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수(術數)와 결합된 동아시아의 전통과학]


동아시아 전통과학에서의 진정한 의미 찾기


                                              박권수(서울대 과사철 협동과정 박사과정)




1920~1930년대 중국에서 의고풍(疑古風)의 학술사조를 주도했던 고힐강(顧詰剛)의 『진한의 방사와 유생』이라는 책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935년에 초간된 이 책은 음양오행과 참위에 바탕한 술수적(術數的) 관념이 진한시대의 정치와 문화, 학술 전반과 얼마나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으로서, 관련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한번쯤은 읽어봐야 할 듯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저자 고힐강이 본문에서 대가답게 힘있고 단호한 어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가끔씩 자신의 논의에 대한 ‘의미부여’를 상당히 방어적인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방어적인 어투는, 그가 당대인들로부터 ‘도대체 왜 오늘날에는 전혀 중요하지도 않은 고대의 망설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논하는가?’라는 식의 비판을 받을 것을 계속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을 써내려 갔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물론 고힐강의 염려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그는 『고사변(古史辯)』을 바탕으로 음양오행과 참위와 같은 오래된 관념들이 전설 속의 성인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말에서 진한시대를 거치면서 방사와 유생들에 의해 창안되었고 유교경전과 결합하였으며 성인에게 가탁된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고조된 전통타파와 유학타파ㆍ미신타파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참위와 술수의 관념에 대한 학술적 논의 자체가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부담감은 그가 개정판의 서문을 쓴 1954년까지도, 어쩌면 문화혁명이 끝나고 난 뒤까지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것은, 그가 느꼈던 부담감이 동아시아 과학사 연구자들의 고민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과학사가 처한 상황 자체를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초 고힐강이 시작한 의고풍의 학문경향은 그가 살아온 시대의 소산물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지난 100여 년간의 시간 또한 술수나 참위 등의 관념들을 전근대적이며 비과학적인 미신이라고 부정하면서 근대적인 것ㆍ과학적인 것ㆍ서구적인 것을 강조하고 지향하던 시기이다.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동아시아 사회는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의 침략에 (일본을 제외하곤) 힘없이 무너졌고, 그러한 무기력을 극복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사회 전체가 ‘자기부정’의 과정과 더불어 서구화와 근대화의 과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동아시아 사회가 독립과 해방을 성취한 이후에도 서구의 물질적 풍요를 따라잡기 위해서 서구화와 근대화의 과정을 계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근대성과 과학성을 지향하고 비과학적인 미신을 부정하는 주장들은 단순히 표면적인 구호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절실하고 진지한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술수나 참위에 대한 연구는 그것이 비록 학술사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위로부터 의심과 회의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한 술수적 관념


동아시아 전통과학사는 이와 같은 근대화ㆍ서구화를 이뤄내기 위한 동아시아 사회전체의 ‘자기부정’과 ‘자기재규정’의 과정을 통해 발전한 분야이며, 나아가 그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분야이다. 여기서 ‘자기부정’이란 전통과학과 문화의 다양한 요소들 중에서 비과학적인 또는 ‘미신으로 보이는 것들을 분리하여 부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천문(天文, 占星)과 풍수(風水), 점술(占術), 명리(命理, 연단(煉丹), 상수(象數) 등의 술수적 형태의 과학활동들이 여타의 것들로부터 분리되고 동아시아 과학사 서술에서 축소되거나 배제되었다. 한편으로는 두 번째의 과정, 즉 전통문화 속에서 ‘과학적인 것’, 그러므로 ‘근대적인 것’들을 별도로 추출하여 확대, 강조하는 ‘자기재규정’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전통과학의 여러 분야들 중에서 수리천문학과 수학, 의학, 지도제작 등의 분야가 ‘근대과학’에 적합한 것으로 여겨져 중시되고 동아시아 과학사 서술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현재까지도 동아시아 과학사의 여러 분야 중에서 천문학과 의학에 관한 연구가 양적, 질적으로 여타의 분야를 압도하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풍수, 점성, 점술, 명리, 연단 등의 분야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미미하며 관련 연구물 또한 일천한 상황이다.

 


한편 하나의 과학분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과학사의 목록에 포함되지 못한 음양오행, 풍수, 점성, 명리, 연단, 상수, 역학 등에 대한 지식들은, 각각 단편적인 부분들로 해체되어 그 중 ‘과학적인’ 내용들만 추출되어 천문학, 수학, 화학, 지리학 등의 ‘정통’ 과학사 분야들 속에 편입되는 운명을 겪었다. 이와 같이 전통시대의 여러 지식들과 유물들 중에서 과학적인 것들을 추출해서 역사를 서술하는 태도는 결국 동아시아 과학사를 고고학사나 유물사에 가까운 모습을 띠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동아시아 과학사의 서술방식은,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화의 과정 속에 진행된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적 기획’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즉 유물과 지식들에 관한 역사를 자기 민족의 역사적 유구성과 민족적 우수성을 잘 드러내는 증거로서 적극 활용하였던 것이다.

