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재고량 늘었다는 증거 없다"

 

지난 5일 <프레시안>에 '해외시각'으로 소개된 "투기는 어떻게 국제유가를 폭등시켰나"(해당기사)라는 기사는 미국의 경제·에너지 전문가인 윌리엄 엥달(William Engdahl)의 주장을 소개한 것이다.
  
  엥달에 따르면, 석유 선물(先物)을 온라인으로 사고파는 장외시장에 대해 미국 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감시를 면제해준 2000년 상품선물현대화법 때문에 골드만삭스 같은 석유 거래 은행들의 고삐가 풀어졌고, 마음 놓고 가격조작과 투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인들이 미국산 석유 상품을 미국에 있는 컴퓨터를 사용하면서도 미국시장이 아닌 영국시장을 통해 거래하도록 눈감아 준 것도 투기를 부추겼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최근의 유가 급등 배경에는 수급 불안정이라는 외양 속에 투기적 요소가 실체로 자리잡고 있으며, 투기로 선물가격이 오르고 이에 따라 현물가격도 오르게 되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어 현재 유가 급등의 60%는 투기 요소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 기사가 나가자 반론을 제기한 독자들이 적지 않았다.
  

▲ 뉴욕상품거래소(NYEMEX)에서 국제유가 선물가격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현물시장에 투기 현상은 없다
  
  특히 아이디 'eyedee'라는 <프레시안> 회원 독자는 "투기가 유가 폭등이라는 증거 별로 없습니다"라는 댓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유가 급등 원인에 대해서는 수급(불균형)설과 투기설이 있어 논란이 크게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투기설의 과학적(객관적)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투기는 결국 가수요에 의한 사재기이니까 투기에 의해 값이 올라가려면 재고량이 크게 늘었어야 하는데 그런 증거가 없습니다.
  
  원유는 부동산과 달리 사용하면 없어지는 물건입니다. 먹으면 없어지는 자장면에 대한 투기가 가능하겠습니까? 사용하면 없어지는 상품에 대해 투기를 하려면 보관비용이 따릅니다. 원유보관은 쉽지 않고 그 비용을 감수하고 투기가 횡행해서 값이 올랐다면 재고가 급증했어야하는데 이 기사와 달리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보관비용이 필요없는 선물시장에서 일시적으로 값이 올라도 결국은 현물시장에서 소화되어야하는데 유가는 현물시장에서도 선물시장과 같은 방향으로 꾸준히 값이 올랐습니다. 보관비용 때문에 현물시장에서 투기를 하기는 쉽지 않고, 했다면 재고량 증가로 이어져야하는데 재고급증 현상은 없다는 겁니다.
  
  유명한 진보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투기설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이 독자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가 쓴 칼럼까지 소개해 주었다. 이미 지난달 23일 <뉴욕타임스> 블로그에 게재된 글이지만, 냉철하고 차분한 논리 전개로 정평이 난 그가 "유가 급등이 선물시장에서의 투기 탓"이라는 주장에 대해 '지적 사기'라며 격분을 감추지 못한 이례적인 내용이라는 점에서 전문 번역해 소개한다.
  
  다음은 'Speculative nonsense, once again(또다시 등장한 엉터리 논리)'라는 크루그먼 교수가 쓴 글의 번역이다. (원문보기) <편집자>
  
  좋다. 한 번 더 말해보겠다. 유가 급등의 원인을 둘러싸고 정치적 논쟁을 벌이자는 게 아니다. 나는 이성을 잃은 투기가 시장을 교란시킨다는 주장을 기꺼이 믿고 싶다. 또한 소비자들이 운전 습관을 바꾸고, 소형차로 바꾸는 등 고유가에 보다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된다면, 얼마간 유가가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투기가 유가를 폭등시키고 있다는 따위의 비논리적인 주장은 지적으로 헛소리라는 점에서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이제 그 이유를 따져보겠다.
  
  조 슈모와 해리엇이라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두 사람은 원유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아닌데, 내기를 하고 있다. 조는 원유 가격이 배럴당 150달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해리엇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보관, 이자 비용 드는 상품, 선물가격이 현물가격에 '직접적 영향' 못줘
  
  원유 현물가격에 이런 행위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사람들이 실제 지불하는 가격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 말이다.
  
