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불행한 코뿔소인데 제멋대로인 펭귄이 한 마리씩 곁에 있어 줘서 내가 불행하다는 걸 겨우 잊고 사나 봐." - P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이 일본에 비해 많은 것이 뒤처졌던 시절에 일본은 "밉지만 배워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잃어버린 30년‘ 속에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제 그런 정서도 많이 옅어졌다. 특히 젊은 세대는 과거에 일본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를 의아해한다. - P282

선진국론은 서구 우월주의 시각에서 국가의 서열화를정당화하는 논리에 가깝다. 세계의 여러 나라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누고 끊임없이 줄을 세우려는 불온한 의도가 숨어 있다. 김종태는 <선진국의 탄생>에서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은 곧 후진국에 대한 우월감"을 뜻한다며, "선진국 담론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한 인식체계"라고 지적한다. - P283

그러나 과거에 앞서갔다는 사실이 문제를 앞서 해결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앞선 장에서 보았듯이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생겼던, 그리고 원래부터 일본 사회가 갖고 있던 수많은 모순과 과제를 적당히 봉합한 채로 지나쳤다. 효율과 속도를 지나치게 중시한 탓이리라.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산적한 문제를 미뤘다. 계속된 전쟁과 불황이라는 위기를 핑계로고 고도성장의 풍요로움도 초점을 흐렸다. 전근대적인 관행도 ‘일본의 전통‘ 이라며 옹호했다. 결국 인권 문제와 젠더 문제 등이 계속 곪다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다. - P284

일본은 "유쾌하지 않은 근대화의 매개자"였다. 우리는 일본이 번역한 서구를 다시 번역했다. 우리에게 서구화는 중역, 즉 이중번역 과정이었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일본의 시스템을 학습하고 모방했다. 해방 전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 ‘선택지가 없는 타의‘였다면, 해방 후에는 ‘선택지가 적은 자의‘  였다. 일본을 따라간 덕분에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었지만,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후유증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는 질곡이 되고 있다. - P2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날 독특한 일본의 영화시장 구조를 만든 주역은 ‘제작위원회‘다. 제작위원회 시스템은 영화사를 비롯해 방송사, 출판사, 광고회사 등 다양한 분야의 회사들이 단기 조합을 만들어 공동투자하고 공동제작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얼핏 보면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제작위원회 시스템은 일본에서 ‘창작 영화 기근의 원흉‘으로 지목된다. 실패 부담의 분산과 효율성을 너무 중시하다 보니, 원작 고정 팬이 있는 ‘안전한 영화‘만 만든다는 비판이다. 오리지널 작품이라는 모험을 회피하기 때문에 참신하고 다양한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 P244

2017년 기준 일본 국민의 1인당 평균 영화관람 횟수는 1.4회로, 미국 3.4 회와 프랑스 3.2회, 한국 4.3회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이 수치는 최근 10년 넘게 변화가 없다. 비판은 앞서 지적한 ‘지나친 팬덤 마케팅에 따른 다양성과 창의성의 실종‘과 ‘내수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갈라파고스화의 심화‘로 요약된다. - P245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확실히 예전만큼의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최근 작품 중에는 NHK 대하드라마 이외에 별다른 인상이 남는 작품이 없다. 일본 방송계 내부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모든 일본 문화 콘텐츠에 공통된 지적이기도 한 ‘지나치게 내수 위주‘라는 점, 다른 하나는 ‘고령층 위주여서 청년층의 외면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두 비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과거 방식을 되풀이하면서 현 상황에 안주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 P248

일본 시청자들이 기존 프로그램 포맷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점도 ‘모험‘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중장년 시청자를 위해서는 형사 · 의학 드라마를 배치하고, 젊은 시청자를 위해서는 아이돌 출신 배우를 기용해서 만화와 같은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방식을 반복하는 중이다. 특히 시청률 경쟁 때문에 쟈니스처럼 인기 아이돌을 많이 보유한 대형기획사가 캐스팅 주도권을 쥔 점도 드라마 완성도 저하로 이어지는 주요인이라는 지적이다. - P249

