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시리쟈르 1 (애장판) 신일숙 환상전집
신일숙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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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화가 ‘신일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불세출의 걸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제외하고 논할 수 있을까.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 이 작품은 가상 국가인 여왕의 나라 ‘아르미안’과 페르시아, 그리스 등을 배경으로 아르미안의 네 딸들(공주)을 중심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했던 여러 신들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들이 치열하게 그려져 있다. ‘운명이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라는 명언으로 더욱 유명세를 치룬 이 작품은 이후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는 현대적인 세련미와 소녀적 감성을 녹여낸 만화로 활동한 동시대의 여러 만화가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 그만의 만화를 선보여 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이집트, 페르시아, 히타이트, 잉카의 고대국가와 중세 유럽, 그리고 가상 국가 아르미안에 이르기까지……. 그의 많은 작품에서는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오랜 역사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조사와 해박한 지식을 짐작할 수 있었고, 또한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사막의 모래바람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이 작품 <에시리쟈르> 역시 어찌 보면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한 작품인 듯 하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완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현재는 사라진 순정잡지 [미르]에서 연재를 시작한 <에시리쟈르>는 편집자의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작품이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분위기는 최대한 살리되 아르미안과는 다른 배경과 차별화된 등장인물로 작품의 독특한 색깔은 잃지 않을 작품으로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에시리쟈르>는 아르미안과 완벽하게 독립적인 작품으로서는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미르]에서 시작된 연재는 잡지의 폐간으로 한동안 미 완결인 체 떠돌다가 [윙크]에서 <리니지>의 완결 후 다음 작품인 <파라오의 연인>을 준비하던 중에 다시 생명을 얻어 연재를 재개했고 결국은 [윙크]에서 완결되었다.

자세히 보면 <에시리쟈르>는 초반부와 후반부의 그림체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몇 년 동안의 공백기를 거치는 동안 작가의 그림체가 달라진 탓이다. 또 어쩐지 처음의 의도야 어찌되었던 후반부로 갈수록 서둘러 마무리하듯 급하게 모든 사건을 해결해버리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윙크] 초창기 시절 인기작이었던 작가의 전작(엄밀히 따지자면 ‘전작’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먼저 완결이 난 쪽인) <리니지>보단 <에시리쟈르>가 더 맘에 드는 작품이었다. ‘아르미안’의 배경인 고대에서 ‘리니지’의 시대 중세로 바로 시간이동을 해버린 탓에 좀 더 사막 향기의 여운을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예언의 여자아이 ‘에시리쟈르’와 왕비의 운명을 타고 난 에시리쟈르를 얻어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왕자들의 왕권다툼이 기둥 줄거리이다. 수도 바그다드의 화려하고 이국적인 풍경과 작품의 주요 배경인 사마르칸트의 사막 지대를 무대로 붉은 장미 문신을 가진 운명의 아이 에시리쟈르와 그녀 이상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되는 또 다른 주인공 라뮤드의 이야기가 바람인 듯 꿈결인 듯, 혹은 노래하듯이 자유롭게 흘러간다. 등장인물이나 배경에서 어쩔 수 없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그림자가 느껴지지만 그것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작품은 소품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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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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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출간해서 150만부가 넘게 팔린 신경숙 작가의 인기작 『엄마를 부탁해』는 그 인기의 여세를 몰아 현재는 연극으로도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소설이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작가 신경숙의 책을 구입했으나 거의 2년 가까이 표지조차 넘기지 않고 방치해 두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한 달 동안 사고 싶은 책과 CD의 목록을 작성해 두었다가 용돈을 받으면 순서대로 사고 싶었던 책과 음반을 사 모았고 한 달 내내 책을 읽고, CD를 반복해서 들었고, 주말이면 홍콩영화를 보러 극장을 기웃 거렸다.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신경숙의 작품을 오랜만에 마주한 나는 어쩐지 선뜻 책장을 넘길 용기가 나지 않아 2년이나 묵혀 두었던 것 같다.

