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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문장 4 - 고대와 현대, 시공을 뛰어넘은 로맨스의 고전
호소카와 치에코.호소카와 후민 글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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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만화를 처음 본 건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년 쯤 전이었다. 나는 아주 조그만 섬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곳에는 서점은커녕 당시 동네마다 있었던 만화대여점도 찾을 수 없었던 오지(?)였다. 어찌되었던 내가 만화책을 처음 접한 건 교실의 미니문고였었는데 도서관도 따로 구비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초등학교였던 내 모교에는 도서관 대신 교실마다 한 켠에 미니문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세계 명작동화나 전집 같은 건 규모에 걸맞게(?)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몇 몇 동화와 위인전, 동시, 시조, 수기, 그리고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캔디캔디>를 비롯한 몇 권의 만화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정식으로 판권이 계약된 이 만화 <왕가의 문장>도 어린이 문고에서 볼 수 있었는데 당시의 제목은 <왕가의 문장>이 아니라 <나일 강의 소녀 캐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나 이외에도 다양한 제목으로 이 만화를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제목만 보고 비슷한 내용의 다른 만화인줄 알고 빌렸다가 사실은 같은 내용의 제목만 다른 만화라는 걸 알고 당황한 적도 있으리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재미있게 봤던 <나일 강의 소녀 캐롤>은 작가의 허가도 없이 국내에서 불법으로 복제된 소위 말하는 해적판 만화였고, 우리나라에 유행처럼 번졌던 해적판 만화에 분노한 작가가 한국과는 절대로 정식 판권 계약은 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판타지 로맨스 만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았던 이 작품을 국내에서는 정식 라이센스 판으로 볼 수 없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지 호소카와 자매는 최근 우리나라와 판권 계약을 체결하고 정식판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던 차원이동 순정만화의 고전인 이 만화를 정식판으로 볼 수 있게 되니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1976년 연재를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연재를 이어가고 있는 순정만화계의 양대 산맥은 <왕가의 문장>과 <유리가면>이 둘 다 정식 판권 계약을 완료하였으니, 비슷한 시기에 연재를 시작했으나 아주 오래 전에 연재가 끝나버려 고리적에 완결 난 <캔디캔디>도 정식판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주 다양한 출판사에서 몇 십 종류로 찍어낸 <캔디캔디>였건만, 그 중에서 하나도 정식판이 없었다는 건 완전 대 쇼크였으니 말이다.

각설하고, 그래서 거의 이십년 만에 다시 본 <왕가의 문장>은 어땠냐고? 캐롤이라는 미국인 소녀가 이집트에서 어떤 사건을 계기로 고대 이집트로 차원을 이동하게 되고, 유명한 이집트 소년 왕 멤피스와 로맨스를 꽃피운다? 여기까지는 아주 오래전에 봤던 만화책의 내용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연재를 시작했다는 이 만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이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나니 조금은 변질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호소카와 자매는 왜 그 토록이나 오랫동안 판권 계약을 거부한 건지(해적판 만화의 열기가 확 사그라든 다음에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가설이긴 하지만 이 만화의 정식판이 십 년 전에만 발간되었어도 그 느낌은 또 달랐을 테다.

현대의 소녀가 차원을 이동해서 과거의 매력남과 사랑을 하는 이야기는 물론 이 만화가 연재를 시작하던 시점에서는 꽤 드문, 획기적인 소재가 되었겠지만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차원이동의 판타지 로맨스는 차고 넘치는 세상이 되었다. <왕가의 문장>의 뒤를 이어 고대 히타이트로 떠났던 <하늘은 붉은 강가>라던가, 사신천지서에 빨려 들어가 고대 중국으로 이동한 <환상게임>을 비롯하여 국내 작가의 여러 작품에서도 차원이동은 더 이상 특별한 소재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리다 지쳐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무한 상승한 나머지 막상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을 때의 당혹감은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70년대 중반에 시작한 연재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반증이고, 또한 작가가 아직까지도 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모든 일에는 알맞은 때가 있고, 너무 오래 뜸을 들인 밥은 최상의 밥맛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 작품 <왕가의 문장>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판권을 계약해서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읽고 있긴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일찍 문을 열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지울 수 없다.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쉽게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흡입력이 떨어지는 게 가장 어려운 점이다. 뭐,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고 알아갈수록 더 좋아지는 사랑도 있게 마련이니 이 작품이 절대 후자 쪽이길 바라며, 어제 어디까지 봤더라? 오늘은 제발 이번 권은 다 봐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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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후루 8
스에츠구 유키 글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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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던 나는 서른이 되면 인생이 끝나기라도 할 것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서른이 지나면 정열 따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지는,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재미없게 살게 될 거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밋밋한 서른이 되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완전 열정적으로 이십대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작 내 이십대는 십대와 다름없는 질풍노도의 시기였고, 열정적인 인생은 비단 나이에 반비례하기 보다는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최근에 만난 스에츠구 유키의 복귀작 <치하야후루>는 그 ‘정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몇 년 전 방송되었던 공유와 성유리 주연의 TV 드라마 <어느 멋진 날>은 일본만화 <에덴의 꽃>의 설정을 따온 작품이었다. 작가 스에츠구 유키의 대표작인 <에덴의 꽃>은 부모의 재혼으로 가족이 된 도키오와 미도리 남매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가족에게 닥친 불의의 사건을 계기로 헤어졌다가 수 년이 흐른 후 다시 만나고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애틋한 사랑을 아련하게 펼쳐놓은 작품이다. 스에츠구 유키를 인기 작가 반열에 올려놓고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층의 지지를 받게 해 준 이 작품은 그러나, 몇 몇 장면이 <슬램덩크>와 <피치 걸>을 표절한 것이 밝혀지면서 일본만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작품의 절판과 함께 작가의 만화계 파문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했다.

