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에 따르면 신흥 강대국은 파워가 계속 확장할 때에는 중국 덩샤오핑의 ‘도광양회‘처럼, 패권국에 맞먹을 수 있을 때까지 ‘대결‘을 미룬다. 그러나 성장이 한계에 부딪히고, 패권국과 동맹 세력에 포위되어 쇠퇴기를 앞둔 시점에 이르면, 신흥 강대국은 더 늦기 전에 현재 움켜쥘 수 있는 것을 확보하려 들어 ‘전쟁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 P169

 150조원 가까이 되는 사교육 시장을 하루 아침에 없애버리거나, 경기침체 우려에도 불구하고 민간기업에 대한 온갖 제재를 가하는 등의 급진적 조치를 시행하는 배경에는 시진핑의 복고적인 정치 신념뿐 아니라 이러한 심각한 인구구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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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시진핑은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고, 자기 주장을 숨겼으며, 대세를 추종했다. 튀는 걸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특별히 적도, 경계하는 사람도 없었고 누구에게든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두 총서기가 전임자 입장에서 보기에는 영향력을 행사하며 조종하기 쉬워 보였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무개성‘과 ‘무색무취‘가 시진핑이 중국 최고 권력가의 유력한 후계자로 선택된 이유였다는 것이었다. - P125

중국 경제의 반등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세계경제가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특히 미국의 경기부양책이 2009년 2월 말에 간신히 통과되고 미국 금융기관들의 정상화 기틀이 마련되는 스트레스테스트 결과가 그해 5월 나오기 전까지, 그 기간 동안 세계 경제의 경기침체 하방 압력을 사실상 중국 혼자서 방어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세계GDP 성장의 절반을 중국이 담당할 정도로 중국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 미국의 경기부양 규모가 여야 간 당파싸움으로 계속 확정이 지연되다가 처음 계획안보다 크게 줄어 간신히 통과한 것에 비해, 중국이 막대한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재빠르게 결정하고 집행한 모습은 마치 미국정치의 비효율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중국 공산당의 유능함이 더욱 강조되는 듯해 보였다. - P127

중국이 도광양회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각과 야심에 대해 거침없이 외부에 표출하기 시작한 게 이즈음부터였다. 금융위기 발발한 후 중국은 공식적으로 미국 달러화 패권에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고, 중국 관영 언론들은 전 세계가 중국과 미국을 대등하게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호들갑을 떨며 앞다투어 보도했다.(중략)
중국은 미국이 내세운 극단적 자유방임의 신자유주의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며 무조건적인 시장화가 만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미국 모델의 대안으로 시장경제와 강력한 정부의 적극적 시장 개입의 혼합형인 중국형 경제모델을 세계에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은 더 이상 자신들의 속내를 억누르며 조용히 힘을 키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경제가 정치보다 우선이라는 외교 원칙도 이때부터 깨지기 시작한다. - P129

보시라이 정변 사태는 덩샤오핑이 만든 집단지도체제의 취약점이 극대화되어 발생한 정치적 위기이며, 후진타오 계파와 장쩌민 계파 간에 벌어졌던 치열한 권력 다툼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P132

중국의 광역행정 단위인성은 면적과 인구 규모가 웬만한 유럽국가들과 엇비슷하거나 심지어는 더 크다. 여기에 중앙정부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후진타오 정권의 취약성까지 가미되자 당시 권력과의 연줄이나 배경이 있는 일부 성 정부의 최고 책임자는 사실상 지방 영주나 제후에 가까운 권한을 누리기까지 했다. 그랬기 때문에 상하이방에 속한 첸량위 상하이시 당서기가 중앙정부에 맞서며 노골적으로 갈등을 벌이다 숙청된 사건 같은 게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중국의 정치권력은 원심력이 강하게 작용하며 자칫 중심까지 형해화될 수 있는 상황까지 치닫고 있었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게 수도에서 먼 지방에 권력 공백이 생길 때마다 반복적으로 생기는 어떤 패턴이 발견된다. 바로 해당 지역을 장악한 야심가가 강력한 지역 기반을 근거로 약해진 중앙 권력에 도전했던 역사 속에 ‘반란‘ 혹은 ‘정변‘으로 기록됐던 사건들의 반복 말이다. 후진타오 정권 말기의 중국 정치 상황은 이러한 지역 기반 야심가를 낳기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했고, 실제 그런 야심가가 정말 등장하여 엄청난 정치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 야심가가 바로 보시라이 당시 충칭시 당서기였다.