  십대였던 나는, 돌이켜보면 꽤 많은 책을 읽었었다. 그닥 특별한 취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소설이었고 신경숙을 비롯하여 정지우, 전경린, 은희경, 배수아 등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남자 작가들의 작품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남성 중심적 시선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그녀들의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게 되었고 무감각해졌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동네 도서관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대형도서관에 매료되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어쩐지 그녀들의 작품이 아닌 다른 작가들의 책을 골라서 읽었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보다는 주로 신인작가나 무명작가의 작품을 골라 읽었는데 다듬어지지 않는 풋풋함과 열정이 느껴지는 작품을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어렸던 내가 좋아했던 그녀들의 작품에서 기성 작가의 농후한 맛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멀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거의 십 년 만에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다시 보면서 처음 표지를 넘겼을 때의 그 느낌이란……. 표지 안쪽에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의 프로필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다소 메마른 듯한 인상의 무표정한 그녀의 사진은 세월을 지나 정면에서 측면으로 바뀌어있었으나 예전과 다름없는 어깨를 덮는 헤어스타일에 ‘전북 정읍 출생. 서울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85년 「겨울우화」……. 로 시작하는 그의 약력을 본 순간 10년의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작가의 프로필을 보며 그간의 회포를 푼 다음에는 책장을 넘기는 일이 훨씬 더 수월해졌다. 게다가 예전에 국어선생님께서 침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셨던 그의 유려한 글 솜씨라니……. 그간의 어색함을 감안할 때 읽기를 끝내는데 일주일 이상의 시간을 예상했었는데 진행속도는 나의 예상을 훨씬 추월하여 체 사흘이 되기 전에 나는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얼마 후에 작품 속 딸의 시선에 지나치게 빙의한 나머지 한동안 머뭇거리긴 했으나, 대체로 빠른 속도로 끝까지 읽어나갔고 읽는 내내 거의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났고 가슴이 먹먹해 졌다.

  생일상을 받기 위해 자식들이 있는 서울로 상경한 엄마는 지하철 서울역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그 길로 실종이 되고 만다. 처음에는 엄마의 실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가족들은 점점 엄마의 부재를 실감하게 되고 잊고 지내던, 혹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희생을 기억하고 후회하고 아파한다. 그것은 각각 큰 딸과 큰 아들, 그리고 남편의 시선으로 기억되고, 종장에 이르러 새의 몸을 빌어 자식들과 시골집과 자신의 고향집을 찾는 엄마 자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특히, 여러 명의 화자 가운데 작가인 ‘큰 딸’은 아들과 남편의 이야기에서도 수시로 등장하여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대표적 화자가 되는데 그만큼 딸의 이야기가 가장 가슴에 와 닿기도 했다.

  그녀의 엄마 박소녀는 시골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열 일곱 나이에 시집을 갔다. 시집 와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정착하지 못하고 늘 밖으로 도는 남편과 일찍 과부가 된 무서운 시누이와 가슴 아린 시동생 균을 살뜰히 챙기며 농사일과 집안 살림을 바지런히 해 냈고,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아 남부럽지 않게 키워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몸이 바스라지도록 집안일을 하고 자식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 작가의 손을 빌어 엄마 ‘박소녀’의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어릴 때 우리 엄마의 18번 중 하나는 대한민국 보통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공부 좀 해라.”였다. 소설 속 엄마가 큰 아들 형철이 검사가 되기를 바라고, 딸의 소설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공부를 많이 한 작은 딸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던 것처럼 우리 엄마의 바람은 딸들이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장을 얻어 엄마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루어주는 것이었다.

  “엄마는 너그 만 할 때,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몬 했다.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와 공부를 안 하노? 내가 나 좋자고 공부하라고 하나? 다 너그들 잘 되라고 하는 기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공부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좀 해라. 으이.”

  아직도 귓가를 생생하게 맴도는 엄마의 그 말들. 실제로 엄마는 가난한 농촌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왔고, 초등학교 졸업 후 학교는 더 이상 다닐 필요 없다는 외할아버지와 1년을 대립한 끝에 1년을 꿇고 중학교를 들어갔다고 했다. 중학교 졸업 후,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엄마를 눈여겨 본 담임선생님께서 예고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건 엄마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여상에 간다고 해도 보내줄까 말까했을 텐데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도 아닌 예고라니……. 그건 가난한 집 맏딸이 감히 꿈꿀 수 없는 사치였던 것.

