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에서 <일리아스>를 읽었다. 두 달에 걸쳐 읽는 동안 여러 다른 책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 중 신영복 선생의 책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을 읽는 관점이 선생의 그것을 흉내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리아스>에 대한 첫인상은 한마디로 불편함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너무나 하찮은 것에 대해서 너무나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의 명예에 흠집이 생겼다는 것인데, 나는 이것이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앞에서 너무나 하찮게 여겨졌다. 또한 아가멤논의 엄청난 선물 공세와 눈 앞에서 동료들의 죽어가는 것도 잠재울 수 없는 그의 분노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되었다. 공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군자라 할만 하다고 했다. 또 소인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만, 군자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아킬레우스는 전형적인 소인이었다.


사실 아킬레우스에 대한 나의 판단과 불편함은 정당하지 못한 것일 지도 모른다. 선생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사람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이 놓여있는 상황과 맥락을 살피라고 말했다. 아킬레우스의 시대, 그리스는 약탈전쟁으로 사회와 경제가 굴러가던 때였다.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이 시대 남자들의 명예는 전쟁에서 이겨 전리품을 많이 챙기는 것으로 높아졌다. 그런 전리품을 아가멤논에게 빼앗겼으니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그는 일찍 죽을 운명을 타고났다. 일찍 죽는 대신 이름을 남기는 것을 택하겠다는 것이 과연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는 겸손한 자세인가를 따져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에게 명예를 얻고 이름을 남기는 일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그의 분노가 극단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람을 평가할 때 선생이 강조하는 또 하나가 시간의 흐름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 놓여있고, 크든 작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겪는다. 아킬레우스도 그러하다. 사실 수 천 년 전의 작품에서 어떤 인물이 변화와 성장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23권 파트로클로스를 위한 장례 경기에서 그는 스스로 정한 규칙을 어기거나 바꿔가며 경기를 진행한다. 이는 공정함의 문제라기 보다는 유연함의 문제인데, 작품의 시작 시점에서 아가멤논에게 전리품을 빼앗겨 분노하는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프리아모스 왕과 마주 앉아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마지막 장면 전에 이미 그의 변화와 성장이 이런 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이 작품에는 수없이 많은 신들이 등장하는데, 신들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아킬레우스가 다른 인간들로부터는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고, 신들과는 굉장히 밀접해 있다는 점이다. 그가 불멸의 명성에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신들과 같이 영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아킬레우스의 변화와 성장은 시간을 초월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자신이 시간 속에 놓인 존재임을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마지막 장면에서 프리아모스 왕이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적진으로 들어와 아킬레우스와 대면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프리아모스 왕이 여러 자식을 모두 트로이 전쟁에서 잃은 비운의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방대한 작품 속에서 실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그때마다 시인 호메로스는 죽은 전사의 출생과 가족관계, 전쟁터에 흘러들어온 내력을 알려준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어떤 전사가 죽을 때,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슬퍼하고 고통받을 지를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찾으로 온 프리아모스 왕은 나에게 선생이 우크라이나에서 본 승전기념탑과도 같은 충격을 주었다.


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을 제시하는 방법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타인과의 만남과 대화였다. 아킬레우스는 작품 속에서 시종 자신의 상처 입은 명예와 일찍 죽을 운명만을 걱정한다. 저 높은 곳에서 신들과 어울리며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고고한 모습이랄까? 그런 아킬레우스가 낮은 곳으로 내려와 인간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어머니 테티스 신도 아니고, 가장 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도 아닌 내가 죽인 적장의 아버지다. 그 사람과 마주 앉아 아킬레우스가 인간의 운명과 존재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모든 의미는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선생의 관계론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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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책의속밖 2022-06-09 08:16   좋아요 0 | URL
많이 늦었습니다만, 찾아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독서모임에서 '글 쓰는 아씨들'이라는 주제로 책을 읽고 있다. <제인 에어>와 <작은 아씨들>을 읽었고, 다음 달에는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를 읽는다. <제인 에어>와 <작은 아씨들>의 결말을 통해 관계의 동등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제인 에어가 로체스터에게 돌아가는 데에는 일종의 사고가 필요했다. 그 사고를 통해 둘의 결합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버사가 죽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로체스터가 불구의 몸이 된다. 작가 샬럿 브론테는 버사의 죽음만으로는 둘의 결합에 필요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사실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는 나이, 신분, 재력 등 모든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다. 결말에 가까워지면 제인 에어가 꽤 괜찮은 집안의 딸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숙부의 유산을 상속받으면서 둘의 격차가 어느 정도 좁혀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굳이 로체스터를 불구로 만들어 그 격차를 더 좁히고 있다. 제인 에어가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 작가가 베푸는 시혜라면, 로체스터가 입은 장애는 작가의 폭력이다. 