중국 최대 직할시 충칭시 당서기로 온 보시라이는 소위 ‘충칭 모델‘로 불리는 몇 가지 정책 패키지를 추진하며 세간의 큰 관심을 받게 된다. 충칭 모델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농민들에게 도시 후커우를 개방하고, 공공 임대주택을 대대적으로 건설하며, 국영기업을 통한 대대적인정부 투자로 도농간 균형 발전과 빈부 격차 완화를 추구하는 모델이다. 그리고 정치·사회적 측면에서는 지역 조직폭력 집단 등을 강력한 공권력으로 소탕하며 공공질서와 치안을 강화하고, 마오쩌둥 찬양과 과거 홍군 혁명가 부르기, 문혁 시기 하방 체험하기 등을 통해서 미화된 과거의 정치적 추억을 자극해 복고적 유행을 불러일으키는, 한마디로 말해서 ‘관 주도 사회 기강 잡기 캠페인‘이었다. - P136

자칫하면 체제까지 흔들 뻔했던 쿠데타 사태에 대한 구조적 원인으로는 명목상 최고지도자의 허약한 리더십과 계파 간 권력 분점이 지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취약함을 노출시켰던 집단지도체제는 그 효용을 다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 P148

개혁개방 이전은 마오쩌둥 시대를 뜻하는 것이며, 개혁개방 이후는 덩샤오핑부터 후진타오 시기까지를 뜻한다. 시진핑이 보기에 마오쩌둥 시대와 덩샤오핑 시대는 서로 충돌하는 게 아니다. 두 시대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중국은 마땅히 두 시대의 유산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시진핑의 생각이다. 자신은 개혁개방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집권했으니, 사실상 그동안 푸대접을 받아 온 개혁개방 이전 마오쩌둥 시기를 재평가하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진핑이 개혁개방 전후 30년 모두 계승해야 한다면서 마오쩌둥의 유산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 저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시진핑 집권 직전 중국 공산당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을 맞이했고, 정파와 이념과 노선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되었으며, 내부 분열 심각도에 따라 통치에 안정성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시진핑은 이 모든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위기가 개혁개방 30년 시기의 후유증 및 부작용과 당의 지속적이고 지나친 우경화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리고 해이해진 당의 군기를 다시금 잡고 고삐를 쥐어야 하며, 그 작업을 위한 수단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이자 본인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 준 마오쩌둥 사상과 마오쩌둥 시기를 다시금 소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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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시진핑은 집권 후 노골적으로 중국의 패권을 추구한 게 사실이다. 그가 주변 국가에 중국의 힘과 의지를 투사하고, 미국 패권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나라들과 끊임없이 외교적 마찰까지 빚어진 것은 분명하다. 특히 미중 간 신냉전 발발로 국제적인 고립과 외교적 위기를 자초했다는 평가가 압도적인 상황이다. 문제는 중국의 위기와 고립은 중국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P86

 대중국 포위망에 협조한 국가들 대다수가 대외 교역량 비중에 있어 미국보다 중국 의존도가 훨씬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얼마나 국제적 인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 형성에 점차 협조하고 있는 한국 또한 원래 스탠스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한다는 소위 ‘안미경중‘으로 불리는 ‘미중 간 양다리 걸치기 노선‘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1부에서 다룬 것처럼, 대한민국 또한 다양한 층위에서 차이나 쇼크를 겪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양쪽으로 걸쳐 놓은 다리 중 하나를 빼야 한다는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며 한국 정부의 대중국 정책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앞에서 지적했듯 한국의 대외무역 비중 1위 국가는 여전히 중국이며 무역 흑자의 많은 비중 또한 중국에서 거두고 있으나, 현재 국내 여론 중 중국과 시진핑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목소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P87

중국에 대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분위기와 인식의 위험성은 사드 사태 전후로 극명하게 드러났던 바 있다. 사드 사태 이전까지 우리 사회의 대세였던 ‘중국에 대한 긍정 일변도의 분위기‘가 정반대로 바뀐 지금은, 또 다른 의미에서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 P88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마오쩌둥 시절의 긍정적 유산을 계승하여 덩샤오핑 시대의 부작용과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자는 일종의 신(新)마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미국과 서구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을 기정사실로 믿는 반서구적 전통보수주의자이다. 신마오주의와 전통보수주의. 이게 시진핑 세계관을 가장 핵심적으로 압축한 두 가지 축이다. - P89

