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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알튀세르와 라깡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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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 ② 맑시즘을 바라보는 지젝의 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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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강사) master@dambe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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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삐딱하게 보기 ① 맑시즘
이번 호 <인문학술>에서는 슬라예보 지젝의 논의들을 살펴본다. 지젝은 셸링과 칸트, 헤겔 등의 독일 철학에 바탕을 두고 라깡을 재해석하면서 이를 맑시즘과 결합해 정치, 사회, 문화 형식에 대입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지젝이 해석해 낸 라깡과 맑시즘을 지젝 이전의 다른 이론가들의 그것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본고의 이러한 논의를 통해 지젝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젝의 논의가 가지는 함의와 영향까지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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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예보 지젝
그레고리 엘리어트는 알튀세르에 대한 충실한 주석서인 『이론의 우회』에서 알튀세르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었다.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은 서로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만나지 못했다.” 그레고리 엘리어트는 이 어긋남의 극적인 예로써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들고 있다. 1968년 파리는 그의 지병인 우울증을 매개로 알튀세르를 스쳐지나갔고, 그의 뒤 늦은 개입이 바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미완성 연구노트였다. 알튀세르는 이 뜨거운 68년도의 거리를 가능하게 했던 이데올로기의 자율성과 주체의 자율성을 정당화하려고 하였지만 그 이론적 결과물은 구조기능주의의 혐의였다. 결론적으로 이 연구노트 속에서도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은 다시 한 번 어긋난다. 근본적인 논쟁을 ‘푸코 대 하버마스’가 아닌 ‘라깡 대 알튀세르’로 잡고 있는 그의 첫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서문을 참고했을 때, 지젝의 출발점은 바로 이 어긋남이다. 알튀세르의 무엇이 알튀세르를 이 어긋남 속에 감금하였는가? 지젝은 구조기능주의를 이유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성급히 거부하는 몸짓을 거부하고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서부터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시작한다. 이 지젝의 몸짓에서 알튀세르는 진정으로 라깡을 만나야만 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우발적 마주침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알튀세르와 라깡의 만남이 두 개의 회귀, 즉 ‘마르크스로의 회귀’와 ‘프로이트로의 회귀’간의 만남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비경제결정론적인 사회구성체의 논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것과 프로이트로의 회귀는 자아심리학의 헤게모니를 넘어서 무의식의 주체를 재확언·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두 회귀의 만남이라는 이론적 스캔들이 낳은 사생아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구성체라는 실체의 논리와 무의식 또는 주체성의 구성이라는 주체의 논리가 매개되는 유일한 공간은 바로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전체적인 기획 속에서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바로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정의의 변화, 즉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론’에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의 변화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보자면 알튀세르는 공식적으로 언급한 바가 없지만 ‘주체 없는 과정 또는 구조’에서 ‘주체 있는 과정 또는 구조’로의 변화 또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에서 ‘최종심금에서의 계급투쟁의 결정’으로의 변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즉 계급 또는 주체의 논리라는 빛 아래에서 읽혀져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지젝이 가지고 오는 개념들은 실재, 적대와 같은 개념들이다.
실재란 라깡의 개념으로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상징계의 한계, 또는 상징계의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또는 상징계가 비전체임을 보여주는 한계 차원이다. 그리고 적대란 이 실재가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한 가지 양태이다. 적대란 단순한 차이나 대립이 아니다. 좌우의 대립이라는 예를 통해서 왜 그런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파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유기적인 총체로서 인식하며 사회의 분열을 외부적인 침입의 결과로서 생각한다. 그리고 우파는 자신을 이 유기적 총체의 수호자로 좌파를 가장 나쁘게는 이 외부의 침입자로 간주한다. 이에 비해서 좌파는 사회를 본래적으로 분열되고 갈등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좌우의 구별 또한 우파의 구별법과 다르다. 이 둘 간의 관계를 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둘이 차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전제를 만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음/양과 같이 서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면서 유기적인 총체를 이루어야만 한다. 두 번째는 이들의 차이가 측정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잴 수 있는 공통의 잣대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던 좌/우의 관계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서로를 구별하고 인식하고 정의하는 방식에서 조차도 달랐다. 즉 이 둘 사이에는 소통의 공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비소통의 공백만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좌우의 관계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일관되고 정합적인 전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백이 존재하며 이 공백으로 인해 사회는 유기적인 전체가 아님이 드러난다. 이 공백에 대한 이름이 바로 라깡의 실재이며, 이 공백에 의해 가로질러진 비관계적 관계―상식적인 의미에서의 관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관계인―가 바로 지젝이 말하는 적대이다.
