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의 우회? 이론의 과잉과 이데올로기의 부재

 

로이 바스카,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이기홍 옮김, 후마니타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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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철 | 서강정치철학연구회 회원,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구조주의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에서 시작된 현대 언어 철학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실재 또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담론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담론은 아니지만, 모든 것은 담론‘적’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세계’에 대한 ‘관찰’이나 ‘진술’은 언제나 ‘이론적’ 혹은 ‘이론 부과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관찰 명제와 이론 명제를 구분하고, 이론 명제를 관찰가능한 명제로 환원함으로써 이론의 진리성을 확보하려는 경험주의 인식론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실재적인 대상을 언제나 언어, 담론의 틀 속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파악하는 ‘실재적 대상’이라는 것이 언제나 ‘이론적 대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이론적 대상은 어느 날 문득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론적․과학적 실천을 통해 생성된 것이며,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원재료가 된다. 실재적 대상과 이론적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 이들이 각각 독자적인 계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이론의 과학적 위상에 문제가 발생한다. 실재적 대상과 이론적 대상을 비교하여, 이론적 진리성 여부 곧 양자의 일치 여부를 묻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올해 초에 출간된,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후마니타스)은 바로 이런 이론적 정세에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의 철학적 지반을 다지고 이데올로기적 땅바닥을 청소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쓰인 글이다.1) 이하에서는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의 중심 개념들과 주제를 중심으로, 이런 이론적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시도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해 볼 것이다. 한편 로이 바스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를 경유할 수밖에 없는데, 로이 바스카와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 등 넓은 의미에서 ‘비판적 실재론’의 출발은 알튀세르의 초기 지식이론에 대한 불만과 비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2)



1. 자동적 대상과 타동적 대상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은 자동적(비이행적) 대상과 타동적(이행적) 대상의 구분에서 출발한다(9장, 「비판적 실재론이란 무엇인가」).3) 자동적 대상이란 인간의 의식 및 과학의 과정 밖에 존재하는 실재적 대상을 가리키며, 타동적(이행적) 대상이란 과학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 낸 인지적․이론적 대상을 말한다. 이런 구분은 매우 중요한데, 비판적 실재론은 타동적 차원의 대상들과 자동적 차원의 대상들 사이의 비동일성, 즉 사유와 존재의 비동일성을 단언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인식론적으로 경도된 근대 철학은, 자동적 대상과 타동적 대상 사이의 일치 여부를 보증해 줄 수 있는 확실한 기초를 찾으려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존재를 인식에 입각하여 정의하는 인식적 오류, 인간중심적 세계 인식의 오류를 범했다. 비판적 실재론은 실재를 탈인간중심화할 것을 역설하며, 존재와 사유, 자동적 대상과 타동적 대상 사이의 구분과 불일치에 대한 승인을 전제로, 과학을 자동적 객체들(실재하는 대상)을 재현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사유 속에 ‘타동적 객체들’을 창출하는 활동․실천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자동적 대상과 타동적 대상을 구분한다 하더라도, 과학이 세계에 대한 진술이라면, 과학의 진리성은 이론이 재현하려고 하는 대상과 이론 사이의 일치를 통해 증명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론과 대상 사이의 일치 여부 혹은 이론의 진리성을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을 비판적 실재론이 성공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가에 비판적 실재론이 설정한 기획의 성패가 달려 있다.




2. 부정의 철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이론의 선택(3장, “파이어아벤트와 바슐라르”)