 

 



술수적 관념을 포용하고 바라보아야


역사란 당대인에 의해 작성된 글이 아닌 후대인들에 의해 쓰여진 글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를 서술할 때면 흔히 역사가의 개인적 욕망이나 시대적 분위기가 ‘역사관’이라든지 ‘시대적 사명’의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끼어 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지난 시기 동아시아 과학사의 서술에 끼어 든 주된 욕망과 시대적 요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곧 동아시아 전통과학사로부터 ‘근대’와 ‘계몽’, ‘과학’의 흔적을 찾아 부풀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과거사로부터 전근대적인 부분을 일체 부정하고자 하는 이중적 욕망의 소산이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과거사를 대면하면서 한편으로는 강하게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강하게 긍정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왔던 것이다.

 

 

다행히 1980년대 이후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동아시아 사회는 그동안 서구사회에 대해 지녔던 오랜 콤플렉스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다. 물론 일부에서는 동아시아 사회가 여전히 ‘근대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거꾸로 ‘근대의 대안’으로서 ‘동아시아적인 것’을 제시하고 탐구하는 논의들도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학계에서는 ‘근대의 맹아’나 ‘자본주의 맹아’를 찾으려는 시도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과거처럼 대규모의 연구프로그램으로 진행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근대’와 ‘계몽’의 흔적을 찾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후 동아시아 과학사의 서술은 어떠한 형태를 띠게 될까?

 


아마도 이런 식의 미래의 전망에 대한 질문만큼 대답하기 난감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과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대부분 비과학적인 것, 술수적인 것들과 뒤섞여서 결합된 형태로 존재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통과학의 모습을 보다 자세히 개괄해보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즉, 오늘날의 관측천문학에 해당하는 천문(天文)은 점성(占星)과 재이(災異)에 관한 논의와, 수리 천문학에 해당하는 역법(曆法)은 길흉(吉凶)의 일시(日時)를 결정하는 명과학(命科學)과, 수학은 수에 대한 신비적 관념이나 상수학적 논의들과, 의학은 무속적 치료의 전통들과, 지리학은 길한 땅을 고르는 풍수와 각각 결합되거나 중첩되어 있었다.

 


여기에다 음양오행, 상수학(象數學), 역학(易學) 등의 지식들은 대부분의 과학분야들에 기본적인 이론과 개념들을 제공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과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역법과 수학, 관측천문, 의학 등의 지식들이 항상 술수, 참위, 상수적 관념들에 얽매여 있었던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의 분야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지식들이 비과학적ㆍ술수적 관념들과 무관한 채로 존재했던 것도 결코 아니다. 결국 우리가 동아시아 전통과학을 장식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사료들을 바라본다면, 전통과학은 분명 비과학적인 술수와 미신과 함께 혼재된 채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음양오행과 참위에 바탕한 술수적 관념이 진한시대의 정치와 문화, 학술 전반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준 고힐강의 논의는, 중국 고대의 지적인 풍토를 솔직하고 정확하게 드러내준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학’이라는 용어를 의미를 보다 넓혀서 사용한다면, 당시의 음양오행과 참위에 바탕한 갖가지 술수들이 당시 과학의 주류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정은, 단순히 서구과학에 비해 동아시아 전통과학의 상대적 저열성을 다시 한번 인정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전처럼 서구과학을 준거로 삼아서 동아시아의 전통과학을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으로 양단하는 작업의 위험성을 인식하는 일이 된다. 사실 서구과학, 혹은 근대과학이 ‘서구사회’라고 하는 특정공간 속에서 형성된 특정시대의 역사적 산물임을 이해한다면, 그것과 전혀 다른 역사적 공간 속에서 발달해온 동아시아의 전통과학을 서구과학의 잣대로서 재단하는 작업이 얼마나 ‘몰역사적’인 행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몰역사적인 태도를 극복하고서 동아시아 전통과학이 술수적, 혹은 비과학적 관념들과 혼재된 채로 존재해왔음을 인정하는 일은, 결국 동아시아 전통과학과 문화의 풍부한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동아시아 과학사 서술에서 술수와 같은 비과학적 지식들을 외면하거나 제대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 그것과 결합되어 있는 전통사회의 과학과 문화, 역사의 엄청나게 풍부한 내용들을 통째로 놓치거나 아니면 오독하게 될 것이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문 116호 -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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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반 2006-12-0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른바 '동양적인 것'에서 제 입맛에 맞는 것들을 이리저리 취합하여 그럴 듯 하게 포장해서 판매하는 이들, 그리고 이들에게 현혹되기 쉬운 자들이라면 마땅히 경청해야 할 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