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원신문_ 제157호_ 2007년 11월 27일>
루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버마스를 통해서 루만 들여다보기, 또는 그 반대
독일 지식사회의 지형도― 하버마스와 루만
독일 지식인들은 적어도 68년의 저항운동 이후 ‘사회’라는 것에 대한 비판과 증오에 뿌리를 둔 인식의 계기들에 몰두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인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하버마스의 ‘사회비판이론’이 그 대표다. 이 이론은 60년대 이후 하버마스라는 이름과 그 저작물을 출판한 ‘쥬어캄프 문화’(미국의 비평가 죠지 스타이너)라는 말로 대변되는데, 대학 강단은 물론 문화예술계와 언론계 등 지식인 사회 전반에 배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현재까지 독일에서 거의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와 병행하여 70년대 이후 지식사회와 독일 대학에 하버마스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루만이고,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에 대응하여 사회와 ‘화해’하고 단순히 ‘관찰’한 것이 ‘사회체계이론’이다. 전자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견주어 루만이 재직한 대학 이름을 붙여 ‘빌레펠트학파’라고 한다.
루만은 1927년생이고 하버마스는 1929년생인데, 청소년 시절 루만은 나치 군대에 입대했다가 미군 포로 생활을 경험했고, 나이가 어린 하버마스는 다행히 나치 소년단(일종의 동네 방위병) 생활만 했다. 공교롭게 작년 가을 비슷한 시기에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두 사람의 나치시절 전력에 대한 의혹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루만은 나치당 기록문서에서 이름이 발견되었고, 그가 직접 서명한 입당원서는 없지만, 쟁점은 본인의 적극적인 의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나치 군대에 입대한 그 세대에 흔히 있었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나치당원이 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버마스의 경우는 직접 작성했다고 하는 ‘나치 충성서약문’에 관한 괴소문이었는데, 이것은 결국 법정으로 간 끝에 사실무근임이 밝혀졌고, 우파 지식인들의 하버마스 깎아내리기 해프닝으로 종결되었다.
60년대 독일 사회학계의 실증주의 논쟁과 학생운동으로 두 살 어린 하버마스가 일찍이 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반면, 루만은 법학공부를 마치고 지방 법원 판사생활을 하다가 거의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후 5개월만에 당시 사회학의 거두 헬무트 쉘스키의 후견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독일에서는 박사학위 취득 후 교수자격을 얻기까지는 보통 5년에서 10년, 기약이 없다). 하버마스가 68년 학생운동 이후 독일 사회학계에서 아성을 구축할 당시, 1971년 후발 학자인 루만은 잘 나가던 하버마스와 맞붙은 소위 ‘사회과학 방법론 논쟁’을 벌이면서 유명해졌다. 두 사람은 1998년 루만이 죽을 때까지 간헐적으로 생산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과 우정어린 경쟁을 통해 두 사람은 각자의 학문세계를 넓히고, 또 출판과 강연을 통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독일 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헤겔상’을 수상한 공통의 영광도 누렸다.
하버마스와 루만의 출발점과 결정적 차이들
이 두 이론이 성공을 거둔 배경이자 공통적 출발점은 바로 맑스주의의 몰락과 관계있다. 세계를 하나의 거대담론으로 통일하던 맑스주의의 몰락이 가시화되고, 68년 사회혁명 시도에 대한 대안들이 탐색되던 70~80년대에는 사회학에서 기존 맑스주의를 대신하여 이론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여러 대안들이 모색되던 시기였다. 가령 당시 태동하던 <포스트모던> 담론도 맑스주의를 비롯한 거대담론의 종말에 관한 또다른 거대담론이었다.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과 루만의 <사회체계이론>도 이 공백에 대한 이론적 대안이었다.
그러나 하버마스와 루만의 이론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은 의사소통적 담화라는 구원론적 힘을 통해 사회를 개선하려는 모던의 철학적 프로젝트였다. 반면, 루만의 체계이론은 사회를 개선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 사회적 과정들을 그것의 맹목적 기능 작용들 속에서 단순히 서술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 하버마스가 사회의 정당성 위기에 주목하고 사회에 대한 한 비판이론을 서술한 반면, 루만은 사회학의 이론적 위기에 주목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지 물었다.
- 하버마스는 계몽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이론에 도덕적 의무를 지우고 사회 속에서 재현된 합리적 이성을 발견하여 비판을 무기로 사회를 가르치려고 한 반면, 루만은 이 계몽철학을 나이브하게 계승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사회를 가르치기는커녕 사회로부터 배우려고 했다.