 칼 포퍼(Karl Popper)의 반증주의에서 출발해 보자. 포퍼의 반증주의는 우리는 한 이론이 참임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단칭명제로 보편명제를 증명할 수는 없다’), 어떤 이론이 틀렸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자연에 이론을 들이대면, 자연은 ‘맞아’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나 ‘틀렸어’라고만 대답할 뿐이라는 것이다.4) 포퍼와 바슐라르에게 과학적 오류는 과학적 지식의 생산에서 하나의 본질적 계기를 구성하며 과학적 지식의 조건이었다. 이 점에서, 과학적 이론이란 이런 오류들을 제거해 나가는, 오류와 단절하는 과정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으며, 제 아무리 성공한 과학적 이론이라 해도 언젠가는 오류로 판정을 받게 된다.5) 우리는 언제나 상대적 진리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일면, 당연한 듯 보이지만, 상대적 진리에 대한 승인은 매우 중요하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 간의 이러한 구별은 모호한 것이라고 당신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이 구별은 과학이 나쁜 의미의 도그마, 즉 경직되고 고지식한 죽은 이론이 되는 것을 막기에 충분할 정도로 모호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흄과 칸트의 신봉자들의 신념론, 불가지론, 철학적 관념론, 궤변들과 우리 사이에 결정적이고 지울 수 없는 분리의 선을 긋기에 충분한 정도로 정확하다.”6) 이 점에서 이론의 진리성과 이론 선택의 합리적 기준을 설정하려는 노력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다. 운이 좋게도, 우리의 과제는 이론과 대상의 일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실재적 대상’의 반격에 맞서 우리의 이론을 굳건히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가다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시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만 하는 점은 ‘이론’에 대한 현대 과학철학의 관점이다. 소위 ‘구조적 이론관’이라고 표현되는 최근의 논의는 이론을 단일한 법칙 진술과 동일시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이나 반증주의자들의 이론관을 부정한다. 오늘날의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적 인식의 기본단위(이론)는 단일한 가설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연관 속에 있는 가설군 전체”로 파악한다. 따라서 과학 이론은 하나의 단일한 진술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론진술들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가 바로 라카토스(Imre Lakotos)의 ‘연구 기획’(Research Program)이라 할 수 있다. 라카토스에 따르면, 과학적 이론은 단일한 법칙 진술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복잡한 이론적 진술들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나아가 이 이론은 그 이론군의 핵심인 ‘하드코어’(hard core)와 그 하드코어를 보충하는 다양한 보조 가설들의 보호를 받는다. 라카토스에 따르면, 각 연구 기획의 핵심 가설인 하드코어는 직접적으로 반증되는 것이 아니라 보조 가설에 의해 보호되며, (나름의 하드코어와 보조 가설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연구 기획들 간의 경쟁이 연구 기획을 평가한다.7)


 여기서 문제는 세계에 대한 진리성을 주장하는 이론, 연구기획들이 현실에서는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합하고 갈등하는 이론들의 형태로 ‘복수’로 주어진다는 것으로, 이에 따라 어떤 이론을 좀 더 과학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게다가 우리는 대체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기존 거인들의 목말을 탄다. 문제는 어떤 거인의 목말을 탈 것인가 이다. 바스카가 보기에, 이 기준을 합리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상대주의에 굴복할 수밖에 없거나, 알튀세르처럼 다시 당파적 선택의 문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8)


 이론과 대상, 이론적 대상과 실재적 대상간의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론의 진리성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바스카가 제시하는 것은 이론들 간의 비교를 통한 간접 증명이다. 바스카는 이를 라카토스의 과학적 연구 기획의 방법론을 좇아 ‘이론들’ ‘사이’에서의 선택으로 개념화한다. 즉, (타동적 객체로서) 어떤 이론이 (자동적 객체로서) 대상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이론 T가 그것의 서술 아래에서, 다른 이론 T′가 그것의 서술 아래에서 설명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현상들에 더하여, T′는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중요한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비록 두 이론이 공약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주 간단히 T가 T′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연구 기획이 확인된 경험적 내용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으면, 즉 그것의 이론적 성장이 그것의 경험적 성장을 예측한다면 진보적인 것이다. 반면 그것이 그렇지 않을 때에는 퇴보적인 것이다.” 부연하자면, 이 전략은 이론들 간의 경쟁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이 중 좀 더 많은 경험적 내용을 갖고 있으며, 자연과 실재 대상의 반격에 맞서 이론의 하드코어는 유지하면서도, 보조 가설들을 통해 하드코어를 잘 방어해 내는 이론을 좀 더 과학적(진보적)인 이론으로 승인한다. 바스카는 우리가 항상 한 대상에 대해 경쟁하고 있는 이론들을 만나게 되며, 대개의 경우 여러 경쟁하는 이론들 가운데서 어떤 이론이 가장 과학적인지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3. 예측과 통제를 넘어, 설명과 비판, 해방의 사회과학으로