  바로 이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방법이 이 작품의 가장 논쟁적인 요소일 수도 있겠다.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에게 관계의 동등함을 계속해서 요구한다. 그만큼 둘의 관계가 동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동등하게 만들 것인가? 어쩌면 이 작품의 결말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기울어진 운동장이 문제라는 것에 우리가 동의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평평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폭력은 꼭 물리적인 폭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과 제도를 통해 움직이는 공권력도 폭력이다. 시장의 질서에 맡기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주장은 어쩌면 기울어진 운동장이 풍화작용으로 평평해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인간의 수명이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 이대로'를 외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주인공 조는 왜 로리의 청혼은 거절하고, 독일인 교수의 청혼은 받아들이는가? 조는 로리에게 끊임없이 '우리는 친구'라고 말한다. 친구 사이는 가장 동등한 관계이다. 조는 동등한 관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반면, 수직적 관계는 불편해하고 어려워한다. 마치 대고모와 가장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 바로 조다. 막내 에이미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이는 대고모의 괴팍한 성격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조는 로리의 할아버지 로런스 영감과는 친구처럼 잘 지낸다. 조가 느끼는 불편함은 돈에서 오는 것 같다. 로런스 영감의 돈은 조가 로리와 친구로 지내는 이상 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고모는 조에게 월급을 주고 있고, 유산 상속을 빌미로 이런저런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조가 마치 대고모에게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은 그녀의 괴팍한 성격보다는 그녀의 재산일 가능성이 크다.

  부잣집 도련님 로리의 청혼을 받아들일 경우 조는 재력의 차이와 남녀 간의 사회적 지위의 차이라는 이중적 격차를 감내해야 한다. 에이미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녀는 예술가로서 성공하기를 꿈꾸는 만큼이나 상류사회에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크기 때문이다. 조는 독일인 교수가 가난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가난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괜찮은 것이다. 완벽하게 동등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한 두 사람에게 마치 대고모의 유산으로 그녀의 저택이 선물처럼 떨어진다. 조는 아무 거리낌 없이 유산을 챙기는데, 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매개로 한 관계이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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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 년 만에 당신을 다시 읽었다. 작년에 당신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은 왜 로체스터에게 돌아가야 했는가? 그리고 유산을 상속받고, 잃어버렸던 친족을 찾는 등 거듭되는 우연은 대체 어쩐 일인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당신을 다시 읽으며 나는 비난의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했다. 나는 왜 당신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다시 읽으니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보였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니 결말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음이 이해가 되는 면도 있었다. 당신을 읽고 나처럼 당신을 비난하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변명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쓴다.

  당신은 책을 읽는 여성이다. 19세기 초중반, 당신의 시대, 여성은 남성에 속박되어 있었고, 태어난 땅에 묶여있었으며, 관습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었다. 여성에게 대학의 문이 열리고, 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고, 남성이 옆에 없으면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었다. 당신이 그러한 억압을 뛰어넘는 유일한 통로는 아마도 책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당신의 독서 목록에 들어있는 조류도감이나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책은 의미심장하다.

