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문장 4 - 고대와 현대, 시공을 뛰어넘은 로맨스의 고전
호소카와 치에코.호소카와 후민 글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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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화를 처음 본 건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년 쯤 전이었다. 나는 아주 조그만 섬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곳에는 서점은커녕 당시 동네마다 있었던 만화대여점도 찾을 수 없었던 오지(?)였다. 어찌되었던 내가 만화책을 처음 접한 건 교실의 미니문고였었는데 도서관도 따로 구비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초등학교였던 내 모교에는 도서관 대신 교실마다 한 켠에 미니문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세계 명작동화나 전집 같은 건 규모에 걸맞게(?)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몇 몇 동화와 위인전, 동시, 시조, 수기, 그리고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캔디캔디>를 비롯한 몇 권의 만화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정식으로 판권이 계약된 이 만화 <왕가의 문장>도 어린이 문고에서 볼 수 있었는데 당시의 제목은 <왕가의 문장>이 아니라 <나일 강의 소녀 캐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나 이외에도 다양한 제목으로 이 만화를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제목만 보고 비슷한 내용의 다른 만화인줄 알고 빌렸다가 사실은 같은 내용의 제목만 다른 만화라는 걸 알고 당황한 적도 있으리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재미있게 봤던 <나일 강의 소녀 캐롤>은 작가의 허가도 없이 국내에서 불법으로 복제된 소위 말하는 해적판 만화였고, 우리나라에 유행처럼 번졌던 해적판 만화에 분노한 작가가 한국과는 절대로 정식 판권 계약은 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판타지 로맨스 만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았던 이 작품을 국내에서는 정식 라이센스 판으로 볼 수 없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지 호소카와 자매는 최근 우리나라와 판권 계약을 체결하고 정식판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던 차원이동 순정만화의 고전인 이 만화를 정식판으로 볼 수 있게 되니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1976년 연재를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연재를 이어가고 있는 순정만화계의 양대 산맥은 <왕가의 문장>과 <유리가면>이 둘 다 정식 판권 계약을 완료하였으니, 비슷한 시기에 연재를 시작했으나 아주 오래 전에 연재가 끝나버려 고리적에 완결 난 <캔디캔디>도 정식판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주 다양한 출판사에서 몇 십 종류로 찍어낸 <캔디캔디>였건만, 그 중에서 하나도 정식판이 없었다는 건 완전 대 쇼크였으니 말이다.

각설하고, 그래서 거의 이십년 만에 다시 본 <왕가의 문장>은 어땠냐고? 캐롤이라는 미국인 소녀가 이집트에서 어떤 사건을 계기로 고대 이집트로 차원을 이동하게 되고, 유명한 이집트 소년 왕 멤피스와 로맨스를 꽃피운다? 여기까지는 아주 오래전에 봤던 만화책의 내용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연재를 시작했다는 이 만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이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나니 조금은 변질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호소카와 자매는 왜 그 토록이나 오랫동안 판권 계약을 거부한 건지(해적판 만화의 열기가 확 사그라든 다음에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가설이긴 하지만 이 만화의 정식판이 십 년 전에만 발간되었어도 그 느낌은 또 달랐을 테다.

현대의 소녀가 차원을 이동해서 과거의 매력남과 사랑을 하는 이야기는 물론 이 만화가 연재를 시작하던 시점에서는 꽤 드문, 획기적인 소재가 되었겠지만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차원이동의 판타지 로맨스는 차고 넘치는 세상이 되었다. <왕가의 문장>의 뒤를 이어 고대 히타이트로 떠났던 <하늘은 붉은 강가>라던가, 사신천지서에 빨려 들어가 고대 중국으로 이동한 <환상게임>을 비롯하여 국내 작가의 여러 작품에서도 차원이동은 더 이상 특별한 소재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리다 지쳐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무한 상승한 나머지 막상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을 때의 당혹감은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70년대 중반에 시작한 연재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반증이고, 또한 작가가 아직까지도 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모든 일에는 알맞은 때가 있고, 너무 오래 뜸을 들인 밥은 최상의 밥맛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 작품 <왕가의 문장>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판권을 계약해서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읽고 있긴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일찍 문을 열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지울 수 없다.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쉽게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흡입력이 떨어지는 게 가장 어려운 점이다. 뭐,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고 알아갈수록 더 좋아지는 사랑도 있게 마련이니 이 작품이 절대 후자 쪽이길 바라며, 어제 어디까지 봤더라? 오늘은 제발 이번 권은 다 봐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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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후루 8
스에츠구 유키 글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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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던 나는 서른이 되면 인생이 끝나기라도 할 것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서른이 지나면 정열 따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지는,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재미없게 살게 될 거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밋밋한 서른이 되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완전 열정적으로 이십대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작 내 이십대는 십대와 다름없는 질풍노도의 시기였고, 열정적인 인생은 비단 나이에 반비례하기 보다는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최근에 만난 스에츠구 유키의 복귀작 <치하야후루>는 그 ‘정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몇 년 전 방송되었던 공유와 성유리 주연의 TV 드라마 <어느 멋진 날>은 일본만화 <에덴의 꽃>의 설정을 따온 작품이었다. 작가 스에츠구 유키의 대표작인 <에덴의 꽃>은 부모의 재혼으로 가족이 된 도키오와 미도리 남매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가족에게 닥친 불의의 사건을 계기로 헤어졌다가 수 년이 흐른 후 다시 만나고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애틋한 사랑을 아련하게 펼쳐놓은 작품이다. 스에츠구 유키를 인기 작가 반열에 올려놓고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층의 지지를 받게 해 준 이 작품은 그러나, 몇 몇 장면이 <슬램덩크>와 <피치 걸>을 표절한 것이 밝혀지면서 일본만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작품의 절판과 함께 작가의 만화계 파문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했다.

