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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과 천황』(가리에 데쓰 글· 슈가 가토 그림, 길찾기, 2007)

난리였다. 일본 열도 전체가 일시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각 신문사는 뒤질세라 호외를 긴급 발행하고, 방송국도 온종일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무슨 일이었을까? 2005년 9월 6일, 일본을 열광시킨 그날은 바로 천황가에 아들이 태어난 날이었다. 자그만치 41년 만의 일이란다. 큰 문화적 이질감 없이 일본사회를 관찰하던 나에게 비로소 ‘이방인’임을 실감케 해준 사건이었다. 천황이 뭐길래? 물음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천황가 아들의 탄생은 하루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출산 추세로 울상을 짓고 있던 유아, 어린이용품 업계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말 놀랍도록 기민하고 일사분란하게 ‘황손 신드롬’이 일어났다. 경제적 파급 효과는 무려 1,500억엔이라 추정되었다. 출산 다음날, 일본에서 가장 리버럴하다는 아사히신문까지 극존칭을 써가며 축원의 사설을 실었을 때 물음표는 마침내 느낌표로 변했다. 이게 만만한 문제가 아니구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휩쓸려 기어이 천황제 개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당시 자민당의 헌법 조사회는 모계천황을 인정하는 황실전범 개정을 추진중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의 문제를 미국과 동아시아 사이에서 궁구하던 나의 둔감한 지성에 일격을 가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천황제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해보았다. 그러나 허탕이었다. 젊은 일본 친구들의 무심함과 심드렁함은 나의 둔감함에 못지않았다. 천황의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드물었고, 천황제의 그늘은 그들의 일상과 짐짓 무관한 듯 보였다. 한마디로 ‘무해한 천황제’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일종의 오락거리로 보이기까지 했다. 영국인들이 왕실가나 다이애나의 스캔들을 가십처럼 대하듯, 그 친구들 역시 천황가의 소식을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가벼이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라야 데쓰의 『일본인과 천황』은 바로 그들을 독자로 상정하여 씌어진 책이다. 저자 서문에서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젊은이들이 천황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도록’ 의식적으로 글을 구성했음이 엿보인다. 천황이 무엇인지, 근대천황제는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하고, 천황제와 군대로부터 일본사회의 인간관계를 유추한 후, 상징천황제의 모순과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도 추궁하고 있다. 나아가 헌법에서 천황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즉 천황제 폐지와 헌법 개정을 요청하는 급진적 주장으로 글을 맺는다. 그가 섭렵한 방대한 참고문헌이 알려주듯 준비는 꼼꼼하고 철저하며, 주장은 뚜렷하고 명쾌하다. 우선 저자의 열정과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읽는 맛이 남다르진 않았다. 특히 만화라는 가장 대중적인 전달 방식을 택하고 있음에도 지루한 감마저 없지 않다. 왜일까? 『맛의 달인』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만화가의 작품이 그다지 재미가 없는 것은... 우선 ‘계몽의 서사’를 들고 싶다. 저자는 국민들을 세뇌하는 천황제와 교육칙어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 비판의 내용을 전달하는 서술 양식만큼은 교육칙어와 엇비슷해 보인다. 만화의 주요 뼈대가 되고 있는 무지한 축구부 젊은이와 깨어있는 이사장과의 대화를 보자. 이사장의 설명에 젊은이들은 놀라고 당황한다. 그리고 깨우친다. 그렇군요! 그랬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래선 안되겠어요! 어른은 가르치고, 젊은이들은 배운다. 동의하고 계몽된다. 이와 같은 계몽과 동의의 메커니즘이 줄곧 반복되고 있다. 계몽의 서사가 반복됨으로써 만화라는 장르적 장점은 어느새 파묻히고 만다. 생략과 간결을 이용한 표현양식과 시각언어의 재현이 독자의 적극적 호응을 유도하고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만화 고유의 특성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혐한류』이다. 또 『전쟁론』과 『대만론』등의 작품을 통해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작품도 있다. 하나같이 대중의, 특히 일본의 젊은층에 큰 호응을 얻었던 만화들이다. 필자도 은근슬쩍 ‘내용’이 궁금해서 읽어본 적이 있다. 동의할 수 없고 심지어 불쾌한 내용도 있었지만, 시종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왜? 만화라는 장르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가장 중요한 장르적 성격이 대중과의 친밀성에 있다면, 이 세 작품은 그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들의 신념과 가치관을 전파한다. 계몽과 동의의 구조를 발견할 수 없고, 그래서 젊은 독자들의 반발도 야기하지 않은 채, 자연스레 그리고 집요하게 그들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불편함과 당혹스러움이 있다. 천황제에 기대어 있는 우익들이 대중과 만나고 소통하는 대중매체를 훨씬 능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전후 60년을 기념해 일본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하였다.