  당신은 1인칭 주인공 시점 소설의 주인공이다. 당신은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다. 당신은 아마도 책에서 읽었을 자유나 평등이라는 말을 속으로 끊임없이 반복하고, 남성에게 동등한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당신은 마음속에서 상대를, 즉 남성을 평가한다. 여성 주인공을 등장시켜 '감히' 자신들을 평가하게 하는 내용의 책을 손에 받아든 남성들의 불쾌해하는 표정이 훤히 보인다. 악질적인 비방에 가까운 당대의 평가들을 이해할 만하다. 

  당신은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그들의 평가에 민감하다. 당신은 오해받고, 무시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울분을 쏟아내곤 한다. 당신의 열정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로우드 학교에서 만난 친구 헬렌과는 전혀 다르다. 신이 언젠가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기에 그녀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런 헬렌은 죽고, 당신은 살아서 그곳을 떠난다. 당신에게는 새로운 일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했다. 당신은 작품 속에서 인간에게는 사랑할 대상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신은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꾼다. 실제로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닌다. 당신은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다. 당신이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지붕 위에 올라가 경계선 너머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장소의 이동을 소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과는 다른 어떤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런 당신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사는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로체스터를 비롯한 남성들에게 장소를 옮겨가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 남성들에게 그것은 배경을 바꾸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로체스터는 결혼해서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별장에 가서 살자고 제안한다. 손필드 장에서 당신은 로체스터의 천사였고, 요정이었다. 그렇다면 손필드 장 밖에서 로체스터가 기대하는 당신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여전히 빛나는 보석, 아름다운 꽃, 귀여운 종달새일 뿐이었다. 이는 세인트 존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여성의 위치는 영국에서도 남성의 보조자일 뿐이었고, 해외로 나간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선교사업을 보조하는 역할일 뿐이었다.

  이 대목에서는 당시 영국의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의 역사가 떠오르기도 한다. 영국을 포함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입장이란 무엇이었는가? 너희들은 후진적이고 야만적이니 나를 보고 배워라. 나는 옳다. 나는 앞서 있다. 따라서 나는 하던 대로 할 것이다. 이것은 영국이 식민지를 향하여 한 말인 동시에 남성이 여성을 향해 한 말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역사를 주도한 사람들은 물론 남성들이었다. 당신이 삼촌에게 받은 유산도 실은 식민지에서 온 돈이라는 것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은 변화한다는 것을,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체스터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도 당신은 훗날 그가 사랑의 열정이 식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을 알고 있다. 버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로체스터에게 모든 상황이 변했으니 나도 변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당신의 성숙한 태도 앞에서 모든 장애를 뛰어넘는 사랑이니 영원한 사랑의 약속이니 운운하는 오늘날의 통속극들은 얼마나 너절하고 초라한가?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 자신이 변화하기도 했다. 외숙모의 죽음을 보기 위해 게이츠헤드로 돌아간 당신을 사촌 자매들은 여전히 냉대하고 무시했다. 그런 언니들 앞에서 당신은 어렸을 때처럼 괴로워하는 대신 태연하게 그림을 그렸다. 나는 당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흐뭇했다. 그런데 그림은 다름 아닌 로체스터의 초상화였다. 당신은 이미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게이츠헤드에서 다시 손필드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그동안 집다운 집이 없었던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에 대해 말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집을 떠난 후 고난을 겪고, 세인트 존의 유혹에 빠졌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로체스터와 결합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숱한 이야기들의 문법을 답습하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이야기는 분명 경계선을 완전히 넘어가지는 못한다. 사실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누구도 그것을 두고 당신을 비난할 수 없다. 다만 나는 경계선 밖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려는 당신의 태도를 기억하려 한다. 손필드 저택의 지붕에 올라 경계선 밖을 바라보며 그것에 대해 말하는 당신, 이것이 당신 제인 에어와 당신을 세상에 내보낸 작가 샬럿 브론테가 놓인 문학사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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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욱이와 마주 앉아 곰팡이 슨 속을 씻어 내리며, 동옥이도 위로해주어야겠다는 원구의 계획대로 그날 그들 셋은 술과 통조림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즐거웠다. 그런데 얼마 후 원구가 동욱을 찾아가 보니 동욱 남매는 보이지 않고 새로 집주인이 된 사나이가 동욱은 외출한 채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게 되었고, 그 뒤 동옥 역시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는 소식을 전한다. 원구는 우산을 쓴 채 동욱 남매가 살던 집을 나온다. 손창섭은 <비 오는 날>의 결말을 이렇게 쓰지 않았다. 진짜 결말은 이렇다. 보자기를 싸 들고 간 원구는 사라져버린 동욱 남매의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다시 돌아가 주인 사나이에게 보자기에 싼 물건을 준다. 원구가 친구와 함께 먹으려고 가져간 술과 통조림은 작품에 이름도 없이 잠깐 등장하는 웬 사나이의 차지가 되고 만다. 그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한 손에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받고 선 채, 원구는 사나이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원구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몇 걸음 걸어 나가다가 되돌아와 보자기에 싼 물건을 끌러 주인 사나이에게 주었다. 이거 원, 이거 원, 하며 주인 사나이는 대뜸 입이 헤 벌어졌다.' 

