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시진핑은 집권 후 노골적으로 중국의 패권을 추구한 게 사실이다. 그가 주변 국가에 중국의 힘과 의지를 투사하고, 미국 패권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나라들과 끊임없이 외교적 마찰까지 빚어진 것은 분명하다. 특히 미중 간 신냉전 발발로 국제적인 고립과 외교적 위기를 자초했다는 평가가 압도적인 상황이다. 문제는 중국의 위기와 고립은 중국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P86
대중국 포위망에 협조한 국가들 대다수가 대외 교역량 비중에 있어 미국보다 중국 의존도가 훨씬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얼마나 국제적 인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 형성에 점차 협조하고 있는 한국 또한 원래 스탠스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한다는 소위 ‘안미경중‘으로 불리는 ‘미중 간 양다리 걸치기 노선‘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1부에서 다룬 것처럼, 대한민국 또한 다양한 층위에서 차이나 쇼크를 겪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양쪽으로 걸쳐 놓은 다리 중 하나를 빼야 한다는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며 한국 정부의 대중국 정책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앞에서 지적했듯 한국의 대외무역 비중 1위 국가는 여전히 중국이며 무역 흑자의 많은 비중 또한 중국에서 거두고 있으나, 현재 국내 여론 중 중국과 시진핑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목소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P87
중국에 대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분위기와 인식의 위험성은 사드 사태 전후로 극명하게 드러났던 바 있다. 사드 사태 이전까지 우리 사회의 대세였던 ‘중국에 대한 긍정 일변도의 분위기‘가 정반대로 바뀐 지금은, 또 다른 의미에서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 P88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마오쩌둥 시절의 긍정적 유산을 계승하여 덩샤오핑 시대의 부작용과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자는 일종의 신(新)마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미국과 서구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을 기정사실로 믿는 반서구적 전통보수주의자이다. 신마오주의와 전통보수주의. 이게 시진핑 세계관을 가장 핵심적으로 압축한 두 가지 축이다. - P89
이러한 시진핑의 세계관은 시진핑 집권 전 두 가지의 대형 ‘사건‘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도 더욱 확신을 갖게 되고, 동시에 외부적으로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바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2년 보시라이 정변 위기 사태다.(중략)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에게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몰락과 중국의 굴기 시대가 도래했음을 확신한 계기가 되었다면, 보시라이 사태는 시진핑으로 하여금 덩샤오핑 시대의 유산이 가진 부정적인 면을 그간 홀대받던 마오쩌둥의 유산으로 극복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시진핑 시대는 2013년부터 시작되었지만, 한국과 전 세계에 차이나 쇼크를 가져올 시진핑 정권의 이념적 노선은 집권 이전 4년 동안의 기간인 2008년부터 2012년 사이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 P90
시진핑은 태자당이라고 불리는 중국공산당 1세대 최고위층 자녀 출신이라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보냈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마오쩌둥 실정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즉, 시진핑 역시 마오쩌둥이 일으킨 비극, 문화대혁명의 대표적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결정으로 인해 본인이 겪은 고통과 고난에서 긍정의 의미를 찾고, 심지어 마오쩌둥을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이자 롤모델로서 자신의 세계관의 기초로 삼는다. - P92
당이 이념적 순수성을 잃고 우경화되어 사회주의 중국을 파괴하는 것을 그는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죽기 전에나서서 이 사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고, 그 수단으로 문혁을 일으켰다는 것이 그의 이념적 경계심을 동기로 둔 해석이다. 아마도 마오쩌둥의 심리에는 잃어버린 권력에 대한 집착과 자신과 혁명을 배신한 동지들에 대한 증오심 등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고 보는 게 적당할 것이다. - P94
역대 중국 최고 지도자들 중 모두가 이 시절을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을 미화하고 심지어 긍정적인 추억으로 간직하는 예외적인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시진핑이다. - P95
중국 공산당이 한때 혁명의 본거지로 삼았던 옌안 산속 토굴 마을에서 보낸 7년은 시진핑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된다. 평범한 청소년에 불과한 시진핑이 처음으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비로소 ‘정치인 시진핑‘으로 최초의 각성을 했던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97
우파는 더욱 진전된 시장화와 심화된 개혁을 주장하였고, 좌파는 국가의 역할 강화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했다.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의 결과로 중국 사회가 다원화되자 중국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시민사회가 생겨났기 때문에 당 밖에서 탄압과 처벌을 각오하고 중국에서구식 대의민주주의 도입을 요구하는 주장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반대에서는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국부인 마오쩌둥 주석의 정신으로부터 너무 많이 이탈하고 변질되었다면서 다시금 마오이즘에 기초한 극단적 국가 통제 시대로 회귀해야 한다고 극좌세력들도 생겨났다. - P101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라는 명목으로 권력을 독점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일축했지만, 경제적으로는 개인 소유와 시장화 원리를 도입하여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있었다.