<에덴의 꽃>을 재미있게 보았던 독자로서 스에츠구 유키의 후속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큰 실망을 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몇 년 만에 그는 새로운 작품을 들고, 그것도 2009 만화대상 대상 수상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꽤 거창하게 컴백하셨다. 뭐, 어찌되었든 나는 그의 도덕성이라던가, 재기의 과정이 궁금한 게 아니니 그저 그의 새로운 작품이 반갑고 설렐 따름이다. 게다가 요즈음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외면 받을 정도로 일본색이 강한데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칙을 가진 카루타가 정갈한 그림체와 섬세한 심리묘사가 주특기인 그의 손에서 어떤 이야기로 펼쳐질지 궁금해졌다.

언니가 일본 최고의 미소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믿었던 초등학생 치하야는 카루타 명인의 손자인 전학생 아라타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어린 아라타의 빛나는 눈동자와 카루타에서 일등을 해서 세계 일등이 되겠다고 말하는 아라타의 꿈에 동화된 치하야는 카루타를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치하야와 아라타, 치하야의 소꿉친구이자 만능 맨 타이치는 카루타와 함께 우정을 쌓아가게 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헤어졌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재회하게 되고 그들의 청춘스토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제목 <치하야후루>는 주인공인 치하야의 이름인 동시에 카루타에 쓰이는 백인일수 중 하나의 싯구로, 작품을 관통하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기도 했다.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카루타는 백인일수을 주제로 펼쳐지는 카드 게임인데, 백인일수란 일본을 대표하는 100명의 가인들이 지은 시 한 수씩을 모은 일본의 고전가집을 말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황조가나 제망매가, 관동별곡 등과 같이 유명한 고전시를 모아 만든 시집을 카드 게임으로 활용한 것이다. 상구와 하구로 이루어지는 백인일수 가운데 하구만 적어놓은 카드를 바닥에 늘어놓고 낭독자가 상구를 읽으면 그와 짝이 되는 카드를 쳐내는 방식인 카루타는 자기가 가진 카드를 모두 없애는 쪽이 이기는 방식이다. 단지 게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스포츠로 카루타 대결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질 때는 복잡한 카루타의 규칙이라던가 지나친 일본색에 대한 반감 따위는 어느새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릴 만큼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천부적인 감각과 재능을 지닌 주인공과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는 이성(異性), 이러한 주인공을 아끼고 충고를 아끼지 않는 조력자와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 그리고 스포츠 경기에서는 빠질 수 없는 라이벌의 등장!!! 스포츠를 소재로 한 만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모두 담겨있으면서도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어우러져 장르를 가려가며 편식하는 독자들도 무리 없이 볼 수 있을만한 추천작이다. 카루타를 통한 만남과 이별, 재회, 그리고 도전……. 그들이 펼치는 아름다운 청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우리 모두의 가슴에도 정열의 꽃이 피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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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이야기 2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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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영국 귀족사회의 어느 귀족 가(家)의 하녀 엠마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려낸 『엠마』의 작가 KAORU MORI가 신작 『신부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의 전작 『엠마』는 불세출의 인기작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작가에겐 어느 정도의 지명도와 인기를 안겨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엠마』의 후속작품이 어떤 이야기일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돌아와 주셨다.