  이를테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손에는 더는 소용없는 보자기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우산을 받고 선 채 비를 맞으며,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라고. 그러니 그 보자기를 앞에 선 모르는 사람에게 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어쩌면 손에 들고 있는 보자기가 사실은 소용없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일지 모른다고. 


2. 

  <미해결의 장>에는 주인공과 광순이 비빔밥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나오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광순에게 삼백 환을 받아든 나는 도넛 집에 가서 '젠자이(팥고물을 한 떡)'를 주문한다. 그런데 젠자이가 나오는 동안 나는 '불시에'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쌀밥과 김이 떠오르는 만둣국을 생각한다. 나는 주문한 떡은 먹지도 않고, 만둣국에 꼭 밥을 먹어야 한다며 젠자이 값으로 백 환짜리 한 장을 내놓고는 도넛 집을 나온다. 백반 한 그릇이 필요한 나는 몇 군데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어떤 양식점으로 들어가 메뉴에 '돈까쓰'라고 적힌 글자를 본다. 나는 '그 발음이 내게 알맞은 것 같아서' 돈가스와 백반을 먹어보고 싶은데, 가격이 삼백 환이다. 일하는 소녀에게 가격을 한 번 더 확인한 나는 백 환을 더 장만해 가지고 오겠다고 일러놓고 밖으로 나온다.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되돌아가 소녀에게 십 분 안으로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소녀뿐 아니라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은 물론이다. 광순의 '오피스'로 가 광순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백 환을 더 청한다. 광순은 오래간만에 돈가스 맛을 좀 보겠다며 나를 따라나선다. 그런데 양식점의 그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몸이 불편해서 방금 돌아갔단다. 나는 실망하여 광순을 떠밀 듯이 밖으로 나온다. 결국 둘은 다른 음식점으로 가서 비빔밥을 먹기로 한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광순은 내게 묻는다. 대체 날 뭐 하러 찾아오는냐고, 나한테 무엇을 기대하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너는 왜 사느냐? 하는 물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끝내 등장하지 않는 비빔밥과 같은 것이다. 아니, 끝내 등장하지 않는 비빔밥을 먹기까지의 그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우며 서글픈 에피소드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쉽게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칫 그 대답은 우리가 말하려는 그 삶이란 것에 비해서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작 비빔밥 먹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고, 난데없이 '너는 왜 사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솜씨가 기가 막힌다.


3.

  소년은 점직한(부끄럽고 미안한) 듯이 그러고 한쪽 손에 든 고무신을 뒤로 슬며시 감추었다. 그러나 만기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소년이 들고 있는 고무신을 걸으면서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달아서 뒤꿈치가 터지고 코뚜리가 쭉 찢어져서 도무지 발에 걸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만기는 가슴이 찌르르 했다. 전차를 타기 전에 그는 소년에게 고무신부터 한 켤레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근처에는 고무신 가게가 눈에 뜨이지 않았고 때마침 전차가 눈앞에 와 멎어서 그대로 이내 차에 오르고 말았다.

