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생 1 신일숙 환상전집
신일숙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순정만화의 르네상스기를 이끌었던 걸출한 순정만화가 신일숙의 작품이 ‘환상전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요란하게 재등장했다. 이미 출판만화계의 어려운 현실은 각종 매체의 보도를 통해서나 만화 출판사의 행보, 그리고 독자들이 느끼는 체감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으로 산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과거의 인기작들을 새롭게 단장해서 재출간하는 건 독자들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물론, 인기가 보장되지 않은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선별해 출판하기보다는 이름난 작가들의 인기작들을 ‘애장판’이나 ‘복간판’이란 타이틀로 재 발간하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인 일일 테지만, 그런 작품들이 오랜만에 선보일 때면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신일숙 환상전집의 네 번째 이야기는 8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지 『르네상스』에 연재되었던 중편 SF만화 <1999년생>이다. 만화의 배경은 2018년의 근 미래다. 노스트라다무스를 비롯한 많은 예언가들이 지구의 종말로 예언했던 1999년의 세기말, 그러한 혼돈의 시대에 태어난 1999년생들, 특히 그 중에서 특별한 능력(초능력)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이 초능력을 이용해서 외계인의 침략에 맞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2010년의 현재에서 보는 2018년과 이 만화가 그려졌던 1988년에 작가가 상상했던 2018년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가는 만화 곳곳에 드러난다. 얼마 전 복간되었던 하기오 모토의 <11인이 있다>에서도 드러난 과거의 SF 작품의 상상력의 한계는 역시 이 작품에서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1999년생 아이들이 이미 열 두 살의 제법 큰 아이가 된 현재에 이르러서는 몇 년 후 2018년이 된다고 해서 만화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우주전쟁 시대가 도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다만, 30년 후 21세기가 되면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우주 시대가 되리라고 믿었던 80년대의 상상력은 이미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시각에선 오히려 참신하고 기발하게 느껴질 정도.

  많은 사람들이 세기말을 무사히 넘긴 후 21세기가 되면 세상이 완전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과거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과학적인 발전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화상통화와 개인용 비행정의 상용화가 동격의 미래라고 상상했던 과거의 상상력에 비해 디지털 기기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서 이미 몇 년 전에 화상통화의 실현을 이룬 반면 교통수단, 예를 들면 개인용 비행정이나 우주선과 같은 규모가 큰 기계의 발전은 생각보다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 수많은 SF 작품에서 단골소재가 되었던 외계인이라던가, 외계인의 지구 침략 등이 이 만화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으며, 외계인에 대항하는 존재로 초능력자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초능력의 실재에 관해선 그 의견이 분분하지만, 뭐 어떠랴? 실재하지 않는 일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 또한 만화를 보는 커다란 즐거움이 아니던가. 물론 지금 다시 이런 소재로 만화를 그린다면 좀 더 세련된 미래의 모습과 최첨단 소품 등이 등장할 수 있겠지만, 이미 세기말의 혼돈을 지나왔고 2018년은 아주 가까운 근 미래이므로 오히려 상상력의 제약이 따르고 그만큼의 한계가 드러나지 않을까.

  작품의 결말에 드러나는 반전도 이제는 식상할 정도로 흔한 장치가 되었지만 20 여 년 전의 작품임을 감안할 때 배경의 촌스러움 따위는 잠재우고도 남을 정도의 기발함과 열정이 느껴지는 결말이다. 작가의 프로필에서도 그가 90년대 초중반 얼마나 맹렬하고 왕성하게 활동했었던가를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선 특히 신일숙 작가의 초기작 특유에서 느껴지는 풋풋함과 열정이 살아 있어 좋았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산다는 거겠지. 애장판이나 복간판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누구보다 더 열렬히 다음 작품(에시리쟈르, 일련의 ‘화이트’ 연재작 들)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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