 이제 비판적 실재론의 기본 주장들을 토대로, 비판적 실재론이 겨냥하고 있는 주된 논적인 경험주의 비판을 살펴보도록 하자(4장, “과학의 이데올로기들로서의 철학들: 실증주의 비판에 부쳐”). 무엇보다, 경험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것의 현상주의적 성격에 기인한다. 예컨대, 오늘날까지도 경험주의적 인식론에서는 기본적으로 흄적 인과성만을 인정해왔다. 흄적 인과성이란 주지하듯이 사건과 사건간의 불변적 결합에 기초한 것이다. 바스카는 이러한 견해를 “인과법칙과 그것의 경험적 근거를 잘못 동일시한 것”이라 비판한다(2장, 「자연과학에서의 실재론」). 반면 실재론에 따르면 “A에 의해 자극되었을 때 B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 그러한 자연적 기제(mechanism) M이 있다면, 그리고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A와 B의 연쇄가 필연적인 것”이 된다. 즉 A와 B의 연쇄가 인과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제 M이 인과 기제가 되는 것이다. A와 B의 지속적인 연접은 어떤 기제 M이 인과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경험적인 근거일 따름이다.


 이 점에서 “인과법칙[M]은 사건들의 유형들[A와 B의 불변적 결합]과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며, 현상 수준보다 깊은 존재론적 깊이를 가진다. 바스카는 이를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1) 실재적인 것(the real: 실체들, 기제들 등으로 이루어지는), 2) 현실적인 것(the actual: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3) 경험적인 것(the empirical: 경험들로 이루어지는)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실재적인 것(the real)은 우리의 경험과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인과 기제(causal mechanism)를 의미한다. 반면, 현실적 영역은 그 존재하는 것들의 운동 결과로 일어난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영역이며, 경험적 영역은 그런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경험들로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요컨대, 경험적 영역은 다른 두 영역에 대해 부수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과 기제는 우리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고 해도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대개의 경우 현실의 개방체계에서는 다양한 인과적 기제들이 중첩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이런 인과 기제를 실험실 속에서만 명확히 파악할 수 있으므로, 각각의 인과 기제들은 하나의 경향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반면, 오늘날까지도 주류 사회과학 방법론은 여전히 경험적 규칙성과 사례󰠏확증(또는 반증)의 독단에 기초하고 있다. 즉 법칙은 경험적 규칙성이거나 또는 그것에 의존하며, 그것들에 대한 적절한 통계와 예측을 통해 확증(또는 반증)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스카가 보기에 이런 입장은 존재하는 것을 경험적인 것으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지나치게 ‘제한적’이며, 이에 기초한 이론을 실재에 대한 올바른 재현으로 승인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으로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다.


 이 점에서, 바스카는 자연 발생적인 사유의 방식과 이것을 반영하는 철학적 경험주의는 그 실재를 신비화․인간화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경험주의는 사회적 실천인 과학을 통해 파악된 (사회적․이론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로 만들기/믿기 때문이다. 사회적․이론적 사실들을 자연화함으로써 탄생하는 물신주의는, 그 사실들을 발생 또는 유지시키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설명을 좌절시키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게 된다. 요컨대, 현실을 탈역사화하고 영구화한다는 말이다. 이와 달리, 비판적 실재론은 인간과학들이 본래 비판적이며 자기 비판적이라고 파악한다. 즉, 사회적 객체들에 대한 해명은 가치가 주입되어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치를 주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그리고 원시 과학적) 견해에 대한 과학적 비판은 본질적으로 해방적 충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일정한 허위의식, 또는 ‘허위’라고 지적할 수 있는 어떤 일정한 의식의 필연성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의식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그것의 해소를 지향하는 행위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뒤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제6장, 과학적 설명과 인간 해방).




4. 나오며: 다시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해 보자. 앞서 살펴보았듯이, 비판적 실재론자들은 타동적 대상과 자동적 대상, 이론적 대상과 실재적 대상 사이의 일치 여부를 보증해 줄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철학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또는 자의적인 결정은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즉, “우리는 어떠한 특정 이론에 ‘합리적 근거’를 부여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 타당성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그 기준은 라카토스의 연구 기획의 방법론을 통해 도입된다. 즉, “어떤 연구 기획이 확인된 경험적 내용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으며, 즉 그것의 이론적 성장이 그것의 경험적 성장을 예상하게 하면, 즉 그것이 계속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예측한다면 진보적인 것이다. 반면 그것이 그렇지 않을 때에는 퇴보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라카토스의 방법론에 대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론들이 태어나는 순간에는 그것들이 장차 성장하고 향상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기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면, 퇴조하고 있는 (퇴보적인) 추세의 연구 기획들도 회복되고 예상하지 못한 광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것들을 기각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천동설에 비해 지동설은 출현 당시 경험과 사례가 적었고 따라서 퇴보적이었다가, 어느 시점을 지난 이후 진보적으로 바뀌었듯이, 어느 특정 시점에서 경쟁하는 이론 가운데 한 이론이 경험적 우세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 우세는 장차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어느 시점에서 한 이론이 더 많은 경험적 내용을 갖고 있다고 인정한다고 해도, 그 이론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경쟁하는 두 이론 가운데,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경험적 사례와 설명력을 지니고 있어야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으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연구기획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지가 모호하다. 게다가, 만약 경쟁하는 연구 기획이 이론적 설명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 자체로 갈등적이라면, 그 싸움의 종결점을 판정해 줄 합리적인 기준이 존재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다.