그렇다고 천황제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는 이 책의 미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일본 사회의 첨예한 논쟁거리였던 「히노마루 기미가요 법안」을 보자. 기미가요가 애당초 모든 사람에게 장수를 축원하며 불렀던 노래였고, 기미가요의 기미를 천황만으로 못 밖은 메이지 시대부터였다는 지적은 새롭다. ‘기미’라는 기호의 독점에서 절대권력이 탄생한 것이다. 또 이 법안의 제정이 앞으로의 전쟁과 전쟁 이전의 일본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날카로운 안목도 돋보인다. 교육법안 개정을 통해 ‘애국심’을 강조하자는 일본사회의 움직임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도 아쉬운 대목이 없지 않다. 특히 ‘천황이 없었다면 군지도자들의 오만도 없었을 것이며 일본군 병사의 고통도 아시아 인민의 고통도 없었다는 주장’은 지나치다. 일본의 모든 문제를 천황제로만 환원시킬 수 있을까? 근대 일본의 일탈이 온전히 천황제라는 전근대성의 온존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그래서 일본이 반성하고 성찰해서 일본만 개혁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80년대 유행했던 일본인론 혹은 일본문화론과 같은 또 하나의 ‘일본 예외론’이 아닐까?


천황제를 일본 특유의 전근대성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다기한 일면으로 파악하는 입체적 시야가 필요하다. 실제로 근대 일본이 ‘천황’을 내세웠던 것은 19세기의 국제질서의 일원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즉 당시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르기 위해서 군주제를 도입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부정하며 등장한 나폴레옹 황제를 필두로 19세기는 세계적으로 군주제의 재구축이 진행되던 시기다. 영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강력한 군주제 국가가 발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천황제는 바로 그러한 세계적 추세를 따라가며 ‘발명’된 것이다. 전통을 재배치하여 상징조작을 하는 현상도 ‘근대적’이며 ‘보편적’이다. 그로부터 백년 후,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군주제에 또 한번의 변화가 온다. 군주로부터 정치적 권력을 박탈한 이른바 ‘무해한 군주제’로의 전환이 그것인데, 이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상실하면서 자국의 정치체제를 개편한 것의 반영이다. 그 흐름 속에 일본에서도 ‘상징 천황제’가 도입된 것이다. 즉 천황제를 또 하나의 일본 예외론으로 특수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근대세계의 변동이라는 보편적인 틀 속에서 이해해야 비로소 해결의 단초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젊은이를 겨냥한 이 책을 읽으며 왜 우리가 뜨끔, 해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이 만화책을 읽는 시종 일본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엄격한 상하관계와 위계질서, 배타적 집단주의와 패거리 문화. 이것이 과연 일본만의 모습인가?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모습이다. 마침 식민지 근대성을 둘러싼 논의도 시끄럽다.


필자가 접한 일본 친구들은 한국이야말로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의 산증거로 간주했다. 그렇게 똘똘 뭉치는 애국심이 놀랍고 경이롭다는 것이다. 이때의 경이에는 분명 냉소가 깔려 있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되어 읽혀져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천황이라는 고유명사를 기어코 ‘일왕’이라 고쳐 써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들의 의식과 일상이 정작 천황제의 잔재를 더 짙게 반영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다. 일본의 천황제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천황제’를 근본에서부터 질문하고 성찰해야 함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추천사를 쓴 김규항의 지적처럼,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은 군사문화의 유산이 아니라, ‘천황제 군사문화의 유산’이었다는 통렬한 자각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은 지금도 여전히 탈식민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했다.