이러한 시진핑의 세계관은 시진핑 집권 전 두 가지의 대형 ‘사건‘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도 더욱 확신을 갖게 되고, 동시에 외부적으로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바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2년 보시라이 정변 위기 사태다.(중략)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에게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몰락과 중국의 굴기 시대가 도래했음을 확신한 계기가 되었다면, 보시라이 사태는 시진핑으로 하여금 덩샤오핑 시대의 유산이 가진 부정적인 면을 그간 홀대받던 마오쩌둥의 유산으로 극복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시진핑 시대는 2013년부터 시작되었지만, 한국과 전 세계에 차이나 쇼크를 가져올 시진핑 정권의 이념적 노선은 집권 이전 4년 동안의 기간인 2008년부터 2012년 사이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 P90

시진핑은 태자당이라고 불리는 중국공산당 1세대 최고위층 자녀 출신이라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보냈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마오쩌둥 실정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즉, 시진핑 역시 마오쩌둥이 일으킨 비극, 문화대혁명의 대표적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결정으로 인해 본인이 겪은 고통과 고난에서 긍정의 의미를 찾고, 심지어 마오쩌둥을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이자 롤모델로서 자신의 세계관의 기초로 삼는다. - P92

당이 이념적 순수성을 잃고 우경화되어 사회주의 중국을 파괴하는 것을 그는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죽기 전에나서서 이 사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고, 그 수단으로 문혁을 일으켰다는 것이 그의 이념적 경계심을 동기로 둔 해석이다. 아마도 마오쩌둥의 심리에는 잃어버린 권력에 대한 집착과 자신과 혁명을 배신한 동지들에 대한 증오심 등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고 보는 게 적당할 것이다. - P94

역대 중국 최고 지도자들 중 모두가 이 시절을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을 미화하고 심지어 긍정적인 추억으로 간직하는 예외적인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시진핑이다. - P95

중국 공산당이 한때 혁명의 본거지로 삼았던 옌안 산속 토굴 마을에서 보낸 7년은 시진핑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된다. 평범한 청소년에 불과한 시진핑이 처음으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비로소 ‘정치인 시진핑‘으로 최초의 각성을 했던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97

우파는 더욱 진전된 시장화와 심화된 개혁을 주장하였고, 좌파는 국가의 역할 강화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했다.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의 결과로 중국 사회가 다원화되자 중국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시민사회가 생겨났기 때문에 당 밖에서 탄압과 처벌을 각오하고 중국에서구식 대의민주주의 도입을 요구하는 주장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반대에서는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국부인 마오쩌둥 주석의 정신으로부터 너무 많이 이탈하고 변질되었다면서 다시금 마오이즘에 기초한 극단적 국가 통제 시대로 회귀해야 한다고 극좌세력들도 생겨났다. - P101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라는 명목으로 권력을 독점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일축했지만, 경제적으로는 개인 소유와 시장화 원리를 도입하여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있었다.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는 이런상충되는 근원적 모순을 현실적인 필요라는 명분으로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급격한 경제발전의 결과 기업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빈부 격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으며, 중국 공산당 내부로 깊게 파고든 부패는 명목상 내세운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간판을 점점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마오쩌둥 개인에 대한 일인 권력 집중이 초래한 폐해를 누구보다 절실히 체감했던 덩샤오핑은 집권 후 국가와 당 최고 권력을 9명의 공산당 상무위원으로 분산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는 덩샤오핑 사후 자연스럽게 정치적 파벌들이 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개혁개방의 부작용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상이한 관점이 더해지면서 당내 분열이 가속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상무위원 내에서도 정치개혁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민감한 주장을 내세우는 인물이 나왔고, 마오이즘의 향수를 자극하는 인물 역시 등장했다. - P102

2007년 3월 시진핑이 상하이 당서기로 깜짝 발탁한 배경에는 2006년 상하이 당서기인 첸량위의 낙마가 있었다. 2006년 첸량위의 실각,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2012년 보시라이 사태까지, 이 세 가지 사건은 시진핑 시대로 가는 결정적 변곡점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 P103

중국 현대사의 지난 60년은 개혁개방으로 인해 근원적인 분기점을 맞게 되었고, 개혁개방 이전 30년과 이후 30년은 서로 정면 충돌하는 성격이 짙다. 이처럼 개혁개방 이전과 이후라는 ‘두 개의 30년‘ 모두를 긍정하고자 하는 건 시진핑 집권기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시진핑은 두 시기 모두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면서 억지가 느껴지는 역사관을 설파하고, 개혁개방 노선을 유지하는 듯하면서도 마오쩌둥 시대의 유산이 강하게 느껴지는 복고적 좌파 정책을 내놓으며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 배경에는 시진핑 스스로 자기 내면에서부터 조화 불가능한 두 가지 가치를 어떻게든 융합시켜 보려는 필사의 시도가 있지 않았나 싶다. - P105