 사실 이런 주장은 비판적 실재론자들보다 먼저 부르주아 사회과학 진영에서 제기되었다. 그 최초의 전쟁터는 경험주의라는 지반이었으며, 이 이론적 전투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라는 오명과 함께, 과학 영역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물론, 이제는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새로운 지형으로 전쟁터가 변하기는 했다. 하지만, 실재론이라는 그 전쟁터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지는 않는다. 비록, 비판적 실재론과 라카토스 연구기획 방법론의 도움으로, 이론의 전쟁터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더는 쉽사리 마르크스주의 이론틀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버팀목을 얻긴 했지만, 적들을 설득하고, 항복을 받아내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긴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두 개의 과학이라는 입장만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곧, 역사유물론의 당파적․갈등적 성격을 드러내는 (후기?)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과 마주치게 된다. 왜 알튀세르가 자기비판 이후, 바스카와는 달리, 이론의 진리성 기준과 이론들 사이에서 선택의 문제 등을 포기하며, 곧장 갈등적, 분파적 진리관으로 나아갔을까? 흔히 토픽적 지식론이라 불리는 후기 알튀세르의 지식 이론은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구분에서 벗어나, 이론의 갈등적‧분파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는 이론이 갈등적, 분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사회과학이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 혹은 ‘사회적인 것’이 그 자체로 갈등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9) 즉, “계급사회와 같은 필연적으로 갈등적인 현실 속에서는 어떤 위치에서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0) 이 점에서 역사 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을 포함하여, ‘사회적인 것’을 다루는 모든 사회과학은 이미 그 자체로 갈등적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사회에 관한 과학적 이론은 바스카도 지적하듯이, 기존 사회의 구성에 대해서는 설명적이지만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초역사화되고 물상화된 ‘사회적인 것’을 비판하면서, 즉각 사회에 대한 재구성 요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로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상황이 이렇다면, 역사유물론과 같은 사회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단순히 ‘과학적 이론’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며, 다시 ‘이데올로기’로 전화됨으로써 대중들을 전복적 주체로 새롭게 구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관념을 …… 더 이상 주어진 전체에 대한 설명의 원리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투쟁에서 그것이 끼칠 수 있는 효과의 견지에서만 고려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형태도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이론 형태에서 ‘이데올로기 형태’로 변화한다.”11)


 물론, 알튀세르의 토픽적 진리관 역시 그리 만족스럽진 않다. 그가 말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형성 문제는 여전히 주체 형성의 문제, 다시 말해 저항적 주체 형성의 문제 및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대중운동의 결합 양식에 대한 문제를 여전히 제대로 해명하지 못함으로써, 과학이 이데올로기로 전화되는 양식과 계기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가 (후기)구조주의라는 이론의 우회를 통해, 토픽적 진리관이라는 분파적 과학에 도달했다면, 바스카는 실재론이라는 이론의 우회를 통해, 해방의 사회과학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지적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이론을 넘어, 과학적 이데올로기로 전화해, 대중들 속에서 실천적으로 소멸하길 기대해 본다.

 



1) 로이 바스카, 「서문」, 이기홍 역,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후마니타스, 2007, 7쪽.