  이를테면 <잉여인간> 속 '그제야' 눈치 챈 고무신, 또는 '때마침' 도착한 전차와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언제나 '그제야' 눈치를 채고, 언제나 '때마침' 눈앞에 와 멎은 전차에 오른다. 뭔가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다음이고, 필연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우연의 연속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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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책을 읽고 서평이나 독후감을 쓰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돈은 없고, 시간은 많았던 한해였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많은 책을 (특히 소설을) 읽었다. 이것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올해 읽은 책을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간다. 이제 곧 한 살 더 먹는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았다. 


1. 카프카








올해는 내 사주에 '병화'가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으로 시작했다. 큰 불을 뜻한단다. 카프카의 사주에도 병화가 들었단다. 읽은 작품이 없어도 친밀감을 느꼈던 이유가 이것이었을까? 내친김에 미뤄왔던 카프카 장편 읽기에 도전했다. 병화때문인가? 차마 남을 태울 수 없어서 작가가 자신을 태우기 위해 쓴 작품으로 읽혔다. 이것은 아무런 근거도 댈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식의 감상일 뿐. 사실 나 같은 무지렁이가 카프카를 한 번 읽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알겠는가? 최근, 독서모임에서 카프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침'으로 읽는 관점을 접했는데, 흥미로웠고 그럴듯했다.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읽어볼 일이다.


2. 나쓰메 소세키
















전부터 읽고 싶었던 작가다. 몇몇 장편이 남긴 했지만, 올해는 소세키를 읽어서 좋았다. 소세키는 내게 내용과 상관없이 읽을 때 마음을 편안하고 흐뭇하게 만드는 작가다. 메이지 시대, 조국 근대화의 사명과 문학에 대한 개인적 취향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해야 했던 소세키.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은 결말이 성공적이라 할 수 없지만, 소세키의 삶은 나름 잘 버텨낸 삶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의외로 좋았던 작품은 데뷔작 <고양이>와 <이백십일>이라는 단편이었다. 우울할 때 남몰래 꺼내서 키득거리며 읽기에 좋다.


3. 일본 문학















소세키 소설 두 편과 함께 독서모임에서 읽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몇몇 단편들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 선생의 통찰. 현재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사태들은 그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처음부터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역사적 시점에 부자연스럽게 끼어든 일들이라는 것. 시점과 문체와 개인의 내면과 같은 근대문학의 담론도 그러하다는 것. 원래부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은 없다는 말씀.


4. 프랑스 문학

















다작의 작가 발자크와 에밀 졸라가 버티고 있어 공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두 작가의 작품은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이 많이 남았다. 남은 19세기 프랑스 문학은 내년으로 미룬다. 올해 읽은 프랑스 문학의 압권은 단연 <보바리>다. 문학의 수도승이 써내려간 치밀한 묘사와 구성은 일종의 명품 수공예를 연상케 했다. 처음에 다소 지루하다고 불평하며 감히 플로베르를 몰라봤다는 것을 사죄드린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제르미날>. 에밀 졸라와 같은 문제의식을 괜찮은 장편으로 써낸 한국 작가가 없어서 아쉽다. 조세희의 <난쏘공> 정도가 있을 뿐. 작년에 읽은 <목로주점>과 <돈>에 이어서 내년에는 <나나>, <인간 짐승>과 같은 작품으로 이어지겠다. 


5.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드디어 우리 도선생님과 톨선생님의 장편을 읽었다. 혹은 읽어버렸다. 사실 이 작품들에 대해 말해보라고 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다만 다른 작품들에 비해 훨씬 훌륭하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겠다 싶었다. 특히 <전평>과 <까라마조프가>는 압도적이었다. 사실 올해의 독서는 이 두 편의 소설을 읽었다고 적고 넘어가도 될 것인데, 적다보니 말이 길어진다. 톨스토이는 저 높은 곳에서 역사와 세상과 인간 군상을 한눈에 조망하게 해준다. 한데 그렇게 조망하는 세계는 결코 질서정연하지 않다. 특히 전쟁터에서의 주인공들의 헛짓거리란 말도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에서 이런 인간 쓰레기들을 끌고 가서 도대체 뭘 어쩌려나 싶은데, 결국엔 구원을 말한다. 한데 그것이 전혀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높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넓다. 톨스토이는 얼마큼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디까지 끌어안을 수 있을까?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6. 러시아 문학
