  그 답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상품을 사고 파는 데 관계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내기에 대해 누가 신경을 쓴다는 것인가?
  
  조 슈모 같은 사람들이 1000만 명이 있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선물계약이라는 것은 미래 가격에 대한 내기이다. 현물가격에 대해서는 절대로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조 슈모같은 사람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또한 그런 내기에 걸린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렇다.
  
  현물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판매할 원유 상품을 실제로 보유한 사람이 조 슈모에게 선물계약을 매도하기로 결정하고, 계약 만기가 될 때 그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시장에 내다팔지 않는다. 계약 가격이 상품을 보관하고 구매에 들어간 자금의 이자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현재가보다 충분히 높다면 이런 계약은 할 만하다.
  
  그런데 원유 재고 통계를 보면 이런 식의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가 없다.
  
  또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통계적으로 보면, 가격이 급등하는 기간에는 선물가격이 현재가보다 대체로 약간 낮은 편이라는 것이다.


  
  원유 현물가격보다 선물가격이 낮게 따라가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EIA)의 월별 통계를 보자. 원유 현물가격이 치솟자 선물가격은 조금 낮게 따라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상품을 보관하고 있을 유인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듯이, 이 문제에 대해 정치적 논쟁을 벌이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유가 급등이 투기 탓이라는 헛소리는 나로 하여금 심한 욕을 하고 싶게 만들고 있다.
  
  추가 : 요즘 마이클 매스터스(최근 미 의회 청문회에서 유가 급등이 투기 탓이라고 주장해 주목받은 헤지펀드업체 회장. 편집자)가 의회에서 "투기꾼들을 단속하면, 휘발유 가격이 갤런 당 2달러(현재 가격의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는 '저온 핵융합(cold fusion)'으로 우리의 에너지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깜빡 잊었나 보다.
  
  ※ 저온 핵융합: 상온에서 일시적인 고온만 발생시켜도 무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핵융합이 가능하다는 이론으로, 1989년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두 학자가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 실험을 지지함으로써 업적에 무임승차하려는 많은 학자들의 동조가 있었고, 상업적인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진 언론들이 이 발표를 신속히 기정사실화시켰다.
  
  두 학자들은 나중에 자신들의 실험 오류를 인식하고 있었으나 이미 너무나 많은 찬사와 명예를 누린 탓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무명의 한 학자의 날카로운 반박이 나오자, 학자적 양심에 따라 고백이 이뤄지며 '과학적 사기극'으로 막을 내린 사건. (편집자)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편집자 엘리자베스 맥도널드도 지난 1일 '원유 투기꾼 마이클 매스터스는 누구인가'라는 기사에서 매스터스의 논리의 허점을 파헤졌다.
  
  맥도널드는 "판매자는 원유 현물가격을 결정할 때 물론 선물가격을 고려한다"면서 "그러나 원유 선물가격 결정에는 수급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하고, 다시 현물가격을 정하는 데 반영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선물 투기는 유가 상승 두려움 증폭 효과"
  
  맥도널드는 미 의회 합동경제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한 미국의 대표적인 에너지 분석가 다니엘 여진의 발언도 소개했다.
  
  여진은 "역사적으로 보면, 유가 급등이 지금처럼 지속되고 있는 현상에는 한가지 요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면서 "투기가 유가 급등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지만, 그것은 유가 상승을 두려워하는 심리를 증폭시킨 것이지, 유가 급등의 주범은 신용위기와 달러 약세"라고 말했다.
  
  어떤 현상의 원인을 특정세력의 소행으로 보는 의혹은 종종 제기된다. 비전문가들이 볼 때는 나름대로 상당히 설득력 있는 근거로 무장이 될 수도 있다. 반론이 불가능한 의혹 제기는 흔히 '음모론'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크루그먼 교수 등에 따르면 적어도 "유가 급등이 선물시장에서의 투기 탓"이라는 주장은 '과학적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에 음모론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승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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