2020년 11월 일본의 ‘국민 아이돌‘ 아라시의 멤버 마쓰모토 준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 그는 미국 연예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K팝의 뿌리는 쟈니스" 라고 주장했다.
마쓰모토 준의 말에서는 자신감보다 K팝의 성공에 대한 위기의식이 느껴진다. - P251

‘서투름‘이 일본 아이돌 문화의 핵심이다. 완성된 ‘스타‘가 아닌 미완성의 ‘아이돌‘, 그래서 응원하고 싶은 대상이 일본 아이돌이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한 일본 사회학자는 일본 아이돌을 향한 특이한 정서의 뿌리를 고교야구 대회인 고시엔에서 찾기도 한다. 미숙하지만 온 힘을 다해 한계를 뛰어넘으려 애쓰는 10대의 모습에 응원을 보내고, 그들의 성취에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 P253

AKB48은 지나친 상술로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멤버의 서열을 공개적으로 결정하는 총선거가 집중포화를 받는다. 앨범마다 한 장의 투표권을 주는 방식인데, 자신이 응원하는 멤버가 상위권에 들도록 몰표를 주기 위해 수백 수천 장의 앨범을 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팬들의 응원하는 마음을 ‘머니게임‘으로 연결한 셈이다. - P253

‘지나‘라는 단어는 일본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서구에는 열등감, 아시아에는 우월감"이라는 상반된 인식이다. 서구 오리엔탈리즘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서양=문명=진보/동양=야만=후진‘의 이분법으로 구별하고, 자신을 문명의 세계로 슬쩍 넣는다. 또 이를 통해 일본의 아시아 지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검은 머리를 한 서양인‘으로 인식하는 일본인의 기묘한 정체성은 종종 분열을 일으켰다. 항상 서구 열등감에 시달리고 서양의 인정을 갈망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260

일본인이 당시 서구에 가졌던 열등감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됐다.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를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5대국의 태도>는 상징적이다. 당시 일본도 평화조약의 조항과 국제연맹 설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덕분에 ‘5대국‘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눈에 띄는 점은 일본을 다른 서구 열강보다 작게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에서조차 자기검열을 해버린 나머지 왜소하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모습은, 당시 서양 앞에서 한없이 위축된 일본인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 P261

또 일본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일본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리서에서 백인종에 관해"정신이 총명하며, 문명의 극도에 달할 만한 소성이 있다. 이를 인종 중 최고라 한다."고 극찬했지만, 흑인종은 "신체가 강건하여 일을 열심히 하지만, 본성이 게을러서 개화 진보의 맛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또 유럽을 아름다운 ‘문명‘의 본산으로 찬양했지만, 그 외 나라는 ‘무지, 혼돈의 세계‘로 서술했다. - P264

그(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은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 대오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하여, 지나나 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사정을 봐주지 말고 바로 서양인이 그들을 대하는방식으로 처리하면 그만"이라고 주장했다.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연대해 제국주의 열강에 대치하기는커녕 일본 자신이 열강과 함께 조선 · 중국을 침략 병합하여 식민지로 지배하겠다는 제국주의 선언이었다. - P267

일본은 근대화를 시작한 18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정체성 문제로 혼동을 겪고 있다. 근대화 이전 일본을 규정하는 우물 안의 벽은 중국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는 영국과 독일 같은 유럽국가가, 패전 이후에는 미국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핵심은 자신을 아시아로 인식할 것인가 아니면 서구로 인식할 것인가이다. 아시아를 여전히 후진성과 동의어로 여기고, 오랫동안 아시아의 서구로 지내왔기에 명확한 입장이 없다. 일본은 전적으로 아시아적이지는 않다고 강변하면서, 동시에 아시아의 대표라고 단언하는 등 우왕좌왕하고 있다.
뿌리 깊게 형성된 우월감이 온전한 아시아로 복귀하는 걸 방해하고 있다. 국민적 단합의 도구로 쓰였던 아시아를 향한 경멸과 선민의식이 발목을 잡는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임을 강조할 때는 오직 유럽이나 미국과의 관계에서 삐걱거림을 느낄 때뿐이다. 일본은 지금도 아시아에서 탈출하기를 꿈꾸면서, 아쉬울 때만 아시아를 찾는 듯하다. - P268

