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에도 사람들은 전부 옷과 머리핀으로 자신이 제정신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어쩌면 다들 처음에는 고결한 사람이었는데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결코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몇 번이고 거듭해서-깨달으면서 괴물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 P206

쓰네노는 히로스케가 그냥 평범한 남자인 줄 알았지만 그가 기꺼이 남편을 자처하고 나서자 일종의 마법이 일어났다. 쓰네노는 집안의 수치이자 골칫거리로 사실상 버린 자식이었고, 호의를 누릴 자격도 없고 무능하고 믿을 만하지도 않고 게다가 외톨이였다. 근 1년 동안 고향에 편지를 보내봐야 마지못해 조금 도와주거나 은근히 모욕을 주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한 단어로 지위가 바뀌었다. 이제 다시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 P214

쓰네노는 평생을 살면서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기술을 배우지도 같은 언어를 쓰지도, 같은 옷을 입지도 않았고, 맞닥뜨리는 운명도 달랐다. 정토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도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어려웠다. 일부 법사들은 여자는 월경과 출산으로 흘리는 피로 땅을 더럽힌 이들에게 정해진 지옥에 빠질 운명이라고 가르쳤다.
(중략)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여자가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음을알게 되었다. 여자가 되는 것에는 수치와 자기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약이 따랐다. - P215

쓰네노의 붓은 일본 문자의 우아한 모양을 따라갔다. 그녀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언어를 구사했다. 숱하게 많은 일에 분노했지만 그녀의 분노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사람을 겨냥했다. 쓰네노는 방세를 낸다는 사실이 아니라 관리인인 진스케에게 분노했다.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오빠에게 화를 냈다.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에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었겠는가? 쓰네노는 다른 어떤 존재가 되는 법을 알지 못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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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펑성대의 사무라이에 대한 서술은 읽을 때마다 청나라 말기의 팔기군 자제들이 생각난다. 다른 부분이야 있겠지만 대략 비슷한 상황이었을 듯.

이 남자들 가운데 전투에서 총이나 활을 쏘거나 칼을 휘둘러 본 이는 하나도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태평 시대는 왕국에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사무라이들은 그 때문에 전쟁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빼앗겼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끼리 조상들이 용감하게 싸웠다고 이야기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족보가 있었고, 없으면 날조했다. 사무라이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전쟁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학교에서 무술을 연구했다. 하지만 왕국이나 자기 집안 다이묘를 지키라는 요청을 받으면 정말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냥 칼에 번쩍번쩍 광을 내고 겉모습을 유지했다. 그들은 돈과 상업이라는 더러운 세계와 거리를 두는 초연한 태도를 열망했다. 낯선 이들사이에서나 대중 앞에서 그들은 조금만 모욕을 받아도 바로 칼을 뽑을 듯한 기세를 보이려고 애썼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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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주한 사람들은 이웃들을 예의주시했다. 언제나 우물과 목욕탕, 이발소에 사람들이 모였다. 일하면서 골목 맞은편에 있는 이들과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남자들은 좁은 공간에서 허세와 욕설을 주고받았고, 혹사당하는 할머니들은 며느리 욕을 했으며, 젠체하는 늙은 남자들은 짜증 섞인 불만으로 모든 이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할 이야기가 있었다. (중략) 어느 누구도 비판에서 자유롭거나 어림짐작에서 예외가 되지 않았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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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로 가는 길에 나카센도를 따라 펼쳐진 마지막 풍경 가운데 커다란 팽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이파리 끝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나무 앞 표지판에 "연을 끊는 나무"라는 설명이 있었고, 옆에 있는 신사에는 작은 공양물과 소원을 적은 종이가 높이 쌓여 있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나무껍질을 한 조각 벗겨서 뜨거운 물에 담근 다음 이상한 낌새를 전혀 모르는 배우자에게 우러난 물을 먹인다. 그러면 마치 마법처럼 인연이 느슨해지고 단단하게 짜인 운명이 풀린다고 했다. 앞에 펼쳐진 길은 엉킨 게 풀린 명주실처럼 곧고 분명하게 쭉 뻗을 터였다. - P107

달구지꾼들은 거친 남자들로, 대개 쓰네노와 함께 길을 따라온 이들 같은 이주자였다. 그들은 달구지 주인집의 뒷방에 몰려 있다가 일이 생기기만 하면 바로 나가서 일당을 받았다. 쓰네노는 달구지꾼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테고, 다른 에도 사람들도 그들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종 못할 이들이었다. 임대인이나 지주가 아니고, 도제가 아니며, 심지어 세입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에나 있어서 거리에서 가마를 지고, 불을 끄고, 손수레를 끌고, 비계를 올렸다. 이주민들이 흔히 겪는 운명이었다. 에도에 속하지 않은 채 에도가 작동하게 만들었다. - P118

