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정책, 외국 투자자에 '된 서리' 맞다

 

  [한미FTA 뜯어보기 112 :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정치경제학(6)] NAFTA 사례
  2006-10-04 오전 10:09:05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11장에서 투자자가 투자대상국에서 적절하고 공정한 대우와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조건과 규범을 폭넓게 정의하고 있다. 이 11장과 관련해서는 내국인 대우, 최혜국 대우 등 많은 쟁점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투자 보호'라는 개념과 관련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먼저 '투자'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외국자본이 국내에 들어와 공장을 짓고 생산설비를 들여놓는 설비투자(greenfield investment)를 연상하는 경향이 있고, 이런 경향을 정치인들이나 보수매체들이 이용하는 일이 흔하다.
 
 

  
  '간접적 수용'과 '수용에 맞먹는 조치'란
  
  하지만 NAFTA 1139조의 정의에 따르면 '투자'란 기업은 물론 각종 유가증권, 부동산, 유형 및 무형의 재산 등 사실상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자산' 취득을 포괄하고, 더 나아가 각종의 이익을 낳는 자본기탁과 투자대상국 내의 각종 허가 및 특허권을 포함한 모든 경제활동 자원의 취득까지 포함한다.
 

  
  이렇게 넓게 정의된 '투자'는 좁은 의미의 경제적 생산 따위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쟁여두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즉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관계와 사실들이 투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 자본주의에서 사적 소유의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하면 사적 소유의 대상은 더 이상 단순명쾌한 '사물'에 한정되지 않고 온갖 유형, 무형의 '자산'으로 넓어지게 되며, 사실상 온갖 사회적 관계에서 이점을 누릴 기득권으로 사적 소유의 의미가 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로 취득된 사적 소유물을 '보호'해야 한다면 어떤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인가.
 

  
  NAFTA 1101조는 11장의 규정들이 적용되는 대상은 투자자 및 투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투자대상국이 취하고 유지하는 '조치들'이라고 명기하고 있는데, 201조 1항에 따르면 여기서의 '조치들'은 '모든 종류의 법, 규제, 절차, 요건 및 관행'이다.
 

  
  다시 말해 '투자'를 보호한다는 것은 무지막지한 혁명정부가 외국 투자자의 피와 땀이 밴 공장과 생산설비를 함부로 빼앗는 폭력을 막는다는 식의 소박한 의미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이제 투자자가 어떤 나라에 '투자'를 해서 취득한 '그 나라 내부의 사회적 관계에서의 기득권'을 마음껏 행사하는 데에 심지어 그 나라의 정부, 의회, 지방자치단체조차 끼어들 수 없게 밀어낸다는 공격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NAFTA는 외국인이 '투자'해 취득한 소유권의 행사를 합법적인 국가가 공공의 목적을 위해 제한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NAFTA는 분명히 NAFTA 참가국 각각이 국내에서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는 외국인의 소유권에 제한을 가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외국인 투자자의 소유권도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제한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단, 조건이 있다. 국가가 돈을 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NAFTA 11장의 규정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1110조의 내용이다. 수용에 관한 조항인 이 1110조를 들여다보자.
 

  
  1110조: 수용과 배상
  
  1. 어떤 참가국도 자국 영토 내의 다른 참가국 투자자의 투자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국유화하거나 수용하거나 혹은 그러한 투자에 대해 국유화나 수용에 맞먹는 조치('수용')를 취해서는 아니 된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1) 공공의 목적을 위하는 경우
  2) 비차별적인 근거에 의하는 경우
  3) 1105조 1항의 적절한 과정과 조응하는 경우
  4) 2단락에서 6단락까지의 내용과 조응하는 배상금을 지불하는 경우

  

  4)에 언급된 '2단락에서 6단락까지'는 배상금은 시장가치로 계산해야 하고, 환율 등을 고려하여 조속히 지불돼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여하튼 위의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경우에만 '합법적인 수용'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즉 1)부터 3)까지를 다 충족한다 해도 외국인 투자자에게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간접적 수용(indirect expropriation)'과 '수용에 맞먹는 조치(measures tantamount to expropriation)'라는 표현이다. 만약 수용이 토지와 같은 사물을 물리적으로 가져간다는 의미라면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간접적 수용'이란 무엇이며, '수용에 맞먹는 조치'란 또 무엇인가. 2003년에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펴낸 보고서는 NAFTA를 포함한 각종 무역협정이나 투자협정에서 이런 두 가지 표현이 실제로 해석되는 방식을 두 가지로 보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점진적 수용(creeping expropriation)이다. 이는 소유자의 소유권에는 아무런 직접적 영향이 없지만, 국가의 개입과 조치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장기간에 걸쳐 투자의 가치가 잠식되는 상황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앞에서 보았던 '규제에 의한 수용(regulatory expropriation)'이다. 이는 소유권의 화폐가치에 영향을 주는 법적 규제 등을 말한다. 국제법에서 국가는 환경, 보건, 소비자 보호, 유해물질 규제 등과 같은 영역에서 일방적인 조치를 취할 '경찰력(police power)'을 보유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왔지만, NAFTA에서는 경찰력도 수용 관련 규정이 적용되는 대상이다.
 

