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에서 '글 쓰는 아씨들'이라는 주제로 책을 읽고 있다. <제인 에어>와 <작은 아씨들>을 읽었고, 다음 달에는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를 읽는다. <제인 에어>와 <작은 아씨들>의 결말을 통해 관계의 동등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제인 에어가 로체스터에게 돌아가는 데에는 일종의 사고가 필요했다. 그 사고를 통해 둘의 결합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버사가 죽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로체스터가 불구의 몸이 된다. 작가 샬럿 브론테는 버사의 죽음만으로는 둘의 결합에 필요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사실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는 나이, 신분, 재력 등 모든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다. 결말에 가까워지면 제인 에어가 꽤 괜찮은 집안의 딸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숙부의 유산을 상속받으면서 둘의 격차가 어느 정도 좁혀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굳이 로체스터를 불구로 만들어 그 격차를 더 좁히고 있다. 제인 에어가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 작가가 베푸는 시혜라면, 로체스터가 입은 장애는 작가의 폭력이다. 

  바로 이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방법이 이 작품의 가장 논쟁적인 요소일 수도 있겠다.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에게 관계의 동등함을 계속해서 요구한다. 그만큼 둘의 관계가 동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동등하게 만들 것인가? 어쩌면 이 작품의 결말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기울어진 운동장이 문제라는 것에 우리가 동의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평평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폭력은 꼭 물리적인 폭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과 제도를 통해 움직이는 공권력도 폭력이다. 시장의 질서에 맡기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주장은 어쩌면 기울어진 운동장이 풍화작용으로 평평해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인간의 수명이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 이대로'를 외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주인공 조는 왜 로리의 청혼은 거절하고, 독일인 교수의 청혼은 받아들이는가? 조는 로리에게 끊임없이 '우리는 친구'라고 말한다. 친구 사이는 가장 동등한 관계이다. 조는 동등한 관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반면, 수직적 관계는 불편해하고 어려워한다. 마치 대고모와 가장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 바로 조다. 막내 에이미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이는 대고모의 괴팍한 성격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조는 로리의 할아버지 로런스 영감과는 친구처럼 잘 지낸다. 조가 느끼는 불편함은 돈에서 오는 것 같다. 로런스 영감의 돈은 조가 로리와 친구로 지내는 이상 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고모는 조에게 월급을 주고 있고, 유산 상속을 빌미로 이런저런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조가 마치 대고모에게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은 그녀의 괴팍한 성격보다는 그녀의 재산일 가능성이 크다.

  부잣집 도련님 로리의 청혼을 받아들일 경우 조는 재력의 차이와 남녀 간의 사회적 지위의 차이라는 이중적 격차를 감내해야 한다. 에이미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녀는 예술가로서 성공하기를 꿈꾸는 만큼이나 상류사회에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크기 때문이다. 조는 독일인 교수가 가난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가난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괜찮은 것이다. 완벽하게 동등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한 두 사람에게 마치 대고모의 유산으로 그녀의 저택이 선물처럼 떨어진다. 조는 아무 거리낌 없이 유산을 챙기는데, 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매개로 한 관계이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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