한국의 탈식민 운동은 일본의 탈제국 운동과 긴밀하게 연계된다. 천황제의 온존 속에서 과거로 돌아가자는 일본 우익의 준동은 이제 평화헌법의 개정을 통해 전쟁하는 국가로 일본을 재편하기 위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일본의 진보진영이 ‘평화헌법 지키기’라는 방어적 자세로 일관하며 ‘보수파’로 몰리기까지 한다. 상징천황제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 1조부터 폐기하자는 저자 가리야 데쓰의 주장이 신선하고 통쾌한 것은 그래서이다. 폐지되어야 할 것은 1조의 천황제이며, 온존해야 할 것은 9조의 평화조항이다. 적극적 개헌론이라 할 수 있다.


상징천황제와 현행 헌법은 전후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과 패전국 일본의 구세력이 담합하여 만든 타협적 산물이었다. 우리 안의 ‘풀뿌리 천황제’를 소거하는 한국의 김매기 작업과, 상징천황제를 폐지하는 일본의 탈제국 과업이 양국 간의 연대 운동을 통해 견고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전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천황제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때, 양국의 민중은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새로운 씨뿌리기 작업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고 사뿐히 ‘즈려밝은’ 채, 그 위에 걸터앉아 동아시아에 군림한 미국과의 관계 조정에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즉 천황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우리 사회의 문제이며, 동아시아인 모두의 문제이다. 이러한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인과 천황』은 한국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책이다. (*)

 

 이병한/ 연세대 사학과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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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식코'? 아파도 돈 없어서

 

병원 못 가는 시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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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BBK 공방으로 허송세월했던 탓에 우리는 우리가 어떤 대통령을 뽑았는지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금산분리 완화와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보험지주회사 도입 등 철저하게 삼성만을 위한 정책 변화는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정권 교체의 일등공신인 보수·경제지들은 철저하게 시장 원리로 굴러가는,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바람잡기에 나섰다. 문제는 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과연 기득권 계층 뿐만 아니라 경제 주체 전반에 그 혜택을 골고루 나눠줄 것이냐 하는 점이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sicko)'는 공공의료가 붕괴하면서 시장에 내몰리게 된 미국 '의료산업'의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식코'는 바다 건너 불 구경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머지않은 미래에 닥쳐올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명박 정부의 의료 관련 공약은 미국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손가락 두개 붙이는데 6840만원.

이 영화는 상처난 부위를 직접 바늘로 꿰메고 있는 웨인이라는 남자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남자는 의료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서 병원에 갈 수 없다.

릭은 집에서 나무를 자르다가 전기 톱에 손가락 두개를 잘렸다. 병원에서는 중지는 6만달러, 약지는 1만2천달러가 든다고 한다. 두 손가락을 모두 붙이려면 7만2천달러, 환율 950원으로 계산하면 우리 돈으로 6840만원이 된다. 릭은 의료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돈을 모두 직접 물어야 한다. 릭은 결국 중지는 버려두고 약지만 붙이기로 한다.



마이클 무어에 따르면 릭처럼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4800만명이나 된다. 전체 인구의 20% 규모다. 이 가운데 1만8천명이 해마다 병원 문턱도 밟지 못하고 죽는다. 민영 의료보험에 가입된 2억5천만명의 사람들도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고도 정작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보험회사들은 영리 목적의 주식회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던 로라 버넘은 보험회사에서 앰뷸런스 비용을 댈 수 없다고 해서 직접 비용을 물어야 했다. 사전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화면을 보면서 묻는다. "앰뷸런스에 실려가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 허락이라도 받으라는 말입니까."


진단은 의사가, 결정은 보험회사가.

덕 노우의 딸은 달팽이관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보험회사의 반대로 한쪽 귀만 수술을 하게 됐다. 양쪽 모두 수술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유에서다. 에이미는 뇌종양 수술을 거부당했다. 진단은 의사가 내리지만 처방은 보험회사가 결정한다. 트레이시는 골수 이식자를 찾았지만 보험회사가 반대하는 바람에 수술을 하지 못하고 결국 죽었다. 이들은 비싼 보험료를 꼬박꼬박 냈는데도 정작 병에 걸렸을 때 혜택을 받지 못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또는 보험에 가입하기 전부터 있던 질병이라는 이유로, 또는 애초에 약관에 보장하지 않기로 기재된 질병이라는 이유로.