  
  결국 19세기 말의 미국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간접적 수용'이나 '수용에 맞먹는 조치'라는 모호한 말의 실제 의미는, 투자의 '자산가치'를 훼손할 만한 일체의 정부 조치들이 모두 수용으로 해석되어 배상의 의무를 부과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투자자들에 대한 법률과 관행이 어떤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외국 투자자들은 투자대상국에 투자를 하게 되면 그 나라에서도 법적 보호를, 19세기 말 미국 자본가들이 누렸던 저 꿈같은 이상적 조건의 법적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제 투자자들은 투자대상국 정부가 자신의 투자자산을 직접 건드리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라도 그 가치에 영향을 줄 만한 입법을 하거나 조치를 할 경우에 당당히 그 철회를 요구하거나 배상을 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투자대상국의 국가와 국민들은 실로 황당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제 국가는 어떤 입법을 하거나 조치를 할 때마다 항상 외국 투자자들의 수익에 영향이 없을지를 살피고, 영향이 있다면 그런 입법이나 조치는 하지 말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런데 입법이나 행정조치란 사회적 형평이라는 가치를 위해 기득권이나 이익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투자'가 매우 폭넓게 정의된 상황에서 그것을 훼손할 일을 피해가면서 입법이나 행정조치를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잔디와 흙이 깔린 곳은 모조리 출입금지'라고 선포하면 아이들은 어디서 축구를 하란 말인가?
 

  
  지금 한국 정부는 한미 FTA의 충격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면서 여러 가지 대응을 잘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대응이라고 한다면 각종 산업정책과 재분배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국내 도처에 쏟아져 들어올 미국 투자자들의 투자자산 가치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그런 정책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소송비용이라는 부담이 있으니, 미국 투자자들이 매사에 사사건건 걸고넘어지지는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정책들은 그 덩어리가 크고 따라서 그것에 걸린 판돈도 크게 마련인데, 과연 미국 투자자들이 가만히 참고만 있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최근 들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에 따른 국제심판 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이 이런 의문에 답을 준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우리의 국가가 취하는 모든 행위가 문제가 되겠지만, 특히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보건, 환경, 안전 등의 분야에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이 부분은 '경찰력'과 관련해 국제법에서 일반적으로 각국의 고유한 권한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NAFTA 11장은 이런 부분도 외국인 투자자 보호라는 목적에서 배제되지 않는다고 암시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실제로 지난 십몇 년 간 NAFTA에 참가한 세 나라의 시민단체들과 국제시민운동 세력이 가장 우려하고 반복적으로 항의해 왔다. NAFTA의 이 부분은 환경과 보건과 같은 분야에서조차 국가가 어떤 조치를 취할 때마다 그로 인한 외국인 투자자의 손익 변동을 먼저 고려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제는 국가가 외국인 투자자를 어떻게 하겠다는 의도도 없이 그저 공공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내놓는 일체의 선량한(bona fide) 입법과 행정조치들도 배상의 의무를 지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중재재판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의료 관련 시장은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관련된 보험과 연금 시장까지 더하면 의료산업은 급성장하는 분야이므로 미국의 투자자들이 이 시장에 들어올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노무현 대통령은 '서비스 경제'의 도래를 원하고 있으니 이렇게 되는 상황을 반길 것이다.
 

  
  그런데 이 분야의 투자가 개방된 뒤에 한국 국민들이 정부를 통해 의료나 보험, 연금 등에 대한 입법을 하거나 정책을 수립해 집행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 외국인 투자자들의 수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개혁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이 큰 규모의 시장에 들어온 그들이 과연 가만히 참고 있을까?
 

  
  지구화 상황에서의 캐나다 의료보험 체계의 미래를 짚어본 300페이지의 <로마노우 보고서(Romanow Report)>(2002)는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의료보험 시장에 들어 온 외국인 투자자와 사적 기업들이 현실적으로 캐나다의 의료보건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행위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실제로 그렇게 될까? 그것들은 그저 가정과 추측에만 기반을 둔 지나친 피해망상의 시나리오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을 맡는 국제 중재재판소들도 다 공정한 재판절차를 운영할 것인데 무리하게 보이는 투자자들의 논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도록 허용하겠는가? 과연 국제 중재재판소들이 애매하고 포괄적인 '수용' 개념을 설마 그대로 적용하겠는가? 또 보건이나 환경과 같은 각국 고유의 영역까지 무시해가면서 오로지 투자자산의 가치 변화만을 고려해 판결을 내리겠는가? 이런 것 저런 것 다 감안해서 균형 잡힌 판결을 내리도록 할 제도적 장치가 있지 않겠는가? 괜한 요란을 떠는 것일 테지.
 

  
  하지만 국제 중재재판소들이 실제로 운영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각각의 국제 중재재판소는 서로 독립적으로 심사하고 판결하며, 사건의 유형 별로 구속력 있는 판례가 쌓이거나 그런 판례에 대해 일관성을 갖춘 판결을 내려야 할 의무도 없다. 따라서 분쟁의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판결이 나오게 마련이다.
 

  
  게다가 수용에 관한 조항이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대해 누구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특히 외국인 투자의 자산가치 감소의 경우 도대체 어느 정도 가치가 감소해야 수용이라고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와중에 있다.
 

  
  미국 기업인 메탈클래드(Metalclad)와 멕시코 정부 사이에 벌어졌던 중재재판에서 나온 판결은 이런 논란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이 사건은 배상금의 규모가 컸던 데다가 환경 및 민주주의의 문제 등과도 얽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메탈클래드에 대해 쓰레기 폐기장 설치 허가를 취소한 멕시코 정부에 국제 중재재판소는 배상의 책임을 지웠다. 배상금 규모는 무려 1억6000만 달러였다.
 

  
  중재재판소는 이 사건에 대한 판결문에서 간단하게 잘라 말한다. "본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환경보호 조치와 같은 동기라든가 의도 등은 고려하거나 결정할 필요가 없다"고. 고려해야 할 문제는 오로지 '투자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가' 하나뿐이라고. 그리고 수용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NAFTA에서 수용이란 공개적이고 고의적이며 자인된 '재산 가져가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 암암리에 행해지거나 고의성이 없더라도 소유권을 훼방하여 그 소유자로부터 '사용권'이나 '그 소유를 통해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의 전체 혹은 상당한 부분을 빼앗는 결과를 낳을 경우에는 비록 투자대상국이 그로 인해 명백한 이득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해도 그런 소유권 훼방은 수용에 해당한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경제적 이득(reasonably-to-be expected economic benefit)'이라는, '자산'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로써 수용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고의성이 없는(incidental)' 경우라 해도 국가의 어떤 조치로 인해 투자자산의 가치가 감소되는 '결과'가 초래된 경우는 모두 배상의 대상이 된다는 내용에도 주목해야 한다.
 