1992년부터 본격화된 민영 부분의 발전은 중국의 시장경제 활성화와 잠재적인 경제적 활력을 키워내며 중국 고도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새 지나치게 커져버린 민영 부문은 중국 통치세력 입장에서는 몇 가지 새롭고 엄중한 위험과 도전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발생한 거의 대부분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 이면에는 이처럼 급격히 성장한민영 부문과 국영 부문을 둘러싼 상이한 이해관계와 관점의 충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 P107

민영 부문의 확대가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그의 가족들에게도 매우 큰 이득이 된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권에 대한 인허가 권한을 이용하여 단순히 뒷돈을 얻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개혁개방의 심화로 자본시장이 성숙하자 중국 거대 기업집단 주식 및 부동산 투자 거래를 통한 세련된 치부 방식이 중공 최고위층 가족 지인들에게 보편화되었다. 개혁개방과 시장경제, 민영경제 영역이 확대될수록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그의 가족들이 누릴 부의 크기도 자동으로 커졌기 때문에 개혁개방 이래 역대 어느 정권도 시장화와 민영 부문 확대를 마다할 동기가 생길 리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중국에선 ‘사회주의 시장경제‘ 중에서 "시장경제가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건 불가역적이다"라는 주장까지 등장하게 된다. 이제 과거 중국의 사회주의는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단언한 표현이었다. - P108

중국이 강력하게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추구하자 이처럼 극도로 경직된 후커우 제도와 노동제도가 족쇄와 같은 것으로 인식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걸쳐 후커우 제도와 노동제도를 수술대 위에 올리고 메스를 가져다 댄다. - P113

농민공 문제는 고소득 도시 출신과 낙후 지역, 농촌 출신 간 소득 격차를 악화시키고 차별을 영속화시키는 등 수많은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를 야기한 중국의 후커우 제도는 결국 한 사회의 계급제도를 유지시키는 것과 다름없었다. 거기에다가 후커우 제도만 문제는 아니었다. 중국의 극단적인 노동유연화 조치 또한 90년대 국영기업에서 대량 해고 사태를 초래하였으며, 과거 단웨이가 제공하던 것에 비해 여전히 부실한 사회적 안전망은 일반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크게 위축시켰다. 다행히 중국 경제가 90년대 이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며 신산업의 막대한 고용 창출이 유연화로 내몰린 노동력을 거의 그대로 흡수하면서 심각한 사회적 위기는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경제성장의 거대 엔진을 담당하게 된 국가 소유 주택의 대규모 민간 불하와 주택시장 민영화 조치는 커다란 부작용을 피해갈 수 없었다. 건설 붐에서 재미를 본 중국 정부는 중국 경제가 침체될 때마다 경기 자극을 위해 부동산을 이용하는 임시방편을 택한다. 이로인한 중국 부동산 거품과 이에 따른 부채 리스크는 수십 년에 걸쳐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이 문제는 3부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또한 운 좋게 정부로부터 싼값에 주택을 불하받는 특혜를 누려 벼락부자가 된 소수의 고소득 도시민들과 이러한 혜택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 대다수 인민들 간의 자산 격차는 중국의 심각한 빈부 격차 확대 추세에 기름을 붓게 된다. - P115

 중국은 미국 정부와 미국 금융 자본, 글로벌 기업 등의 투자와 지원과 자문 등을 통해 단순 저임금 의존형 저부가가치 산업으로부터 점차 기술 의존형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자국 산업을 발전시키고 재편성할 수 있었다. 즉, 중국이 1980년대 이후 몰아닥친 세계화와 정보화혁명과 신자유주의 시대의 최대 수혜자라는 것은 명백하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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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먹거리‘라는 말을 좀 특이한 의미로 쓰는 듯하다. 흔히 말하는 ‘효자 산업‘ 내지는 중요 산업..정도의 의미로 사용하는 듯한데,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 처음 봐서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어색하다.