제이슨처럼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이유로 애초에 보험 가입을 거부당하는 경우도 있다. 제이슨은 병에 걸리면 전 재산을 쏟아붓고 파산하거나 꼼짝없이 죽어야 한다.

마이클 무어는 전직 보험회사 의학 고문의 의회 청문회 장면을 중계한다. 그는 거부처리 비율이 높을수록 자신의 연봉이 올라갔다고 증언한다.

"보험 가입 과정에서 가입 희망자 여러분을 솎아낼 수 없거나 의사가 처방한 치료를 거절하기 힘들거나 수술비 보장을 해 줘야 할 판국이 될 것 같으면 회사는 이 사람을 부릅니다. 청부업자인 셈이죠. 아이넘 씨가 하는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사 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분은 그저 가입 양식에서 여러분이 못 보았던 한 점의 잘못을 들춰내거나 있는 줄도 몰랐던 사전 조건을 발견하면 됩니다. 살인사건 다루듯이 조사합니다. 그러니까, 저희는 고객의 의료기록들을 철저히 분석하는데 못해도 최근 5년 정도의 분량을 가지고 뭔가 숨겼던 사실이나 알리지 않았던 정보가 혹시 있나 뒤지지요. 그러면 이쪽에서 약관상 해지를 하든 문제가 심각하다고 우겨서 돈을 못 주겠다고 하든 할 수 있죠. 만약 고객이 알리지 않은 사실이 없다고 판단하더라도 저희는 기존 거절사례를 또 찾아봅니다. 고객들은 대체로 옛날 처방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으니까요. 예전에 무슨 증상으로 인해 보험금을 타먹었다면 꼼꼼한 사람은 그 의료기록을 살펴본다 이거지요. 그리고, 한때 돈을 주던 증상은 더 이상 그런 증상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맞아요! 말장난이에요. 근데 이게 방법입니다. 만사공평하게 대해야 할 일인데 생략되어 있던 사전 의료기록으로 인하여 보험회사랑 엮이기만 하면 이것 참 환장할 돈이거든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지요. 되돌아보면, 제가 누굴 죽인다고는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사람들 인생을 괴롭게 했느냐고요? 그렇지요. 왜 안 그렇겠어요. 보험회사 일은 오래 전에 손 씻었습니다만 그런다고 제가 이 더러운 바닥에서 일했던 경력을 속죄하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의료 산업화 걸림돌 규제 철폐하겠다."

이 영화가 최근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건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민영보험 활성화와 영리법인 병원 설립 등을 추진할 계획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이 당선자는 선거 과정에서도 "보건의료산업을 미래 전략산업으로 육성해 의료산업화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겠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이 당선자는 11월 15일 대한의사협회의 보건의료 정책 질의에서도 "건강보험 수가체계를 개선하고, 의료인이 전문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치료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머니투데이는 21일 <'의료 산업화' 강력 드라이브 예고>에서 "이 당선자는 모든 의료기관이 국민건강보험의 적용을 받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당연지정제 폐지는 의료 민영화의 첫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건강보험을 받지 않는 병원이 생겨나면 의료 서비스의 질적 차이가 확산되기 시작하고 미국처럼 의료 양극화가 본격화될 가능성도 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야 비용을 더 치르더라도 더 좋은 치료를 받고 싶겠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의료 양극화를 불러오게 된다. 건강보험에서 이탈하려는 고소득 계층이 늘어날수록 건강보험 재정은 파탄날 것이고 혜택도 축소될 수밖에 없다. 민영 의료보험 시장이 활성화되겠지만 저소득 계층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민영 의료보험이 모든 질병을 완벽하게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규식 연세대 교수는 19일 서울신문 칼럼 <30년 묵은 건강보험 패러다임 바꿔야>에서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환자만 보도록 하는 제도를 고쳐 건강보험 환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순수 민영의료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의료를 분배의 볼모로 잡아두는 패러다임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의료 양극화를 현실화하는 이런 주장이 이미 실행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는 22일부터 '건강보험 폐지 검토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진행 중이다. 28일 현재 1만4천여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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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대학원신문 제245호

 

[학술기획] 일본의 지적 흐름 ① <문명론의 개략>을 통해 일본 근대 읽기


 

