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시진핑은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고, 자기 주장을 숨겼으며, 대세를 추종했다. 튀는 걸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특별히 적도, 경계하는 사람도 없었고 누구에게든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두 총서기가 전임자 입장에서 보기에는 영향력을 행사하며 조종하기 쉬워 보였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무개성‘과 ‘무색무취‘가 시진핑이 중국 최고 권력가의 유력한 후계자로 선택된 이유였다는 것이었다. - P125

중국 경제의 반등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세계경제가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특히 미국의 경기부양책이 2009년 2월 말에 간신히 통과되고 미국 금융기관들의 정상화 기틀이 마련되는 스트레스테스트 결과가 그해 5월 나오기 전까지, 그 기간 동안 세계 경제의 경기침체 하방 압력을 사실상 중국 혼자서 방어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세계GDP 성장의 절반을 중국이 담당할 정도로 중국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 미국의 경기부양 규모가 여야 간 당파싸움으로 계속 확정이 지연되다가 처음 계획안보다 크게 줄어 간신히 통과한 것에 비해, 중국이 막대한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재빠르게 결정하고 집행한 모습은 마치 미국정치의 비효율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중국 공산당의 유능함이 더욱 강조되는 듯해 보였다. - P127

중국이 도광양회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각과 야심에 대해 거침없이 외부에 표출하기 시작한 게 이즈음부터였다. 금융위기 발발한 후 중국은 공식적으로 미국 달러화 패권에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고, 중국 관영 언론들은 전 세계가 중국과 미국을 대등하게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호들갑을 떨며 앞다투어 보도했다.(중략)
중국은 미국이 내세운 극단적 자유방임의 신자유주의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며 무조건적인 시장화가 만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미국 모델의 대안으로 시장경제와 강력한 정부의 적극적 시장 개입의 혼합형인 중국형 경제모델을 세계에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중국은 더 이상 자신들의 속내를 억누르며 조용히 힘을 키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경제가 정치보다 우선이라는 외교 원칙도 이때부터 깨지기 시작한다. - P129

보시라이 정변 사태는 덩샤오핑이 만든 집단지도체제의 취약점이 극대화되어 발생한 정치적 위기이며, 후진타오 계파와 장쩌민 계파 간에 벌어졌던 치열한 권력 다툼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P132

중국의 광역행정 단위인성은 면적과 인구 규모가 웬만한 유럽국가들과 엇비슷하거나 심지어는 더 크다. 여기에 중앙정부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후진타오 정권의 취약성까지 가미되자 당시 권력과의 연줄이나 배경이 있는 일부 성 정부의 최고 책임자는 사실상 지방 영주나 제후에 가까운 권한을 누리기까지 했다. 그랬기 때문에 상하이방에 속한 첸량위 상하이시 당서기가 중앙정부에 맞서며 노골적으로 갈등을 벌이다 숙청된 사건 같은 게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중국의 정치권력은 원심력이 강하게 작용하며 자칫 중심까지 형해화될 수 있는 상황까지 치닫고 있었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게 수도에서 먼 지방에 권력 공백이 생길 때마다 반복적으로 생기는 어떤 패턴이 발견된다. 바로 해당 지역을 장악한 야심가가 강력한 지역 기반을 근거로 약해진 중앙 권력에 도전했던 역사 속에 ‘반란‘ 혹은 ‘정변‘으로 기록됐던 사건들의 반복 말이다. 후진타오 정권 말기의 중국 정치 상황은 이러한 지역 기반 야심가를 낳기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했고, 실제 그런 야심가가 정말 등장하여 엄청난 정치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 야심가가 바로 보시라이 당시 충칭시 당서기였다.

중국 최대 직할시 충칭시 당서기로 온 보시라이는 소위 ‘충칭 모델‘로 불리는 몇 가지 정책 패키지를 추진하며 세간의 큰 관심을 받게 된다. 충칭 모델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농민들에게 도시 후커우를 개방하고, 공공 임대주택을 대대적으로 건설하며, 국영기업을 통한 대대적인정부 투자로 도농간 균형 발전과 빈부 격차 완화를 추구하는 모델이다. 그리고 정치·사회적 측면에서는 지역 조직폭력 집단 등을 강력한 공권력으로 소탕하며 공공질서와 치안을 강화하고, 마오쩌둥 찬양과 과거 홍군 혁명가 부르기, 문혁 시기 하방 체험하기 등을 통해서 미화된 과거의 정치적 추억을 자극해 복고적 유행을 불러일으키는, 한마디로 말해서 ‘관 주도 사회 기강 잡기 캠페인‘이었다. - P136

자칫하면 체제까지 흔들 뻔했던 쿠데타 사태에 대한 구조적 원인으로는 명목상 최고지도자의 허약한 리더십과 계파 간 권력 분점이 지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취약함을 노출시켰던 집단지도체제는 그 효용을 다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 P148

개혁개방 이전은 마오쩌둥 시대를 뜻하는 것이며, 개혁개방 이후는 덩샤오핑부터 후진타오 시기까지를 뜻한다. 시진핑이 보기에 마오쩌둥 시대와 덩샤오핑 시대는 서로 충돌하는 게 아니다. 두 시대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중국은 마땅히 두 시대의 유산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시진핑의 생각이다. 자신은 개혁개방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집권했으니, 사실상 그동안 푸대접을 받아 온 개혁개방 이전 마오쩌둥 시기를 재평가하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진핑이 개혁개방 전후 30년 모두 계승해야 한다면서 마오쩌둥의 유산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 저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시진핑 집권 직전 중국 공산당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을 맞이했고, 정파와 이념과 노선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되었으며, 내부 분열 심각도에 따라 통치에 안정성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시진핑은 이 모든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위기가 개혁개방 30년 시기의 후유증 및 부작용과 당의 지속적이고 지나친 우경화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리고 해이해진 당의 군기를 다시금 잡고 고삐를 쥐어야 하며, 그 작업을 위한 수단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이자 본인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 준 마오쩌둥 사상과 마오쩌둥 시기를 다시금 소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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