왜냐하면, 루만은 하버마스가 주장하던 사회의 이성적인 정체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루만은 하버마스와 달리 사회를 하나의 ‘패러독스’로 보았다. 모던 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되었고 부분체계들은 저마다 독립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각각의 부분체계는 사회의 통일성을 각각 다르게 기술한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어떤 이성적인 정체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하버마스는 ‘뜨거운 실천가’이고, 루만은 ‘차가운 이론가’이다. 하버마스의 말을 빌리면 루만은 그 자신 오랫동안 관료생활을 한 “규범의식을 냉소적으로 해체시킨 법률가”로서, 이성을 형식으로 취급하고 실천이성을 제거한 냉소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맑스주의의 붕괴와 모더니티의 와해 과정에서, 하버마스가 근대적 주체의 ‘수정’에, 푸코가 주체의 ‘사망’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루만은 아예 주체를 배제하고 체계를 관찰하기만 했다. 이 관찰하는 체계가 체계이론의 근본이다. 하버마스가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할 합리적 주체를 설정했지만, 루만의 체계이론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다. 루만은 사회체계이론으로부터 인간을 추방함으로써 근대 철학의 유산과의 완전한 청산을 시도했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1)사회를 전적으로 커뮤니케이션에서 행위와 주체의 배제, 2)이 커뮤니케이션에서 인간을 기껏해야 ‘응고된 우발성’으로 기술한다(방법론적 반휴머니즘). 하버마스와 같은 휴머니스트들에게는 도발적으로 들릴 말이다.
루만씩 글쓰기와 루만 읽기의 한 방법 사상
하버마스가 펼치는 담론은 대개 대가들의 문헌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하버마스를 읽을 때 하버마스가 서술하는 고전철학과 근대철학의 대가들의 담론과 대면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그의 논증의 정당성을 대가들과 그들 저작물의 권위에 기대는 측면이 강하다. 그는 정신사학자이자 해석학자로서의 사회학자로서, 그의 책에는 항상 인명색인(Namenregister)이 붙어있다. 반면, 루만을 읽는 독자들은 인명(대가들)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개념들과 사상(事象, Sache)과 마주한다. 루만은 고의적으로 저서에 인명색인을 달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책에는 항목색인(Sachregister)만 있다. 사회학자는 현재의 사회를 관찰하는 관찰자이지, 대가들과 그들이 남긴 문헌들에 몰두하는 정신사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특히 루만의 이론은 불친절하다. 루만의 글쓰기는 특정 개념을 ‘패러독스’로 설명하기 때문에 무척 어렵다. 참고로 필자는 루만 해석자인 베를린 공대 노르베르트 볼츠 교수의 석박사 과정 콜로키엄에서 루만의 ꡔ사회적 체계이론ꡕ을 3학기에 걸쳐 강독한 바 있는데, 독일 전공자들도 어려워하는 글이니 우리 대학원생들에게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루만의 글은 극단적인 추상성의 차원에서 전개되어 현실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다. 루만 스스로도 그의 이론을 뜬 구름 잡는 일에 비유하여 “비행은 구름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비행은 아주 두껍게 덮인 폐쇄된 구름층을 고려해야 한다. 이 때 비행기 조종사는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계기판)를 신뢰해야 한다”(ꡔ사회적 체계이론ꡕ 서문)라고 썼다. 즉 그의 사회학은 조종사의 시각이 아니라 비행기 계기판의 눈금에 의존하는 계기비행/맹목비행(instrument/blind flight)의 사회학이다. 그래서 사회학의 테마인 사회는 현실과의 접촉 없이 계기비행 중에 있고, 사회체계는 환경과의 접촉 없이도 마치 계기비행처럼 바로 그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폐쇄적으로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루만을 읽기 위해서는 마치 계기비행하는 조종사처럼 다소간의 맹목이 필요하다. 체계이론이 기대는 소위 2차적 차원의 사이버네틱 이론은 관찰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 즉 맹점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다. 즉, 어떤 관찰의 맹점이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곧 그 관찰 가능성의 조건이다. 맹점이 관찰의 선험성이듯, 루만에 대한 맹목이 없이는 루만에 대한 안목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
루만은 헤겔의 올빼미 메타포를 완전히 다른 식으로 해석한 바 있는데, 그의 ꡔ사회적 체계이론ꡕ은 “우리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에게 더 이상 좁은 둥지에서 훌쩍이지 말고 이제 야간비행을 시작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다. 우리는 그 비행을 감시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고, 모던 사회에 대한 정찰비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ꡔ사회적 체계이론ꡕ, 661쪽)”는 말로 끝맺고 있다.
윤종석/ 자유기고가, N.볼츠의 <컨트롤된 카오스> 등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