<에덴의 꽃>을 재미있게 보았던 독자로서 스에츠구 유키의 후속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큰 실망을 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몇 년 만에 그는 새로운 작품을 들고, 그것도 2009 만화대상 대상 수상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꽤 거창하게 컴백하셨다. 뭐, 어찌되었든 나는 그의 도덕성이라던가, 재기의 과정이 궁금한 게 아니니 그저 그의 새로운 작품이 반갑고 설렐 따름이다. 게다가 요즈음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외면 받을 정도로 일본색이 강한데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칙을 가진 카루타가 정갈한 그림체와 섬세한 심리묘사가 주특기인 그의 손에서 어떤 이야기로 펼쳐질지 궁금해졌다.

언니가 일본 최고의 미소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믿었던 초등학생 치하야는 카루타 명인의 손자인 전학생 아라타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어린 아라타의 빛나는 눈동자와 카루타에서 일등을 해서 세계 일등이 되겠다고 말하는 아라타의 꿈에 동화된 치하야는 카루타를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치하야와 아라타, 치하야의 소꿉친구이자 만능 맨 타이치는 카루타와 함께 우정을 쌓아가게 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헤어졌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재회하게 되고 그들의 청춘스토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제목 <치하야후루>는 주인공인 치하야의 이름인 동시에 카루타에 쓰이는 백인일수 중 하나의 싯구로, 작품을 관통하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기도 했다.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카루타는 백인일수을 주제로 펼쳐지는 카드 게임인데, 백인일수란 일본을 대표하는 100명의 가인들이 지은 시 한 수씩을 모은 일본의 고전가집을 말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황조가나 제망매가, 관동별곡 등과 같이 유명한 고전시를 모아 만든 시집을 카드 게임으로 활용한 것이다. 상구와 하구로 이루어지는 백인일수 가운데 하구만 적어놓은 카드를 바닥에 늘어놓고 낭독자가 상구를 읽으면 그와 짝이 되는 카드를 쳐내는 방식인 카루타는 자기가 가진 카드를 모두 없애는 쪽이 이기는 방식이다. 단지 게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스포츠로 카루타 대결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질 때는 복잡한 카루타의 규칙이라던가 지나친 일본색에 대한 반감 따위는 어느새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릴 만큼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천부적인 감각과 재능을 지닌 주인공과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는 이성(異性), 이러한 주인공을 아끼고 충고를 아끼지 않는 조력자와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 그리고 스포츠 경기에서는 빠질 수 없는 라이벌의 등장!!! 스포츠를 소재로 한 만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모두 담겨있으면서도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어우러져 장르를 가려가며 편식하는 독자들도 무리 없이 볼 수 있을만한 추천작이다. 카루타를 통한 만남과 이별, 재회, 그리고 도전……. 그들이 펼치는 아름다운 청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우리 모두의 가슴에도 정열의 꽃이 피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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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리쟈르 1 (애장판) 신일숙 환상전집
신일숙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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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신일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불세출의 걸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제외하고 논할 수 있을까.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 이 작품은 가상 국가인 여왕의 나라 ‘아르미안’과 페르시아, 그리스 등을 배경으로 아르미안의 네 딸들(공주)을 중심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했던 여러 신들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들이 치열하게 그려져 있다. ‘운명이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라는 명언으로 더욱 유명세를 치룬 이 작품은 이후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는 현대적인 세련미와 소녀적 감성을 녹여낸 만화로 활동한 동시대의 여러 만화가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 그만의 만화를 선보여 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이집트, 페르시아, 히타이트, 잉카의 고대국가와 중세 유럽, 그리고 가상 국가 아르미안에 이르기까지……. 그의 많은 작품에서는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오랜 역사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조사와 해박한 지식을 짐작할 수 있었고, 또한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사막의 모래바람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이 작품 <에시리쟈르> 역시 어찌 보면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한 작품인 듯 하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완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현재는 사라진 순정잡지 [미르]에서 연재를 시작한 <에시리쟈르>는 편집자의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작품이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분위기는 최대한 살리되 아르미안과는 다른 배경과 차별화된 등장인물로 작품의 독특한 색깔은 잃지 않을 작품으로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에시리쟈르>는 아르미안과 완벽하게 독립적인 작품으로서는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미르]에서 시작된 연재는 잡지의 폐간으로 한동안 미 완결인 체 떠돌다가 [윙크]에서 <리니지>의 완결 후 다음 작품인 <파라오의 연인>을 준비하던 중에 다시 생명을 얻어 연재를 재개했고 결국은 [윙크]에서 완결되었다.