언어학자들은 모리가 실용적인 이유에서 ‘일본어 폐지론‘을 들고 나왔다고 본다. 그의 평생 꿈은 하루빨리 일본이 서양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점이 많고 빈약한 언어인 일본어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차라리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로 교육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P270

일본이 서양 문명을 얼마나 열심히 흡수했는지는 입이 딱 벌어지는 정부 차원의 번역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 ‘번역의 홍수‘라고 할 정도로 정부가 나서서 수천 권을 번역했다. - P275

일본 정부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에 대한 정보 파악이 우선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근대화는 곧 서구화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넓은 의미에서 서구의 번역을 의미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번역한 서구 문물과 제도를 낡은 국내 체제의 개혁에 쏟아부었고, 짧은 시간 안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1895년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중국을 누르고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나섰다. 문화면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지위는 역전됐다. 중국 학생이 ‘아시아의 선진국 일본‘을 배우려 도쿄로 몰려들었다. 특히 청일전쟁의 충격으로 1898년 시작된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일본은 중국 지식인의 제도개혁과 교육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1905년과 1906년에 일본에 유학한 중국인 학생은 이미 8,000명을 넘어섰다. 일본 유학생을 통해 언어에서도 ‘역변‘ 현상이 뚜렷해졌다. 일본에서 새로 만들어진 단어가 번역어‘로써 중국어 어휘로 수용돼갔다. - P276

하지만 일본이 서구 번역에 임했던 자세 중 일부 요소가 요즘 ‘일본의 위기‘를 부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바로 필요한 알맹이만 쏙 빼먹겠다는 ‘선택적 수용‘의 문제다. 당시 일본의 근대화 구호인 ‘화혼양재‘에 함축적으로 드러나는 사고방식이다. (중략) 문제는 서양의 기술만 수용하겠다는 태도가 150년 이상 계속됐다는 점이다. 물론 일본은 나름 독자적인 발전을 통해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지금의 정체를 가져온 근본 원인의 하나가 된 것은 아닐까. 일종의 압축적 근대화의 후유증인 셈이다. - P278

원본이 없는 개량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개량 전략은 ‘후발주자의 이익‘, 즉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캐치업Catch-up‘의 대상이 없어지고, ‘팔로우십Followship‘이 아니라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위치에 서면 당황하고 갈 길을 잃기 쉽다. 일본이 1990년대 들어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추락한 데는 원본 창작에 대한 소홀과 고민 부족이 크게 작용했다. - P279

가리타니도 지적했듯이 "무엇이든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와 같은 뜻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일본은 외래문화 수용 과정에서 개량이 완료되면 원본을 철저히 따돌린 역사를 반복했다.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일본이 열려 있기보다 닫혀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 P2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40년 체제론‘ 지지자들의 일본 경제체제 비판은 이와 같은 사례에 맞춰져 있다. 이른바 ‘생산자 우선주의‘와 ‘경쟁 부정‘이 일본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쟁 수행을 위한 생산력 증강을 모든 것에 우선했고, 국민 단결을 위해 경쟁보다 팀워크와 성과의 평등 배분이 중시돼 이 두 가지가 절대 원칙처럼 여겨졌던 것인데, 패전 이후에도 그대로 고착됐다고 지적한다. - P216

‘생산자 우선‘으로 생산자인 일본 기업의 국제경쟁력 향상에만 정책의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정작 공원과 같은 사회자본 정비에 대한 투자는 오히려 늦춰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서구 국가들보다 훨씬 적은 공공투자 때문에 국민은 낡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해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경쟁 부정‘은 유통업과 서비스업 등 생산성이 낮은 산업에 개혁의 메스를 들이대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들 산업의 자체 혁신이 늦춰지면서 세계 기준에서 도태되는데도 방치했다는 것이다. - P217

