어놓은 동유럽의 가난한 위성국가들보다는 독일, 프랑스와의 우호관계가 훨씬 중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고, 그 결과 소비에트제국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오키나와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을 때,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면 이와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질지 모릅니다. 미 제국도 일단 붕괴가 시작되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붕괴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소련은 내부적으로 붕괴했습니다(imploded). 나는 소련의 사례가 미국의 장래를 보여주는 예언적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냉전이 끝났죠. 승리배당금, 즉 진정한 평화배당금을 챙겨야 할 순간이 온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미국은 예전에 큰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우리는 매우 신속하게 군비를 감축했습니다. 물론 1947년 이후 훨씬 더 신속하게 군비증강에 나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우리 군부는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89년이 되면서 베를린장벽의 붕괴 이상으로 나를 놀라게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군산복합체의 존재이유, 즉 펜타곤의 거대한 관료기구와 전세계 바다를 떠다니는 우리 군함들, 그리고 수많은 미군기지들이 계속 있어야 할 모든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즉각, 조건반사적으로 또 다른 적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지도자들로서는 냉전시기의 군사기구들을 철폐한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건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미국 국민들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 또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한마디로 재앙이었습니다. 당시엔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었죠. 그는 즉각 아프가니스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끝났다', 이런 얘기였죠. 미국 역사상 최대의 비밀공작, 그리고 이를 위해 투입된 그 엄청난 비용과 희생을 뒤로 한 채 그냥 손을 떼어버린 겁니다. 그러자 1980년 소련과의 대결을 위해 우리가 발굴하고 지원했던 아프간인들은 즉각 우리를 적으로 간주했고, 우리에게 그 대가를 치르도록 했습니다. 최대의 블로우백(blowback: 미 정보기관이 사용하는 용어로 미국의 비밀공작이 초래한, 예기치 못한 역작용을 지칭함)은 물론 9.11이었습니다만, 그 이전에도 크고 작은 블로우백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제대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냉전은 끝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는 것, 즉 냉전 때와 똑같은 구조, 똑같은 군사케인즈주의, 그리고 무기제조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가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지면서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가장 중심적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냉전은 실제로는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허울에 불과했단 말인가? 어떤 다른 목적이란 2차대전 기간 동안 대영제국의 후계자로서 의도적으로 미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 내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냉전은 우리가 늘 주장해 왔던 것처럼 전체주의적 가치와 민주주의적 가치의 경계선이 분명한 대결이 아니었습니다. 1950년대 어느 시점의 서유럽에서라면 이러한 주장, 즉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결이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세계적 맥락에서 관찰한다면, 중국, 그리고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치렀던 2번의 전쟁,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고려에 넣는다면 이러한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로서는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재고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똑똑한 학부생들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아주 여러 번 말입니다. "교수님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때마다 케인즈 경의 유명한 말로 대꾸를 했습니다. 자신의 입장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질문을 받은 이 영국의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글쎄요, 저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저의 입장을 재고해 봅니다. 귀하께서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뭘 하십니까?'
 

  
  국제관계를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재검토해 보자는 결심을 굳히게 된 데는 소련이 붕괴되고 5년 후 제가 겪은 개인적 경험도 한몫을 했습니다. 1995년 가을에 오키나와 현지사의 초청으로 오키나와를 방문했는데 당시 그 섬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1995년 9월 4일, 미 해병 2명과 해군 병사 1명이 12살 난 오키나와 어린이를 강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일본에서,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 이후 최대의 반미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저는 일생의 대부분을 일본 연구에 바쳐 왔지만 오키나와를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와이 군도의 카우아이 섬보다도 작은 그곳에 32개의 미 군사기지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 미군의 존재가 오키나와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압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선량한 냉전의 전사로서 저의 첫 반응은 '오키나와의 사례는 분명 예외적인 경우일 거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언론도 오키나와 사태를 보도하지 않았고, 오키나와가 미국의 군사식민지임이 분명하며, 게다가 1945년 오키나와전투 이래 미군이 계속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라지(Raj: 영국의 인도 식민지)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키나와의 사례는 충격적이고 불행하기는 하지만 미국의 거대한 군사기구 중에 아주 예외적인 사례라고 치부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 뒤 공부를 해나가면서 저는 오키나와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미 해외 군사기지의)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미국의 군사기지에서는 오키나와와 같은 상황을 쉽게 볼 수 있다는 얘깁니다.
 