  
  즉 메탈클래드 사건을 담당한 중재재판소는 환경 문제에 대한 국가의 '경찰권(police power)'도 인정하지 않았고, 국가의 조치가 '선량한 동기'에 의한 것이었는지 여부도 묻지 않았다. 게다가 이 중재재판소는 '수용'을 정의하면서 대단히 확장된 의미의 '소유' 개념을 사용했다.
 

  
  이렇게 볼 때 위에서 우리가 제기한 우려는 비현실적인 기우가 아닌 것이다. 기우이기는커녕 그 반대의 상황보다 현실화 가능성이 훨씬 높은 실질적인 가능성이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NAFTA 11장을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이나 투자협정들에 들어 있는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가 투자대상국의 민주주의, 헌법질서, 환경, 보건, 경제구조 등을 실질적으로 건드리고 훼손한 사례들이 도처에 허다하며, 비단 NAFTA뿐만 아니라 EU나 UNCTAD 등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한 수많은 논쟁과 연구와 개선책 제시가 이어지고 있다.
 
 

  
  정부를 쫄아들게 만드는 된서리 효과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를 이용해 투자대상국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입법 철회나 거액의 배상금만인 것도 아니다. 제소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투자대상국을 쫄아들게 해 어떠한 입법이나 행정조치도 아예 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규제당국에 대한 된서리(regulatory chill) 효과'다.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를 활용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는 단 하나, 즉 소송비용이다. 대략 몇 백만 달러에 달하는 소송비용의 부담으로 인해 배상의 규모와 승소의 가능성 등을 감안해 그 정도의 비용을 부담할 만해야 실제로 이 제도를 활용해 제소에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투자자들이 원하는 것을 값싸게 확보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제소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먼저 투자자가 투자대상국 관청에 '의도 통지(notice of intent)'를 보내게 되어 있는데, 이 단계에서 제소의 논리와 배상금의 크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면 국제 중재재판으로 가지 않고도 해당 국가를 뒤로 물러서게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벌어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일들은 '물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입법이나 정책 아이디어를 착상하는 단계에서부터 외국인 투자자들의 저항을 감안해 정부가 스스로 무산시키는 규제도 적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례로 필립 모리스 사건이 있다. 2001년 12월에 캐나다 정부는 담뱃갑에 '순한 맛(mild)'이라고 표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자 담배회사인 필립 모리스가 NAFTA 11장을 언급하면서 캐나다 정부에 항의서를 제출했다. 소송이 벌어질 경우 배상금 부담을 계산해본 캐나다 정부는 이 규제안을 철회하고 말았다.
 

  
  좀 더 최근의 사례도 있다. 캐나다 뉴브런즈윅 주의 입법위원회는 오랜 숙의와 전문가 자문을 거쳐 뉴브런즈윅 주의 상황에 맞는 공공 자동차보험을 도입할 것을 제안했고, 이 방안에 대한 뉴브런즈윅 주민들의 지지도 상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존의 자동차보험 회사들이 이번에도 NAFTA 11장을 언급하며 제소할 가능성을 암시하고 나섰고, 결국은 뉴브런즈윅 주지사가 입법위원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NAFTA는 캐나다가 새로운 공기업을 설립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권리도 결국에는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투자자나 외국 기업의 이익을 크게 건드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공기업이란 것은 그 정의상 국민경제의 형평과 균형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되는 것이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시장에 관여하고 부의 재분배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니 NAFTA에 규정된 공기업 설립의 권리가 제대로 지켜질 리가 없다.
 
 
   
 
  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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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용 방패'가 '공격용 창'으로 변하다

 

  [한미FTA 뜯어보기 111 :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정치경제학(5)] 투자자 보호장치
  2006-10-02 오전 9:22:12
  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한미 FTA 협상에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도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했을 뿐, 그 구체적인 내용과 이에 대한 정부의 협상방침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이 추진하거나 성사시킨 각종 자유무역협정과 투자협정들의 대표 격이자 그 표준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를 기준으로 이 제도를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한미 FTA는 NAFTA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NAFTA 플러스'라는 말이 양국 관료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니 그렇게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는 외국에 투자하는 이들의 이익과 재산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외국에 투자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말할 것도 없이 투자대상국에서 예기치 못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 자신이 투자해 놓은 자산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이다.
 

  
  과거 멕시코의 카르데나스 정부에서 쿠바의 카스트로 정부를 거쳐 칠레의 아옌데 정부와 1970년대 말의 이란 혁명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 자본가들이 투자대상국에 갖고 있었던 공장과 기업을 순식간에 국유화당해 빼앗기는 악몽을 얼마나 많이 겪었던가? 미국 자본가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의 자본가라 해도 이러한 위험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나라에는 투자를 할 리가 없다. 그러니 투자협정이나 자유무역협정에 그런 제도를 집어넣는 것은 당연하다고 많은 교과서에 씌어 있고, 우리나라 외교통상부도 이런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속 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구화된 21세기 세계경제에서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국 투자자들을 위해 일정한 보호장치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반대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 보호장치가 하필이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라는 논란 많은 제도여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의를 갖고 있다. 정부 관리들은 그동안 이 제도가 시행되어 온 과정과 그것을 뒷받침한 이론을 살펴보았는가? 누군가가 말했듯이 "이 제도는 1990년대 들어 투자자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아니라 투자자들이 투자대상국의 정치와 사회를 공격하는 창으로 변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물'이 아닌 '자산'이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다
  
