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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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작위적인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문득 어느날 이야기가 떠오르고 그 이야기를 작가는 슥슥 써 내려가는 것이다. 마치 하늘로 부터 계시가 내려오듯 이야기는 계속 작가의 손을 통해 슥슥 적혀지는 것이라고. 그 세계를 모르는 나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좀 달랐다. 아마 그래서 내가 소설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것을 깨닫게 해 줬는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는 그런 의식을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에밀 졸라는 서문에서부터 밝힌다.

 "강한 남자 한 명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욕구불만 상태인 여자 한 명을 설정한다. 그들 속에서 어리석음을 찾는다. 단지 어리석음만을. 그런 다음 그들을 난폭한 드라마 속으로 내던지고 그 두 존재들의 느낌과 행동들을 면밀히 기록한다.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있는 두 육체에 대하여 행한 것 뿐이다."- 11~12쪽

 마치, 소설쓰기가 아니라 사람을 대상으로 무슨 심리실험이라도 행하는 듯한 말투로. 그러니까 이 소설의 느낌은 작가가 컨셉을 잡고 계획을 세웠다는 느낌을 준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글자들을 받아적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설정하고 상황을 배경을 설정하고 사건을 만들어 내고 결말을 예상해 내는 식으로.

 

 사실 150여년전에 쓰여 졌다는 이 이야기가 스토리로 우리를 감동시키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욕망때문에 결국 불륜과 살인을 저지른 연인들이 행복하지 못한 결말을 맞는 이야기는 현재는 식상한 플롯이다. 아마도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이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서 영화"박쥐"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그 영화에는 다수의 다른 장치들이 사용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보지 않아서 정확히 어떤것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대에도 이 이야기가 읽혀질 수 있는 이유는 (비록 변주의 손길을 가해질는지 몰라도) 무엇일까? 단지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유는 아닐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프랑스 문학의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 이란 수식어 탓도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닳고 닳은 소재이지만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주들에 열광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뻔하고 어이없고, 어쩌면 극히 드문 경우의 일일지 모르지만 누군가 또는 내가 그럴 수도 있는 희박한 가능성에 어떤 진실성이 있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욕망의 바닥은 설사 자신이 갖고 있다는것을 확신 할 지라도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그런 상황의 설정이 아무에게나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에서 아직도 내밀한 죄의식과 전율을 느끼게 되는게 아닐까? 오래 깊이 생각해 본 이유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런 이유도 이 소설이 아직까지 읽혀지고 있는 이유중 하나가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 책 읽는 동안, 주변에 심란한 일들이 전개된다. 가뜩이나 심란한 소설에 심란한 주변.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으시시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름대로 그 일이 해소된 듯 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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