  
  톰 : 미국이 지구상에 군사력을 배치하고 있는 방식, 이것이 선생께서 미국의 세계적 위상을 재고하는 데 핵심적 요소가 되었군요. 사실 선생의 최근 저서 〈제국의 슬픔들〉에서도 펜타곤의 미군 주둔 방침에 관한 부분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미 군사기지에 대한 선생의 지적에 그다지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찰머스 : 왜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이 미국 안에 있는 거대한 군사보호구역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원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기 마련이라고 여기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전혀 자연스럽지가 못하거든요. 이들 군사시설은 인위적인 데다가 비용도 엄청나게 잡아먹고 있습니다. 최근의 현상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군사기지 폐쇄발표에 대한 시끌벅적한 논란들입니다. 쓸모가 없어진 군사시설을 폐쇄하는 것은 펜타곤으로서는 지극히 논리적인 조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군산복합체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양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는 '공급 중심의 경제학'이라든가 '래퍼 커브' 등과 같은 그럴 듯한 말로 현실을 은폐하려 합니다. '인위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한다'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대공황시대의 고용증진국(WPA: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은 때때로 '땅 파고 다시 메우는 일 시키고 돈 주는 곳'이란 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폭탄 만들어 팔아먹는 일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무기들과 비교해보면 미제 무기가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대단히 많은 무기를 매우 빨리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지요.
 
 
   
 
 

찰머스 존슨/일본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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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래서 국가가 투자자의 소송대상이 됐구나"

 

  [한미FTA 뜯어보기 108 :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정치경제학(3)] 현대판 상인법
  2006-09-29 오전 9:59:23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실로 특이한 1990년대 이후의 신 발명품이다. 이 제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예를 들어 국제 중재재판 제도, 상인법(lex mercatoria), 투자보호 협정 등은 물론 그 전부터 있던 것이며 어떤 것은 멀리 고대 이집트와 페니키아 상인들로까지 소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제도들이 한데 뭉쳐 지금 우리 눈앞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 특히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하는 지구정치경제의 큰 흐름 속에서 보지 않으면 그 의미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그 역사적 흐름을 날줄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최근의 세계정세를 씨줄로 하여 이 제도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살펴보자.
 
 
 

  
  중세 상인법 성립의 배경
  
  중세 유럽은 법적 제도의 일관성으로 보자면 극히 파편화되고 혼란스러운 사회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과 같이 잘 만들어진 법체계로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있었던 비잔틴 제국과는 달리 교회법, 로마법, 실정법, 관습법 등 서로 다른 여러 개의 법체계들이 혼란스럽게 병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법체계는 12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상업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상업이라는 행위는 아주 정교한 법적인 규범과 약속의 틀 안에서만 번성할 수 있다. 법적 안정성이라는 '인프라'가 없다면 상행위는 언제든지 사기와 주먹다짐이 난무하는 난장판으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중세의 상인들은 이러한 법적인 혼란상태 속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법, 즉 상인법을 만들게 된다. 큰 장터를 찾아 전 유럽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상인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시비가 붙을지, 어떤 부당한 상황에 부딪힐지 모른다. 그런데 분쟁과 시비를 항상 그 지역의 영주나 교회의 판결에 맡겨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선 기약 없이 발이 묶여 장사를 망칠 것이요, 영주들이 재판비용이랍시고 요구하는 수수료도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재판소에서 사용하는 법적 논리가 상업의 논리에 그다지 맞는 것도 아니다. 장사를 하다 보면 시비가 붙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고, 그 해결은 그저 당사자들이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타협을 보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법정에서 '정의'니 '공정가격'이니 하는 복잡한 법체계 상의 논쟁에 휘말릴 경우엔 그야말로 짜증이 극점으로 치달을 것이다.
 