일본은 지금도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에서는 과거의 성공 방식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일사불란을 강조하는 일본 시스템은 다른 산업에 독으로 작용하고 있다. 수직적인 일 처리와 인간관계는 소통부족과 창의력 결핍으로 이어졌고, 사회와 기업의 활력과 성과를 모두 떨어뜨리고 있다. 경제체제와 쌍을 이루는 권위주의적 교육과 제도, 관행은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과거의 강점이 오늘날에는 개선해야 할 약점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진단은 한국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 P223

공동운명체를 강조하는 일본식 노사 관행은 장시간 근로의 만연과 과로사라는 달갑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회사 사회‘는 안정적인 고용을 제공하는 대가로 직원에게 무한에 가까운 헌신과 희생을 요구했다. "회사가 전부" 이고 "취미는 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바람직한 남성으로 여겨지고, 장시간 근로가 미덕이 되고 관행으로 정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 P230

유독 일본에서 블랙 기업 문제가 심각한 배경에는 일본적 고용 관행이 자리 잡고 있다. 즉 블랙 기업이 ‘회사와 나는 하나‘라는 일본의 ‘전통‘을 악용해 청년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례를 보면 일본 청년들이 블랙 기업에 충성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일본적 고용 관행에 대한 믿음이었다. 청년들은 과거처럼 기업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하면 기업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지만, 블랙 기업은 처음부터 짧게 뽑아 쓴 다음 버릴 계획이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변절‘한 기업과 과거처럼 ‘순진‘한 노동자의 헌신과 복종의 조합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 P234

회사주의는 ‘고도성장 시대의 일본‘ 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잠시 나타났다가 ‘평생직장‘ 이라는 환상만 남기고 사라진 신기루일지 모른다. 일본에도 우리에게도 그것은 지속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었다. 이면을 들춰보면 지금 시대에는 감내하기 어려운 단점과 부작용도 적지 않다. - P2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특히 우리가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는 일본 정치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중 기본인 "국민이 나라의 주인" 이라는 명제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국민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의 민주주의가 국민의 힘으로 일궈낸 게 아니라, ‘위로부터‘, ‘밖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 P137

메이지 헌법이 규정한 일본의 입헌군주제는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까웠다. 의회는 민의를 대표하는 입법기관이 아니라 ‘건의 기관‘ 또는 ‘협찬 기관‘에 불과했다. 서둘러 의회를 개설하고 헌법을 만든 가장 큰 목적은 서구에 일본이 근대국가임을 보여주고 서구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한다는 것이었다. 형식적인 기구였을 뿐 민의의 반영 같은 인식은 희박했다. 겉으로는 서구의 근대 정치체제를 갖췄지만 서구와 같은 시민혁명 과정이 없었기에 정치의식은 전근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나 중국은 더했지만 말이다.
이후 1910년대에서 1920년대에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민주주의 개혁 바람이 잠시 불었지만, 경제공황의 발생과 잇따른 군인의 쿠데타와 전쟁으로 ‘민주주의의 암흑기‘인 전체주의 시대로 들어갔다. 분명히 일본은 아시아에서 제일 앞서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지만, 국민의 민주주의 의식이 성숙해질 시간이나 계기가 없었다. 오히려 전시체제에서 민주주의는오랫동안 위협받고 위축돼 소멸 직전이었다.
- P138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후견‘ 덕분에 다른 나라보다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실제 일본은 1990년대 탈냉전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는 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앞선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딱 거기에 멈췄다는 점이다. - P139