자세히 보면 <에시리쟈르>는 초반부와 후반부의 그림체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몇 년 동안의 공백기를 거치는 동안 작가의 그림체가 달라진 탓이다. 또 어쩐지 처음의 의도야 어찌되었던 후반부로 갈수록 서둘러 마무리하듯 급하게 모든 사건을 해결해버리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윙크] 초창기 시절 인기작이었던 작가의 전작(엄밀히 따지자면 ‘전작’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먼저 완결이 난 쪽인) <리니지>보단 <에시리쟈르>가 더 맘에 드는 작품이었다. ‘아르미안’의 배경인 고대에서 ‘리니지’의 시대 중세로 바로 시간이동을 해버린 탓에 좀 더 사막 향기의 여운을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예언의 여자아이 ‘에시리쟈르’와 왕비의 운명을 타고 난 에시리쟈르를 얻어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왕자들의 왕권다툼이 기둥 줄거리이다. 수도 바그다드의 화려하고 이국적인 풍경과 작품의 주요 배경인 사마르칸트의 사막 지대를 무대로 붉은 장미 문신을 가진 운명의 아이 에시리쟈르와 그녀 이상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되는 또 다른 주인공 라뮤드의 이야기가 바람인 듯 꿈결인 듯, 혹은 노래하듯이 자유롭게 흘러간다. 등장인물이나 배경에서 어쩔 수 없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그림자가 느껴지지만 그것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작품은 소품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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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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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출간해서 150만부가 넘게 팔린 신경숙 작가의 인기작 『엄마를 부탁해』는 그 인기의 여세를 몰아 현재는 연극으로도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소설이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작가 신경숙의 책을 구입했으나 거의 2년 가까이 표지조차 넘기지 않고 방치해 두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한 달 동안 사고 싶은 책과 CD의 목록을 작성해 두었다가 용돈을 받으면 순서대로 사고 싶었던 책과 음반을 사 모았고 한 달 내내 책을 읽고, CD를 반복해서 들었고, 주말이면 홍콩영화를 보러 극장을 기웃 거렸다.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신경숙의 작품을 오랜만에 마주한 나는 어쩐지 선뜻 책장을 넘길 용기가 나지 않아 2년이나 묵혀 두었던 것 같다.

  십대였던 나는, 돌이켜보면 꽤 많은 책을 읽었었다. 그닥 특별한 취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소설이었고 신경숙을 비롯하여 정지우, 전경린, 은희경, 배수아 등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남자 작가들의 작품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남성 중심적 시선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그녀들의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게 되었고 무감각해졌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동네 도서관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대형도서관에 매료되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어쩐지 그녀들의 작품이 아닌 다른 작가들의 책을 골라서 읽었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보다는 주로 신인작가나 무명작가의 작품을 골라 읽었는데 다듬어지지 않는 풋풋함과 열정이 느껴지는 작품을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어렸던 내가 좋아했던 그녀들의 작품에서 기성 작가의 농후한 맛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멀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거의 십 년 만에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다시 보면서 처음 표지를 넘겼을 때의 그 느낌이란……. 표지 안쪽에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의 프로필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다소 메마른 듯한 인상의 무표정한 그녀의 사진은 세월을 지나 정면에서 측면으로 바뀌어있었으나 예전과 다름없는 어깨를 덮는 헤어스타일에 ‘전북 정읍 출생. 서울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85년 「겨울우화」……. 로 시작하는 그의 약력을 본 순간 10년의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작가의 프로필을 보며 그간의 회포를 푼 다음에는 책장을 넘기는 일이 훨씬 더 수월해졌다. 게다가 예전에 국어선생님께서 침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셨던 그의 유려한 글 솜씨라니……. 그간의 어색함을 감안할 때 읽기를 끝내는데 일주일 이상의 시간을 예상했었는데 진행속도는 나의 예상을 훨씬 추월하여 체 사흘이 되기 전에 나는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얼마 후에 작품 속 딸의 시선에 지나치게 빙의한 나머지 한동안 머뭇거리긴 했으나, 대체로 빠른 속도로 끝까지 읽어나갔고 읽는 내내 거의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났고 가슴이 먹먹해 졌다.