  
  상인들은 유럽의 주요 교역로와 주요 상업중심지 곳곳에 상인법을 시행할 만한 재판소(사실 이것은 재판소라기보다는 중재기관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를 세우고, 신속하고 값싸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분쟁을 해결하는 장치를 만든다. 이런 재판소의 판사 자리에는 오랜 장사꾼 경험 속에서 상업의 온갖 관행과 실제 사례에 정통해 있고 상인들 사이에서 신용과 명망을 쌓은 이들이 앉았다. 재판에서는 분쟁이 생긴 양쪽이 각각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판사는 '정의를 실현'하기보다는 양쪽이 조속히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중재'를 했다. 그래서 분쟁의 양쪽 당사자는 재판소에서 후닥닥 문제를 해결한 뒤 각각 가던 길을 간다.
 

  
  상인법에 의한 재판은 보통의 공공 재판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갖고 있었다. 먼저, 이 재판의 절차는 철저하게 분쟁 당사자들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재판소의 선택, 증거의 종류나 제출 방식, 사용되는 법적 원천의 종류 등이 모두 양쪽의 합의에 의해 결정됐다. 상인법에 의한 재판이 이런 특징을 갖고 있었음을 기억해두는 것이 현재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을 담당하는 국제 중재심판의 절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상인법에 의한 판결은 강제력을 통한 집행(enforcement)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당시 사회적 폭력을 행사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영주 등이 상인법의 운영 과정에 끼어드는 일이 드물었으므로 그들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다. 결국 유럽을 오가는 상인 공동체의 상호신뢰가 상인법에 의한 판결의 효력을 뒷받침하는 암묵적인 힘이 되었다. 자기가 합의한 절차를 거쳐 내려진 판결에 복종하지 않는 상인이 있다면, 상인 공동체에서 그 상인을 시쳇말로 '왕따'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특징에서 알 수 있듯이 상인법이라는 것은 결국 자립적인 논리체계와 집행체제를 갖춘 법적 원천이었다고 보기 힘들고, 어떤 이들은 아예 상인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인법으로 일컬어지는 관행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공식적인 국제법 체계의 외곽에서 벌어지는 각종 분쟁중재 과정의 규칙과 진행절차에서 중요한 모범이 되고 있다.
 
 
 

  
  주권국가의 등장 이후
  
  혼란스러웠던 서유럽 세계의 법적 질서는 17세기에 들어 근대적인 영토국가들로 이루어진 소위 베스트팔리아 체제(Westfalia System)가 성립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유럽은 이제 한 조각의 땅도 남김없이 모두 배타적인 국경선과 영토를 주장하는 영토국가의 퍼즐 조각들로 분해되었다.
 

  
  그리고 그런 국가들은 각기 자국 영토 안에서는 오로지 자국만이 법을 정할 수 있는 권력인 주권(sovereignty)을 가지며 그밖의 다른 어떤 법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에 따라 예전의 상인법은 국가의 법제화를 거쳐 각국에서 통일적으로 시행되는 민법과 상법으로 흡수된다. 그 밖의 여러 다른 기존의 법적 원천들도 이제 주권국가가 포고하는 법전으로 통합된다.
 

  
  유럽이 이렇게 국가별로 독자적인 법체계를 가진 퍼즐 조각들로 찢어지게 되자, 각각의 퍼즐 조각 사이의 법, 즉 국가 간의 법체계는 어떻게 해냐 하느냐는 문제가 생겨났다. 이것은 이후 몇 백 년 간 유럽 법학자들을 괴롭힌 문제였고, 현실적으로 제도화하는 것도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유럽의 국가 간 관계란 이른바 '세력균형 체제(Balance of Power System)'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쟁을 통한 힘의 균형 달성'을 체제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체제였다.
 