엘리트들에게 위험은 하나의 형태와 모양을 지녔다. 정확히 쓰네노 같은 모습이었다. 굶주리고 해진 옷차림이지만 마치 줄곧 여기에 오고 싶었다는 듯이 날카로운 눈매로 도시를 돌아보는 지친 이방인 말이다. 그 경고는 쓰네노의 에치고 억양처럼 쉽게 눈에 띄고, 화재 종소리처럼 분명하고 끈질기게 위기가 조성되고 있고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 P121

1787년 여름에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폭도들이 에도의 쌀 도매상과 소매점, 사케 양조장, 그 밖에 물품 부족과 높은 물가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표적으로 삼았다. 폭도들은 절구를 깨뜨리고, 가구를 부수고, 옷가지를 진흙 바닥에 짓밟고, 부엌 세간을 하수구에 던져버렸다. 쌀 양동이를 거리에 내동댕이쳐서 깨뜨렸다. 부주의한 행동 그 자체가 중요했다. 매점매석에 항의하는 것이지 훔치려는 게 아니었다. 낟알이 골목 곳곳에 쓸데없이 굴러다녔지만 셋집의 솥단지는 여전히 텅 비었다. 결국 며칠 동안 난장판이 벌어진 끝에 수백 곳의 상점이 박살 났다. 대부분 도매상과 사케 양조장이었지만 쌀 소매점도 몇십 곳이 피해를 보았다.
덴메이 폭동으로 알려진 1787년의 소요를 겪으면서 쇼군의 관리들은 이미 도시 장악력을 상실했음을 깨달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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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책자는 언제나 따분하고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대학』은 꼼꼼한 주해가 달린 우아한 문체의 한문으로 이렇게 말했다. "여자에게 맞는 유일한 자질은 온화한 순종과 정조, 자애, 침묵이다." - P41

쓰네노는 고대 중국에 가서 현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이나 이런 일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잘 자라서 자기 집안과 비슷한 집에 시집을 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여대학보고』의 첫 줄은 독자에게 어떤 희망도 품지 말라고 가르쳤다. "모름지기 여자는 자라서 다른 집으로 떠나는", 즉 시집가는 존재였다. 다른 어떤 가능성도 없었다. - P43

에도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도시의 번화한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방으로 몇 킬로미터씩 뻗은 상점가, 본 적도 없어서 사고 싶은지도 알 수 없는 물건들을 갖춘 바글바글한 노점상, 거대한 굴 같은 상인 저택, 그리고 사방에 자리를 잡고서 일을 해주고 수고비를 요구하는 수많은 미용사와 거리 청소부, 똥거름 수거인, 세탁부 등에 관해. 에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많은 살 것들이 있었지만 돈을 버는 방법은 훨씬 더 많았고, 때로는 노동과 여흥, 강탈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 P57

수도는 여자들에게도 의미심장한 곳이었다. 시골 마을에서 생을 보낸 여자들에게 "에도"는 다른 종류의 삶을 부르는 주문이었다. 에도 여자들의 옷차림과는 판이하게 다른 옷을 입었을지라도 "에도 스타일" 머리를 하는 시골 처녀들 사이에 에도는 유행과 세련미의 상징이었다. 겨울밤에 화로 앞에 둘러앉아서 여행 경험이 풍부한 손님들에게 에도에서는 새해를 어떻게 축하하는지를 물어보는 어머니와 딸들에게 도시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였다.
에도는 젊은 여자들에게 기회이면서도 불가능한 기준이었다. - P58

마을 남자들을 싫어하는 젊은 여자들, 아버지한테 매를 맞는 딸들, 보리밭이나 소, 논만 멍하니 바라보는 또 다른 날을 마주하기 힘든 지루한 여자들, 그림에서 본 옷을 입고 싶은 꿈 많은 십대들, 남편이 지겹거나 학대를 당하거나 그냥 남편 나이가 너무 많은 부인들, 첫날밤에 실망한 신부들에게 에도는 봉홧불처럼 밝게 빛나는 도시였다. 에도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모두가 농부가 아니고, 아무도 자기 가족을 알지 못하며, 사라졌다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나타나도 되는, 붐비는 익명의 도시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혼잣말을 되뇌어 보는 하나의 이야기였다. 시장 경제가 발흥하면서 농촌의 여자들은 상상 속에서 가로지를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로나 길을 나섰다. 뭔가 다른 일-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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