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지나의 다리 이정애 컬렉션 1
이정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대원씨아이에서 issue collection으로 발행되는 만화의 면면을 보자면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소재로 여러 명의 작가가 하나의 주제로 다양하게 풀어내는 연작시리즈 순애보를 필두로 몇 권의 중편 시리즈와 단편집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새롭게 발행되는 이정애 컬렉션이 반가운 이유는 더 이상은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는, 꽤 오래전 절필 선언을 한 안타까운 작가의 복간작품이라는 데 있다.

이정애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열왕대전기]나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을 집필 중에 절필 선언을 한 탓에 그 작품들의 결말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예전에 발행된 작품을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완결을 볼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되겠지만.

이번에 발행된 이정애 컬렉션의 1권은 [키 큰 지나의 다리]라는 작품이다. [열왕대전기]나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을 제외하고는 긴 호흡의 작품이 드문 탓에 유난히 중 ․ 단편 작품이 많은 이정애 작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먼저 간택(?)된 작품은 솔직히 좀 예상 밖이었다. [키 큰 지나의 다리]라니……. 어떤 만화였지? 오래전 만화를 다시 읽을 때면 문득 ‘어? 그게 무슨 내용이었지? 결말은 어땠더라?’ 하는 가물가물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이 작품 역시 그랬다. 허나, 이 작품을 다시 읽은 후에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이 10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작가 자신도 새롭게 느껴질 만큼 [키 큰 지나의 다리]에는 그의 작품의 원형이랄까, 소재랄까 싶은 전형적인 것들이 그 어떤 작품보다도 뚜렷하게 담겨진 작품인 듯 하다.

20XX년 여름, 퉁구치(서울). 밀수와 갈취, 매매춘이 기승을 부리는 혼돈의 국경도시를 배경으로 퉁구치 밀매조직의 2대 세력 가운데 하나인 족제비파의 두목 지나와 지나의 오른팔이자 족제비파의 실질적인 두뇌 한, 그리고 그들 사이에 르포라이터 에블린이 개입하게 되면서 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형과 다리를 나눠가진 샴쌍둥이로 태어났으나, 분리수술의 성공으로 공유했던 다리 한 쪽과 사랑했던 형을 동시에 잃어버린 태생적 아픔을 지닌 주인공 지나는 그 상실감을 탐욕과 폭력성으로 드러내는 나쁜 남자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어린 시절 지나와 만나 비상한 머리로 지나의 두뇌이자, 상실한 다리와 같은 존재가 된 선(善)을 대변하는 인물 한. 한은 지나에게 구원되었으나, 또한 주변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파멸시키는 지나에게 애증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한에게 반한 괜찮은 여자 에블린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지나와 한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지독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이야기이다.

이정애 작가의 작품 속에는 유난히 키가 크고 각진 근육질의 사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흡사 인체해부학 책에나 등장할 법한 날렵한 근육덩어리의 몸을 자랑한다. 가뭄에 콩 나듯 등장했던 여주인공은 [아테르타 연대기]의 남성적인 여신, 혹은 몇 몇 단편들에 등장했던 성별이 불분명한 꼬마 여자아이의 모습이거나 그도 아니면 이 만화에 등장했던 에블린과 같이 제 3자의 눈을 가지고 작품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성이 전멸하다시피한 마초적이고 남성적인 인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독히 남성적인 모습과 아름다운 남자들과의 사랑으로 여성독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의 만화에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미(美)의 상징적 존재도 남자의 몫이었다.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의 소델리니 교수라던가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의 나녹, 그리고 그 맹목적인 사랑을 동경하게 만들었던 [열왕대전기]의 아름다운 소년 쇼너 스키올라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절대 사랑에 목말라 하며,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절망하고, 그리고 행복해한다.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안타깝고 애처롭게 펼쳐지며, 때로는 가슴 저릿한 충격과 비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도 한다. 이 작품 [키 큰 지나의 사랑]에서도 지나와 한의 지독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끝을 이야기한다. 허나, 에블린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들의 사랑은 비극적이긴 하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몇 페이지 넘겨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아! 이건 이정애 만화다!” 라는 그런 느낌이 무엇보다 좋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나도 여전히 반갑고 뭔가 차별화된 특별함이 느껴지는 만화. 언젠가는 미완의 걸작 [열왕대전기]나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의 완결과 그의 새로운 작품도 만나볼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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