19세기 중앙아시아, 카스피 해 인근의 지방도시에 사는 에이혼 가(家)의 막내아들 카르르크에게 산 너머 먼 마을에서 여덟 살 연상의 새색시 아미르가 말을 타고 시집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름동안은 유목민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하르갈 가문의 처녀인 스무 살의 아미르와 예전에는 유목을 했었지만 지금은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는 에이혼 가의 아들인 열 두 살의 카르르크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신부와 어린 신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아버지, 어머니와 누나 세이레케와 자형 유스프, 그리고 누나의 네 아이들에다 집안의 상속자인 카르르크와 갓 시집 온 아미르까지……. 열 두 명이나 되는 대 식구인 에이혼가. 함께 살고 있는 큰 누나인 세이레케 외에도 카르르크 위로 여러 명의 형과 누나가 있지만 막내가 상속을 받는 이 지역의 풍습에 따라 막내인 카르르크가 후계자가 되고 그의 아내인 아미르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종부(宗婦)가 되는 셈이다. 거기다 영국 출신의 이방인으로서 중앙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은 객식구 스미스 씨까지 더해져 날마다 바람 잘 날 없이 소란스러운 에이혼가의 이야기가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처음 시집 온 아미르가 에이혼 가문의 전통을 몸에 익히며 점차 에이혼 가문의 며느리로 적응에 가는 모습과 함께 카르르크의 가족들이 활달하고 명랑한 아미르에게 매료되어가는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이 가족에게 닥치는 거의 유일한 위기는 아미르 네 친정 식구들이 아미르를 다시 돌려달라고 찾아와서 행패를 부린 정도인데, 다른 마을 부호에게 시집보낸 동네 처녀가 죽고 더 이상 시집보낼 처녀가 없게 되자, 어린 카르르크에게 시집보낸 아미르를 다시 데려가서 대신 시집을 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우리 옛말은 과연 괜히 나온 게 아닌지라 국적을 불문하고 통용이 되는 훌륭한 속담임이 에이혼가의 위기 극복 방법과 그 후의 가족들(특히 카르르크와 아미르)의 미묘한 변화에서도 여실히 느껴진다.

더 이상 유목생활을 하진 않지만 유목민 특유의 카리스마를 맘껏 발산하시는 할머니와 그에 반해 온화하고 조용한(카르르크와 비슷한 성품의) 할아버지, 자식들에 대한 사랑 뿐 아니라 여전한 부부애를 과시하는 애정 넘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세이레케 누님의 개성 넘치는 네 명의 아이들-매를 좋아하는 큰 딸 티레케, 개구쟁이 아들 둘째 토르칸과 셋째 차르그, 산양을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막내아들 로스템-까지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작가의 애정이 담뿍 담겨져 있어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아졌다.

특히 작가의 로망이 가득 담긴 매력적인 여주인공 아미르는 유목민 출신답게 전사의 기질을 갖춘 명궁에다 활발하고 야성적이며 강하지만 순진하고 청순한 양면성을 지닌 양갓집 아가씨로 결정적으로 아름다운 연상의 아내이다. 그에 반해 카르르크는 조용하고 온화하며 따뜻한 성품을 가진 의젓한 어린신랑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미르에 비해 한참 어리지만 가끔씩 깜짝 놀랄 정도로 어른스러운 카르르크와 의외로 귀여운 면을 가진 솔직한 성격의 아미르를 만나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아미르를 만나고 결혼을 한 후 점차 어른으로 자라는 카르르크와 자신보다 훨씬 어린 꼬마 신랑 카르르크가 점차 남자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새삼 연심을 느끼는 아미르의 예쁜 사랑을 좀 더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었는데……. 객식구이자 이 이야기의 화자이기도 했던 스미스 씨가 에이혼 가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떠남에 따라 앞으로는 또 다른 신부의 이야기가 그려질 것이라고 한다. 근래 보기 드물게 정성이 가득 담긴 그림체와 흥미로운 이야기가 눈길을 사로잡았던 『신부 이야기』. 귀엽고 사랑스러운 카르르크 & 아미르 커플과의 헤어짐은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19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신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벌써부터 마음은 두 근 반 세 근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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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생 1 신일숙 환상전집
신일숙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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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순정만화의 르네상스기를 이끌었던 걸출한 순정만화가 신일숙의 작품이 ‘환상전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요란하게 재등장했다. 이미 출판만화계의 어려운 현실은 각종 매체의 보도를 통해서나 만화 출판사의 행보, 그리고 독자들이 느끼는 체감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으로 산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과거의 인기작들을 새롭게 단장해서 재출간하는 건 독자들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물론, 인기가 보장되지 않은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선별해 출판하기보다는 이름난 작가들의 인기작들을 ‘애장판’이나 ‘복간판’이란 타이틀로 재 발간하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인 일일 테지만, 그런 작품들이 오랜만에 선보일 때면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신일숙 환상전집의 네 번째 이야기는 8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지 『르네상스』에 연재되었던 중편 SF만화 <1999년생>이다. 만화의 배경은 2018년의 근 미래다. 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한 많은 예언가들이 지구의 종말로 예언했던 1999년의 세기말, 그러한 혼돈의 시대에 태어난 1999년생들, 특히 그 중에서 특별한 능력(초능력)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이 초능력을 이용해서 외계인의 침략에 맞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2010년의 현재에서 보는 2018년과 이 만화가 그려졌던 1988년에 작가가 상상했던 2018년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가는 만화 곳곳에 드러난다. 얼마 전 복간되었던 하기오 모토의 <11인이 있다>에서도 드러난 과거의 SF 작품의 상상력의 한계는 역시 이 작품에서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1999년생 아이들이 이미 열 두 살의 제법 큰 아이가 된 현재에 이르러서는 몇 년 후 2018년이 된다고 해서 만화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우주전쟁 시대가 도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다만, 30년 후 21세기가 되면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우주 시대가 되리라고 믿었던 80년대의 상상력은 이미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시각에선 오히려 참신하고 기발하게 느껴질 정도.