  어렸던 나는 엄마의 옛 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거듭 강조하시는 엄마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인 거지, 왜 엄마가 못 푼 공부의 한을 자식에게 풀려고 하는 지 말이다. 엄마의 “공부” 소리가 더해질수록 엄마에게 반항하는 내 목소리도 커져갔고 반항은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기 일쑤였다. 결국은 “그래. 니 마음대로 하고 살아라.”는 엄마의 체념 섞인 한숨과 함께 엄마와의 대립은 끝이 났지만 어린 시절 학교가 파하면 제일 먼저 엄마에게 달려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때의 다정함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의 고마움이나 무한애정은 새록새록 느끼긴 하지만 오랫동안 반쯤 닫아버렸던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표현하는 방법은 거의 잊고 살았다. 가끔씩 마음을 꺼내 보이려고 다가가다가도 종내는 서로의 마음을 할퀴고 돌아서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작가의 말처럼 끝내 잃어버린 엄마를 찾지 못하고 결말을 맞이한 것은 어쩌면 그가 우리들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인 동시에 아직은 우리에게 ‘기회’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우리 엄마도 어느 날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엄마의 희생과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서 언제까지나 덜 자란 모습으로 칭얼대기만 하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어린 날, 서툰 솜씨로 어설프게 만든 종이 카네이션에 함박웃음을 짓던 엄마였는데……. 오늘은 엄마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써 볼까? 그런데 무슨 말부터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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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할 수 있어 1
모리시타 에미코 지음, 손정임 옮김 / 신영미디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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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 전 안방극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대 성공 이후 30대 싱글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은 날로 변모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드라마나 영화, 소설, 만화 속에서 그려내는 가상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들이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결혼에 대한 가치가 변화하는 동시에 싱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시타 에미코 작가의 <혼자서도 할 수 있어>는 30대 싱글 여성의 삶을 너무나도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표지에서 말해 주듯이 이 작품은 30대의 독신에, 게다가 남친이 없는 레알 솔로지만 그런대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여자의 일상을 가감 없이 담아내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평소에는 판매 업무를 하고 원룸의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으며, 지금은 우연히 남친이 없을 뿐인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니, 더욱 귀가 솔깃해 진다. 그림 자체가 뛰어나지도 않고, 이야기의 매력이 극대화되지도 않은 작품이지만 작화체와 4컷 만화의 중간쯤인 그림체로 담담히 풀어내는 사실적인 이야기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30대가 되었지만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고, 결혼에 대한 압박은 어느 정도 받고 있지만 아직 결혼이나 싱글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가진 바 없이 그저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 뿐인 작가의 이야기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으로서의 삶을 제시하는 판타지를 보여주기보다는 현실 그대로의 리얼한 삶의 이야기로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다. 자발적인 독신은 아니나 아직까지는 많은 부분 결혼제도에 있어서 남자에 비해 불합리한 점을 가진 여자로서의 삶에 어느 정도 회의를 가진 독신 여자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심히 공감하면서, 또 그 처절하고도 유쾌한 삶을 응원하면서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지금 내 자신의 삶에도 용기를 불어넣게 되는 것이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이십대를 지나 지나간 청춘을 추억하며 때로는 나이 어린 여자아이들의 젊음을 부러워하고 시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못한 게 아니라 그저 인생을 즐기며 살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위안과 용기를 보내는 작가의 나름 희망적인 메시지까지 읽어낼 수 있다. 때론 현실의 팍팍함에 우울함에 빠지기도 하지만 인생 뭐 있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모자란 인생에 즐겁게 사는 거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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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지나의 다리 이정애 컬렉션 1
이정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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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씨아이에서 issue collection으로 발행되는 만화의 면면을 보자면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소재로 여러 명의 작가가 하나의 주제로 다양하게 풀어내는 연작시리즈 순애보를 필두로 몇 권의 중편 시리즈와 단편집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새롭게 발행되는 이정애 컬렉션이 반가운 이유는 더 이상은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는, 꽤 오래전 절필 선언을 한 안타까운 작가의 복간작품이라는 데 있다.

이정애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열왕대전기]나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을 집필 중에 절필 선언을 한 탓에 그 작품들의 결말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예전에 발행된 작품을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완결을 볼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되겠지만.