2) 분석철학적 전통에서 초기 알튀세르의 지식이론을 비판하며,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법을 수용하는 또 다른 이론가로는 대표적으로 알렉스 캘리니코스를 꼽을 수 있다. 캘리니코스의 책 『마르크시즘의 미래는 있는가』(열음사, 1987)는 비판적 실재론과 알튀세르의 철학이 맺고 있는 일련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현대철학의 두 가지 전통과 마르크스주의』(갈무리, 1995) 역시 분석철학의 전통에서 비판적 실재론의 철학적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책들에서는 'realism'을 실재론이 아니라, 리얼리즘으로 번역하고 있어 다소 혼동을 주고 있다. 이 점에서 캘리니코스가 따르는 이론적 전통을 ‘포스트알튀세르적 앵글로 마르크스주의 실재론자’들로 규정하는 피터 빈스(Peter Binns)의 언급은 의미심장하다. 피터 빈스,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임무는 무엇인가?」, 이원영 편역, 『현대 프랑스 철학의 성격 논쟁』, 갈무리, 1995, 200쪽 참조. 이 외에도, 비판적 실재론에 대한 훌륭한 소개로는, 러셀 키트 & 존 어리, 이기홍 역, 『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한울, 1995; 마가렛 아처 외, 이기홍 역, 『초월적 실재론과 과학』, 한울, 2005; 마가렛 아처 외, 이기홍 역, 『비판적 자연주의와 사회과학』, 한울, 2005를 참조.


3) 바스카와 캘리니코스는 ‘이론적 대상’과 ‘실재적 대상’을 구분하는 알튀세르의 입장에 강한 지지를 보이며, 자신들이 알튀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의 이론적 체계 속에서 실재적 대상은 칸트의 물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저 없어도 되는 것으로 취급을 받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이론틀에서 실재적 대상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비판과 달리, 알튀세르에게 있어 실재적 대상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아미엥에서의 주장」에서 지식의 대상과 실재 대상 사이의 구분의 사이의 중요성, 그리고 실재 대상이 함의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러한 필수적인 구별이 확고하게 견지되지 않을 때 명목론, 나아가 관념론으로 인도될 수 있다 …… 마르크스는 지식 대상에 대한 실재 대상의 우위라는 테제를 통해서, 그리고 두 번째 테제, 즉 실재 대상과 지식 대상의 구별에 대한 첫 번째 테제의 우위를 통해서,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보다 확실하게 자신을 보호하였다.” 루이 알튀세르, 김동수 역, 「아미엥에서의 주장」,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2000, 162쪽.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거울 없는 반영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글로는,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이성훈 역, 「레닌의 철학적 전략 - (거울 없는) 반영에서 (주체 없는) 과정으로」,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 백의, 1995를 참조. 바스카는 과잉결정 개념의 도입 역시 알튀세르의 공헌으로 꼽는다. 과잉결정 개념을 비판적 실재론자들은 다중결정(multiple determination)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연주의와 사회과학』에 실린 콜리어의 글(「층화된 설명과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참고하라. 참고로 번역 용어와 관련해 'transitive', 'intransitive'는 철학에서 흔히 ‘이행적’, ‘비이행적’으로 번역되기도 하나, 이 글에서는 역자인 이기홍 선생의 용례를 따라 ‘타동적’, ‘자동적’으로 썼다.


4) 우리는 이러한 현대 과학철학의 특징을 ‘부정성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서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며, 현대과학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포퍼와 바슐라르의 저작(『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와 『새로운 과학 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이 1934년에 동시에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가 그토록 논박하고자 했던 실증주의․경험주의 인식론은 이미 주류 과학철학․사회과학 방법론 내에서도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알튀세르가 실증주의․경험주의 비판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려고 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론적 반인간주의’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실증주의가 이론적․논리적으로 매우 허약한 체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이론적 반인간주의’가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넘어서야 할 지점이 어디인가를 명확하게 가르쳐 준다.


5) 이 점에서 오류와 진리는 서로 대칭적인 것이 아니며, 오류의 장소가 바로 진리의 장소이며, 진리의 장소는 언제나 오류의 장소가 된다(『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89쪽 각주). 알튀세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데올로기의 장소가 바로 진리의 장소이며, 과학적 이론은 이데올로기와의 단절을 통해 등장하지만, 이는 다시 이데올로기로 전화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Etienne Balibar)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데올로기는 진리의 장소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 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진리의 다른 이름은 항상 이미 진리의 하나의 이름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테제들」, 윤소영 엮음, 『맑스주의의 역사』, 민맥, 1991, 254쪽.


6) 알튀세르, 「아미엥에서의 주장」, 163쪽에서 재인용. 알튀세르는 이를 ‘최소한의 일반성’ 개념으로 포착한다.