  NAFTA 11장에 나오는 '투자자의 이익 보호'라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출현했는지를 살펴보자. 다만 그 전에 잠깐, 19세기 이후 미국 법률의 역사에서 '사적 소유'와 '수용(收用, expropriation)'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돌아보아야겠다. 사적 소유와 수용은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를 떠받치는 기본 개념이고,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가 국제 중재재판에서 해석되고 시행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관행이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 특히 제5수정조항(Fifth Amendment)과 제14수정조항(Fourteenth Amendment)에 명기된 '사적 소유 보호' 개념은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이래의 영국 보통법(Common Law) 전통을 잇고 있다. 그 요점은 아주 간단하다. 정부는 개인의 사적 소유물을 가져갈 수 있지만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고, 적절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그 개인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에서 쓰레기 폐기장을 짓기 위해 나의 알토란같은 땅뙈기를 가져갔다면? 이 경우에는 나라가 공공의 목적을 위해 내 땅을 가져간 것인데다가 관련 법절차를 모두 거친 '수용'일 테니 내가 무조건 나의 사적 소유권을 내세워 나라의 조치에 반대할 수 없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분명 나에게 그 땅의 가치에 맞먹는 배상을 해야 한다. 이는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이다. 이처럼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법의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명쾌함도 어디까지나 소유의 대상도, 수용의 대상도 다 '토지'와 같은 가시적인 사물(thing)인 게 분명할 때에나 가능하다. 미국이 남북전쟁을 거쳐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 뒤에는 소유의 주요 대상이 사물이 아닌 온갖 자산(asset), 즉 소득을 창출해주는 모든 것이 된다. 이에 따라 사적 소유의 대상은 토지와 같은 구체적 '사물'이고, 수용이란 사물을 맘껏 사용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라는 단순명쾌한 보통법의 관념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1872년의 '도축장 사건(Slaughtering House Case)'을 보자. 당시 루이지애나 주의회는 루이지애나 시내에서 도축장을 독점적으로 운영할 권리를 특정 법인에 주고, 모든 도축업자들은 그 도축장에서 소정의 사용료를 내고 도축을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졸지에 터무니없이 높은 도축장 사용료를 내게 된 도축업자들은 루이지애나 주의회의 조치가 자신들의 사적 소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연방 법원에 제소했다.
 

  
  그러자 대법원 판사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사적 소유의 대상은 소유자가 갖고 있는 '사물'인가, 아니면 그 사물을 사용하여 벌어들이는 '화폐적 가치'인가가 쟁점이었다. 만약 앞쪽 정의가 맞는다면 루이지애나 도축장 사건은 아무런 사적 소유의 침해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주정부가 도축업자들이 갖고 있는 사물, 즉 그들의 도축장비나 고객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며, 그들은 그 전과 똑같이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뒤쪽 정의가 옳다면 도축업자들은 명확하게 큰 금전적 손해를 보게 되었고, 따라서 주정부가 헌법을 어긴 것이니 마땅히 그 법을 철회하든가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872년은 아직 전통적인 보통법의 사고방식이 강한 때였기에 결국 대법원의 판결은 '사적 소유의 대상은 사물이며, 따라서 주정부는 잘못이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 직후인 1880년대의 미국은 그렇게 소 몰고 내 땅에 가서 농사 짓고 돌아와 씻고 잠자던 예전의 평온한 세상이 아니었다. 철도가 뚫리고 땅투기가 벌어지고 주식 물타기라는 신종 금융기법이 개발되는 등 한마디로 세상만사를 '나의 수익 창출능력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밴더빌트, 카네기, 모건, 록펠러 등 대자본가들이 온 사회를 헤집고 바꾸어버리는 '날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의 시대였다. 사적 소유의 법적 정의도 그래서 점점 더 '화폐가치' 쪽으로 기울어진다.
 

  
  미네소타 주정부는 철도 건설 과정에서 토지의 가치 변동을 겪게 된 땅주인들에게 배상을 하게 되는데, 그 배상액의 결정을 놓고 시비가 벌어져 마침내 1890년에 대법원까지 올라간다(Minesota Rate Case). 주정부는 "정부에서 토지의 소유권을 가져간 것이 아니며 단지 토지의 가치 삭감만 일어났으니 사적 소유가 침해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 문제는 헌법적 사안이 아니라 주정부의 재량 아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땅주인들은 "비록 정부에서 소유권을 가져가지 않았다 해도 토지의 화폐가치가 떨어졌으니 주정부가 우리의 사적 소유물을 수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배상액은 주정부가 결정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한다(미국 헌법 제5수정조항은 배상의 기준을 시장가치에 둔다).
 

  
  대법원은 어떻게 판결했을까? 뜻밖에도, 사적 소유의 대상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미래수익 창출능력'이라고 정의하면서 땅주인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따라서 미네소타 주정부가 자의적으로 배상액을 결정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한다. 20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사적 소유의 법적 정의가 정반대로, 다시 말해 단순한 '사물'에서 '사물을 통해 벌어들일 화폐가치', 즉 '소득창출 능력'으로 바뀐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 더욱 극적인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체적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 위에 덧씌워진 '소득창출 능력'과 같은 추상적인 것이 중요하다면, 물질적 형태가 있든 없든 소득창출을 가져다주는 것은 모두 사적 소유를 주장할 대상이 된다는 인식이 퍼졌다. 이에 따라 '무형자산'들도 당연히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무형자산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됐다. 의회나 정부가 공공의 목적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한다 해도 그 조치가 누군가의 '소득창출 능력'을 감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 조치가 구체적 사물과 관련된 것이건 무형의 각종 사실들(facts)과 관련된 것이건 사적 소유의 침해인 수용에 해당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그 조치를 철회하든가, 아니면 그 조치로 인해 발생하는 금전적 손해를 배상하든가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자. '무형자산'이란 사실 그 포괄범위가 넓으면서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무형자산에는 특허권이나 사업권과 같이 비교적 구체적인 것도 있지만 대중적 평판, 기업의 이미지, 더 나아가 그 이름도 아리송한 '굿윌(goodwill, 영업권)' 등 실로 '기업의 소득창출에 도움이 되는 모든 사실관계'가 다 들어간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만한 조치는 모조리 사적 소유의 침해가 되니, 정부는 조치를 철회하든가 '수용의 대가'를 치르든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그런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법의 임무가 된다면?
 
