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선험성이 그러하듯 우리가 ‘마을‘을 쓰기 전에 ‘마을‘에 대한 상상은 이미 우리의 머릿속에 있었다. 수용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문학사에서 체득한마을 서사는 숙명적으로 몇 가지 패턴이 있다. 첫째는 유토피아적인 패턴으로 전원시적인 묘사, 지나치게 아름다운 환상이다. 둘째는 계몽적 패턴으로 연민과 자연스러운 겸손이다. 셋째는 원형적 패턴으로 문화적 화석과 같은 가족 국가 모델이다. 이후의 저자들은 언제나 이들 중 하나에 속했다. - P429
문학(비단 문학만이 아니라)의 경우, 가장 피할 수 없는 것은 작가가 무언가를 ‘보기‘ 전에 이미 완전한 개념과 핵심 단어를 갖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여 이를 이해하고 분석한다는 것이다. 루쉰의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은 원형과 계몽으로 가득 차 있으며, 무지하고 낙후하며 혼란스러운 국민성과 생활방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중국 농촌의 평범한 생활과 생명의 내면적 개방성을 무시하거나 박탈하고 있다. 그것들은 역사적 공간, 고형화된 공간, 생명력을 상실한 공간에 갇혀 있다. - P432
나는 량좡의 역사와 현실을 모두 썼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사실 어떤 작가도 자신이 모든 진실을 썼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량좡과 나의 량좡은 확실히 다르고, 칭리의 량좡도 아버지의 량좡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량좡으로 돌아가고, 함께 량좡을 떠나고, 함께얘기를 들어도, 당신과 내가 보는 것과 쓰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중략) 우리의 진실은 모두 선택을 거친 진실이다. ‘논픽션‘이라는 제목이 머릿속에 떠오른다고 해도 내가 쓴 글이 모두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P440
당신이 소설에서 허구, 상징, 과장을 사용하든, 논픽션에서 정확성, 세부 사항, 재현을 사용하든 우리가 궁극적으로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이 세상을 인식하는 하나의 도식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글의 사전 논리를 경계하고 검토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문학 작품에 있어서의 ‘진실‘은 ‘이렇다‘가 아니라 ‘내가 보는 바로 이것이다‘를 지향한다. - P441
‘나‘도 ‘량좡 마을을 떠난 사람‘이다. 내가 ‘량좡‘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량좡‘에 대한 판단은커녕 도덕적 판단도 할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내‘ 가 피질문자가 되어야 했다. -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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