7) 구조적 이론관에 대해서는, 김보현, 「구조주의의 이론관」, 이초식 외, 『귀납논리와 과학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0; 알랜 찰머스, 신일철, 신중섭 역, 『현대의 과학철학』, 서광사, 1985, 7장 참고. 마르크스주의 연구 기획에서 하드코어들은 대표적으로, 계급투쟁,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경험에 의해 직접적으로 반증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보조 가설들을 통해 보호되며, 하나의 경향성으로 제시된다. 임레 라카토스의 연구 기획의 방법론과 포퍼의 소박한 반증주의에 대한 비판 및 라카토스가 제시하는 세련된 반증주의에 대해서는, 임레 라카토스, 조승옥, 김동식 역, 「반증과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의 방법론」, 『현대과학철학논쟁』, 민음사, 1994를 참조.


8) 초기의 알튀세르는 지식의 대상과 실재의 대상을 구분한 뒤, 이들 각각은 서로 독자적인 계열에 속하기에, 그 일치성 여부를 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론의 진리성 여부는 오로지 이론 내적인 기준을 통해 제시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물론 잘 알려져 있듯, 그 기준은 이론적 실천을 통한 전(前)과학적 이데올로기와의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런 초기 알튀세르의 이론주의에 대한 비판적 실재론자들의 비판과 불만은 그 기준의 모호성(얄궂게도 알튀세르 역시 기준의 기준 문제로 추궁을 당한다)에 있다. 한 논평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디아마트가 그 정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는데도, 그는 뒤쪽으로 열린 창문을 통해 기어올라 그 유물론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레고리 엘리엇, 이경숙, 이진경 역, 『이론의 우회』, 새길, 1992, 165~166쪽 참조.


9) 사실, 구조주의의 가장 큰 기여는 바로 사회의 구성 그 자체가 자의적, 역사적, 문화적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10)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알튀세르와 라캉』, 공감, 20쪽.


11) 루이 알튀세르, 「오늘의 맑스주의」, 『역사적 맑스주의』, 새길, 1999, 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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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의 윤리에서 급진적 정치철학으로

 

[연대대학원신문 153호]기획서평

 

이병주 경희대 신문방송학 강사 lbj72@khu.ac.kr

 

● 야니 스타브라카키스,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
●Judith Butler/Ernesto Laclau/Slavoj Zizek,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Verso, 2000)

 


왜 정신분석학인가

   
 
▲ 은행나무 펴냄
 
스타브라카키스의 저서 『라캉과 정치』의 영어판 부제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기(thinking the political)’이지만 보다 더 정확한 부제를 달면 ‘라클라우와 라캉’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 저서는 라클라우를 정신분석화하고 있으며, 탈구나 헤게모니와 같은 라클라우의 개념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정치철학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시도만이 유일한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인가?’ ‘왜 정신분석학인가?’ 왜냐하면 푸코의 권력이론이나 들뢰즈·가따리의 정치이론과 같이 정신분석학에 근거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급진적인 이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 저서를 이론과 정치의 공간에서 맥락화하며 그 맥락화 속에서 보다 정확하게 이 저서가 담고 있는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질문과 관련된 논쟁의 결절점을 제공해주는 (곧 도서출판b에서 번역 출간될)『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공저자인 라클라우와 버틀러, 지젝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왜 정신분석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버틀러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으며, 『라캉과 정치』가 제시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라클라우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논쟁들은 라클라우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 『라캉과 정치』 안에서 다시 반향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라캉과 정치』를 맥락화하는 데 매우 유용한 논의들을 제공해준다. 우선 스타브라카키스와 지젝의 대립을 보여주는 두 언급을 보자.

 

급진적 민주주의와 라캉의 윤리

스타브라카키스는 민주주의의 역설로서 ‘동유럽과 남아프리카에서의 민주주의의 성공’과 서구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침울한 실망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지젝은 동유럽에서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근본적인 민족주의를 자신의 이면으로서 불러냈다고 지적한다. 이 서로 다른 지적은 두 이론가의 주장 모두 정신분석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스타브라카키스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 정치는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그는 환상과 증상의 변증법이라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와 대타자는 모두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는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의 결핍을 메움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 한다. 이를 라클라우의 용어로 번역하면 적대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사회적 환상을 통해 부인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적대의 한 담지자는 완전한 사회의 실현을 방해하는, 그렇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증상)로 환상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스탈린의 굴락과 나치의 아우슈비츠는 유토피아 정치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렇다면 이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통과하면서도 급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스타브라카키스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라고 대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급진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적대와 그로 인한 사회적 탈구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유일한 정치기획이며,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정치기획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윤리적 행위가 환상의 가로지르기라면, 급진적 민주주의의 토대는 바로 이 윤리학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윤리적 행위란 유토피아적인 조화의 윤리학을 넘어선 사회적 결핍의 제도화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로 하자면 민주주의 혁명으로 창출된 권력의 공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정치의 유일한 이름은 오로지 라클라우와 무페 식의 헤게모니 투쟁이다.