  생일상을 받기 위해 자식들이 있는 서울로 상경한 엄마는 지하철 서울역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그 길로 실종이 되고 만다. 처음에는 엄마의 실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가족들은 점점 엄마의 부재를 실감하게 되고 잊고 지내던, 혹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희생을 기억하고 후회하고 아파한다. 그것은 각각 큰 딸과 큰 아들, 그리고 남편의 시선으로 기억되고, 종장에 이르러 새의 몸을 빌어 자식들과 시골집과 자신의 고향집을 찾는 엄마 자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특히, 여러 명의 화자 가운데 작가인 ‘큰 딸’은 아들과 남편의 이야기에서도 수시로 등장하여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대표적 화자가 되는데 그만큼 딸의 이야기가 가장 가슴에 와 닿기도 했다.

  그녀의 엄마 박소녀는 시골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열 일곱 나이에 시집을 갔다. 시집 와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정착하지 못하고 늘 밖으로 도는 남편과 일찍 과부가 된 무서운 시누이와 가슴 아린 시동생 균을 살뜰히 챙기며 농사일과 집안 살림을 바지런히 해 냈고,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아 남부럽지 않게 키워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몸이 바스라지도록 집안일을 하고 자식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 작가의 손을 빌어 엄마 ‘박소녀’의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어릴 때 우리 엄마의 18번 중 하나는 대한민국 보통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공부 좀 해라.”였다. 소설 속 엄마가 큰 아들 형철이 검사가 되기를 바라고, 딸의 소설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공부를 많이 한 작은 딸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던 것처럼 우리 엄마의 바람은 딸들이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장을 얻어 엄마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루어주는 것이었다.

  “엄마는 너그 만 할 때,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몬 했다.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와 공부를 안 하노? 내가 나 좋자고 공부하라고 하나? 다 너그들 잘 되라고 하는 기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공부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좀 해라. 으이.”

  아직도 귓가를 생생하게 맴도는 엄마의 그 말들. 실제로 엄마는 가난한 농촌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왔고, 초등학교 졸업 후 학교는 더 이상 다닐 필요 없다는 외할아버지와 1년을 대립한 끝에 1년을 꿇고 중학교를 들어갔다고 했다. 중학교 졸업 후,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엄마를 눈여겨 본 담임선생님께서 예고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건 엄마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여상에 간다고 해도 보내줄까 말까했을 텐데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도 아닌 예고라니……. 그건 가난한 집 맏딸이 감히 꿈꿀 수 없는 사치였던 것.

  어렸던 나는 엄마의 옛 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거듭 강조하시는 엄마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인 거지, 왜 엄마가 못 푼 공부의 한을 자식에게 풀려고 하는 지 말이다. 엄마의 “공부” 소리가 더해질수록 엄마에게 반항하는 내 목소리도 커져갔고 반항은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되기 일쑤였다. 결국은 “그래. 니 마음대로 하고 살아라.”는 엄마의 체념 섞인 한숨과 함께 엄마와의 대립은 끝이 났지만 어린 시절 학교가 파하면 제일 먼저 엄마에게 달려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때의 다정함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의 고마움이나 무한애정은 새록새록 느끼긴 하지만 오랫동안 반쯤 닫아버렸던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표현하는 방법은 거의 잊고 살았다. 가끔씩 마음을 꺼내 보이려고 다가가다가도 종내는 서로의 마음을 할퀴고 돌아서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작가의 말처럼 끝내 잃어버린 엄마를 찾지 못하고 결말을 맞이한 것은 어쩌면 그가 우리들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인 동시에 아직은 우리에게 ‘기회’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우리 엄마도 어느 날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엄마의 희생과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서 언제까지나 덜 자란 모습으로 칭얼대기만 하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어린 날, 서툰 솜씨로 어설프게 만든 종이 카네이션에 함박웃음을 짓던 엄마였는데……. 오늘은 엄마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써 볼까? 그런데 무슨 말부터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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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이야기 2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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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영국 귀족사회의 어느 귀족 가(家)의 하녀 엠마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려낸 『엠마』의 작가 KAORU MORI가 신작 『신부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의 전작 『엠마』는 불세출의 인기작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작가에겐 어느 정도의 지명도와 인기를 안겨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엠마』의 후속작품이 어떤 이야기일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돌아와 주셨다.