계급적대의 중층결정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계급투쟁, 즉 계급적대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지적되어야만 하는 것은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은 밤의 위엄이 아니듯이 계급투쟁 또는 계급적대란 정치의 로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급적대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정하듯이 실정적으로(positive)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이 사회의 궁극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계급적대란 라깡의 실재처럼 오로지 중층결정을 통해서만 그리고 증상적인 형태를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중층결정이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꿈 형성 과정을 서술하기 위해서 도입한 개념이다. 중층결정의 논리에 따르면 꿈에서 우리는 무의식적 욕망의 중핵―라깡적 의미의 실재―을 결코 볼 수 없으며 오직 전치와 응축이라는 꿈 작업을 통해서 형성된 왜곡된 형태의 무의식적 욕망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계급적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꿈이 무의식적 중핵과 연결된 낮의 찌꺼끼들을 배치하는, 즉 무의식적 중핵의 리비도를 전치하고 여러 다양한 꿈 사고들의 계열을 응축하듯이, 계급적대란 자신의 적대적 에너지를 다양한 사회갈등으로 전치하고 이 갈등들을 라클라우가 말한 등가의 연쇄로 응축하는 중층결정 속에서만 보여질 수 있다. 알튀세르의 “최종심급의 고독한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정식화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계급적대란 항상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 갈등이라든지 여성과 남성의 대립이라든지 또는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과 내국인의 갈등 등으로 중층결정된다. 즉 계급적대란 철저하게 알튀세르적인 의미에서 상이한 갈등 방식의 우연적이고 비일관적인 배치―즉 정세, 국면―를 설명해 주는 구조화 원리이자, 라깡적인 실재의 의미를 살려본다면 초월적 틈새 그 자체이다.
꿈이 탁월한 무의식의 형성물, 즉 증상이라면 이 계급적대는 증상의 형태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증상이란 억압된 것의 회귀이면서도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쾌락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즉 의식으로부터 배제되면서도 이 의식을 지탱하고 있는 실재의 한 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젝은 이것을 사회에도 적용하고 있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와 등가교환을 전제로 성립된 사회구성체이다. 그런데 이 사회구성체를 지탱하면서도 이 사회구성체의 전제에 위배되는 역설적인 존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다. 다만 임금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굶어 죽는다는 부자유를 제외하고는. 모든 상품은 등가교환된다. 그러나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등가교환에서 제외되는 예외적인 상품이다. 그런데 이 예외, 즉 임금노동과 잉여가치가 없이는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이 예외를 떠맡고 있는 계급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였다. 이런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일관되고 정합적인 사회―즉 의식―를 위해서는 배제되거나 부인되어야만 할 증상인 셈이다. 그리고 계급적대로 인한 사회의 비일관성과 마찬가지 이야기이지만 증상에 의한 사회의 비일관성을 다시금 일관된 것으로 환상화하는 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계급적대란 그럼에도 돌아오는 것들이며, 이것은 지젝이 벤야민의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지칭하고 있는 라깡적 의미에서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실재의 고집이고, 즉 반복강박으로서의 죽음의 충동인 셈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도 그랬지만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의식상의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의식상의 각성으로 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데올로기가 근거하고 있는 현실적 토대가 무너질 때 폐지된다. 이와 대당하는 지젝의 개념은 바로 ‘환상의 횡단’으로서의 행위이며, 라깡적 용어로 실재의 윤리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지젝의 근래의 작업들이 탁월한 행위였던 레닌적인 몸짓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의식의 주체란 권력의 장소이자 저항 또는 전복의 장소로 정의되고, 이 논리는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라는 헤겔적 모토 아래 역사적 유물론의 기획은 다음과 같이 선언된다. 즉 알튀세르의 ‘주체 없는 과정’은 ‘주체 있는 과정’이 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가 기획했던 역사적 유물론의 가능성의 윤곽이 잡힌다: “요컨대 절대는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헤겔적 모토의 마르크시즘적 판본은 역사는 경제적 토대의 발전(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주체의 논리)으로도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지젝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또 다른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자인 숀 호머의 지적대로 지젝은 교조적인 라깡주의자일 수는 있어도 전통 마르크스주의자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한 번도, 그리고 심지어 알튀세르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를 모든 실정적 속성을 박탈당한 라깡의 주체로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레고리 엘리어트가 자신을 반-반 알튀세리앙이라고 지칭했던 호명법을 차용해 본다면, 지젝의 입장은 아마도 포스트-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지젝이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을 중심에 두는 마르크스주의의 문제틀을 부활시키면서 하는 질문은 이렇다. 만약 지금 당신의 바지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죽은 개들의 복수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알튀세르라는. 이들이 ‘이론은 실천이다. 즉 실천은 이론이다’와 같은 정치의 시간과 이론의 시간 간의 단락의 가능성을 사유 가능하게 한다면.
이병주 / 언론정보학부 강사
FROM 경희대 대학원신문 제1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