   
 
▲ 도서출판 b 펴낼 예정
 
지젝은 이와 같은 논의는 정치를 자유민주주의적 틀 안에 가두어버리고 진정한 행위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라캉의 윤리적 차원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스타브라카키스의 행위란 실재 앞에서의 항상 실패한 행위라는 것이다. 지젝은 행위를 ‘발생한 불가능’으로서 정의한다. 여기에서 불가능성이란 불가능성으로서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의 좌표 내부’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지젝이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성과가 돌아가는 마이너스 성장률’과 같은 것들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행위란 사회-상징적 질서의 재정의 과정이다. 이러한 지젝의 논의는 어떤 점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와 다른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지젝이 제시하는 것은 역사성(historicity)과 비역사적인 중핵 간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의 제시를 통해서 지젝은 라클라우와 버틀러의 입장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보편성’ 개념이다.

 

텅 빈 보편성과 근본적 불가능성의 문제

라클라우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항상 어떤 특정한 내용에 의해 헤게모니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 장소는 헤게모니라는 우연성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계급본질주의와 같은 정치적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버틀러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역사적인 배제/포함의 과정 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특히 비역사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성차의 구별이라는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즉 성차란 섹슈얼리티라는 본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젠더라는 수행적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정신분석학적 본질주의를 넘어선 성차의 정치이다.

여기에서 지젝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들이 말하는 보편성 그 자체가 출현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성차의 우연성이든 정치의 우연성이든 이 모두는 특정한 역사적 형식이며, 이 형식이 출현하기 위해서 원초적으로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둘은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하는 특수한 내용을 분석할 뿐 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 두 가지 관계를 적대와 차이에 종속된 적대(또는 무페의 용어로는 대항의 논리로 번역된 적대)의 변증법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근본적인 성적 적대란 ‘실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즉 외상적인 것)이며, 이 실재적 불가능성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을 통해 남/녀의 성차가 상징적으로 구성되고, 또는 이 불가능성의 원초적인 억압을 통해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할 수 있는 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지젝의 논점은 정치적 적대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이 둘이 누락한 문제는 바로 이 (불)가능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는, 즉 사회적인 것을 구조화하는 전체적인 원칙이라는 것이다.

 

억압된 역사적 유물론의 회귀?

흥미롭게도 지젝의 행위 개념과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이 지젝의 논의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만약 근대 민주주의가 전근대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조직화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정초적 행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젝은 이 근대 민주주의(의 출현의 조건)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논의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이와 동일한 논리로 라클라우와 무페의 다양한 주체성에 기반한 포스트모던 정치를 후기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지젝은 계급투쟁을 라클라우적 용어로 차이의 체계를 가로지르는 적대로 재개념화하며, 이러한 계급적대에 대한 분석의 누락은 포스트모던 정치가 자본주의를 탈정치화하는 징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지젝은 반자본주의적인 행위를 기존의 상징적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즉 유토피아(u-topic)를 열어나가는 행위로 정의한다. 그러나 아직 지젝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교한 이론화 작업을 내어놓고 있지 못하다. 만약 지젝의 입장에 동의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입력 : 2007년 05월 27일 16:35:52 / 수정 : 2007년 05월 27일 16: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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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역사학은 더이상 랑케의 말에 구속받지 않는다. 하지만 더욱더 자유롭게 나아간 그들이 마주친 곳은 사학과 인접학문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구역이었는데...위기 속에서도 한층 활기가 넘치는 그 시공간 속으로...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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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본 새로운 역사- 그 이론과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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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들어 인류의 정신사에 크나큰 영향을 준 구조주의. 구조주의의 전사부터 그 전개, 화려한 꽃을 피운 사상가들과 그 해체에 나선 망치 든 철학자들까지. 오늘날 지금-여기에 있는 우리를 위한 사유의 축제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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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에서 힘으로
아사다 아키라 지음, 이정우 옮김 / 새길아카데미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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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 『구조와 힘』이라는 원래 서명처럼 레비-스트로스부터 들뢰즈/가타리까지 사유의 흐름을 문학적인 문체로 풀어내준다. 각각의 철학적 사고를 깊이 보여주지는 않지만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가 풍기는 느낌과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최적의 책이라 할만하다. 다만 다소의 예비지식 없이 접근하다가는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할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차이와 타자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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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욱은 개인적으로 내가 매우 좋아하는 학자이다. 이 책은 들뢰즈, 레비나스를 비롯해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와 같은 철학자, 프루스트, 투르니에, 쿤데라와 같은 작가들의 사유까지를 모두 망라한다. 특히 제1장, 2장, 10장의 내용은 압권이다. '표상적 사유와 비표상적 사유'를 비교하는 서문 역시 현대철학의 흐름을 정리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무엇보다 각각의 개념을 정리하고 비교하는 저자의 탁월한 능력과 가독성 뛰어난 문체가 강점이다.
들뢰즈의 철학- 사상과 그 원천
서동욱 지음 / 민음사 / 2002년 9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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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타자』이후 2년만에 발간된 들뢰즈 전공자의 본격 들뢰즈 입문서. 이정우나 이진경이 들뢰즈의 특정 저서, 특정 입장에 많이 치중했다면, 서동욱은 철학사적 흐름 속에서 들뢰즈가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개념을 어떻게 변형시켰는가에 주목한다. 칸트와 니체, 스피노자의 철학이 들뢰즈 속에서 어떻게 '사산아'가 되어가는가를 살펴보는 과정이 흥미롭다. 특히 3장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 레비-스트로쓰, 라깡, 푸꼬, 알뛰쎄르에 관한 연구
김형효 지음 / 인간사랑 / 1990년 3월
25,000원 → 23,750원(5%할인) / 마일리지 720원(3% 적립)
2003년 10월 11일에 저장
절판