 

  
  1980년대에 시작된 반전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고 해보자.

  
  "나는 번화가 중에서도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 조그만 토스트 집을 열었다. 워낙 큰 길을 끼고 있어 행인이 많았고, 신호가 바뀌는 주기도 길었다. 그래서 아침 출근 때에는 신호를 기다리다가 향긋한 빵 내음에 취한 사람들이 가게로 엄청 꼬여들었다. 그야말로 '길목'이라는 무형자산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시청에서 신호등을 없애고 대신 그 자리에 지하도를 만들기로 했다. '길목'은 없어졌고, 사람들은 빵 내음은 맡을 틈도 없이 지하도 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매상이 절반으로 줄었다. 결국 시청은 지하도를 만듦으로써 나의 무형자산을 없앤 것이니 내 사적 소유를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시청은 그 지하도를 없애거나 내게 보상을 해야 한다."

  
  그럴까? 그렇다면 정부와 의회는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입법을 할 때 관련되는 사회적 관계와 사실들을 모조리 다 살펴서 아무도 그로 인해 수입이 떨어지는 일이 없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일개 토스트 가게 주인이 위와 같은 주장을 한다고 하니 터무니없어 보이겠지만, 만약 무형자산의 소유자가 철도왕 밴더빌트,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금융왕 모건과 같은 사람인데 그가 무형자산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선다면 대단히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돈으로 고용한 변호사들은 두었다가 무엇을 할 것인가. 대자본가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조치를 정부가 취하려고 할 때마다 변호사들을 내세워 그 조치를 간단하게 물리친다.
 

  
  '사적 소유'에 대한 이런 포괄적인 정의는 20세기 초에 미국 자본주의의 관행이 되어버렸고, 결국은 대자본가 몇 명의 사업상 이익에 의해 온 나라가 휘둘리는 상황이 조성되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래서 1920년대의 걸출한 미국 지식인 두 명, 즉 경제학자인 존 커먼스(John Commons)와 사회철학자인 모리스 코헨(Morris Cohen)은 서로 일치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예전처럼 사물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사회적 사실관계로까지 그 대상이 확장된 '사적 소유'란 사실상 사회적 권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더 나아가 코헨은 이러한 권력은 이미 전통적인 국가의 권력, 즉 주권(sovereignty)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서 뉴딜(New Deal) 정부가 사적 소유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관행에 쐐기를 박고, 각종의 규제와 법적 조치로 그 의미를 좁혀나가기 시작한다. 세월이 흘러 1960년대가 되면 사적 소유가 그 전에 가지고 있었던 대부분의 사회적 권력은 국가의 행정과 입법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사적 소유의 의미는 '국가가 허용하는 만큼의 소득을 취득할 권리' 정도로 축소된다.
 

  
  그런데 1980년대가 되자 이야기가 다시 반전된다.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라 할 레이건 정부 시절에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자본가들과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이 사적 소유권의 확장을 노리고 '규제에 의한 수용(regulatory expropriaton)'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이것은 정부가 사적 소유물을 가져가거나 물리적인 침해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정부의 규제로 인해 특정한 소유권이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로 인한 피해만큼의 금액을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시내의 목 좋은 곳에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 하필 그 지역에 대한 정부의 규제, 예를 들어 건물의 높이나 지하실의 깊이 등을 제한하는 규제가 도입되어 그 땅에 수익성 있는 건물을 지을 수가 없게 된다면? 이 경우에 비록 정부가 내 소유권 자체를 건드린 것이 아니고 도입된 규제도 공공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 해도 나는 그 금싸라기 땅을 놀려두는 수밖에 없으니 금전적 피해를 본 것이고 마땅히 정부가 그만큼을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정부의 각종 규제를 철폐한다는 레이건 시대의 구호와 맞물려 상당한 사회적 힘을 얻게 되었다.
 

  
  미국 대법원은 이런 경우에 정부 편을 들어주는 역사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정부의 조치로 인해 물리적 침해는 일어나지 않고 소유물의 경제적 가치가 감소된 것만으로는 그 가치 감소가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 해도 해당 정부 조치가 수용임을 증명하는 데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미국 대법원의 판례에 의해 확립된 원칙이라는 것이 1993년에 미국 법원에서 나온 한 판결(Concrete Pipe and Prods. of Cal., Inc. v. Construction Laborers Pension Trust for S. Cal.)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사회의 전반적 변화 및 보수화가 서서히 미국 법조계와 헌법학계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2년의 한 판례(Lucas v. South Carolina Coastal Council)에서는 어떤 종류의 규제 조치는 토지에 대한 수용이 될 수 있음을 법원이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엡스타인(Richard Epstein)을 비롯한 여러 법학자들은 이런 정도의 판결도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소유물의 가치를 감소시키는 규제는 사실상 모두" 그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의 의무를 규제당국에 지운다는 의견을 표명했고, 이런 의견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법과 제도의 관행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미국의 법조계 내에는 공공의 목적을 위한 정부의 규제 조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흐름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에 '규제적 수용'이라는 개념이 순식간에 중심적인 법적, 제도적 관행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모든 투자자들이 실현되기를 원하는 '규제적 수용' 개념이 이상적으로 펼쳐진 국제조약 규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NAFTA의 11장에 명기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 제도 조항이다.
   
