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독특한 일본의 영화시장 구조를 만든 주역은 ‘제작위원회‘다. 제작위원회 시스템은 영화사를 비롯해 방송사, 출판사, 광고회사 등 다양한 분야의 회사들이 단기 조합을 만들어 공동투자하고 공동제작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얼핏 보면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제작위원회 시스템은 일본에서 ‘창작 영화 기근의 원흉‘으로 지목된다. 실패 부담의 분산과 효율성을 너무 중시하다 보니, 원작 고정 팬이 있는 ‘안전한 영화‘만 만든다는 비판이다. 오리지널 작품이라는 모험을 회피하기 때문에 참신하고 다양한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 P244
2017년 기준 일본 국민의 1인당 평균 영화관람 횟수는 1.4회로, 미국 3.4 회와 프랑스 3.2회, 한국 4.3회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이 수치는 최근 10년 넘게 변화가 없다. 비판은 앞서 지적한 ‘지나친 팬덤 마케팅에 따른 다양성과 창의성의 실종‘과 ‘내수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갈라파고스화의 심화‘로 요약된다. - P245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확실히 예전만큼의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최근 작품 중에는 NHK 대하드라마 이외에 별다른 인상이 남는 작품이 없다. 일본 방송계 내부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모든 일본 문화 콘텐츠에 공통된 지적이기도 한 ‘지나치게 내수 위주‘라는 점, 다른 하나는 ‘고령층 위주여서 청년층의 외면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두 비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과거 방식을 되풀이하면서 현 상황에 안주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 P248
일본 시청자들이 기존 프로그램 포맷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점도 ‘모험‘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중장년 시청자를 위해서는 형사 · 의학 드라마를 배치하고, 젊은 시청자를 위해서는 아이돌 출신 배우를 기용해서 만화와 같은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방식을 반복하는 중이다. 특히 시청률 경쟁 때문에 쟈니스처럼 인기 아이돌을 많이 보유한 대형기획사가 캐스팅 주도권을 쥔 점도 드라마 완성도 저하로 이어지는 주요인이라는 지적이다. - P249
2020년 11월 일본의 ‘국민 아이돌‘ 아라시의 멤버 마쓰모토 준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 그는 미국 연예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K팝의 뿌리는 쟈니스" 라고 주장했다. 마쓰모토 준의 말에서는 자신감보다 K팝의 성공에 대한 위기의식이 느껴진다. - P251
‘서투름‘이 일본 아이돌 문화의 핵심이다. 완성된 ‘스타‘가 아닌 미완성의 ‘아이돌‘, 그래서 응원하고 싶은 대상이 일본 아이돌이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한 일본 사회학자는 일본 아이돌을 향한 특이한 정서의 뿌리를 고교야구 대회인 고시엔에서 찾기도 한다. 미숙하지만 온 힘을 다해 한계를 뛰어넘으려 애쓰는 10대의 모습에 응원을 보내고, 그들의 성취에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 P253
AKB48은 지나친 상술로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멤버의 서열을 공개적으로 결정하는 총선거가 집중포화를 받는다. 앨범마다 한 장의 투표권을 주는 방식인데, 자신이 응원하는 멤버가 상위권에 들도록 몰표를 주기 위해 수백 수천 장의 앨범을 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팬들의 응원하는 마음을 ‘머니게임‘으로 연결한 셈이다. - P253
‘지나‘라는 단어는 일본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서구에는 열등감, 아시아에는 우월감"이라는 상반된 인식이다. 서구 오리엔탈리즘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서양=문명=진보/동양=야만=후진‘의 이분법으로 구별하고, 자신을 문명의 세계로 슬쩍 넣는다. 또 이를 통해 일본의 아시아 지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검은 머리를 한 서양인‘으로 인식하는 일본인의 기묘한 정체성은 종종 분열을 일으켰다. 항상 서구 열등감에 시달리고 서양의 인정을 갈망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260
일본인이 당시 서구에 가졌던 열등감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됐다.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를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5대국의 태도>는 상징적이다. 당시 일본도 평화조약의 조항과 국제연맹 설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덕분에 ‘5대국‘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눈에 띄는 점은 일본을 다른 서구 열강보다 작게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에서조차 자기검열을 해버린 나머지 왜소하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모습은, 당시 서양 앞에서 한없이 위축된 일본인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 P261
또 일본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일본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리서에서 백인종에 관해"정신이 총명하며, 문명의 극도에 달할 만한 소성이 있다. 이를 인종 중 최고라 한다."고 극찬했지만, 흑인종은 "신체가 강건하여 일을 열심히 하지만, 본성이 게을러서 개화 진보의 맛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또 유럽을 아름다운 ‘문명‘의 본산으로 찬양했지만, 그 외 나라는 ‘무지, 혼돈의 세계‘로 서술했다. - P264