  
  무력경쟁과 전쟁의 상황에서도 구속력을 갖는 '국제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으로 인해 정치학자들 중에서는 아예 국제법, 즉 '주권국가 사이의 법'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몇 백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경험과 관례가 축적되어 20세기에 이르면 비록 국내법만큼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구속력을 갖는 국제법 체계가 성립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국제법은 어디까지나 주권국가들 사이의 법, 즉 '국제공법(public international law)'라는 점이다. 국제법 성립의 유일한 원천은 주권국가들이고, 주권국가들의 동의(consent)가 그 효력의 유일한 근거가 되며, 국제법이 적용되는 대상도 주권국가들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구성원에 국가만 있는 것은 아니며, 국경을 넘어서는 상호작용에 국가 간 관계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어느 상인이 영국의 어느 회사와 큰 거래를 진행하다가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 경우에 소송이 붙는다면 어느 법을 적용해야 하는가. 프랑스의 상법을 적용해야 하는가, 영국의 상법을 적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3의 법', 즉 국제상법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적용해야 하는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법적 권력을 가진 주체는 주권국가다. 국제법이 있다면 주권국가들끼리 동의한 국제공법이 있을 뿐이다. 이 체계 밖에 따로 존재하는 국제상법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프랑스 법정에서 프랑스 상법에 따르든가, 영국의 법정에서 영국 상법을 따르든가, 아니면 제3국,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 소송을 진행하면서 네덜란드 상법을 따르든가 해야 할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판결이 나온 뒤에도 여러 상법들 사이에 모순과 갈등이 있을 수 있기에 그 판결이 각국 국내의 법과 모순될 수 있다. 국제사법(private international law)이란 다름아닌 이러한 나라들끼리의 사법 상 갈등이 있을 때 그러한 갈등을 조정하는 각 나라의 고유한 절차들의 묶음에 불과하며, 그래서 국제사법을 가리켜 '여러 법들의 갈등(conflict of law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래의 한쪽 당사자가 국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자본가가 아르헨티나에 투자해 광산을 사들였는데 아르헨티나 정부의 부당한 조치로 인해 그 광산을 억울하게 빼앗기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에 영국 자본가는 아르헨티나 정부를 직접 상대로 해서 법적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국제법 상 주권국가와 개인은 법적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 자본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영국으로 돌아와 영국 정부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뿐이다. 만약 영국 정부가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면 영국 정부가 나서서 국제 중재재판에 제소할 수도 있고, 아르헨티나 정부와 외교적 협상을 벌여 문제를 풀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두 나라 정부 간의 문제이지, 문제의 영국 자본가가 직접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중반까지도 관습으로 굳어져 있었던 국제법의 전통이다.
 

  
  이렇게 경직되고 복잡한 주권국가 중심의 국제법 체계는 세계적 차원에서 상거래를 펼치는 이들에게는 인기 있는 것이 되기 힘들다. 그래서 19세기 들어 세계적으로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공식적인 국제법 체계의 가장자리에서 옛날 '상인법'의 정신이나 관행에 따라 국제상거래 관계에서 상인들 스스로가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절차에 호소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적으로 벌어지던 상인들 간의 중재를 국제체제의 한 제도로서 인정하고 그것에 법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국제상업을 부흥시키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국제 중재심판의 제도화
  
  마침내 1923년 국제통상회의소(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의 주도로 유럽 17개국 대표들이 제네바에 모여, 민간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해결을 구속력 있는 중재심판에 넘기기로 합의하고 이를 각국이 법적으로 인정하기로 한다(Geneva Protocol of 1923). 그 이후 여러 번의 갱신과 발전(Geneva Convention of 1927, New York Convention of 1958)을 거치면서 제도가 점차 발전하여, 이제는 중재심판이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건 각국은 그 결정을 자국의 법률에 비추어 재검토하는 일 없이 그대로 법적 집행력을 갖는 것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 참여하는 나라도 현재까지 130개국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중재(arbitration)란 정해진 절차와 법적 원천 및 체계에 따라 진행되는 공적인 법원의 재판과는 다른 것이다. 중재에서는 첫째, 심판이 진행되는 과정과 절차가 모두 분쟁 당사자들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 둘째, 당사자들의 사적인 정보 유지와 사업기밀 누설 방지를 위해 심판의 진행은 모두 비밀에 붙여지고 분쟁의 심판을 맡은 이들은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다는 점에서 중재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는 분쟁해결 방식인 것이며, 중세 상인법의 전통과 여러 모로 유사하다.
 

