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문장 4 - 고대와 현대, 시공을 뛰어넘은 로맨스의 고전
호소카와 치에코.호소카와 후민 글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내가 만화를 처음 본 건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년 쯤 전이었다. 나는 아주 조그만 섬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곳에는 서점은커녕 당시 동네마다 있었던 만화대여점도 찾을 수 없었던 오지(?)였다. 어찌되었던 내가 만화책을 처음 접한 건 교실의 미니문고였었는데 도서관도 따로 구비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초등학교였던 내 모교에는 도서관 대신 교실마다 한 켠에 미니문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세계 명작동화나 전집 같은 건 규모에 걸맞게(?)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몇 몇 동화와 위인전, 동시, 시조, 수기, 그리고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캔디캔디>를 비롯한 몇 권의 만화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정식으로 판권이 계약된 이 만화 <왕가의 문장>도 어린이 문고에서 볼 수 있었는데 당시의 제목은 <왕가의 문장>이 아니라 <나일 강의 소녀 캐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나 이외에도 다양한 제목으로 이 만화를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제목만 보고 비슷한 내용의 다른 만화인줄 알고 빌렸다가 사실은 같은 내용의 제목만 다른 만화라는 걸 알고 당황한 적도 있으리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재미있게 봤던 <나일 강의 소녀 캐롤>은 작가의 허가도 없이 국내에서 불법으로 복제된 소위 말하는 해적판 만화였고, 우리나라에 유행처럼 번졌던 해적판 만화에 분노한 작가가 한국과는 절대로 정식 판권 계약은 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판타지 로맨스 만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았던 이 작품을 국내에서는 정식 라이센스 판으로 볼 수 없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지 호소카와 자매는 최근 우리나라와 판권 계약을 체결하고 정식판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던 차원이동 순정만화의 고전인 이 만화를 정식판으로 볼 수 있게 되니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1976년 연재를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연재를 이어가고 있는 순정만화계의 양대 산맥은 <왕가의 문장>과 <유리가면>이 둘 다 정식 판권 계약을 완료하였으니, 비슷한 시기에 연재를 시작했으나 아주 오래 전에 연재가 끝나버려 고리적에 완결 난 <캔디캔디>도 정식판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주 다양한 출판사에서 몇 십 종류로 찍어낸 <캔디캔디>였건만, 그 중에서 하나도 정식판이 없었다는 건 완전 대 쇼크였으니 말이다.

각설하고, 그래서 거의 이십년 만에 다시 본 <왕가의 문장>은 어땠냐고? 캐롤이라는 미국인 소녀가 이집트에서 어떤 사건을 계기로 고대 이집트로 차원을 이동하게 되고, 유명한 이집트 소년 왕 멤피스와 로맨스를 꽃피운다? 여기까지는 아주 오래전에 봤던 만화책의 내용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연재를 시작했다는 이 만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이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나니 조금은 변질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호소카와 자매는 왜 그 토록이나 오랫동안 판권 계약을 거부한 건지(해적판 만화의 열기가 확 사그라든 다음에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가설이긴 하지만 이 만화의 정식판이 십 년 전에만 발간되었어도 그 느낌은 또 달랐을 테다.

현대의 소녀가 차원을 이동해서 과거의 매력남과 사랑을 하는 이야기는 물론 이 만화가 연재를 시작하던 시점에서는 꽤 드문, 획기적인 소재가 되었겠지만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차원이동의 판타지 로맨스는 차고 넘치는 세상이 되었다. <왕가의 문장>의 뒤를 이어 고대 히타이트로 떠났던 <하늘은 붉은 강가>라던가, 사신천지서에 빨려 들어가 고대 중국으로 이동한 <환상게임>을 비롯하여 국내 작가의 여러 작품에서도 차원이동은 더 이상 특별한 소재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리다 지쳐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무한 상승한 나머지 막상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을 때의 당혹감은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70년대 중반에 시작한 연재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반증이고, 또한 작가가 아직까지도 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모든 일에는 알맞은 때가 있고, 너무 오래 뜸을 들인 밥은 최상의 밥맛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 작품 <왕가의 문장>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판권을 계약해서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읽고 있긴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일찍 문을 열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지울 수 없다.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쉽게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흡입력이 떨어지는 게 가장 어려운 점이다. 뭐,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고 알아갈수록 더 좋아지는 사랑도 있게 마련이니 이 작품이 절대 후자 쪽이길 바라며, 어제 어디까지 봤더라? 오늘은 제발 이번 권은 다 봐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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