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사냥
윤후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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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는 그가 여우를 향해 뛰어가자 자신도 모르게 자신 역시 여우를 쫓아 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뛰어가는 나의 앞에는 푸슈킨 기념 박물관에서 본 그림 속의 모든 사물들이 살아서 움직였듯이 모든 생물, 무생물이 어울려 살아나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대자연의 모든 것데 대한 생동의 소리였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 나를 향해 있는 모습에, 나는 지난날 매사에 자아를 상실했던 나의 껍질을 벗어낸다. 시국에 대해 행동적이지 못했던, 사랑했던 여인을 적극적으로 잡지 못했던 나에서 벗어난다. 뿐만 아니라 지난 밤 자른 이들의 대화와 행동거지에 그토록 적의를 나타내었던 나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또한 오랫동안 사회에 묻혀있던 내 자신을 발견하는 촉매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대자연의 품에서 사람들과 살아가는 법을, 나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소설이 주지하는 바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도 혹시 여기서의 '나'와 '그'가 아닐지 잠시 곰곰히 생각해 보자.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이상에 괴로워하거나 사회에 아예 뿌리내리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살아진' 삶을 지내오고 있지는 않은가? 삶을 비관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다만 그것이 비관을 위한 비관에 그칠 때 문제가 된다.

결론적으로 '긍정적 비관주의'가 요구된다. 그것은 우리네 삶에 자성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따금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얼마 후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을 때 잔잔한 표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평온인 동시에 미소이다. 사회와 나는 조화로울 때 가장 평화롭다. 인간은 결국 사회 내에서 살아가고 또한 사회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지천명을 넘겨버린 나이에 나와 그가 그렇게 달려가는 이유는 그것의 마지막 가능성을 바로 여우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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