독도나 동해 표기 논란에서 표출되는 격렬한 정서와 극단적 논리에서 엿보이듯, 한국 사회가 일본을 인식하는 지평은 ‘있다’, ‘없다’라는 이분법에서 그리 멀지 않다. 학술적인 담론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근자에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들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으나 우리는 일본내에서의 그의 사상사적 위치에 대해 가늠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이에 일본의 다양한 지적 흐름들을 조망해본다. <편집자주>

 




오늘날 ‘문명’은 주요한 핵심 용어가 되었다. ‘문명권의 충돌’이니 대화니 하는 말들이 그것을 상징해 준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난 19세기말에도 ‘문명’은 주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시대는 서구 세계와 동아시아의 만남으로 특징지워지는 전환기에 다름 아니었다. ‘근대’ 역시 그 시점과 떼놓을 수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문명론의 개략>




 ‘문명’이란 관점에서 그 시대를 바라본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꼽아야 할 것이다. ‘문명개화’와 ‘독립자존’을 표방했던 그는 <문명론의 개략>(1875)이란 대표작을 남겼다. 당시 유행했던 ‘문명론의 결정판’에 다름 아니었으며, 그 사상적인 자장은 같은 시대 ‘개화파’로 불리던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등)에게도 미치고 있었다.




후쿠자와는 메이지유신(1868) 전에 이미 세 차례의 서양행을 통해서, 서구 문명과 그 발전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이면에 있는 어두운 측면, 즉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 현상까지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보편적인 ‘문명’의 논리는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것(실제로 그러했다). 논리적으로는 자국의 ‘독립’이 부정될 수도 있다는 것. 따라서 그에게는 ‘문명’도 중요했지만, 일본의 ‘독립’ 역시 중요했다.




고뇌하는 ‘후진국 지성’으로서의 그는 마침내 <문명론의 개략>에서 이렇게 말한다. “목적을 정하고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 (중략) 그 목적이란 무엇인가. (중략) 독립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 독립을 보전하는 법은 문명 외에 달리 없다” 일본의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니 ‘독립’하기 위해서라도, 서양의 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것. 서로 다른 범주인 ‘문명’과 ‘독립’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고 있다.




근대적인 국가, 즉 ‘주권적 국민국가’ 형성을 위해서, 그는 일본사회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일본에 정부는 있어도 국민은 없다”, “일본국의 역사는 없고 일본 정부의 역사가 있을 뿐”이라는 비판 위에서, 인민의 정신과 인민의 기풍을 진작·발달시켜 ‘인민’을 ‘국민(네이션)’으로 업그레이드시켜야 하며,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차원에서는 “독일개인(獨一個人)의 기상(인디비듀알리티)”을 가져야 한다고 갈파했다. ‘일신’이 독립해야 ‘일국’이 독립할 수 있다는 것.




시대와 더불어 그의 사상은 점차 국가주의로 변모해갔다. ‘악명’을 얻게 된 것 역시 그 언저리부터다. 적극적인 문명개화에 힘입어, 일본은 비서구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서구중심의 근대 ‘국제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회원 자격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게서 배운 것(혹은 당한 것)을 아시아에 그대로 실행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탈아입구’! 일본은 ‘아류’ 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자적 존재처럼 되었다. 그 같은 ‘이중성’이야말로 일본의 근대가 지닌 특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야스 노부쿠니의 ‘읽기’




익히 아는 것처럼, 전쟁으로 치달려간 군국주의 일본은 2차 대전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학자이자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1914~96)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글을 통해서, 군국주의로 나아갔던 일본인들의 심리적 특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해냈다. 동시에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론적 탐구를 넘어 직접 실천에 나서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깊이 연구했으며, <문명론의 개략>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시도해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를 내놓았다.