  많은 사람들이 세기말을 무사히 넘긴 후 21세기가 되면 세상이 완전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과거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과학적인 발전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화상통화와 개인용 비행정의 상용화가 동격의 미래라고 상상했던 과거의 상상력에 비해 디지털 기기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서 이미 몇 년 전에 화상통화의 실현을 이룬 반면 교통수단, 예를 들면 개인용 비행정이나 우주선과 같은 규모가 큰 기계의 발전은 생각보다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 수많은 SF 작품에서 단골소재가 되었던 외계인이라던가, 외계인의 지구 침략 등이 이 만화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으며, 외계인에 대항하는 존재로 초능력자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초능력의 실재에 관해선 그 의견이 분분하지만, 뭐 어떠랴? 실재하지 않는 일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 또한 만화를 보는 커다란 즐거움이 아니던가. 물론 지금 다시 이런 소재로 만화를 그린다면 좀 더 세련된 미래의 모습과 최첨단 소품 등이 등장할 수 있겠지만, 이미 세기말의 혼돈을 지나왔고 2018년은 아주 가까운 근 미래이므로 오히려 상상력의 제약이 따르고 그만큼의 한계가 드러나지 않을까.

  작품의 결말에 드러나는 반전도 이제는 식상할 정도로 흔한 장치가 되었지만 20 여 년 전의 작품임을 감안할 때 배경의 촌스러움 따위는 잠재우고도 남을 정도의 기발함과 열정이 느껴지는 결말이다. 작가의 프로필에서도 그가 90년대 초중반 얼마나 맹렬하고 왕성하게 활동했었던가를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선 특히 신일숙 작가의 초기작 특유에서 느껴지는 풋풋함과 열정이 살아 있어 좋았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산다는 거겠지. 애장판이나 복간판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누구보다 더 열렬히 다음 작품(에시리쟈르, 일련의 ‘화이트’ 연재작 들)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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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 & 에이 Q 앤드 A 1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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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의 전근으로 6년간 고향을 떠났던 아츠시네 가족은 아츠시의 고교 입학 무렵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츠시의 가족은 원래 부모님과 형 히사시, 동생 아츠시까지 4인 가족이었는데 형인 히사시는 6년 전 11살 때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히사시(통칭 ‘큐짱’)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과 우수한 실력으로 모두에게 우상처럼 여겨지고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아츠시는 아다치 미츠루의 다른 만화 주인공이 그러하듯 아직까지 ‘각성’을 하지 못한 상태로 뭐든 대충대충 해치우는 적당주의의 표본으로 그려진다. 작품의 제목인 『Q 앤드 A』는 큐짱의 ‘Q'와 아츠시의 ‘A’인 것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얼마 후, 아츠시 주위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바로 6년 전에 죽은 형 큐짱이 유령이 되어 옛날 집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 헌데 이상하게도 큐짱은 동생인 아츠시와 애완견 데로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고 낮에는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저녁이 된 이후에야 외출이 가능하고, 그마저도 행동반경에 어느 정도 제약을 받는다. 게다가 이 이상한 유령은 먹기도 하고 물건을 움직이는 능력도 있으며 만화책도 보는데 하는 짓은 6년 전 그때의 초등학생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게다가 수시로 아츠시의 몸에 들어가 쓸 데 없는(?) 능력을 발휘하여 아츠시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츠시는 또 큐짱으로 인해 여러 인물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연은 여자주인공인 아츠시의 초등학교 동창 마에자와 유호다. 큐짱의 영향을 받아 육상을 시작한 유호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 나오는 다른 여자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미인에 실력까지 두루 갖춘 모두의 공주님이다. 거기다 초등학교 시절, 매번 큐짱에게 밀려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던 동네 형 진노는 큐짱에 대한 복수를 동생인 아츠시에게 하리라 마음먹고 자신이 부장으로 있는 육상부에 아츠시를 끌어들여 복수를 계획한다. 육상부에는 이미 소꿉친구 마에자와 유호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으로 아츠시에게 라이벌 선언을 한 오가사와 이치로가 있었는데, 이치로가 아츠시에게 라이벌 선언을 한 이유는 다름 아닌 큐짱이 아츠시의 몸을 빌어 제멋대로 실력발휘를 해 버린 탓이다. 게다가 유령을 볼 수 있는 영 능력 소녀 오쿄의 존재는 유령인 큐짱과 동생 아츠시의 파란만장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

