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이 내세운 평화주의의 내실은 어떠했는가라고 다시금 묻고 싶습니다. 헌법 9조의 역사는 빈껍데기의 역사였고, 비핵화 삼원칙 따위도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습니다. 실은 국민도 이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죠. 그럼에도 전후 일본은 평화 국가라는 표면상의 원칙에서 일탈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패전과 초토화를 경험하면서 ‘전쟁에 강하다는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더 이상 내세우면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폭넓게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P245

"굳이 말하자면 가동하지 않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정도의 뜨뜻미지근한 의지 표현으로는 멈추게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굳이 말하자면 가동하지 않는 쪽이 낫다는 생각입니다만" 정도의 의견은 사실상 추진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절대 반대‘라고 해야 비로소 뭐든 멈추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지요. 왜 그런 당연한 이치를 모를까요? 내가 국민 전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아베가 하자는 대로 따르며 정말로 마음속 깊이 아베를 지지하는 사람은 유권자 5분의 1 이하일지도 모르지만, ‘그다지 신용할 수는 없어도 이 사람밖에 없으니까‘ 정도의 기분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그 결과가 어떨지 모를 리 없지요.
- P248

일본인은 ‘극단‘을 좋아하지요. 균형 감각을 유지하면서 팽팽한 의견이 오가는 대화로 생산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상황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숨에 한쪽 극단으로 쏠려야 이해하기 쉽고, 그렇게 논의가 진행돼야 다들 좋아합니다. 따라서 아베를 물러나게 하려면 아베에게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해야 빨리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P248

아베는 대미 종속과 대미 자립을 번갈아 들고 나옵니다. 후텐마 기지를 둘러싼 문제와 관련하여 오키나와현 지사의 양보를 받아내기가 무섭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합니다. 집단적 자위권 용인을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직후에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합니다. 결국 ‘대미 종속‘의 포즈를 한 번 취한 다음 바로 ‘미국이 싫어하는 짓‘을 합니다. 그래야 셈이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미국이 싫어하는 짓‘, 그러니까 야스쿠니 참배나 북한과 접근하는 일은 아베 입장에서 보면 ‘대미 종속‘의 대가로 허용된 그 나름의 ‘성과‘인 셈입니다. 선물을 보낸 후에 밖에서 돌을 던져 그 집 유리창을 깹니다. 그러면 ‘상쇄‘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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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약 ‘한일병합 시대‘의 한국인이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고 한국인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생각한다면, 타임머신을 보내줄 테니 그 시대로 가서 한국인으로 살아보란 말입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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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어떠한 정책을 채택할 경우, 언제나 단기적인 합리성은 보여왔습니다. 백악관 대변인의 설명을 들어보면 늘 그럴싸한 얘기를 하지요. 그런데 그와 같이 단기적으로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정책을 반복해서 채택하지만 그만큼 또 반복해서 실패합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패턴이 있습니다. 왜 그들은 대부분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면서까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할까요? 매번 정당화를 위한 적당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말이지요. - P202

성가신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만이 미국과 통하는 파이프 또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지요. 친미노선을 충실하게 받드는 사람만이 이권을 독점하는 구조는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겠지만, 그래도 이전에는 마음속에서 그런 물음을 파고들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친미 노선 이외의 가능성을 상정하기만 해도 특정 이익 공동체로부터 배제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신조 사이의 질적인 낙차가 아닐까 싶습니다. - P204

분명히 일본은 경제 영역에서 미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자각하지 못했고, 나아가 전쟁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승리한 시점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허둥지둥하다가 어느 사이엔가 반전 공세에 직면했고, 아차하는 사이에 수탈당하는 대상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 P210

"왜 우리만 나쁜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영국과 미국은 더 나쁘지 않은가!" 라는 외침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패전했다는 의미이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어른이라는 얘기겠지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경의를 표할 만한 태도를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P231