마루야마 스스로 <문명론의 개략>에 대해 마치 에도시대 유학자들이 많이 시도했던 ‘경전의 주석서’ 같은 것으로 만들어보고자 했다고 한다.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거기서 국가주의자로 변모하기 이전에 후쿠자와가 가졌던 ‘비전’(주권적 국민국가 형성), 동시대의 다양한 담론들과 치렀던 이론적인 투쟁, 그리고 전통 일본사회로부터 물려받은 부정적인 유산(권력의 편중)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냈다. 자신의 시대에 걸맞게 읽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 저변에는 일본사회의 ‘병리적 구조’에 대한 분석·비판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해주는 건전한 ‘시민사회 형성’이라는 명제가 깔려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후쿠자와가 죽은 지 100년이 되던 해(2001)부터, 고야스 노부쿠니(1933~ )는 <문명론의 개략>에 대한 새로운 읽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를 내놓았다. 그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그의 작업에 대해, 2차 대전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의 ‘계몽적인 해독자’가 ‘근대주의적인 시각’으로 후쿠자와를 읽었다고 보았다. <문명론의 개략>을 근대의 계몽적 고전으로 보고, 근대적인 사유의 빠르고 뛰어난 실현을 그저 현창(顯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래서 후쿠자와를 위한 ‘변명의 책’처럼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그는 ‘포스터모더니즘’ 내지는 ‘탈근대’적인 입장에서, 마루야마 식의 ‘근대주의적인 시각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읽고자 했다. 그래서 <문명론의 개략>을 긴박한 과제를 짊어지고서 동시대의 많은 담론과 격렬하게 항쟁하며 쓰여진 문명론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그런 시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모습은 대조적인 ‘양면성’을 갖는다. 대내적으로는 황학자(皇學者)들과 국체론에 대해 격렬한 ‘사상투쟁’을 전개하는 ‘급진적 자유주의자’, 대외적으로는 서양 문명을 목적으로 삼아 급격한 문명개화를 주장하는 ‘탈아론자’. <탈아론>(1885)이 그 물증이 된다. 




이렇듯 <문명론의 개략>을 서로 다르게 읽은 데에는 사상사를 보는 시각과 방법론, 세대차이, 읽은 시점의 차이(1980년대와 2000년대)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스스로 밝혔듯이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사상에 입각해서 충실히 ‘해설’하고자 했다면, 고야스는 현재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독’하고자 한 것이다. 때문에 ‘누가 제대로 읽었는가’보다는 ‘왜 그렇게 읽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는 게 더 효율적일 것이다.




굳이 그 차이를 요약하자면, 기본적으로 ‘근대’를 긍정하면서 일본 근대의 ‘긍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려는 시각과 바야흐로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면서 일본 근대의 ‘부정적인’ 측면까지 읽어내고자 하는 시각의 차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앞에서 말한 일본 근대가 지닌 ‘이중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고 해도 좋겠다. 비서구 국가들이 ‘제국주의’ 일본을 비난하면서, 내심으로는 ‘성공적인 근대화’에 대해서 선망의 눈길을 보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글로벌화’와 ‘탈근대’를 구가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오히려 ‘근대’에 다름 아닌 듯하다. 또는 그 ‘원형’에 대한 탐구라 해도 좋겠다. ‘단절’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좋든 싫든 간에, 일본의 근대는 한국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근대 일본을 통해서 우리는 서구의 지식과 문물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라는 불행한 체험을 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문명론의 개략>에 대해 서로 다른 읽기를 보여주는 두 권의 해설서를, 가능하다면 그 텍스트와 함께, 우리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읽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단순한 일본사상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우리의 근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김석근/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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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원신문_ 제157호_ 2007년 11월 27일>

루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버마스를 통해서 루만 들여다보기, 또는 그 반대




독일 지식사회의 지형도― 하버마스와 루만

독일 지식인들은 적어도 68년의 저항운동 이후 ‘사회’라는 것에 대한 비판과 증오에 뿌리를 둔 인식의 계기들에 몰두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인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하버마스의 ‘사회비판이론’이 그 대표다. 이 이론은 60년대 이후 하버마스라는 이름과 그 저작물을 출판한 ‘쥬어캄프 문화’(미국의 비평가 죠지 스타이너)라는 말로 대변되는데, 대학 강단은 물론 문화예술계와 언론계 등 지식인 사회 전반에 배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현재까지 독일에서 거의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와 병행하여 70년대 이후 지식사회와 독일 대학에 하버마스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루만이고,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에 대응하여 사회와 ‘화해’하고 단순히 ‘관찰’한 것이 ‘사회체계이론’이다. 전자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견주어 루만이 재직한 대학 이름을 붙여 ‘빌레펠트학파’라고 한다.