올해의 발견이라 한다면 투르게네프와 레스코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작가들이야 작품을 읽지 않아서 그렇지 워낙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두 작가는 특히 레스코프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주인공이 맞는 허무하면서도 당연해 보이는 비극적 결말, 인상에 남는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맥베스 부인>은 강력한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러시아 소설에 이런 작품도 있었나 싶었다. 레스코프의 <광대 팜팔론>이나 <왼손잡이>와 같은 다른 작품이 기대된다. 이것은 내년으로 넘긴다.


7. 영국 문학

















올해의 독서에서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작품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국 작가들이 모여서 '이런 것을 쓰자'라고 담합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한마디로 이들 작품들은 잃어버린 핏줄과 돈줄을 찾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그 비중이 크든 작든 이런 이야기가 반드시 등장한다. 알고 봤더니 너랑 나랑 사촌이래. 알고 봤더니 주인공이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래. 분명 이에 대한 연구도 되어 있을 것이니, 한 번 찾아봐야겠다. 한 편을 꼽자면 <테스>다. 지인이 예전에 이 작품을 두고 '자존심을 지킨 사랑'이라 평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아주 마음에 드는 평이었다. 다음에 다시 읽는다면 백석의 번역으로 보고 싶다.


8. 미국 문학









얼마 읽지 않은 미국 문학이지만 <모비딕>을 읽었기에 그것으로 되었다. 1951년이라는 연도를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고 세련되었다. 당대에 읽히지 않은 것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역자도 말하고 있듯이 이 소설은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바다와 같다. 바다와 고래와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는 물질성에서부터 철학과 영혼과 종교를 말하는 형이상학까지, 거대하다. 올해 읽은 책은 첫째 <전평>, 둘째 <까라마조프가>, 셋째 <모비딕>이다. 이 세 작품과 같은 작품을 앞으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홍 글자>의 주인공은 <맥베스 부인>과 더불어 올해의 잊을 수 없는 여성으로 꼽는다. <톰 아저씨>의 경우 당대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노예제에 관해 작가가 할 수 있는 말을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작가들도 이 시대의 첨예한 사안에 대해 더 많이 발언하기를 기대한다.


9. 독일 문학









독일 문학은 많이 읽지 못했다. 사실 도서관에서 빌려다놓고 조금 읽다가 포기한 작품이 몇 편 있다. 파우스트도 1권만을 겨우 읽었을 뿐이다. 그나마 <미하엘 콜하스>라는 신선한 작품을 만나 즐거웠다. 카프카의 3대 장편을 읽은 것으로 독일 문학의 아쉬움을 달랜다. 

한편 올해는 괴테가 제출한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 많았다. 거기에는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라는 책을 읽은 것도 한몫했다. 소세키와 같은 국민작가의 부재, 한국문학의 위상과 번역의 문제, 세계문학 전집의 유행과 효용의 문제 등. 내가 답을 낼 수는 없지만 이런저런 생각은 많았다.


10. 기타
















주로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들이다. 우선 제발트와 존 버거를 알게 된 것이 수확 중의 수확이다. 이들 두 작가는 내 독서 행태에 대해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렵고 재미없다고 쉽게 포기하고 말았던 지난 독서 경험들, 반성한다. 평생에 걸친 경험과 생각을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쓴 작품을 단 몇 시간만 읽고 뭔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놓아버렸던 것이다. 제발트와 존 버거는 읽을 때는 힘들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은 작가가 되었다. <종이 동물원>과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훌륭한 sf를 알게 된 것도 좋았다고 한마디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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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19-12-30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네요!
새해에도 즐독하십시요!ㅎ

책의속밖 2019-12-31 08:11   좋아요 0 | URL
막시무스 님도 즐독하시고,
즐겁고 편안한 새해 맞이하시기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