 

 


 

  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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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공세', 국제법 체계를 완전히 뒤엎다

 

  [한미FTA 뜯어보기 110 :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정치경제학(4)] 투자협정
  2006-10-01 오후 3:08:01
  특정 국가가 '익명의 모든 외국 투자자들'에게 '모든 투자'와 관련해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ICSID)의 중재심판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 일괄적인 계약 같은 것은 없을까? 있다. 투자협정(Bilateral Investment Treaty)이 바로 그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국제 중재심판
  
  특정 국가가 어떤 특정한 외국 투자자와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특정 국가와 협정을 맺는다면, 그 협정은 국가와 국가 간에 맺은 조약이니 흠결 없는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다. 그 협정에서 상대 국가에 "당신네 나라의 모든 투자자들은 우리나라에 투자하는 모든 계약과 관련해 생기는 모든 분쟁을 ICSID의 중재심판 회부함으로써 보호받을 수 있다"는 일괄적인 동의를 해주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 ICSID는 투자협정의 양 당사국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외국 투자자 대 국가의 분쟁에 대해 구속력 있는 중재심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투자협정은 국가의 주권을 침해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불만을 제기하는 외국 투자자가 나타나면 국가는 언제든 ICSID로 불려 나가야 하고, 제기된 불만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그 국가는 ICSID의 중재심판 결과에 복종해야 한다. 심지어 그 불만이 주권국가의 고유한 입법조치나 행정조치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볼 때 투자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국가주권을 외국 투자자와 ICSID에 양도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어떤 나라든 그야말로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외국인 투자의 단비를 목 타게 기다리는 상황이 아닌 한 다른 나라와 투자협정 같은 것을 쉽게 체결하려 하지 않는다. 투자협정 체결은 195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있긴 했으나, 몇몇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에서 드물게 벌어지는 일일 뿐이었다. 이처럼 투자협정을 통해 국제 중재심판에 대한 복종을 약속한 나라가 많지 않았고, 따라서 ICSID라는 장이 만들어졌어도 국가를 상대로 한 분쟁사건을 들고 그 문을 두드리는 경우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적었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 지구화가 본격화되면서 각종의 양자 간 또는 다자 간 투자협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결과로 현재 그 수가 2000개를 넘게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1965년에서 1994년까지 30년 간 32건에 불과했던 ICSID 중재심판 건수는 1995년에서 2004년까지의 불과 9년 동안 140건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ICSID와 달리 분쟁발생 사실을 공표할 의무가 없는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나 국제통상회의의 국제중재법원(ICA)과 같은 그밖의 국제분쟁 조정기구들의 중재심판 건수까지 더하면 국제 중재심판은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ICSID에서 일하는 법률가 오바디아(Eloise Obadia)는 2002년 취리히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면에서 양자 간 및 다자 간 투자협정과 ICSID의 관계는 '백마 탄 왕자님(Prince Charming)'과 '잠자는 미녀(Sleeping Beauty)'의 관계와 같다. ICSID는 생겨난 후 30년 동안에는 '잠자는 미녀'와 흡사했다. 등록되는 제소 건수가 연평균 한두 개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양자 간 및 다자 간 투자협정이 확산되자 ICSID는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서 우리는 1990년대에 들어 투자협정이 왜 그렇게 급증하게 됐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의문에 답하는 것은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2차대전 이후 지구화의 3단계
  
  2차대전 직후의 세계경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지구적 경제'라고 할 수 없었다. 지구 표면과 인구의 상당부분이 공산진영에 속해 있었고,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 다수도 사회주의나 혁명적 민족주의에 근거한 국가주의적 경제체제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방세계에서도 대부분의 나라들이 사회민주주의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체제였고 무역, 통화, 노동, 조직, 기업 지배소유구조 등 모든 면에서 각종의 규제들이 존재했다. 이런 2차대전 직후의 세계경제 모습은 지구적 차원에서의 자본과 상품과 서비스의 완전한 자유이동이라는 자유무역의 이상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그래도 기록적인 고성장 기조에 힘입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존속해 오던 지구적 체제는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해체되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지구화(globalization)의 세계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대략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반에 미국 달러화를 기축으로 하는 고정환율제가 무너지고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 2차대전 직후의 세계경제 체제에 최초의 충격이 가해진 것이 그 첫 번째 단계였다. 기존의 전후 세계 정치경제 체제를 떠받치던 포디즘적 생산체제는 통화와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전제조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전제조건이 허물어진 것이다.
 

  
  그 충격은 스태그플레이션 등 경제적 혼란 외에 내란, 국제분쟁 등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 영국과 미국의 보수세력을 필두로 노동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코포라티즘적 사회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또 엄청난 양의 오일달러가 서방의 은행을 거쳐 제3세계 국가의 외채로 흘러가고 자본이동이 본격화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이 극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그 두 번째 단계였다고 할 것이다. 이 기간에 미국의 통화주의자들은 인플레이션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살인적인 금리인상을 감행했고, 이 때문에 이미 많은 외채를 빌려 쓰고 있던 제3세계 국가들이 속속 외채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군사예산을 폭발적으로 늘려 소련을 압박하는 '제2의 냉전'에 착수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80년대에 제3세계에 시장개방이 확산된다. 외채 위기를 맞은 개발도상국에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들어가 악명 높은 '구조조정(structural adjustment)'을 감행함으로써, 폐쇄적적이던 개발도상국의 자급자족적 거시경제 구조를 순식간에 개방시켜버린다.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 종속이론을 탄생시키고 민족경제를 강조하던 나라들도 이제는 외국자본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가 하면, 무역과 금융을 개방하고 공기업을 민영화하거나 해외에 매각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진영도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과거 공산진영에 속했던 나라들에 새로 들어선 정권들도 거의 예외 없이 '시장과 개방만이 살 길'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 후로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지구화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고, 이 시기를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3단계 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버티던 '아시아적 자본주의' 국가들도 1997년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 지구적인 '페레스트로이카'의 대열에 합류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전후 세계를 이루고 있었던 '갑각류처럼 단단하고 폐쇄적인 각국의 거시경제 구조'를 개방시키는 작업이 이 시기에 거의 완료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지구화라는 이상은 실현된 것일까.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민경제' 운운하면서 해묵은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고집하던 갑각류들의 껍질은 거의 벗겨졌지만, 그 껍질 속에는 기존의 가지가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제도와 관행과 장치들이 엄존하고 있다.
 

