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대학원신문 제245호

 

[학술기획] 일본의 지적 흐름 ① <문명론의 개략>을 통해 일본 근대 읽기


 

독도나 동해 표기 논란에서 표출되는 격렬한 정서와 극단적 논리에서 엿보이듯, 한국 사회가 일본을 인식하는 지평은 ‘있다’, ‘없다’라는 이분법에서 그리 멀지 않다. 학술적인 담론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근자에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들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으나 우리는 일본내에서의 그의 사상사적 위치에 대해 가늠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이에 일본의 다양한 지적 흐름들을 조망해본다. <편집자주>

 




오늘날 ‘문명’은 주요한 핵심 용어가 되었다. ‘문명권의 충돌’이니 대화니 하는 말들이 그것을 상징해 준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난 19세기말에도 ‘문명’은 주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시대는 서구 세계와 동아시아의 만남으로 특징지워지는 전환기에 다름 아니었다. ‘근대’ 역시 그 시점과 떼놓을 수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문명론의 개략>




 ‘문명’이란 관점에서 그 시대를 바라본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꼽아야 할 것이다. ‘문명개화’와 ‘독립자존’을 표방했던 그는 <문명론의 개략>(1875)이란 대표작을 남겼다. 당시 유행했던 ‘문명론의 결정판’에 다름 아니었으며, 그 사상적인 자장은 같은 시대 ‘개화파’로 불리던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등)에게도 미치고 있었다.




후쿠자와는 메이지유신(1868) 전에 이미 세 차례의 서양행을 통해서, 서구 문명과 그 발전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이면에 있는 어두운 측면, 즉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 현상까지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보편적인 ‘문명’의 논리는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것(실제로 그러했다). 논리적으로는 자국의 ‘독립’이 부정될 수도 있다는 것. 따라서 그에게는 ‘문명’도 중요했지만, 일본의 ‘독립’ 역시 중요했다.




고뇌하는 ‘후진국 지성’으로서의 그는 마침내 <문명론의 개략>에서 이렇게 말한다. “목적을 정하고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 (중략) 그 목적이란 무엇인가. (중략) 독립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 독립을 보전하는 법은 문명 외에 달리 없다” 일본의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니 ‘독립’하기 위해서라도, 서양의 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것. 서로 다른 범주인 ‘문명’과 ‘독립’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고 있다.




근대적인 국가, 즉 ‘주권적 국민국가’ 형성을 위해서, 그는 일본사회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일본에 정부는 있어도 국민은 없다”, “일본국의 역사는 없고 일본 정부의 역사가 있을 뿐”이라는 비판 위에서, 인민의 정신과 인민의 기풍을 진작·발달시켜 ‘인민’을 ‘국민(네이션)’으로 업그레이드시켜야 하며,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차원에서는 “독일개인(獨一個人)의 기상(인디비듀알리티)”을 가져야 한다고 갈파했다. ‘일신’이 독립해야 ‘일국’이 독립할 수 있다는 것.




시대와 더불어 그의 사상은 점차 국가주의로 변모해갔다. ‘악명’을 얻게 된 것 역시 그 언저리부터다. 적극적인 문명개화에 힘입어, 일본은 비서구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서구중심의 근대 ‘국제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회원 자격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게서 배운 것(혹은 당한 것)을 아시아에 그대로 실행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탈아입구’! 일본은 ‘아류’ 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자적 존재처럼 되었다. 그 같은 ‘이중성’이야말로 일본의 근대가 지닌 특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야스 노부쿠니의 ‘읽기’




익히 아는 것처럼, 전쟁으로 치달려간 군국주의 일본은 2차 대전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학자이자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1914~96)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글을 통해서, 군국주의로 나아갔던 일본인들의 심리적 특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해냈다. 동시에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론적 탐구를 넘어 직접 실천에 나서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깊이 연구했으며, <문명론의 개략>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시도해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를 내놓았다.




마루야마 스스로 <문명론의 개략>에 대해 마치 에도시대 유학자들이 많이 시도했던 ‘경전의 주석서’ 같은 것으로 만들어보고자 했다고 한다.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거기서 국가주의자로 변모하기 이전에 후쿠자와가 가졌던 ‘비전’(주권적 국민국가 형성), 동시대의 다양한 담론들과 치렀던 이론적인 투쟁, 그리고 전통 일본사회로부터 물려받은 부정적인 유산(권력의 편중)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냈다. 자신의 시대에 걸맞게 읽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 저변에는 일본사회의 ‘병리적 구조’에 대한 분석·비판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해주는 건전한 ‘시민사회 형성’이라는 명제가 깔려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후쿠자와가 죽은 지 100년이 되던 해(2001)부터, 고야스 노부쿠니(1933~ )는 <문명론의 개략>에 대한 새로운 읽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를 내놓았다. 그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그의 작업에 대해, 2차 대전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의 ‘계몽적인 해독자’가 ‘근대주의적인 시각’으로 후쿠자와를 읽었다고 보았다. <문명론의 개략>을 근대의 계몽적 고전으로 보고, 근대적인 사유의 빠르고 뛰어난 실현을 그저 현창(顯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래서 후쿠자와를 위한 ‘변명의 책’처럼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그는 ‘포스터모더니즘’ 내지는 ‘탈근대’적인 입장에서, 마루야마 식의 ‘근대주의적인 시각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읽고자 했다. 그래서 <문명론의 개략>을 긴박한 과제를 짊어지고서 동시대의 많은 담론과 격렬하게 항쟁하며 쓰여진 문명론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그런 시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모습은 대조적인 ‘양면성’을 갖는다. 대내적으로는 황학자(皇學者)들과 국체론에 대해 격렬한 ‘사상투쟁’을 전개하는 ‘급진적 자유주의자’, 대외적으로는 서양 문명을 목적으로 삼아 급격한 문명개화를 주장하는 ‘탈아론자’. <탈아론>(1885)이 그 물증이 된다. 




이렇듯 <문명론의 개략>을 서로 다르게 읽은 데에는 사상사를 보는 시각과 방법론, 세대차이, 읽은 시점의 차이(1980년대와 2000년대)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스스로 밝혔듯이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사상에 입각해서 충실히 ‘해설’하고자 했다면, 고야스는 현재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독’하고자 한 것이다. 때문에 ‘누가 제대로 읽었는가’보다는 ‘왜 그렇게 읽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는 게 더 효율적일 것이다.




굳이 그 차이를 요약하자면, 기본적으로 ‘근대’를 긍정하면서 일본 근대의 ‘긍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려는 시각과 바야흐로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면서 일본 근대의 ‘부정적인’ 측면까지 읽어내고자 하는 시각의 차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앞에서 말한 일본 근대가 지닌 ‘이중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고 해도 좋겠다. 비서구 국가들이 ‘제국주의’ 일본을 비난하면서, 내심으로는 ‘성공적인 근대화’에 대해서 선망의 눈길을 보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글로벌화’와 ‘탈근대’를 구가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오히려 ‘근대’에 다름 아닌 듯하다. 또는 그 ‘원형’에 대한 탐구라 해도 좋겠다. ‘단절’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좋든 싫든 간에, 일본의 근대는 한국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근대 일본을 통해서 우리는 서구의 지식과 문물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라는 불행한 체험을 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문명론의 개략>에 대해 서로 다른 읽기를 보여주는 두 권의 해설서를, 가능하다면 그 텍스트와 함께, 우리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읽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단순한 일본사상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우리의 근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김석근/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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