그(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은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 대오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하여, 지나나 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사정을 봐주지 말고 바로 서양인이 그들을 대하는방식으로 처리하면 그만"이라고 주장했다.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연대해 제국주의 열강에 대치하기는커녕 일본 자신이 열강과 함께 조선 · 중국을 침략 병합하여 식민지로 지배하겠다는 제국주의 선언이었다. - P267
일본은 근대화를 시작한 18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정체성 문제로 혼동을 겪고 있다. 근대화 이전 일본을 규정하는 우물 안의 벽은 중국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는 영국과 독일 같은 유럽국가가, 패전 이후에는 미국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핵심은 자신을 아시아로 인식할 것인가 아니면 서구로 인식할 것인가이다. 아시아를 여전히 후진성과 동의어로 여기고, 오랫동안 아시아의 서구로 지내왔기에 명확한 입장이 없다. 일본은 전적으로 아시아적이지는 않다고 강변하면서, 동시에 아시아의 대표라고 단언하는 등 우왕좌왕하고 있다. 뿌리 깊게 형성된 우월감이 온전한 아시아로 복귀하는 걸 방해하고 있다. 국민적 단합의 도구로 쓰였던 아시아를 향한 경멸과 선민의식이 발목을 잡는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임을 강조할 때는 오직 유럽이나 미국과의 관계에서 삐걱거림을 느낄 때뿐이다. 일본은 지금도 아시아에서 탈출하기를 꿈꾸면서, 아쉬울 때만 아시아를 찾는 듯하다. - P268
언어학자들은 모리가 실용적인 이유에서 ‘일본어 폐지론‘을 들고 나왔다고 본다. 그의 평생 꿈은 하루빨리 일본이 서양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점이 많고 빈약한 언어인 일본어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차라리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로 교육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P270
일본이 서양 문명을 얼마나 열심히 흡수했는지는 입이 딱 벌어지는 정부 차원의 번역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 ‘번역의 홍수‘라고 할 정도로 정부가 나서서 수천 권을 번역했다. - P275
일본 정부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에 대한 정보 파악이 우선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근대화는 곧 서구화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넓은 의미에서 서구의 번역을 의미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번역한 서구 문물과 제도를 낡은 국내 체제의 개혁에 쏟아부었고, 짧은 시간 안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1895년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중국을 누르고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나섰다. 문화면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지위는 역전됐다. 중국 학생이 ‘아시아의 선진국 일본‘을 배우려 도쿄로 몰려들었다. 특히 청일전쟁의 충격으로 1898년 시작된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일본은 중국 지식인의 제도개혁과 교육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1905년과 1906년에 일본에 유학한 중국인 학생은 이미 8,000명을 넘어섰다. 일본 유학생을 통해 언어에서도 ‘역변‘ 현상이 뚜렷해졌다. 일본에서 새로 만들어진 단어가 번역어‘로써 중국어 어휘로 수용돼갔다. - P276
하지만 일본이 서구 번역에 임했던 자세 중 일부 요소가 요즘 ‘일본의 위기‘를 부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바로 필요한 알맹이만 쏙 빼먹겠다는 ‘선택적 수용‘의 문제다. 당시 일본의 근대화 구호인 ‘화혼양재‘에 함축적으로 드러나는 사고방식이다. (중략) 문제는 서양의 기술만 수용하겠다는 태도가 150년 이상 계속됐다는 점이다. 물론 일본은 나름 독자적인 발전을 통해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지금의 정체를 가져온 근본 원인의 하나가 된 것은 아닐까. 일종의 압축적 근대화의 후유증인 셈이다. - P278
원본이 없는 개량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개량 전략은 ‘후발주자의 이익‘, 즉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캐치업Catch-up‘의 대상이 없어지고, ‘팔로우십Followship‘이 아니라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위치에 서면 당황하고 갈 길을 잃기 쉽다. 일본이 1990년대 들어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추락한 데는 원본 창작에 대한 소홀과 고민 부족이 크게 작용했다. - P279
가리타니도 지적했듯이 "무엇이든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와 같은 뜻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일본은 외래문화 수용 과정에서 개량이 완료되면 원본을 철저히 따돌린 역사를 반복했다.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일본이 열려 있기보다 닫혀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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