루만은 1927년생이고 하버마스는 1929년생인데, 청소년 시절 루만은 나치 군대에 입대했다가 미군 포로 생활을 경험했고, 나이가 어린 하버마스는 다행히 나치 소년단(일종의 동네 방위병) 생활만 했다. 공교롭게 작년 가을 비슷한 시기에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두 사람의 나치시절 전력에 대한 의혹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루만은 나치당 기록문서에서 이름이 발견되었고, 그가 직접 서명한 입당원서는 없지만, 쟁점은 본인의 적극적인 의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나치 군대에 입대한 그 세대에 흔히 있었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나치당원이 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버마스의 경우는 직접 작성했다고 하는 ‘나치 충성서약문’에 관한 괴소문이었는데, 이것은 결국 법정으로 간 끝에 사실무근임이 밝혀졌고, 우파 지식인들의 하버마스 깎아내리기 해프닝으로 종결되었다.

60년대 독일 사회학계의 실증주의 논쟁과 학생운동으로 두 살 어린 하버마스가 일찍이 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반면, 루만은 법학공부를 마치고 지방 법원 판사생활을 하다가 거의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후 5개월만에 당시 사회학의 거두 헬무트 쉘스키의 후견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독일에서는 박사학위 취득 후 교수자격을 얻기까지는 보통 5년에서 10년, 기약이 없다). 하버마스가 68년 학생운동 이후 독일 사회학계에서 아성을 구축할 당시, 1971년 후발 학자인 루만은 잘 나가던 하버마스와 맞붙은 소위 ‘사회과학 방법론 논쟁’을 벌이면서 유명해졌다. 두 사람은 1998년 루만이 죽을 때까지 간헐적으로 생산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과 우정어린 경쟁을 통해 두 사람은 각자의 학문세계를 넓히고, 또 출판과 강연을 통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독일 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헤겔상’을 수상한 공통의 영광도 누렸다.

 

 

 


하버마스와 루만의 출발점과 결정적 차이들

이 두 이론이 성공을 거둔 배경이자 공통적 출발점은 바로 맑스주의의 몰락과 관계있다. 세계를 하나의 거대담론으로 통일하던 맑스주의의 몰락이 가시화되고, 68년 사회혁명 시도에 대한 대안들이 탐색되던 70~80년대에는 사회학에서 기존 맑스주의를 대신하여 이론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여러 대안들이 모색되던 시기였다. 가령 당시 태동하던 <포스트모던> 담론도 맑스주의를 비롯한 거대담론의 종말에 관한 또다른 거대담론이었다.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과 루만의 <사회체계이론>도 이 공백에 대한 이론적 대안이었다.

그러나 하버마스와 루만의 이론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은 의사소통적 담화라는 구원론적 힘을 통해 사회를 개선하려는 모던의 철학적 프로젝트였다. 반면, 루만의 체계이론은 사회를 개선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 사회적 과정들을 그것의 맹목적 기능 작용들 속에서 단순히 서술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 하버마스가 사회의 정당성 위기에 주목하고 사회에 대한 한 비판이론을 서술한 반면, 루만은 사회학의 이론적 위기에 주목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지 물었다.


- 하버마스는 계몽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이론에 도덕적 의무를 지우고 사회 속에서 재현된 합리적 이성을 발견하여 비판을 무기로 사회를 가르치려고 한 반면, 루만은 이 계몽철학을 나이브하게 계승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사회를 가르치기는커녕 사회로부터 배우려고 했다.

