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이정애 컬렉션 2
이정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1995년 여름에 창간되어 2001년 봄 폐간하기까지 정확히 딱 70권이 발행되었던 성인용 순정만화 잡지 『화이트』. 물론, 『화이트』이전에도 성인을 대상으로 한 순정지가 발행된 적이 있었고, 이후에도 몇 몇 잡지들이 등장하고 사라졌지만, 『화이트』는 그 잡지들 중 그나마 가장 오래 살아남았었다. 분명, 성인대상 잡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성인이 되기 전인 내가 버젓이 교복을 입고서도 구매할 수 있었던, 그래서 지금도 고향집 벽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추억의 잡지 『화이트』. 돌이켜보면 『화이트』라는 잡지는 당시 어린 나이의 나에게는 조금 감당하기 벅찬 감도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 작품들 중 절반쯤은 이해했고 나머지는 그저 읽고 흘려버렸었다. 그것은 신일숙, 강경옥, 김기혜, 한혜연 작가 등과 함께 『화이트』를 대표했던 작가 중 한 명이었던 이정애 작가님의 다소 난해한 작품도 한 몫 단단히 했었다.

  물론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든 작품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람마다 취향도 제각각, 작품을 받아들이는 견해도 남다른 법이니 그건 개인차 일수도 있으나, 보편적으로 나이가 들다보면 예전에 몰랐던 걸 알게 되는 것도 있을 테고, 또 사고의 유연성 같은 것도 생기지 않으려나. 각설하고, 이정애 작가님은 지금은 물론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진 않지만, 그 시절 그의 작품은 뭐랄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기묘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만화는 충분히 마니아틱해서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경하던 친구의 취향이었던 이정애 작가의 만화를, 그의 만화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좀 버거웠던 내가 열심히 보았던 건, 아마도 취향과 상관없이 그의 작품에서 열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넘치는 열정에 나도 모르게 반하고 말았다.

  이정애 컬렉션의 두 번째 작품인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은 그의 전작들에선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학원물로 시작한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통해 그 특유의 분위기와 아우라를 분출했던 그가 거의 유일하게 취약했던 장르였던 학원물에 도전한 것이 다소 의아하다 싶었더니, 결국은 작가의 말에서 표현했듯이 결과적으로는 이정애 특유의 SF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물론 그런 장르의 전환이 전혀 낯설지도, 불편하지도 않다는 것이 그의 작품을 즐기는 또 다른 묘미이긴 하지만. 그리고 또한 이 만화는 그간 나를 힘들고 혼란스럽게 했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좀 더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세인트 니콜라스 예비학교를 대표하는 세기의 꽃미남이자, 세인트 니콜라스 예비학교 뿐 아니라 근처의 세리단 여학교에까지 명성을 떨치는 발렌타인 왕자님 나녹 맥클레인이 어느 날 우연히 부딪치게 되는 아프리카 출신의 여학생 모딘 그웬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 절대적 아름다움과 그에 못지않은 까칠하고 결벽증에 가까운 별난 성격으로 모두의 왕자님으로 군림하는 나녹이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무심한 여학생 모딘에게 반하면서 벌어지는 유쾌한 소동을 시작으로 냉혹하기가 시베리아 벌판이라는 세인트 니콜라스의 훈육위원장 야스민 르로이가 나녹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된다. 물론 여기까지만의 이야기였다면, 조금 독특한 주인공들이 풀어가는 특이한 학원물일 뿐이었겠지만 나녹과 모딘, 그리고 야스민이 얽힌 이(異) 세계인 다른 별에서의 애증관계가 드러나면서 당당히 SF로서의 본색을 드러낸다.

  우리나라에서 야오이란 만화장르가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보편화되기 전, 표현의 자유가 심히 제약을 받던 무렵에 그려진, 그래서 다소 억눌리고 자유롭지 못했던 표현의 한계가 느껴져 때때로 안타까움을 주었던 그의 만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지금이 좀 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독특한 그 시절만의 감성과 향수가 느껴져 아련함을 더한다. 어찌되었던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 만화가였고, 내가 본능적으로 거부했던 동성 취향의 만화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의 만화에 열광하게 만들었던 유래 없는 작가다. 만화가 절필 10년 가까운 세월, 새삼 그의 절필이 안타까운 것은 지금이라면 나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그의 작품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법 한데 이제는 추억 속 작품들을 뒤적이며 애틋한 마음만을 가져야한다는 아쉬움 탓이다.

  6월에 발간 예정인 컬렉션 시리즈 [탈콘의 피], [신데렐라 이야기], [용왕의 근심]의 출간 소식도 더없이 반가운 일이긴 하나, 오래전 작품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에 더해서 언젠가는 그가 다시 만화계로 복귀하여 미완된 걸작들을 마무리 해 주길 간절하게 바래본다. 그의 작품에 열광했던 팬이라면, 인내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끈질길 테니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기다림의 끝이 있기만 하다면 언제까지고 행복한 기다림에 빠져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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