  
  1990년대에 피어스 브로스넌을 내세워 새롭게 단장한 007 영화 제목대로 진정으로 '전 세계를 무대로(All the World's A Stage)' 자본이 지구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수익의 가능성을 열어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남은 장벽들을 제거하고 무력화시킬 효과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즉 지구화의 단계는 이제 거시경제의 차원에서 미시적, 정치사회적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전 세계에 강제되고 있는 '신헌정주의'
  
  199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 정치학계에서 가장 뚜렷하게 부각된 열쇠말 하나는 바로 '지구적 통치(global governance)'였다. 양대 강국을 중심으로 편제됐던 냉전적 세계질서는 사라졌다. 그 후의 세계에 하나의 자율적 질서가 성립하도록 전 지구적 차원의 보편적 규범(norm)을 창출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바로 핵심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논의의 대상이었던 1990년대의 세계질서를 스티븐 길(Stephen Gill)과 같은 비판적 지구정치경제학자는 다른 시각에서 해석한다. 지구의 어느 곳에서이건, 자본을 투자한 자의 권리와 이익이 제일의 우선성을 가지며 지상의 그 어떤 권위와 권력과 법률도 그러한 자의 목표를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전 지구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와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신헌정주의(New Constitutionalism)'가 바로 그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지구적 통치의 규범'으로서 전 지구에 강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자 간 및 양자 간 투자협정, 그리고 그 핵심을 이루는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도라는 새로운 현상이야말로 그러한 '신헌정주의'를 현실화시키는 효과적인 장치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투자협정과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도는 몇 백 년 동안 유지돼 온 국제법의 체계를 한 번에 넘어서서 주권국가의 모든 통치행위를 외국 투자자의 이익이라는 기준에 따라, 그것도 국제 중재심판이라는 상인법적 전통의 사적 기구를 통해 무력화시키는 무기가 되고 있다.
 

  
  특히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가 도입됨에 따라 이제 국제 투자자들은 개별 국가 안에 존재하면서 투자의 수익성에 장애가 되는 오만 가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장벽들에 대해 예전처럼 하나하나 악전고투를 벌이며 싸울 필요가 없게 됐다. 국가를 책임자로 몰아 소송으로 국제법정에 불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원래의 국제법 체계에서는 도저히 동렬에 설 수 없었던 국가와 외국 투자자가 이제 동급으로 맞먹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국가가 외국 투자자의 수준으로 내려와서 함께 상업적 행위자 차원의 동급이 된 것이 아니다. 외국 투자자가 주권국가와 동급의 수준으로 올라가서 그 입법활동과 행정활동을 분쟁의 대상으로 삼을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게다가 뒤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러한 분쟁이 벌어지는 곳은 공적 이익을 비롯해 다양한 고려가 이루어지는 보통의 공공 재판소가 아니라 당사자 둘과 심판관 한 명이 조용히 모여 상업적 고려에만 근거해 대충 합의를 보는 중재심판소다. 이런 중재심판소는 과거의 상인법이 부활한 것인 동시에 예전의 상인법과는 전혀 다른 국제법적 위력도 갖춘 존재다.
 

  
  이러한 포복절도할 사태에 대해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의 반 하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투자자 보호 체제는 상인법의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 상업중재와는 달리, 민간인들 간의 행동을 규제하거나 그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체제의 목표는 정부가 다국적 기업들을 규제하는 방법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자협정에 따라붙게 되는 투자자-국가 분쟁은 본질적으로 공적 분쟁, 즉 어떤 국가가 자기 영토 안의 개인들을 규제할 주권의 행사를 문제로 삼는 분쟁이다. 비록 이 체제가 국제 상업중재의 모델을 따르고 있고 사적 차원의 권위를 통치수단으로 삼고 있으나, 이 체제는 국제 상업이 아니라 국제 공법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여러 국가들의 권위로 뒷받침되는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개발도상국들은 그런 투자자 보호 체제를 포함한 투자협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김대중 정부 이래 우리나라의 경제관료들과 주류 경제학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입에 올린 핵심어가 바로 '외국인 투자 유치' 아니었던가. 우리 국가경제의 흥망성쇠는 모조리 여기에 달려 있다는, 그래서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은 절대선이요, 그것에 해가 되는 것은 절대악이라는 생각이 이미 우리 사회의 담론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이 이러하다면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이리하여 3단계의 지구화 전략의 마지막 단계, 즉 투자협정을 앞세운 자본의 공세와 '신헌정주의'가 세계 곳곳으로 힘을 뻗치게 된 것이다.
 

 

 

 
 

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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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창간 2006년 4월 26일
 
2006년 11월 30일 (목)
제 31 호
발행처 : 인권운동사랑방
편집인 : 박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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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문헌읽기] “자기방어를 방어하며”

- 휴이 뉴튼(Huey P. Newton), 흑표범당(The Black Panther Party) (1967.6.20)

"자신들의 더 나은 이익을 위한 규범과 법률을 만들고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가난한 이들의 의무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류의 기본적 인권 중 하나이다."

