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시리쟈르 1 (애장판) 신일숙 환상전집
신일숙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가 ‘신일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불세출의 걸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제외하고 논할 수 있을까.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 이 작품은 가상 국가인 여왕의 나라 ‘아르미안’과 페르시아, 그리스 등을 배경으로 아르미안의 네 딸들(공주)을 중심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했던 여러 신들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들이 치열하게 그려져 있다. ‘운명이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라는 명언으로 더욱 유명세를 치룬 이 작품은 이후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는 현대적인 세련미와 소녀적 감성을 녹여낸 만화로 활동한 동시대의 여러 만화가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 그만의 만화를 선보여 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이집트, 페르시아, 히타이트, 잉카의 고대국가와 중세 유럽, 그리고 가상 국가 아르미안에 이르기까지……. 그의 많은 작품에서는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오랜 역사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조사와 해박한 지식을 짐작할 수 있었고, 또한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사막의 모래바람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이 작품 <에시리쟈르> 역시 어찌 보면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한 작품인 듯 하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완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현재는 사라진 순정잡지 [미르]에서 연재를 시작한 <에시리쟈르>는 편집자의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작품이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분위기는 최대한 살리되 아르미안과는 다른 배경과 차별화된 등장인물로 작품의 독특한 색깔은 잃지 않을 작품으로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에시리쟈르>는 아르미안과 완벽하게 독립적인 작품으로서는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미르]에서 시작된 연재는 잡지의 폐간으로 한동안 미 완결인 체 떠돌다가 [윙크]에서 <리니지>의 완결 후 다음 작품인 <파라오의 연인>을 준비하던 중에 다시 생명을 얻어 연재를 재개했고 결국은 [윙크]에서 완결되었다.

자세히 보면 <에시리쟈르>는 초반부와 후반부의 그림체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몇 년 동안의 공백기를 거치는 동안 작가의 그림체가 달라진 탓이다. 또 어쩐지 처음의 의도야 어찌되었던 후반부로 갈수록 서둘러 마무리하듯 급하게 모든 사건을 해결해버리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윙크] 초창기 시절 인기작이었던 작가의 전작(엄밀히 따지자면 ‘전작’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먼저 완결이 난 쪽인) <리니지>보단 <에시리쟈르>가 더 맘에 드는 작품이었다. ‘아르미안’의 배경인 고대에서 ‘리니지’의 시대 중세로 바로 시간이동을 해버린 탓에 좀 더 사막 향기의 여운을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예언의 여자아이 ‘에시리쟈르’와 왕비의 운명을 타고 난 에시리쟈르를 얻어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왕자들의 왕권다툼이 기둥 줄거리이다. 수도 바그다드의 화려하고 이국적인 풍경과 작품의 주요 배경인 사마르칸트의 사막 지대를 무대로 붉은 장미 문신을 가진 운명의 아이 에시리쟈르와 그녀 이상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되는 또 다른 주인공 라뮤드의 이야기가 바람인 듯 꿈결인 듯, 혹은 노래하듯이 자유롭게 흘러간다. 등장인물이나 배경에서 어쩔 수 없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그림자가 느껴지지만 그것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작품은 소품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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