이번에 발행된 이정애 컬렉션의 1권은 [키 큰 지나의 다리]라는 작품이다. [열왕대전기]나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을 제외하고는 긴 호흡의 작품이 드문 탓에 유난히 중 ․ 단편 작품이 많은 이정애 작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먼저 간택(?)된 작품은 솔직히 좀 예상 밖이었다. [키 큰 지나의 다리]라니……. 어떤 만화였지? 오래전 만화를 다시 읽을 때면 문득 ‘어? 그게 무슨 내용이었지? 결말은 어땠더라?’ 하는 가물가물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이 작품 역시 그랬다. 허나, 이 작품을 다시 읽은 후에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이 10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작가 자신도 새롭게 느껴질 만큼 [키 큰 지나의 다리]에는 그의 작품의 원형이랄까, 소재랄까 싶은 전형적인 것들이 그 어떤 작품보다도 뚜렷하게 담겨진 작품인 듯 하다.

20XX년 여름, 퉁구치(서울). 밀수와 갈취, 매매춘이 기승을 부리는 혼돈의 국경도시를 배경으로 퉁구치 밀매조직의 2대 세력 가운데 하나인 족제비파의 두목 지나와 지나의 오른팔이자 족제비파의 실질적인 두뇌 한, 그리고 그들 사이에 르포라이터 에블린이 개입하게 되면서 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형과 다리를 나눠가진 샴쌍둥이로 태어났으나, 분리수술의 성공으로 공유했던 다리 한 쪽과 사랑했던 형을 동시에 잃어버린 태생적 아픔을 지닌 주인공 지나는 그 상실감을 탐욕과 폭력성으로 드러내는 나쁜 남자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어린 시절 지나와 만나 비상한 머리로 지나의 두뇌이자, 상실한 다리와 같은 존재가 된 선(善)을 대변하는 인물 한. 한은 지나에게 구원되었으나, 또한 주변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파멸시키는 지나에게 애증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한에게 반한 괜찮은 여자 에블린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지나와 한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지독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이야기이다.

이정애 작가의 작품 속에는 유난히 키가 크고 각진 근육질의 사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흡사 인체해부학 책에나 등장할 법한 날렵한 근육덩어리의 몸을 자랑한다. 가뭄에 콩 나듯 등장했던 여주인공은 [아테르타 연대기]의 남성적인 여신, 혹은 몇 몇 단편들에 등장했던 성별이 불분명한 꼬마 여자아이의 모습이거나 그도 아니면 이 만화에 등장했던 에블린과 같이 제 3자의 눈을 가지고 작품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성이 전멸하다시피한 마초적이고 남성적인 인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독히 남성적인 모습과 아름다운 남자들과의 사랑으로 여성독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의 만화에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미(美)의 상징적 존재도 남자의 몫이었다.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의 소델리니 교수라던가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의 나녹, 그리고 그 맹목적인 사랑을 동경하게 만들었던 [열왕대전기]의 아름다운 소년 쇼너 스키올라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절대 사랑에 목말라 하며,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절망하고, 그리고 행복해한다.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안타깝고 애처롭게 펼쳐지며, 때로는 가슴 저릿한 충격과 비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도 한다. 이 작품 [키 큰 지나의 사랑]에서도 지나와 한의 지독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끝을 이야기한다. 허나, 에블린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들의 사랑은 비극적이긴 하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몇 페이지 넘겨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아! 이건 이정애 만화다!” 라는 그런 느낌이 무엇보다 좋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나도 여전히 반갑고 뭔가 차별화된 특별함이 느껴지는 만화. 언젠가는 미완의 걸작 [열왕대전기]나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의 완결과 그의 새로운 작품도 만나볼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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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이정애 컬렉션 2
이정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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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여름에 창간되어 2001년 봄 폐간하기까지 정확히 딱 70권이 발행되었던 성인용 순정만화 잡지 『화이트』. 물론, 『화이트』이전에도 성인을 대상으로 한 순정지가 발행된 적이 있었고, 이후에도 몇 몇 잡지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화이트』는 그 잡지들 중 그나마 가장 오래 살아남았었다. 분명, 성인대상 잡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성인이 되기 전인 내가 버젓이 교복을 입고서도 구매할 수 있었던, 그래서 지금도 고향집 벽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추억의 잡지 『화이트』. 돌이켜보면 『화이트』라는 잡지는 당시 어린 나이의 나에게는 조금 감당하기 벅찬 감도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 작품들 중 절반쯤은 이해했고 나머지는 그저 읽고 흘려버렸었다. 그것은 신일숙, 강경옥, 김기혜, 한혜연 작가 등과 함께 『화이트』를 대표했던 작가 중 한 명이었던 이정애 작가님의 다소 난해한 작품도 한 몫 단단히 했었다.