[인권연구_창] 발전권의 이론과 실천에 대하여 (1) (Arjun Sengupta, Human Rights Quarterly Vol. 24, 2002)

발전권이 인권으로 여겨질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발전권을 인권으로 인정하느냐와 발전권과 관련된 의무를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를 구분해야 한다.

[외침] 두레의 현대화, 공동체를 꿈꾼다

마을도서실 만들기 김영곤ㆍ김동애 부부를 만나

한때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김영곤 씨가 ‘마을도서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진보의 꿈은 무엇일까? 김동애 씨가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공부방을 진행하면서 얻은 대안교육의 경험은 무엇일까?

[논평] 원천봉쇄로는 봉쇄할 수 없는 외침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시위가 법의 이름으로 금지되는 현실 위에서 얼어붙은 인권을 녹이는 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폭도’라는 이름표를 기꺼이 달 준비가 되어 있다.

[디디의 인권이야기] FTA 반대를 넘어 삶의 권리 재구성하기

FTA에 반대하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 세계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의 권리를 다시 구성해내는 것이니까요.

[인권, 영화를 만나다]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켄 로치 감독, 2006

1920년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독립전쟁. “무언가에 반대하는 것은 쉽지만, 그 후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독립 원하는 인도네시아 식민지, 웨스트 파푸아

12월 1일 웨스트 파푸아 독립 지지 캠페인 열릴 예정

12월 1일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선포일을 기념하기 위해 모닝스타(파푸아 국기)를 게양한 두 명의 양심수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인도네시아 대사관 앞에서 진행한다. 이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시아 민중의 인권현장] 전범 처벌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라

진정한 '화해'를 위해 반드시 해야할 일

화해가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배상, 그리고 명확한 진상규명이 없는 한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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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보호 못하는 비정규 법안

[분석] 현행보다 후퇴, 차별시정은 커녕 모두를 비정규직으로

이꽃맘 기자 iliberty@jinbo.net
보호법 아니라 비정규직 양산법!

결국 비정규 관련 법안이 6년 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발에도 20여 분 만에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안은 2007년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법안을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법안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일까?

기본적으로 이 법안의 취지는 비정규직의 확산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시정하겠다는 미명하에 사용주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용을 합법적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법안의 시작부터 비정규직 확산을 막겠다는 의지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참세상 자료사진

현행 법안보다도 훨씬 후퇴한 비정규직 보호법?

일단, 이번에 통과된 법안은 현행 법안보다도 훨씬 후퇴된 법안이다.

‘기간제및단시간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안’은 근로기준법의 근로계약 기준인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과 사업완료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1년을 초과하지 못하도록”한 것을 “사용사유 없이 2년 동안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을 보장”하는 것으로 개악했다. 이제 2년 동안 아무 제약 없이 ‘합법적’으로 기간제 노동자들을 마음껏 고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은 현행 26개 업종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개악해 “근로자 파견업은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업무를 제외하고 전문지식, 기술, 경험 또는 업무의 성질 등을 고려해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업무”로 개정해 사실상 ‘네거티브’ 방식을 도입해 개악했다. 불법파견에 대해서도 현행 “불법파견이 인정되면 고용된 것으로 간주한다”라는 ‘고용의제’에서 “고용해야 한다”라는 말만 남은 ‘고용의무’로 후퇴했다.
 

 

정규직은 없다

그렇다면, 정부의 말대로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까?

노동계는 “오히려 1년 11개월짜리 기간제 노동자가 확산될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실제 이번에 통과된 법에서는 6개월, 1년, 1년 11개월 등의 기간으로 반복적으로 기간제 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싼 임금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하던 사용주가 2년 후에 더 많은 임금을 줘야 하는 정규직 노동자를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실제 경총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사용자의 90%이상이 정규직 전환에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사용자는 2년이 되기 직전에 기간제 노동자를 해고하고 또 다른 기간제 노동자로 그 자리를 채우는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기간제 노동자를 사용할 것이다. 정규직 전환은 없다.
 

 

‘합리적 이유’로 차별하게 만들어 준 비정규 법안

참세상 자료사진

정부는 이번 법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차별시정 조항을 만들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것은 “단시간 근로자임을 이유로 당해 사업 또는 사업장의 동종 또는 유사한 업무에 종사하는 통상근로자에 비해 차별적 처우를 하여서는 안된다”는 규정이다.

차별적 처우는 “합리적 이유없이 불리하게 처우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합리적 이유’가 있다면 차별해도 된다는 것이다. ‘합리적 이유’라는 추상적 개념은 절대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법원에게 넘어간 ‘합리적 이유’에 대한 판단은 “노동시장의 건강한 발전에 이바지”하는데 바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합리적 이유’가 밝혀진다고 해도 사용자는 1억 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면 그만이다.

 

 


"대답해라“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는 성명을 통해 “이 법안의 통과는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반에 해당하는 기간제 노동자들을 2년 주기 집단해고로 몰고 갈 것이고, 불법파견과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엄청난 양산이 초래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지적했다.

이 지적에 답하긴 커녕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앵무새처럼 또 다시 떠들었다.

“기간제(363만 명), 단시간(114만 명), 파견근로자(13만 명) 등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처우 금지, 시정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그간 우리사회의 양극화 문제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차별처우가 대폭 시정되고 개선될 전망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외치고 있다.

"정부와 보수양당의 비정규 악법 강행 통과는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 전체의 목숨줄을 빼앗아 버렸다"
 
결국..비정규법안 날치기 통과
김한길 원내대표, '비정규법안 재논의' 부인 혹은 부정
비정규법안 처리 무산, 재논의는 물 건너 간 듯
비정규 법안 법사위 통과 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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