세습 정치인은 비교적 손쉽게 권력을 이어받기 때문에 공정성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회통합을 해친다고 비판받는다.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는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일본 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대체로 찬반 의견이 거의 반반으로 나뉜다. 과거 봉건시대 신분제도의 잔재가 강한 탓일까? 유권자들이 세습에 관대한 것이다. 그중에는 장인정신을 들먹이며 대를 잇는 정치가 장점이 많다고 옹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봐도 세습의 만연은 득보다 실이 많다. 유능한 인재라도 진입장벽을 뚫기가 쉽지 않아서 정치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 P141

일본 정치부 기자들이 자국 정치인들을 비판할 때 종종 쓰는 표현이 ‘위로부터의 시선‘ 이다. 아직도 정치를 베푸는 걸로, 국민을 그저 ‘통치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국민의 수준을 가리키는 ‘민도民度‘나 ‘분수에 맞게‘ 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사적인 자리에서는 ‘백성‘이란 단어를 쓰는 정치인이 아직까지 있다니 말 다했다.
정치인이 쓰는 단어가 여실히 보여주듯이 일본의 민주주의는 더는 성숙해지지 못하고 정체를 거듭하고 있다. 최근에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분명히 제도는 민주주의인데, 실제 제도를 운용하는 모습은 여전히 먼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스스로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은 것이 아니라, 위에서‘, ‘밖에서 떠먹여 준 민주주의여서 그런 것일까. - P144

관료들은 ‘아마쿠다리‘, 즉 낙하산 인사로 관청에서 퇴직 후 민간회사의 간부로 들어가는 관행도 만들었다. 낙하산인사는 관료와 기업 간의 정보교환과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지만, 훗날을 대비한 봐주기식의 행정과 인맥 형성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컸다. - P151

일본 학자들은 쇼와 노스탤지어 현상의 배경에는 일본의 현재에 대한 강한 불안과 불만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진단한다. 노스탤지어는 ‘나쁜 현재‘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생겨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 P160

자숙경찰은 어떤 대상에 딱지를 붙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콕 찍어서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다. 코로나19 긴급사태에서는 외출이나 영업 등을 ‘자숙‘ 해달라는 정부 지침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는 명목일 뿐, 실제로 가해대상은 ‘괴롭혀도 별 탈이 없을 것 같은‘ 사회적 약자였다. 대형 점포는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은 것과 달리, 지침을 잘 지킨 작은 음식점과 주점이 표적이 됐다. 재일교포와 차이나타운이 공격 대상이 된 것도 ‘소수자 차별‘이라는 맥락이었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은 자숙경찰의 공격은 학교나 직장에서의 이지메(집단 따돌림)와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고 지적한다. 일종의 집단 내 편 가르기와 희생양 만들기 현상으로 본 것이다. - P172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 패전까지의 이른바 ‘15년 전쟁(1931~1945년)‘ 기간 동안 국가주의가 득세를 부리면서 일본인의 국민의식은 과잉으로 치달았다. 군국주의는 잦은 전쟁의 원인이자 결과물이었다. 반성을 통해 비대해진 국민의식을 ‘순화‘하고 정제 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 P178

극단적으로 흐르는 그들의 밑바탕에 깔린 정서는 ‘상실‘이다. 내면에 상실의 울분이 켜켜이 쌓여 있고, 보상받고 싶은 심리로 가득 차 있다. 현실에 좌절한 나머지 자기긍정의 계기를 아찔하게도 전쟁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문제는 정치권이 이런 분노를 약한 존재 또는 이웃 국가를 희생양 삼아 돌리려 한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손쉽고 편한, 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 P182

일본어로 안은 ‘우치‘, 밖은 ‘소토‘라고 한다. 귀속감은 ‘소토‘가 아닌 ‘우치‘에 속하려는 욕망이다. 그러나 ‘우치‘는 어디에도 없다. ‘우치‘에 귀속한 인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우치‘에 귀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만이 존재한다. 일본사회에서 ‘우치‘에 귀속되라는 유혹에 저항하기는 너무 어렵다. 또 끊임없이 소토‘에 적을 만들어 문제를 타개하려는 경향도 여전하다. - P1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