이렇게 한바탕 난리 법석이 발생하고 나자 비로소 사람들은 중국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는 필수 원자재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21년 11월 한국무역협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 수입품목에서 단일국 의존도가 80%에 달하는 품목 중 절반 가까이(1,850개)를 중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에는 대표적인 한국의 차세대 먹거리인 2차 전지의 필수 핵심 자재인 망간, 흑연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의 골간 산업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P58

중국의 불행이 곧 한국의 행복이 되려면 우리는 중국과의 경제적 의존도부터 줄여나가는,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기간에 불가능한 일이며, 장기적으로도 큰 대가들을 치러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 P63

시진핑은 자신의 장기 집권에 대한 명분 쌓기용으로 2021년 11월11일 중국 공산당 창당 이래 세번째 역사결의 채택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과거 마오쩌둥의 반제국주의 노선 채택,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당화 같은 실질적 · 결정적 의미를 담았던 역사결의와 달리 모호하고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신랄한 평이 우세한 실정이다. 만일 2022년 연말 중국 당대회에서 이렇게 빈약한 명분을 통해 억지로 3연임에 성공할 경우, 시진핑에게 자신의 장기집권을 사후에나마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단 하나밖에 없다. 모두가 예측하다시피 양안통일 카드다. - P73

시진핑은 덩샤오핑이 어렵게 구축하고 이후 나름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온 후계 시스템을 해체한 뒤 미국의 세계 패권을 향한 도전에 나설 예정이다. 동시에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대가도 감수하겠다는 의지에 충만해 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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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무엇보다도, 현재 중국의 문제적 상황한가운데에 놓인 시진핑이라는 인물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중략) 나는 지금 중국의 극단적인 변화에는 시진핑의 세계관이 짙게 배어 있다는 관점을 갖고 있고, 그 세계관은 그가겪어온 여러 세계사적인 사건들, 또 중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 확신한다. - P11

반중 감정이 젊은층을 중심으로 퍼진 이유는 중국이 우리의 국가적인 위협으로 떠오른 게 비교적 최근이며, 중국이 한국에 시비를 걸면서 생기는 양국 간 주요 마찰 중 하나가 이들의 주 관심사인 대중문화 영역이었던 탓이 크다. 더욱이 태어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공기처럼 당연한 걸로 여기며 자란 우리 청년 세대에게 일인 독재와 대중문화 검열, 언론 탄압 같은 중국 공산당의 행태가 더욱 부정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 P22

중국에 대한 세계의 치솟는 반감과 부정적 인식에는 아마 많은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근래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팬데믹 사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고, 2013년 집권 후 10년 차에 접어든 시진핑 정권의 공격적이고 국수주의적 외교 정책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힐 것이다. 그리고 시진핑이 자신의 국수주의적 외교 방침을 공격적으로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중국의 거대한 국력 상승 또한 근원적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을 것이다. - P24

중국에서 통일과 분열이 반복될 때마다 그 격렬한 지정학적 지진의 여파는 예외 없이 한반도를 뒤흔들고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중원 대륙에 통일 제국이 탄생하면 동아시아 패권과 종주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한반도 침략이 이어졌다. - P26

낙후된 중국은 당시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성공과 부유함에 더욱 큰 자부심과 우월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심리적 만족의 대상이자, 값싸고 무궁무진한 노동력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도모할 수 있는 경제적 기회의 대상이었다. 자신들의 처지에 솔직했던 당시의 중국인들에게도 한국은 경제발전의 선배로서 모범적인 벤치마킹의 나라, 또 가난하고 낙후된 중국경제에 절실히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제공해 줄수있는 선망의 국가에 가까웠다. - P29

원래 중국 공산당 정권은 악명 높은 대중문화 검열 정책으로 유명했지만 시진핑 정권이 2021년 시행한 대중문화 탄압 정책은 과거의 악명을 무색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2021년 ‘중국 연예계 정풍운동‘으로 불리는 대중문화 탄압 정책은 제2의 문화대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만들었다. - P34

업계 내부 인사들의 분석대로, 사드 배치에 따른 한한령 보복 조치는 자국 산업 육성을 위한 핑계의 성격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배터리에 관해서는 그 의도가 더더욱 확실할 것이다. 중국 정부가 한한령 패키지에 하필 배터리를 포함시킨 의도는 분명하다. 배터리 산업이 미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 P41

중국의 산업 굴기는 한국 경제와 산업계가 현재 마주한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제품이 과거의 싸구려 모방 제품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기술과 품질, 가격 모든 면에서 환골탈태하여 글로벌시장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키워 나간다는 경고는 우리에게 새롭지 않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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