왜냐하면, 루만은 하버마스가 주장하던 사회의 이성적인 정체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루만은 하버마스와 달리 사회를 하나의 ‘패러독스’로 보았다. 모던 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되었고 부분체계들은 저마다 독립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각각의 부분체계는 사회의 통일성을 각각 다르게 기술한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어떤 이성적인 정체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하버마스는 ‘뜨거운 실천가’이고, 루만은 ‘차가운 이론가’이다. 하버마스의 말을 빌리면 루만은 그 자신 오랫동안 관료생활을 한 “규범의식을 냉소적으로 해체시킨 법률가”로서, 이성을 형식으로 취급하고 실천이성을 제거한 냉소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맑스주의의 붕괴와 모더니티의 와해 과정에서, 하버마스가 근대적 주체의 ‘수정’에, 푸코가 주체의 ‘사망’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루만은 아예 주체를 배제하고 체계를 관찰하기만 했다. 이 관찰하는 체계가 체계이론의 근본이다. 하버마스가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할 합리적 주체를 설정했지만, 루만의 체계이론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다. 루만은 사회체계이론으로부터 인간을 추방함으로써 근대 철학의 유산과의 완전한 청산을 시도했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1)사회를 전적으로 커뮤니케이션에서 행위와 주체의 배제, 2)이 커뮤니케이션에서 인간을 기껏해야 ‘응고된 우발성’으로 기술한다(방법론적 반휴머니즘). 하버마스와 같은 휴머니스트들에게는 도발적으로 들릴 말이다.


 


루만씩 글쓰기와 루만 읽기의 한 방법 사상

하버마스가 펼치는 담론은 대개 대가들의 문헌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하버마스를 읽을 때 하버마스가 서술하는 고전철학과 근대철학의 대가들의 담론과 대면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그의 논증의 정당성을 대가들과 그들 저작물의 권위에 기대는 측면이 강하다. 그는 정신사학자이자 해석학자로서의 사회학자로서, 그의 책에는 항상 인명색인(Namenregister)이 붙어있다. 반면, 루만을 읽는 독자들은 인명(대가들)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개념들과 사상(事象, Sache)과 마주한다. 루만은 고의적으로 저서에 인명색인을 달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책에는 항목색인(Sachregister)만 있다. 사회학자는 현재의 사회를 관찰하는 관찰자이지, 대가들과 그들이 남긴 문헌들에 몰두하는 정신사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특히 루만의 이론은 불친절하다. 루만의 글쓰기는 특정 개념을 ‘패러독스’로 설명하기 때문에 무척 어렵다. 참고로 필자는 루만 해석자인 베를린 공대 노르베르트 볼츠 교수의 석박사 과정 콜로키엄에서 루만의 ꡔ사회적 체계이론ꡕ을 3학기에 걸쳐 강독한 바 있는데, 독일 전공자들도 어려워하는 글이니 우리 대학원생들에게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루만의 글은 극단적인 추상성의 차원에서 전개되어 현실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다. 루만 스스로도 그의 이론을 뜬 구름 잡는 일에 비유하여 “비행은 구름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비행은 아주 두껍게 덮인 폐쇄된 구름층을 고려해야 한다. 이 때 비행기 조종사는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계기판)를 신뢰해야 한다”(ꡔ사회적 체계이론ꡕ 서문)라고 썼다. 즉 그의 사회학은 조종사의 시각이 아니라 비행기 계기판의 눈금에 의존하는 계기비행/맹목비행(instrument/blind flight)의 사회학이다. 그래서 사회학의 테마인 사회는 현실과의 접촉 없이 계기비행 중에 있고, 사회체계는 환경과의 접촉 없이도 마치 계기비행처럼 바로 그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폐쇄적으로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루만을 읽기 위해서는 마치 계기비행하는 조종사처럼 다소간의 맹목이 필요하다. 체계이론이 기대는 소위 2차적 차원의 사이버네틱 이론은 관찰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 즉 맹점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다. 즉, 어떤 관찰의 맹점이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곧 그 관찰 가능성의 조건이다. 맹점이 관찰의 선험성이듯, 루만에 대한 맹목이 없이는 루만에 대한 안목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

루만은 헤겔의 올빼미 메타포를 완전히 다른 식으로 해석한 바 있는데, 그의 ꡔ사회적 체계이론ꡕ은 “우리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에게 더 이상 좁은 둥지에서 훌쩍이지 말고 이제 야간비행을 시작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다. 우리는 그 비행을 감시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고, 모던 사회에 대한 정찰비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ꡔ사회적 체계이론ꡕ, 661쪽)”는 말로 끝맺고 있다.



윤종석/ 자유기고가, N.볼츠의 <컨트롤된 카오스> 등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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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반 2007-12-28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종석 씨의 이 글은 (푸코에 대한 독일적/영미적 이해와 더불어) 하버마스 편향의 정도가 좀 지나치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하버마스와 루만의 차이를 독일적 전통 내에서 명료하게 드러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 옮겨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