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야후루 8
스에츠구 유키 글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렸던 나는 서른이 되면 인생이 끝나기라도 할 것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서른이 지나면 정열 따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지는,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재미없게 살게 될 거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밋밋한 서른이 되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완전 열정적으로 이십대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작 내 이십대는 십대와 다름없는 질풍노도의 시기였고, 열정적인 인생은 비단 나이에 반비례하기 보다는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최근에 만난 스에츠구 유키의 복귀작 <치하야후루>는 그 ‘정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몇 년 전 방송되었던 공유와 성유리 주연의 TV 드라마 <어느 멋진 날>은 일본만화 <에덴의 꽃>의 설정을 따온 작품이었다. 작가 스에츠구 유키의 대표작인 <에덴의 꽃>은 부모의 재혼으로 가족이 된 도키오와 미도리 남매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가족에게 닥친 불의의 사건을 계기로 헤어졌다가 수 년이 흐른 후 다시 만나고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애틋한 사랑을 아련하게 펼쳐놓은 작품이다. 스에츠구 유키를 인기 작가 반열에 올려놓고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층의 지지를 받게 해 준 이 작품은 그러나, 몇 몇 장면이 <슬램덩크>와 <피치 걸>을 표절한 것이 밝혀지면서 일본만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작품의 절판과 함께 작가의 만화계 파문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했다.

<에덴의 꽃>을 재미있게 보았던 독자로서 스에츠구 유키의 후속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큰 실망을 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몇 년 만에 그는 새로운 작품을 들고, 그것도 2009 만화대상 대상 수상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꽤 거창하게 컴백하셨다. 뭐, 어찌되었든 나는 그의 도덕성이라던가, 재기의 과정이 궁금한 게 아니니 그저 그의 새로운 작품이 반갑고 설렐 따름이다. 게다가 요즈음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외면 받을 정도로 일본색이 강한데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칙을 가진 카루타가 정갈한 그림체와 섬세한 심리묘사가 주특기인 그의 손에서 어떤 이야기로 펼쳐질지 궁금해졌다.

언니가 일본 최고의 미소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믿었던 초등학생 치하야는 카루타 명인의 손자인 전학생 아라타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어린 아라타의 빛나는 눈동자와 카루타에서 일등을 해서 세계 일등이 되겠다고 말하는 아라타의 꿈에 동화된 치하야는 카루타를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치하야와 아라타, 치하야의 소꿉친구이자 만능 맨 타이치는 카루타와 함께 우정을 쌓아가게 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헤어졌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재회하게 되고 그들의 청춘스토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제목 <치하야후루>는 주인공인 치하야의 이름인 동시에 카루타에 쓰이는 백인일수 중 하나의 싯구로, 작품을 관통하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기도 했다.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카루타는 백인일수을 주제로 펼쳐지는 카드 게임인데, 백인일수란 일본을 대표하는 100명의 가인들이 지은 시 한 수씩을 모은 일본의 고전가집을 말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황조가나 제망매가, 관동별곡 등과 같이 유명한 고전시를 모아 만든 시집을 카드 게임으로 활용한 것이다. 상구와 하구로 이루어지는 백인일수 가운데 하구만 적어놓은 카드를 바닥에 늘어놓고 낭독자가 상구를 읽으면 그와 짝이 되는 카드를 쳐내는 방식인 카루타는 자기가 가진 카드를 모두 없애는 쪽이 이기는 방식이다. 단지 게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스포츠로 카루타 대결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질 때는 복잡한 카루타의 규칙이라던가 지나친 일본색에 대한 반감 따위는 어느새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릴 만큼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천부적인 감각과 재능을 지닌 주인공과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는 이성(異性), 이러한 주인공을 아끼고 충고를 아끼지 않는 조력자와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 그리고 스포츠 경기에서는 빠질 수 없는 라이벌의 등장!!! 스포츠를 소재로 한 만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모두 담겨있으면서도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어우러져 장르를 가려가며 편식하는 독자들도 무리 없이 볼 수 있을만한 추천작이다. 카루타를 통한 만남과 이별, 재회, 그리고 도전……. 그들이 펼치는 아름다운 청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우리 모두의 가슴에도 정열의 꽃이 피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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