  
  결국 20세기 들어 지구경제의 확장과 더불어 중세 상인법의 관행을 닮은 사적 중재심판이 국제법적 지위를 갖춘 하나의 제도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각국의 국내법에 의해 제약당하지 않는 나름의 구속력을 가지게 된 것은 실로 중요한 발전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큰 한계가 있다는 것이 국제통상회의소(ICC)의 불만이었다. 각국이 국내 법과의 일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순응해야 하는 중재심판의 대상이 민간인들 사이의 '상업적(commercial)'인 사안으로 제한돼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다시 보겠지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11장에서 정의된 '투자'의 포괄적인 정의에 비하면, 이 '상업적'이라는 말로 인해 중재심판 대상의 범위가 좁아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재심판의 결정이 나왔다 해도 그 결정이 '상업적'인 범위를 넘어 예를 들어 각국 공공정책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단될 경우 각국 정부는 그것을 무시할 권리를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 다국적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세계 각국으로 생산영역을 확장하면서 투자대상국 정부들과 이런저런 마찰을 빚기 시작했음에 비추면 이런 한계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1965년에 열린 '투자분쟁조정 회의(ICSID Convention)'는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 회의는 기존에 확립된 사적인 국제 중재심판 제도를 이제 국가와 외국 투자자 간의 분쟁에까지 적용하기로 했다. 나아가 세계은행 산하에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International Center for Investment Dispute Settlement: ICSID)'라는 포럼을 만들고 이를 통해 국가와의 관계에서 외국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중재의 절차와 규칙 등을 정하기로 하고, 분쟁이 생길 경우에는 이 센터에 중재심판을 조직하는 역할을 맡기기로 했다.
 

  
  사적 절차였던 중재심판이 급기야 주권국가와 투자자의 관계로까지 확대 적용되고 그 절차와 규칙도 제도화된 것이다. 이로써 투자자가 직접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중재심판을 통해 주권국가에 대한 구속력이 행사되도록 할 수 있는 제도의 터가 닦인 것이다.
 

  
  하지만 ICSID는 오늘날의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와는 아직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떤 나라가 ICSID에 서명했다고 해서 그 나라가 그때부터 '모든' 외국 투자자와의 '모든' 분쟁사항과 관련해 ICSID에서 마련한 중재심판에서 내려진 결정에 모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권국가는 여전히 국제법이 발휘하는 효력의 원천이었다. ICSID의 심판이 개별 국가에 국제법적 효력이 있는 구속력을 가지려면, 그 국가가 "이 건은 우리나라의 법적 권한에 속하지 않으며 ICSID의 중재심판 대상이 된다"는 식의 명시적인 의사표명을 해야 했다.
 

  
  이러한 명시적 의사표명은 우선 '계약'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서 외국 투자자를 받아들이고자 하는데, 마침 광업에 투자하려고 하는 외국인 A가 있고 카지노에 투자하려고 하는 외국인 B가 있다고 하자. 이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A는 꼭 잡아야 할 투자자이지만 B는 오지 말았으면 하는 투자자일 수 있다. 이 나라는 A와의 계약에서는 투자보호의 확신을 주기 위해 "분쟁이 생길 경우 ICSID의 중재에 맡긴다"고 계약에 명시할 수 있을 것이고, B와의 계약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경우 A와의 계약과 관련해서만 ICSID의 중재심판이 이 나라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다. 이 나라의 부패한 경찰과 공무원들이 B의 카지노에 달라붙어 '삥'을 뜯어간다 해도 B가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 ICSID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새로이 시도된 것이 투자협정(BIT)이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의 도입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살펴보기로 하자.
 
 
   
 
 

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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