미국은 일본이 위험 요소였기 때문에 일본 연구에 자본을 투입했지요. 1980년대까지 일본은 미국 입장에서 동반자이자 위험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쇠퇴하면서 리스크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한정된 지역 연구 자원을 일본에 투입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 《국화와 칼》같은 일본 연구가 필요 없게 된 이유도 일본이 더 이상 ‘적‘으로서나 파트너로서나 대단한 존재가 아니게 된 데에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정말 기이하다. 속을 알 수 없는 놈들이다. 잠재적인 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돈을 들여가며 일본을 연구했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기 때문에 연구하지 않는 겁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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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가 서술하고 있는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일본인은 패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역사를 논할 때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함으로써 일본인의 아이덴티티가 분열하고 있다. 또한 파괴를 간절히 바라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한 일본의 왜곡된 아이덴티티를 고질라가 상징하는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의 상황은 고질라가 스크린에서 뛰쳐나와 일본 본토를 습격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인은 어떤 대응을 했는가? 가림막을 설치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심지어 프로젝터로 그 가림막에 번영하는 일본의 모습을 투사해 바라보고 있다." - P177

전후 체제가 끝나려고 할 때 속마음이 분출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아주 싫어한다. 우리는 진실로 패한적이 없기 때문에 서양식의 리버럴한 가치관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 P181

일본은 ‘패전의 부인‘이 병의 원인이긴 하지만 일본 말고도 모든 국민국가는 원점에서 뭔가를 부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나라는 자국의 정통성에 관하여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때 국가의 성립에 관한 정통성에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부인합니다. 그런 식으로 조작하지 않은 나라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 P181

각각 방법이 다르고 의거한 이야기도 다르지만, 패전 사실을 솔직하게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패전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든 패전국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패전을 부인했습니다. 아마도 패전의 부인이 야기한 병세가 가장 심각한 쪽은 일본과 프랑스일 테죠. 저마다 드러난 모습은 완전히 다르지만 ‘패전의 부인‘이 정치 왜곡의 뿌리라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습니다. - P185

자민당의 고치카이 같은 그룹은 아베 패거리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들이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견해가 지금의 자민당 정치에 일정한 알리바이로 기능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다모가미 도시오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베는 이런저런 입장이 있기 때문에 자제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 아베의 본심은 나와 완전히 똑같다. 아베가 자신의 입장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대신해서 말한다"고 말이죠. 다모가미는 온통 틀린 얘기만 하고 다니는 사람이지만 이 말만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 P192

왜 저 엘리트들은 싸우지 않을까요? 바로 역겹기 짝이 없는 엘리트 의식 때문입니다. 그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기 때문에 국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국가의 지도적 중핵에 서 있는 자신들의 위상 자체는 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뀌든 나는 언제나 위에 있을 테니까 상관없다. 지는 승부는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라 할 수 있겠지요. - P193

원전 사고 경우에도 국민 사이에서는 가능한 한 잊고자 하는 경향이 대단히 강합니다. 따라서 무의식 안에서는 파국에 이르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한편,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괜찮아, 별일 아닐 거야"라며 현실을 부정합니다. 기묘한 균형이랄까, 양가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 P197

STAP 세포 사건 당시 주간지에서 ‘이과계 여성‘이니뭐니 하며 치켜세우더니 그 후 하루아침에 내팽개칩니다. 높이 치켜세워야 떨어질 때 낙차가 커지기 때문에 한껏 추어올리죠. ‘이놈은 머지않아 떨어져‘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적절한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높이까지 들어 올립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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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직장은 고무공이에요. 가족, 사랑, 친구, 행복 이런 것들은 유리공이에요. 공놀이를 할 때 고무공은 떨어뜨려도 다시 올라와요. 그런데 가족, 사랑, 행복 이런 공은 유리공이라서 한번만 떨어뜨려도 깨져버리죠."

서울로 돌아온 권일용은 병원에서 일하는 남동생에게 전화했다. "병원에 독실 있냐?" 몸이 아픈 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싫었다. "그렇게 3일 동안 누워있었어요. 수액주사 맞고요. 미치도록 사람이 싫은 거예요. 그러다 보면 하느님이 그리워집니다. 그때 나오면 돼요. 그리고 나서 다시 사람이 사는 곳으로 나오죠. 동굴에서 기어 나오듯이 나와서, 다시 사는 거야." 권일용은 다시 살아나와서, 살해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냉혈한들을 추적했다. 그것이 권일용과 행동과학팀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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