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는 이런상충되는 근원적 모순을 현실적인 필요라는 명분으로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급격한 경제발전의 결과 기업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빈부 격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으며, 중국 공산당 내부로 깊게 파고든 부패는 명목상 내세운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간판을 점점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마오쩌둥 개인에 대한 일인 권력 집중이 초래한 폐해를 누구보다 절실히 체감했던 덩샤오핑은 집권 후 국가와 당 최고 권력을 9명의 공산당 상무위원으로 분산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는 덩샤오핑 사후 자연스럽게 정치적 파벌들이 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개혁개방의 부작용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상이한 관점이 더해지면서 당내 분열이 가속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상무위원 내에서도 정치개혁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민감한 주장을 내세우는 인물이 나왔고, 마오이즘의 향수를 자극하는 인물 역시 등장했다. - P102
2007년 3월 시진핑이 상하이 당서기로 깜짝 발탁한 배경에는 2006년 상하이 당서기인 첸량위의 낙마가 있었다. 2006년 첸량위의 실각,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2012년 보시라이 사태까지, 이 세 가지 사건은 시진핑 시대로 가는 결정적 변곡점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 P103
중국 현대사의 지난 60년은 개혁개방으로 인해 근원적인 분기점을 맞게 되었고, 개혁개방 이전 30년과 이후 30년은 서로 정면 충돌하는 성격이 짙다. 이처럼 개혁개방 이전과 이후라는 ‘두 개의 30년‘ 모두를 긍정하고자 하는 건 시진핑 집권기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시진핑은 두 시기 모두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면서 억지가 느껴지는 역사관을 설파하고, 개혁개방 노선을 유지하는 듯하면서도 마오쩌둥 시대의 유산이 강하게 느껴지는 복고적 좌파 정책을 내놓으며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 배경에는 시진핑 스스로 자기 내면에서부터 조화 불가능한 두 가지 가치를 어떻게든 융합시켜 보려는 필사의 시도가 있지 않았나 싶다. - P105
1992년부터 본격화된 민영 부분의 발전은 중국의 시장경제 활성화와 잠재적인 경제적 활력을 키워내며 중국 고도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새 지나치게 커져버린 민영 부문은 중국 통치세력 입장에서는 몇 가지 새롭고 엄중한 위험과 도전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발생한 거의 대부분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 이면에는 이처럼 급격히 성장한민영 부문과 국영 부문을 둘러싼 상이한 이해관계와 관점의 충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 P107
민영 부문의 확대가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그의 가족들에게도 매우 큰 이득이 된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권에 대한 인허가 권한을 이용하여 단순히 뒷돈을 얻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개혁개방의 심화로 자본시장이 성숙하자 중국 거대 기업집단 주식 및 부동산 투자 거래를 통한 세련된 치부 방식이 중공 최고위층 가족 지인들에게 보편화되었다. 개혁개방과 시장경제, 민영경제 영역이 확대될수록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그의 가족들이 누릴 부의 크기도 자동으로 커졌기 때문에 개혁개방 이래 역대 어느 정권도 시장화와 민영 부문 확대를 마다할 동기가 생길 리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중국에선 ‘사회주의 시장경제‘ 중에서 "시장경제가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건 불가역적이다"라는 주장까지 등장하게 된다. 이제 과거 중국의 사회주의는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단언한 표현이었다. - P108
중국이 강력하게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추구하자 이처럼 극도로 경직된 후커우 제도와 노동제도가 족쇄와 같은 것으로 인식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걸쳐 후커우 제도와 노동제도를 수술대 위에 올리고 메스를 가져다 댄다. - P113
농민공 문제는 고소득 도시 출신과 낙후 지역, 농촌 출신 간 소득 격차를 악화시키고 차별을 영속화시키는 등 수많은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를 야기한 중국의 후커우 제도는 결국 한 사회의 계급제도를 유지시키는 것과 다름없었다. 거기에다가 후커우 제도만 문제는 아니었다. 중국의 극단적인 노동유연화 조치 또한 90년대 국영기업에서 대량 해고 사태를 초래하였으며, 과거 단웨이가 제공하던 것에 비해 여전히 부실한 사회적 안전망은 일반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크게 위축시켰다. 다행히 중국 경제가 90년대 이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며 신산업의 막대한 고용 창출이 유연화로 내몰린 노동력을 거의 그대로 흡수하면서 심각한 사회적 위기는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경제성장의 거대 엔진을 담당하게 된 국가 소유 주택의 대규모 민간 불하와 주택시장 민영화 조치는 커다란 부작용을 피해갈 수 없었다. 건설 붐에서 재미를 본 중국 정부는 중국 경제가 침체될 때마다 경기 자극을 위해 부동산을 이용하는 임시방편을 택한다. 이로인한 중국 부동산 거품과 이에 따른 부채 리스크는 수십 년에 걸쳐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이 문제는 3부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또한 운 좋게 정부로부터 싼값에 주택을 불하받는 특혜를 누려 벼락부자가 된 소수의 고소득 도시민들과 이러한 혜택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 대다수 인민들 간의 자산 격차는 중국의 심각한 빈부 격차 확대 추세에 기름을 붓게 된다. - P115
중국은 미국 정부와 미국 금융 자본, 글로벌 기업 등의 투자와 지원과 자문 등을 통해 단순 저임금 의존형 저부가가치 산업으로부터 점차 기술 의존형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자국 산업을 발전시키고 재편성할 수 있었다. 즉, 중국이 1980년대 이후 몰아닥친 세계화와 정보화혁명과 신자유주의 시대의 최대 수혜자라는 것은 명백하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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