  물론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든 작품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람마다 취향도 제각각, 작품을 받아들이는 견해도 남다른 법이니 그건 개인차 일수도 있으나, 보편적으로 나이가 들다보면 예전에 몰랐던 걸 알게 되는 것도 있을 테고, 또 사고의 유연성 같은 것도 생기지 않으려나. 각설하고, 이정애 작가님은 지금은 물론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진 않지만, 그 시절 그의 작품은 뭐랄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기묘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만화는 충분히 마니아틱해서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경하던 친구의 취향이었던 이정애 작가의 만화를, 그의 만화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좀 버거웠던 내가 열심히 보았던 건, 아마도 취향과 상관없이 그의 작품에서 열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넘치는 열정에 나도 모르게 반하고 말았다.

  이정애 컬렉션의 두 번째 작품인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은 그의 전작들에선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학원물로 시작한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통해 그 특유의 분위기와 아우라를 분출했던 그가 거의 유일하게 취약했던 장르였던 학원물에 도전한 것이 다소 의아하다 싶었더니, 결국은 작가의 말에서 표현했듯이 결과적으로는 이정애 특유의 SF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물론 그런 장르의 전환이 전혀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다는 것이 그의 작품을 즐기는 또 다른 묘미이긴 하지만. 그리고 또한 이 만화는 그간 나를 힘들고 혼란스럽게 했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좀 더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세인트 니콜라스 예비학교를 대표하는 세기의 꽃미남이자, 세인트 니콜라스 예비학교 뿐 아니라 근처의 세리단 여학교에까지 명성을 떨치는 발렌타인 왕자님 나녹 맥클레인이 어느 날 우연히 부딪치게 되는 아프리카 출신의 여학생 모딘 그웬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 절대적 아름다움과 그에 못지않은 까칠하고 결벽증에 가까운 별난 성격으로 모두의 왕자님으로 군림하는 나녹이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무심한 여학생 모딘에게 반하면서 벌어지는 유쾌한 소동을 시작으로 냉혹하기가 시베리아 벌판이라는 세인트 니콜라스의 훈육위원장 야스민 르로이가 나녹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된다. 물론 여기까지만의 이야기였다면, 조금 독특한 주인공들이 풀어가는 특이한 학원물일 뿐이었겠지만 나녹과 모딘, 그리고 야스민이 얽힌 이(異) 세계인 다른 별에서의 애증관계가 드러나면서 당당히 SF로서의 본색을 드러낸다.

  우리나라에서 야오이란 만화장르가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보편화되기 전, 표현의 자유가 심히 제약을 받던 무렵에 그려진, 그래서 다소 억눌리고 자유롭지 못했던 표현의 한계가 느껴져 때때로 안타까움을 주었던 그의 만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지금이 좀 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독특한 그 시절만의 감성과 향수가 느껴져 아련함을 더한다. 어찌되었던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 만화가였고, 내가 본능적으로 거부했던 동성 취향의 만화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의 만화에 열광하게 만들었던 유래 없는 작가다. 만화가 절필 10년 가까운 세월, 새삼 그의 절필이 안타까운 것은 지금이라면 나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그의 작품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법 한데 이제는 추억 속 작품들을 뒤적이며 애틋한 마음만을 가져야한다는 아쉬움 탓이다.

  6월에 발간 예정인 컬렉션 시리즈 [탈콘의 피], [신데렐라 이야기], [용왕의 근심]의 출간 소식도 더없이 반가운 일이긴 하나, 오래전 작품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에 더해서 언젠가는 그가 다시 만화계로 복귀하여 미완된 걸작들을 마무리 해 주길 간절하게 바래본다. 그의 작품에 열광했던 팬이라면, 인내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끈질길 테니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기다림의 끝이 있기만 하다면 언제까지고 행복한 기다림에 빠져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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