어떤 분야든 <교과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구조주의에 대한 친절하고 자세한 입문서로 추천하기에 주저가 없다.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 그리고 알튀세에 대한 개괄을 하는 데 적절하다. 저자 김형효는 국내에 서양철학자들의 사상을 쉽게 소개하고자 줄곧 노력해온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현재 정문연 교수로 재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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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와노동
2007.3.20 |346호

99주년 세계 여성의 날, 그녀들의 저항이 보여준 것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연대, 사회서비스 시장화 정책 반대 공동투쟁에서 시작하자


99년 전 미국의 봉제공장 여성노동자들은 불에 타 죽었고, 경찰은 여성의 일할 권리와 단결․저항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울산과 광주의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은 법이 보장해 놓은 최저임금과 연장근로수당,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받기 위해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저임금의 불안정한 고용 속에 빈곤으로 내몰린 여성노동자들에게 그런 상황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저항할 권리조차 없는 것이 100여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이미 여성노동자들은 폭력 앞에 벌거벗겨진 채 살아가고 있다. 정부의 사회서비스 시장화 정책은 결국 여성노동자들을 서비스 구매자와 제공자로 만나게 하여 여성노동자의 요구와 권리를 개별화하고 대립시켜 여성노동자간의 연대를 어렵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우선 이러한 시장화 정책에 반대하는 여성노동자들의 공동의 요구와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해온 여성노동자들의 경험과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사회서비스가 평등하고 보편적으로 제공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또한 고용형태와 조건에 따라 그 혜택이 달라지는 출산․육아휴가제도와 보육료 지원 등의 개별화된 요구를 넘어 누구나 안전하게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고, 치료받고 쉴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권리를 노동자운동의 집단적 요구로 구체화해야 한다.



(가)2007 사회운동포럼 조직위원회 구성을 위한 간담회

○ 공동제안단위 : 문화연대 민주노동당서울시당 민주노총서울본부 사회진보연대 인권운동사랑방

○ 제안 대상 : 아래 취지에 공감하고, 사회운동포럼 조직위원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단체와 개인

○ 제안 내용 : (가칭)사회운동포럼 조직위원회 구성을 위한 간담회에 참여해 주십시오.

- 때 : 2007년 3월 27일(화) 오후 2시
- 곳 :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 (02-365-5363)
- 내용
1.(가)사회운동포럼 제안 취지 및 기획(안) 설명
2.(가)사회운동포럼 조직위원회 사업구상 토의

○ 첨부
1.(가)사회운동포럼 제안 취지 및 기획(안)
2. 간담회 장소 약도. 끝.



사회진보연대
http://www.pssp.org |
(140-801)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48 신성빌딩 4층
TEL:02-778-4001~2 | FAX:02-778-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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