  최고 인기 스타의 자리도 언젠가는 내리막길이 있기 마련이듯이 어떤 만화가든 그 작가를 대표하는 화제작 다음에는 좀처럼 그 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을 보기 힘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타케이코 이노우에를 일본 최고의 벼락부자로 만들었던 <슬램덩크>는 야구 이외의 스포츠 만화에 별 관심이 없던 일본 스포츠 만화의 불문율을 깨고 대 성공! 이웃나라인 우리나라에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당시 대학농구의 인기와 맞물려 슬램덩크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작가는 무사의 이야기를 그린 <배가본드>와 또 다른 농구만화 <리얼>등 여러 작품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슬램덩크>는 아마 앞으로도 내내 그의 이름 앞에 따라다닐 것이다. 여전히 수많은 독자들이 <슬램덩크> 그 이후의 이야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한은 말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은 거의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그림체와 스포츠를 소재로 하며 첫사랑(소꿉친구)과 라이벌로 인해 소년이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자기복제 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욕을 먹지 않는 희한한 작가가 바로 아다치 미츠루. 최근작 『Q 앤드 A』 역시 피를 나눈 형제와 소꿉친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거의 30년 전 작품인 <터치>를 떠올리기에 손색없는 조건이다. 게다가 재능 있는 형의 죽음과 동생의 성장, 소꿉친구와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더욱 더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 시작에 불과한 이 이야기는 얼마든지 <터치>와는 달라질 수도 있으나, 그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터치>를 떠올리는 데는 무리가 없을 듯 하다.

  그의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H2』 이후 그려진 만화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새로운 스포츠 종목인 권투에 도전했으나 흐지부지한 완결이 되어 아쉬웠던 <카츠>, 이후 다시 야구와 소꿉친구와 첫사랑을 적당하게 버무린 스토리로 돌아온 <크로스 게임>도 왠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다. 간간히 발표하는 단편들에서 독특한 소재와 새로운 이야기가 간혹 눈에 띄기는 하지만, 대부분 ‘야구만화 → 다른 스포츠 만화 → 간간히 일탈 → 다시 야구 만화 → 다른 스포츠 만화’의 사이클로 이어지는 그의 만화에서는 이미 새로운 이야기는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독자들도 전혀 새로운 작품 보다는 차라리 H2의 결말을 변경(히까리가 완전히 바람나는 이야기라던가…….)해서 스페셜 편으로 다시 출간해 주는 것을 더 바랄지도 모른다.

  * 요약 : 아다치 미츠루의 신작. 야구만화는 아님. 죽은 형이 유령이 되어 나타남. 뛰어난 능력자였던 형이 동생의 몸을 빌어 능력을 발휘하고자 함. 적당주의자인 동생은 유령인 형 때문에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지 모름. 소꿉친구인 여자주인공은 완벽한 소녀. 아마도 주인공과 러브라인이 있을 듯함. 라이벌 등장. 그러나 히데오 이후 어떤 라이벌도 주인공급의 매력적인 남자는 없었음. 혹시나……? 하고 기대했으나, 역시 『H2』나 『터치』, 『러프』 같은 작품을 뛰어넘을 것 같지는 않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다치 미츠루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미 중독되어 있으므로 보긴 볼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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