19세기 중앙아시아, 카스피 해 인근의 지방도시에 사는 에이혼 가(家)의 막내아들 카르르크에게 산 너머 먼 마을에서 여덟 살 연상의 새색시 아미르가 말을 타고 시집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름동안은 유목민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하르갈 가문의 처녀인 스무 살의 아미르와 예전에는 유목을 했었지만 지금은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는 에이혼 가의 아들인 열 두 살의 카르르크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신부와 어린 신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아버지, 어머니와 누나 세이레케와 자형 유스프, 그리고 누나의 네 아이들에다 집안의 상속자인 카르르크와 갓 시집 온 아미르까지……. 열 두 명이나 되는 대 식구인 에이혼가. 함께 살고 있는 큰 누나인 세이레케 외에도 카르르크 위로 여러 명의 형과 누나가 있지만 막내가 상속을 받는 이 지역의 풍습에 따라 막내인 카르르크가 후계자가 되고 그의 아내인 아미르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종부(宗婦)가 되는 셈이다. 거기다 영국 출신의 이방인으로서 중앙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은 객식구 스미스 씨까지 더해져 날마다 바람 잘 날 없이 소란스러운 에이혼가의 이야기가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처음 시집 온 아미르가 에이혼 가문의 전통을 몸에 익히며 점차 에이혼 가문의 며느리로 적응에 가는 모습과 함께 카르르크의 가족들이 활달하고 명랑한 아미르에게 매료되어가는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이 가족에게 닥치는 거의 유일한 위기는 아미르 네 친정 식구들이 아미르를 다시 돌려달라고 찾아와서 행패를 부린 정도인데, 다른 마을 부호에게 시집보낸 동네 처녀가 죽고 더 이상 시집보낼 처녀가 없게 되자, 어린 카르르크에게 시집보낸 아미르를 다시 데려가서 대신 시집을 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우리 옛말은 과연 괜히 나온 게 아닌지라 국적을 불문하고 통용이 되는 훌륭한 속담임이 에이혼가의 위기 극복 방법과 그 후의 가족들(특히 카르르크와 아미르)의 미묘한 변화에서도 여실히 느껴진다.

더 이상 유목생활을 하진 않지만 유목민 특유의 카리스마를 맘껏 발산하시는 할머니와 그에 반해 온화하고 조용한(카르르크와 비슷한 성품의) 할아버지, 자식들에 대한 사랑 뿐 아니라 여전한 부부애를 과시하는 애정 넘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세이레케 누님의 개성 넘치는 네 명의 아이들-매를 좋아하는 큰 딸 티레케, 개구쟁이 아들 둘째 토르칸과 셋째 차르그, 산양을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막내아들 로스템-까지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작가의 애정이 담뿍 담겨져 있어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아졌다.

특히 작가의 로망이 가득 담긴 매력적인 여주인공 아미르는 유목민 출신답게 전사의 기질을 갖춘 명궁에다 활발하고 야성적이며 강하지만 순진하고 청순한 양면성을 지닌 양갓집 아가씨로 결정적으로 아름다운 연상의 아내이다. 그에 반해 카르르크는 조용하고 온화하며 따뜻한 성품을 가진 의젓한 어린신랑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미르에 비해 한참 어리지만 가끔씩 깜짝 놀랄 정도로 어른스러운 카르르크와 의외로 귀여운 면을 가진 솔직한 성격의 아미르를 만나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아미르를 만나고 결혼을 한 후 점차 어른으로 자라는 카르르크와 자신보다 훨씬 어린 꼬마 신랑 카르르크가 점차 남자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새삼 연심을 느끼는 아미르의 예쁜 사랑을 좀 더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었는데……. 객식구이자 이 이야기의 화자이기도 했던 스미스 씨가 에이혼 가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떠남에 따라 앞으로는 또 다른 신부의 이야기가 그려질 것이라고 한다. 근래 보기 드물게 정성이 가득 담긴 그림체와 흥미로운 이야기가 눈길을 사로잡았던 『신부 이야기』. 귀엽고 사랑스러운 카르르크 & 아미르 커플과의 헤어짐은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19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신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벌써부터 마음은 두 근 반 세 근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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